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사 14 : 선종의 흥기 이중톈 중국사 14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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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교수의 중국사 시리즈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 대단히 아쉽다. 이중톈 교수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의 르네상스인으로 모르는 분야가 없는 박학다식의 천재다. 이름이 알려진 건 <백가강단>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삼국지 강의>를 한 게 계기였다. 이 강의는 동명의 책으로도 2권이 출간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나는 두 권을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내친김에 <초한지 강의>까지 달렸다. 여기에 <이중톈 미학강의>를 더하면 얼추 대표작을 다 나열한 것 같다. 이 중 무엇이 가장 재미있었냐는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지만 굳이 따진다면 미학 강의, 삼국지 1, 삼국지 2, 초한지 순이 아닐까 한다.


이 외에도 중국 현대의 시류를 다룬 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별로였던 것 같다. 그렇게 자연히 멀어져 오랜 시간 각자의 삶을 살다 이렇게 다시 역사로 만나니 그 반가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다. 나는 이 중국사 시리즈를 벌써 두 권이나 독파 중이다.


<선종의 흥기>.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선종'이었다. 달마가 시조로 알려진 이 종교는 불교의 한 종파로 아주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꾸준한 정진과 수련을 통해서만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다른 종파와는 달리 한 순간의 깨달음만으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돈오점수'와 이를 상징하는 얄궂은 선문답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탓에 지배적인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정치 체제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고대 중국사를 통틀어도 종교가 흥기 한 경우는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도교와 불교가 자웅을 겨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황권에 의지하여 서로 세력 다툼을 벌였다. 정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 중국에서 종교의 흥망성쇠는 오직 권력의 조정에 달려 있었다. 이것은 신앙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실제로 중국 황제 중 진정한 신앙인은 매우 드물었다. 이것이 기독교, 이슬람 세계의 왕들과 매우 다른 점이다. 역시 가장 큰 이유는 '공자' 때문이었다. 유교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였고 그 정점에 황제가 있다. 백성은 모두 황제의 자식인데 초월적 신이 나타나 황제 또한 그의 자식이라 한다면 어떻게 국가의 기강이 서겠는가.


특히 불교는 황제를 불안하게 만드는 몇 가지 요소를 갖고 있었다. 승려들은 호구에서 제외되어 각종 세금을 면제받았고 군주보다 부처를 위에 두었다. 수많은 사원들은 자체적인 법률과 법규, 심지어 승병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단단한 연합체로 발전하면 주지들이 제후로 자처하는 것도 먼 일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선종이 그토록 흥기 한 건 정말 의아한 일이다. 달마의 고향에선 거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종교니 말이다.


<선종의 흥기>는 이 똑똑한 종교가 종교의 무덤이라 불리는 중국에서 어떻게 수천 년을 살아왔는지 살펴본다. 더 좋은 건 같은 시기 대제국을 완성한 이웃 문명을 같이 둘러본다는 것이다. 세 문명은 각각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각자의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큰 역사를 조명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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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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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가짜 노동과 진짜 노동이 무엇인지 구별할 기회를 줬다. 도시가 봉쇄되고 모임이 금지된 그 시기에도 반드시 모여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청소부, 간호사, 소방관, 경찰관 기타 등등. 정말 놀라운 건 저 중에 내가 하는 일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계사, 변호사, 전문 경영인, 마케터, 준법 감시 책임자 등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숨겨진 역설을 눈치챈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필수 인력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연봉 차이를 떠올리면 그 역설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내 생각에 인간은 주 3일 근무가 적당하다. 5일씩이나 나와서 할 일은 거의 없다. 스스로 판단하여 진행할 일은 불필요한 보고 체계 속에서 한없이 늘어진다. 회의는 비 온 뒤 활짝 핀 버섯처럼 우후죽순 만들어지고 이 모든 걸 기록하고 정리하는 문서화가 시작된다. 누군가는 이 모든 비효율을 없애겠다며 TF를 구성해 새로운 보고 체계와 회의 규칙과 문서를 만들어낸다. BOOM!


우리 스스로 우리 일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세상 그 누가 자기 일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실 하루에 3시간 정도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고대엔 노동이 오직 노예의 것이었다. 노동에서 해방된 시민은 충분한 여가를 즐겼고 이 시간은 어떠한 '실용적 목적'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자유로운 인간이란 필요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상황을 바꾼 건 기독교의 세계관이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청교도 신앙은, 사실 우리 기대와는 달리 구원을 받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상을 견지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회개해도 당신은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 천국에 갈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난 노동을 가능케 했다. 이미 구원이 정해진 사람이라면 살아생전에도 축복을 받을 테고, 그 축복의 증거가 바로 속세에서의 성공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해 사회적 성공을 이뤄냈다. 그 결과 부를 만들어내는 노동이 신성화된다.


관점은 좀 다르지만 헤겔과 마르크스도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사물을 만들고 처리하는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며, 한 인간이 세상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환경을 처리하고 그 자신을 외면화, 즉 체현하는 건 노동을 통해서라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말했다. - p.323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이 세계와 나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없고 연결이 없다는 건 곧 소외됐다는 것이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다 관뒀을 때 찾아오는 공허나 좋은 직장에 들어간 사촌의 어깨가 올라가는(자기가 곧 그 회사 자체인 것처럼)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전자는 세계와 단절이 된 거고, 후자는 더 많이 연결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외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A를 정상으로, B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B에 속한 것들은 모두 소외된다.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A를 정상으로 보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A로 옮겨가는 것과 사실은 B가 정상이었음을 주장하는 것. A로 옮겨가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일의 중요성을 부각하려 할 것이고 그 중요성은 대부분 노동에 투입되는 시간으로 측정될 가능성이 높다.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바쁜 사람이다. 하지만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일까? A에 대한 믿음은 우리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바쁜 사람으로 만들라고 유혹한다. 


가짜 노동은 이렇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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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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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나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좋아했다. 야미쿠로가 득시글한 미지의 동굴을 탐험하고, 이상한 박사님과 어시스턴트가 등장하고, 탐정이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그야말로 모험활극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유일한 단점은 중간중간에 '세계의 끝'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세계의 끝'에는 마라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단물 빠진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참 모험을 즐기다 이 '끝'을 맞닥뜨리면 장로드래곤 앞에서 한타가 벌어진 순간 PC 전원이 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정확히 '세계의 끝'의 확장판이다. 1, 2, 3부로 나뉜 이 소설에서 나는 은근히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기대했다. 그래, 이 지루한 1부를 클리어하고 나면 반드시 원더랜드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기대는 완전히 박살 났다. 768페이지 내내 기다려온 장면은 단 한 문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키는 이 작품에 어떤 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과거에 발표한 중편 소설 하나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저런 곳에 발표한 글들은 전부 출판까지 이어졌으나 이 작품만은 예외였다. 작가로서의 역량이랄까? 뭐 그런 게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후 하루키는 이 모티브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풀어냈고 그중에 하나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 하지만 응어리는 여전했고 그것이 바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등장했다. 이로써 하루키는 수십 년  담아 온 체기를 모조리 토해냈다.


70세가 넘은 노작가에게는 홀가분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인 나에게 이 소설은 고구마에 고구마를 씹어 삼킨 듯 답답했다. 베레모에 스커트를 즐겨 입는 도서관장이라든가 내 몸에서 분리된 그림자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죽어서 유령이 된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특유의 시그니처를 곳곳에 찍어뒀지만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던 적은 이 작가의 책 중 유일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이 꾸준한 작가는 원하는 글을 어디든 발표할 수 있고 심지어 출판까지 가능하다. 그것이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습작이든, 징검다리든, 아니면 완전히 실패한 것이든. 나는 이 책이 두세 권으로 분권 됐다면 아마 절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가 딱 그랬다. 그런데 이 두꺼운 책 한 권을 꾸역꾸역 읽고 나니 <기사단장 죽이기>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이것보다 재미가 없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The World of Haruki'를 꾸준히 탐험해 온 사람이라면 이 기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느끼며 정상참작이 가능하겠지만 중간에 뜩하고 끼어든 뉴비들은 당혹스럽지 않을까 싶다. 하루키에 대한 혐오는 대부분 거기서 시작되는 것 같다. 인생에 늘 흥망성쇠가 있듯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누군가는 '망'에서 시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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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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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가 실재하며 오직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세계란 우리가 의식한 결과이므로 세계는 이 세상의 사람 수만큼 존재한다는 포스트모던한 생각이,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라 느껴질 수 있는 객관적이고 유일한 실재로부터 나를 구원하고, 동시에 아주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계로 이끈다는 점에서 상당한 매력을 느끼지만, 결국 그들이 얘기하는 의식의 결과는 뇌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라 실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해석하는 관점이 여럿이라고 해서 작품 자체가 여럿일 수는 없는 법이다.


확고한 신념은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균열이 갔다. <매트릭스>는 이 세계가 정교한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며 우리가 느끼는 이 모든 경험은 그저 뇌로 흘러들어 가는 전기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데카르트 식으로 표현하면 '통 속의 뇌'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식으로 표현하면 데미우르고스들이 갖고 노는 '샌드 박스'인 것이다.


<세계 그 자체>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주장하는 책이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든 물리적 세계는 우리 밖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벽에 머리를 부딪혀볼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결과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실재와 표상을 헷갈리지 말라고 말한다. 표상은 세계에 대한 우리 나름의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수학이나 물리학 자체가 곧 세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저자는 같은 과학자이면서도 이와 같은 생각에 명백한 선을 긋는다. 물리학과 수학은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뛰어나도 실재를 기술하는 수단일 뿐이다. 실제로 두 학문은 끊임없이 오류가 수정되어 왔다. 이건 단지 우리가 이 두 학문을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말에 담긴 모순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들이 다루는 물리학과 수학이 곧 세계 그 자체인데 그것이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아직 완벽하지 않다는 말인가? 우리 세계는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여 완벽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객관적 실재는 오직 스냅숏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딱 그 순간에만 진실인 것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 잠깐의 진실조차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읽고 '통 속의 뇌'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뿌리 뽑은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어렵다. 논리적으로 증명한다기보다는 세계는 그냥 실재하는 거야, 그냥 그래,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는 물론 내 이해의 한계일 수도 있다. 이렇게 대단한 주장을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번역서로 읽고 이해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고.


물리적 실재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우리의 의식인 것 같다. 어떤 과학도 아직 의식의 동작 방식을 완전히 풀어내지 못했다. 외부의 자극을 느낄 감각이 없다면 의식도 존재하지 않을까? 신화 속의 신들은 대부분 무에서 '나'를 인식하고 이를 통해 '너'를 추론하여 세계를 만들었다. 이 신화들에 따르면 세계보다 의식이 먼저다. 그렇다면 다시 과학으로 돌아가 빅뱅 당시로 시선을 돌려보자. 빅뱅이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 세계의식의 깨어남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의식은 어디에, 무엇으로 존재하는 걸까? 모든 물질에 질량을 부여한 힉스장이 세계의식의 물리적 실체라는 아이디어는 어떤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뇌는 이 힉스장의 생물학적 결과라는 생각은?


나는 이것들이 다 그냥 짜 맞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빅뱅을 생각하면 역시 이 세계가 실재한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단순한 입자들이 모인 인간이 어떻게 의식을 갖게 됐느냐는 질문을 떠올리면 이 문제는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정말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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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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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들의 영원한 친구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렇게 썼다.


"암컷은 착취당하는 성이며, 진화의 근본적인 차이는 난자와 정자에서 비롯된다."


성과 성역할에 대한 신화는 뿌리가 깊다. 여성은 조신하고 신중하며 모성으로 알을 품는다. 알을 품으려면 모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성은 말 그대로 엄마에게만 존재하므로 출산과 육아는 암컷의 몫이다. 그것은 자연이 정해놓은 섭리다.


암컷은 조신하고 신중하기 때문에 짝짓기 때도 어두운 관객석에 앉아 신나게 춤을 추는 무대 위 수컷들을 수줍게 바라본다. 수컷은 포식자의 눈에 잘 띄는 화려한 깃털을 휘날리며 가장 마음에 드는 암컷 앞에 선다. 암컷은 못 이기는 척 수컷의 손을 잡고 으슥한 풀숲으로 이동한다.


선택은 수컷의 몫이므로 진화의 바퀴를 굴리는 것도 수컷이다. 암컷은 그 선택을 받아들일 뿐이다. 생물학을 지배해 온 이 가부장적 프레임은 우리가 이 쇼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를 삭제해 왔다. 혹시 암컷은 관객이 아니라 심사위원이었던 게 아닐까? 수컷이 그 무의미하고 에너지 비효율적인 행동을 수백만 년간 유지해 온 이유는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택당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냐는 말이다.


야생에는 강간이 횡행한다. 암컷이 강제로 교미를 당하는 모습은 정말 처참하다. 작은 암컷이 몸짓이 큰 수컷을 당해낼 수는 없다. 이 관점에서 암컷은 결국 착취당하는 성이며 진화의 바퀴를 굴리는 건 다시 수컷이 몫이 된다. 그러나 이 사건 전후로 벌어지는 암컷의 '교활한 음모'는 눈을 번쩍 뜨게 만든다. 암컷의 생식기는 능동적인 기관이다. 그들은 "생리, 화학적 특성을 이용해 정자를 보관, 분류, 거부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수컷의 정액은 갖다 버리고, 선택된 정자는 난자로 가는 직통 노선에 올라 적극적으로 이동 속도를 높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로 같은 통로 속에서 헤매다 끝나게 할 수도 있다."(p. 199) 게임을 시작하는 건 수컷이지만 이기는 건 암컷이다.


작고 수동적이며 안전지향적이라 모험과 도전을 모르는 암컷과 자기의 우수한 유전자를 사방팔방 뿌리도록 진화한 수컷. 이 성신화는 수컷의 외도와 암컷의 정절을 자연의 섭리로 정당화했다. 암컷은 작고 약하며 수컷은 크고 강하다는 편견은 수컷 중심의 위계와 지배를 당연시하는 구실이었다.


세상에는 이 신화들이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라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짜 뉴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과학계가 남성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애플 TV의 <레슨 인 케미스트리>에서 주인공이 한 남자 화학자에게 생각나는 여성 과학자의 이름을 아는 대로 대보라고 말한다. '마리 퀴리'. 나와 그 남자는 이 이름 외에 어느 것도 말할 수 없었다.


생물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을 뒤집을 반증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단순한 예외로 치부해 왔다. 벌과 개미는 여왕을 정점으로 한 사회를 구성하는 '매우 특이한 생물'이다. 수컷보다 암컷이 훨씬 크고 강한 사마귀는 '아주 보기 드문 곤충'이라 할 수 있다. 마다가스카르 숲에 터를 잡은 베록스시파 여우원숭이 사회에서는 알파 암컷이 무리를 지배한다. 그곳에서 수컷은 이등 시민이다. 포유류가 구성한 공동체에서 이런 사례는 '매우 드문 일'이다.


<암컷들>은 이런 신화들이 진화생물학의 최전선에서 어떻게 박살 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암컷들의 놀라운 생태를 읽고 있으면 이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심지어 자연계에는 명확한 암수 구분조차 그리 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남과 암수로 구분된 세계야말로 진정 '예외'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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