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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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바나 다카시는 1940년에 태어나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수재로 졸업 후 주간문춘이라는 잡지사를 다니다 2년 만에 퇴사, 그 해 도쿄대학 철학과에 재입학한, 딱 봐도 괴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천재타입의 인간이다. 좀 더 황당한 얘기를 해주자면, 이 사람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책으로 가득 채운 빌딩 한 채를 갖고 있다. 벽면에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그려져 있어 고양이 빌딩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지하 1층, 지상 3층 총 4층에 걸쳐 타치바나 다카시가 읽은 책 수만 권이 보관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한 감탄은 읽은 책이 많다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일본공산당연구', '원숭이학의 현재', '뇌사', '거악 vs 언론',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우주로부터의 귀환' 등 역사, 사회, 철학에서 생물학, 뇌과학 그리고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써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야들은 단순히 한 분야를 파해치다 보면 그 주변의 것들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이른바 '연계 학문'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완전히 독립된 분야여서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전 인생을 걸고 공부해야만 하는 것들, 그 중에서도 최첨단을 달리는 난해하고 까다로운 전문 분야인 것이다. 


 

 

 

한 인간이 이 모든 지식을 섭렵하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천체물리, 고전역학, 분자생물학, 열역학, 역사, 철학, 사회, 교육, 법학, 의학, 인류학 등 세상의 모든 지식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추론해 터득할 수 있는 기초 학문을 각각 A4 다섯 매 이내로 요약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태어날 때 부터 갖고 있었거나, 보통 사람보다 열 배는 느린 시공간에 살고 있다는 가정 말이다. 얼굴이 심하게 못생겼다는 점을 감안할 때 외계인이나 괴물 따위를 가정해 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인간의 형태와 비슷하기에 이 같은 가정은 제외 하겠다. 대신 그의 지식 탐구 과정을 조금 더 살펴 보기로 하자. 

 

 

 

이 남자는 자기가 맡은 일이라면 어떤 분야이든 상관없이 먼저 그와 관련된 책 수십권을 읽고 시작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원숭이학의 전문가와 대담이 잡혀 있다면 원숭이학 자체는 물론 생물학, 동물학 등 관련된 분야를 적어도 큰 그림만큼은 정확히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행 학습을 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읽는 책을 쌓아 올리면 1~2m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시작할 때니까 그 정도지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되어 책이라도 쓰게되면 하나 둘 씩 쌓인 자료와 책이 산을 이뤄 매번 그 자료를 보관할 아파트를 새로 임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도쿄 한 복판에 우뚝 솟은 고양이 빌딩은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어느 괴짜의 허영이 아니라 오직 필요에 의한, 필요를 위한, 필요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읽을 수 있을까라고 의아해할 것이다.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전부 읽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읽었다'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각각 다르게 내리는 한 이러한 논쟁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목차, 도입부의 수십 페이지 혹은 각 단락의 첫 문장만 읽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상 서문에 전부 써있으며 각 단락의 중심 주제는 주로 첫 문장에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책 한 권을 십분만에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책 뒤 쪽의 색인만 있으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단순 정보를 읽는데 수 시간을 할애하거나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을 꾸역 꾸역 읽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단 하루 만에도 우리가 공들여 읽어야 할 보물같은 책들은 수천 권씩 생겨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렇게 진화하는 지식의 속도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니 될수 있는 한 몸을 가볍게 해 광범위한 지식 세계를 두루두루 탐험해 가자는 것이 타치바나 다카시 독서의 핵심인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역시 '이래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된다. 핵심은 지식이 형성하고 있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지 지식 자체가 아니다. 예전에는 어느 내용이 어떤 책 몇 페이지에 나오는지 기억하는 게 지식인의 척도로 여겨졌지만 요즘같은 인터넷 시대에 암기란 구시대적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그 두껍고 지루한 책을 덮어 버리는데 주저하지 말라. 머뭇거리기엔, 우리가 가야할 길이 너무나도 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저자의 독서사(史)를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에세이가 아니다. 이 책에서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나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적잖이 실망할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저자가 '독서'에 관해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 혹은 강의 기록의 모음이다. 그래서인지 형식과 주제가 다소 산만한 면이 있다. 정작 듣고 싶은,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 대한 대답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인터뷰로 수록되어 있지만, 그의 독서법을 받아들여 후루룩 읽어 치웠으니 그 내용은 스스로 상상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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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1-05-11 21:05   좋아요 0 | URL
와! 코맥매카시 책을 출간하고 있는 민음사분이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네요! 메일 주소는 wired@huskycode.com 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2013-07-11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3-07-11 19:31   좋아요 0 | URL
와 영광이에요! 현대미학 강의는 쓰면서도 제대로 쓴건지 헷갈리는 리뷰였는데, 좋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쓸테니 종종 놀러오세요. 저도 자주 놀러가겠습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이강훈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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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통 6-7권의 책을 한번에 구입하는 편이다. 책들이 배달되면 제일 먼저 읽을 순서대로 책을 쌓아 놓는 작업을 한다. 책과 관계된 일이라면 그저 멍하니 표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지는 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흥분되는 순간은 이제 막 도착한 책을 책상 위에 늘어 놓고 뭐 부터 읽을까 고민하는 이 순간이다.

이번에는 소설이 네 권, 인문서가 한 권, 만화가 두 권이었다. 만화야 정해놓고 읽는게 아니니까 책장으로 직행 한다. 나머지 다섯 권은 보르헤스의 알렙, 코맥 매카시의 국경을 넘어,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이 책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씨'였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씨'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는 커트 보네거트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500쪽이 훌쩍 넘는 '국경을 넘어'와 역시 비슷한 두께의 '살인자들의 섬'을 보면서 소화불량에 빠진 뇌를 상큼한 디저트로 달래겠다는 궁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주말에는 웬만하면 책을 읽지 않는 내가, 특별히 시간을 내 '살인자들의 섬' 후반 150페이지를 단숨에 읽어 치울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책을 읽고 감상을 쓰려면 그 책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지난 1년간 글을 써왔던 경험을 돌이켜 봤을 때, 아무래도 집중하지 못한 책은 할 얘기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책 읽기가 잘 안 될 때 마다 나는 '이렇게 읽으면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어'라고 마음 속으로 소리치며 정신을 다잡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손에 들고 출근 길 지하철에 올라 회사로 향하는 도중, 나는 깜짝 놀랐다. 책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책 읽는 속도가 결코 빠른 편이 아니다.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출근길에 고작 30페이지를 읽는다. 그런데 이 책은 회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끝나 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책을 덮어 버렸다. 이대로 모조리 읽어 버리면 퇴근길에 읽을 내용이 단 한 쪽도 남지않기 때문이다. 난 내 스스로 뭔가를 해야겠다고 정해 놓은 시간을 그냥 흘려 보내고 나면 심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예전에도 쪽수 계산을 잘못해 퇴근길에 읽을 책이 없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 때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 나는 동공 확장, 방분방뇨, 호흡곤란 등의 증세를 겪다 네 발로 지하철 플랫폼을 뛰기 시작, 급기야 지나가는 사람들을 침이 질질 흐르는 입으로 물어대다 긴급 출동한 경찰 특수부대에 진압된 적이 있었다라고 하는 건 거짓말이고, 어쨌든 책을 읽지 못하면 심하게 초조해 한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런데 글을 쓰고 보니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 또한 그런 초조를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책 얘기는 언제 나오는거야?'라며 사람들은 짜증스럽게 마우스를 스크롤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들어보라. 

나는 지금 피에르 바야르가 말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실천하고 있다. 텍스트에 대한 비평은 그것을 문장 하나, 단어 하나처럼 부분적 요소로 환원하여 심도있게 분석한 뒤 그 결과를 집적시켜 만들어 내는 기계적 행위가 아니라, 완전히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을 추구해야 하는 지적 상상력의 결정체이므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읽고 있는 이 리뷰야 말로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최고의 창작물이며 앞으로 나와 그리고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실천해 나가야 할 글쓰기 형태인 것이다라고 하는 건 헛소리고 이럴 땐 줄거리를 소개 하는 것 외에, 나로서도 별 다른 수가 없다는 걸 고백해야 겠다.

매맞을 각오로 한마디 더 하면, 

들어보라! 줄거리 소개로 치면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이 세계에 15억 6천만 724명이나 있기에 나는 이 같은 수고를 다음의 링크로 대신하려 한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13853  

 

  

 <푸쉬킨>

내 리뷰가 비록 당신을 속였더라도 부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커트 보네거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이 책 살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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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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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을 접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말 그대로 데니스 루헤인의 원작 소설 '살인자들의 섬'을 읽거나,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셔터 아일랜드'를 보는 것이다. 무엇을 먼저 봐야하는지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충고하건대 소설을 먼저 보라. 그것도 전부 읽는 것은 좋지 않다. 멈춰야 할 시점은 세 번째 챕터인 '셋째 날', 이 책을 기준으로 정확히 403 페이지에 도착했을 때이다. 


소설이 이야기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 이유는 역시 서사가 가진 원초적인 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 승, 전, 결. 이 네 단락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꿈꿔왔던 세상을 보고 때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며 이로 인해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 짓는다. 

나는 수면욕, 성욕, 식욕처럼 인간을 생존케 하는 근원적 욕망 가운데 반드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망이 추가되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야 마는, 그로 인해 생명을 이어갈 희망을 갖고 상처를 치유했던 인간 역사의 몇 가지 예만으로도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세계 대전과 노예제도와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소설가들이 직업을 잃었을지.

물론 서사에도 약점은 있다. 이야기는 분명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탄생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끊임없이 쇠퇴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이야기는 되풀이 할 수록 맥이 풀린다. 충격적이라고까지 느껴졌던 최초의 신선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루함으로 부패한다. 부패의 정도는 특히 씌여진 서사에 더 심하기 마련인데, 구전된 서사가 시대와 화자를 달리하여 조금씩 변화할 수 있는 것과 달리 한 번 씌여진 글은 결코 그 내용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대부분의 훌륭한 작가들이 작품에 모호한 상징을 넣거나 주제와 의미를 다층적으로 구성하여 자신의 작품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그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새롭게 해석되는 작품을 원한다. 그렇게 못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주제라도 작품에 담고자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작품이 인간 지성사에 길이길이 남을 뿐만 아니라 덤으로 스웨덴행 비행기표까지 물고 올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대중 소설은 그 어떤 장르보다 '이야기 자체'에 집중한다.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훌륭한 대중 소설이 갖춰야 할 제 1의 의무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꽉짜인 플롯을 구성 하고 독자가 다음에 벌어질 일을 도저히 알아 차릴 수 없도록 이야기를 교묘하게 전개 시킨다. 특히 '살인자들의 섬'처럼 후반부의 반전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소설에서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치밀한 준비야 말로 대중 소설이 일회용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거 아닐까? 잘 짜인 대중 소설은 마치 샴페인같다. 병째로 흔들어 충만해진 탄산이 뚜껑의 개방과 함께 해방될 때, 이야기는 응축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독자를 희열의 꼭대기에 올려 놓지만, 그 후로는 바닥을 굴러 다니는 빈병만을 남길 뿐이다.


객관적으로 말하면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은 반전 소설로서 아주 훌륭한 작품이다. 마침내 진실이 기다리는 곳에 다다르면 작품 곳곳에 널려 있던 수 많은 복선들이 가시처럼 일어나며 이처럼 명백한 단서를 바보같이 놓치고 지나간 독자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 들어온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번역의 문제는 언제나 외국 소설을 평가하는데 있어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만, 어쨌든 이 한마디는 하고 끝내야겠다. 내가 영어로된 원서를 완벽히 이해하고 그 감상을 기가막힌 영어로 쓸 날이 오지 않는 한, 이 소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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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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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에 당신은 우선 비독서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비독서에는 네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다. 너무 당연한 얘기여서 심심할 정도다. 

둘째는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다. 제대로 읽지 않은 책은 읽지 않은 것과 같다는 생각. 역시 충분히 
납득할 만한 얘기다. 

이어지는 세 번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다. 이는 직접적으로 책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이 오로지 그 책에 대해 주워들은 경우를 말한다. 책 대신 서평을 
읽거나 광고, 소개글 등을 접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은 '분명 읽었지만 책의 내용을 잊어 버린 경우'다. 비독서의 네 가지 형태 중에서도 가장 모호하고 억울하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심지어 그것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경우라면 그것을 읽지 않은 책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책에 따르면 구분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것은 명백히 비독서에 해당된다.

책의 저자 피에르 바야르가 이렇게 비독서를 구분해 놓은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이것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물론 '차이가 없다'라는 말은 결코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책에 대한 담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말이 어려우니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두 남자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떨어진다. 한 남자는 재빨리 몸을 굴려 그것을 '피했다'. 한편 다른 남자는 그 순간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떨어지는 자동차를 '피할 수 있었다'. 어떤가? 두 사람은 전혀 다른 행위를 했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가? 이 경우 두 행위는 결과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차이가 없다'라는 것도 이처럼 결과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경우를 의미한다. 

자 여기까지 봐서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이 따위 책 읽고 싶지 않아라고 소리치기 일보직전이라는 걸 알지만 당신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간지나는 제목에 '혹'한 순간 이미 무슨 얘긴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마음의 상태가 됐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 보자. 


 

 


책을 읽지 않았건, 대충 읽었건, 혹은 누군가로부터 들었든 심지어 전혀 책을 읽지 않았든 우리가 어떤 책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일련의 인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저자와 관련된 개인적 경험일 수도 있고 책 제목에 대한 단순한 느낌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하루키의 1Q84에 대해 얘기한다고 할 때 실제로 나는 1Q84를 읽어본 적도 서평을 본 적도 
그 내용을 누군가로부터 들은것도 아니지만 1Q84를 보는 순간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릴 것이고 당연히 그 책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덧붙여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시작으로 완전히 망가졌으며 
그의 소설에는 잡다한 판타지와 야릇한 에로티시즘만이 남아 있을 뿐, 1Q84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전혀 기대할 만한 소설이 아니다'라고 신나게 씹을 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는 나의 생각이 아주 심각한 편견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며 보지도 않은 책을 싸구려로 매도해버리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내가 1Q84를 자세히 읽고, 이 책에 대한 글들을 찾아본 뒤 결국 당신의 비평에 동의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논쟁은 직장을 잃고 토론은 땅 속에 묻혀 평화롭고 조용한 세상이 도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하는가? 텍스트란 갑론을박, 끝없는 논쟁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창작의 가능성을 낳는 법이다. 그런데 당신과 내가 어설픈 합의를 보는 순간 이글이글 타오르며 폭발을 준비하던 해석의 다양성이 순식간에 멸종해 버렸다. 그런 다음 그것들은 모두 박제가 되어 아무도 찾지 않는 박물관의 지하창고에 쳐박힌다. 좀 더 올바른 행동을 한답시고 들인 노력이 오히려 텍스트가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말살시킨 셈이다. 

물론 약간이라도 주의가 깊은 독자라면 분명 내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책을 자세히 읽으면 모든 사람이 하나의 비평에 다다를 것이라는 전제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 전제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수 십가지의 반론이 떠오르는 근거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완전히 쓸모없는 얘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엔 우리가 두고두고 되새겨볼만한 의미심장한 얘기가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비평의 획일화를 지양하자는 것이다. 

책을 읽든 읽지 않든, 주워 듣고 하는 얘기든 아니면 내용을 잊어버려 횡설수설하든 이 모든 것들이 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내고 그로인해 비평의 세계가 더더욱 시끄러워질 수 있다면 그 방법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책을 자세히 읽는 것만이 비평의 무대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장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비평은 고도로 단련된 분석행위이며 그것은 단 하나의 진실을 찾아 떠나는 고행이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은 자, 
대충 읽은 자 따위는 그 여행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말해 주면, 비평이란(=책에 대해 말하는 것) 결코 선생님이 불러주는 정답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받아쓰기 시험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것의 진위를 따지고 점수를 매기는 일이 아니다. 

비평의 세계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은, 수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담론들을 비집고 그 사이에 오직 나만의 이야기를 끼워넣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보관되어 있다는 바벨의 도서관에, 영원히 반짝반짝 빛날 당신의 책 한권을 꽂아 두는 일과 같다.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아는 척'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아니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마음껏 '말해도 되는 이유'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제목만 보고 끌린 사람들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책장을 덮을 테지만, 피에르 바야르의 관점에선 당신의 그런 행동 또한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라. 심지어 이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당신이 다른 곳에 가서 이 책을 신나게 씹을지라도, 저자는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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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대해 아무거나 생각해 보자. 누군가는 우주에 먼지처럼 박혀 있는 지구에 무좀처럼 돋아나 있는 인간의 7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얼굴 모양에 대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혹은 먼지처럼 박혀 있는 지구에 무좀처럼 돋아나 있는 인간의 취향과 미각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사람따위는 관심 밖. 그대신 이 우주 어딘가에 살고 있을, 갈기 대신 도넛을 달고 다니며 꼬리에선 고압축 플라즈마를 발사, 입에선 냉면 육수를 뿜어내는 목도리 도마뱀 한 마리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말해 두지만 정해진건 없다. 생각 하나하나에 우열을 매겨 점수를 줄 생각도 없다. 그저 살랑살랑 봄바람이 얼굴을 간지르는 이 밤, 입을 헤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아무에게도 타박받지 않을 그런 시간을 가져보자는 거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낼 수도 있다.

잘생긴 개미핥기와 못생긴 사람 중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니?

못생긴 사람.

그리고는 '못생긴 사람은 성형 수술로 바뀔 수 있으니까'라고 덧붙인다. 합리적 사고에 미국식 개척정신까지 단단히 갖춘, 그래서 때때로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친구가 한 말이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재미없는 대답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요건을 두루두루 갖췄다. 친구여, 신의 축복이 영원하기를.

트위터의 글자 수 제한이 140자라는걸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럴수가!

예전엔 나도 몰랐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한 때는 뭘 모르던 멍청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뭔가 자기보다 모른다고 생각하는 인간을 만나면 가차없이 잔인해 진다.

화려한 삶과 평온한 죽음 중에 무엇이 더 나을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소문을 도대체 누가 퍼뜨리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만나게 되면 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다닌거라면, 진짜 용서하지 않겠어.

자살은 인간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설명 없이, 아무런 반론 없이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건 오로지 돈 뿐이다.

침묵은 긍정인가?

누군가는 대답할 가치가 없거나 아무리 말해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할 때 침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긍정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해 놓고는 자기 혼자 들떠 신나게 떠든다. 누군가는 끝까지 침묵으로 응대해 보지만 천박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것은 조롱을 위한 명분 밖에 되지 않는다.

물냉면은 냉면의 왕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간의 끝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나요?

고민하지 말자. 안달복달 해봐야 인간은 결국 똥으로 변신한다.
언젠가 내 소설에 쓰일 대사다.

이 글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다. 일관된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촌철의 맛도 없다. 이런 글을 쓰느니 그냥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일찍 잠 드는게 어떨까?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쳇, 그러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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