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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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야 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의 본질이라고 나는 쓴 바 있다.

2차 세계 대전의 한복판. 동남 아시아의 한 열도에서는 태평양 너머의 백인들을 위해 기발한 쇼를 기획 중이었다.

제군들! 전 아시아의 산업과 전 아시아의 미개한 인종들이 바로 우리의 지배 아래 비로소 개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머나먼 동쪽에서 적국의 함선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함대는 거대하고 무참합니다. 제군들! 신이 바다를 들어 적함을 깨부쉈던 역사를 기억하십니까! 이번엔 여러분들이 제로센 비행기를 타고 혈혈단신, 적군의 항공모함에 온 몸을 부딪힐 예정입니다. 제군들! 신의 바람을 불러 봅시다. 신민들이 대답한다.

*'텐노-헤-카반자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제군들! 전 유럽의 산업과 전 유럽의 우수한 인종을 더러운 유대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우리 아리아인들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 아리아인들은 그들을 수용소에 쳐넣고 짓밟고 으깨 부수고 그래도 남아 있는 이들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줄지어 세워 놓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가스실로 보낼 것입니다. 나는 우리 아리아인의 미래가, 아리아인의 운명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아리아인들이 대답한다.

'하일 히틀러'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일개 군인이었을 뿐이다.'

전범 재판소의 올가미에 목이 꿰인 수 많은 전범들이 약속한 듯이 이 하나의 비명만을 외친채 밧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모두가 미쳐 있는 세상에선 미쳐있는 것을 변명할 필요가 없다. 광기가 시들고, 승리의 몽상이 패배의 현실에 겁탈 당할 때 쯤에야 사람들은 허겁지겁 변명을 준비한다. 그리고 한다는 말이 겨우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어쩔 수 없었다'라는 것이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을 본질로 갖는 그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그건 변명일 뿐이다. 

'마더 나이트'의 주인공 '하워드 W. 캠벨 2세'는 좀 달랐다. 그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독일인 아내와 결혼했다. 독일에서 살았고 문학적 재능을 발휘해 나치의 연예 선전부에서 대활약을 했다. 수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고 포로들이 수용소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하워드 W. 캠벨 2세의 방송을 들으며 가스실로 끌려갔다. 그런데 이 남자에겐 비밀이 있었다. 공원에서 만난 프랭크 위르타넨 대령, 즉 미국 정보부 소속의 스파이에게 포섭 됐던 것이다.

하워드 W. 캠벨 2세는 스파이가 됐다. 방송에서 일부러 말실수를 하는 것으로 암호를 보냈다. 극작가이자 아마추어 배우이기도 했던 하워드에게 스파이 역할은 안성맞춤 이었다. 그로인해 전쟁이 끝난 뒤, 전범들이 차례로 죗값을 치르고 있을 때 하워드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무죄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하워드의 무죄를 입증해선 안됐다. 세계의 영웅 미국이 비열한 협잡꾼이 되선 곤란했기 때문에, 하워드는 아주 작은 보상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뉴욕의 허름한 다락방에 보금자리를 얻었다.  


 

 

<하켄 크로이츠(Hakenkreuz):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기> 

 


아우슈비츠를 만들었고 유대인 600만명을 가스실로 보낸 홀로코스트 주식회사의 CEO 아이히만을 만났을 때 하워드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유대인 육백만 명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이히만이 대답했다.

"천만에."

이 말을 듣고 하워드가 내리는 아이히만에 대한 평가, 나는 그 소설의 전문을 옮김으로 커트 보네거트의 진가를 드러내고 싶다. 그러나 내 글을 지루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욕망은 여기에 그 일부만을 적고 있다.

"나는 아이히만과 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아이히만은 병원으로 가야 할 사람이고 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만든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아이히만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이히만의 머릿속에서는 진실과 거짓, 희망과 절망, 미와 추, 친절과 잔인, 희극과 비극이 모두 뒤범벅되어 아무 구분 없이 처리된다.

내 경우는 다르다. 나는 거짓말을 할 때면 항상 그것이 거짓말임을 인식하고, 누군가가 내 거짓말을 믿을 때 그로부터 나올 잔인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으며, 잔인함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중략)

만일 내세에 또다른 생이 있다면, 그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를 용서하라.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 p219


제로센의 퍼스트 클래스에 앉아 텐노-헤-카반자이를 외친 사람들도 아우슈비츠의 시체 제단 위에서 하일 히틀러를 외친 사람들도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그들 자신도 몰랐다는 것이다.

구원을 미끼로 회개를 요구하는 신을 엿먹이는 방법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정신병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고로 교수형은 정신병자를 구원할 수 없다. 죽음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했던 하워드, 바로 그의 차지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하워드는 뉴욕의 허름한 다락방, 그 아래 살고 있는 유대인 의사를 찾아가 자신이 바로 하워드 W. 캠벨 2세임을, 나치의 연예 선전부에서 대활약했으며 현재 이스라엘 정보부에서 혈안이 되어 수색중인 바로 그 하워드 W. 캠벨 2세임을 자수했던 것이다. 하워드는 자신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쳐 있는 이스라엘에 송환되어 재판을 받기로 했다. 그는 죽음을 향해 제발로 찾아갔다.

그 뒤에 우리의 하워드가 어떻게 됐는지는 묻지 마시라. 나는 인생의 아이러니, 그 무참한 삶의 비애를 기술할 용기가 없기에 차마 뒷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운이 좋든 나쁘든 모든 사람은 언젠가 그 허망한 삶의 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산다는 건 마찬가지로 처연한 일이니까.
 

 

커트 보네거트는 평생을 전쟁과 싸우다 죽었다. 그는 전쟁을 혐오했고 조지 부시에게 머더 뻐킹을 먹였다. 누가 그랬더라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은 웃음이라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보네거트는 자신의 소설을 풍자와 블랙코미디로 가득채웠던 것이리라.

정신 나간 세상에서 살다 보면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도무지 믿어 주지 않는 경험을 종종하게 된다. 가슴을 쥐어짜며 분통을 터뜨려 봐도 나아지는건 없다. 그럴땐 그냥 광대가 되자. 언제나 웃으며 그러나 두 주먹은 꼭 쥔채.

이 무참한 현실 속에선 오직 유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텐노-헤-카반자이: 천황 폐하 만세
*본문에서 Bold 처리한 부분은 전부 원문을 인용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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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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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4년, 후금의 태종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으로 바꿨다. 조선에 군신지국의 예를 요구했다. 대의의 나라 조선, 기개가 높았으나 말이 더 높아 창검이 아닌 혀로 싸우는 나라. 조선의 임금이 8도에 임전태세를 명해 결전을 다짐하자 후금의 태종은 몸소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한다.  

북방의 칼바람에 단련된 철병에겐 조선의 겨울이 낯을 간지르는 미풍에 불과했었나 보다. 압록강을 넘은지 12일째, 서울이 점령 당했다. 임금은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그 길 또한 막혀 있었다. 사대부와 약간의 관군, 도처에서 모여든 향병을 이끌고 인조는 남한산성에 둥지를 튼다. 개전 14일째,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화친을 거부했다. 임금의 성은은 높았고 야만국의 황제는 비천했다. 각도에 격서를(激書) 보내 분전을 촉구하면 지방 관리들이 관군을 끌어 모아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고 백성들은 
농기구 대신 창검을 들어 임금의 성은에 보답할 것이었다. 

싸움의 길은 생(生)의 길과 포개어져 있고 생의 길은 창검으로 으깨지는 병사들의 시체 위에 있었다. 사직은 백성의 피로 흥건한 그 길을 따라 영원히 계속되야 
할 터였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김상헌이 거부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의란 삶 앞에서 무력한 것. 명나라는 운이 다했다. 옹색한 산성에 엉덩이를 비비고 눌러 앉으면 적들은 더욱 조이고 들어와 기어이 사직을 말려 죽일 터였다. 
싸움의 길은 사(死)의 길과 다름 아니고, 사의 길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다. 사직은 그 치욕을 견디고 일어나 끝까지 삶을 이어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치욕과 맞바꾼 땅 위에선 백성들의 생명이 다시 시작될 것이고 무너진 성벽이 새롭게 세워질 것이며 마침내 임금의 성은이 예전처럼 온 나라에 흘러 넘칠 것이었다. 


영의정 김류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싸움의 형식 안에 패배의 내용을 채워 나갔다.' 병사들의 추위를 막기 위해 보급된 광주리를 빼앗아 수성에 필요없는 말을 먹였다. 주린 말들은 그 광주리를 풀어 끓인 
여물을 먹고 죽었다. 죽은 말의 각을 떠 병사들을 먹였다. 목숨을 보전한 병사들이 성첩 위의 칼바람을 맞고 주린 말의 뒤를 따라갔다. 말이 병사를 물고 병사가 말을 씹고, 죽은 말의 영혼이 죽은 병사의 넋을 태우고 달렸다. 

김류의 말은 높디 높은 조선의 말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김류의 말은, 살자는 건지, 죽자는 건지, 성문을 열자는 건지 아니면 닫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출처: Flickr.com, Patrick Houlihan>

 

김상헌과 최명길과 김류의 말은 서로를 밟고 타넘으며 말의 장벽을 세웠다. 편전 위의 보료에서 왕의 시야는 말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장벽 너머에 얼마나 많은 적이 웅크리고 있는지 격서를 받은 장군들이 군사를 이끌고 올라오는지, 삶의 길이 싸움의 길에 있는지 아니면 지키는 길에 있는지, 사는 것이 죽는것과 정녕 다른지, 실상은 그 둘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 어떤 것인지 왕은 알지 못했다. 

눈먼 왕과 충성스런 사대부들이 말로 쌓은 제단 위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동안
, 곡기 없는 뱃가죽은 헛구역질로 터졌고 칼날 같은 겨울 바람이 터진 뱃가죽을 찢었다. 조정이 피난 오기 전, 대장간의 풀무질이 쇠를 달구고 장돌뱅이가 닷새 장을 가득 채우고 동네 개들이 낯선 이들을 향해 짖던 마을,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그 생명의 숨결이 나랏님이 오신 뒤로 잦아 들고 있었다.

왕은 나라의 뜻을 행하고 나라는 백성의 뜻을 받는 것인데, 백성이 없는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니었다. 1637년 음력 1월 30일, 왕은 성문을 열고 황금빛 일산 아래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술 석 잔을 내렸다. 왕은 술 한 잔에 세 번씩, 아홉 번 절을 올렸다.
 

 

 

김훈의 글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죽이는 소설가를 많이 봐왔지만 적어도 이 땅에서 최고의 인간 백정을 꼽으라면 그건 김훈이 되지 않을까. 나는 황석영의 담담함을 좋아하고 박완서의 소소함도 사랑하지만 순수하게 문장만으로 정신을 잃게 되는 경우는 김훈의 소설을 읽을 때 밖에 없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런게 소설인가, 이렇게 써야 소설가가 되는가'하는 생각에 이제 막 잎을 낸 글쟁이의 꿈이 시들고 아득히 멀어보이는 그 길의 처연함에 다리의 힘이 풀리고 만다. 


남한 산성은 칼의 노래, 현의 노래에 이은 역사 소설이다. 생각해 보니 그는 역사 소설만 쓰는 것 같다. 김훈이 기자 출신이기 때문일까? 집요하게 사실을 수집하고 진위를 날카롭게 가려낸 뒤 솜씨 좋게 재단했던, 몸에 깊게 배인 옛 업의 습관은 그를 역사와 소설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을 지도 모른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만을 하고 살 때 가장 밝게 빛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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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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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은 아멜리 노통의 작품 중 최고다. 나는 '제비 일기' 따위, 그녀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는 문제작까지 읽은 바이므로 이 말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노통의 소설엔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과 순수한 허구로 이루어진 것이 있다. 둘 사이에는 안타까울 정도로 심한 차이가 있는데 주로 전자는 뛰어난 작품이고 후자는 짬뽕 국물을 뒤집어 쓴 페르시아 고양이처럼 흉물스런 이야기 들이다. 

그리고 전자에 속하는 작품들 중에서도 바로 이 소설,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이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광채로 노통의 필모그래피를 반짝 반짝 빛내고 있다라고 하는 얘기는 이젠 너무 
구차한데다가 상투적이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으며 더 이상 문장을 늘였다간 나로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되버릴까봐 찬양은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소설의 원제는 '튜브의 형이상학'이다. 노통의 특기, 과장의 미학이 엿보인다. 내용 또한 자신을 신이라 믿는 어린애의 얘기다. 

이 아기는 확실히 다른 아기와는 다르다. 우선 울지 않는다. 울음은 아기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그만한 나이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소통이다. 울음의 부재는 곧 관계의 부재고 관계의 부재는 곧 존재의 부재다. 아기는 고심끝에 결론을 내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나는 신이로구나.


지고의 숭배 대상이자 유일한 신인 아기가 하는 일은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는 일이다. 먹기만 하면 싸는걸 보니 입에서 똥구멍까지 수직의 튜브로 연결되어 있는게 분명하다. 아기는 고심끝에 신의 본질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신은 튜브다.

두 살이 넘어갈 즈음, 분노한 아버지가 독생자를 내려 주듯 아기는 힘차게 울며 자신을 낳은 인간들과 소통을 시작한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멜리 노통.

여차저차 인간 세계에 발을 담갔지만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이 지나친 나머지 곧바로 말을 하지는 않기로 결심한다. 머리 속에는 이미 모든 단어가 들어 있었지만 갓 두살이 넘은 아이가 유창하게 불어를 - 노통은 벨기에 사람이고 벨기에 사람은 불어를 쓴다 - 구사하면 부모의 마음에 근심이 서린다. 그래서 밤낮 울기만 했다. 2년 동안 철저히 침묵을 고수한 아이가 입을 열자마자 울음만 쏟아내니 오히려 부모들의 마음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정녕 신의 뜻을 헤아릴줄 모르는구나.

신은 분노했다.

그러나 분노한 신의 입으로 친할머니가 공수해온 벨기에산 화이트 초콜릿이 들어가자 뚝! 울음을 그쳤다. 그리곤 아직 모든 사람을 용서할 마음은 없었지만 할머니와 초콜렛에게만큼은 사랑을 약속했다. 신이 내린 첫 번째 구원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인간에게 신의 언어를 허락했다. 생각만큼 발음이 잘 된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엄마, 아빠를 말 할 수 있었다. 노통은 자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러나 오빠 만은 예외였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저분하고 교활하고 난폭한 작은 인간. 노통은 오빠를 저주하는 의미에서 결코 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보모 니쇼상과의 관계는 노통의 신놀음에 불을 붙였다. 니쇼상은 일본인 답게 고용주에 대한 복종을 철저히 실천했다. 그녀는 어린 신을 숭배하는 유일한 신도였으며 니쇼상의 헌신적인 순종으로 이 작은 신은 유일자로서의 자각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곳에 있다. 모든 이의 숭배를 받으며, 왼손에는 꺼지지 않는 생명을 오른손에는 불멸의 영혼을 들고, 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친할머니가 죽었다.

두 살 짜리 아기의 머리 속엔 삶만이 유일한 세상이다. 죽음이라는거,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전광석화, 죽음이 깨어나면서 뿌리는 일말의 불안감이 노통의 마음 속에 단단히 웅크리고 있던 '불멸의 믿음'을 끌어내렸다. 존재의 '영원함'은 죽음의 포로가 되었다. '영원함'은 거짓말로 판명되었고 거짓말쟁이 존재는 연약한 속살을 드러낸채 삶 속으로 나아갔다.  

 

 

 <출처: Flickr, Julius Koivistoinen>

 

죽음이란게 있다면, 결국 존재가 그리로 나아가도록 지어진 거라면, 그렇다면 삶의 족적이란, 살아가려는 모든 노력이란 결국 '에둘러 돌아가는 길'에 지나지 않은가. 죽음은 존재의 필연. 나는 내 존재를 구차하게 연명함으로써 죽음에 저항하지 않겠다. 

그리하여 어린 신은 어느 8월말 오후, 집 앞 마당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진다. 고의였는지 발을 헛디뎠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못 위로, 뒤통수에서 터져나온 새빨간 피를 흘리면서도 노통은 삶을 구걸하지 않았다. 눈 앞에는 카시마상이 서 있었다. 또 다른 보모이자 신의 적대자였던 카시마상. 그녀는 죽음에 임박한 신을 오로지 침묵으로 마주하며 그 자살에 소리없는 축복을 전하고 있었다. 

니쇼상이 소리를 치며 달려왔다. 노통을 꺼내들고 물기를 닦으며 도와 달라고 소리친다. 눈 앞까지 다가왔던 죽음이 스믈스믈 삶으로 흡수되더니 어느덧 자취를 감춰 버린다. 

 

 

<출처: Flickr.com, Cape Cod Cyclist> 

 

신과 세상, 실존과 불안의 의미를 어린 아이의 심리 속에서 풀어내는 아멜리 노통의 글솜씨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감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감탄을 했다는 말로 감상을 적는다면 노통에게 대단한 실례를 범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나에겐 이 소설을 평할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랴 애꿎은 단어로 불필요한 찌꺼기를 남기느니, 오늘은 이대로 마치는 수 밖에... 아무쪼록, 이해해 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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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 상 밀리언셀러 클럽 42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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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유명하다고 해서 처음으로 책을 사봤다. 필사를 할 생각 이었다. 나에게 글쓰기와 생계의 길은 다르지 않아, 하나로 포개져 있으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의 책을 베껴 문장의 힘을 키우고 나아가 생활의 방편을 마련해 볼까 해서였다.

서문을 읽었다. 기가 막히더라.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읽던 책을 관두고 이것부터 집어 들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꾹 참았다. 맛있는 음식은 제일 나중에 먹어야 희열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을 읽고는 실망했다.  

스티븐 킹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 - 상'은 489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다.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일까? 단편집 치고는 다소 묵직한 감이 있다. 그러나 책의 재미는 두께에 반비례한다는 명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 떠올리고 이 책으로 증명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을 읽어도 남은 페이지 수가 줄지 않아 자주 뒤 쪽을 들쑤셨다. 왜 이야기가 끝나지 않지? 책을 읽는 동안 솟아오르는 질문과 싸우느라 문장을 파헤치고 재미를 분석할 여력이 없었다. 장바구니에서 '하'권을 삭제했다.

이 책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안개'처럼 200 페이지가 넘는 대작도 있고 '카인의 부활', '호랑이가 있다'처럼 아주 짧은 소품도 있다. 특이하게는 '편집증에 관한 노래'같은 긴 시도 있지만 사실 다 고만고만한 중편들이다.

우선 '안개'에 대해 말하자면, 작품이 너무 길다. 특히 도입부는 대하 역사 소설을 뺨칠 정도로 길다. 정체 불명의 안개가 마을을 뒤덮어 사람들을 잡아 먹는다는 내용인데 이 안개가 아주 기어온다. 마을을 뒤덮기 까지 수십 시간이 걸리는 듯 하다. 당연히 안개가 조장하는 불길한 서스펜스가 아주 천천히 전해진다. 주인공 일행이 대형 마트에 고립되고 난 뒤부터는 다행히 긴장이 돌아오지만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이 또 엉성하다.   

 

<B급 영화로 만들기 딱 좋은 스티븐 킹의 소설들> 

 

'토드 부인의 지름길'이나 '뗏목'같은 경우는 소재에 있어서는 참신한 맛이 있지만 긴장과 서스펜스, 염통이 쫄깃해지는 박력과는 거리가 멀다.

'원숭이'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법한 진부한 소재를 택하고 있고 '카인의 부활'도 컬럼바인이나 버지아텍 총기 난사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오늘날에는 쇼킹한 맛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나머지 소설도 마찬가지, 느슨한 플롯의 연속으로 지루함이 범람하고 졸음이 몰아친다. 

머리 끝까지 빨려 들 것 같은 정체불명의 흡입력. 독자의 판단을 마비시키는 강력한 환각제. 킹의 소설에선 이런걸 기대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나 M.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센스'같은 치밀함이 이 소설엔 없었다.

킹의 창작론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어 보니 그 해답이 나온다. 이 소설가는 플롯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상황에서 출발하는데 특정한 상황 속에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몰아 넣고 스스로 행동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받아 적는 것이 쓰기의 전부라고 한다. 스티븐 킹은 애초에 완벽한 사기를 설계해 놓고 독자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는 구라꾼이 아니라 입심 좋은  허풍쟁이였던 것이다.  


 <출처: Flickr.com, geoftheref>
 

소설에 대한 판단은 직접 읽어보고 내려야할 일이지만 꼭 집어 추천하자면 글쎄, 그럴만한 작품은 없다. 혹자는 일 방문자 8명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남자가 3억부의 사나이를 평가하는 것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이 그런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냉철한 논리라도 아무리 높은 이름값이라도 '어쩔 수 없는 건'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중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지구 위에 어쩔 수 없어 하는 또다른 인간들이 3억권이 넘는 소설을 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웬지모를 안심이 된다. 나 같은 사람만 있었다면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훌륭한 소설가 한 명이 어두운 다락방 위에서 쥐와 거미를 위해 글을 써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혹평만 쏟아냈으니 다른 얘기를 몇 개 더 해야겠다. 킹은 성공한 소설가지만 에세이를 썼더라도 크게 성공했을 사람이다. '유혹하는 글쓰기'나 그의 서문을 읽어 보면 이 사람이 글쓰기에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알 수 있다.

킹은 기본적으로 센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유머 감각도 풍부할 거고 아마 말도 엄청 잘할 거다. 그건 대화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소설가는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독특한 소재와 그로테스크한 상황이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온다.

그런데 이 소재와 상황들은 명왕성의 당근이나 마그마 속의 우동처럼 인위적인 독특함이 아니다. 그의 공포는 우리 삶의 아주 익숙한 것으로부터 나온다. 낡은 인형, 매일 아침 보는 안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 날락하는 화장실. 그것들이 순간 낯선 것으로 변하며 그 안에서 공포가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 이 사람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덧 나의 집이 그리고 나의 장난감이 스믈스믈 본모습을 드러내며 그 섬뜩한 입김을 무방비의 살갗위로 뿜어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대중 소설의 시비는 판매 부수가 내려주는 것이다. 대중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문학성과 주제와 플롯에 앞서 '대중을 거스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스티븐 킹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소설은 길이 길이 인세를 벌어 들여 출판사와 후손들과 어딘가에서 꿈을 키우고 있을 어린 소설가를 살 찌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남자,

역시 만만히 볼 사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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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스티븐 킹은 3억 부 이상의 책을 팔았다. 빗자루를 타고 나타나 코끼리가 건초를 먹어 치우듯 팔아치운 '해리포터'만 없었다면 스티븐 킹은 말 그대로 '킹'이 됐을 거다. 비록 일등의 자리는 호그와트의 마법사 도련님에게 빼앗겼지만 공포, 스릴러 분야에선 역시 이 남자가 '킹'이다. 피와 시체가 꽃처럼 장식되고 으깨진 두개골이 카펫으로 깔리는 세상에선 이 남자가 먹어준다는 말이다.  

킹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어린 시절 부터였다. 재밌게 본 만화책을 베껴 최초의 소설을 썼다. 엄마가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전말을 알게 되자 다음 부터는 창작 소설을 쓰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킹은 그 후로 꼬박 꼬박 자기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글을 읽었고, 환호했고, 지갑에서 푼돈을 꺼내 킹에게 주었다. 칭찬이 킹을 춤추게 했다.   

 

 

미국의 하류층으로 태어나 홀 어머니 밑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킹은 영리했다. 주립대 영문과에 입학했고 그 곳에서 아내를 만난다. 공부도 했겠지만 건진건 사랑이었다. -  글을 쓰는 사람에게 둘 중에 뭐가 나은지는 나중에 가 봐야 안다. - 졸업하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가졌고 세탁소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썩은 식탁보와 음식물 쓰레기, 피와 병균이 우글거리는 병원 빨래와 싸웠다. 기진맥진한 몸을 임대용 트레일러 위에 뉘였고 그 안 구석, 작은 세탁실에 쭈구려 앉아 소설을 썼다. 삶의 무게가 감당키 힘들어 교직을 구했다. 

형편은 조금 나아졌지만 시간은 반대였다. 수업을 하고 시험을 보고 집으로 시험지를 들고와 빨간펜으로 이리 저리 채점을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소설을 쓴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날 땐 TV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서랍 속에는 쓰다 만 원고가 너댓개 있었으나 완성은 무지개 너머 머나먼 정글이다.

글쓰기는 시간이다. 멋진 글을 쓰고 싶으면 일단 엉덩이를 붙이는 방법부터 익혀야 한다. 3억부의 사나이 킹도 그걸 깨달았다. 그는 정해놓은 시간에 적합한 장소에 앉아 - 그게 변기 위가 됐든 한적한 커피숍이 됐든 - 정해진 분량을 쓰고야 마는 인내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야 편집자가 보내오는 '거절 편지'에 친필 메모가 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꿈 꾸는 자가 태어나면 다른 곳에는 비웃는 자가 태어난다. 이것 저것 지어낸 이야기를 신이나 떠들고 있으면 '참 기발한 생각이네'라고 적당히 대꾸한 뒤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어렵게 꺼낸 말 속에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면 '열심히 해보라'는 말과 함께 '언제 철들래'하는 표정이 기습을 한다.

주변 사람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꼬깃 꼬깃 접어온 종이에 개발새발 그려 놓은 글을 보고 있으면 그 곳에 정말 길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읽기와 쓰기는 정말 더디게 성장한다. 싹이 돋는걸 봐서는 도무지 언제 꽃이 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글쟁이에게는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킹의 아내 태비처럼, 구겨 버린 초고 속에서도 글을 이어갈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말이다.   

"나는 폰드 스트리트의 셋집 현관이나 허먼의 클래트 로드에 있던 임대용 트레일러의 세탁실에서 소설을 썼는데, 만약 아내가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면 나는 용기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비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놓고 당연시할 수 있는 요소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에 그녀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격려해 주었다. (중략)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굳이 믿는다고 떠들지 않아도 좋다. 대개는 그냥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p89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소설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시 받는 사람이다. 믿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꿈은 이어진다.

킹은 이 밖에도 단어를 연마하고, 초고에서 10%를 삭제하고, 대화문을 생생하게 쓰고, 부사를 쓰지 말고, 창작 잡지를 구독하고, 저작권 대리인을 알아보고, 출판 시장을 조사하여 자신에게 어울리는 출판사에 투고할 것을 충고하지만 중요한 얘기는 이미 앞에서 다했다.

사람들은 쓰기 전에 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유명 소설가의 작법서는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된다. 나도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글을 쓰기 전이었고 한 번은 쓰기 시작한 뒤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런 책은 쓰기 전에 읽는게 아니다. 쓰고 난 뒤에 읽어야 한다. 행동이 나가지 않으면 생각은 구름 위에 노닐뿐 종이 위로 내려와 글이 되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면 머리는 필사적으로 따라온다. 이 책을 두 번째 읽으면서 나는 그걸 깨달았다. 

  
 
   
<출처: Flickr.com, joshjanssen> 
 
 
글을 쓴다는 건 외로운 일이다. 나는 안다. 나와 당신이 유명한 소설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꿈을 향해 전력을 다하고 싶어도 우리의 인생은 좀처럼 여유를 내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내가 특별히 뭔가를 잘못했거나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굳은 결심을 하고 달려드는 사람일 수록 고통과 좌절, 멸시와 비난의 철벽에 겹겹이 둘러 쌓여 고통을 당한다. 그리고 기어이 그 꿈을 포기하게 만든다.

1973년 스티븐 킹은 연봉 6,400달러의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다. 그 해 장편 '캐리'를 2,500달러의 선인세로 계약했다. 몇달 뒤 '캐리'의 보급판 판권이 40만 달러에 팔리자 킹은 할 말을 잃었고 태비는 낡아빠진 트레일러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캐리의 성공엔 분명 운이 따랐다. 그러나 그 운은 캐리 이전에 소멸한 수 많은 원고를 밟고 왔다. 그걸 모른다면, 우리는 작가가 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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