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계의 철학 - 측정 그리고 과학의 진보
장하석 지음, 오철우 옮김, 이상욱 감수 / 동아시아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과 과학의 골수팬이라면 과학 철학을 변태 잡종 쯤으로 경시할지도 모른다.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라는 거겠지. 그러나 과학과 철학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에게 과학 철학은 강된장을 만난 보리밥이 될 수 있다.


과학 철학은 메타 학문이다. 거창하게 메타라고 써봤지만 사실 나도 메타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과학이 그릇에 담긴 물을 탐구하는 분야라면 메타 과학은 바로 그릇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그릇을 연구해서 뭐할 건데요?


물만 쳐다보는 사람에겐 호수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지 않는 법그릇을 더듬어 더듬어 더듬어 가다보면 물 속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물 전체의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릇을 연구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메타적 사고는 매우 생경하다. 우리는 초등 6년, 중학 3년, 고교 3년 총 12년 동안 받은 정규 교육에 불필요할 정도의 증오심을 갖고 있는 데, 이는 12년 동안 배운 지식들이 살아가는 데 혹은 직장을 얻는 데 혹은 일 잘하는 회사원이 되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비메타적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물론 한국 교육이 메타 교육을 지향한 것 같지는 않지만 사실 학교에서 수학을 배운다는 건 '수학적 사고'를 기르기 위함이지 수학 공식을 외우자는 게 아니다. 비메타적 사고 안에서 지식과 그 지식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상황은 오로지 1:1(일반적으로는 그것보다 더 낮은 비율로)로 대응할 뿐이지만 메타적 사고는 지식을 틀로써 이용하므로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극도로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선 이도저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당장 써먹을 방도도 없어 보이는 메타적 사고가 지나치게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200년 전만 해도 과학과 철학은 하나였다. 그 위대한 뉴턴조차 자연 철학을 연구한 '철학자'아니었던가. 피타고라스는 어떤가 그는 철학자이자 사운드 엔지니어였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물리학자였지만 그의 연구를 가능케 한 건 우주와 삶에 대한 그의 철학적 태도 덕분이었다. 전공을 하지 않으면 그 분야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프로페셔널 멍청이들은 뉴턴과 피타고라스와 아인슈타인이 철학과 과학을 '복수 전공' 했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그들이 처음부터 모든 걸 갖고 태어난 천재였다고 믿거나. 그러나 인류 지성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인들에게 쏟아진 찬사는 그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생각할 줄 안다'는 이유로 부여된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들은 메타적으로 사고할 줄 알았기에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분야를 매끈하게 연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철학>은 과학 철학서다. 메타 과학이다. 이 책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온도라는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다고 이 책을 말랑말랑한 과학 이야기 쯤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메타 과학이라도 과학은 과학. 무시무시한 공식이 등장하고 어마어마한 전문 용어가 쏟아진다. 번역도 그닥 온전치 않다.


그러나 온도계는 커녕 온도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에 '온도'를 연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걸 기억하자. 그들은 오로지 뜨겁고 차갑다는 감각만을 갖고 연구를 시작했다. 아주 짙은 안개 속에서 시작한 작은 여정이 끝내는 거대한 '앎'에 도달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터져나오는 뜨거운 경의를, 당신은 이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B급 좌파 김규항은 오늘날 좌와 우를 가르는 기준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에 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그 이름만 듣고선 마치 숭고한 인권 운동을 연상시키는 '신자유주의'는 그러나 지난 30년 간 세계 경제를 극심한 빈부격차와 빈곤으로 빠뜨린 무시무시한 경제 역병의 이름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장은 언제나 효율적이고 공정하니 무능한 정부 따위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규 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애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이 신자유주의의 클래식 버전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왜 시장을 믿는걸까? 그건 개별 경제 활동에 대한 판단은 그것과 관련된 이해 관계자들이 가장 잘 내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경험도 정보도 부족한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삼성전자의 미래 전략을 구상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에 반박할 여지를 찾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1997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엔 대우도 현대도 엘지도 삼성도 휴대폰을 만들었다. 당시엔 대우도 현대도 엘지도 삼성도 건설을 했다. 당시엔 대우도 현대도 삼성도 기아도 자동차를 만들었다. 당시 대기업들은 돈이 되는 곳이라면 우후죽순 손을 뻗쳤고 그걸 가능하게 한 건 높은 부채 비율과 계열사간 순환 출자였다. 가장 유망한 직종의 성장을 보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건 합리적 경영인이 할 짓이 아니다. 그들은 당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으로 새로운 시장에 진출했다. 기업은 커질대로 커졌지만 그 속을 채운 건 고름이었다. 1997년 그 고름의 쓰나미에 휩쓸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가. 신자유주의 맹신론자들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가 하면 인간의 욕망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혹자는 1997년의 외환 위기가 일시적 착란에 빠진 기업인들에게 내려진 시장의 철퇴였으며 결국 이 시련을 통해 우리가 글로벌 초일류 기업을 얻게 되지 않았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997년 이후 극도로 불안해진 고용 환경은 임금 노동자들의 권리를 쓰레기통에 쳐박았고 그들을 무한 경쟁의 칼날로 갈아버렸다. 시장의 은혜는 극소수의 부자들에게만 내려졌을 뿐이다. 


설령 시장이 개인의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 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모두의 장기적 이익으로 귀결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예를들어 당신이 현대 자동차의 주요 주주라고 해보자. 당신은 왜 파업도 잦고 힘센 노조를 가진 울산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지 않는가? 실제로 유명한 미국 제조 회사 중 대다수는 자국 내에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지 않다. 임금도 낮고 통제도 쉬운 개도국으로 생산 시설을 옮기면 더 큰 이익을 낼 것이고 이는 높은 배당과 주식의 시세 차익으로 돌아올텐데 말이다. 


이번엔 당신이 민영화된 전기 회사의 CEO라고 생각해보자(공기업 민영화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숙원이다). 당신이 이윤율이 낮은 도서지역의 전기 공급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대신에 당신은 지점을 폐쇄해 인력을 감축하고 그 부지를 팔아 막대한 부동산 이익을 거두는 데 집중할 것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이는 전체적인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지겠지만 어차피 독점 기업 아닌가? 사람들은 싫어도 당신 회사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 한 회사의 CEO로서 당신은 매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압력으로 자본 시장이 개방된 현대 사회에선 이같은 횡포가(합리적 판단)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은 거의 아무런 제약 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자본은 이익에 더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거대 자본은 개도국(한국도 포함된다) 알짜 기업의 최대 주주가 되어 회사와 임직원, 나아가 국민의 피를 빨아 먹은 뒤 그들이 아사 직전에 이르렀을 때 훌쩍 다른 나라로 옮겨갈 수 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경제 대국이라 자부하는 대한민국조차 론스타의 외환은행 먹튀, 상하이 자동차의 쌍용차 먹튀, 소버린의 SK 경영권 유린에 눈 뜬 채로 당할 수 밖에 없지 않았는가.


개별 이해 집단은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대의나 윤리적 판단에 무심할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어떤 기업의 주주들이 자신의 월급 봉투가 얇아질 걸 알면서도 불량품에 대한 대규모 리콜을 단행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 포드 자동차는 제품 결함으로 인한 연료 탱크 폭발로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보험금 지급이 리콜에 드는 비용보다 싸다는 이유로 리콜을 거부한 적이 있다. 심지어 그 위대한 애플조차 '왜 환경 친화적인 기업을 만드느라 쓸데 없이 비용을 쓰냐'며 주식을 팔아버리겠다는 주주들의 협박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의 수명은 국가에 비해 짧다. 그리고 기업의 수명은 인간의 수명 보다도 짧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더 큰 이득을 취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고 기업의 영속성 보다(오너 기업은 예외) 당장의 월급 봉투를 부풀려 줄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는 것이다.


오로지 국가만이 이것을 초월할 수 있다. 국가는 장기적 발전이나 공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지금 당장의 손실을 감수할 수 있다. 국가는 고용 안정과 국민의 행복한 삶이라는 대의를 위해 생산 시설을 외국으로 옮기려는 기업,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 단기적 이익을 노리고 들어오는 투기 자본의 유입에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작은 정부는 이 같은 정부의 역할을 축소해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를 위한 시장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건 아주 타당한 설득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주장에 대해 선뜻 반박할 논리를 찾기 힘들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수 많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정교한 이론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허상을 낱낱이 밝혀주는 이 책은 무척 소중하다.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에 비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훨씬 쉽고 친절하다. 이 책은 전문 경제학 분야가 으레 가질 법한 어려운 경제 이론과 복잡한 수학 공식을 포함하지 않는다. 장하준 교수는 언제나 역사를 통해 경제 이론을 검증한다. 역사는 언제나 경제보다 쉽고 친절하다.


공항과 철도를 팔아 먹으려 안달이 난 국가의 국민이라면, 복지 정책을 게으른 무능력자들의 파렴치한 요구로 받아들이는 국가의 국민이라면, 이 책을 '나쁜 사마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하준 교수 처럼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학자가 한국인이라는 건, 게다가 그가 약자의 편에 서 있다는 건 대한민국의 몇 안되는 희망 중 하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사랑 2014-09-25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글 잘 쓰셨네요... 격하게 공감합니다.

한깨짱 2014-09-25 12:32   좋아요 0 | URL
격하게 공감해 주셔서, 정말 격하게 감사합니다.
댓글저장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로켓에 올라타!


초특급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가 나온지 6개월 뒤 출간된 이 책은 저자가 똑같이 마이클 샌델임에도 불구하고 꼬릿꼬릿한 장사꾼의 냄새를 풍긴다. 급한 기획에 좋지 않은 번역, 게다가 대부분 <정의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되풀이 함에도 불구하고 4년간 32쇄를 찍었다는 사실은 한국경제신문이 얼마나 좋은 장사꾼이었는지를 증명한다. 장사꾼들 사이엔 이런 말이 있지. 


'로켓이 출발할 땐 묻지 말고 올라타!'


필시 이 책을 사기 위해 이곳에 들렀을 사람들을 위해 한 마디 하자면, 


사지 마세요. 반값 할인해도 사지 마세요. 


<정의란 무엇인가>에 깊이 감명한 나머지 그의 후속작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른 책을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마이클 샌델의 책을 처음 접하는 것이라면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쪽이 번역도 편하고 정성도 많이 들였기 때문이다. 민주 시민에겐 올바른 행동에 마땅한 보상을 부여할 할 책임이 있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왜 도덕인가?'라는 거창한 제목을 무시하고 단도직입, 샌델의 주장을 핵심만 꺼내보자. 그것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공동체가) 직접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책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생각'이라는 걸 스스로 할 수 있게 된 뒤부터 자기가 설정한 가치와 목적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그러나 이 같은 믿음은 현실 세계의 첨예한 가치 논쟁을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취약한 근거 위에 세워졌는지 깨닫게 된다. 


최근 논란이 되는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을 생각해보자. 그의 간증은 사실 중교인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떠나 이 발언은 그가 얼마나 신실한 종교인인지를 증명하는 모범적 발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마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들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는(물론 내용에 문제는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창극이 누군가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하거나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지 않은가. 좀더 강경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문창극의 발언 자체는 그의 권리이나 이렇게 잘못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총리가 될 수는 없다는 관점에서 그를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똘똘이 스머프들의 논리적, 이성적 판단과는 달리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의 발언에 심각한 모욕을 느낄 것이며 나아가 문창극의 간증이 단순히 남들과 '다른'것이 아니라 '틀리'다는 주장을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 살아가는 게 좋은 한국인의 삶이라는 걸 우리가 당연히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엔 좀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성숙한 시민의 미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이 좋은 삶을 제도화 하고자 모든 사람들에게 빈곤세를 거뒀다고 하자. 벌써 분노로 이글거리는 당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 취지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결코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그렇다면 자유인인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은 간통죄에 찬성하는가?


나는 솔직히 간통죄가 사람의 감정을 법으로 강제하는 악법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결혼 생활이란 감정이 소멸한 배우자를 신뢰와 정으로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라 불타오르는 감정을 찾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게 아닐까? 그게 두 사람의 정신 건강에도 훨씬 좋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나를 음탕한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좋은 결혼 생활이란 배우자에 대한 신뢰를 죽을때까지 지키는 것이며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결혼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눈치 챘겠지만 빈곤세에 반대하는 사람과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근거는 완전히 같다. 그러니까 만약 당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금을 내기 싫은 자유주의자라면 당신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호텔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쿨하게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이다. 



샌델의 당부


이런 모순이 시사하는 바가 뭘까? 그것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가리는 일이 될 것이다. 샌델은 그 방법으로 공동체의 합의를 제시한다. 물론 이것은 다수의 사람, 다수의 단체가 지지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통적 규범을 그대로 따르자는 것도 아니다. 


샌델은 우리가 컴퓨터와 TV가 있는 방을 나와 광장에 모여야 한다고 말한다. 광장엔 대학 교수와 택시 운전사와 부자와 막노동꾼과 평범한 회사원과 전문직 연구원이 모두 모일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점잖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쉬쉬해왔던 종교와 정치와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때로는 강력한 이견에 부딪혀 모든 게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다. 타인의 관점과 이견을 접할 수록 이해는 커녕 경멸과 증오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샌델의 말마따나 '시도해보기 전까진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법' 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몽준 같은 사람들은 죽을때까지 '70원 밖에 안하는 버스비가 뭐가 비싸다고 난리를 치냐'고 핏대를 올릴 것이며 그의 아들은 '역시 미개한 국민을 교화하는 건 불가능하니 아버지에게 미국 주지사에 출마하는 건 어떻겠냐'고 말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1989년 개포동의 주공아파트 78동에선 매주 한 번씩 반상회가 열렸다. 거기선 어느 사장님의 운전 기사와 대학 교수와 회사원이 한데 모여 어떻게 해야 78동 주민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지 논의했다. 이 필부들의 회의가 사회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1989년의 개포동이 2014년의 개포동보다 훨씬 살기 좋았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루살렘 함락


살라딘의 등장과 함께 예루살렘이, 그것도 너무나 쉽게 함락됐다는 사실은 전 유럽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성도 예루살렘이다. 아무리 전략적 가치가 높다 한들 '에데사'와는 급이 달랐던 것이다. 3차 십자군은 누가 제창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결성됐다. 게다가 이 3차 십자군은 왕들의 전쟁이라고 불린 2차 십자군 원정 때 보다도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이유는 국가로서는 최초로 영국왕 헨리 2세가 참전했기 때문인데, 당시 영국은 오늘날과 같은 섬나라가 아니라 프랑스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유럽의 대표국이었기 때문에 3차 십자군은 그야말로 최정예 유럽 군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원정을 떠나기도 전에 이 강력한 영국왕을 물리친 자가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헨리 2세의 아들, 사자심왕 리처드였다. 



사자심왕 리처드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는 뜻의 사자심왕. 이 별명을 지은 건 마땅히 자기 왕을 칭송하기 마련인 영국인도, 원정을 승리로 이끌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품은 기독교인도 아닌, 리처드의 칼을 직접 몸으로 맞아본 이슬람교도였으니 이런 전쟁이면 으레 만들어지기 마련인 허황된 신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은 결코 혼자 하는 게 아니니 이 3차 십자군의 공을 모두 리처드에게 돌리는 건 지나치다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왕 필리프 2세는 십자군 원정으로 군사적 공백 상태가 된 유럽을 차지할 야욕을 품고 개전 3개월 만에 군대를 물리고 만다. 이를 보고도 리처드가 성전을 계속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원정을 떠나기 전 필리프 2세와 맺은 상호불가침 조약 때문이었다. 정직한 사람의 최대 단점이 역시 상대방도 자신과 같이 정직할 거라 믿는 마음이라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행보였다. 기병 3천에 보병 8만. 역대 최대라 할 수 있는 대군을 이끈 황제 붉은 수염은 행군 도중 강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인해 신성로마제국군은 아주 일부만 남긴 채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대군을 자국으로 물린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공정한 역사를 쓰기로 마음 먹은 역사가도 3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을 오로지 리처드의 공으로 돌리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개전과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십자군 국가의 옛 도시를 재탈환한다. 항구도시 아코에서 시작한 수복 전쟁은 아르수프, 야파, 아스칼론까지 실패없이 이어졌다. 상대는 중동의 이름 없는 영주가 아니라 전설의 술탄 살라딘 이었으니 '실패없이'라는 말이 가진 전공의 무게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코 앞에 둔 리처드에게 비보가 도착한다. 필리프 2세가 리처드의 동생과 손을 잡고 영국을 침략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겠지만, 사자왕이라 불리운 남자다. 그는 고작 천사백명의 병사를 이끌고 살라딘이 손수 이끈 이만명의 군대를 패퇴시킨다. 뒤이어 보내온 강화 요청을, 살라딘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 내용에 예루살렘의 반환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십자군 국가는 지중해에 면한 여러 항구를 포함해 리처드가 수복한 영토의 대부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용맹한 사자를 상대하는 데 온 힘을 다한 탓인지, 전설의 술탄 살라딘은 1년 뒤에 숨을 거두고 만다.



붉은 수염의 손자


사자왕 리처드도 해낼 수 없었던 예루살렘 탈환을 성공시킨 건 물에 빠져 죽은 황제 '붉은 수염'의 손자 프리드리히 2세였다. 어쩌면 그는 종교 전쟁의 사악함을 깨달은 최초의 유럽 군주가 아니었나 싶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 보통의 왕족들과는 달리 평민과 어울렸다. 그 평민 중에는 이슬람교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여타 유럽 왕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를 알았으니 그들의 문화와 삶, 그리고 신앙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결코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이해. 배타심이란 본디 다른 사람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무너지는 법이다. 이런 소년이 황제가 됐으니 어찌 성전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러나 교황을 비롯해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는 편협한 광신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나라의 황제로서 성전에 나서지 않는 프리드리히 2세에 분노했다.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전쟁을 피해왔던 황제였으나 예루살렘 왕위를 이어 받고 뒤이어 교황의 파문까지 받은 탓에 더 이상 전쟁을 미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전쟁은 말과 창을 달리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그는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외교적 협상을 시작했다. 석달에 걸친 교섭 끝에 황제가 얻어낸 것은 예루살렘. 믿음의 사람들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얻어낸 이 쾌거를 역시 같은 이유로 경멸했다. 이슬람 사료에 따르면 '굴욕'이라고 부를 정도의 뛰어난 성과였는데도 말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어쩌면 성스러움에 지친 그들에게 합법적으로 허용된 일종의 변태적 욕망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흐르는 이교도의 피 속에서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기독교인들. 이후에 유럽을 지배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런 머저리였다는 사실은 얼마 안되는 중동의 평화를 지옥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이후의 이야기들


프리드리히 2세 이후에 십자군을 이끈 인물들은 사자왕 처럼 특출난 전투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프리드리히 2세처럼 뛰어난 외교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전투도 외교도 없었으니 그들에게 남은 건 오로지 재앙 뿐. 가진 건 신앙심 밖에 없었던 프랑스왕 루이 9세는 7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 간단히, 적군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1차 부터 7차까지 150년의 원정 기간 동안 일국의 왕이 포로로 잡혔던 적은 이 때가 처음일 만큼 말 그대로 '미증유의 패배'였던 것이다. 이 패배로도 부족했는지 막대한 몸 값을 치르고 풀려난 루이 9세는 20년 뒤 제 8차 십자군을 일으킨다. 20년 전의 패배가 두려웠는지 이번에는 프랑스에서 뱃길로 가까운 튀니지아를 목표로 삼지만 상륙 한달 만에 역병을 만나 군대를 물린다. 재앙의 씨앗 루이 9세도 마침내 이곳에서 숨을 거둔다. 


뛰어난 능력자에게 조차 거침없이 불운을 쏟아내는 게 역사의 잔인함이다. 그러니 멍청이들에겐 얼마나 더 가혹했겠는가? 루이 9세의 죽음 이후 십자군 국가의 존망은 그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21년 뒤 살라딘이 세운 아이유브 왕조를 몰락 시키고 정권을 잡은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카릴이 십자군 최후의 도시 아코를 함락시킴으로써 200여년에 걸친 십자군의 역사는 사막의 먼지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1291년 5월 18일의 일이다.



시오노 나나미와 십자군 이야기


지중해의 전쟁 3부작, 로마인 이야기 두 권,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그리고 이 십자군 이야기까지 시오노 나나미의 책 9권을 읽었다. 지중해의 전쟁 3부작은 역사를 소재로 하나 어디까지나 '소설'이며 <로마인 이야기>는 방대한 사료가 다소 지루하게 흐르는 사료 모음집이라 할 수 있고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가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감상을 형식없이 풀어내는 수필에 가깝다. 나의 선호를 밝히자면 역시 소설과 수필이다. 역사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대단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소설가도 아닌 탓에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로 접할 수 있어 아주 좋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는 그 제목에 이야기가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다르다. 담담히 사료를 풀어내는 그녀의 필치는 확실히 사랑하는 것을 정렬적으로 적어낼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한 마디로, 조금 지루하다. 


이 <십자군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래도 <로마인 이야기>에 가깝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다소 과장을 섞더라도 살라딘과 사자왕의 대결을 시오노 나나미가 그리는 소설로 봤다면 어땠을까? 이게 바로 어쩔 수 없는 시오노 나나미 팬의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버지의 위대한 이름


역사를 살피다보면 종종 뛰어난 선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볼품없는 2세의 존재에 놀라게 된다. 이유가 뭘까? 추측컨대


첫째는 큰 일을 하느라 바빴던 탓에 자식 교육 혹은 그 생산 자체에 소홀했던 탓이리라. 둘째는, 아마도 아버지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 자기 뜻을 펼치기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누구누구의 아들'로 불렸을 것이다. 그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혁신은 커녕 매번 안전하고 고분고분한 길만 택했으리라.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에게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치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아무리 쉬운 길이라도 아버지의 이름이 주는 부담감은 필시 실수를 연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을 하면서 실수까지 한다면 그 자신마저 '아 역시 난 안되는구나'하는 패배감을 품는 게 당연한 일 아니었을까.


1095년 툴루몽 공의회에서 시작해 1099년 예루살람 해방까지 불과 5년 만에 위대한 목표를 달성한 십자군 1세대는 그 후 18년에 걸쳐 정복을 확고히 함으로써 십자군 국가의 존재를 반석 위에 올려 놓는다. 그러나 1118년, 1차 십자군 세대 중 마지막으로 남은 예루살렘 왕 보두앵이 세상을 떠난다. 위대한 세대의 완전한 퇴장이었다.



흥망성쇠, 인간사의 진리


영광 후에는 쇠락, 쇠락 후에는 영광이 따르는 게 인간사의 진리다. 전술했듯 1118년 이후로 1차 십자군이라 불리운 영광의 세대는 전원 퇴장했다. 이 공백을 틈타 이슬람 세력은 1144년 1차 십자군의 최초 함락지인 에데사 탈환에 성공한다. 에데사 탈환은 십자군 국가 방어의 최전선을 잃었다는 현실적 타격을 넘어 십자군 국가에 더이상 신의 가호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정신적 타격을 주었다. 예루살렘 해방 이후 50년 가까이 승리의 향기에 취해 있던 유럽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제후들의 십자군이라 불리운 1차 원정 때와는 달리 2차 십자군은 프랑스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친히 참전한 왕들의 전쟁이었다. 왕들이 손수 이끌고 온 은빛 기사들의 물결. 이 중무장 기병의 위용을 보고 원정의 실패를 떠올리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2차 십자군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동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이들이 성도에 도착한 건 1148년 4월 3일 이었다. 여세를 몰아 전쟁을 시작했다면 좋았으련만 신앙심이 깊었던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성지 순례를 원한 탓에 개전은 7월로 밀리고 만다. 혹서가 지배하는 중동의 한 여름에 군사 행동을 하겠다는 멍청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뿐만아니라 군대의 목표는 함락당한 에데사가 아니라 다마스쿠스였다. 대대로 풍요를 자랑했으며 바그다드 이전엔 이슬람의 수도로 불린 다마스쿠스다. 규모도 더 컸고 용맹했던 1차 십자군 조차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고도를 감히 차지하겠다고 나선 건 왕들의 허세였을까 아니면 심각한 자만심 이었을까? 전투가 시작된지 고작 나흘, 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깨끗히, 군대를 물린 걸 보면 아무래도 허세였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지켜주었나


2차 십자군 원정 실패의 악영향은 여러모로 컸다. 왕이 친히 이끈 군대가 아무것도 못하고 물러난 것이다. 유럽의 가장 강력한 왕들도 지킬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이 땅을 지켜준단 말인가? 이같은 공포심이 십자군 국가 전역에 퍼진 것은 당연했다. 반대로 왕들을 물리친 이슬람 쪽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1144년 에데사가 함락된 이후 무려 33년이 지난 1187년 까지 십자군 국가는 단 한 뼘의 영토도 잃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기사단. 90년대 초반에 판타지를 읽었던 남자라면 로도스 기사단 이라는 이름에 가슴이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이 로도스 기사단이라는 이름은 사실 예루살렘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했던 성 요한 기사단이 로도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긴 뒤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이다. 말했듯 원래 의료 봉사가 주목적이었던 이 기사단은 난세에 힘입어 전투 집단으로 거듭났다. 


한편 성 요한 기사단과 더불어 난세의 성도를 지킨 기사단이 바로 그 유명한 템플 기사단(성당 기사단)이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예수회 등등 종교 관련 믿거나 말거나 식 전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기사단은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신 앞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단이었으며 전투가 벌어지면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적진을 파괴한 기사중의 기사였다. 


비록 그 수는 적었으나 이들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중무장한 기사였다. 게다가 크고 작은 싸움으로 전투에는 이골이 난 베테랑.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탄 이 '중세의 꽃'은 일반 보병 혹은 기병과도 비교가 안될 정도의 일당백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이 기사단이 짓고 관리해온 성채였다. 단 한 번도 전력 부족에 시달리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십자군 국가였던 만큼 요소요소에 성채를 지어 소규모 병력으로도 운영 가능한 방어 체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셋째는 당시 이슬람 세력의 관심이 십자군 국가 보다는 자국의 통일에 있었던 탓이다. 따지고 보면 십자군 국가는 지중해에 곰팡이처럼 피어 기생하는 한 줌의 나라 아니던가. 천하제패에는 어디까지나 순서가 있는 법이다.


넷째는 그야말로 신의 가호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시리아의 대지진이었다.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지진이 끊이지 않는 중동이니 그때라고 예외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알레포, 모술, 다마스쿠스로 이어지는 오늘날 이라크의 북부와 시리아 전역을 통일해 더 이상 뒤통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이슬람 세력에게 이 지진은 그야말로 뼈아픈 재난, 그리스도교도에겐 신의 가호였을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이유로 십자군 국가는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시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유용하게 쓰는 건 아니다.



마침내, 살라딘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대지진의 피해를 착실히 복구한 중동의 이슬람 세력은 때마침 이집트 왕조의 분열이라는 호재를 맞게 된다. 호재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한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시대 이슬람에는 확실히 호재를 호재로 알아보는 인재들이 있었다. 


분열을 틈타 이집트로 군대를 이끌고 간 것은 소수파 쿠르드족 출신의 시르쿠였다. 그는 카이로에 도착하자마자 이집트 전 영토의 3분의 1을 양도한다는 조약에 서명한다. 아군과 적군을 포함해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계획된 것이었을까? 시르쿠가 예언자의 묘소에 참배를 떠난 사이 그의 조카가 일을 저지르고 만다. 카이로의 재상을 죽이고 백부 시르쿠를 그 자리에 추대한 것. 반대는 없었다. 소수파 출신 시르쿠가 이집트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최고 권력자는 취임 두 달만에 욕실에서 머리를 다쳐 죽고 만다. 뒤를 이은 건 31세의 조카, 살라딘이었다. 


중동의 이슬람 세력은 이 애송이를 여전히 자신의 부하 정도로 생각했으나 살라딘에게는 추호도 부하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 온도차가 결국엔 화를 부르고 만다. 이제 살라딘은 눈엣가시가 됐다. 소수 민족 출신인 주제에 나이까지 어린 애송이가 성질을 살살 긁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러나 살라딘을 제거하기 위한 군대는 군 최고통수권자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출진조차 하지 못했다. 이 권력의 공백을 놓칠 살라딘이 아니다. 이집트를 떠난 살라딘은 때로는 군사력을 앞세워 또 때로는 정치력을 발휘해 중동의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간다. 그리고 1186년, 마침내 살라딘은 이집트와 중동을 아우르는 이슬람 역사 최초의 통합 군주가 되었다.


자기 땅에선 더 이상 우환이 사라진 살라딘의 눈에 띈 건 당연 지중해에 잔뜩 몸을 웅크린 십자군 국가였다. 1187년 3월 13일,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살라딘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가 그랬던 것처럼 이슬람 세계 최초의 '지하드(성전)'을 선언한다. 


나는 1차 십자군의 성전이 '불과 5년 만에'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대업을 이뤘다고 쓴 바 있다. 그러나 살라딘의 지하드는 고작 7개월 만에 예루살렘을 재탈환함으로써 마무리된다. 7개월이다. 계절이 고작 두 번 바뀌는 새에 역사가 바뀐 것이다. 


이제 십자군에게 남은 건 정말 한 줌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루스 뿐이었다. 그러나 바다로 이어진 이 한 줌의 땅이 또다시 반격의 실마리가 되니, 그 전쟁의 주인공은


전설의 사자왕 리처드였다.


3권에서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