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소장판 1~6 세트 (묶음)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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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이라 하면 '터치(1981)'나 'H2(1992)'를 말해야 옳을 것이다. 다양한 스포츠를 그리긴 했으나 그의 전성기는 역시 야구 만화를 그릴 때였다. 대중이 흥분하기 쉬운 환경에서는 영웅을 그리기도 쉬운 법 아닌가. 아다치 미츠루의 야구 만화들은 일본의 야구 붐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는 대표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최고의 작품을 묻는다면 역시 '러프(1987)'다. 수영과 다이빙이라는 비인기 종목을 다뤘으며 아다치 미학이 완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는 점, 게다가 소장판본으로 여섯 권에 지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들이 그 제목과(Rough) 닮은 구석이 있고 또 그것과 공명을 이뤄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분출하는 것 같아, 나에겐 'H2'나 '터치' 보다도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작품을 몇일 전 마지막권의 주문을 통해 완전히 소장하게 됐다. 오랫동안 5권까지만 보유해 왔으나 문득 생각이 나 마지막 6권을 채워 넣은 것이다. 책장에 꽂기 전 간만에 만화를 펼쳐보니 그 깔끔하고 담백한 선이 눈에 가득했다. 흩으러졌던 마음까지 저절로 추스려지는 기분이었다.






주인공 니노미야 아미와 야마토 케이스케는 할아버지 대에 철천지 원수가 된 두 집안의 손녀 손자다. 원수가 된 사연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원수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아미는 야마토 케이스케를 '살인자'로 여기며 성장한다. 그 분노는 상당히 커 매년 설날 야마토 케이스케에게 '살인자'라고 쓴 연하장을 보낼 정도. 그런 두 사람이 우연찮게 한 고등학교에서 만난다. 그것도 다이빙부와 수영부. 모른척 하고 살래야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지척의 관계로서 말이다.


원수를 가까이서 보는 게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야마토 케이스케와 니노미야 아미는 둘 다 잘 생기고 예쁜, 착하고 뛰어난 학생들이었으니까. 얽히고 설킨 학창 생활 속에서 야마토 케이스케를 덮고 있던 분노의 껍질이 하나씩 하나씩 깨져나간다. 그 속에서 멋쟁이 남자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당연한 말씀. 상황은 케이스케 쪽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를 살인자로 부르며 미운 짓만 골라하는 여자애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굴복하는 건 남자의 특권이자 의무 아니던가?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엔 독특한 집안 사정 보다도 더 큰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나카니시 히로키라는 남자의 존재.


나카니시 히로키는 일본 최고의 수영 선수이자 어릴 때 부터 아미의 결혼 상대로 지목되어온 남자다. 케이스케의 할아버지 때문에 니노미야 집안이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줬던 게 나카니시 집안이었고 그런 인연으로 두 집안 사이에는 자연스런 혼담이 오갔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아미는 나카니시 히로키라는 물결을 타고 주어진 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겐 이제 야마토 케이스케라는 특별한 일이 생겼다.


나카니시 히로키는 소년이 남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파도였다. 그 파도는 한 쪽 발로는 꿈을 다른 쪽 발로는 사랑을 밟고 서 있다. 나에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거대해 감히 쳐다볼 수 조차 없는 존재를 라이벌로 맞아야 하는 소년의 무참함 뿐이다. 그러나 소년은 꾸역꾸역 전진해 나간다. 히로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파도에 불과하지만, 소년의 파도는 기어이 대양을 흘러가 철썩 대지를 때리고 마는 묵직한 힘이 있다.


마침내 두 남자는 마지막 경주를 위해 나란히 선다. 가슴을 울리는 출발 소리와 함께 오래된 워크맨에서 니노미야 아미의 고백이 흘러 나온다. 그 음성이 푸른 하늘에 사위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쯤 두 남자는 결승선에 다다랐을 테지만, 만화는 그 뒷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다치 미츠루는 과감한 침묵과 함축적 암시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침묵 속에서 말을 찾고 암시 속에서 의미를 밝혀야 하기에 그의 작품은 천천히 음미해야하며 서서히 스며들지만 그로써 자기도 모르는 새에 흠뻑 젖어 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침묵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곰곰히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알 것이다. 함축적 암시를 풀어본 사람이라면 그 암시가 얼마나 적합한 표현이었는지 깨달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이 그림으로 그려진 하이쿠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고작 17자에 불과한 한 줄의 시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걸어 오던가. 대사가 생략된 컷들엔 사실 대사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고 관련 없이 툭 던진 것 같은 말엔 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다치 미츠루의 재미라면 느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다치 미츠루 미학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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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과의 만남 - 사유의 스승이 된 철학자들의 이야기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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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다루는 출판사치고 '철학 입문서'에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회사는 없을 것이다. 철학 입문은 그야말로 모든 인문 분야의 숙원이요 과제며, 정석이자 로망이다. 


이유가 뭘까? 


맛을 한 번 보고나면 결국 와구와구 게걸스럽게 탐하고 마는 철학 구매자들의 왕성한 소비욕은 비지니스맨이라면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기회일 것이다. 철학 입문서는쟁반 위에 잘라 놓은 시식 과일. 일단 한 번 맛만 보라니까. 그러고 나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있을테니까!


한편 의무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아무리 발광해도 철학은 팔리지 않아. 니체는 신을 죽였고 대중은 철학을 죽였지. 의미심장한 얘기, 아무리 늘어놔봐도 따분한 말장난처럼 들릴 뿐이야. 그러니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얼음 위에서 속수무책인 북극곰이 되버린거다. 철학을 출판하는 사람들과 환경 보호 NGO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상실감을 공유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유야 뭐가 되면 어때. 비지니스 맨의 마음으로 책을 냈든, 아니면 철학에 대한 절절한 애정에서 출판을 했든, 어쨌든 이런 책들이 명맥을 유지한다는 건 철학을 사랑하는 흔치 않은 소시민으로선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처음 시작하는 철학'의 속편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책을 본 적은 없으나 아마도 고전 철학들을 다뤘을 것으로 짐작한다. 왜냐하면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이 현대 철학자 스무 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광스런 왕관을 받은 스무 명의 철학자들은 현대 철학사에 독보적 위상을 남긴 사람들과 여기에 더하여 작가의 선호도를 반영해 선정됐다. 면면을 보면 앙리 베르그송과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 비트겐 슈타인을 거쳐 사르트르, 카뮈에 이르렀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로 마무리 된다.


이 책이 좋은 점은 '위대한 생각'을 창조해낸 사람을 굳이 철학자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를 두 번째로 다룰 뿐만 아니라 인도의 정치인 마하트마 간디, 자신을 철학자로 부르길 거부했던 유대인 여성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 역시 철학자임을 거부한 알베르 카뮈, 인류문화학자 레비 스트로스를 이 위대한 명단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에 윌러드 밴 오먼 콰인, 메를로퐁티, 알튀세르 같은, 실제로 위대하지만 대중에게는 그닥 위대하지는 않은 철학자들도 이름을 올린다. 위대한 생각엔 하이데거나 사르트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작가의 사자후라고나 할까. 위대한 생각이란 본디 편견과 차별의 바위를 깨부수며 거침없이 흐를 때 진정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법이다. 매번 그 나물에 그 밥인 현대 철학에 질린 사람이라면 이 반가운 면면에 새로운 흥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책 내용은 쉽고 가볍다. 한 명당 15페이지 내외를 할당해 내용이 지나치게 심화되는 것을 막고 한 명 한 명 빨리빨리 알아가는 재미를 선사한다. 물론 이 쉽고 빠름이 철학에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는 분명 일정량의 고통을 통해서만 흡수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아무리 세태가 변했고 그것을 원한다 할지라도 철학은 결코 한 입에 꿀떡 삼킬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기 부족한 내용을 15페이지로 줄여야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삭제될 수 없어 아우성치는 사상의 비명들이 존재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책을 쓰다 보면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고 누구와 논쟁했고 누구와 사랑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 이렇게 5페이지를 빼고 나면 태산과도 같은 그들의 철학을 불과 10페이지에담아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만이 남는다.


책 제목이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이듯이 오롯이 그 생각에만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순수한 사상의 덩어리만을 꾹꾹 눌러 담은 뒤 형틀을 돌려 생각의 정수, 그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내고 짜냈다면, 불가해 보이는 15페이지에도 충분히, 양질의 엣센스가 담기지 않았을까? 읽는 동안 나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해봤다.


이 책은 원래 '간략하게 보는 현대 철학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 그 목적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확하면서도 접근 가능한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지극히 단순한'(p. 7) 것이다. 이는 입문서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목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그 목표를 아주 충실히 달성하고 있기 까지 하다. 그야말로 '언'과 '행'이 일치하는 셈. 그러니 나의 불만은 본격적인 현대 철학은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가벼운 입문서에는 갈증을 느끼는, 참으로 어설픈 독자의 어정쩡한 불만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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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서정록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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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이 책을 손에 든 이유는, 역시 그 무시무시한 제목 때문이었다. 이런 제목을 보고나면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지. 사실 다자의 오사무도 우연히 들른 도서관에서 '인간 실격'이란 제목에 뜩, 걸려버려 지금까지 팬이 된 경우거든. '어둠의 왼손'을 봤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던거야. 줄을 딱 땡기는 순간 어부의 뇌리에 꽂히는 월척의 느낌이랄까?


이 제목이 웬지 모르게 느낌 있는 이유는 제목을 듣는 순간 그 형상이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둠과 왼손이라니, 평소엔 가깝게 지낼래야 도무지 그럴 수 없는 두 단어지, 게다가 어둠이란 걸 떠올리는 순간 머리 속은 그야말로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버려, 왼손은 이미 이 어둠 속에 사로잡혀 형체도 없어 사라지 버린다구. 하지만 형체를 떠올리지 못해도 다가오는 느낌이라는 건 있다. 발 뒤꿈치에 달라 붙은 그림자가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와 쿡! 등뒤를 찌를 것만 같은 공포, 스릴러, 서스펜스. 아마도 이 제목을 본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스릴러라고 생각할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둠의 왼손'은 SF다. 그것도 무섭지 않은 SF. 작자는 어슐러 르귄이라는, 'SF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라고 평가받는 대문호다. 직전에 읽은 책이 바로 같은 SF 장르인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마치 사막을 걷는 듯한 무미건조한 문장에 마음이 바짝 말라 있었던 터라 르귄의 문장이 더더욱 가슴 깊이 스며들었던 것이겠지만, 이 책 '어둠의 왼손'은 펑펑 눈이 내리는 겨울 행성 '게센'을 그리고 있음에도 문장 하나하나가 오히려 포근하고 보드라웠다. 아, 과연 대 문호라 불릴 만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적어도 한 페이지 건너 한 번씩은 가슴을 쑥 파고 들어왔다. 







배경은 눈과 얼음의 행성 '게센', 이곳의 주민들은 한 몸에 남녀 양성을 모두 갖고 있다. 26일마다 돌아오는 '케머기'에 남자 혹은 여자의 성을 스스로 선택해 사랑을 나누고 자식을 갖는다. 주인공 겐리 아이는 일종의 우주 연합이라고 볼 수 있는 에큐멘의 대사로서(지구인) 게센과 교역 협정을 맺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다. 


게센인들이 겐리 아이의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그 비참한 최후를 눈에 새긴 듯이 기억하는 우리인지라 에큐멘을 대하는 게센인들의 신중함과 머뭇거림을 답답하게 여길수도 있겠으나, 어디 신문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스르르 스며들 수 있는 것이겠는가? 모름지기 생명이란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에 저항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저항은 점차 두 가지로 분화된다. 하나는 자극, 또 하나는 적대다. 자극을 택한 집단은 그것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하는 반면 적대를 택한 집단은 그것을 자기 생명의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어느 사회고 이 두가지 의견이 충돌하기 마련인데 후자로 중론이 모아진 사회치고 그 끝이 아름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에큐멘은 제국주의 시대의 선진국처럼 무력으로 강화를 요구하는 집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점잖음이 오히려 자신의 대사 겐리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 겐리 아이는 다가온 새 시대가 자기 자리를 지켜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놓고 주판알을 튕기던 정치인들의 음모로 강제 노동 수요소로 보내진다.







행성 게센의 두 나라 '카르하이드'와 '오르고린'에 대한 묘사가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을 닮아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둘의 대립이 결국 겐리 아이라는 '제3의 길'에 의해 봉합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게센인들이 양성을 모두 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생명체라는 점에서 '어둠의 왼손'은 단순한 SF를 넘어 풍부한 의미와 해석을 지닌 소설로 나아간다. 그 의미는 부질없는 이념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지독할만큼 고착되버린 남녀 성역할에 대한 재고의 촉구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의미의 경중에 따라 소설의 위대함을 측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읽는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의 가슴에 또렷한 흔적을 남기는 소설이야말로 진정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함박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밭에 오롯이 새겨져 있는 순결한 발자국처럼 말이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겐리 아이는 지구인에게는 너무나 혹독한 게센의 겨울에 생명을 바쳐 견디고 있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카르하이드'의 옛 재상 에스트라벤에 의해 구출된다. 에스트라벤은 국가의 이익보다 평화를, 게센인보다 전 인류를 더 사랑했다는 이유로 카르하이드에서 추방된 정치인이었다. 겐리 아이는 처음에 에스트라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얼음길, 빙하 위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화산,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위에 간신히 뿌리 내린 한 움큼의 텐트 안에서 두 외계인은 서로의 입장과, 생각과 그리고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자기 손바닥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이제 그 둘은 서로에게 완전히 의지해 걸어나간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두 사람은 내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와 한 발짝 한 발짝 고귀한 발자국을 남기고, 나는 두 사람이 어깨에 맨 것이 사실은 침낭과 텐트와 식량이 든 가방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역사였음을 깨닫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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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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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을 읽고 리뷰를 쓸라치면 언제나 이런 고민에 빠진다.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감상을 일일이 적어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긴 글을 주절주절 써야 하나, 아니면 세인의 평가와 내가 받은 전반적 인상을 적당히 버무려 보는 이들은 그저 알쏭달쏭, 도대체 책을 사야하는 건지 말아야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상망측한 글을 써야하나 같은 고민 말이다.


전자의 방법을 쉽게 쓸 수 없는 이유는 역시, 힘이 들어서다. 이 방법은 쓰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힘이 든다. 게다가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단편집이라고 해도 독자의 사랑은 그 모두에게 고루고루 분배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다보니 어느 작품은 잔뜩 정성을 들이게 되고 또 어느 작품은 설렁설렁 쓰게 되 아무래도 균형이 맞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개 후자의 방법을 택하고 만다. 그럴 수 밖에 없지. 내게 글쓰기는, 언제나 공포의 순간이니까.





이 책은 SF다. 이 과감한 명제를 선술하는 이유는, 이것으로 인하여 적어도 70% 이상의 독자가 이 리뷰를 읽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SF는 무협지와 더불어 글쓰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낙인이다. 이유야 어떻든 이 바닥에 발을 들인 이상 평생 이류 작가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 SF 작가들의 운명. 이 잔인한 선입견은 SF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속설에서 기인한다. 기껏해야 애들이나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는 무시. 


'니가 애냐? 아직까지 그런거나 보고 있게?'


단언컨대 자신이 애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양있는 어르신들의 95%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애들이나 보는 거라고? 언어학과 종교, 수학과 물리학, 프로그래밍과 명명학을 이해하는 아이라면 가능할지도. 


나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 과학을 100%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여러 평가에 따르면 테드 창의 과학적 정밀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게 일반적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니, 도대체 어떤 작품을 써내야 이렇게 무시무시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을 얻기 위해 나는 벌써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했다.


두 번이나 정독했지만 사실 두 번 모두 그의 과학적 엄밀성에 감탄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 과학적 엄밀성이란 걸 따져볼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요 또 그런 건 그닥 나의 구미를 당기는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놀란 건 과학이 아니었다. 나를 감동시킨 건 과학 이외에 그가 가진 다양한 지식이었다.


이른바 통섭이라는 화두가 몇 년 전부터 대한민국의 여기저기를 기웃대는 모양이지만 아직까지 그 중요성이 진지하게 다뤄진 적은 없는 것 같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 워낙에 절실한데다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시험에 나오는 것만을 달달 외우는 것이 배움의 왕도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회니까, 통섭따위 사실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 그런데 외국을 보면 인문학으로 IT 업계를 이끈다거나 철학자가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테드 창도 바로 그런 류의 사람이다. 아이비 리그의 명문 브라운 대학에서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저자는 과학보다는 글쓰기가 맘에 들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라는, 그리고 과학적 엄밀성 이라는 말에서 전문 지식이 난무하는 긱(Geek) 소설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테드 창의 소설엔 확실히 과학 이외의 것들이 더 묵직하게 자리한다. 소설은 과학에서 시작했나 싶지만 어느덧 신학으로 향하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힘차게 반동한 뒤 언어학, 명명학, 수학, 물리학, 신경생리학 등으로 눈부시게 산란한다. 뿐만 아니다. 이른바 '기발한 상상력'으로 뭉뚱그려지곤 하는 소재의 특이성은 이미 범상한 장르 소설의 한계치를 훌쩍 뛰어 넘어 버린다.


내가 특히 감동을 받은 작품은 이름의 신성한 힘을 주제로 한 '일흔 두 글자'와 순차적 문법 규칙을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을 동시에, 하나의 전체로서 전달하는 어의문자(語義文子)를 소재로 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였다. 두 작품은 모두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만물의 이름을 지을 때 썼던, 인류가 오래 전에 알고 있었지만 바벨탑 이후에 잃어버린 그 태초의 언어를 암시하는 듯 했다. 발터 벤야민의 철학이기도 한 이 신비주의적 언어 철학은 요 몇년 동안 내 마음 속에 단단히 뿌리 내린 믿음과 깊은 조응을 이룰 수 있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첫째, 이런 류의 소설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는 특징인 뒷 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쫄깃함이 없다는 점이다. 주제가 가진 철학에 이야기 본연의 재미가 상당수 희생됐던 걸까? 둘째로 테드 창의 문장은 그 주제가 가진 심오함에 비해 아름다움의 깊이가 부족했다. 장르의 특성인가보다고 생각하려는데 뒤이어 어슐러 K. 르귄의 '어둠의 왼손'을 읽고는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 문장의 아름다운은 결코 장르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테드 창은 똑똑하고 재주 많은 사람들의 글이 으레 그렇듯 재기발랄하지만 표현에 대한 고민은 부재해 있는, 그런 류의 문장을 구사했다.


상당한 비난을 감수할 각오로 극도로 단순화해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좀 더 나이가 든 뒤에 읽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라고나 할까. 두 작가 모두에게 실례가 되는 줄은 알지만 워낙에 정리를 좋아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두 사람 모두 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리라 믿고 이 어수선한 글을 서둘러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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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만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7
이탈로 칼비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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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마침내 소설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20년간 헤매던 미로에서 드디어 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문을 나서는 순간 햇빛이 쏟아져 내려 질끈 두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뜨자 내 앞에 거대한 이야기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내가 미로를 헤매는 동안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이야기들이 거기 그렇게 죽어있었던 것입니다.


오열하는 슬픔이라기 보다는 바위처럼 묵직한, 차가운 슬픔을 안고 나는 무덤을 올랐습니다. 무덤은 생각보다 크고 높았습니다. 나에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었나 놀라울 정도였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람이라도 쐬면 이 무거운 슬픔이 조금이라도 씻겨져내릴까 싶어 저는 정상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발을 디딘 순간 다시 한번 무겁고 차가운 슬픔이 가슴을 쿡 찔러왔습니다. 


발 밑에서 희미하게 꿈틀대는 작은 진동을 느낀 건 바로 그 때였습니다. 저는 죽어서 힘이 다한 물컹한 이야기들을 손으로 걷어 내며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이야기 한 다발을 발견해드랬죠. 이야기는 거의 죽은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선한 바람이 불자 숨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흐물거리던 몸체가 단단해지고 창백했던 얼굴에 신선한 광채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진동은 발 밑을 찌릿찌릿하게 만들 정도로 커져있었습니다. 저는 흥분한 마음에 주변의 시체들을 걷어내 더 많은 공간을 만들어 냈죠. 그 순간 이야기는 크게 기지개켜듯 더미 속을 뚫고 나와 하늘에 강렬한 빛 한 줌을 토해내더니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잠시 후 거대한 진동과 함께 형형색색의 이야기가 솟구치더니 앞서 날아간 이야기가 그려 놓은 빛의 통로를 따라 어느 하나는 바다로 또 하나는 강으로 또 다른 하나는 숲으로, 산으로, 그리고 저 너머 무지개 속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들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제가 큰 상실감을 느꼈을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아니 슬픔이라니요? 오히려 행복했죠. 즐거웠습니다. 이야기들이 아무리 멀리 날아갔다 한들, 그것이 얼마나 꼭꼭 숨어 있다고 한들 그들은 모두 제 세계 안에 있습니다. 지금 제 노트에는 이야기들이 날아가면서 뿌려놓은 편린들이 빽빽히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단서로 꼭꼭 숨어버린 이야기를 찾아 평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강한 확신에 온 몸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위 이야기는 모두 내가 경험한 실화다. 나는 이 소설,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 만화'를 읽고 비로소 내 머리 속에 빅뱅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불쌍한 과학자들은 빅뱅이니 양자역학이니 신기하고 알쏭달쏭한 현상들을 찾느라 바쁘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결과를 목격할 뿐이다. 현상들이 아무리 정교하게 동작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게 설명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이 모든 것들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현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터져 나올 뿐이다. 한 가지 희망은 꼬리의 끝에서 언젠가 제1 원인이 나올 거라는 믿음이다. 이런 희망을 품고 그들은 영원히 이어질 꼬리를 죽을 때까지 잡아 당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도 나의 세계, 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다. 나는 결국에 소설가가 되고 마는데, 그건 내가 재능이 있기 때문도, 열심히 습작을 하기 때문도, 수 백권을 책을 읽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소설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저 나보다 먼저, 이탈로 칼비노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된 뒤에도, 어쩌면 나는 그저 이탈로 칼비노의 그림자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이미 늙은 크프우프크의(Qfwfq, 이 책 우주만화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어버렸고, 


우주는 영원한 팽창을 시작해 버린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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