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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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되거나 절판되지 않고 살아 남은 커트 보네거트의 번역서 중 유일하게 에세이 한 권 있으니 그게 바로 이 책 '나라없는 사람'이다.

좋은 수필이란 작가의 문제 의식이 소설의 언어로 발화하기 이전의 생생한 감정을 담고 있기 마련이어서 이것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더 쉽게 이해하거나 나아가 동일 작가의 다른 소설들까지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라고 하는건 너무나 평범하고 뻔한 문장이라 커트 보네거트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으니 좀 더 커트 보네거트 식으로 말해보자.

75세인지 76세인지 어쨌든 지구에서 가장 멍청하고 폭력적인 동물의 평균 수명을 훌쩍 넘은 탓에 더 이상 좋은 농담도, 좋은 글도 생산할 수 없다고 생각한 노작가가 최후의 역작을 내놓았으니 그 책이 바로 타임퀘이크다. 그런데 이 책을 마지막이라고 선언한 노인네가 2년 후 단편집을 출간하고 거기다 아주 짧은 소설을 한권 덧붙였으며 심지어 그 6년 뒤 에세이까지 한권을 추가했으니, 미국 사람들은 이 책을 A Man Without a Country 라 불렀고 극동 아시아의 토끼모양 땅 덩어리에 살고 있는 옐로 몽키스들은 이를 '나라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됐수?
 

 

 

타임퀘이크의 뒷 작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더 이상 좋은 농담을 할 수 없었던 탓인지 나라 없는 사람은 타임퀘이크의 일부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가 하면 이미 한 번쯤 소설에서 언급했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술자리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주사는 테이블 위에 토를 해 놓는 사람이나 소파에 누운채로 오줌을 싸는 사람이나 친구의 뒤통수를 맥주병으로 때려 놓고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라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사람이라는데, 되풀이 하는 말이 워낙에 좋은 말이니 대충 좋게 좋게 넘어가 주자. 게다가 이 책을 쓸 때 우리의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는 여든 두 살이었지 않은가!

미국이라는 악당의 나라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건 정말로 축복이다. 아마도 미국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에 타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같은 의인이 살아남아 후세에 정의를 지키는 법을 가르쳐 줬기 때문일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가 스스로를 나라 없는 사람으로 부른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음에도 결코 미국인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의 이웃과 친구들에게는 많은 비난과 야유를 받아야 했다.

미국인들은 세계 각지의 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토록 증오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미국인이 멍청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싫어하는게 아니라 그들이 거만하기 때문에 미워한다. 커트 보네거트도 떠나버렸으니 앞으로는 누가 이런 사실을 가르쳐 줄지 모르겠다.

커트 보네거트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 놨더니 친구 역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더니 오래된 번역본들을 절판시켰고 남아있는 몇 권들마저 품절의 벼랑 끝에서 위태로이 떨게 만드는 망할 출판사들을 협박해 재판을 출간하게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나는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서울 시내 대형 서점 4곳을 동시에 폭파시켜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자고 했다. 나는, 필요하다면 충분히 감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해줬다.

물론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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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3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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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어느날 잠에서 깨 늑대를 바라보았다. 늑대는 무리를 지어 눈 밭을 달려 가고 있었다. 눈 덮인 초원에 따뜻한 콧김을 내뿜던 송아지 한 마리가 순식간에 먹이로 변했다. 파리한 달 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눈 위로 송아지의 새빨간 핏줄기가 뚝뚝 녹아 들어갔다.

순간 우두머리 늑대가 고개를 돌려 소년이 있는 곳을 바라 보았다. 소년은 도랑에 납작이 엎드렸다. 바람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산 기슭을 때렸다. 펄떡 펄떡 뛰는 소년의 심장 소리가 늑대의 귀에까지 들리는 듯 싶었다. 늑대는 곧이어 눈 위에 코를 박고 킁킁 대더니 만찬에 만족한 듯 길게 울음을 내지르고는 소년을 지나쳐 산 위로 달렸다. 곧이어 무리들이 늑대를 따랐다.

소년의 이름은 빌리 파햄이다. 17살 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과 함께 목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멕시코에서 넘어온 늑대 한 마리가 목장의 송아지를 잡아 먹었다. 아버지와 빌리는 덫을 쳤으나 늑대는 영리했다.

어느날 빌리는 자신이 늑대의 마음을 알아버린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빌리는 모닥불이 타고 남은 시커먼 잿덩이 아래에 커다란 덫을 설치한 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침대에서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아직 여명의 어스름조차 이른 캄캄한 밤이었다. 빌리는 마구간으로 가 말 위에 안장을 얹은 뒤 안장 주머니에 소총을 꽂고 덫을 향해 떠났다. 두 시간 남짓 말을 타고 도착한 곳에서, 빌리는 아몬드 빛 눈동자를 커다랗게 확장시킨 암늑대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늑대는 새끼를 베고 있었다.

소년은 늑대를 멕시코로 되돌려 보내 주겠다고 다짐했다. 소년은 늑대에 재갈을 물리고 밧줄을 묶어 말 뒤에 매단 뒤 국경을 넘어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갔다.

멕시코에 도착한 빌리는 밀수꾼으로 오해받아 늑대를 빼앗겼다. 늑대는 사슬에 묶여 축제를 떠돌다 투견장으로 끌려가 생사를 건 진지한 싸움에 빠져 들었다. 거의 두 시간, 그 동네의 모든 개들과 사투를 벌인 늑대는 땅바닥에 주저 앉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소년은 성큼성큼 늑대에게 다가가 피투성이 머리를 향해 소총을 발사했다. 늑대의 가죽을 챙기러 올라온 사람에게 소년은 자신이 갖고 있던 윈체스터 44구경 소총을 줘버리고 늑대의 시체를 가져갔다. 늑대를 엎고 천막을 빠져나가는 소년 앞으로 악당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소년은 늑대를 산에 묻고 돌을 올려 놓은 뒤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소년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부모와 사라져 버린 부모가 남긴 피투성이 매트리스를 마주했다. 강도들이 산탄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날려 버리곤 말들을 훔쳐 달아났다. 살아남은 건 목이 잘려 짖지 못하는 개 한 마리와 동생 보이드 뿐이었다.

빌리는 동생과 함께 또다시, 멕시코로 떠난다. 잃어버린 말들을 찾기 위해. 그러나 말들을 되찾았을 때, 빌리는 동생을 잃었고, 동생의 마지막을 대면하는 순간 말들은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국경을 넘어'는 코맥 매카시의 국경 삼부작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우울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최고로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하다. 소년은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 국경을 넘지만 오히려 돌아오는 건 상실의 아픔 뿐이다. 아버지의 말을 타고 터벅터벅, 말라 비틀어진 초원을 가르지를 때 마다 그 갈라진 틈새 사이로 선과 악이 구분없이 튀어나와 소년의 가슴을 꾹, 움켜쥔다. 이 잔인한 세계가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한건 이 모든게 소년이 살아내야 하는 단 하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소년은 마침내 이 사실을 깨닫지만 그 고독을 함께 나눌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빌리는 어째서 이 여행을 시작했을까? 소년은 덫에 걸려 헐떡대는 늑대의 아몬드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활짝 열리는걸 알아챘다. 소년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기어이 그 길을 걷고 말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잃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누군가는 세계가 악한거라고 말할 지 모른다. 소년을 가시밭 길로 내몰은 건 이 세계이며, 그것은 칠흑같은 입을 벌리고 있다 이 곳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집어삼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거기엔 특별한 의도도 선악도 없다. 세계가 어떤 속삭임으로 인간을 유혹하든 결국 국경을 넘는건, 말을 탄 인간이다. 그 황량한 구분선 위로 발을 내딛을 때 마다 가슴에 섬뜩한 상처가 새겨지는 줄 알면서도 소년은 걷고 또 걸어 비로소 어른이 된다. 
 

 

  <출처: Flickr.com, say.today> 

이 소설은 분명 압도적인 슬픔을 그리고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외치는 비명은 오히려 침묵에 가까울 정도로 담담하다. 아마도 여기서 오는 아이러니가 더욱 거대한 무게가 되어 읽는 사람의 가슴을 그토록 짓누르고 있는 것이리라.

책을 덮고 나면 이 압박감이 사라질 거라 생각하지만,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킨 마음은 마침내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거친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나 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차가운 바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칠게 휘돌아 나가며 파편들을 이리저리 흩으려 놓는다.

남겨진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황량해진 마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흩어진 파편들을 긁어 모으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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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어렵다 보니 자주 이사를 하게 된다. 바로 직전에 살던 집은 일년 반을 채우지 못했고 그 전에 살던 집도 채 2년이 되지 않아 나가야했다. 물론 그 전, 그러니까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그 집 바로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꽤 오래 지냈긴 했다. 17평, 작지만 큰 저층 주공아파트. 하지만 그 주공아파트도 네 번의 이사 끝에 겨우 정착한 집이었으니, 1989년 2월 서울로 전입 신고를 한 이래 우리 가족은 무려 일곱 번이나 이사를 하며 이 동네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일곱 개의 집 중 어느 하나도 우리집은 없었다.  

 

 

새로 이사온 집은 빌라인지 주택인지, 어쨌든 2층 짜리 집이긴 한데 우리는 2층에 있는 세 개의 방 중 두 개를 차지했다. 방 하나는 집 주인의 것으로, 실제 집은 홍천에 있어 가끔 올라와 그 방을 쓴다고 한다. 그런 줄 알았다면 세들지 않았을텐데, 그래도 월세가 너무 싸고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라, 밤사이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며 잠에 들었다.

주택 입구에는 가슴팍에도 미치지 않는 쪽문이 달려 있다. 2층으로 올라 오려면 Z자로 꺽인 계단을 두 번이나 돌아야한다. 계단 끝에는 윗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철제문이 달려 있다. 튼튼한 자물쇠가 달려있긴 하지만 유리를 깨고 문을 열면 속수무책이다. 훔쳐갈 거라곤 책밖에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현관문을 닫고 왼쪽으로 돌아서면 또 다시 철제문이 보인다. 집으로 들어가는 최후의 관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집주인의 방이 있고 왼쪽에는 장판을 깔거나 도배를 하지 않아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창고가 있다. 이 두 방 사이로 길다란 복도가 이어진다. 그 복도 끝에 마치 두 개의 삶을 구분하려는 듯, 낡은 나무 문이 버티고 서 있다. 문을 열면 나타나는 두 개의 작은 방이, 바로 나의 집이다.  

 

 

이사에 대해선 그닥 거부감이 없다. 어릴 때 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더 어릴적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억이 닿는 한에서만 헤아려 봐도 전북 이리 - 지금의 익산 -, 경기도 수원, 인천시 주안동, 송월동, 십정동... 그 중에는 우리 네 가족이 누우면 딱 하나 책상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남았던 단칸방도 있었고 13층 삼익 아파트의 꼭대기층도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막내 고모와 함께 살던 집은 금강빌라 302호였다. 베란다에 서면 파란 천막으로 둘러싼 김치 공장이 보였던 게 생각난다. 지금은 이 곳에 주안역이 들어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원래 망해서 간 집에는 정 붙이기가 힘들다던데, 이번 이사는 바로 전 집으로 갈 때에 비하면 웬지모를 친숙함마저 느껴진다. 한 번 겪어본 일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살았던 옛 동네로 돌아온다는 설레임 때문일 수도 있다. 뭐, 앞으로 이보다 못하지는 않을 거라는 체념섞인 희망 탓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변기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다는 점과 화장실 환기가 어렵다는 점만 빼면 이 집은 대체로 합격이다. 책장이 복도에 있어 내 오래된 미래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유를 누릴 수는 없게 됐지만, 그래도 책을 버리지 않고 가져온 것만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사할 때 마다 우리가 버리고 온 책을 모으면 아마 지금의 집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출처: Flickr, m4calliope>

 

이러나 저러나 25년여, 나와 함께 살아온 동네로, 나는 돌아왔다. 앞으로의 내 인생이 어디로 향할지, 이보다 좋아질지 아니면 더 나빠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시작이 이토록 미약하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끝은 창대하리라. 역경을 견디고 고난을 참는건 내 특기다.  

이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들려주고 싶어 이 글을 쓴다. 글을 읽은 모든 사람은 내 삶의 목격자가 된 셈이다. 아무쪼록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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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대역 플랫폼에 한 가득 쏟아져 있던 인분을 보고 놀라 이러는게 아니다. 냄새가 고약했기 때문도 아니다. 구역질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어딘가에서 그 똥의 주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겁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처음엔 이런것들 때문에 짜증이 나긴 했다. 하지만 짜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각은 적응했고 시선은 손에 들고 있던 책 쪽으로 곧장 옮겨갔다. 그런데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도통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시퍼렇게 멍들어 스치기만 해도 격통이 몰려오는 상처를, 웬지 모르게 계속 찌르며 아픔을 느끼고싶은 마조히즘적 본성이, 귓가에 인분을 쳐다보라고 속삭였다.

나는 끝내 그 똥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책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삼호선에서 칠호선으로 향하는 고속터미널역 통로에 한 가득 쏟아져 있던 인분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고 하는건 거짓말이다. 깜짝 놀랐다.

불과 수 센티미터 앞에 똥이 놓여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걸었다. 참사를 막은 건 후각이었다. 코를 찌르는 인분의 냄새는 고장으로 멈춰버린 대관람차처럼 내 발을 허공에 정지시켰다. 나는 멀찍이 돌아나와 인분을 바라보았다. 바닥위에 점점이 찍혀 있는 흔적을 봤을 때 누군가 똥을 밟고 지나간 것이 확실했다.

아침부터 어지간히 운이 없는 사람이다.

똥은 매우 굵었다. 하마터면 몸짓이 거대한 짐승의 짓이라고 생각할 뻔 했다. 그러나 지하철 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동물 중 크기로 따지면 인간이 으뜸 아닌가. 코끼리나 코뿔소 따위가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확실했다.

나는 이 똥이 교대역의 그 똥이라고 확신했다. 똥의 색깔과 크기가 심각할 정도로 비슷했다. 게다가 교대와 고터는 삼호선으로 한 정거장 차이였다. 교대가 먼저고 고터가 나중인걸 볼 때 녀석은 삼호선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앞서 범인이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 쭈그리고 앉아, 어딘가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관객들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밤새 삭힌 응가를 시원하게 배설해낼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봤다.

이런 상상을 한다고 해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건 없다. 도덕은 도덕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아침마다 변비로 고통받는 누군가라면 그것이 얼마나 시원하게 배설된 건지, 그리하여 자신은 언제 경험해 봤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정화의 기쁨을 어떻게 이리도 간단하게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사실에, 일부는 부러움과 또 일부는 시기심이 충만한 시선으로 응가를 바라보지 않을 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플랫폼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응가가 우주의 비밀을 노래하는 우울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안달복달 해봐야 인간은 결국 똥으로 변신할 뿐이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100년 이라는 시간은, 저 응가가 콘크리트 위에 존재할 수 있는 수 십분의 시간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누군가는 울적한 마음에 빠져 그날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원초적 행위는 그것의 단순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심오한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만약에 그가 시원하게 갈긴 응가 옆에 장 활동을 돕는 기능성 음료를 놓아뒀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따위 글을 쓰기 위해 이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녀석은 그렇게 노골적인 놈이 아니었다.

한때 자기 몸의 일부였던 말랑말랑한 덩어리를 단칼에 분리해낸 뒤 곧이어 도착하는 전철을 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나무랄데 없는 퍼포먼스다.  

나는 언젠가 꼭 한번, 그 놈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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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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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를 완전히 이해하는 날, 더이상 나는 내가 아니다. 이 글은 아직 내가 나일때 쓰는 감상이다. 이해했다는 건 거짓말이고, 읽었다는 사실조차 자신이 없다.

'알렙'은 이 세상의 모든 지점과 모든 역사와 모든 시간과 모든 영상과 모든 소리가 결코 겹쳐지거나 투명해지는 법 없이 담겨 있는 구슬이라, 그것을 보는 순간 세상의 비밀을 모두 알아챌 수 있다지만, 오히려 알렙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면 할수록 이것을 더더욱 알 수 없게 되는 역설은 보르헤스를 이해하는 한 방법인지 아니면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조롱인지, 역시 모르겠다.
  

 

 

소설 '알렙'에는 신, 시간, 영겁회귀, 우주같은 형이상학적 주제들이 미로, 불사, 재규어의 가죽 무늬, 바퀴 등의 모호한 상징물로 나타난다. 게다가 이 상징물들은 보르헤스가 평생을 고집한 단편이라는 형식 속에서 고도로 압축되어 제시되는 탓에 애초에 갖고 있던 모호함을 넘어 완전한 혼돈 속에 빠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 해외의 독자들은 여기다 번역의 모호함이라는 재앙까지 선물로 받게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작가에게 해석 또는 그에 준하는 실마리를 요구하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러한 모호함을 작품 속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모호성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권고를 내림으로써 독자를 안개 자욱한 숲 속에 가둬 버린다.
  

 

  

생각해 보면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애초에 머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역사와 시간을 동시에 본다는 것은 존재했고,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한다는 얘기지만, 이것을 말과 글로 설명하려 할 때 인간은 수십 만년 동안 갈고 닦은 언어의 기술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

이것은 보르헤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말과 글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뱉어낸 모든 말들이, 씌여진 모든 글들이 인과관계에 묶인 죄수에 불과하다는걸 알고 있었다. 결국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알렙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모순, 불가지 같은 야심차지만 빈약하기 그지 없는 말들이다.

그렇다면 알렙을 이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때로는 너무 많은 생각이 좋은 생각을 잡아 먹는다. 또는 계산된 음모가 우연을 이기지 못한다.

알렙은 직관으로 봐야한다.
알렙은 점점이 박힌 별들에서 나타나는 별자리 같은거고 갈라진 나무 무늬에서 떠오르는 사람 얼굴 같은 거다. 어떤 단어를 수없이 되풀이해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어느 순간 단어가 의미를 잃고 완전히 낯선 소리로 다가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씻겨진 단어는 이 세상과 굳게 관계 맺고 있던 논리의 사슬을 풀어헤치고 괴물같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안타까운건 설령 당신이 알렙을 직관으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나에게, 나는 당신에게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이 직관의 깨달음이다. 알렙은 알렙을 말하는 순간 알렙이 아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하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머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성의 무지가 그리는 무한의 고리 위에서, 영원히 방랑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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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안그림자 2011-03-08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각적이고 분석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세상에는 빛이 존재하고, 인생에는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니 그 속에 삼차원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이 확인할 길이 보이지 않는 영화 속의 무극은 아니지만 무극같은 사차원적 영원성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싶어 보입니다^^

한깨짱 2011-03-12 10:11   좋아요 0 | URL
네, 사차원적 영원성. 이게 알듯 모를듯 긴가민가한데 막상 글로 표현하려면 정말로 어려운 것 같네요. 이 글은 쓰면서도 올바로 쓰고 있는지 확신이 안섰는데 칭찬해 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