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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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세이는 좀 편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에세이를 읽고 나니 김훈의 문장, 그 어렵고 낯설은 말들의 기원을 어렴풋이 깨달을 뿐 파도처럼 덮쳐오는 말들의 무게에 나는 기어이 탈진하고야 말았다.

에세이가 이렇게 어려워도 되는건가? 그의 말을 빌리면, 문장의 탄생은 처절한 육체 노동의 결과다. 그의 단어는 짓이기고 으깨진 삶이 찔끔 뱉어내는 진주같은 것이고 망가지고 부서진 폐허 속에서 품어낸 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고통 속에서 뽑아낸 삶의 기록이기에, 읽는 이에게는 쓴자의 아픔이 절절이 전해져 온다. 그러므로 김훈의 문장을 읽고 탈진해버렸다는 고백은 그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는 반증이 된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 마다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남한 산성과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거기서 느껴지는 묵직한 대사들이 실제 김훈의 삶과 막대한 괴리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말이다. 만약 김훈이 깐죽대는 말투에 매일매일 술에 쩔어있고 안 한만 못한 말들을 습관적으로 내뱉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다시는 그의 소설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마치 팬티만 입고 글러브를 낀 브록 레스너가 상대를 향해 짐승같이 달려들며 '나 사실은 게이야'하고 고백할 때와 마찬가지의 충격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소설과 다르지 않았다. 김훈은 젊은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 지내며, 울부짖는 여동생들을 향해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고 외친다. 나는 이 '설화적 대사'를 보자마자 그 진지한 상황에는 아랑곳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대사를 곱씹어 읽으며, 이 사람도 '자신의 문학을 오롯이 살아내는' 사람이구나 하는 안도가 생겼다. 

 

 

 

나는 김훈 소설들의 그 숨죽여 우는 듯한 처연함을 좋아했다. 그의 인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말 못할 사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담담한 표정 뒤에 슬픈 울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감정을 토하지 못하고 여러차례 곱씹어 안으로 울었다. 나는 나라를 배신하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우륵을 이해했고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선을 깨뜨리면서도 승리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순신을 좋아했다.

그런데 에세이에 나타나는 김훈의 모습에서 나는 이순신을 보았고 우륵을 보았다. 그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해야 하는 소설가였다. 그는 이 무참한 운명이 답답해 질 때면 무심히 흐르는 시간을 따라 자전거를 탔고 바다로 빨려 들어가는 강의 하류에 멈춰서 주저 앉았다. 그곳에서 말들은 이지러지듯 피어났다 먼지처럼 사라졌다. 왜놈의 죽음을 딛고 삶으로 나아가는 이순신과 동족의 시체를 밟고 생으로 도망가는 우륵의 모습처럼, 김훈의 문장은 수 없이 명멸하는 생각의 무덤 위에서 살아있는 언어의 춤을 추었다. 

 

 

 

나는 소설이 모를 심어 벼로 바꾸는 한 해의 농사라면 에세이는 모판에 씨를 심어 모를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좋은 에세이라면 작가의 문제 의식이 소설의 언어로 발화하기 이전의 생생한 감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바다의 기별'은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 안에서 인간 김훈을 보고, 인간 김훈이 느끼는 삶의 고뇌를 알며, 삶의 고뇌에서 꿈틀대며 터져나오는 고통의 문장을 읽었다면,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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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ige 2011-02-11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훈님이 '나는 자전거 레이서다' 하실 때가 제일 좋던데

칼의 노래 서문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처연함과 결연함이란 ...

한깨짱 2011-02-11 21:28   좋아요 0 | URL
김훈님은 정말 문장력이 대단하신 분이죠. 문체도 확실하고 주제도 일관성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셜록 홈즈가 틀렸다 패러독스 4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여름언덕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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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피에르 바야르는 문학 속의 인물들이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고 살아가는, 명백한 실재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허구와 실재 사이에는 높은 투과성'이 있어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소설 속에 깊이 빠져들듯이 허구 속에 살고 있는 등장 인물들 또한 때때로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로 넘어와 산다고까지 말한다.

허무맹랑한, 지극히 소설가다운 상상이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이런 현상을 현실 세계에서 보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깝게,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죽는다는 소식때문에 방송국에 빗발치는 항의 전화를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 있어 극중 인물의 죽음은 실재하는 죽음과 다름 아니다. 정신나간 소수의 집단 환각이라고 생각하는건 당신의 자유지만, 이러한 현상이 이야기가 존재해왔던 지난 수 천년동안 있어왔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할 일이 아니다.
 

 

 

1893년 셜록 홈즈가 죽었을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있어 셜록 홈즈의 죽음은 더 이상 잡지에서 탐정 이야기를 읽을 수 없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홈즈의 죽음은 명백히 실재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여졌고 독자들은 마치 자신의 혈육이 죽은 것처럼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정작 홈즈를 만들어낸 아서 코난 도일은 슬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셜록 홈즈를 언제 부턴가 증오하기 시작했고 호시탐탐 그를 죽일 기회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코난 도일의 홈즈 살해 계획을 알아챈 어머니가 소설의 플롯을 제공하면서까지 홈즈의 생명을 연장한 전력이 있을 정도였으니, 피에르 바야르가 1893년에 일어난 '라이헨바흐 폭포의 추락사'(홈즈는 이 폭포에서 떨어져 죽는다)를 계획된 살인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피에르 바야르의 관심은 자연스레 이 작품, 작가의 단호한 결의로 죽었던 홈즈가 별안간 살아나 유례없는 유명세를 누렸던 '바스커빌가의 개'로 향한다. 명탕점의 부활은 셜록 홈즈와 아서 코난 도일의 화해를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밀어 뜨리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던 아서 코난 도일이 더욱 큰 고통으로 그를 죽이기 위해 다시 살려냈던 걸까?
 

 

 

'셜록 홈즈가 틀렸다'는 이처럼 현실 세계의 코난 도일과 허구 속의 셜록 홈즈 사이에 존재하는 애증을 전제로, 그것이 바스커빌가의 개라는 소설 속에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찾으려는 책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이 코난 도일의 증오를 밝히는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논란 자체를 '허구와 실재 사이의 투과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하며 동시에 텍스트, 그러니까 수십 혹은 수백년 동안 오로지 하나의 의미로만 해석되어왔던 이 견고한 바위 덩어리에 사실은 다양한 의미와 사실이 숨겨져 있음을 폭로하려 한다.

그래서 이 폭로 작업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피에르 바야르는 소설의 텍스트를 완전히 해체한 뒤 이 해체된 텍스트를 데번셔의 황무지 위에 흩어 놓고 유유자적 그 위를 거닐면서 코난 도일의 증오가 새겨넣은 크고 작은 흠집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솎아낸 텍스트들이 하나로 이어졌을 때 마침내 살인 사건의 진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도 지난 100년 동안 완벽하게 그 사실을 숨겨온 냉혹한 살인마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책의 목표가 추리 소설의 논리를 부수면서 느끼는 새디즘적 지적 유희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저자의 태도가 너무나 겸손하고 또 열정적이다.
저자는 역겨운 거만을 떨며 아서 코난 도일의 플롯을 비웃거나 셜록 홈즈를 조롱하지 않는다. 대신 책을 읽는 것과 읽은 책을 해석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며 우리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온 절대적 존재들이 사실은 얼마나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지 신선한 지적 충격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 책은 홈즈의 팬이냐 아니냐와는 상관 없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셜록 홈즈가 틀렸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알아두자, 이 책은 그렇게 건방진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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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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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두가 재테크에 열을 올린다. 친한 친구가 적립식 펀드로 몇 배의 수익을 냈다는 말을 들으면 차곡차곡 모아뒀던 적금이 흔들린다. 혹은 누군가 Daum 주식을 2만원에 2천만원 사뒀다가 8만원에 팔아 벤츠 컨버터블을 샀다는 말을 들으면 오랜 시간 면벽수련을 해오던 무욕자들의 등줄기도 찌릿찌릿 소름이 돋는다.

20년전, 송강호는 김상경에게 드롭킥을 날리며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고 물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우리 시대에 대해 묻지 않는다. 모두가 '돈의 왕국'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골의사는 부자의 기준을 '더 이상 부를 늘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고 못되고는 자신이 가진 절대적 부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 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재테크 강의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면 아마도 헛웃음을 듣거나 오랜 시간 속세를 떠나있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도인쯤으로 취급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투자에 대해 알고 싶은 건 단 하나다. 주식이라면 어떤 종목이 오를 것이냐, 부동산이라면 어느 아파트가 오를 것이냐 하는 것 말이다.

혹시 재테크를 하는 이유가 조금 이라도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닌가? 만약에 그렇다면 당신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황금이 숨겨져있는 정글은 수 십년간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과 금융 공학을 전공한 특급 인재들 그리고 초대형 투자사와 은행이 경합을 벌이는 사냥꾼들의 섬이다.

사냥꾼들은 정글을 살찌울 유동선 자산을 아주 손 쉽게 얻는데 그건 바로 안전한 대륙에서 배를 타고 도착하는 욕망에 눈 먼 사람들, 바로 당신의 주머니를 털어 얻어진 것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엘도라도의 꿈은 멈추지 않는다. 저마다 합당한 논리를 가슴에 품고 저 머나먼 바다로부터 끝도 없이 밀려든다. 

 

 

 

시골의사는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 보다는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는 게 훨씬 쉽다고 했다. 예를 들어 당신이 100억원 상당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는 해저층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건 아니고 한 10번 정도 바다를 쑤시면 나온다고 하자. 바다를 한 번 탐색할 때 드는 비용은 1억이다. 만약 당신이 10억원의 현금을 보유한 사람이라면 이 탐사는 매력적인 투자다. 그러나 1억원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건 분명히 도박이다.

리스크란 부자일 수록 품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겐 반드시 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리스크를 적극적으로 껴안으려 한다. 이 정도 돈은 없어져도 그만이라 생각, 내가 던지면 언제나 모가 나올 거라 생각하는 심리, 그리고 이제는 알만큼 알았다는 자만심이 당신을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가난의 지옥으로 빠뜨린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부자가 되려면 먼저 부자가 되야한다. 그럴려면 사돈의 팔촌이 땅을 사도 점잖게 있을 줄 알며 돼지 저금통을 깨서 한 주식투자가 수십 억이 됐다는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작지만 꾸준히 이익을 내고 약간의 금리 차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하며 ATM기의 수수료를 아까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승리하는 사람'이 되야 한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부자가 되는 길은 자신의 현재 수입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수입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법은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을 재테크의 세상으로 인도하는 수 많은 시정잡배들은 노후 자금 10억 만들기과 국민 연금의 고갈 등을 운운하며 공포감을 조성할 뿐이다. 그들은 적당히 게임의 법칙을 설명해 준 뒤 이제는 게임을 시작해야 될 때라고 속삭인다. 눈 앞에 다가온 재앙이 당신의 모든 것을 쓸어 담을 자루를 들고 서 있는데도 조바심이 난 당신은 지갑을 열고 적금을 깨고 아이가 모은 돼지 저금통까지 그러쥐며 대박의 흥분에 취해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눈치챘을 땐, 이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뒤일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이 책은 투자 입문서라기 보단 경제학 책에 가깝다. 저자는 부동산이란 무엇이며 주식이란 어떤 것이고 어디에 얼마를 투자해야 노후자금 '10억'을 벌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가격이란 무엇이고 금리란 어떤 것이며 가격과 금리의 변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변동하는 원리는 무엇인지를 경제학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시중의 어떤 그 투자 입문서보다 부의 본질에 근접해 있다.

돈을 벌어 보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런 강의를 해주는건 웬만한 배짱과 철학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시골의사 박경철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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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웃에는 데이빗 린치, 데이빗 크로넨버그, 데이빗 핀처, 아주 넓게 봐줘서 데이빗 보위까지 네 명의 데이빗이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연출한 것은 데이빗 린치고 컬트 영화 크래쉬(1996)를 만든 것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데이빗 보위다. 그리고 데이빗 핀처는 소셜네트워크(2010)를 만들었다.

데이빗 핀처의 소셜네트워크가 공개 됐을 때 알만한 사람들은 기대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1995년에 세븐, 1999년에 파이트 클럽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에일리언 3(1992)를 연출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에요 라고 말해 찬물을 끼얹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데이빗 핀처는 세븐과 파이트 클럽을 만든 사람이고 최근에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까지 거꾸로 보내버린 감독이다. 기대를 안할 수가 없었다. 



 
 

 

소셜 네트워크는 하버드 컴공생 마크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을 만들고, 성공하고 돈 냄새를 맡은 인간들과 괴로운 소송을 벌이는 내용이다. 휘황찬란한 성공기가 아니다. 욕망과 성공에 눈이 먼 인간들을 관조하며 그 본성을 속살까지 드러내는 잔인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의 조명은 어둡다. 살인범의 이야기인 세븐과 정신분열자의 이야기인 파이트 클럽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이 무거운 조명이다. 카메라는 이 어둠 속에 들어 앉아 인간의 악한 본성을 포착한다.

소셜 네트워크가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밋밋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는 성공과 실패와 그리고 분쟁을 극적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산발적으로 이야기를 내뱉는다. 그래서 감정은 고조되지 않는다. 힘들게 올라간 롤러 코스터가 내리막길 직전에 멈춰 버린 느낌. 아니, 아예 오르막길까지 가는 평평한 레일 위를 달리다 만 것 같은 이 느낌은 그대로 관객의 마음 속에 남아 욕구 불만을 일으킨다. '이런걸 볼려고 8,000원이나 낸건 아니지' 하는 한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런식의 전개가 이뤄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실제 페이스북의 성공이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크 주커버그의 대사처럼 '아직 이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페이스북은 세계 최고의 소셜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그들은 어디까지 클 줄 모르는 폭발적 성장기의 어린아이였으나 사람들은 자꾸만 잡아다 키를 재려 했다.

엔젤 투자자들이나 넵스터의 숀 파커는 칼을 든 도축업자였고 페이스북을 통제 가능한 울타리에 가둬 놓은채 이 돼지에 칼을 꽂아 한 몫 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내는 짧았고 결국 도살 명령은 내려졌다. 피냄새를 맡은 파리떼들이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야기 중간중간 끼어드는 소송 장면들은 이런 상황을 은유하는 듯 하다. 그것은 도축업자의 칼날이 살갗을 찍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여지없이 관객의 환상을 깨뜨린다. 데이빗 핀처는 그들의 성공이 아니라 사라져버린 꿈과 깨져버린 우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하는 주커버그의 심리에 집중하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의 순결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이스북의 원래 아이디어를 윙클보스 형제로부터 제공 받은 것이 명백함에도 그는 '소스 코드는 온전히 나의 것'이며 페이스북을 만드는 일은 '자신에게 소송을 건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지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요구한다'고 거드름을 핀다. 이런 태도는 소송 과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것을 지루하게 연장시키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원흉이 된다. 

그러나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떠벌이려는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심각한 컴플렉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학창 시절 지지리도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와 땅 팔아 부자가 된 사연을 주구장창 늘어 놓는 것 처럼 말이다.

사실 마크 주커버그는 컴플렉스 덩어리다. 영화 초반 주커버그가 에리카에게 - 에리카 올브라이트, 여자친구 - 쉴새 없이 떠드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자기 지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피닉스 클럽'의 부름을 받지 못한 Geek일 뿐이다.

그가 절친 에두아르도를(피닉스 클럽) 버리고 숀 파커를 따르기 시작한 것도 컴플렉스 때문이다. 주커버그는 숀 파커가 냅스터를 만들었고, 그 사실이 자신을 무시하는 세상을 엿먹이는 열쇠라고 믿는다. 실제로 숀 파커는 주변 사람과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페이스북을 만든 자신 또한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이렇게 페이스북은 주커버그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사회적 보호망이 된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로 불리는 한 그는 더 이상 별볼일 없는 Geek으로 취급받지 않아도 된다. 뿐만아니라 Facebook의 명함 뒤어 숨어 이렇게 상스러운 말을 지껄여도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 볼 뿐이다. I'm CEO, bitch!라고 말이다.

이 영화가 시종일관 침울하고 어두컴컴한 이유는 페이스북을 둘러싼 소송과 갈등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페이스북 자체가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서 태어났다는 것 즉, 사랑받지 못한 자의 뒤틀린 욕망을 먹이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성공같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보장된, 이토록 흥분되는 소재에 아무 거리낌 없이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건 데이빗 핀처 밖에 없다. 그가 헐리웃 자본으로 일하는 상업 영화 감독이라는 점은 이런 사실을 더더욱 놀랍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번에는 데이빗 핀처도 별거 없었어'하고 단정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소셜 네트워크를 계기로 데이빗 핀처의 다음 영화를 선택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것이 데이빗 핀처를 작가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는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확고한 스타일과 철학이 있는 남자라면 다음 영화 아니 다다음 영화 아니 다다다음 아니아니 영원히 그의 영화를 기대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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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지음, 민병걸 옮김 / 안그라픽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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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하라 켄야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이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디자인의 디자인'의 저자라는 말로 이 남자를 설명하고 싶다.

특정 분야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무자가 자신의 업(業)을 설명하고 이론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유는 많겠지만 대개는 첫째,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둘째, 대부분의 크리에이터들에게 정리는 창조보다 귀찮은 일에 속하기 때문이며 셋째, 자신조차 자기가 발휘하고 있는 창조의 근원을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셋 중 첫째를 핑계로 둘째를 디자이너 개개인의 성실도의 문제로 간주하더라도 마지막 세번째 이유, '자기 자신조차 창조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것에는 실제 본인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막막함이 담겨 있다. 
 

 

 

그런데,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디자이너란 설명하고 주장하는 일보다 직접 만들고 보여주는 것이 훨씬 쉽고 또 그것을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이다. 덧붙여 이론없이도 훌륭한 작업물을 내놓는게 바로 디자이너의 위대함인데, 뭣때문에 힘들여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말이다. 물론 이 말에도 일리는 있다. 행동보다 말이 많은 이 세상에서 실무와 실용, 보이는것과 만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가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만약 우리 세대의 디자인을 우리 세대만으로 끝낼 것이라면 이런 생각에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게 목적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그것은 반드시 이론으로 정리되야 할 필요성이 있다. 경험이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누군가 멈춰서서 음미하지 않으면 결코 축적되지 않는다. 축적된 경험은 후대의 이해와 손질을 거쳐 지혜로 탈바꿈하고 이렇게 숙성된 지혜가 바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는 것이 이른바 인간 역사의 진보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상도 사실은 우리 전세대들이 축적해 놓은 유구한 전통이 발판이 된 것이다. 그때도 누군가는 이론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세의 강줄기에서 유유히 사유의 헤엄을 쳐왔던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역사는 여전히 다음 세대의 진보를 잉태하고 있다.
 

 

 

'디자인의 디자인'에 소개된 많은 디자인 작업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꼽으라면 단연 '리디자인 프로젝트'다. '리디자인 프로젝트'란 하라 켄야가 주도한 프로젝트로 건축, 제품 디자인, 시각 디자인, 의상 디자인 등 다양한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 받은 디자이너들에게 '일상의 제품'들을 새롭게 디자인하라는 과제를 주고 그 결과물을 프로토타입으로 제작하는 작업이었다.

사실 일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을 다시 디자인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디자인이란 그 무엇보다 합목적성을 전제로 하는 작업이다. 만약 키보드, 성냥, 물컵 등이 다 비슷한 모양으로 디자인 되어 있다면 그것에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것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우발적인 영감에 의해 창조된 것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그것들에는 수십, 수백 아니 수천년 동안 쌓여온 일상의 경험이 반영되어 오늘날의 형태를 띄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지혜와 경험의 결과물을 한 순간에 전복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뿐더러 자칫 잘못했다간 우리의 선배들과 역사를 기만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제를 받은 디자이너들은 마치 이런 우려를 비웃듯 엄청난 디자인을 선보였다.
 

 

 

 위 사진은 반 시게루의 네모난 휴지심이다. 얼핏보면 변기를 제출해 놓고 '샘'이라 이름 붙인 뒤샹의 조크와도 닮은 듯하다. 그러나 동그라미가 네모로 바뀌면서 휴지는 적재가 용이해 진다. 뿐만아니라 적재시 발생하는 수납 공간의 손실도 상대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렇게 높아진 적재 효율성은 당연히 운송의 효율성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대가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네모난 휴지심이 전해오는 메시지다.

상상해 보자. 보통의 동그란 휴지심이라면 휴지를 풀 때 아무런 저항이 전해지지 않는다. 잡아당기는 만큼 술술 풀려 원하는대로 쓸 수 있다. 그러나 네모난 휴지심은 풀릴 때 마다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낸다. 바로 이 저항이 휴지를 낭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작은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이처럼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환경 보호가 일상의 행위와 밀접히 관련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이것이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됨으로써 휴지를 아끼는 습관으로까지 발전 된다.

두 번째는 후가사와 나오토의 티백이다. 아래 사진을 보자. 
 

 

 

티백에 고리가 달려 있다. 그런데 이 고리의 빛깔은 홍차가 제일 맛있어지는 시점의 색채와 비슷하다. 이게 바로 포인트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 색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홍차의 맛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둘간의 관계를 인식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고리보다 진한 편이 좋다거나, 혹은 오늘은 엷게 타서 마시자는 식으로' 색채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해 나갈 수도 있다. 단순한 고리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 낸 것이다.

다음은 멘데 카오루의 성냥 디자인이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끝에 발화제를 입혔다. 이것은 '땅에 떨어진 나무가지에게 지구로 환원되기 전에 마지막 일을 시켜보자'는 발상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멋있는 생각이다. 게다가 나뭇가지 하나하나의 면면 또한 매우 아름답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물조차 섬세한 감성으로 낚아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의무인 것일까?

멘데 카오루의 성냥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미(美)를 디자인이라는 수단으로 세련되게 발굴해 냈다. 이로써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삶에 하나의 느낌표가 새겨진다. 

   

마지막으로 리디자인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하라 켄야의 '산부인과 사인(간판) 작업'의 결과물을 살펴 보자. 보통 사인, 간판이라고 하면 아크릴이나 플라스틱을 떠올리게 된다. 그 안에 전구가 하나 들어있고 밤에는 불을 내뿜는다.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방이나 벌레 따위가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장점은 이 플라스틱을 유일무이한 간판의 소재로 떠오르게 만든다. 그런데 하라 켄야는 이 사인에 백색 면(綿)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백색 천이란 그런거다. 마땅히 손을 대지 않아도 하루하루 쌓이는 먼지에 의해 자연적으로 때가 탄다. 검은 색이라면 쉽게 가려질 수 있겠지만 흰색 천은 먼지의 흔적을 숨길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천을 더럽히는 게 자연 오염인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은 '이제 막 초콜릿을 먹은 손'으로 이 간판을 만질 것이다. 아니면 벽을 짚고 이동하는 산모가 땀에 절은 손으로 이 간판을 움켜 쥘 수도 있다. 이 때마다 흰색 천에는 오염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다. 도대체 이렇게 귀찮은 짓을 왜 한 걸까? 


 

 

 

그러나 쉽게 더러워진다는 특성 자체가 바로 이 작업의 핵심이다. 병원이란 그 무엇보다 위생과 청결이 최우선 되는 특수한 장소다. 그런데 만약 흰색 천으로 만들어진, 쉽게 더러워질 수 밖에 없는 이 사인들이 언제나 청결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만큼 병원이 청결과 위생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건 아닐까? 

 

 

 

이 책은 얼핏 디자인 전공자들이 읽는 관련 전문서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읽어 보면 디자인이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할 뿐 사실은 이 책이 인간과 사물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라 켄야의 디자인 철학은 일상의 사물들과 멀리 떨어져 대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뜬구름을 잡는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제품으로 다가온다. 바로 이것이 마치 타고난 센스, 탁월할 미의식 따위를 갖춰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디자인의 세계를 아주 친숙하고 쉽게 정리해 준다.

마지막으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라 켄야의 답을 듣는 것으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 수 없이 많은 보고 느끼는 방법을 일상의 물건이나 커뮤니케이션에 의식적으로 반영해 가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어쩌면 대가와 풋내기의 차이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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