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섬 - 19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다른우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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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프랑스어권 소설가 중에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역시 아멜리 노통이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이 여자는 벨기에 사람이다. 그녀는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를 프랑스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한다. 아멜리 노통은 확실히 자극과 개성을 추구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푹 빠져들만한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갈증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멜리 노통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보바리 부인'(플로베르 작)을 만나고 '비계 덩어리'(모파상 작, '여자의 일생'이라는 소설이 더 유명하다. 하지만 이 남자의 최고작은 뭐니뭐니해도 '비계 덩어리')와 조우한다.


하지만 당신이 아직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당신은 프랑스 문학사의 거대한 기둥 하나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름에서 부터 확연한 아이덴티티가 느껴지는 이 남자, '아나톨 프랑스'다.





1844년, 아나톨 프랑스는 태어났다. 본명은 '자크 아나톨 프랑수와 티보'(Jacques Anatole François Thibault). 센 강 기슭에서 조그만 서점을 운영했던 아버지 탓에 어릴 적 부터 책과 친했다. 아나톨 프랑스는 '황금 시집'으로 데뷔한 이래 꾸준히 평론과 소설을 썼고 그 당시 사람치고는 드물게 오래 살며 1896년는 아카데미 회원으로, 1921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수상작은 바로 이 소설 '펭귄의 섬'이다.





노벨상 수상자, 아카데미 회원같은 권위적 색채와는 어울리지 않게 '펭귄의 섬'은 아주 유머러스하다. 마치 개그맨의 만담을 보는 것 같은 친근함이 있지만 사회와 역사를 향한 풍자의 칼날은 섬뜩하리만치 날카롭고 정확하다. 


간단한 줄거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평생을 수도원에서 보낸 '성 마엘'은 어느날 자기 앞에 나타난 돌구유를 보고 그것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평생동안 수도원을 나가 본 적이 없는 성자가 여행을 떠난다. 성 마엘은 이후 37년동안 세계를 돌며 218개의 교회와 74개의 수도원을 세운다. 여전히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던 어느날 성 마엘은 자신이 처음으로 세례를 내린 외디크 섬의 주민들이 또 다시 우상을 숭배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첫 복음 전파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낀 마엘은 또 다시 돌 구유를 타고 여행을 떠나지만, 늘 그렇듯 영웅의 여행에는 시련이 따르기 마련. 악마의 유혹에 빠진 마엘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순수한 돌구유에 돛과 키를 달게 된다. 노인은 남쪽으로 키를 잡고 항해를 시작했지만 이윽고 강한 물살에 의해 남서쪽으로 떠밀려 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강한 바람이 불자 돌구유는 통제 불능, 성스런 여행은 타락한 의지와 함께 속절없이 얼음의 땅을 향하게 되었다.


갖은 고초 끝에 거대한 섬에 도착한 마엘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한다. 그 땅에는 대학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처음 본 이방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 들일만큼 온순하고 선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감동한 마엘은 그곳의 주민들에게 세례를 내려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러자 천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성 마엘이 사람으로 착각한 이들이 봄철을 맞아 짝짓기를 하러 몰려든 펭귄이었던 것이다. 지독한 근시와 여행의 고초는 이 노인으로 하여금 펭귄을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례를 인정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성인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한다. 성인들은 세례의 효험이 형식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내용에서 나오느냐를 두고 두패로 갈려 싸웠다. 한 때 질투와 시기의 대명사로 유대인에게 저주와 멸망을 안겨줬던 신이었지만, 다가오는 세대에 '선한 의지'로 부각되길 원했던 신은 그 자애로운 마음을 발동하여 펭귄을 사람으로 변신 시킬 것을 명한다. 그리하여 펭귄은 사람이 되었고 사람은 역사를 만들었다. 





줄거리만 봐도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명으로 사람이 된 펭귄은 이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간의 역사를 되풀이 하며 사유 재산과 토지의 경계를 만들고 전쟁과 살육을 발명한다. 아나톨 프랑스는 이 펭귄의 역사를 프랑스의 역사에(신화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1:1로 대입하며 날카로운 풍자를 전개하는데, 겉으로는 프랑스의 역사에 국한된 것으로 보이는 이 스케일은 사실상 인류의 역사로 확대한다 하더라도 모자랄 것이 없을 만큼 깊은 사유로 독자를 압도한다. 


보통 노벨상 수상 작가의 책들은 뭔가 멜랑콜리하고 어려운 맛이 있는데, '펭귄의 섬'은 정말 정말 재밌다. 하나도 어렵지 않다. 현대의 작가 중 이와 유사한 소설가를 찾자면 '커트 보네거트'가 있을 것이다. 둘은 모두 휴머니스트로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권위와 폭력에 거부한 성인들이었다.


종교? 그거 그냥 사람이 만든거 아니야? 나의 신을 믿어라 믿지 않겠다로 처참한 살육의 파티가 벌어진다면, 그따위 것 그냥 사라져 버리는게 우리를 위해 더 나은게 아닐까? 그렇다면 예술은? 미에 명확한 기준이 존재한다면 시대마다 천차만별로 변화하는 예술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대의 생각은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이 진실의 권위는 독특한 실험과 창의를 발현하는 예술가들을 질식시키지. 진실, 정의? 그런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게 나을지도 몰라. 아무리 선한 의지도 진실이 되는 순간, 정의가 되는 순간 폭력을 잉태하니까.


나는 아나톨 프랑스가 남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지적 회의주의와 신랄한 비꼬기로 가득찬 그의 소설은 태어날 때 부터 반항심으로 가득차 있던 내 영혼과 깊은 교감을 나누며 마음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산 사람하고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아나톨 프랑스는, 매일 매일 역겨운 권위에 피투성이가 되는 내 마음에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그를 만난건 정말 행운이다.


p.s -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은 번역본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군사 독재와 그 정신을 이어 받은 정치 세력이 이 땅에 단단한 보수적 권위의 성벽을 세운 탓이리라. 이처럼 비상식적인 사회를 이토록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뭘까? 나는 '펭귄의 섬'의 문구를 인용해 이를 설명하려 한다. 


'정부의 한결같은 조처도 축복받은 한국 사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본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정부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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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변 세계문학의 숲 1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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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다크나이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라쇼몽'의 주인공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후자에 속했다. 22살에 데뷔해 13년간 불꽃같이 펜을 놀리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근대 문학의 영웅.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은 '아쿠타카와 상'이다. 내가 그의 환생이라고 여길정도로 진정 사랑한 '다자이 오사무'조차 평생 이 상을 받지 못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자살을 했지만, 영웅이 되지는 못했다. 이게 모두 '아쿠타카와 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첫인상은 '스마트'다. 문장이 깔끔하다. 주절주절 하지 않는다. 지저분한 풍자나 비겁한 자조가 없다. 아주아주 자신감이 넘치는 젊은이다. 이야기의 소재도 예상 밖이었다. 캇파(일본의 정령. 개구리를 닮은 정령), 불륜, 창작의 괴로움,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코, 참마 죽 등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주제는 진지하고 깊이가 있지만 매우 경쾌하다. 예의 대작가라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어깨에 힘을 팍 준 위압감이 없다. 기본적으로 굉장히 모던하다. 현대 문학의 아버지란 얘기는 괜히 하는게 아니었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은 마치 80년대 '브라운(Brown)'의 전자 제품 같은 느낌이 든다. 아주 세련되고 아름다우며 군더더기가 없는 디자인의 정수. 신기한건 그의 외모 또한 대단히 세련됐다는 사실.





읽는 순간 감이 오는 책이 있다. 그 사람의 전작을 모조리 독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기분. 게다가 단편 작가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편 한편, 시간이 나는 대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편안한 이 느낌. 


단편집 '지옥변'에서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게사와 모리코'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불륜 관계에 있는 두 남녀의 은밀한 마음속 정경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둘은 사랑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사랑한다. 오로지 육체적 갈망으로 여자를 품었다고 고백하지만 그 여자를 위해 여자의 남편을 죽이려는 남자. 그 남자에 의해 더럽혀지고 무시당하고 미움당하면서도 '남편을 죽여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영혼의 위로를 느끼는 여자. 이 모든 장면들이 환하게 뜬 달빛 아래에서 생생한 색채로 살아난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두 남여의 깊고 깊은 마음 속까지 내려가 반짝이는 진주 한알을 물고 올라오는 날렵한 물고기 같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면 35살에 죽는 것 따위,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게 없지 않은가.


더 놀라운건 이 소설의 구성이다. 모리토(남자)의 독백만을 듣고선 별볼일 없던 소설이 게사(여자)의 심리와 교차하는 순간 아차 싶은 반전의 충격이 전해온다. 역시 여자의 속마음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인건가? 모리토는 게사를 마음껏 능욕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녀를 위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건 당신이야. 어쩌면 남자란 , 여자의 속임수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평생 그걸 깨닫지 못하는 멍청한 동물인지도 모르겠군.


구로사와 아키라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두 단편 '덤불속'과 '라쇼몬'을 결합해 영화 '라쇼몬'을 찍은 건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둘 모두 세련의 대가. 모던의 극치. 우리가 1950년대에 제작된 이 영화를 보면서도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주제나 형식이 극도로 세련됐기 때문이다. 60년 전의 작품을 마치 어제 만들어진 것 같이 보여주는 능력. 세상이 변했다고 허세를 부려봐야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공사의 디자인에 큰 박수를 쳐주고 싶다. '지옥변'이란 제목과 무서울만큼 어울리는 파격적 디자인이다. 양복을 입은 남자와 기모노를 입은 여자. 그 대립에서 오는 묘한 긴장감. 세기말에 피어오른 신(新)과 구(舊)의 대결.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뒤덮은 짙은 어둠. 범인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어둠 뿐이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이 어둠을 헤치고 심연을 탐험한다. 그 속에서 발견하는 섬뜩한 진실. 그의 작가적 역량을 진심으로 경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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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6-04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라는 물건은 여자의 속임수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평생 그걸 깨닫지 못하는 멍청한 동물이라는 문장이 저도 모르게 웃음 짓게 만드네요^^^ 그럴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은 남자입장에서도 비슷하지 않을 까요. 그렇게 살다가 정들어가며 사는것이 인생이고, 그렇게 살아가야 버텨지는게 우리 인간이라는 물건의 숙명이지요.

한깨짱 2012-06-08 13:32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렇게 살다가 정들어가는게 인생이지요. 산다는건 버티는거고 그 버팀의 원천은 역시 정인가요? 남자와 여자 모두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전 참 솔직한 편인데, 사람들은 진실을 추구하면서도 실제 그것과 맞닥뜨리면 질색을 하더라고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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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중권이 진영의 불분명함과 무한의 딴지 걸기로 네티즌의 뭇매를 맞을 때도 나는 그를 존경했다. 그가 쉽게 쓰기의 달인이었기에. 사람이 모든게 완벽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그렇게 얘기하는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진중권이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그를 재수없고 짜증나는 똘똘이 스머프쯤으로 여긴다. 미치겠네, 미학 오딧세이나 서양미술사를 한 번 읽어 보라고. 잘난척하느라 집어든 곰브리치나 에코의 책 보단 훨씬 재밌을 테니까.





그런데 이 책, 쉽지 않다. 진중권이 한계를 드러낸건가? 그건 아니다.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런 문제가 뭔가? 현대 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양식'은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수십 년간 지속되는 안정적인 조형의 형식이었다'(5p)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양식은 여름철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격동의 마술을 연출해 낸다. '짧은 시간 존속하다가 곧 다른 것들로 교체되는 복수의 양식들의 어지로운 겅존, 그것이 바로 '모던'이라는 시대의 특징'(5p)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현대 미술은 너무나 복잡하다. 어지럽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구분지을 수 없다. 폭발할듯 피어났다 안개와 같이 흩어진다. 뿐만 아니라 양식에 철학이 포함된다. 현대 미술은 더 이상 외부 세계를 묘사하길 거부했다. 미술은 더 이상 자연의 모조품을 생산해내는 조악한 공장이 아니다. 그런데 시각적 예술이 무언가를 묘사하길 그친다면 그것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감정을 그리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색을 만들어 낸다. 공간을 그린다. 관념을 그린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위대한 예술을 행위한다.





'20세기에 등장한 예술운동은 저마다 선언과 강령을 발표하며 정당운동을 방불케 하는 정치적 수사를 구사하곤 했다'고 한다. 이것이 현대 미술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20세기에 이르러 미술가들은 원하나 네모 하나 또는 모조리 검게 칠한 캔버스를 들고 나타나 이것이 회화의 근원이라고 우긴다. 우기기 위해선 철학이 필요하다. 보잘것없는 캔버스를 가리기 위해 수사를 입혀야 한다. 그래서 언뜻 보면 현대 미술은 그저 말빨만 앞세운 멍청이들의 놀이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해도 별 도리가 없다. 하지만 20세기 예술가들의, 과거와 철저히 결별하려는 그 눈물겨운 투쟁을 보고 있으면 그것을 감히 말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 어지간히 회의적인 내게도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예전의 예술이 더 쉬웠다. 그저 손재주를 가진 젊은이가 공방에 들어가 몇년 씩 수업을 쌓는다. 그리고 독립해 화가가 된다. 그당시의 예술혼은 우리가 생각하는것 만큼 고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기 기술'에 대한 장인 정신과 동의어였다. 그들은 기술자였다. 결코 철학자가 될 필요가 없었다. 보이는 그대로 그리면 됐고 누가 더 똑같이 그렸는가로 평가를 받았다. 귀족과 왕궁의 후원을 받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직업인이었지 예술인이 아니었다. 화가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20세기에 화가들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다. 시민은 선악과를 따 먹었고 비로소 '자아'를 알게 됐으며 여가를 가졌고 그것을 채워줄 뭔가를 갈망했다. 화가들은 대규모 스포츠와 박람회와 사진과 싸워야 했다. 무지한 부르주아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 안에서 다른 누군가와도 다른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야만 했다. 옆에서 누군가 검은 사각형 하나를 그려 놓고 그것이 회화의 근원이라고 얘기한다. 예술계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 사각형을 창조한 예술가는 화려한 수사를 갖고 있다. 나조차도(당시의 미술가) 쭉 듣고 있자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마돈나나 동산을 똑같이 베껴 그리며 만족하겠다고? 꿈도 야무지지.





현대 미술은 파괴와 저항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안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아갔다. 체제를 거부했다. 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에 빗장을 건 것은 파시즘과 나치즘, 전체주의적 코뮤니즘이었다. 그들은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튀어나온 가지들을 쳐내야 했다. 자유? 반항? 상상력? 그것은 반체제다. 탄압의 정도는 그것의 위대함과 비례한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사람들은 상상력을 두려워 한다. 상상력은 생각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생각이 살아있는 한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 


과거의 예술이 저항적이었다면 그것은 예술계에 대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주류 미술에 대한 반감. 미술 권력에 대한 항거. 아주 아주 협소한 토라짐그러나 현대 미술의 분노 사회를 향한다. 정치에 항거하고 통치에 반대하는 사상의 향연. 풍부한 상상력과 저항의 정신이 예술에 깃들어 있고, 그것이 대중과 결합하는 날 그들만의 제국은 무너져 버린다.


20세기 미술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영적이고 숭고하며 신비하고 난해하다. 나는 그 난해함으로 인해 현대 미술은 그 소재와 주제를 떠나 어떻게 해석되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라 여겼다. 검은 사각형 안에서 지옥을 보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보든 그건 전적으로 나의 자유다. 그것이 현대 미술이니까. 아! 나의 이런 생각은 얼마나 순진했던가. 현대 미술의 이해를 위해선 엄청나게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머리가 모조리 뒤집혀 버리는 고통의 순간들. 


이 책을 보는 내내 나는 거대한 철학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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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 케이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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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어 치웠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 없는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주 원초적인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


사실 실존이니 진실이니, 주체니 자아니하는 온갖 위대한 사상으로는 영혼의 안식을 찾을 수 없다. 그런것들은 인생을 헝클어뜨리기 위해 발명된 것이다. 당신의 삶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지금까지 믿어왔던 게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해? 사상은 의문과 고민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사악한 용이다. 이 용은 우리가 현실에 안주해 휴식과 평안을 얻는 걸 원하지 않는다. 이 용의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가 의지하던 세상은 흐물흐물 무너지다가 마침내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절대적 암흑으로 변해버린다. 


하지만 이야기는 정반대다. 이야기는 휴식을 준다. 어린 시절 우리는 아련히 들려오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우리는 이야기 속에, 우리와 똑 닮은 사람과 사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견고한 증거가 된다.





소네 케이스케의 단편집 '코'에는 일본 현대 소설이라면 예의 등장하는 엽기가 존재한다. 트라우마, 정신병, 암매장, 장기 매매, 사지 절단 기타 등등.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비정상적인 이야기를 매일매일 현실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기사는 이제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누가 누구를 죽인 다음 시체를 토막내 조금씩 조금씩 내다 버렸다는 얘기 조차 더 이상 뉴스가 될 수 없는 시대인 것을. 


그렇다면 이 소설은 진부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끔찍한 현실에 익숙해져 있다지만 오히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해져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안개처럼 뿌옇게 우리 주변을 떠다닌다. 우리는 장기 매매와 암매장, 토막 살인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을 느껴본 적은 없다. 이 소설의 대단함은 이렇게 막연하게 떠다니는 고통의 관념을 아주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낸다는데 있다. 소네 케이스케는 이 칼날을 움켜쥐고 우리의 피부를 잘근잘근 썰어준다. 그것도 우리가 똑똑히 지켜보는 앞에서.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단편은('폭락', '수난', '코') '수난'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작이라 부를만하다. 특히 '폭락'의 경우 소재가 너무나 기발하다. '폭락'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주식 시장에 상장하는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그곳의 인간들은 자기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인간 관계를 관리하고 억지로 선행을 일삼는다. 


그러나 이것을 과연 가상의 세계라 부를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를 돌아보라! 오늘날 인간 관계 맺기는 더 이상 온정과 인간애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며 언제나 관리되야 하는 대상이다. 결혼은 두 인간이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한 숭고한 도전이 아니라 돈과 돈이 만나는 거대한 비지니스다. 나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면 부모형제와의 관계도 청산해야 한다. 그건 몰인정한게 아니라 최선의 의사결정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다.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진장 애를 쓴다. 시장이라는 절대적 '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찍이 법으로 통치하는 것에 실패한 이 사회를 온전하게 다시 세운 것은 시장이었다.'(63p)라는 대사는 이 소설의 백미다.





'수난'은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 않다. 일본인이라면 충분히 써낼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코'는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가장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다. '폭락'이 소재의 참신함으로 활화산처럼 질주하다 뻔한 반전으로 추락하는 허술함을 보였다면(이런걸 보면 역시 신인은 신인이야라는 생각이 든다) '코'의 경우 구성이 매우 치밀하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마치 평행선처럼 진행되던 두 이야기가 결정적인 순간 마주치며 등골이 오싹한 전율을 끼얹는게 이 소설의 특징이다. 


두 이야기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표현 자체도 꼼꼼히 신경썼다. 한 명의 등장인물은 평범하게 또 한 명은 독백으로. 특히 독백의 경우 등장인물의 정신병적 심리를 아주 잘 묘사하는데 이것이 또 다른 등장인물과 극명한 차이를 보여 소설 전체에 기괴한 분위기를 드리운다. 줄거리와 구성이 중요한 작품이기에 이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소네 케이스케를 단순한 호러 소설가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소설가는 우리 사회의 악마적 얼굴을 '호러'라는 장르로 버무려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같은 자질은(주제와 표현의 완벽한 결합) 그야말로 대작가에게서나 볼수있는 능력 아닌가! 물론 소네 케이스케는 아직 신인이다. 그의 자질은 일부에서 번뜩이며 나타났다 곧바로 사라지곤한다. 


이 신세대 작가를 '부조리'란 옛 단어로 수식하고 싶지는 않지만, 문득 그 단어가 떠오른 이유는 내가 아마도 소네 케이스케에게서 '아베 코보'의 아메리카노 버전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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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5-19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님의 서재에댓글은 남기는것은 처음인데
확실히 단순한 호러 작가라고 설명하기 에는 작가의 글을 이끌어가는 스타일이 장난아니죠 저는 코와 폭락이 가장 마음에 들더구요 모든것을 자본으로 생각하는 주가에 의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방식또한 현대의 물질만능을 비판하는

한깨짱 2012-05-21 19:41   좋아요 0 | URL
역시 모든 분들이 코와 폭락을 언급하는 걸 보니 '수난'이 좀 아니긴 아니었나 봅니다. 저도 '폭락'의 경우 그 소재의 선택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사실 완성도 측면에서 보면 '코'가 더 좋긴 한데 '폭락'이 주는 소재의 신선함은 가히 충격적이었네요.
 
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 탱고를 찾아 떠나는 예술 기행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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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 리오넬 메시. 보르헤스. 그리고 왕가위. 나에게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축구의 나라였고 보르헤스의 도시였으며 왕가위의 고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난 이 도시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땅고.


두 남녀를 보라. 나른하게 달아오른 조명 아래 잔뜩 긴장한 상체가 물흐를 틈도 없이 밀착해 있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검은 양복에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는 그 시원하게 드리운 이마처럼 자신감에 넘쳐 흐른다. 여자는 이미 남자에게 몸을 맡긴 뒤다. 부풀어 오르는 감정에 고개는 젖혀지고 두 팔은 남자의 얼굴과 어깨를 꼭 안아 쥔다. 두 다리를 수줍게 포개어 몸을 뒤트는 순간 남자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여자의 다리를 훑고 지나간다. 





이것이 바로 탱고다. 사랑의 격정과 황홀의 순간을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그리고 정열적으로 표현해 내는 춤. 이 사랑이 이토록 격정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두 남녀가 이별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탱고 한 곡은 보통 3분 내외이며 길어야 5분이다. 3분 후면 그들은 떨어지는 것이다. (중략) 3분이든 30년이든 똑같다. 탱고나 인생이나 다를 바 없다. 언젠가 상대는 떠난다. 그러므로 이별을 전제로 한 춤에서 그들은 정열적일 수 밖에 없다. 끝을 알고 하는 사랑이니, 그렇게 안타까운 것이다.(37p)


탱고는 원래 부두 노동자들의 춤이였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 경제 부흥의 바람이 불던 시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항구에는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떠나온 청년들로 가득찼다. 그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왔다. 매일밤 시달리는 향수는 말할 것도 없지. 청년들은 허기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사창가를 찾고 독한 술을 마시지만 어디 영혼의 굶주림이 물질로 채워질 수 있겠는가. 사무치는 고독에 그들은 동변상련의 몸둥이를 부둥켜 안고 서로의 외로움을 치유했던 것이다.





탱고가 춤이라면 그것은 또한 음악이기도 했다. 탱고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그것을 듣고 나면 '아 이게 탱고였구나'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곡이 있다. 알파치노 주연의 '여인의 향기'에 나온 바로 그 음악. 그 강렬한 선율 때문에 한 번 듣고 나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곡이다. 


탱고 음악은 물론 탱고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었다. 기타와 바이올린과 이동식 피아노로 구성된 밴드는 역시 빈민층의 음악 답게 조촐하고 애잔했다. 탱고의 양식은 표현력과 이동성에서 확고한 우위를 보였던 반도네온이 밴드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부터 확실히 자리잡기 시작한 모양인데 독일 이민자들의 손에 들려온 이 악기는 원래 찬송가 반주를 위해 만들어졌다. 싼 가격과 휴대성 때문에 개신교 보급에 큰 역할을 한 이 악기는 지구를 반대편에 있는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날아와 또 하나의 '붐'에 불을 붙인 셈이다. 바로 '탱고'라는 붐 말이다. 


20세기 초 우연히 프랑스에서 발매된 탱고 음반은 이 이민자들의 음악을 전세계로 알리는 기회가 됐다. 그리고 이 인기는 예상치 않은 결과를 얻어냈다. 바로 아르헨티나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를 어느 정도 봉합하는 구실을 한 것이다.


말했다시피 탱고는 부두의 노동자, 보잘것없는 하층민의 음악이자 춤이었다. 상류층은 이 춤과 음악을 지저분하고 퇴폐적인 문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음악이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자 그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20세기 초의 전형적 부르주아 답게 아르헨티나의 상류층들은 유럽 문화라면 무조건 숭배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탱고도 받아들일 수 밖에. 이 우스꽝스러운 현상은 사람의 편견이라는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견고한지, 또 그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무력과 피가 아닌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세상. 우리는 언제쯤 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여전히 많은 탱고바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말벡 와인을 마시고 두꺼운 스테이크를(아르헨티나는 소고기가 유명한데 인구 3천만인 이 나라는 소가 6천만 마리라고 한다) 먹으며 탱고의 기에 젖어든다. 


창 밖 거리에는 외로운 가로등이 홀로 불을 밝히고, 어둠 속에선 두 남녀가 서로의 몸을 밀치며 마치 고독의 뿌리를 뽑아 버리려는 듯 뜨거운 땀방울을 쏟아 낸다. 가슴을 저미며 울리는 반도네온과 바이올린의 울음. 콘트라베이스의 육중한 울림은 끝내 우리를 고독의 심해로 끌고 내려가려는 바위추다.

책을 읽는 내내 탱고를 듣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눈에 아른거리는 사랑, 그 떨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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