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는 언제 치나요?
다니엘 호프 외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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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라는건 그렇다. 언제 봐도 부담이 없고 또 재밌다. 마치 남의 일상을 몰래 엿보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도 준다. 그런데 에세이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것이 인문 교양서의 탈을 쓸 때다. 무미건조하고 전혀 흥미롭지 않은 전문 지식을 생생하고 활기 넘치는 문체로 전달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쉽게 그 무거운 문을 쉽게 열 수 있다.






'박수는 언제 치나요?'는 클래식 입문서를 표방한 에세이다. 저자 다니엘 호프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자신이 겪었던 음악 활동을 책 전체에 걸쳐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 중에는 뉴욕의 택시 기사를 만나 클래식 콘서트의 편견을 깨주게 된 일화 부터 유명 음악가들의 뒷 이야기, 시기별 음악 사조의 특징과 그 연주법까지 다양한 무게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음악가들의 뒷담화였는데, 사실 뒷담화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또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일화라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클래식 음악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 위대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그 자신도 작곡가였는데, 하루는 그 위대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곡은 짧고 가볍고 대중적으로 써라. 아무리 둔감한 사람의 귀도 간지럽게 할 수 있어야 한다.'(p.55)

너무너무 재미있는 얘기 아닌가? 오늘날 우리가 그 이름만 듣고도  머리를 쥐고 세차게 흔들 만큼 고루하고 지겨운 클래식 음악을 창조한 모차르트는 '곡은 짧고 대중적으로 쓰라'는 아버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며 음악 활동에 매진했다. 아마도 모차르트 부자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그 아버지는 모차르트에게 아이돌 가수가 되라고 당부했을 것이다. 이런걸 보면 클래식하고 고귀한 예술들도 한 때는 모두 저급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시대의 대중은 현대의 대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은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속 음악가를 고용해 파티와 음악회를 수시로 열던 부자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음악을 깊이 이해할 만큼 교양도 있었고. 하지만 이 일화로 미루어 보아 그 시대의 모든 대중들이 음악을 이해하고 있었던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확실한 건 하나다. 음악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오락 거리'였다는 것. 모차르트와 후원 귀족의 관계는 정확히 소속 가수와 소속사의 관계로 대치될 수 있다. 아마도 그 당시의 클래식 음악가들이 오늘날 우리가 부여하는 권위과 지위를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모차르트를 폄하한 것 같은데, 사실 모차르트는 엄청난 반항아였으며 단순히 고용된 음악가가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강한 에고를 지닌 진정한 아티스트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유명 작곡가들의 에고가 어느 정도 였는지, 이번엔 베토벤의 일화를 소개해 보겠다.






베토벤은 그 초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엄청나게 완고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로지 청중과 자기 자신에게만 책임을 지는 예술가의 길을 가려 했다. CD도 YouTube도 없던 그 시대에 음악은 오로지 귀족들이 여는 음악회를 통해서만 유통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귀족의 후원 없이는 어떠한 음악 활동도 불가능했다는 것. 베토벤은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예술적 자존심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를 후원하는 영주 리히노프스키가 자신을 업수이 여긴다고 느꼈는지 베토벤이 이렇게 말했다.

'영주님, 당신이 영주인 것은 우연과 출생의 덕이지만 나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 자리에 왔소. 세상에 영주는 수천이 넘지만 베토벤은 단 하나뿐이오!'(p.60)

음악가나 화가가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아티스트'가 된 것은 근대의 일이다. 절대왕정이 붕괴하고 부르주아 사회가 도래하면서 귀족의 후원을 잃게 된 '직업인'들이 저마다 살 길을 찾게 되면서 누구는 '진짜 대중'에게 팔리는 예술을 하고 누구는 고고하고 배고픈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되면서 저급 문화와 고급 문화(예술)의 영역이 분리된 것인데, 사실 이 얘기는 이전에 발터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책을 통해 말했거나 앞으로 다른 책을 통해 말할 기회가 많으므로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다.

자, 이제 다시 에세이라는 장르로 돌아가자. 에세이는 이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가득하다.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군고구마를 까먹으며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를 듣듯, 에세이에는 소소하고 유쾌한 진리가 반짝 반짝 빛나고 있다. 

에세이라는 장르는 어쩌면 요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문학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길게 읽을 시간도, 펑키한 뭔가를 찾을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 보다 손쉽게 자극과 교양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소설가들이 에세이 작가로 전향하는지도 모르고.

'박수는 언제 치나요?' 한 권을 읽고 클래식에 통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입문서란 원래 강물까지 말을 끌고 가는 것이 전부다. 이 후에 그 거대한 강물을 다 들이키든 그 속에서 헤엄일 치든 그건 전적으로 우리의 의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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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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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지칭하는 호모 어쩌구 하는 단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호모 사피엔스'일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사람. 사실 이렇게 인간을 정의하려는 노력은 인간이 자연계의 다른 것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일반 생물과 다른 점은 과연 무엇인가?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건가? 직립보행을 한다는 건가? 아니면 예술을 할 줄 안다는 건가? 수 많은 궁리 끝에 도달한 답은 결국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이 이성에 대한 강력한 믿음 덕분에 우리 인간은 비로소 육체적 동물성의 한계를 벗어나 이 세상의 특이종으로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38년, 네덜란드 출신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름하여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란 것이다.

 



역사학자 하위징아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당연하게도 역사적 방법을 취한다. 인간이 언어를 발견하고, 문명을 일으키고, 집단을 형성하고, 법과 체계를 세워 국가를 만들고, 심지어 전쟁을 일삼고 기타 등등 오늘날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행동들이본질적으로 놀이에 다름 아니었으며 바로 놀이로서 발전해 왔다는 것, 하위징아는 이 모든 것들에 하나하나 구체적 예시를 들어가면서 자신의 독특한 주장해 펼쳐 나간다. 


그렇다면 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문화를 놀이로 설명하기 위해 우선 놀이를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 놀이의 보편적 특징을 언급한다. 그것은 아마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놀이에 의무나 강제적 명령이 부여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무언가를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놀이의 필요라는 것은 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정비례하며'(42p) 이것은 놀이가 그 자체로서 목적이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놀이는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다. 놀이는 일상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놀이가 만들어낸 고유의 세계로 들어가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왜 어느 순간 현실 세계를 잊고 그 안에 완전히 몰입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잘 설명해주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놀이는 일단 시작되면 어느 순간 종료되야 한다. 하지만 이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놀이는 후손에게 물려져 전통이 되며 따라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특성을 갖는다. 한편 놀이는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독립된 공간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스포츠 경기장, 무대, 도박장 등의 장소가 생활 세계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어 온 것은 아마도 일상 세계와 놀이터를 엄격하게 구분지음으로써 더 강력한 몰입 효과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넷째,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다. 규칙은 놀이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규칙이 없는 놀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놀이에 참여한 어떤 사람이라도 그 규칙을 어기는 순간 놀이는 중단된다. 예를 들어 얼음땡의 술래가 된 사람이 '얼음'을 외친 플레이어를 잡고 끝까지 술래가 되길 종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참가자 모두가 합의한 규칙을 누군가가 어기는 순간 몰입은 중단되며 참가자들은 놀이의 세계로부터 강제로 꺼내져 현실 세계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렇게 정의된 놀이를 어떻게 스포츠, 문학, 심지어 법과 정치에까지 연관지을 수 있는 의아할 것이다. 이 글에서 그 사례를 모두 언급할 수는 없으니 가장 관계가 없어 보이는 법률의 경우를 따져 보자.

소송은 확실히 놀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소송 당사자들은 법원이라는 독립된 공간에서 할당된 시간 내에 논박을 주고 받는다. 원래는 평범한 회사원이거나 가게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이 곳에선 피고나 원고라는 배역을 맡아 변호사 또는 검사와 한 팀을 이룬다. 소송 과정에서 드러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규칙은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소송이 과연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있는가? 광장에 모여 논쟁을 주고 받고 그것을 일종의 놀이로 유희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소송이 놀이라는 주장이 일면 타당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원고와 피고들은 분쟁을 해결하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구체적인 이득을 얻고자 한다. 현대의 소송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그 자체로서의 목적되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위징아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고대에 놀이의 특성을 지니고 있던 행위들이 현대로 오면서 점차 놀이적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물론 이정도의 설명은 충분치 않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위징아는 문화가 놀이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려 할 뿐 왜 현대에 이르러 그것이 놀이의 특성을 잃게 됐는지에 대한 고찰은 진행하지 않고 있다.

내 보기에 그 이유는 아마 이성에 의한 이성을 위한 이성의 세계였던 근대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성이란 강력한 합목적성을 추구하며 언제나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사실만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아무런 목적없이 행위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는 놀이와 각종 문화 현상을 연관 짓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법률이나 정치같은 진지하고 엄숙한 사회 현상이 바로 근대에 이르러 급속도로 발전하며 그 전문성과 체계성을 갖췄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한 사항이다. 

이 책 '호모 루덴스'가 무목적성을 기반으로 하는 '놀이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는 인간' 을 공격하며 근대 사회의 맹점을 비판했다면 난 이 책을 인생의 책으로 꼽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공백은 나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어쩌면 그 공백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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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1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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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코드 (양장) -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숨어 있는 언어
찰스 펫졸드 지음, 김현규 옮김 / 인사이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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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리뷰는 이 책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언제나 기원이 문제였다. 이것은 어디서 온 것인가? 저것은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 그것은 왜 움직이는가? 전광석화처럼 달려 나가는 생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건 언제나 이런 뿌리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기원을 헤아리는 것은 꼭 불 꺼진 방에서 스위치를 찾는 것과 같다. 이리저리 부딪히며 가까스로 스위치를 켜 보면 그 안에 또 다른 문이 서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 다시 어두컴컴한 방에서의 술래잡기가 되풀이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어린아이의 질문처럼, 기원은 긴 꼬리를 휘날릴 뿐 좀처럼 본체를 보여주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냐고 묻는 말에 나는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이라고. 머리 속에 '왜?'가 떠오른 순간 이전의 고요했던 날들은 완전히 박살나 버린다. 평범했던 것들이 더 이상 평범해 보이지 않고 당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해 지지 않을 때 뇌 속에 쌓인 두터운 껍질들이 일어나며 기원으로 향하는 미로의 문을 연다. 유사이래 이 문에 들어선 사람들은 대개 철학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컴퓨터의 기원을 밝히는 이 책 'CODE'를 철학서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단적인 증거로 저자 찰스 펫졸드는 프로그래머다(나는 대학 시절 윈도우 프로그래밍의 교재로 찰스 펫졸드의 책을 봤다!). 철학자와는 평생 말 한 번 섞을 것 같지 않을 사람. 그런데 이 책이 펼쳐 보이는 컴퓨터의 역사에는 예의 첨단 과학이 유발하는 지끈지끈한 두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낙타의 등에서 산을 보고 송아지의 눈에서 바다를 보듯이, 이 Bit의 오딧세이에는 철학적 사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컴퓨터의 세계는 오로지 0과 1만으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하필 0과 1일까. A와 B면 안되는 걸까? 아니 좀 더 깊이 내려가서 왜 항상 양자택일일까? 일자무식, 단순한 흑백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 3의 무엇에는 컴퓨터를 못 견디게 할 만큼 어떤 악의적 개념이 숨어있단 말인가? 그런데 신기한건 컴퓨터는 오로지 0과 1만 가지고도 사과와 바나나와 원숭이와 거기다가 그 엉덩이가 빨갛다는 사실까지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런걸 보면 '음양론'이 떠오른다. 음과 양이 어우러져 태극을 이루고 그 태극이 온 세상 만물을 생성하듯이 컴퓨터는 0과 1로 우주를 만들어낸다. 지극히 현대적인, 게다가 지극히 서양적이기까지 한 이 사물의 원리가 어쩜 이리 동양 사상의 정수를 쏙 빼닮았는지... 어쩌면 컴퓨터는 서구 문명 사회가 음양론의 정수를 깨달아 만들어낸, 그 형이하학적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0과 1이 음양론의 그림자라면 아스키코드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편린이다. 이쯤되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 컴퓨터의 언어와 그 의미는 철저하게 임의로 결합한다. 예를들어 알파벳 소문자 'a'는 아스키 코드로 '97' 이진수로 표현하면 '1100001'이 된다.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1100001에는 'a'라는 의미를 잉태할 어떠한 썸씽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니피앙이 시니피에의 바다에서 그 하나를 건져 내듯이 컴파일러는 이진수의 낚시대로 우리말의 의미를 낚고 있는 것이다. 

한편 컴퓨터 진보의 역사와 이를 위한 인간의 집념에선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창조된다'는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의 미래가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언젠가 컴퓨터가 너무너무 발전해 컴퓨터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정하고 그들 스스로가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면, 기술 문명의 발전과 그에 따른 온갖 가치들을 노동의 산물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 이쯤보면 찰스 펫졸드의 'CODE'는 완전히 인문서다. 그것도 철학에 언어학에 경제학까지 잡탕한 종합 인문서말이다. 하지만 고백할게 있다. 
사실 이 책에서 이런 사색을 이끌어 내는건 완전히 자의적이다. 아니 철저히 주관적이다. 아니아니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주관적이고 심지어 대단히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개 눈에 똥만 보였다고 밖에...

이 책이 철학과 사상을 컴퓨터의 역사로 은유한 출판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메타적인 철학서라고 설명하는 건 사기다. 하지만 어떻하냐고! 0과 1에서 출발해 논리 회로를(AND, OR, NOR, NAND...) 만들고 그 논리 회로를 좁은 공간에 직접하기 위해 반도체를 만들고 반도체를 모아 CPU를 만들고 그 CPU로 컴퓨터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내가 본 건 음양과 소쉬르와 아담 스미스 인걸. 

하여튼 기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이렇게 두서 없다. 제대로 된 출구를 찾았는가 하면 어김없이 딴 세상이다. 자 주절주절 이야기를 딴 데로 돌리는 건 무안하다는 증거. 더 이상 썼다간 매 맞을까 두려우니 오늘 리뷰는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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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연 2012-02-28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한깨짱 2012-02-29 21:20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책이긴 한데, 컴퓨터공학 베이스가 없으면 많이 어렵긴 하더라구요.
 
결혼.여름 알베르 카뮈 전집 1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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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산문집이다. 대학 시절 이방인을 읽은 이후로 카뮈를 읽은 적이 없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재회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재회의 낯설음은 으레 그렇듯 둘 사이에 패인 시간의 공백때문이 아니었다.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간 순간, 나는 이 낯설음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 내가 읽고 있는 '결혼, 여름'의 카뮈는 내가 알고 있던 '이방인'의 카뮈가 아니었다.

카뮈의 산문은 시적이었다. 더 이상의 수식은 이 춤추듯 넘실대는 에세이의 고귀한 리듬을 해칠것만 같아 적지 않는다. 이방인의 카뮈만을 알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분명히 말해두고 싶다. 카뮈에게는 두 개의 영혼이 있다. 하나의 영혼은 숨막히는 열기를 호흡하며 꺼질듯 말듯 깜빡이는 전등 아래서, 밤새 위대한 소설의 바위를 굴려 나간다. 또 하나의 영혼은 시원한 바다를 가르며 힘차게 수영한 뒤 따뜻하게 달궈진 모래 사장 위로 기어 올라가 기분 좋은 태양 빛을 만끽한다. 카뮈의 소설이 사막에서 나온다면 그의 에세이는 바다에서 나온다.




기억을 되살려 보자.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러야 했던 뫼르소에게선 팍팍하고 건조한, 그래서 씹으면 씹을 수록 텁텁한 맛이 났다. 부조리는 사막의 모래 바람에 수분기를 몽땅 뺏겨 파삭파삭 말라버린 미이라 같았다. 티파사를 노래하는 카뮈의 옆엔 윤기 넘치는 흑발의 여인이 누워있다. 그 우아함이 파도를 차고 오르는 힘센 펄떡 거림과 결합한다. 탱탱하게 솟아오른 피부를 태양이 어루만지면 살갗은 보기 좋은 구리빛으로 물든다. 울긋불긋 물든 꽃들은 축복을 내리고, 그 향기에 취해 눈을 뜨면 비로소 헤아릴 수 없는 자유가 온 몸을 가득 채운다.

카뮈는 알제의 오랑을, 제밀라를, 티파사를 여행하며 돌과 태양과 바람과 폐허가 된 역사를 얘기한다. 이야기를 읽는대는 마음의 준비도 상상도 필요 없다. 그저 벅차 오르는 문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때로는 누렇게 물든 나른함이, 때로는 입안가득 넘쳐 흐르는 과육이 향기가, 마치 축복처럼 다가온다.

문장은 상당한 만연체다. 카뮈 자신도 그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광 앞에서는 차마 문장을 끊을 수 없었나 보다. 첫 단어를 읽고 중간쯤 지나다 보면 어느새 문장에 흠뻑 취해 비틀비틀 단어 사이를 오간다.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글에 취해 신나게 춤을 추고 나면 어느새 책 한 권이 끝나있다. 찌릿찌릿 가볍게 떨리는 몸의 여운은 기분 좋은 숙취다.

난생 처음 이런 에세이를 읽은 것 같다. 이 한권의 책으로 카뮈를 전독(全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저 부조리의 화신 카뮈를 재인식하기에는 이만한 책이 없는 셈이다. 카뮈를 읽고 싶지만 시지프스의 돌덩이도, 뫼르소의 태양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대신에 이 향기로운 술 한 잔을 따라 마시는 건 어떨까? 

카뮈의 '결혼,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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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맨 프로젝트 - 신자유주의를 농락하는 유쾌한 전략
앤디 비클바움.마이크 버나노.밥 스펀크마이어 지음, 정인환 옮김 / 빨간머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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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으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들어야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고 나니 아직도 한참은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 앤디 비클바움과 마이크 버나노는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좀 남다른 점이 있다면 '신자유주의'를 싫어했다는 것 정도? 그런데 그 증오가 생각보다 대단했었나 보다. 어쩌면 범죄가 될 수도 있는, WTO에 그레이트 빅 엿을 날리는 작업 '예스맨 프로젝트'를 시작해 버렸으니까. 그것도 앞날이 창창하던 젊은 시절에 말이다. 이런걸 보면 역시 서양놈들은 여간내기가 아니라니까.

앤디 비클바움과 마이크 버나노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신과 증오를 어떻게 표현해 낼지 궁리하다 우연히 GATT.org 도메인을 선물 받는다. GATT는 1944년에 창설된 무역협정으로 1995년 WTO가 대체하기 이전까지 세계 무역을 관장하던 협정인데, 다행인건(?) WTO의 대체 이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GATT와 WTO를 혼동한다는 사실이었다. 청년들은 여기서 빛을 보았다. 그들은 WTO의 홈페이지를 그대로 카피해 GATT.org 사이트를 만들었고 contact 페이지에 자기의 이메일을 연결해 놨다. 그들은 이 황당한 가짜가 과연 세계 유수의 엘리트들을 속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이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국제법률연구센터가 국제 무역을 주제로 강연을 요청해 온 것이다. 





앤디는 일정상 세미나에 참석할 수 없는 WTO 사무총장 마이크 무어를 대신해 강연을 맡은 앤드리아스 비클바우어 박사로 변신했다. 세미나가 열리는 오스트리아의 5성급 호텔에는 세계 유수의 법률회사 소속 국제무역 담당 변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앤디는 이 사람들을 앞에 두고 이 세계에 만연한 '자유무역'을 가로 막는 방해물들이 무엇인지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정 무역을 옹호하는 유럽 연합과 다국적 기업의 자본 침식을 막는 개별 국가의 고유 문화, 그리고 각국의 의회였다. 

앤디는 특히 선거제도의 개혁을 통해 각국의 의회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방법으로는 시민이 자신의 투표권을 파는 투표권 경매 시스템이 제시되었는데, 그 근거가 상당히 그럴싸 하다. 설명을 들어보자.

미국의 경우 기업은 정치인을 후원한다. 그 돈은 정치인의 홍보 대행업체를 통해 방송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방송국은 해당 정치인에 대한 정보를 유권자에게 제공한다. 유권자는 이 정보를 받아 투표를 하고 이렇게 당선된 정치인은 자신을 후원해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 전통적으로 군수 업체의 지원을 받은 공화당의 부시 부자가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기업의 이익을 챙겨주는 것 처럼 말이다. 

앤디의 투표권 경매는 이 단계를 좀 더 깔끔하게 만들자는 시도다. 시민이 투표권 경매 사이트에 자신의 투표권을 팔면 기업이 그것을 구매하여 자신이 원하는 정치인에게 투표를 한다. 짜잔!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민주주의가 아주아주 깔끔해 진 것 같지 않나?

앤디는 자신의 정신나간 강의가 시작되면 성난 관중석으로부터 토마토와 계란 세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신고를 받고 출동한 오스트리아 경찰에 의해 구치소로 연행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연이 끝날때까지 변란은 없었다. 사람들은 앤디의 말을 경청했고 강연을 마치고 내려오는 앤디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잘츠부르크에서의 성공을 만끽하기도 전에 연거푸 강연 문의가 들어왔다. 앤디는 세계를 돌며 강연을 했고 심지어 세계적인 방송국의 TV 토론회에 참가해 WTO를 대변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앤디는 노예 제도를 옹호하거나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을 참수해야 한다는 등 반인륜적이고 몰상식한 주장을 되풀이 했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도, 어떤 지식인들도 앤디의 말에 반박을 하거나 그 정체를 의심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예스맨들은 부와 권력을 거머쥔 엘리트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또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강연에 쏟아지는 박수 세례로 확인해 나갔다. 이건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길 원했던 그들은 좀 더 파격적인 강연 내용으로 뉴욕주립대를 찾았다. 앤디는 그곳에서 '굶주림은 빈곤층들이 열악한 근무 환경을 참게 만드는 특효약'이며 '외과 수술을 통해 빈곤층의 음식 섭취를 줄여야'하며 굶주림이 진정 문제라면 '똥을 정제하여 빈곤층의 식량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연은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은 분노의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WTO를 KO 시키자!'는 구호를 흔들어댔다.

2002년 5월 21일, WTO 개발경제연구부의 '킨니스렁 스프라트'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회계사협회 오찬 강연에서 WTO가 전세계에 가난을 유포했으며 부자 나라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제 3세계를 유린해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에 WTO는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무역 체계를 연구하는 단체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밝혔다. 킨니스렁 스프라트 박사가 강연을 마치자 오찬장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박수 갈채로 가득찼다. 킨니스렁 스프라트 박사, 아니 앤디 비클바움은 아직도 이 세계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느끼며 예스맨 프로젝트의 마지막 강연을 마쳤다. 



                                                                      <앤디 비클바움>


예스맨 프로젝트의 활약상을 쭉 보고나니 문득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패기 없이 살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입시에 매달리고 학점에 무릎 꿇고 기업에 머리를 조아려 하루하루 젊음을 소진하는 우리들은 과연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 걸까?

오늘날 이 땅의 젊은이들은 좋은 세상을 만드려는 노력보다는 이미 썩을대로 썩어버린 기존의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경주한다.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현실의 무게 아래선 오로지 한 방향을 향해 달릴 수 밖에 없으니까. 교활한 세상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 언제나 실패에 대한 협박과 공포로 우리들의 눈을 가려 버린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일,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 이제 이런 일들은 너무나도 따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 따분한 레이스에 그레이트 빅 엿을 날리는 일은 한가지 뿐이다. 바로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뒤로 돌아 달리는 것. 

예스맨 프로젝트는 이같은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큰 용기가 됐다. 때마침 2012년이 시작되는 지금, 올 한해는 더욱 더 미친놈이되서 이 세상에 큰 당혹감과 재미를 선사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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