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 (20주년 기념판) - 에셔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1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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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나온게 벌써 20년이라고 한다. 참으로 세월이란! 


이 책은 1994년 1월 15일에 초판이 나왔다. 오랜 군부 독재 끝에 탄생한, 이른바 문민정부 시대의 책이다. 진중권은 자신이 이 책을 쓸 무렵엔 이미 그가 추구하던 이상 사회가 붕괴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해한다. 군부 독재라면 치를 떨었던 한 남자가 그 군부 독재자들의 힘을 빌려 대통령이 된 시절이니까.


뜨거운 80년대를 산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90년대는 위선적 민주주의와 위태로운 번영이 뒤범벅된 역겨운 시대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 남자는 구역질 나는 현실을 떠나 이상적 진리 탐구의 영역에 발을 디딘다. <미학 오디세이>는 현실의 압도적 부조리함에 삶의 추동을 잃은 뜨거운 청년이 차가운 지식인으로 다시 태어난 관문이었던 셈이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현대인들에게 미란 대상에 속한 객관적 실체라기 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 주관적 판단이라는 생각이 더 익숙할 것이다. 저급한 대중 문화를 향유하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선 절대적 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것이 더 유리할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라는 노래가 ~하므로 ~보다 더 우수하다'거나 '~라는 책은 ~하므로 더 저급한 것'이라고 하는 말에 질색을 하며 달려든다. 오늘날 개인의 취향을 무시하는 건 몰상식의 증명이자 용서 받을 수 없는 폭력행위다. 문제는 이렇게 미의 주관성에 대한 뜨거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강남의 성형외과로 달려가 객관적으로 예쁘다고 판단되는 눈과 코와 이마와 턱을 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태도는 진정 무엇일까?


미는 정말로 주관적 판단에 있는 걸까?



미는 대상에 있는가 수용자에게 있는가?


좀처럼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 중 대다수는 전지현과 자신의 여자친구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에 아마 '전지현'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니라고? 이 딱한 사람 같으니... 대다수의 미적 판단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건 미가 주관적 판단이 아닌 대상 즉 객관적 실체에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과거엔 어땠을까? 아래 그림을 보자. 루벤스의 1639년 작 <파리스의 심판>엔 '미'를 대표하는 삼미신이(아프로디테, 헤라, 아테나) 등장한다. 당신은 저 셋 중 누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파리스의 골머리를 썩혔던 이 문제가 아마도 우리에겐 실소로 다가올 것이다. 풍만하고 후덕한 아줌마 세 명 중에서 세계를 대표하는 '미인'을 선택하라니...




<파리스의 심판>. 루벤스. 1639년 작.



이런걸 보면 '미'가 대상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는 아닌 것 같다. 미가 객관적이라면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는 동일한 대상에서 동일한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저 삼미신 중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고대엔 미가 확실히 대상 안에 객관적으로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과 그 고대를 부활시키려 한 르네상스를 보라. 그들에게 미는 완벽한 비례와 구도였다. 때문에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예술은 번뜩이는 영감에 따라 마음대로 짓고 허무는 작업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규칙을 발견하고 그 규칙을 작품에 정확히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술은 일종의 기술, 즉 '테크네'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바로크 시대에만(르네상스를 바로 뒤 이은 예술 사조) 가도 벌써 그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래의 두 그림을 보자. 







위는 푸생의 <성가족>(1648년 작)이며 아래는 루벤스의 <성 리비노의 순교>(1633년 작)다. 르네상스의 고전미를 그대로 답습한 화가답게 푸생의 그림은 배경과 인물의 구분이 뚜렷하고(명확함) 안정적인 구도를(완벽한 구도) 갖추고 있다. 반면 루벤스의 그림은 구도가 격정적이고(불완전한 구도) 인물과 배경은 전체 안에서 통합되어 있으며(모호함) 복잡한 구성을 갖고 있다. 푸생의 그림이 질서, 비례, 척도를 중요시하는 '이성의 그림'이라면(객관) 루벤스의 그림은 감정과 분위기를 강조하는 '감성의 그림'이라고(주관)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푸생이냐 루벤스냐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이 논쟁이 어떻게 끝났냐고? 사실 이 논쟁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논쟁을 통해 사람마다 미학적 취향이 다 다를 수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객관과 주관의 고리 안에서


현대에 이를 수록 '미'는 점점 더 주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현대 예술에는 더이상 객관적 미를 파악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는 이제 완전히 주관 속으로 침몰한 것처럼 보인다. 예술가들은 차가운 이성대신 뜨거운 감성을 작품에 답는다. 그들의 작품을 만드는 건 기술이 아니라 번뜩이는 영감이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공방에서 평생을 보내는 장인 보다는 책상 앞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카피라이터를 더 닮아 있다.


미에 대한 논쟁을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있을까? 객관주의자들은 이대로 영영 퇴물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걸까? 아니다. 주관주의자들에겐 아직 대답해야 할 질문이 남아 있다. 미가 정말로 주관에 속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왜 우리 동네 담벼락에 휘갈긴 낙서가 아니라 바스키아의 그래피티를 예술이라고 부르는 걸까? 




바스키아의 그래피티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 동네 담벼락의 낙서보다 바스키아의 낙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미가 주관적 판단이 아닌 대상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철저한 주관주의자라 하더라도 모든 대상에서 미를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미와 추를 경험하는 걸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대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대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미학적 취향을 갖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주관과 객관을 도는 뫼비우스의 띠


우리는 이 무한의 띠 위에서 길을 잃는다. 어쩌면 모순 그 자체가 이 세상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미궁 속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핵심에 가닿은 걸지도. 미학 오디세이 1권은 이렇게 불길한 가능성을 안은 채 2권으로 나아간다.




<그리는 손> 모리츠 에셔. 1948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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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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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해되지 않는 걸 모조리 악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것이다. 사람들이 역사를 경외시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지하고 긴 호흡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역사를 외면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긋지긋한 암기 과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사실의 나열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흥미진진한 학문이다. 역사가 긴 호흡을 갖고 있다는 건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는 의미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역사를 공부하는 건 더더욱 중요하다. 다른 나라를 침범한 야만적 제국주의자들이 기를 쓰고 그 민족의 역사를 지우려고 한 것만 봐도 자기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음 한국사의 출간은 나에게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다. 왜곡된 역사관이 역시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정부의 용인 아래 버젓이 교과서로 만들어지는 이 때, 뭔가 제대로 된 역사를 보여주려는 시도가 바로 이 '민음 한국사'이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연산군


물론 최초의 시도는 아니겠지만 이 책은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를 기술함으로써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조망한다. 


역사의 보편성을 이해한다는 건 산 넘고, 물 건너 사는 그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다. 광적인 배타성과 차이에 대한 몰이해는 대개 그들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인류는 표면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해왔을 뿐 근본적으로는 지구에 속하는 한 종으로서 비슷한 역사의 발전을 이뤄왔다. 


한편 역사의 특수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당신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남들은 다 똑같은 데 왜 너만 그러니 라고 하는 순간 보편성은 폭력이 된다. 이 보편의 폭력을 막고 차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열쇠가 바로 역사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다.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조망하는 건 객관적 역사서를 만들기 위한 필수 요소다. 특수성만을 강조한다면 한 나라의 역사는 쉽게 신화화 될 것이다. 반면 보편성만을 강조한다면 역사에 필시 위계가 생기며 이 위계는 특정 국가의 역사를 깔보거나 침략의 구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를 기술함으로써 얻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재미다. 세종대왕님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무렵 - 비록 10년 뒤이긴 하지만 - 술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오늘의 이스탄불)을 함락시켰다거나 연산군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피바다로 만들고 있을 무렵 피렌체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의 공방에 앉아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언제 들어도 묘한 흥분을 자아낸다.



15세기의 조선


이 책은 15세기, 무려 태조(이성계), 태종(이방원), 세종, 세조가 등장하는 조선의 건국 초기를 다루고 있다. 이 네 명의 임금님이 등장하는 조선의 역사는 정치적 긴박감과 안정, 문화 발전의 대폭발이 번갈아 가며 일어난 그야말로 격동의 한 세기였다. 이 시기가 얼마나 흥미로웠는지는 이미 만들어졌거나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 영화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재 절찬리 방영중인 KBS의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며 태종(이방원)의 형제의 난을 다룬 것이 역시 KBS의 '용의 눈물'이다. 한편 송중기를 스타의 반열로 만들어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그 유명한 세종대왕의 이야기이며 작년에 개봉한 '관상'은 바로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이 네 명의 임금을 연달아 읽으면서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권력의 무정함을 느낄 수 있다. 태조는 다섯번째 아들 이방원의 도움으로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지만 그가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어쩌면 자신과 너무 닮았기에) 세자 책봉을 하지 않았다. 이는 결국 왕자의 난으로 이어져 조정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이후 태조는 함경도 함흥에 은거하며 자기 아들을 죽이기 위해 반란을 꾸미기까지 했다.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도 나눌 수 없는'것 이었던 셈이다.


한편 성왕 세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태종)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 없앴기 때문이다. 태종은 심지어 세종의 장인까지 단칼에 날려 버릴 정도로 왕권을 흔드는 어떠한 위협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렇게 확보된 정치적 안정은 세종으로 하여금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성왕의 꽃은 코를 찌르는 피바다 위에서 개화한 것이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세조. 세종의 둘째 아들)은 이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왕권을 강화하지만 이후의 왕들은 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 때문에 오히려 약화된 왕권을 물려받아야 했다. 왕보다 강한 권력을 가진 신하 한명회가 그 누구보다도 강한 권력을 추구한 세조 때의 공신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로 점철된 역사의 한 장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약간 지루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책이 정치만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암투와 간계가 난무하는 정치 투쟁은 밤을 새고 봐도 지루할 새가 없지만 '연분 9등제'와 <월인천강지곡>을 만나는 순간 지긋지긋한 국사 공부의 트라우마가 되살아 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이 객관적으로 씌여졌기 때문이다객관적인 서술은 문장에서 감정을 지운다. 감정이 지워진 문장에서 감동을 받을 수는 없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역사서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칭찬 받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따분한 교과서가 된다. 최선을 다해 객관성을 유지할 수록 이 책이 점점 더 재미 없어 질 것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의 본질이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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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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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포일러 많습니다.


코맥 매카시라는 이름만 듣고 반사적으로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이라면 다소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번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이 책은 우리가 열광해 마지 않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이 아니라 그가 최초로 집필한 '영화 시나리오'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가 문학 인생 최초로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출판 관계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었을까?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했겠지.


<카운슬러>의 출간은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얘기다. 영화가 개봉하기 13일 전 1쇄가 나온 이 책은 <카운슬러>의 개봉과 동시에 2쇄를 찍었다. 줄곧 탐욕의 부덕을 노래하던 코맥 매카시 자신도 - 물론 그 자신이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결국 출판 '산업'이라는 거대한 탐욕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씁쓸한 아이러니를 넘어 잔인한 조소로 다가온다.


산업은 산업의 탐욕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우리는 비판의 강도를 높임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산업의 수요를 끝없이 창출, 그것의 활성화에 이바지한다. 산업은 우리에게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훈장을 부여한다. 우리는 그 훈장으로 자위를 한다.


뭐가 이리 진지해?



똑같은 지옥 위에서


<카운슬러>는 코맥 매카시가 줄곧 그려왔던 지옥, 바로 그 위에서 폭력과 죽음의 서사를 되풀이 한다. 황량한 사막은 여전하고 그 위로 탐욕이 붉게 노을진다. 그 속에 녹색 돈다발이 있다. 바뀐점이 있다면 돈의 액수다. 루엘린 모스가(<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주인공) 10년 전 사막 위에서 주운 돈가방엔 25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 때는 250만 달러로도 인생 역전이 가능했을 것이다(<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배경은 80년대의 텍사스다). 하지만 오늘날 고작 250만 달러 때문에 국경을 넘나드는 대추격전을 벌이며 수 십명을 죽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 값도 되지 않는 돈을 갖고 도대체 왜? 그래서 액수는 8배, 2,000만 달러가 된다. 물론 1조원 대의 사기 대출을 받는 시대엔 이것도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코맥 매카시의 주인공들은 모두 중요한 선택을 한다. 그들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자기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나는 아닐거야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카운슬러>) 기꺼이 탐욕에 몸을 던진다. 그렇게 운명의 톱니바퀴가 굴러 간다. 이후 작가는 이 기계적 움직임을 역시 기계적인 건조함과 담담함으로 묵묵히 묘사해 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추격자들이다. 그들은 살인청부업자나 마약 조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죽음의 메타포다. 그 누구도 이 추격자를 피할 수는 없다. 탐욕은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찾아올 그 추격자의 방문을 좀 더 앞당긴다. 너는 도망칠 수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 눈을 감는 순간에야 당신은 당신의 필사적인 도망이 사실은 죽음의 품을 향한 어이 없는 질주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이 죽음을 연기한 것이 최악의 사냥꾼 안톤 쉬거였다면 <카운슬러>에선 멕시코 후아레스의 마약 조직이 그 역할을 맡는다. 둘은 모두 죽음을 상징하지만 거기엔 큰 차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 대상이 이야기의 재미에 미치는 영향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해야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안톤 쉬거는 무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한 명의 인간이었기에, 어쩌면 대항해서 이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한다. 실제로 그는 루엘린 모스가 쏜 총에 맞아 빈사 직전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카운슬러>의 마약 조직은 그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 그것이 한 존재를 너무나 간단히 지워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끔찍한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카운슬러>의 등장인물들은 루엘린 모스처럼 샷건을 날리거나 국경을 넘어 도망치지 못한다. 그들은 속수무책이다. 검은색 에스컬레이드가 도착해 길을 막고 차에 태우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카운슬러>에선 비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이야기는 아무런 긴장감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흥미진진한 싸움 구경이 아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폭력이며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학살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기대했던 당신이 이 영화 혹은 소설을 보고 실망감을 느꼈다면, 아마도 이게 그 이유일 것이다.



과대평가된 탐욕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나온 게 2005년이니 거의 10년 전이다. 이 10년 동안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코맥 매카시는 변화한 세상에 만족할까? 올해 82세가 된 이 노인은 여전히 이 세상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다.


코맥 매카시는 샷건 한방을 얼굴에 맞는 것으로 탐욕의 대가를 치루는 세상이란 천국에서나 존재할 법한 자비로운 세계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탐욕의 끝은 더 처절하고 끔찍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 뜨거운 덩어리를 놓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테니까. 


<카운슬러>에는 스너프 필름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스너프 필름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마체테로 여자애 머리를 댕강 잘랐다더군. 열네 살쯤 된 아이였는데, 복면을 한 남자한테 항문 성교를 당하던 중 울면서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데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지.(p.99)


뭔가 일이 꼬였다는 걸 알았을 때 마약 중계상 웨스트레이는 주인공 카운슬러를 만나 이 얘기를 해준다. 그들이 관계를 맺은 마약 조직이 이 스너프 필름의 제작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카운슬러는 도망을 계획하지만 그의 약혼자 로라가 멕시코 조직에 납치당한다. 조직은 애초에 로라만을 타겟으로 했을 것이다. 탐욕의 대가는 죽음보다 더 커야 하니까.


카운슬러는 로라를 찾으러 멕시코 후아레스로 떠나지만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채 그저 자신에게 배달된 DVD 한 장을 받는다. 그 순간 후아레스 변두리의 쓰레기 매립지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목 없는 로라의 시체가 더러운 쓰레기 더미 속으로 파묻힌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머저리들에게 빨간 원피스를 입은 로라의 시체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올 인'을 외치며 팔을 뻗는 순간 그 시체는 당신이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머저리들은 그저 죽음으로 이 모든 걸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탐욕의 종말에 선 사람들에게 죽음은 자비다. 그 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공포.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의 고통.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질러야만 하는 세상을 경험해 본 적 있는가? '탐욕은 언제나 과대평가되지만, 공포는 그렇지 않다'(p.105)는 말은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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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 (반양장)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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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과 고전 미술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재현성'에 있을 것이다. 고전 미술은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는지 명확한 입장을 취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 천장에 하나님과 아담을 그렸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캔버스 위에 성모 마리아와 루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를 그렸다. 그러나 여기 현대 미술이 있다. 그것은 형체를 잃고 주제를 버렸으며 의미를 숨긴 것처럼 보인다. 현대 미술을 마주한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기에 미술은 순수하게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술은 더 이상 '~을 위해 존재' 하거나 '~을 재현하지' 않는다. 미술은 말한다. 나는 '~을 하기 위해'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나이기 위해 이곳에 있다'. 이름만 들어도 성스러워지는 Fine Art의(순수 예술) 시작이다.


Fine Art는 자연이 아니라 예술 자체를 탐구한다. 더 이상 그 무엇도 재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을 재현'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재현 대상과 재현 결과인 예술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낸다.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재현을 주제로 하는 예술은 태생 자체가 저급한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잘해도 결국엔 실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한계에 가닿고야 만다.


재현을 포기하기 위한 가장 극단적 방법은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뒤샹은 급진적일 뿐만 아니라 천재적이었다. 뒤샹은 변기에 서명을 한 뒤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미 만들어진 변기는 자기 자신 이외에 그 어느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예술은 사물 그 자체가 됨으로써 가장 순수한 것이 된다. 여기가 바로 모더니즘의 클라이막스였다.





모더니즘은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다른 말로 그것은 그 당시의 '현재'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더니즘 예술의 급진성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규정하기 위한, 혹은 자기 자신을 미래에 위치 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여기 시간의 숙명성이 있다. 미래는 결국엔, 언젠가, 현재가 된다. 더불어 그것은 과거가 된다. 뒤샹이 변기를 '샘'으로 명명하는 그 순간 모더니즘은 현재를 극복하고 전통을 극복하고 체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샘'이 그것을 설명하는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미술관의 '현대 예술' 섹션에 위치하는 순간 모더니즘의 생명은 다한다.


1960년대에는 이미 "아방가르드주의 자체가 전통이 되고, 예외로서 규칙이 되어버리는 미래 사회의 징후"가 나타나 있었다. (중략) 여기서 아방가르드의 극복이 '끝없는 자기 부정'이라는 아방가르드의 계승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포스트모던은 이 역설에서 출발한다(모더니즘편 p.357).



포스트모더니즘, It's just happening


이 책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표현주의(잭슨 폴록), 앵포르멜, 색면추상,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팝아트, 플럭서스, 해프닝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해프닝' 뿐이다. 


'해프닝'은 '간단히 말해 그냥 일어나는 사건'(p. 223)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해프닝은 '예술과 삶의 경계를 구별하지 않으'며 '단 한 번만 실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예술과 삶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프닝은 예술가 혹은 예술이 취하는 특권적 위치를 포기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예술을 위해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짜 바보에게 바보라는 말은 욕이 될 수 없듯이 여기서 너를 예술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비평의 협박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할까?


고대에는 새조차 무엇이 더 위대한 예술인지 알고 있었다(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그림 경연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비평은 단순한 사후 해석을 넘어 예술 자체를 규정하는 심판자가 된다. 비평 없이는 그 누구도 작품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술과 비평 사이에 견고한 카르텔이 형성된다. 그러나 카르텔은 기본적으로 이권에(利勸) 대한 입장의 일치다. 이 말은 예술이 문화 산업에 굴복하고 그것을 살찌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해프닝은 예술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그저 삶 자체일 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해프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해프닝은 예술을 이용해 살을 찌우려는 그 어떤 주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진정한 Fine Art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편 '단 한 번만 실연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해프닝은 영원히 '현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초기에 해프닝은 꽤 엄격한 스크립트가 있어 관객과 퍼포머 사이에 행위를 규정하곤 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즉흥성'을 더 강조해 그 기획과 실연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는 구경꾼들을 몰고 나가 마당 위에 얼음 벽돌을 함께 쌓았다. 얼음은 결국 녹을 것이다. 얼음이 녹고 나면 해프닝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모던을 극복하려는 수 많은 포스트모던적 시도는 '작품'을 남기는 우를 범하므로써 언젠가 그 자신이 과거가 되는 참사를 겪는다. 전통을 극복한 위대한 작품들이 모든 열정과 힘을 쏟아 낸 뒤 박물관으로 돌아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통이 되는 것이다전통을 극복하려는 그들의 야망은 일시적이지만 해프닝은 그 자체가 '일시적' 이었기에 오히려 영원히 '현재'로 남게 된다. 작품을 남기지 않은 것은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체제를 극복하겠다는 정신이 결국엔 체제가 되어 군림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애초에 시지프스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둘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게 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자기가 영원히 미래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어느새 과거가 되버렸고 자기를 부정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러나 해프닝은 애초에 부정될 '자기'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 윤회의 고리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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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벚꽃과 개미


<좀머 씨 이야기>는 설령 좀머 씨에 대한 이야기를 뺀다 하더라도 꽤 괜찮은 소설로 남았을 것이다. 유년기의 파스텔톤 추억이 잔잔하게 흘러, 이제는 온통 회색빛으로 변한 우리의 마음에 생명력 넘치는 빛깔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엔 좀머가 있다. 그의 죽음이 있다. <좀머 씨 이야기>를 읽는 것은 아름다운 벚꽃 가지 위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를 보는 것과 같다. 벚꽃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선 그 개미까지 봐야 한다. 개미는 작지만 결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법이 없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봄이 지나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개미 뿐이다. 


이 작품은 호수와 숲과 바람이 있는 작은 마을을 그리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오히려 좀머의 발자국이 더 깊게 남는다. 나는 그 자국을 더듬어 이 책을 네 번이나 읽었다. 



좀머 씨의 죽음


좀머 씨의 삶은 대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어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비어 있기에 채울 수 있다. 이 소설은 매우 짧지만 그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그가 우리에게 직접 전해준 말로부터 이 채움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p. 35)


이것은 작중 화자인 '나'의 아버지가 주먹만한 우박이 떨어지던 길을 홀로 걷는 좀머 씨에게, '그러다 죽겠어요'라고 말하자 그가 한 대답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그러니 나를 죽지 않게 하려면 제발 날 가만 놔두시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가 피아노 선생님에게 심한 야단을 맞고 자살을 결심해 올라간 가문비 나무 위에서 좀머 씨를 목격한 대목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거기서 아주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그리고는 자살할 결심을 포기한다. '불과 몇 분 전에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p. 94)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고작 피아노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이유로 자살을 한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짓거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좀머 씨의 끊임없는 걷기가 사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오해일 수도 있다. 이것이 오해라는 사실은 '나'가 훨씬 나이를 먹고 난 뒤, 좀머 씨와 다시 만난 대목의 지지를 받는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숲 속을 달리던 중 호숫가에 서 있는 좀머 씨를 보게 된다. 그는 걷고 있지 않았다. 좀머 씨는 석양이 지는 호수 반대편을 바라보며 멈춰 서 있었다. 그러다 한 발짝 한 발짝 호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물은 좀머 씨의 무릎까지 찼다. 잠시 후 허리까지, 가슴까지 그리고 머리 꼭대기까지 물이 차 올랐다. 이윽고 호수는 잔잔해지고 좀머 씨의 밀짚모자만이 살랑이는 물결을 따라 유유히 떠내려갔다. 


'나'는 그제서야 우박이 떨어지는 그날 밤 자신을 향해 외쳤던 좀머 씨의 말이 이해 된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은 '그러니 죽을 수 있게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나는 가문비 나무 아래에서 좀머 씨가 뱉던 한숨을 떠올린다. '나'는 좀머 씨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누나에게도, 형에게도, 경찰에게도,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 코르넬리우스 미켈에게조차 그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주었다.



쥐스킨트의 아이러니


좀머 씨가 원한 것은 영원한 침묵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이 세상에 묶어 두려는 다른 존재를 피해다닌다. 이것은 마치 타자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존재가) 해석되는 걸 끔찍히도 싫어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 떠올리게 한다. 좀머 씨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오해와 불통의 과정을 피하고 싶어 끊임없이 도망다녔던 걸지도 모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자신이 언론과 대중을 피해 철저히 숨어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 쥐스킨트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는 왜 소설을 쓰는 걸까? 


그는 왜 소설을 써 대중에게 보여주는 걸까. 그 행위가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나'는 '나'의 침묵이 좀머 씨에게 안식을 줬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호수 밑바닥에 고요히 침잠해 있는 좀머 씨를 꺼내 <좀머 씨 이야기>를 썼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좀머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만 기어이 소설을 써 그를 안식에서 몰아내고 완성된 소설은 다시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안식에서 몰아낸다. 그는 왜 이 부조리한 장난을 반복하는 걸까?


어쩌면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나'와 '좀머 씨' 사이에서 방황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쥐스킨트는 보통 사람의 세계에 있는 '나'와 그것으로부터 영원히 침묵을 지키고 싶은 '좀머 씨'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그는 소설을 쓸 때는 '나'가 되지만 다 쓰고 나면 '좀머 씨'가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이 평생 동안 이 세계로부터 도망다니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좀머 씨처럼 차가운 호수 한가운데로 발을 옮길 용기가 있어야 한다. 


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작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쥐스킨트가 비로소 어떤 선택을 했는지 추측할 수도 있다. 나는 그가 평생 좀머 씨로 살기로 결심했길 바란다. 그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라면 그의 작품 같은 건 다시는 안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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