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까오량 가족 대산세계문학총서 65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원제보다는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 제목이 더 유명한 모옌의 장편 소설 '홍까오량 가족'입니다. 사실 '붉은 수수밭'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이 영화의 원작이 '홍까오량 가족'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장이모의 탓도 있죠. 지금이야 관(官)에 딱 붙어 올림픽 개막식 같이 돈을 쏟아 부은 대규모 퍼포먼스나 '영웅', '황후화'같이 알맹이는 없고 겉만 화려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지만, 이 사람 87년 데뷔작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 상을 수상한 세계적 감독입니다. 모옌이 노벨상을 탓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붉은 수수밭'은 영원히 장예모의 작품으로 기억됐겠죠.


장예모가 '붉은 수수밭'을 공개했을 때 세계인들은 '중국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80년대 중국은 억압, 감시, 학살의 상징이자 인류의 적, 공포의 대마왕이었죠. 그런데 장예모의 영화가 나타납니다. 스크린에는 붉은 수수가 홍수처럼 넘실댔고 그 밑에 단단히 뿌리내린 민중의 삶이 있었죠. 흙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건 바로 인간의 냄새이기도 했습니다. 세계인이 중국이라는 땅을, 새롭게 발견한 겁니다.


뭔가를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선 그 안에 고유한 색채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농촌을 배경으로, 땅을 주인공으로, 그 위에서 생장하는 식물과, 그것을 먹고 자라는 민중을 그려왔던 모옌의 소설에는 토속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오리지널리티가 있었죠. '붉은 수수밭'이 중국을 새롭게 발견해냈다는 말은 결국 원작의 오리지널리티를 잘 살렸다는 말 이상이 아닌 것입니다.





산동성 까오미현 둥베이향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작고 귀여운 발까지 가진 꽃처녀 따오펑리옌은, 고작 검은 노새 한 마리를 받고 단씨 가문에 팔려갑니다. 문제는 단씨가 문둥병 환자였다는 거에요. 거래를 성사시킨건 돈 밖에 모르는 아버지였죠. 단씨와의 첫날밤, 닭발처럼 갈라진 괴물손이 어두컴컴한 베일 뒤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따오펑리옌은 소리를 지르며 날카로운 가위를 집어 들었죠. 그날 밤 따오펑리옌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따오펑리옌이 시집을 가는 날 그 가마를 들었던 사람 중에 위잔아오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위잔아오는 건장하고 패기넘치는 젊은이였고, 악당이 될 기질이 충분했죠. 그는 따오펑리옌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닭발처럼 갈라진 괴물손의 아내가 된다는걸 납득할 수 없었어요. 이날 둘 사이에는 찌릿한 전기가 흘렀습니다. 모종의 계약이 성립했죠. 둥베이향에는 시집갔던 처녀가 친정으로 돌아가 사흘동안 지내고 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따오펑리옌이 친정으로 돌아가는 날 위잔아오는 그녀를 납치합니다.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는 붉은 수수의 바다에 누워,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눴어요. 따오펑리옌이 시댁으로 돌아오는날 마을의 연못은 단씨 부자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습니다. 


따오펑리옌은 단씨 가문의 양조장을 물려 받았고 후에 위잔아오가 찾아와 일꾼이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안방을 차지하게 되죠.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아이가 또우꽌, 그의 아들이 바로 '나', 이 '나'가 화자가 되어 삼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를 쳘치는것이 바로 소설 '홍까오량 가족'입니다.



붉은 수수밭에서 따오펑리옌 역을 맡은 공리. 이 작품의 그녀의 데뷔작



수수밭 위에서 펼쳐지는 끈적끈적한 남녀상열지사, 이것이 '홍까오량 가족'의 전부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의 주 무대는 1930년대. 바야흐로 일제의 침략이 거세던 시기였죠. 칠점매화총 - 탁자 위에 매화 모양으로 일곱개의 동전을 쌓아둔 뒤 탁자에는 흠집하나 없이 동전만을 쏴 맞추는 기술 -, 총쏘기의 달인이자 까오미현의 악당인 위잔아오는 항일 민병대의 사령관이 됩니다.


대악당 위잔아오는 벙어리, 머저리, 멍청이, 겁쟁이 등을 데리고 일본군 트럭부대를 습격, 장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립니다. 하지만 민병대는 위잔아오와 아들 또우꽌을 남기고 전멸해요. 부대를 먹이기 위해 밥을 싸들고 오던 따오펑리옌조차 일본군의 기관총에 가슴이 뚫려 숨을 거둡니다. 두 부자가 거머쥔 승리에는 상실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고향, 따뜻하고 포근하고 아름다운 나의 집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불타 버리죠.


민병대의 전멸은 연합 전투를 벌이기로 했으나 배신한 국민당 부대(우익) 때문이었어요. 그들은 뒤늦게 나타나 전리품들을 가로챕니다. 위잔아오는 국민당 부대 사령관을 죽이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어요. 잔아오에게 남은 부하는 아들 또우꽌이 전부였으니까요. 코흘리개에 넝마를 걸친 거지 부대 팔로군(좌익)은 숲 뒤에 숨어 전투를 지켜보다 얼마 남지 않은 전리품이나마 구걸하고자 뻔뻔한 얼굴을 들이밉니다. 


나라를 지키는 방식에도 두 개가 있는 셈이죠. 이념을 내세운 자들은 결코 협력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씨 부자를 죽이고 여자를 가로챈, 파렴치하고 잔인한 위잔아오지만, 진짜 악당은 이념의 혓바닥으로 민중을 괴롭히는 이런 자들이 아닐까요? 위잔아오는 읽을줄도 쓸줄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나라를 구하는데 자기 몸을 바치는걸 아까워 하지 않았습니다. 허기진 역사는 이렇듯 뒤를 돌아보지 않는 민중의 시체를 먹고 전진하는 법이죠.


살아남은 사람들은 겹겹이 쌓인 상실을 즈려 밟고 꾸역꾸역 살아 나갑니다. 무엇을 위해서? 거창한 이유는 절대 아니죠. 그들은 땅에서 태어났고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돌아간다는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받아 들입니다. 그 누런 땅 위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채, 소리를 지르고 욕을 내뱉고 웃고 떠들고 개고기를 씹어 먹으면서.





1987년 '붉은 수수밭'을 보고 느꼈을 서양인들의 충격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이 상상했던 중국인은 누런 옷을 똑같이 맞춰 입고 회색빛 얼굴을 한 채 맥없이 걸어가는 좀비었을 거에요. 그런데 붉은 스크린 위로 또렷한 개성을 지닌 인간들이 뛰쳐나올 듯 꿈틀대고 있었던 거에요. 그들은 중국을 다시 봤죠. 그 안에서 인간을 발견한 겁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군자란 2013-01-08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수수밭을 보고싶어 집니다. 책까지도... 소설류의 책을 손놓은지가 꽤 되는데 과연 읽을 수 있을지..내 자신을 지켜봐야할 듯...

한깨짱 2013-01-08 23:03   좋아요 0 | URL
소설 읽어보세요! 문학은 정말 위대한 것 같아요. 특히 모옌의 소설은 표현의 다채로움에 감탄하게 되네요.
 
광해, 왕이 된 남자
이주호.황조윤 지음 / 걷는나무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어떻게 써야 팔리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펴든 책 '광해 왕이 된 남자'. 천만 관객이 든 영화라면, 과정이야 어떻든 그 이야기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렇게 수준 낮은 드라마에는 잘도 열광 하면서 왜 영화에만큼은 그토록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르겠습니다. 돈을 내기 때문인가요?


광해는 대체로 좋은 평을 받기는 했지만 일부에선 '억지로 울리려 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억지로라도 독자를 울릴 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광해가 재미있는 이유요? 우선 술술 읽힙니다. 260페이지 짜리 장르 소설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근엄한척 해봐야 남는거 하나 없습니다. 날카로운 정치적 견해나 치밀한 역사 연구에 감탄하기 위해 광해를 산 사람이 있겠습니까? 장르 소설은 우선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럴려면 쭉쭉쭉 진도가 나가야 되요. 쭉쭉 진도가 나간다는건 뒷 이야기가 궁금해 죽겠다는 얘깁니다. 


광해는 그런 소설이에요. 구중궁궐 은밀한 왕궁 안에서 질퍽한 음모가 벌어집니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가 있고 그걸 막으려는 자가 있어요. 첨예한 갈등이 불꽃을 튀면서 가슴을 졸이게 만듭니다. 책장이 훨훨 날아 다녀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 하선은(주인공) 결국 죽을까? 그럼 광해는?


소재가 광해였다는 것도 좋았어요. 솔직히 광해가 누군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 나라 관객들 잘 모르잖아요. 바꿀 수 없는 사실. 정해진 결말. 역사를 영화화할 때 가장 큰 걱정거리 하나가 없어진 거에요. 사람들이 모르니까, 이야기의 긴장감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겁니다.


둘째로 도승지 허균. 저는 허균이야 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이 조선의 역사를 잘 모르는건 다행인데, 그렇다고 너무 모르는것도 문제에요. 그걸 허균이 해결해 줍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허균이에요. 홍길동의 아버지. 


같은 아비의 자식이라도 어느 뱃속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신분이 구별되던 조선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서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웅 활극을 그린 남자. 그렇게 진보적이었던 남자가 한 나라의 도승지(현대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합니다)입니다. 그리고 정사에 있어서까지 파격을 일삼았죠. 통쾌합니다. 한 나라의 정치인이라면 대국을 앞에 두고도 당당할 수 있는 패기와 기개가 있어야죠. 우리가 바라던 정치인이 바로 이런거 아니겠습니까?


셋째로, 이 소설 웃깁니다. 그게 영화화된 이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나라 관객들이 가장 많이 남기는 감상평이 '남는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관객들에게 적당히 진지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커다란 웃음을 안겨주면 대체로 이런 얘기는 사라집니다. 진지한 주제 속에서 활짝 핀 웃음. 이게 바로 팔리는 글의 조건이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전 이 소설이 별로였어요. 역사가 너무 파괴됐습니다. 멸종했어요. 우리에게 역사는 그저 이야기거리에 불과한가? 그래서 우리가 이토록 비참한 현대사를 쓰고 있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건 역시, 지금 우리의 아픔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지도자. 국민을 하늘처럼 여기고 권력을 돈 벌이 수단으로 삼지 않는 지도자. 국가를 위해선 그 높은 자리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지도자를 기대하면서. 우리 모두 19일날 투표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빛을 베다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옌은 1955년 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문화 대혁명을 경험했어요. 중국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끔찍했던 십년. 고귀한 공산 중국에 스믈스믈 파고드는 더러운 부르주아 정신을 깨끗히 정화해버리겠다는 의도. 지주 출신의 자손들은 학교를 떠나야 했고 막무가내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습니다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했어요.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동생이 형제를. 1966년에서 1976년까지 중국에서 사람을 죽이는 법은 매우 쉬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골라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부르주아로 둔갑시킵니다. 부르주아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전부 죽거나 더 이상 회생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파괴됐죠.


사실 문화 대혁명은 국가 경제 부흥에 실패한 마오쩌둥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친위 쿠데타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의도라도 오로지 그것만이 정의라고 선언할 때 의도는 비참한 폭력으로 변하고 맙니다. 하물며 불순한 의도야 오죽하겠습니까.


아이러니한건 이 비참한 10년이 그 어느때보다 훌륭한 소설가와 화가, 철학자와 정치인을 낳았다는 거에요. 지금 중국을 이끄는건 이 10년을 말로, 그림으로, 정치로 비판하며 반성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그 주인공중 하나, 모옌의 '달빛을 베다'입니다.





달빛을 베다에 수록된 12편의 단편에는 가슴 저미는 애통과 목구멍 가득 차오르는 억울함, 체제를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매가 짙게 베어 나옵니다. 문화 대혁명을 경험한 작가라면 애통과 억울함, 비판 의식이 없을 수 없겠죠. 동시대의 작가로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어 본게 전부지만 그 시대의 작가들이 모두 이런점을 갖고 있을거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의 소설가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와 주제로 문화 대혁명이라는 역사의 찌꺼기를 뜯어 먹고 살아가는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당대에 우뚝선 소설가라면 누구나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목소리를 갖기 마련이죠. 제가 모옌에게 발견한 건 두 가지입니다. 바로 향토적 색채와 세상에 대한 깊은 공포에요.





모옌의 소설에선 한 쪽 한 쪽 짙은 흙냄새가 풍겨옵니다. 때로 그 흙냄새는 누렇게 물든 밀밭을 사르르 흔들고 지나는 바람 냄새로, 끈적 끈적 노송을 타고 내리는 송진 냄새로, 코 끝을 훅 스치고 지나가는 비릿한 강물의 냄새로 바뀌곤 합니다. 사방 가득한 자연의 냄새. 아마도 현대의 중국인들은 모옌의 소설을 읽으며 잊혀진 대지의 숨결을 추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물과 밀밭, 소나무 숲을 대신하는 건 삐뚤빼뚤 요란하게 늘어선 빌딩과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공장들일테니까요. 


그런데 이 향수는 곧 추억하고 싶은 않은 시간과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연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여 놓여 있는데, 사람들은 왜 변해 서로를 찌르고 공격 할까요? 아름다운 대지 위에서 날뛰는 살쾡이 같은 인간들. 이 부조화는 모옌의 소설을 더 강한 슬픔으로 옭아맵니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픈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짙은 흙냄새가 소설의 겉 모습을 구축한다면 그 내면을 휘감고 있는 것은 등골이 쭈삣한 공포입니다. 모옌은 실제로 공포 소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단편 두 작품을 이 책에 싣고 있습니다. 하나는 악마같이 검은 개가 주인을 물어 죽이려하는 '목수와 개', 또 하나는 이유없이 소나무에 묶여 죽음을 맞는 소년의 이야기 '엄지 수갑'입니다. 


모옌의 공포는 단어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때에야 드러나는 은유적인 것이 아닙니다. 새파란 새벽녘에 뜩하고 나타나 온 정신을 마비시키는, 귀신같은 섬뜩함이 번뜩번뜩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편의 공포를 읽으면서 절절히 깨닫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보다 무서운게 사람이다'는 말입니다. 모옌은 나이가 들어서까지 귀신의 존재를 두려워할만큼 겁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화 대혁명은 이 순진한 소년에게 진정 무서운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줬습니다. '엄지 수갑'의 소년이 느끼는 공포는 그 거대한 검은개가 뿜어대는 불길함을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천하가 태평했다면 모옌은 드라마나 영화의 각본을 쓰며 편안한 이야기꾼으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모옌의 소설에는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그리워하는,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의 모습이 오롯이 베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소년이 문화 대혁명을 맞아 또렷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고, 어른이 되고, 노벨상을 받는 소설가가 됩니다. 개인에겐 참 잔인한 일이지만,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역시 사실인가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캐치-22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6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부터 글을 좀 쉽게 쓰려고 합니다. 조곤조곤, 쉬엄쉬엄 옛날 얘기 하듯, 물 흐르듯 그렇게. 첫 번째 작품은 조지프 헬러의 '캐치-22'입니다.






'캐치-22'를 알게 된 건 다른 사람의 소설에서였어요. 커트 보네거트였던가 다른 사람이었던가. 정확한건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소설가들이었을 거에요. 그들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캐치-22'를 최고의 소설로 꼽았습니다. 이렇게 연을 맺게 된 책들은 실패할 확률이 적지요. 


'캐치-22'는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미 공군 폭격수들의 소동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요사리안! 요사리안은 벌써 50회 이상을 출격했지만 승진에 대한 욕심으로 50회, 55회, 60, 70, 80회! 자꾸만 횟수를 늘리는 캐스카트 대령 탓에 똥냄새 나는 전쟁터에 발이 묶인 불쌍한 폭격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대응법은 두 가지입니다. 애국심으로 정신을 마비시켜 전장에서 장렬히 폭사하던가 아니면, 미쳐 버리던가. 요사리안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요사리안은 자신이 정신병자이므로 더 이상 출격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함정에 빠지고 말아요. 함정은 캐치-22. 캐치-22는 공군 규정집으로, 요사리안이 귀향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대고 있습니다.


1. 미친 사람은 폭격에 나갈 수 없다.

2.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미친것이 아니다. 


머리가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 빠져 나갈 수 없는 영원의 미로. 비논리적 논리성, 불합리, 미치고 펄쩍 뛸 노릇. 네, 이 소설은 부조리 문학입니다.





현대인이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역시 세계 대전을 통해서였습니다. 데카르트가 시작하고 뉴턴이 마무리 지은 근대 사회에서 인간과 짐승을 구분짓는 제1 기준은 바로 '이성'입니다. 인간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잘나빠진 이 인간이 수 십만의 동족을 살해하고 귀중한 유산을 파괴하는 폭력적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른다면, 이걸 과연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부조리 문학이, 그저 비뚤어진 지식인들이 만든, 대단히 모호하고 난해한, 현대 사회의 '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조리는 말이죠, 이 개같은 세상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삶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요사리안에게 전쟁은 사지가 날아가고, 사방으로 피가 튀고, 포탄 소리가 요동치는 현실이었지만 캐스카트 대령과 그 밖의 장군들에겐 승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가장 많이 죽였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고 승진을 합니다. 본국의 군수품 제조사들은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이 회사에 투자한 부자들은 다시는 맞을 수 없는 호기를 누립니다. 그들에게 전쟁은 완벽한 비지니스죠. 그들에게는 이 아수라장을 멈출 이유가 전혀 없어요.저는 아귀를 만나기 위해 굳이 지옥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귀는 우리 옆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지옥이에요. 알베르 카뮈는 '현재를 체험한 자만이 지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부조리 문학의 대가였던건 결코 우연이 아니죠.



진정한 인간. 카뮈.



부조리 문학의 매력은 비논리와 비문이 얽히고 설키는 가운데 불현듯 번쩍하고 진리가 나타나는데 있습니다. 그 날카로움은 정말 섬뜩할 정도에요. 다음은 요사리안이 군의관에게 찾아가 자신이 미쳤기 때문에 더 이상 폭격을 나갈 수 없다고 알리는 대목입니다.


"난 돌았어. 미치광이지. 이해가 안 가? (중략) 난 진짜 정신 이상이야."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해를 못하는 다네카 군의관의 무능함에 요사리안은 어리둥절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나? 이젠 자네가 내 전투 임무를 면제시키고 날 고향으로 보낼 수 있어. 그들은 미친 사람을 죽으라고 내보내지는 않을 거야, 안 그래?"


"그럼 미치지 않았다면 누가 나가지?" (캐치-22 2권, 160p. 민음사)


광인이 진실을 말하는 세상이라면 미친건 세상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요사리안은 미쳤지만 미친게 아니에요. 부조리한 세상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겁니다. 대단히 정상적인 일이지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해요. 무슨 말인지 다 아실거라 믿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문제는 경제라고 멍청아!'


바보 천치, 한참 봐줘도 멍청이를 면하지 못하던 1993년 빌 클린턴의 선거 전략실 화이트보드에 저런 글이 씌였다. 참모진들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채 빙빙빙 겉만 돌고 있었다. 하지만 저 한 마디로 모든게 확실해졌다. 문제는 경제였고 그들은 멍청이였다. 


빌 클린턴은 미국의 42대 대통령이 된다. 4년 뒤엔 재선에도 성공했다. 민주당 후보가 재선에 성공한 사례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미국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14년 뒤 동아시아의 소국 대한민국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도 문제는 경제였다. 먹고 살기는 힘들었고 사람들의 마음은 팍팍했다. 정권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던 때였다. 이 때 개고기를 좋아하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 정치인이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는 문제가 경제라고 말했다. 747 공약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개고기를 좋아하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 정치인이 정말로 경제를 살려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왜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동시에 존재하는가. 누구는 왜 부자가 되고 누구는 왜 가난한가. 미국에는 먹을 것이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왜 시에라리온에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먹일 피죽 하나 구할 수 없는가. 먹고 사는 문제에는 이렇게 아이러니와 부조리가 넘실댄다. 안타까운 일인지 천만다행인지, 이 문제를 풀어 보겠다고 일생을 바친 사람들 또한 후지락 페스티발 야외 화장실의 똥만큼 차고 넘친다. 그 똥통에 우리 대통령님이 있었던건 말할 것도 없고.







빈곤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까지 빈곤을 설명하는 이론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지리적(기후) 문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만큼 고지식하기 이를데 없는 이 답답한 이론은 모든 경제적 빈곤이 지리적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지구상의 빈곤국이 주로 적도 주변의 타오를듯 뜨거운 국가라는 걸 보면 얼핏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두게 이미 끝난 이론이야. 


18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였던 몽테스키외는 뜨거운 나라의 국민들이 게으르고 호기심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 혁신에 대한 의지가 적고 노동 생산성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경제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가난한 서열로 둘째가라면 상당히 서운해할 노스 코리아의 경우 꽤 자랑할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룬 사우스 코리아와 살을 맞대고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중국과 마주보고 있는건 말할 것도 없고! 놀라운건 아직도 이 이론에 기대 경제 빈곤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거다. 세상에!


둘째, 문화적 문제. 생각의 노후함으로 따지면 지리 가설에 뒤지지 않고 나아가 인종차별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는 이 이론은 번영이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의 신봉자들은 아마 찢어지게 가난하던 한국의 70년대를 보면서 '유교 사상에 찌들어 있는 한국인들은 옛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조직 시스템 탓에 혁신이 어렵고 경쟁할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유교 문화에 대한 영향은 일본도 만만치 않았다. 추가로 중국을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내 알기론 한국, 일본, 중국만큼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경험한 나라는 이 우주상에 없다. 


마지막, 무지 가설. 정치인들이 멍청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보고 있으면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은 경제 개발의 방법을 몰라서 실천하지 않는게 아니다. 그들에게 경제를 개발할 동기가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정치인들도 도로, 항만, 국립 병원과 학교, 통신 등의 인프라가 경제 개발에 필수적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이아몬드, 석유, 커피 등 넘쳐나는 자원이 있다. 그걸 독점하고 유통할 만큼의 인프라만 구축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온 국민이 혜택을 입을 정도로 인프라가 구축되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 유통되기 쉽다. 꿀같은 권력을 놓치기 쉬워진다는 얘기! 옛말에 나쁜짓을 하려면 더 똑똑해야 된다고 했다.



담장 하나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미국 애리조나 주의 노갈레스와 멕시코 소노라 주의 노갈레스. 한 쪽엔 번영과 평화가 한 쪽엔 빈곤과 불안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번영은 어디서 오는가?


두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 번영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의 수립이다. 공권력을 갖춘 정부의 존재는 무엇을 보장하는가? 바로 사유 재산 제도다. 


당신이 농사를 지어 열심히 일했고 상당한 수확을 거뒀다. 그 순간 무법자들이 나타나 수확한 농작물을 모조리 빼앗아 간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농기술을 도입하고 저수지를 만들고 도로를 확장할 생각이 들겠는가? 국가는 사유 재산을 보호해 경제 활동을 장려할 의무가 있다. 그러면 국민은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경제는 더더욱 활성화 된다.


문제는 오늘날 대다수의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을 착취하는 주체가 바로 국가라는 점이다. 아프리카의 극빈국들은 사악한 독재자들이 수십년 동안 나라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다그들은 독점한 권력으로 부를 착취하고 축적된 부를 부정 선거와 국민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에 투자해 권력의 독점을 영속화한다. 


바람직한 정치란, 모든 정당이 동일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해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정치 정의는 다양한 정당이 다양한 집단을 대변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함께' 전진할 때 이뤄지는 것이다.


견제없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썩고 만다. 썩은 정치는 국가의 부를 소수에게만 분배하고, 시민은 굶어 죽는다. 국가 번영의 두 번째 조건은 정치제도의 다원화, 쉽게 말해 민주주의다. 


국가 번영의 세 번째 조건은 '포용적 경제제도'다. 미국이 한 때 위대한 나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포용적 경제제도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건강하던 시절 그들은 독점을 싫어했다. 록펠러와 철강왕 카네기는 미국 정부의 철퇴를 피해갈 수 없었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마이크로 소프트도 그랬다.


독점이 나쁜 이유는 창의성을 말살하기 때문이다. 전기 자동차를 개발하는 연구소가 SK에너지에 합병되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다면? 쇠보다 단단한 종이를 만드는 포항공대 연구소가 포스코의 지원금이 끊겨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면? 기존에 부를 축적한 사람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길 원치 않는다. 독점은 창의적 인재들이 경쟁을 통해 혁신을 이뤄낼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막아 버린다. 새로운 기회는 그들에게 새로운 위험이고 없어져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들은 단순한 이론 논쟁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대 로마에서 부터 현대의 아프리카까지 역사적으로 드러난 구체적 사실을 이용해, 현대 사회의 최대 쟁점이며 경제학의 최대 난제인 '우리는 왜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저돌적으로 답변해 나간다.


이 책의 저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로빈슨이 채택한 언어가 어렵고 따분한 경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2012년 한국을 살고 있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통달한 경제 학자들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이며 재미난 옛날 이야기다. 두껍다고 겁먹지 말고, 따분할까 오해하지 않고 천천히 한줄 한줄 읽어 나간다면 빈곤과 번영의 작은 실마리 쯤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