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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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이야기에 꿀이 빠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야기에는 돈이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가 있어야 부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10억? 20억? 대기업 회장들에게는 스마트폰 인터넷 뱅킹으로 송금할 수 있는 최저 금액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임금 노동자들에게 '억'은 결코 만만한 액수가 아니다. 그렇다고 20억을 가진 사람을 부자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럼 8,700만 달러는 어떤가? 이만하면 부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시골의사는 부자의 기준을 '더 이상 부를 늘려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설의 주인공 엘리엇 로즈워터는 분명 부자다. 8,700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로즈워터 재단의 이사장.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하루에 10,000 달러가 생기지만 의용 소방대원으로 일하며 알콜 중독자, 매춘부, 10대 미혼모 등을 보살피는 로즈워터군의 천사. 이 남자라면 시골의사가 말한 부자의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을 것이다.

만약 이런 부자들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회라면 앨리엇 로즈워터는 결코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지구는 탐욕이 휘몰아치는 욕망의 바다 그 한 복판에 떠 있는 작은 배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하여 커트 보네거트는 이런 소설을 쓰게 됐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여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의 문제'를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로즈워터가의 재산 8,700만 달러는 앨리엇의 증조부인 노어 로즈워터가 남북 전쟁의 혼란기와 전후 미합중국의 허점을 간파하여 축적한 부의 결과물이다. 이 돈은 앨리엇의 아버지인 리스터 에임스 로즈워터에 이르러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는 '도덕'을 가르치는 재단을 만들어 이 돈을 모두 귀속시켰다.

재단의 이사장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후손이 대대로 맡는다는 강령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아들인 앨리엇 로즈워터가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알콜 중독자에 정신병자가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신 분열의 이유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대략 2차 세계 대전 참전 당시 무고한 소방대원을 죽인 트라우마가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창문으로 수류탄을 던지고 건물에 침투해 들어가 막고 차고 찌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소방 마스크를 쓴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한 명은 아직 어린애였다. 죽음이 삶보다 관대한 전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인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앨리엇의 영혼은 이 일로 송두리째 파괴 되었다. 신경 쇠약에 걸린 앨릴엇은 곧바로 제대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출처: Flickr.com, dunechaser>

 

전장에서 돌아온 앨리엇이 처음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건 아니다. 우선 술을 먹기 시작했다. 많이 마셨다. 그러더니 헛소리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파티 장소에서 더 심했다. 손에 든걸 목격당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싸구려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의 작품들에 심취했고 모두의 앞에서 그것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출을 시도했다. 미국 전역의 의용 소방대를 전전하며 미친 소방대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고향, 인디애나 주 로즈워터로 돌아왔다. 로즈워터 의용 소방대에 최고급 소방차를 기증한 앨리엇은 드디어 정식으로 소방대원이 되었다.

소방서에 두 대의 전화를 놓았는데 한 대는 화재 신고를 받는 전화였고 한 대는 '무엇이든 도와주는 로즈워터 재단'의 상담 전화였다. 이 전화로 의부의 아이를 임신한 열 다섯살 짜리 소녀와 매춘부와 노숙자들을 상담했고 그들에게 상당한 돈을 보내줬으며 로즈워터 군의 신생아들에게는 전부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IBM)의 주식을 한 주 씩 선물했다.

앨리엇 로즈워터가 기행을 일삼고 이혼 소송을 진행하며 동시에 정신과 치료를 받는 동안 로즈워터 재단의 기금 운용 변호사 무샤리는 로즈워터 재단의 서류 더미 속에서, 심각한 정신 질환이 있는 경우 이사장직에서 해임할 수 있다는 재단 규정을 찾아냈다. 인간이 돈 냄새를 맡았다.

무샤리는 앨리엇 로즈워터를 대신할 상속자를 찾아냈고 그를 앞세워 소송을 걸었다. 상원의원은(앨리엇의 아버지) 아들의 정신을 되찾고 나아가 재단의 돈을 지킬 태스크 포스 팀을 꾸렸다. 앨리엇은 뉴욕으로 송환됐다.

그가 다시는 로즈워터군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앨리엇을 전송했다. 앨리엇이 떠난지 얼마 후 로즈워터 군의 매춘부와 미혼모들은 자기 아이의 아버지가 사실은 앨리엇 로즈워터였음을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앨리엇이 돌봐준 사람들이었다. 그 속에는 의부의 아이를 임신한 열 다섯살짜리 소녀도 끼어 있었다. 

 

 

 

이 소설에서 미친것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앨리엇 로즈워터와 그의 아내 실비아 뿐이다. 그러나 지극히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미친 사람으로 묘사하는 소설의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커트 보네거트는 로즈워터 부부의 정신병적 선행과 지극히 똑똑한 사람들이 펼치는 탐욕의 세계를 대비시킴으로써 돈에 미쳐 인간의 본성을 잃어 버린 세상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제 5 도살장'으로 대변되는 커트 보네거트의 후기작들에 비해 이 책은 가볍고 단순하다. 문득 문득 Jesus Christ를 연상케하는 앨리엇 로즈워터의 기행들은 그 이면에 난해한 상징이 숨어 있다기 보단, 등장 인물의 희화화를 통해 조롱의 강도를 증폭시키려는 의도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난해한 상징 따위 없어도 소설은 충분히 훌륭하다. 이 점은 소설의 끝부분, 테니스 라켓을 머리 위로 치켜든 앨리엇 로즈워터가 우리 모두를 향해 '생육하고 번식하라'고 외치는 장면에 이르러 분명하게 이해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294페이지의 양장본 소설을 읽느라 소비된 당신의 노고는 멈추지 않는 웃음과 함께,

모두 보상 받을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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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커빌가의 개 열린책들 세계문학 102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조영학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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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은 셜록 홈즈다. 아서 코난 도일의 만들어낸 이후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이 그렇게 믿었고 그 자손들이 믿음을 이어 나갔다. 시간이 흐르자 믿음은 전설이 됐다. 셜록 홈즈를 번역한 나라가 이 전설에 동참했다. 번역한 나라의 자손들이 그 말을 이어나갔다. 번역의 불길은 황무지와 살인, 런던과 대저택, 스릴러와 추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극동 아시아의 남조선에까지 번져 급기야 열린책들 '세계 문학'의 102번째 시리즈로 '바스커빌가의 개'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B호에 작은 사무실을 갖고 있던 셜록 홈즈는 이렇게 전세계적인 탐정 신화를 완성해 냈다.  

 

 

 

고전의 아우라는 언제나 후세들의 가치관에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 사람이 누구든 고전을 파괴하려는 자는 사회적 교수형에 처해 주류 세계에서 밀려난다. 앞 세대의 눈부신 광채는 눈먼 후손을 낳고 눈먼 후손은 고전을 영원히 눈부시게 만든다.

그래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일리아드, 오디세이' 서사의 촌스러움을, '로미오와 줄리엣'의 진부한 신파를, '셜록 홈즈'의 농밀하지 못한 트릭을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광신도들의 무자비한 돌팔매를 피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전의 가치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깊은 통찰력을 통해서만 발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스커빌가의 개'는 가장 유명한 소설이다. 그 유명한 셜록 홈즈 시리즈 중에서도 말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셜록 홈즈의 부활'때문 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은 1893년에 출간한 '셜록 홈즈의 회상록', 그 최종장인 '마지막 사건'에서 셜록 홈즈를 폭포 밑으로 떨어뜨려 죽인다. 그것은 셜록 홈즈 시리즈의 종지부를 알리는 대사건이었는데, 아서 코난 도일 자신이 추리 소설이라는 대중적 장르를 떠나 문학가로서의 길에 정진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작가에게도 세상일이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미지의 것이었나 보다. 정치에 대한 꿈은 낙선의 현실로 이어졌고,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의 부활'만큼 독자를 열광시키는 소재는 없을 거라며 출판사에 흥정의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는, 은근히 다른 출판사를 언급하며 100파운드 정도면 셜록 홈즈가 무덤에서 뛰쳐나올 의사가 있다는 내용을 적어 넣었다.  

 

 

 

'바스커빌가의 개'는 바스커빌가의 전설로 부터 시작된다. 데번셔의 황무지에 자리잡고 있는 바스커빌가의 대저택에는 대저택을 갖고 있는 부잣집 도련님이 으레 그렇듯 망나니 아들이 하나 살고 있었다. 이 망나니는 망나니 답게 여색을 즐겼는데 하루는 친구들과 잔뜩 술에 취해 옆 마을의 미녀를 납치해왔다. 그러나 미녀는 잡혀온 미녀들이 으레 그렇듯 머리가 빈 공주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망나니 도련님이 술독에 빠져있는 동안 담쟁이 덩쿨을 타고 탈출에 성공했다. 흥분과 욕망으로 축축해진 입김을 내뿜으며 망나니가 문을 열었을 때 방은 이미 텅비어 있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망나니는 친구들을 끌고 야밤의 추격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추격은 실패했다. 망나니의 친구들이 비명 소리가 들려온 계곡으로 달려가보니 망나니의 시체가 그들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 위엔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거대한 사냥개 한마리가 서 있었는데 사냥개는 지금 막 망나니의 목을 물어 뜯어 꿀꺽 집어 삼키려는 찰라였다. 야밤의 추격전은 피와 공포로 물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황무지에는 '바스커빌가의 망나니'를 물어 죽인 '지옥개의 저주'가 퍼지기 시작했다. 바스커빌가는 완전히 몰락했다. 망나니 바스커빌의 3대손 찰스 바스커빌이 남화공에서 얻은 막대한 부를 업고 황무지로 돌아올 때 까지 바스커빌가의 대저택은 아무도 살지않는 황무지에 버려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찰스 바스커빌마저 '지옥개의 저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드디어 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B호에 사건 의뢰가 접수 된다. 

 

 

<출처: Flickr.com, loja> 

 

'바스커빌가의 개'에는 두 가지 독특한 점이 있다. 우선 홈즈의 부활로 유명한 소설이지만 사실 이야기의 대부분이 왓슨 박사의 시점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이런 구성은 후반부의 반전을 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둘째로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소설의 분위기다. 사람과 말을 삼키는 늪지대, 피폐한 황무지, 불을 뿜는 지옥개,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대저택의 공포 등이 의문의 살인 사건과 어울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바스커빌가의 개'가 고딕 소설로까지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점을 감안하더라도 나에게 셜록 홈즈는 자정이 넘은 시간 오래된 브라운관 TV로 보는 토요 명화만큼이나 빛 바랜 영광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단 한편의 셜록 홈즈를 봤을 뿐이다. 이 한권으로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의 전부를, 혹은 그의 삶과 경험의 화신인 셜록 홈즈를 비하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고전의 독해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가 철저히 현대성을 잊고 빠져드는 과거로의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고전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그것에 몰입하는 독자의 태도에 달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왜 고전을 읽을 것인가', '그곳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고전을 읽는 것을 넘어서 고전이 현대와 상호작용하는 혹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니 '바스커빌가의 개'가 재미 없었다면 곰곰히 생각해 보라. 과연 자신이 틀린 건지 아니면 셜록 홈즈가 틀린 것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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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은 언제나 관객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이다. 그가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 이래 이 설레임은 숙명처럼 김지운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김지운은 30세가 넘기까지 백수로 지냈다고 한다. 그냥 백수는 아니었는데, 하루 종일 무위도식하는 친구들과 함께 문화와 예술을 논했다. 그러다가 본인이 심각한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용한 가족'을 집필했고 덜컥 영화 감독이 되버렸다. 이름난 영화 감독이 된 뒤 김지운은 그때 그 시절을 일컬어 에너지를 축적했던 시기라고, 뭐 이렇게 과학적인 표현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대충 비슷한 뉘앙스로 그때를 형용했던 것 같다.

뭐 표현이야 어쨌든 김지운은, 오랫동안 참아 왔던 감성을 폭발시키면서 항문에 임박한 응가를 변기 속에 한 가득 쏟아낼 때의 카타르시스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지운이 왜 악마를 보게 됐을까? 그의 필모그래피는 언제나 전작과 다름을 추구했으므로 그의 과거를 쫓아 현재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모든 장르를 스타일리쉬하게 풀어낸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그건 모든 예술가들이 갖춘 공통점이기 때문에 그걸로 김지운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럼 도대체 왜 김지운은 악마를 보게 된걸까? 심심한 대답이겠지만, 주연 배우 최민식이 김지운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영화계에서 오랫 동안 잊혀져 있던 오대수는 혜성을 타고 지구에 충돌하길 원했을 것이다. 김지운이 여기에 걸렸다.

피와 섹스를 숭배하는 살인마를 잡아 아킬레스 건을 잘라버리는 복수극을 연출할 사람은 우리나라에 박찬욱 밖에 없다. 그러나 박찬욱에겐 '복수는 나의 것'이 있었다. 그럼 이렇게 센 영화를 누가 할 수 있을까?

얼렁 뚱땅 만들었다간 손가락질만 받는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엔 형식(스타일)이 필요하다. 포르노를 예술로 만드는 건 섹스(내용)가 아니라 스타일(형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통 스타일로는 되지도 않는다. 그럼 당연하지 않나? 김지운 밖에는 없다. 그리고 덤으로 '이병헌'을 얻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직 안 본 사람들을 위해 말해두면 이 영화 엄청 잔인하다. 장경철은 학원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홀로 길을 가는 여자를 납치한다. 둔기로 머리를 때려 기절 시키고 나체로 끌고와 살아 있는 몸을 토막낸다. 작업을 끝낸 창고의 하수구는 시뻘건 피를 토해낸다. 이 영화에서 인간은 도살장의 짐승들과 다름 없다. 장경철은 왜 살인을 하는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살아가는 게 당연한 만큼 살인도 당연하다.  토막 살인이 사회의 끔찍한 기현상이었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지 않았나. 2003년 부터 2004년까지 26명을 살해한 유영철은 강남구 신사동에서 첫 범행을 저질렀다. 토막 살인범은 우리 이웃에 살고 있다.

이렇게 당연한 사건으로는 다큐를 찍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방점은 장경철이 아니라 이수현(이병헌)에게 찍혀야 한다. 연쇄 살인과 강간은 당연한 일이지만 복수도 마찬가지일까? 내가 당한만큼 돌려 주는게 법과 질서의 왕국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경철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이상 인내하는 자신의 삶은 정상이라는 유리관 안에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인내는 언제나 마음 속에 꿉꿉한 앙금을 남기지 않나? 개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닐까? 생각해 보니 쪽팔린다. 나도 개가 되자. 그러면 안되나? 개가되서 물어 죽이는 거다. 더 끔찍한 악마가 되어 다른 악마의 항문에 꼬챙이를 꽂아 버리자! 윤리 따위 지나가는 개나 줘버리라고.

바로 이 카타르시스가 '악마를 보았다'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카타르시스는 길지 않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악마를 보았다'의 흥행 실패가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관객은 영화관을 나오면서 강간과 후두부를 강타하는 파이프와 시뻘건 피와 자기가 싼 똥을 뒤지는 최민식만 기억한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장경철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장면에서조차 관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못한다. 

 


  

 

복수를 마음 먹은 이상 이수현은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무언가에 대한 분노가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이수현의 복수가 정당한 거라면, 사회에 대한 분노로 사람을 죽인다는 모든 살인범들도 정당하다. 그렇다고 당신이 이수현이라면 장경철을 가만히 놔둘 수 있나? 토막난 약혼녀의 주검 앞에서 당신은 차가운 이성을 지킬 수 있느냔 말이다.

이게 바로 딜레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올드보이'가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건 바로 이 딜레마 덕이었다. 그러나 '악마를 보았다'는 이수현의 딜레마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복수 할 것인가에 더듬이를 곧추 세운다. 그래서 이수현의 고뇌는 피와 똥과 시체에 묻힌다. 슬픔과 분노를 무표정한 표정 속에 응축해내는 이병헌의 유례없이 좋은 연기도 한 바가지 싸놓은 설사 위에서 조용히 묻혀 버린다.

장경철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수현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니가 진거야'라고. 이 영화가 기분을 더럽게 하는 이유는 장경철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수현이 아무리 자극적으로 장경철의 죽음을 연출해도, 설령 죽음 뒤에 부활 시켜 7번씩 70번을 다시 죽인다 하더라도,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고통은 오직 살아 남은 자의 것이다. 장경철의 머리가 레테의 강을 건너 저 세상으로 가는 순간 이수현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눈물을 쏟아 낸다. 그건 결코 카타르시스의 눈물이 아니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수현이 졌다. 이병헌이 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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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루쉰 지음, 전형준 옮김 / 창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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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치고는 꽤 재기 발랄한 면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핍박 받는 인민과 핍박 받는 인민을 핍박하는 옆 집 인민이 등장하는데, 그 관계를 묘사하는데 있어 가끔 블랙 코미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유머가 존재한다.

그의 대표작 아Q정전을 보자. 이 소설은 아Q의 내력을 장황하게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의 내력을 정리하여 '전(傳)'으로 써낸 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거나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인물에나 어울리는 일이다. 그런데 아Q가 누구인가? 거렁뱅이에 무뢰한이다. 루쉰은 거창한 형식 속에 비루한 소재를 채워 넣고 있다. 그리고 이 과잉된 서론이 독자들의 마음을 적당히 풀어지게 한다. 루쉰의 코미디가 서서히 시동을 거는 것이다.

코미디의 절정은 아Q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아Q는 거듭된 패배의 경험을 통해 이른바 '정신적 승리법'을 터득한다. 그것은 패배가 명백한 상황에서도 본인만큼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한 아Q는 영원히 승자다. 급기야 사형장으로 향하는 조리 돌림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짐작하지 못한다.

이런 얘기를 웃음기를 싹 거둔채 진지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블랙 코미디의 전형 아닐까? 좀 싸게 쳐줘 비아냥이나 조소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소와 비아냥이 철저한 주제 의식 아래 치밀하게 전개 된다면 그건 하나의 문학 형식이 될 수도 있다. 노벨은 스타일이 없는 사람에겐 상을 주지 않는다. 
 

 

 

우의 치수(治水)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홍수를 다스리다'에서는 풍자와 조롱, 유머의 강도가 훨씬 높아 진다.

이 소설에는 두 부류의 정치인이 등장하는데, 첫째는 '우'로 대표되는 행동파고 둘째는 '조정의 관료', '재야의 학자'로 대표되는 관념파다. 루쉰의 풍자 대상은 당연 후자다.

사변과 논쟁에만 몰두할 뿐 현실을 타계할 대책이 없는 무의미한 학자들, 게으르고 부패해 탁상공론만을 일삼는 관료들은 새로운 치수법을 앞세워 천하를 주유하는 우를 당해내지 못한다. 실천과 진실의 정치가 보수와 반동을 타파하여 이 세상이 백성들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루쉰의 바람이었다.  

'아Q정전', '홍수를 다스리다'가 잽으로 일관하다 스트레이트로 마무리하는 아웃복싱이라면 쿵이지, 고향, 술집에서 같은 소설은 묵직한 훅이 날아드는 인파이팅이다.

이 소설들은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글쎄 뭐라고 해야할까?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흰 담벼락의 얼룩같이 언제까지고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잔잔한 떨림을 일으키는 감정의 앙금을 남긴다. 이를테면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어릴 적의 친구를 만났지만 그 친구의 타락을 목격해 버리고 마는 '고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옛 친구의 선한 정신을 마비시켜버린 현실의 괴로움과 절망. 삶 앞으로 불어오는 현실의 광풍에 마모되고 짓이겨져 우리는 그렇게 살아갔다. 20년이 지나가버리자 우리는 완전히 남남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은, 그의 후배들은 어떤가? 그들에게도 여전히 삶은 어둡고 절망적인가? 그러나 루쉰은 어린 아이들의 정에서 하나의 희망을 본다. 

우리의 후배들은 아직 한 마음이다, 훙얼은 수이성을(작자와 작자 친구의 자식들)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희망한다. 그들은 더 이상 나처럼, 사람들끼리 격절되지 않기를...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이 한마음이 되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나처럼 괴롭고 떠도는 삶을 사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들이 룬투처럼 괴롭고 마비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괴롭고 방종한 삶을 사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삶을.  

 

루쉰은 결코 문장 자체가 뛰어난 것은 아니다. 주제다. 좀 더 자세하게는 주제를 드러내는 태도다.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자를 억압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자를 숭배하는 마음. 이같은 하층민의 노예 근성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지를 거칠지만 진솔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드러낸다.  

알고 있겠지만 루쉰은 옛날 사람이다. 1881년에 태어났다. 글의 끝 부분에 작가의 탄생 연대를 드러내는 이유는 아주 상투적인 결말을 내기 위해서다. 이런 결말은 작가와 작품이 현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록 빈번히 출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다.

오래 세월이 지났음에도 루쉰의 소설이 현대적 의의를 갖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배를 잡고 조소하는 120년 전의 암흑 세계에서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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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10-11-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허스키님!^^ 아Q정전 정말 많이 읽히는 책이죠~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허스키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한깨짱 2010-11-24 19: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도란도란님 근데 책이 저랑은 약간 안 맞는 것 같아서 망설이게 되네요. 나중에 더 좋은 기회 있으면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69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올 한해 동안 100여편의 글을 쓰면서, 상당부분 책에 대한 얘기를 해왔고, 몇몇 책에 대해선 과도한 찬양을 일삼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책을 찬양하는데 있어선 일말의 망설임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남겨 두고 싶지 않다.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이다.

벌써 세 번째 이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은 인간의 심리를 파헤치는데 있어선 러시아의 도박광 도스토옙스키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이고, 삶의 희비극을 묘사하고 조소하는데 있어선 안톤 체홉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정도지만, 무엇보다 평등과 자유를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우스 풍의 서사시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문학과 사상 그리고 전 인류의 해방과 평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고, 뭐 그냥 철 없는 고교생들의 떠들썩한 난동기 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겐은 17세이며 동시에 동정인 고교생이다. 17세에 동시에 동정이라는 사실은 그 삶에 무수히 많은 고뇌와 레퍼토리가 함축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평범한 많은 고교생들이 더 나중을 위해, 그러니까 결혼 적령기에 이르러 '불특정 다수의 암컷들'을 차지 하기 위한 고급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고문 과정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다면 겐은 좀 더 분명하게 현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천사 마츠이 카즈코의 눈에 띄기 위해 종업식날 바리케이트 봉쇄 작전을 펼치는가 하면 페스티발때 공연할 둘 만의 연극 극본에 키스씬을 적어 넣기도 한다. 겐에게 욕망은 현실이고 현실은 즐겨야 하는 것, 그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다마는 17세이며 동시에 동정인 고교생이다. 그의 삶은 동정과 17세의 고교생이 이뤄내는 복잡 다단한 화학 작용의 피해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는 의학부를 지망하는 초우량 모범생이었다. 재수없게 겐과 한 반이 되었다. 어느날 겐이 아다마를 꼬셔 동물원으로 놀러간 날 그에게 랭보의 시를 보여준 것이 화근이었다. 시는 고교생의 마음에 풍랑을 일으켰다.

뒤 늦게 알아버린 또 다른 나. 나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낯설고 거친 에너지. 지난날의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거부해버리고 마는 난폭한 페이소스. 결혼 할 남자와 혼수 문제로 헤어졌다 속수무책 혼자가 되버린 45살의 노처녀 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뒤늦은 사춘기다. 아다마에게 사춘기가 찾아 왔다.
 

 

 

종업식 바리케이트 봉쇄 작전을 통해 겐은 사세보 지역 대학의 스카우트 제의와 8만엔의 현금, 진정한 참회와 눈물이 어린 학교 선생들의 사과, 그리고 좌파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천사 마츠이 카즈코의 마음과, 나아가 몸을 차지할 수 있었다 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고 아다마와 함께 118일간의 정학을 맞아야 했다.

그러나 정학은 겐에게 휴식과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한 인간들이다. 아다마는 정당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한 자신에게 내려진 폭압적이고 부당한 처사에 분노했다. 매일 매일 먼 길을 찾아온 선생에게 대들며 난폭한 말을 쏟아 냈다.
언제나 침착했고 무엇보다 부드러웠던 아다마는 어디로 가버린거니.

어머니는 아다마를 혼란에 빠뜨린 친구 겐을 찾아와 눈물을 흘려 보지만, 어머니, 아들은 알지 않아도 될걸 알아 버렸어요.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답니다. 

 

 

 

두 사람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Morning Election Festival! 아침에 서는 축제!
언제나 말만 앞서는 겐에겐 행동파 아다마가 있었다. 공연장을 섭외하고 대학에 다니는 형에게 부탁해 티켓을 인쇄하고 공고, 상고, 여고, 여상에 티켓을 판매했다. 겐은 준와의 여신 나가야마 미에에게 속이 비치는 네글리제를 입혀 오프닝 무대에 올려 보냈다. 나가야마 미에가 *사토 에이사쿠와 린든 존슨, 도쿄 대학의 정문이 그려진 나무 판자를 도끼로 찍어 버렸다. 축제는 대성공 이었다.


축제의 여운이 겨울 바람과 함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불어갈 쯔음 겐과 마츠이 카즈코는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덜컹 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갔다. 허름한 극장에서 온 가족을 처참히 살해한 뒤 전기 의자에서 최후를 맞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 '냉혈'을 봤다. 두 시간 반 동안의 고문을 마치고 두 사람은 바닷가로 나갔다. 마츠이 카즈코가 샌드위치와 후라이드 치킨이 담긴 도시락을 열었다. 겨울 바다의 세찬 바람 앞에서 때때로 불어오는 모래 먼지를 손으로 가리며 두 사람은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마츠이 카즈코는 상냥하고, 예쁘고, 머리 좋고, 사랑받으며 자란 사람이다. <냉혈>에서 묘사된 세계가 평화로운 생활과 무척 가까운 곳에 잠복해 있다고 해도, 또 그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천사가 한 말, "난 브라이언 존스의 챔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싶어"라는 것이다.

샌드위치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우리는 겨울 바다를 뒤로했다.

키스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여 1969년은 지나갔다.


1969년의 17세 고교생 무라카미 류는 지금은 소설가가 되었다. 데뷔작이 히트를 치고 방송에도 자주 나갔다. 고급 호텔에 묵으며 다음 스케쥴을 확인했다.

준와의 여신 나가야마 미에는 미용사가 되었다. 아다마, 겐과 함께 삼총사였던 이와세는 이케부쿠로의 캬바레에서 음유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종업식 바리케이드 봉쇄 작전이 결행됐을 때 겐의 멱살을 잡으며 학교를 위해 울었던 학생 회장은 대학 진학 후 적군파에 가담하여 싱가폴에서 검거 되었다.

의대생 남자 친구가 생겨 일방적인 이별을 선고했던 마츠이 카즈코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브라이언 존스의 챔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갈 것이다.

아다마는, 의사가 되지는 못했다.
 

*당시 일본과 미국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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