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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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를 읽고 창피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키보드 위에 올려진 열개의 손가락을 바위처럼 단단하고 칼날 보다 예리한 하루키의 시선이 무겁게 누르고 있다. 그의 글 안에서 내 손가락은 자유롭지 못하다. 1Q84, 뒤틀린 시간과 공간의 통로를 통해 하루키는 내 글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글에 대한 글은 어쩌면 그 글의 '공기번데기'일지도 모르겠다. 마더는 도터의 탄생을 알고 있어. 1Q84에서 도터는 마더와 동일한 위상을 유지하지만 이 현실에선 아무리 야심차게 준비한 도터라도 결국엔 마더의 찌꺼기에 불과해. 1Q84를 읽고 창피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아. 




1Q84를 사야 되나 말아야 하나, 그 맥없는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다. 읽을 사람은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이 글을 써야 하는가. 나 자신이다. 나는 창문을 열고 컴퓨터를 킨다. 기분 좋은 가을 바람의 냉기가 창문을 통과해 살갗에 와 닿는다. 적당한 온도다. 나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고 눈을 감는다. 지금부터 나는 1Q84의 공기번데기를 만들 것이다. 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엄숙한 분위기다. 아직 달이 뜰 시간은 아니다.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째 의문, 아오마메의 이야기는 덴고의 소설인가?


아오마메의 세계에 두 개의 달이 뜨기 시작했을 때 부터, 나는 그것이 덴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덴고는 '공기번데기'의 리라이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 그리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거기에 아오마메가 등장한다고 볼만한 여지는 전혀 없지만, 어느 순간 아오마메의 이야기에 일그러진 녹색 달이 등장하고 평행선을 달리던 두 레일이 덜컹하는 전환기의 당겨짐과 함께 서서히 한점으로 모여든다. 소설가가 하나의 세계를 써내려 가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써내려 간다. '책을 쓰는 것'은 '인생을 산다'의 은유로써 손색이 없다. 덴고는 장편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 삶을 축조해 나가는 것과 같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만나고 싶은 아오마메를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킨다. 거듭 강조하지만 여기서 '쓴다'는 '산다'와 같다. 덴고는 소설을 쓰면서 그 소설을 산다. 덴고의 소설은 덴고의 바람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현실'은 강렬한 바람에서 탄생한다. 


(스포일러 있음)


소설과 현실이 지나치게 가까워지자 덴고는 자기 이야기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덴고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다. 현실은 소설과 지나치게 뒤엉켜 버리고 덴고 자신 조차 이것이 소설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여기서 분명한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계속되야 한다는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하루키는 자신이 직접 화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하루키는 3권에서 딱 한번 해설을 한 뒤 바람같이 사라진다). 하지만 좀 더 안정적이고 필연적인 화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시카와가 등장한다. 그 우시카와는 덴고와 아오마메의 삶에 끼어든 '이물'이지만(생김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교롭게도 그 끼어듦이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이것을 통로로 두 사람은 재회한다. 여기서부터 다시 하루키의 소설이 시작된다.


1Q84는 책의 저자와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써내려가는 소설(삶)이 복잡하게 얽혀들면서 다층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그 애매모호함과 뭔가 있을 듯한 기대감이 시종일관 강력한 몰입도를 만들어 낸다. 하루키 소설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몰입도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며 섬광을 내뿜을 때, '헉'하는 신음 소리만이 독자의 텅 빈 머리를 울린다.



리틀 피플은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리틀 피플을 하나의 의미로 결정짓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너무나 적다.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오늘날 빅 브라더는 예전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우리 속에 끼어들어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오늘날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양상은 훨씬 교묘하고 은밀해졌다. 하루키는 빅 브라더에게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리틀 피플?



공기번데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 공기번데기를 하나의 의미로 결정짓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너무나 적고 또한 일관적이지 못하다. 


나는 도터와 마더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안다. 덴고가 아오마메의 공기번데기를 보고 그의 손을 잡았을 때, 헤클러&코흐 사의 권총을 목구멍에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아오마메의 손가락이 멈춘다. 


나는 도터와 마더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덴고가 목격한 아오마메의 도터는 10살의 아오마메였다. 


나는 도터가 매개자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후카에리의 도터는 리틀 피플과 이 세상을 연결한다. 아오마메의 도터는 덴고와 아오마메를 연결한다. 아오마메의 도터가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던 이유는, 덴고의 기억이 20년 전에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도터는 마더의 간절한 '바람'이 현실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덴고가 아버지의 병실에서 봤던 공기번데기는 아오마메의 도터가 아니라, 바로 덴고의 도터일지도 모르겠다.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어떻게 평하고 있을까?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게 짜였고 마지막까지 독자를 견인하는 힘이 있지만, 공기 번데기란 무엇인가, 리틀 피플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우리는 마지막까지 미슨터리어스한 물음표의 풀 속에 내던져지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점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러한 자세를 '작가의 태만'이라고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한 듯한 뉘앙스만 풍기는 자세에 관해 머지않아 진지한 고민을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Book2, p.145~146. '공기번데기'에 대한 비평 중)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게 짜였고 마지막까지 독자를 견인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 작가를 태만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Book2, p.146. 덴고의 대사)



에필로그


설명을 듣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을 들어도 모른다는 것이다(책 본문 중). 그리하여 이 소설엔 해설이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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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 버클리 :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지식인마을 2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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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철학의 이해라는 수업의 중간 고사 시험 문제로 'Cogito ergo sum'을 비판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그때 내가 썼던 답안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 나는 또 한번 'Cogito ergo sum'을 만난다.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지만 이제는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다. 


정말?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한 지금도 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Cogito ergo sum'이란 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정수이며 그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서양 근대 철학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고농축 선언이다. 이 말을 완벽히 이해하고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학 강의와 저술만으로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원리를 알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감각 경험'에 의한 귀납 추론을 선택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은 '명석판명한 지식'을 토대로 한 연역 추론이었다. 

명석판명한 지식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의심 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를 뜻한다. 절대적 진리란 대충 따져보아 '참인 명제'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동물은 모두 죽는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이것은 경험적으로 봤을 때 참일 가능성이 크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동물의 죽음을 목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령 이 명제가 참이라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동물은 모두 죽는다'라는 명제에서 '동물'이나 '죽는다'라는 단어를 너무나 쉽게 얘기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동물이나 죽음의 존재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젠장 무슨 말이냐고?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동물을 토끼로 바꿔 보자.


지금 당신의 눈 앞에 흰색 토끼 한 마리가 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귀여운 토끼 한 마리다. 귀를 쫑긋 세우고 당근을 갉아 먹는다. 이제 손을 뻗어 토끼를 만져보자. 그 보드라운 털이 만져지는 순간 당신의 손에 토끼의 실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토끼의 존재가 이렇게 생생하게 전해오는데도 여전히 토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생각인가? 하지만 더 생각해 보자. 당신의 감각이 거짓이 아니라고 할만한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 인간의 감각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같은 길이의 직선인데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 보이는 아래 그림을 보라.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더 얘기해 주자면, 당신이 방금 만진 그 토끼는 내가 일본 로봇 연구소에서 빌려온 정교한 토끼 로봇이었다. 손 끝에 전해지던 보드라운 촉감은 최고급 캐시미어 가죽으로 만들어낸 가짜 털 덕분이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정교한 로봇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이같은 경험을 만들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속았다고 낙심하기엔 이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여기서 철학적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 'Cogito ergo sum'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같은 의심에서 딱 한 발자국 전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확실치 않다. 완벽히 증명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거듭해 나가다 보면 결국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 한 가지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의심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근대 사회는 데카르트의 작품이다. 의심할 것 없는 정확성. 제1 명제의 반석 위에 하나하나 차곡차곡, 추론을 통한 지식을 쌓아 세계를 구축한다. 이것은 마치 정교한 건축을 연상케 한다. 철저한 엔지니어링적 사고. 데카르트가 닦은 사상의 반석은 곧이어 아이작 뉴턴이라는 신성한 건물을 탄생시키고, 드디어 과학과 기술과 우리의 '오늘'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는 의심하는 나의 사고 작용이 곧 나의 실체를 증명한다고 보았다. 아무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 봐도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으니까. 여기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심하고 있는 그 내가 '직접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실체'라고 말하는 건 명백한 비약이다. 데카르트가 알 수 있는 건 단지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 그 사실'일 뿐이지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 실재적인 '육체'는 아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정신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육체'라고 불리는 껍데기가 있어야 한다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자신의 '명석 판명한 지식'의 전제로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천하무적 승승장구 할줄만 알았던 근대 사회가 오늘날 다양한 문제를 드러내며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이 세계가 데카르트의 명석판명하지 않은 지식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일까?


나는 앞서 데카르트의 명제를 반박하면서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 그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는데에는 동의했다. 데카르트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는 그의 철학이 '관념론'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실재하는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는 불안정한 세계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와 '육체를 가진 나'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을 대담한 비약으로 메꿨던 것이다. 


역사는 이후 데카르트 철학의 논리적 상처를 봉합하려는 많은 사람들을 배출한다. 아일랜드의 대주교 '조지 버클리'도 그 중 하나였다. 





조지 버클리는 경험론자라는 측면에선(귀납적 추론) 데카르트와 반대점에 서 있는 사람이었지만 '세계의 실재를 규명'하려는 목적에 있어서는 동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버클리가 증명하려한 '실재'는 데카르트의 '실재'와는 차원이 달랐다. 데카르트에게 '실재'라는 것은 외부 세계에 떡하니 공간을 차지하고있는 '물질적 실재'였던데 반해 버클리의 '실재'는 '관념론적 실재'였다.


집, 산, 강 그리고 한마디로 모든 감각 가능한 대상들은 이해력에 의해 지각되는 것과 독립적으로, 자연스럽게 또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113p, 원출처: 인간 지식의 원리론, 버클리 작)


버클리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외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지는걸 의아하게 생각했다(지극히 당연한걸 의심하고 비판해야만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버클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아무런 증명없이, 우리가 인지하는 것에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본능적으로. 하지만 지각은 결코 외부 세계의 실체를 증명해주진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지각하는가? 그것은 관념이다. 해의 실체가 아닌 해라는 관념, 사과의 실체가 아닌 사과의 관념. 하지만 어떻게 실체 없이 관념이 존재할 수 있는거지? 구체적 물질이 없다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그것에 대한 관념도 존재할 수 없잖아! 관념과 실체가 분리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이 같은 딜레마에 빠져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어야 한다. 그리하여 버클리는 과감히 칼을 뽑아들었다. 버클리는 말한다. 외부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관념' 뿐이다. 


버클리는 우리가 보는 사과, 모니터, 키보드, 아이폰 등이 모두 물질이 아닌 관념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정하면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다. 굳이 실체와 관념을 나눠 골치 아프게 따질 일이 없다. 세계는 관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념을 지각한다. 우리는 지각되는 관념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기에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명명백백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버클리는 Cogito ergo sum에 버금가는 유명한 명제를 도출해 낸다. 


Esse est percipi(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자, 버클리에 의해 세계는 다시 안전한 반석 위에 올라왔다. 세계는 명명백백히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물질이 아닌 관념의 형태이긴 하지만. 얘기는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세계를 이끌어 간다. 


자,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귀를 닫고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 속에 우리 자신을 가둬보자.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버클리의 이론에 따르면 이 경우에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내가 볼 때만 존재한다. 내가 보지 않을 때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버클리도 이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철학을 완전 무결한 이론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대주교 조지 버클리. 그는 이 퍼즐을 완성할 마지막 조각을 자신의 직업 안에서 찾았다. 그의 해답은 신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지각하지 않는 동안 이 세계가 사라질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좋다. 왜냐고? 전지전능하신 신께선 우리가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이 세상 만물을 빠짐없이 지각해 주시고 계시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편)


신을 믿는 다는 건 이토록 편리한 일이다. 당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영어 점수가 안나와 승진을 걱정할 지라도, 공부를 안해 수능을 망칠 것 같아도, 두려워 말라 주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지니.





알면 알 수록 철학만큼 재밌는게 없다. 특히 인식론은 언제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줘 더더욱 흥미롭다. 원래부터 그렇게, 자연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곰곰히 따져보고 천천히 돌아보면 모든게 새롭다.


철학이 좀 더 쉬웠다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논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나아졌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철학을 폄하하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들은 쓸데 없는 고민을 사서하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김영사 '지식인 마을' 시리즈 만큼 부질없는 기획도 없을 것이다. 이 시리즈는 진심, 진정으로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책들로 가득한데, 우리가 이 모든 사상을 섭렵한다 할지라도, 행복은 머나먼 정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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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9-0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 어렵네요...살아가는데 아무도움이 안되는 학문...한국사회에서는 정말 영양가 없는 분야...백수의 첫걸음...하지만 이 땅에 뿌리를 박고 꿋꿋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할 징검다리 어쩌면 우리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힐링의 학문이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어려운 인식론을 쉽게 설명하는걸 보니 상당히 철학적이시네요^^

한깨짱 2012-09-04 14:55   좋아요 0 | URL
네 철학 정말로 어렵습니다. 인식론을 쉽게 설명했다 하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두 사람의 철학에 대해 뭔가 오해했기 때문에 설명이 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기독교 이야기
유재덕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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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전, 모래와 먼지를 뒤집어 쓴 중동의 작은 지방 나사렛, 그곳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오늘날까지 죽지않고 찬란하게 살아남아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일부에서는 그 남자가 달변이었다고 말한다. 항간으로는 그 남자의 외모가 대중을 완전히 매료시킬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는 사람들 중에는 그 남자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장님을 눈 뜨게 했으며 미친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 남자가 성공한 이유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주고 일곱 번 씩 일흔 번을 용서해 주는 것. 이게 바로 그 남자의 성공 전략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네 이웃을 내 몸의 반에 반만 사랑했어도'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타 종교를 증오하고 억압하는데 그들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줘왔다. 그리고 그 분노와 증오를 종교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대대로 전해오는 것을 그들의 존속 전략으로 삼아왔다.





종교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선행되야 하는건 교리가 아니라 바로 역사다. 이런건 유치 1, 2부 때부터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 나라 교회치고 역사에 기반한 기독교를 가르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종교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에 뿌리를 내린 역사적 실체다. 이걸 무시하면 종교는 현실과 유리되어 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 버린다. 인간과 구체적 세계가 사라진 종교? 그런걸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


우리 나라 종교인들 중에는 가톨릭과 기독교를 이른바 성당과 교회로 나눠(언제 한번 이 단어의 유래를 찾아보고 싶다) 마치 독립된 별개의 종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눈 앞이 캄캄해지고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일부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은 게거품을 물고 난리를 칠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가톨릭은 기독교의 형님뻘 되는 종교다. 가톨릭이야 말로 나사렛 예수를 계승한 최초의 종교라는 말이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에는 당연히 가톨릭 따위는 없었다. 예수와 열두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전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이스라엘에 파견된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핍박을 받았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예수의 언행이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성전을 찾는 것보다 네 이웃과 화해를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거나 성전 앞에서 비둘기를 파는 상인의 좌판을 걷어 차며 '꺼지라'고 할 정도로 대담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혁명적 인물은 기득권의 눈 밖에 나기 마련이 아닌가? 당시 유대인 대제사장이었단 안나스와 가야바는 점차 넓은 지지를 확보해 가던 예수를 군중 선동, 정치 혼란의 주범으로 고발하여 결국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하고 만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보던 지하 묘지. 카타콤



예수 사후 와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사역을 이어갔다. '사도'로 일컬어 지는 열 두 제자들이(특히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독립 종교로서의 지위를 다지게 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라기 보다는 '바울'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변국을 여행하며 선교에 힘썼고 당시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수 많은 피지배층들이 사회적 소수자를 옹호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자 기독교는 점차 로마의 지배층으로까지 침투했다. 세속적인것을 거부하고 경건한 생활에 힘쓰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독교인의 삶은 속세에 찌든 로마의 도시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서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를 자칭한 뒤 벌인 첫 일은 교리의 통합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핍박 끝에 자유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그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심각한 교리 다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교회의 분열을 우려했던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7월 4일, 3백 명의 감독과(Bisop) 2천 명의 장로들(presbyter) 및 집사들(deacon)을 당시 황궁이 있던 니케아에 소집해 교리 통일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니케아 공회'다. 


니케아 공회가 채택한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역시 삼위일체론일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났으나 그 본성은 '신'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같은 교리를 공의회까지 열어 결정할 정도면 초창기 기독교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상당히 분분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대립은 결국 반 삼위일체론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는 아리우스가 추방되면서 일단락 된다. 하지만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종파는 현재까지도 당당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선 완전히 사이비 종교로 오해받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 대표 종파다. (여호와의 증인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으며 대한민국에만 10만명의 성도가 살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가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교리, 즉 이단을 구분해 내고 그들을 잔인하게 심판하는 절대적 교리라는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와 말씀을(성경)을 임의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합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의 채택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교리는 줄곧 교회 권력을 놓고 벌이는 정치적 암투의 희생양이 되어 왔으며 특히 정적을 제거할 구실로는 그만한 방법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상당히 퇴색하고 말았다. 


교리 선택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다수의 추종자들의 합의하여 결정하는 구조를 채택하는 한 교리 해석의 난립과 이를 통한 종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실제로도 그리스도교는 수 차례의 교리 논쟁으로 많은 분파를 만들어 냈으며 그 때마다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진흙탕 싸움을 계속해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 안에서도 또다시 교리 논쟁이 벌어져 이집트, 에티오피아의 콥트교회와 시리아의 야고보교회를 탄생시켰다. 


과연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진짜 말씀인가를 따지는 일은 강물과 바다물을 앞에 두고 무엇이 진짜 물인가를 가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오늘날의 교리에 따르면 두 번 따져볼 가치도 없이 터무니 없는 주장이겠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아니면 교회를 지배하고 그 권력을 향유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인가? 내가 '신은 믿을 수 있지만 교회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후 그리스도교의 상황을 얘기하면 한 마디로 분열이다. 분열이 심했다는건 그만큼 기독교가 '장사가 됐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개인의 구원, 정의로운 삶 어쩌구 하는 가치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건 언제나 힘 없고 무지한 평신도들 뿐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종교는 직업이다. 밥벌이라는 뜻이다. 밥 그릇 주위에는 언제나 악취와 오물이 넘쳐나는 법이다.


7세기에는 이슬람이 탄생했다. 마호메트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마호메트의 하나님은 이슬람교도들에게 자신이 직접 창조한 자식들을 무참히 살해하라고 사주했다. 아이러니한건 기독교인들도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사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동일한 계시를 받고 서로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런 이중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에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가 존재하는 걸까?


사람들이 기독교(가톨릭)의 부패와 멍청함과 부정의에 언제까지 참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최초의 유럽 왕이었다. 그는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인정하고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16세기). 물론 그에게 정의로운 동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파문 시킨 로마 가톨릭이 꼴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틴 루터와 칼뱅이 등장한다. 이들은 가톨릭에서 분리된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고, 한국에서는 이를 개신교 또는 '교회'라 지칭하며 가톨릭의 '성당'과 구분한다. 


유대교에서 시작한 '야훼의 종교'는 가톨릭, 콥트교,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영국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등 수 많은 종교를 파생시켰고 프로테스탄트교는 장로교(칼빈파),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교, 루터교, 제7의 안식일교(삼육 재단)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파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똑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었지만 탄생 당시에는 거의 예외없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댔다. 





이 책은 오랜 기독교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지만, 2천년이란 그렇게 만만한 시간이 아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담는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다. 숨가쁜 질주에 내용은 다소 산만하고 일부는 빈약해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를 한 눈에 훑어 보기에는 이것만큼 좋은 책도 없어 보인다. 시간과 지면이 허락했다면, 저자도 분명 더 나은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기독교인 이야기'를 내 손으로 직접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분명 흥미진진한 작업이 되겠지만, 죽기 전에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대교, 가톨릭 보다는 개신교의 분열이 훨씬 심각한 이유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근본 정신이 저항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부패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 정신이 오히려 프로테스탄티즘의 분열을 가속화 시켰으니, 역시 세상은 아이러니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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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8-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우매함을 가장 극적으로 나타내주는 표지가 저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우매한 존재들이지요. 그러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존재들,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확신 과 자신감에 오만한 존재들...그 태생적인 한계를 깨닫지 못한 이상 그들이 내린 결론은 결국 모래성일 뿐...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도 그런 존재고요....

한깨짱 2012-08-29 13: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간의 우매함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인간의 불안, 그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때때로 종교에 귀의하여 평온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기도 해요.

군자란 2012-08-29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그걸 몰랐을때가 행복했던것 같아요. 신앙의 그 충만함을 어디에서 채울 수 있을까요? 지금도 무척 그립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못본체 할 수는 없고...그냥 그저...웃지요...

한깨짱 2012-08-30 11:55   좋아요 0 | URL
역시 앎은 악마의 재산인 것 같아요.

군자란 2012-08-30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앎은 악마의 재산이라....새겨 듣겠습니다...

한깨짱 2012-08-31 11:25   좋아요 0 | URL
너무 진지하게 새겨들으실 필요는 없어요 ^^
 
부도덕 교육 강좌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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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 교육 강좌'는 '주간 명성'이라는 여성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단행본으로 펴년 에세이 집이다. 67편의 부도덕 교육에 해설, 옮긴이의 말까지 포함해 총 422페이지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무게는 무겁지 않아. 내용 또한 마찬가지. 출근길 전철에 서서 부담없이 읽기에 아주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있지. 문제는 내가 이 책을 소설로 알고 샀다는 거야.


미시마 유키오는 데뷔와 동시에 성공을 거둔 남자다. 거칠게 없었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입문했고 31살 때 이미 '금각사'를 써 버렸으니까. 어릴 땐 몸이 약해 수줍음 많고 허약한 소년, 근육질의 동성 친구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을 정도로 괴상한 아이였지만, 성공을 거두고 보디 빌딩을 시작하더니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패기 충만한 이상한 아저씨가 되버렸지. 그러니까 감히 '부도덕'을 교육하시려는 것 아니겠어?



소설가들은 원래 그래야만 하는건지, 원래 그랬기 때문에 소설가가 되는건지 알수는 없지만, 대개 개성있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사람일 수록 이 세상을 삐뚜루 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사람들은 대개 도덕적으로 민감하고 시비에 철저하며 본질 추구에 집요한 면을 보인다. 뭐하나 허투루 넘어가는게 없어. 이 삐딱이들이 '엄밀하게 따지면'이라고 말을 시작할 땐, 어지간히 골치아플 준비를 해야 한다. 

부도덕 교육 강좌가 말 그대로 부도덕을 교육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도덕이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억제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덕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거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남의 불행에 기뻐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은연중에 그 불행이 고소하게 느껴지면서 묘한 자신감에 벅차오르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니가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잘난척 하더니 내가 알아 봤다'. 본성이 펄떡펄떡 살아 날뛸땐 도덕은 속수 무책인 법이지. 하지만 이 더러운 본성을 자기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면? 문득 거울을 봤더니 그 속엔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짐승의 모습이 있다. 이게 나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고 본래의 도덕적인 나로 돌아온다. 


미시마 유키오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독자가 보는 것은 치졸하고 잔인한 나의 '본모습'이다. 인간은 '내 눈의 들보'를 보기 시작했을 때 도덕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작자가 보여주는 건 진실한 너의 모습. 네 눈의 들보. 부도덕 교육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론 도덕 교육이라는 여러 독자들의 평은, 그러므로 타당하도다.


하지만 이런 역설, 너무 흔하잖아. 진부해. 질린다고. 도덕 교육같은거, 진지하게 점잖빼고 얘기하면 꼰대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이런 제스쳐를 취하는거 아니야? 기본적으로 당신의 글에선 남성 우월주의와 힘에의 의지가 느껴져. 남을 깔보는 듯한 시선이 문장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 마음을 질겅질겅 씹어댄다구. 그래서 난 당신이 싫고, 당신의 말투가 싫고, 이 책이 싫어.





하지만 그의 지적엔 절묘한 섬뜩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잔혹함은 소년기의 특징이다. 아무리 감상적으로 보이는 소년에게도 본능적인 잔혹성이 내재되어 있다. 소녀도 마찬가지다. 다정한 심성은 어른의 교활함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p. 19. 선생을 무시하라, 속으로만)


어른이 된다는 것, 건강한 사회의 예의바른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펄떡펄떡 살아 날뛰는 본성을 감옥에 가둬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으로 유배보내는 것 아니겠는가. 대가의 시선에는 당해낼 수 없는 점이 있는 법이지. 내가 만약 일찍 성공을 거뒀다면, 아마도 미시마 유키오 같은 사람이 됐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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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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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한 페이지의 리뷰로 옮기는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책은 예루살렘의 기록 아닌가. 예루살렘에는 종교와 문명, 역사와 인종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그것을 하나씩 풀어 헤쳐 온전히 날것의 예루살렘을 꺼내보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책을 딱 한 번 읽고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번역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역사는 현기증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복잡하다. 수 천년의 역사 동안 그 땅에는 얼마나 많은 예수와 요한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무하마드와 알리가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성전과 요새와 왕조가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인종과 종교가 있었는지! 어느 순간 독자는 홍수처럼 밀려 오는 지명과 이름의 압도적 물결에 휩쓸려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된다. 불과 1분 전에 읽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페이지를 뒤로 돌리는 건 예삿일이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미궁 속을 헤매는 운명을 겪기 마련이다. 


저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한 권의 책에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넣을 작정을 한 것 같다. 이 책엔 아브라함에서 부터 네타냐후(2009년 부터 재직 중인 이스라엘 총리)에 이르는 유대인들의 기록이 있으며 이는 거의 4,000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400년이 아니다. 4,000년 이다. 


앞에서 나는 이 책을 딱 한 번 보고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알수는 없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말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딱 한 번 읽는 것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알수는 없지. 하지만 이 책 딱 한 권만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알수 있는 것도 사실이네. 





여기 예루살렘이 있다. 그곳에 처음 뿌리를 내린 사람은 아마도 아브라함으로 보인다. 그에겐 이삭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이삭은 야곱과 에서라는 아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야곱은 에서에게 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가로챘다. 나중에 야곱은 낯선 자와 씨름을 벌이는데, 그 사람은 나중에 신으로 밝혀지고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그는 열 두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것이 바로 유대의 12지파가 되었다. 


그들의 역사처럼 파라오의 호의를 입은 건지 아니면 노예로 끌려 갔던지 그 사실 여부를 따질 수는 없지만 그들이 이집트에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이 대탈출의 기적이 바로 모세 5경 중, 출애굽기(이집트=애굽)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 후 예루살렘엔 다윗과 솔로몬이 있었다. 성전과 요새가 지어졌고 역사상 유래없는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번영은 길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다윗 왕가)로 갈라선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의해 멸망하고 만다. 디아스포라의(유대인들이 세계 각지로 뿔뿔히 흩어지게 된 것) 시작이었다.


유대인을 고향으로 돌려 보낸 것은 중동의 새로운 강자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를 멸망 시키고 유대인을 해방 시켰다. 해방된 유대인은 또 다시 페르시아를 꺽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에 점령 당했다. 아시다시피 알렉산더는 이민족의 문화에 관대한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은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명은 길지 않았다. 유럽에선 그리스 문명을 이어 받은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다. 로마는 자기가 정복한 나라의 속국들을 이어 받았고 거기엔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로마인 총독은, 


폰티우스 필라테(본디오 빌라도)였다.





폰티우스 필라테는 성난 유대 군중들을 향해 강도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풀어줄 것이냐고 물어봤다.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원했다. 폰티우스 필라테는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그러자 군중이 대답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p. 197)


오늘날까지도 많은 천박한 기독교인들이 이를 근거로 유대인의 박해를 정당화 한다(저자에 따르면 이 마태복음의 구절이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 한다. 저자는 폰티우스 필라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완곡, 부드러움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피를 보기 전에 손을 씻을 필요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p.197).)


이후 세계를 지배한 것은 그리스도교였지만, 그게 그리스도교의 우월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변덕쟁이에 야심가였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중요한 내전을 치르기 전날 밤(312년) '하늘에 빛으로 된 십자가'가 '이 신호와 함께 너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문구와 함께 겹쳐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군인들의 방패에 크리스투스의(Christos. 영어로는 Christ) 첫 두 글자인 키로(Chi-ro)를 그렸다. 그는 승리했고 로마를 차지했다. 당시 로마는 곧 세계였으며, 이로인해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종교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300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적수가 없었다.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이슬람교는 많은 무지한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 예수, 성경, 마리아 등의 개념을 공유하는, 기독교와 아주 유사한 종교다. 실제로 이슬람교가 등장한 초창기엔 종교간 충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마호메트를 선지자로 규정하자 상황은 달라졌고 수 백년이 흐르는 동안 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이제 예루살렘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공통 성지가 되었고 역사상 유례없는 핫 플레이스가 되버렸다. 여름에는 작렬하는 태양이,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가 존재하는, 전략적, 경제적 가치도 없는 바위 투성이의 쓸모없는 땅이 말이다.


이 각축전에서 먼저 승기를 잡은 건 이슬람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과 군사력을 앞세운 이슬람은 유럽의 스페인과 중동의 대다수 지역을 정복했고 예루살렘은 보너스였다. 그런데 이슬람은 많은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자비하고(칼이냐 코란이냐) 문란한(할렘 문화) 민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매우 관대했고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 이슬람 교도들이 사이 좋게까지는 아니었지만 '공존'하는게 가능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종교적 광신에 빠진 중세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성지를 이교도의 손에서 빼앗고자 피의 축제를 벌였고 이게 바로 4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다.


그러나 이 대혼란 속에서 유대인은 단 한 번도 승기를 잡아본 적이 없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뀔 때 마다 심한 박해를 받았고(특히 그리스도인들의 박해) 그저 더 관용적인 침략자가 나타나 자신을 구원해 주길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들이 이 땅을 다시 차지하게 된 건 1948년이 되어서였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유대인 유력자들 사이에서 '시온 주의'가 발흥하게 된다. '시온 주의'란 뿔뿔히 흩어진 유대인들, 세계 각지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는 모든 형제들을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모아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유럽의 왕들 중 일부는 '기생충 같은 유대인들을 내 땅에서 없앨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심정으로 또 일부는 '유대교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으로 또 일부는 '불가사의한 예언의 광신'에 휩싸여(예언에 따르면 유대인이 다시 예루살렘이 돌아왔을 때 메시아가 강림한다) 이 운동에 참여했다. 유대인들의 땅으로는 남미의 아르헨티나, 아프리카의 우간다 등이 제시됐다. 그러나 그 무엇도 예루살렘이 가진 거대하고 위대한 상징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유대인의 지지를 얻고 싶었던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시온 주의자들은 드디어 자기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영국을 도왔다. 마침내 영국은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은 영국이 프랑스와 아랍인들에게도 똑같이 팔레스타인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온 주의는 물거품이 됐고 예루살렘은 영국의 통치하에 그리스도인과 유대인과 이슬람인이 공존하는, 유대인들로서는 예전과 전혀 다를게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유대인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날때 까지도 자기 나라를 세울 수 없었는데, 영국인의 배신에 실망한 일부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있었음에도 영국이 아닌 독일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결국 무력 항쟁을 통해 영국군을 몰아 내고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옛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망한지 2,700년이 지나서였다.


이 후 이스라엘의 역사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둘러 쌓여 있었다. 이들은 호시탐탐 예루살렘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각지에서 폭탄 테러와 유대인 살인이 벌어졌다. 2,700년 만에 되찾은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멸망의 위기로 몰아 넣은 것은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였다.


단 하나의 아랍 국가를 원했던 민족주의자 나세르는 아랍 국가들 사이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고 싶었다. 그는 주변 아랍국을 선동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게 현대 전쟁사의 최고 드라마 6일 전쟁이다. 


아랍 연합군은 50만의 병력, 5,000대의 탱크, 900대의 비행기를 확보했다. 이스라엘은 27만 5,000명, 1,100대의 탱크, 200대의 비행기를 확보했다.(p. 814)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심지어 이스라엘인 조차도 자국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과감한 선제 기습 공격으로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1967년 6월 5일 오전 7시 10분, 이집트로 날아간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그들의 공군을 궤멸시켰다. 이스라엘은 불가사의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것은 마치 2,700년 간 유보해왔던 축복이 한 순간에 내려진 것 같았다. 이제 그 누구도 유대인들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빼앗을 수 없었다.





역사는 언제나 가해자의 잔인함을 고발하지만 동시에 복수심에 불타는 피해자 어떻게 가해자로 변신하는지를 주목하기도 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겪어온 폭력과 멸시의 고통을 이슬람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가자 지구를 폭격해 수 많은 민간인을 사살하고 폭탄 테러의 위협으로 부터 유대인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비인간적인 격리를 실행하고 있다. 끔찍한 게토의 추억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 말이다.





아브라함에서 시작한 예루살렘의 전기가 2000년대 이스라엘의 모습에 이르러 마무리 지어지면,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세계의 역사를 단숨에 들이킨 듯한 자신감이 충만해 온다. 


이 책은 유대인들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예루살렘에 대한 책이다. 예루살렘에는 수 많은 종교와 민족과 국가가 존재해왔다. 저자는 그 모든 것들을 어느 일방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어쩌면 그의 의도가 예루살렘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을 두고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의도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종교 때문에 폭탄 테러와 비인간적인 학살이 자행되는 곳이다. 아이러니한건 그 곳에 사는 사람 모두가 정의와 평화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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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8-0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루살렘을 안다는 것은 인간을 안다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인간의 부조리가 한 곳에 응축된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고요, 외계인이 지구상에 나타난다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면 이곳이 아닐까...정말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수많은 것들....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은 아니 겠지요?

한깨짱 2012-08-09 13:15   좋아요 0 | URL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지요. 예루살렘은 정말 복잡하고 미묘한 곳인것 같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이 거하는 곳에 오히려 절망과 폭력만이 가득한 아이러니. 읽는 내내 정말 복잡한 심정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