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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 2024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문제는 경제라고 멍청아!'
바보 천치, 한참 봐줘도 멍청이를 면하지 못하던 1993년 빌 클린턴의 선거 전략실 화이트보드에 저런 글이 씌였다. 참모진들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채 빙빙빙 겉만 돌고 있었다. 하지만 저 한 마디로 모든게 확실해졌다. 문제는 경제였고 그들은 멍청이였다.
빌 클린턴은 미국의 42대 대통령이 된다. 4년 뒤엔 재선에도 성공했다. 민주당 후보가 재선에 성공한 사례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미국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14년 뒤 동아시아의 소국 대한민국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때도 문제는 경제였다. 먹고 살기는 힘들었고 사람들의 마음은 팍팍했다. 정권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던 때였다. 이 때 개고기를 좋아하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 정치인이 영웅으로 등장한다. 그는 문제가 경제라고 말했다. 747 공약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개고기를 좋아하는 건설회사 사장 출신 정치인이 정말로 경제를 살려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왜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동시에 존재하는가. 누구는 왜 부자가 되고 누구는 왜 가난한가. 미국에는 먹을 것이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왜 시에라리온에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먹일 피죽 하나 구할 수 없는가. 먹고 사는 문제에는 이렇게 아이러니와 부조리가 넘실댄다. 안타까운 일인지 천만다행인지, 이 문제를 풀어 보겠다고 일생을 바친 사람들 또한 후지락 페스티발 야외 화장실의 똥만큼 차고 넘친다. 그 똥통에 우리 대통령님이 있었던건 말할 것도 없고.
빈곤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까지 빈곤을 설명하는 이론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지리적(기후) 문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만큼 고지식하기 이를데 없는 이 답답한 이론은 모든 경제적 빈곤이 지리적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지구상의 빈곤국이 주로 적도 주변의 타오를듯 뜨거운 국가라는 걸 보면 얼핏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두게 이미 끝난 이론이야.
18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였던 몽테스키외는 뜨거운 나라의 국민들이 게으르고 호기심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 혁신에 대한 의지가 적고 노동 생산성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경제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가난한 서열로 둘째가라면 상당히 서운해할 노스 코리아의 경우 꽤 자랑할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룬 사우스 코리아와 살을 맞대고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중국과 마주보고 있는건 말할 것도 없고! 놀라운건 아직도 이 이론에 기대 경제 빈곤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거다. 세상에!
둘째, 문화적 문제. 생각의 노후함으로 따지면 지리 가설에 뒤지지 않고 나아가 인종차별적인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는 이 이론은 번영이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의 신봉자들은 아마 찢어지게 가난하던 한국의 70년대를 보면서 '유교 사상에 찌들어 있는 한국인들은 옛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조직 시스템 탓에 혁신이 어렵고 경쟁할 동기를 부여하지 못한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유교 문화에 대한 영향은 일본도 만만치 않았다. 추가로 중국을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내 알기론 한국, 일본, 중국만큼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경험한 나라는 이 우주상에 없다.
마지막, 무지 가설. 정치인들이 멍청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보고 있으면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 정치인들은 경제 개발의 방법을 몰라서 실천하지 않는게 아니다. 그들에게 경제를 개발할 동기가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정치인들도 도로, 항만, 국립 병원과 학교, 통신 등의 인프라가 경제 개발에 필수적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이아몬드, 석유, 커피 등 넘쳐나는 자원이 있다. 그걸 독점하고 유통할 만큼의 인프라만 구축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온 국민이 혜택을 입을 정도로 인프라가 구축되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 유통되기 쉽다. 꿀같은 권력을 놓치기 쉬워진다는 얘기! 옛말에 나쁜짓을 하려면 더 똑똑해야 된다고 했다.
담장 하나 사이로 마주하고 있는 미국 애리조나 주의 노갈레스와 멕시코 소노라 주의 노갈레스. 한 쪽엔 번영과 평화가 한 쪽엔 빈곤과 불안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번영은 어디서 오는가?
두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 번영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의 수립이다. 공권력을 갖춘 정부의 존재는 무엇을 보장하는가? 바로 사유 재산 제도다.
당신이 농사를 지어 열심히 일했고 상당한 수확을 거뒀다. 그 순간 무법자들이 나타나 수확한 농작물을 모조리 빼앗아 간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농기술을 도입하고 저수지를 만들고 도로를 확장할 생각이 들겠는가? 국가는 사유 재산을 보호해 경제 활동을 장려할 의무가 있다. 그러면 국민은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경제는 더더욱 활성화 된다.
문제는 오늘날 대다수의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을 착취하는 주체가 바로 국가라는 점이다. 아프리카의 극빈국들은 사악한 독재자들이 수십년 동안 나라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독점한 권력으로 부를 착취하고 축적된 부를 부정 선거와 국민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에 투자해 권력의 독점을 영속화한다.
바람직한 정치란, 모든 정당이 동일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해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정치 정의는 다양한 정당이 다양한 집단을 대변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함께' 전진할 때 이뤄지는 것이다.
견제없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썩고 만다. 썩은 정치는 국가의 부를 소수에게만 분배하고, 시민은 굶어 죽는다. 국가 번영의 두 번째 조건은 정치제도의 다원화, 쉽게 말해 민주주의다.
국가 번영의 세 번째 조건은 '포용적 경제제도'다. 미국이 한 때 위대한 나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포용적 경제제도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건강하던 시절 그들은 독점을 싫어했다. 록펠러와 철강왕 카네기는 미국 정부의 철퇴를 피해갈 수 없었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마이크로 소프트도 그랬다.
독점이 나쁜 이유는 창의성을 말살하기 때문이다. 전기 자동차를 개발하는 연구소가 SK에너지에 합병되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다면? 쇠보다 단단한 종이를 만드는 포항공대 연구소가 포스코의 지원금이 끊겨 연구를 중단해야 한다면? 기존에 부를 축적한 사람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길 원치 않는다. 독점은 창의적 인재들이 경쟁을 통해 혁신을 이뤄낼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막아 버린다. 새로운 기회는 그들에게 새로운 위험이고 없어져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들은 단순한 이론 논쟁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대 로마에서 부터 현대의 아프리카까지 역사적으로 드러난 구체적 사실을 이용해, 현대 사회의 최대 쟁점이며 경제학의 최대 난제인 '우리는 왜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저돌적으로 답변해 나간다.
이 책의 저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로빈슨이 채택한 언어가 어렵고 따분한 경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2012년 한국을 살고 있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통달한 경제 학자들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이며 재미난 옛날 이야기다. 두껍다고 겁먹지 말고, 따분할까 오해하지 않고 천천히 한줄 한줄 읽어 나간다면 빈곤과 번영의 작은 실마리 쯤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