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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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동양 역사상 최초의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된 일본은 함대를 구성해 당시 무적이라 불리던 러시아 발틱 함대를 쳐부쉈다. 그리고는 제로센 비행기를 만들어 진주만을 습격했다. 이 일로 일본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있은지 70년 만의 일이다.

이걸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근대 자본주의 국가란 것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공자왈 맹자왈로는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로써 수 천년간 지배해오던 사고방식과 전통은 근대화의 쓰나미에 휩쓸려 폐허의 잔해가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만든것도 이 근대화의 쓰나미 덕분이었다.  



  



문제는 이 근대화라는 것이 사실상 서구화와 동의어라는 것이다. 근대화를 이룬답시고 받아들인 서구 문명은 동양인의 생활과 사고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이 과정에서 동양적인 것=틀린 것, 서양적인 것=옳은 것 이라는 잘못된 공식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서구 문명의 잔인성과 복잡한 세계를 단순하게만 이해하려는 성급함이 수 천년간 쌓아 온 전통과 지식 체계를 완전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이렇게 넝마가 된 '동양식 사고방식'을 다시 주목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이었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니스벳은 동양식 사고방식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다름'이란 각각의 고대 문명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미친 생태, 정치, 경제적 환경의 차이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 방법은 서양을 고대 그리스로 동양을 고대 중국으로 치환하여 비교하는 것이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단순히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의 차이로 단순화하는데는 많은 위험이 있겠지만 이 두 문명이 각각의 대륙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완전히 잘못된 비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제의 차이>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는 수 많은 도시 국가가 모여 형성된 섬나라였다. 사방이 바다. 경작지는 매우 적다. 이런 곳에서 먹고 살려면 사냥, 수렵, 목축 그리고 무역업이 적합했다. 이런 일들은 농업에 비해 사람들의 협동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유지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개인적 의사와 욕구를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이런 욕구들이 충돌했을 때는 적극적인 논쟁을 통해 해결하려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학과 수사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반면 고대 중국은 사방이 땅이었다. 경작할 땅은 차고 넘친다. 그러다 보니 고대 그리스 보다 무려 2,000년이나 먼저 농경 정착 생활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농사라는건 단순히 따져봐도 타인의 손길이 절실한 일이지만 관개 시설의 구축이라던가 재해 복구, 방지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두고 봤을 땐 중앙 권력의 통제와 지역 사회의 단결 없이는 절대로 불가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중국인에게는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논쟁을 피하고 화합을 꾀하는 것)은 단순히 예의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생활 방식이었던 것이다.


<정치의 차이>


두 나라의 정치 체제 차이는 위에서 언급한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런 차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스는 수 많은 폴리스가 독립 국가 형태로 존재하는 일종의 공통 문화권이었지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아테네가 싫은 사람은 얼마든지 다른 도시로 옮겨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죽기 전 망명 길을 떠나라는 제자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끝내 독배를 삼키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적 망명이 쉬운 사회에서는 국가 권력의 눈치를 보지않고 마음껏 발언할 수 있는 저항적 지식인들이 많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나라. 심지어 통치자라 할 지라도 도편추방제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인류 최초의 민주 공화국. 이 같은 자유의 보장은, 비록 흩어졌다 합쳐졌다 하기는 했지만 역사의 대부분을 통일된 전제국가의 지배로 채웠던 아시아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 정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형이상학적 신념 차이>

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보자. 고대 중국인들이 경제적, 정치적 활동을 하기 위해선 밖으로 주의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야 했고, 한편으로는 위로 눈을 돌려 권력자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사회적 상황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생활 습관은 '전체 맥락' 속에서 '나'를 파악하는 경향을 만들었으며 이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을 사회적 의무와 인간 관계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네트워크 속에서 파악하면, 당연히 이 우주는 독립적이고 불연속적인 원자들의 결합이 아니라 연속적인 관계들의 유기체로 인식된다. 따라서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할 때에도, 개별적인 개체들의 내부 속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 개체가 속한 전체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p.192)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은 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들의 주 산업은 농업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사람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가축을 칠 곳을 계획하고 어떤 상품을 어디에다 팔 것인지 결정할 수 있었다. 주로 서양인들의 강점으로 분류되곤하는 분석적, 논리적 사고의 발달은 바로 이런 생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적 사고의 특징은 현상을 파악함에 있어 사물 자체의 속성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년 마을을 찾아오던 학이 더이상 오지 않았을 때를 가정해 보자. 이때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인들은 '마을 사람들이 부덕한 탓', 즉 학과 인간의 정서적 관계에서 이유를 찾는 반면 서양인들은 '학의 생태'를 파악하고 '마을의 환경 변화'를 고려하여 논리적 이유를 유추해낼 것이다. 둘중 어떤 문명이 더 '과학적'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이같은 형이상학적 신념의 차이가 서양 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건 두 말할 필요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가 옳은가?>

그래서 누가 옳냐고? 이런 질문에는 역시 둘다 옳다는, 다소 맥빠지는 대답만이 정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인들이 과학이라는 불도저를 이끌고 문명의 발전에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논리적, 분석적 사고를 앞세워 과학의 초석을 세웠고,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들이 동양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똑똑한 머리로 만들어 놓은게 문명의 충돌, 종교 전쟁, 인종 청소라는 사실에 그 자신들도 질려버렸기 때문이리라. 발전은 더뎠지만 타인과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존중하는 동양인들의 사고 방식에 찌릿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동서양의 사고 방식 차이를 인종의 태생적 문제로 한계 짓지 않고 다양한 환경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그 차이에 대한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보여준다. 책 내용 또한 쉽고 흥미로운 심리 실험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글로벌 시대에 남과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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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이 된 철학교수
프랭크 맥클러스키 지음, 이종철 옮김 / 북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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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프랭크 맥클러스키는 철학과 교수다. 그는 그 곳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가르쳤다. 그 시대의 철학은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할 덕목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 

논리적으로 다듬어진 답들은 교과서에 빼곡히 적혀 있지만 아무래도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희생과 용기를 이해하는 건 머리지만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를 가로채는 건  두 팔과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 교수라면 누구나 앎과 실천을 통일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강의는 압도적인 위엄을 갖추게 될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교수가 소방관이 된데는 아마도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Fireman이라고 하면 엄청난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크롬 도금으로 번쩍이는 소방차를 보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흥분한다. 그래서인지 의용소방대원이라는 것이 끊이지 않고 모집되는 모양이다. 

의용소방대란 자원봉사의 성격이 짙지만 지자체의 보조금과 각종 기부금을 받아 월급, 보험가입, 교육 심지어 퇴직금까지 지급하는 일종의 정부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곳의 구성원들은 월급과 퇴직금을 바라고 모여든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생업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희생하는 대가로 위험한 삶을 넘겨받은 고귀한 시민들이다. 미국의 경우 1,148,850명의 소방관 중(2008년 기준) 무려 72%에 달하는 827,150명이 이렇게 바보같은 거래를 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출처: Flickr,  ricardomakyn

 

길에서 만나면 평범하고 온순해 보이는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글거리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가 뭘까? 그저 어릴적 추억을 잊지 못하는 어른들의 로망인 걸까? 아니면 Xsports마저 싫증난 사람들의 철없는 취미인 걸까? 마호팩 펄스의 소방대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호팩 펄스 출신의 부모나 형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불 냄새를 맡으며 자라왔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순간 Fireman이 되어 있었다. 이건 의무나 사명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들은 그저 되야할 것이 된 것 뿐이다.

프랭크 맥클러스키 또한 이런 운명에따라 마호팩 펄스의 소방서에 발을 디뎠다. 머시 대학의 철학 교수는 결코 지식과 실천을 통합하기 위해서라든가 존경받는 아버지, 용감한 시민이 되기 위해 Fireman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소방관이 됐고 출동한 화재 현장에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무로 돌리는 오렌지 빛 신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런데 그 순간 프랭크 맥클러스키는는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지 깨달았다. 여지껏 살아왔던 모든 시간들이 바로 그 화재 현장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소방관들은 여느때처럼 농담을 주고 받으며 피자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소방서 뒤뜰의 잔디밭에는 따스한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 속에 섞여 조용히 울려오는 가슴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자신이 왜 소방관이 됐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살다보면 때로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는 오래된 신념과 내가 진짜 바라는게 무엇인지 속삭여주던 마음의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 때 시간을 멈춰두고 지난날을 돌아본다. 이 시간 여행 속에서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되찾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더 캄캄한 미로 속에 갇히곤 한다. 탈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보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제자리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피운
불빛은 어느새 어둠의 일부가 된다. 애타게 기다려 보지만, 잊혀진 소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저자는 머리말에 이 책을 '고향으로 가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라고 썼다. 본문 중에는 '우리 모두는 올바른 길을 알기 어려운 인생에서 전기를 맞게 된다'라고도 썼다. 길을 잃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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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계의 카프카라는 말에 '혹'한 꿈의 포로 아크파크 시리즈가 도착했네요. 총 다섯권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작가는 마르크앙투안 마티외라는 프랑스 사람으로 잡지, 신문 등의 매체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 이 책의 1권 '기원'으로 1990년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 신인 작가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그 후 2004년 까지 후속권을 출간해 총 다섯 권의 '아크파크 시리즈'를 만들어 냈다고 하네요.   

 

 

그림체만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내용은 여러 철학적 주제를 블랙유머!로 풀어내고 있다고 하니 더더욱 호기심이 동합니다. 아래는 1권 '기원'의 첫 페이지 첫 대사. 

 

 

 

권위, 이성과 논리를 무너뜨리는 건 '유머'라고 믿는 제 생각과 100% 싱크로율을 보이는 명대사! 더더욱 기대되는 순간입니다.  

 

페이지 일부는 3D로 볼 수 있게 안경까지 구비되어 있네요. 아무쪼록 여러모로 기대되는 만화, '꿈의 포로 아크파크 시리즈'입니다. 리뷰는 각권 1회, 매달 한 번 씩 진행할 계획만 갖고 있네요. 부디 여유로운 한 달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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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포로 아크파크 세트 - 전5권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50,000원 → 45,0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0원(5% 적립)
2011년 05월 22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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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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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대학생들은 대체로 똑똑하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스터디를 구성해 취업을 포함, 각종 시험에 대비하며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회를 찾아 듣고 자기계발을 위해 TV와 인터넷을 끈다. 이 다음에 꼭 성공할 것 같은 대학생들을 보라. 그들은 쓸데 없는 일에 질색한다. 그들은 효율과 합리의 화신이다.

효율과 합리의 기본 규칙은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선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한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선 시험을 잘봐야 한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선 시험에 나올 법한 것들만 공부해야 한다. 고액의 쪽집게 과외!

하지만 이렇게 공부한 학생들은 고작 A라는 질문에 A'를 내놓을 뿐이다. 해답이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것은 획일화 되어있고 따분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결코 B나 C라는
답안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나마 예상했던 A가 나왔기에 망정이지 D나 Z같은 문제가 나오면 그들은 아예 대답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위 공무원이나 판검사라고 하면 웬지 모르게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정답을 내는데는 도통해 있다. 그들은 선례와 규칙을 따르는 것만큼은 귀신같이 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범주에 들지 않은 사건을 마주했을 때는 커다란 당혹감을 느낀다. 그들은 게임의 규칙에 지배당할 뿐, 결코 게임 자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대학은 어떠한가? 국가와 기업에 인재를 공급하는 최대 납품처인 대학이 실무 교육의 광풍에 휘말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회는 해당 전공을 몇 년씩 공부한 학생들이 정작 실무에는 젬병인 사실에 볼멘 소리를 해댔고, 기업 총수의 주머니 돈으로 연명하는 정치인과 교육자들은 하나같이 대학 교육의 허와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인 교육이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사원을 겨우 쓸만한 부품으로 키워내는데 1인당 몇 억씩이나 든다며 한탄한다. 언론은 이렇게 재교육에 낭비하다간 국가 기간 사업의 경쟁력이 약화될까 두렵다며 설레발을 친다. 그들이 대학에 원하는건 이런거다.

'공학인증을 받고 복수전공을 하지 않은 컴공과 졸업생 20개 추가요.' 

그래서 오늘날 잘나가는 대학이 갖춰야할 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줄줄이 뽑아내는 대량 공급처로서의 역량과 시스템이다. 공학도도 문학을 알아야 하고 경제, 경영학과 학생들이 철학과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구한말 대한민국을 말아먹었다고 비난받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된다. 

바야흐로 대학에는 교양 교육이 사라진다. 심지어 입시 교육에서 조차 기초 과학의 과목수가 줄어들고 역사와 문화가 사라진다. 세계 최고의 인재가 입학한다는 동경대조차 생물을 배우지 않은 의대생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모르는 인문대생이 있을 정도니 이 세계가 전반적인 교양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양은 단순히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르네 데카르트가 몇 년도에 태어났고 리처드 파인만이 무슨 법칙을 발견했는지 줄줄 외우는 것이 교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KBS 퀴즈 대한민국'에 출연해 오천만원의 상금을 놓고 다투는 것 외에 그다지 할 일이 없다.

교양은 보다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지식이다. 학문의 계보를 흔히 나무에 비유하는데, 그 뿌리에 해당하는게 바로 교양이다. 그래서 교양을 모르면 원리를 모르고 원리를 모르면

A의 답이 A'고 B의 답이 B'라는걸 일일이 알려줘야 한다. 원리를 모르고서는 A와 B를 통해 C를 추론해 내고 A와 C를 합해 D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못한다. 

교양의 부재가 단순히 창의력의 부재만으로 끝나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교양의 부재는 반드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오늘날 자신이 하는 일에만 고도로 집중한 나머지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보라! 
그들은 3.5파운드의 잘나빠진 뇌를 이용하여 비효율적인 관료제와 무한경쟁과 타인에대한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배금주의, 그리고 모럴해저드를 만들어냈다! 

 

 

 

이 세상에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 세계의 지배자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통 남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뚫어져라 각자의 나무만 쳐다본다. 숲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새 소통이 사라지고 시끄러운 소음만이 남으면, 하늘에서 불폭탄이 떨어져 문제가 되는 숲 전체를 날려 버린다. 

21세기에 분쟁이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해결된다.
오늘날 세계 최고라고 손꼽히는 많은 대학에서는 이런 바보들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이런 바보들이 지구를 지배한다.


P.S - 나는 최첨단 전자기기를 만드는 굴지의 회사에서 니체와 실존주의와 커트 보네거트와 찰스 디킨스에 대해 논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저 떨리는 마음으로, 매우 감명 깊게 읽은 소설 한 권을 추천하는 CEO를 단 한 명이라도 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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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해는, 이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영화가 아니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 추격자를 본 500만의 관객들이 무슨 기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의 미학적 기술적 측면에선 황해가 추격자보다 훨씬 낫다. 물론 기술적 진보는 이 영화의 제작비가 100억이 넘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데뷔했던 많은 신인감독들이 뒤이어 맡은 대작 영화에서 거의 예외없이 비틀거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나홍진 감독의 연출력은 충분히 박수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연기

하정우와 김윤석의 연기는 최고였다. 하정우는 영화 초반 구남의 감정을 다소 산만하게 표현하는 면이 있었으나 차츰 안정되가더니 후반부에 이르러선 구남과 완전히 일체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구남이 복수에 눈을 떴을때, 그 절제된 감정에서 뿜어나오는 차가운 복수에 난 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섬뜩함을 느꼈다. - 한국 영화에는 차가운 복수가 딱 두 번 있었는데, 첫째가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고 둘째가 바로 '황해'의 구남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이(이병헌 분) 동일한 슬로건을 내걸고 질주했지만 이 둘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 

김윤석의 경우 지금까지의 평가가 다소 과장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나는 황해의 면정학을 보면서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무심한 표정에서 터져나오는 광기어린 폭력과 뻔뻔함의 표현은 면정학을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그로테스크한 악당으로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연기가 배우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좋은 연기는 감독과 배우의 시너지에서 나온다. 비유하자면, 감독이 깔아 놓은 레일 위로 배우가 맹렬히 달려나가는 것이랄까? 영화에 따라 레일 위를 달리는 건 호화로운 여객차가 될 수도 있고 냄새나는 화차가 될 수도 있다.

영화 황해를 달리는 건 두 대의 폭주 기관차다. 서로 비껴 지나간듯 보이는 두 대의 기관차가 사실은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알아챌 때, 우리는 긴장감에 흠뻑 젖어 두 주먹을 꾹 쥐게 된다.   




연출


황해에서 가장 잘된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면정학의 무리가 한국의 아지트에서 내복만 입은채로 고기를 뜯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은 이 고기가 사람 고기라고 하는데, 설정 상 개고기가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개고기는 연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상처 회복에 탁월하기 때문에 이전 상황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생김새는 족발을 더 닮았다). 물론 중요한건 고기의 종류가 아니라 장면이 만들어 내는 탁월한 분위기와 효과다.

순서 상 이 장면은 구남과 면정학의 추격신 직후에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앞 시퀀스에서 완전히 연소해버린 긴장의 잔해를 추스려 남은 이야기를 대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장면의 첫 샷은 풀샷이다. 추격씬이 빽빽한 클로즈업 위주의 편집이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풀샷은 시각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한편 영화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면정학의 아지트를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풀샷을 가득채운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후줄근한 내복 차림이다. 피가 배어나온 하얀 붕대를 여기저기 감은채로 열심히 고기를 먹는다. '맞고 들어왔으니까, 오늘 하루 수고했으니까 고기나 먹고 힘내보자'는
단순무식한 생각이 잔뜩 쫄아있던 관객들의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웃음이 나올듯 말듯 미묘한 긴장이 유지되는 이유는 낡은 목조 건물이 뿜어내는 공포와 '뜯어 먹는다'는 행위의 폭력성 때문일 것이다.

분위기가 점차 이완의 국면으로 접어 들때 쯤
김태원의 부하들이 아지트를 습격한다. 또다시 분출하는 핏빛 아드레날린. 면정학이 먹다 남은 뼈다귀를 휘둘러 적들의 두개골을 깨는 순간, 장면은 터져나온 핏줄기로 그로테스크의 낙인을 찍고 폭력 미학의 정점에 올라선다.


얼핏 싱겁게만 보이는 이 장면은 사실 복잡한 계산이 들어 있는 고난도 씬이다. 만일 나홍진이 이 장면을 구남의 살해 시뮬레이션으로만 채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서스펜스는 잔잔한 물결만을 일으킬 뿐, 해일이 되어 덮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홍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뮬레이션 중간에 갑작기 김승현을 끼워 넣는다. 예기치 못한 만남. 틀어지는 계획. 지금까지 잔잔하게 꿈틀대던 장면속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진다. 우리는 구남이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지 너무나 잘 안다. 우리는 구남과 함께 이 상황을 모면할 완벽한 변명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쭈뼛쭈뼛대며 어쩔줄 모르는 구남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더더욱 미심쩍게 만든다. 그런데 이 불쌍한 살인자를 구원해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 김승현이다. 

'연변 사람이야?'

살았다. 그래 구남은 연변사람이다. 이제부터는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면 된다. 구남의 공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떨림도 멈춘다. 뒤이어 김승현은,

'춥다고 이런데 들어와 있지마'

라고 말한다.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구남과 우리의 계획은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 거
기다가 김승현은 떠나가는 구남을 불러 지갑에서 이 만원을 꺼내 주기까지한다. 돈 앞에서 머뭇거리는 구남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받어'라고 반말을 한다. 이 남자, 정말로 대범하다.




우리가 김승현에 대해 알게 되는 건 살인 사건 후 보도되는 뉴스를 통해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렇게 대범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자기를 죽이러 온 두 명의 킬러를 맨 손으로 제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바로 여기서 해소 된다. 물론 왜 김승현을 죽여야만 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 있다.

이 장면은 좋은 시나리오라는 빵 위에 탄탄한 연출력이라는 패티를 얹은 최고급 수제 햄버거다. 시나리오는 불필요한 정보를 늘어 놓아 이야기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 정보는 자신을 감춰야 할 곳에선 숨죽여 기다리다 때가 왔을 때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드러낸다. 연출은 서스펜스와 미스테리의 블록을 두 손에 움켜 쥐고 이야기를 교묘하게 조립해 나간다. 이 완벽한 미로 속에서 관객은 길을 잃은 방랑자가 된다.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나아갈 길을 찾다 보면 어느덧 뒷목까지 다가온 반전의 칼날이 단칼에 머리를 베어 버린다.







'면정학 아지트 습격 시퀀스'가 미장센, 연출, 조명 등 객관적인 측면에서 가장 훌륭한 장면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김승현 교수와 구남이 처음으로 만나는 '논현동 빌딩 씬'이다.  









갑작스런 김승현의 등장은 관객에게 강렬한 첫인상과 함께 여러 의문을 남긴다. 김승현의 정체는 뭘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죽여야 하는 걸까? 아니 딱 봐도 만만치않을 이 사람을 내가 과연 죽일 수나 있을까?

김승현이 구남을 구원하는 순간 팽팽했던 긴장감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관객이 여전히 자리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뒤이어 쏟아져 나오는 의문들이 서스펜스의 빈자리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나홍진이 추격자로 500만 관객을 찍었을 때, 나는 한국 영화계에 또 하나의 뽀록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논현동 빌딩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각을 고쳐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될성 부른 나무를 떡잎 부터 알아보는 거라면 명감독의 자질은 한 컷만 봐도 알 수 있다. 황해의 떡잎은 논현동 빌딩이다. 그러니까 김승현의 한 마디가, 나홍진의 미래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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