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정치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8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김호경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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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이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그래서 불안을 떨쳐낼 수 있었다면, 종교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종교도 존재한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이다. 


초기의 종교는 언제나 소박하고 진실하다. 나쁘게 말해, 덜 체계적이다. 지도자들은 부족한 체계에 언제나 불안을 느끼기에 각종 형식이 더해진다. 형식이 체계적이고 화려할수록 종교에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는 언제나 억압적이다. 지도자들은 성전의 해석과 형식을 만들 권리를 독점한다. 반론은 불신으로 여겨지고 파문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이 등장한다. 이제 사람들은 거룩한 신의 말씀을 믿는 게 아니라 종교의 형식을 숭배한다. 형식을 숭배하는 한 종교는 배타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종교는 전쟁과 심판의 구실이 된다.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에 온 사람답게 스피노자는 천부인권으로서의 자유를 옹호한다. 이 자유는 물론 종교에도 적용된다. 생각해보라, 인간의 성향은 다양하므로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근거해 믿음의 원칙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이 자유로운 의지로 신에게 순종할 수 있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p.24)


이제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은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종교를 해석하는 데 그 중 옳고 그른 것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인의 믿음은 오직 그의 행위에 따라서만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도덕이다. 쉽게 말해 믿음의 해석이 도덕적 행동으로 귀결된다면 그의 자유는 보장되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행동이 아무리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해석이 성경 자체에서(신학-정치론은 기독교를 주제로 한다) 도출된 게 아니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예컨대 '윤회'를 믿는 사람이 그 믿음으로 인해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평생 도덕적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윤회'를 가르치지 않기에 그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해석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므로 스피노자의 논의는 자연스럽게 성경의 해석법으로 옮겨 간다.  스피노자 이전의 교리 해석은 그리스 철학이 중심이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 교부 철학의 아버지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반으로 한 사상가였다. 그런데 성경의 해석을 위해 왜 외부의 권위가 필요한 걸까? 이 같은 의문에 스피노자는 그 어떤 근본주의자 보다도 근본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성서는 오직 성서 자체로만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한 방법은 그 어떤 급진주의자 보다도 급진적이었다. 


스피노자 이전의 해석은 이미 씌어진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성서는 절대 오류가 없는 거룩한 문서였기에 교부 철학의 목표는 모순된 성서의 내용을 철학을 이용해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성서를 씌여진 언어의 문법을 고려하고 역사적으로 검증하고 그래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텍스트로 간주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당시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비난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한술 더 떠 신학을 정치에 귀속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말이다. 스피노자는 기독교의 모든 문제가 특정인에게 성서 해석의 권위가 집중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성서를 텍스트로 만들고 그 해석의 권한을 만민에게 부여하려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는 한 이 같은 자유를 보장하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종교는 정치에 귀속되야 한다. 오로지 정치만이 특정 신앙보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우위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신학은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는 신학도 결국엔 인간의 삶을 평화롭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인간이 평화롭지 않다면 아무리 거룩한 뜻을 가졌다 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피노자의 신학은 신을 빙자한 사회학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 새로운 신학 안에선 신조차 초월적 실체가 아닌 지고의 도덕 선생님으로 존재한다. 


종교가 도그마였던 시대에 이보다 더한 신성모독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종교의 권위가 급속이 무너져내리던 과도기이기도 했다. 중세의 신학과 근대의 철학이 격전을 벌였다. 싸우려는 욕구가 충만한 시대엔 어느 쪽이든 확실하게 선택해야 명성을 얻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신학에서 벗어난 듯 보이면서도 신학으로 돌아가고 신학인듯 하면서도 기존의 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렌즈를 깎으며 생계를 유지했던 은둔 철학자의 운명이, 바로 여기서 결정됐다. 


그러나 선각자의 앞선 사상은 결국 역사가 보증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늘날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위험 요소가 있다면 바로 종교가 아닐까? 은둔자의 이해 받지 못한 신학이 비로소 빛을 발할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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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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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한바가지에요



죽음에 대처하는 법


사랑하는 사람과 목숨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봤거나 잃어본 상상을 해본 사람은 안다. 


압도적 고통의 무게를. 


사랑하는 사람 대신 내가 죽겠다는 건 평생 내가 살면서 지고 가야 할 슬픔의 무게를 상대방에게 전가하겠다는 얘기다. 따지보고면, 이기적인거야.


어려운 건 복수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 여기엔 인생을 걸어야 한다. 실패할지도 몰라, 불안과 초조가 홍수처럼 밀려온다. 


오르페우스의 경우도 있다. 이 남자는 우아하다. 자기 능력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자를 찾아 복수하기 보다는 연인을 되살리고자 마음 먹었다. 지옥문을 지키는 켈베로스를 자신의 뛰어난 연주로 잠재우고 지옥으로 갔다. 지옥의 왕과 왕녀 하데스와 페르세포를 만나 또 하나의 음악을 연주했다. 왕과 왕녀는 감동 받았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연인의 삶을 되돌려 달라고 한다. 욕심을 너무 부렸다. 연인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했어야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도 '어쭈 이것 봐라?'라는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시련을 더한다. 지옥을 나설 때까지 절대 뒤돌아 보지 말 것. 지상을 두어 걸음 앞둔 오르페우스는 방심했고 뒤를 돌아봤다. 연인은 다시 끝모를 지옥으로 끌려 갔다.


<세상의 마지막 밤>에는 마테오와 피포가 나온다. 피포가 주인공이다. 마테오는 피포의 아버지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어느 평범한 아침 마테오는 피포의 손을 잡고 등교길에 나선다. 약간 늦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재촉해 빨리 걷는다. 상기된 아버지의 얼굴에 손이 아프다는 말도 못한채, 질질 끌리듯 따라간다. 어느 골목에 들어섰을 때 마피아의 총격을 받았다. 아들이 죽었다.


아내는 아들의 복수를 원했다. 마테오가 그 더러운 마피아 놈의 심장에 차가운 총알을 꽂아 넣길 원했다. 아버지는 해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났다. 어려운 건 복수라니까.


택시 운전수 였던 마테오는 일은 하지 않고 도시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평생 동안 지옥을 연구한 교수를 만난다. 교수는 지옥의 문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르페우스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옥에 내려간 피포를 찾은 마테오는 아들을 안고 경계에 선다. 두어 걸음 앞에 세상이 있다. 마테오는 비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자기 능력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남자였다. 


죽음 하나에 삶 하나. 


마테오는 지옥의 문 밖으로 피포를 던져 삶과 죽음의 거래를 끝마친다. 20년 뒤 피포는 마피아를 찾아 배를 가르고 20년 전 그 날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을 모두 자른다. 비겁한 아버지가 용감한 아들을 낳은 것이다.



복고의 아이러니


문학에서 서사가 사라지고 있다. 너무 오래됐으니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만화, 드라마는 여전히 강력한 서사의 힘을 뽐내며 끝없이 반복되는걸? 문학은 그 반복이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와 만화, 드라마가 2,000년 넘게 계속된 건 아니니까, 질림의 수준은 다를 수 있는 거다. 다른 가능성은 타 매체가 보여주는 서사의 천박함에 화가난 경우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왔는데 그걸 이 따위로!


<세상의 마지막 밤>은 프랑스인이 로랑 고데가 그린 고전적 서사의 전형이다. 어느 곳 보다 빠르게 서사가 멸종한 프랑스. 그런 프랑스에서, 마치 고대의 부활을 외치듯(르네상스!), 저자는 그리스 신화의(서사의 기원!) 모티브를 보란듯이 차용한다. 


지옥 여행자 오르페우스.


로랑 고데는 오르페우스가 가져온 삶과 죽음의 빵 사이에 부성애를 끼워 2,000년도 더 된 평범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 옛날 식 샌드위치가 오히려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니, 정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독하다세상에 새로운 일은 없고 오직 옛것이 돌고 돌며 되풀이 된다는 말은 과연 진실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 


그러나 이 서사가 현대적 프랑스와 거리를 둔 신선한 반향일지는 몰라도 현대적 대중성을 내재한 흥미진진한 지옥 여행은 아니라는 점은 알아뒀으면 한다. 프랑스인은 죽었다 깨나도 <해리 포터> 같은 건 쓸 수 없거나 그런 걸 쓰기엔 너무나 우아한 민족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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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지음 / 시공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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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의 서재에서 단원 김홍도의 '씨름도'를 명쾌하게 읽어주는 책을 본 적 있다. 반드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다른 법이라 몇 년이 흘렀다. 분명히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잘못 산 책이다. 내가 봤던 그 책이 아니란 말이다. 다행히 잘못된 책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조선 말의 회화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도판을, 그것도 컬러로 볼 수 있는 책이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다. 누구 말마따나 있어야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그런 책이다.


이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종이 한 장, 끽해야 비단 한 필에 불과한 얇은 조각들이 수 많은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나 아득해질 때가 있다. 생각할수록, 살아낸 세상이 몇 개고, 겪어낸 전쟁이 몇 갠데. 게다가 그림은 천한 환쟁이의 영역 아니었던가. 천출이 그린 천물을 누군가는 고이고이 간직해 수 백년을 물려 왔던 거다. 그림 앞에 서면 그 누군가의 마음이 아련하다. 


그러나 조선 시대만 놓고 봤을 때(이 책은 조선 시대에 70%를 할애한다) 그림과 화가의 지위는 완전히 천한 것도 아니었다. 모호했다. 우선 화원이 있다. 국가에 고용된 기술직 공무원으로 왕의 초상화나 왕조의 각종 행사를 그림으로 옮겼다. 500년 실록의 국가답게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던 것이리라. 지금으로 따지만 일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 중엔 일러스트레이션을 능가하는 대작을 그린 이들도 있다.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의 안견이나 최고의 금강산 그림을 그린 겸재 정선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런 대가들은 왕족(안견-안평대군) 또는 왕의(정선-영조) 직접적인 후원을 받아 예술 활동을 했다. 문재(文才)를 겸비한 이들은 높은 벼슬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문제의 왕족과 사대부들이 있다. 선비, 양반, 왕족 출신의 화가들인데 앞서 소개한 화원의 그림이 호구지책 이었다면 이들의 그림은 그야말로 취미, 높여 말해 내면의 수양으로 여겨졌다. 여기가 바로 모호한 점이다. 스스로 천기라 치부하는 것이 어째서 내면의 수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걸까? 동일한 행위라도 행위자가 다르면 다른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러나 지배층들의 그림에 대한 태도는 원칙이 없었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이중적이었다. 이와 관련해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나는 사대부 출신의 세 명화가라 하여 겸재, 현재와 더불어 삼재로 불린 관아재 조영석의 일화다. 영조 재위 시 관아재가 그림을 잘 그린다 하여 임금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다. 이 때 관아재는 "내가 어디 환쟁이냐"며 당차게 거절을 한다. 다시 한 번 조정에서, 그러면 감독관을 시킬테나 맡아라 했는데 이마저도 거부해 관아재는 옥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나서도 끝까지 그림을 그리지 않아 사대부로서의 '자부심'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건 관아재가 자신의 그림을 손수 모아 <사제첩麝臍帖>이라는 화첩까지 만들어 놓고 거기다 "물시인범자비오자손勿示人犯者非吾子孫" 즉,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만약에 범한다면 내 자손이 아니다"고 까지 써놨다는 것이다. 보이고 싶지 않다면 자기 손으로 찢어 버리거나 애초에 그리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화첩까지 만들어 놓고 흉흉한 위협까지 적어 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는 표암 강세황의 일화다. 이것도 영조 재위 시의 일이다. 누군가 영조에게 표암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자 그 누구보다 그림을 좋아하고 식견이 높았던(영조는 겸재에게 직접 그림을 배웠다) 대왕은 이렇게 대꾸한다. "그런 천기를 잘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오히려 누가 되니 자중토록 하라". 강표암은 감격했다. 얼마나 감격했냐면, 


그림을 끊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붓을 들었다 한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지만 자기 손으로 화첩을 지었던 관아재나 십수년을 끊었음에도 결국엔 다시 붓을 들고 만 강세황이나, 결국엔 사대부라는 자부심마저도 이들의 예술혼을 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술은 그 어떤 억압에도 살아 남는다.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은 많은 것을 담았지만 썩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강의를 옮긴 책이라 읽기는 쉽지만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훌훌 흘러가는 기분이다. 언급하는 화가, 그림이 너무 많은 탓이기도 하다. 또 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서 좋고 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서 나쁘다라는 설명이 적다. 모든 걸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동양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림에서 무엇을 봐야 할 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고전 미술사를 개괄하고 싶은 사람, 특히 조선의 미술사를 간략히 훑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중에 마음에 드는 화가, 그림을 골라 심층 탐구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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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4
김경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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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의 끝이다. 언어가 달리고 달려 종착했을 때 시가 된다. 종착한 언어의 모습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취했을 보통의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은 모두 버린 채 깨끗한 정수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열매와 꽃과 나무를 버리고 씨앗으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볼 때 범인은 놀라지 않는다. 똑같이 보이는 씨앗들이 수북히 담긴 자루를 보며 감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시를 볼 때 슬퍼지는 범인도 있다. 열매와 꽃과 나무를, 죽었다 깨나도 하나의 씨앗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의 첫 시를 읽자마자 시집을 사버렸다.


첫 시 '외계(外界)'에는 양팔 없이 태어난 화가가 나온다. 화가는 양팔이 없어 입으로 붓을 문다. 입에 문 붓을 움직여 그는 종이에 바람을 그려 넣는다. 바람엔 형체가 없기에 종이에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화가는 절벽을 기어올라(두 팔이 없는 화가가 어떻게 절벽을 올랐을까? 입술은 부르트고 이빨이 다 깨졌겠지) 몇 달 씩 입을 벌렸다. 입 속에 바람을 머금고 붓을 물면 바람이 그려진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다 문득 화가는 자기가 그리는 것이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이었음을 깨닫는다.


보통 사람인 나는 이 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시뿐만아니라 시집에 수록된 거의 모든 시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시는 비문에 비문을 엮어 만든 미로 같았다. 뒤의 단어는 앞의 단어의 의미를 지우기 위해 애썼고 뒷 문장은 앞 문장의 진행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시집을 끝까지 읽은 이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바람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에서 아무도 이해못하는 시를 쓰는 시인의 그림자를 봤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의 외로움을 안다. 이것은 외계의 존재지만 내계에서 태어나버린 자의 숙명이다. 외로움은 시인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드는 게 이 외로움이기에 시인은 죽을 때까지 외로워야 한다. 시인에게서 시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간단히 엉터리라고 경멸한다. 그러나 명백히 앞에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그 어리석음에 쏟아내는 시인의 분노도 헤아려보자.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시를 그것도 두 번이나 꾹꾹 마음 속에 눌러 담은 이유는 시인의 분노가 그의 삶을 까맣게 불태울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궁 안에 두고 온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아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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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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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뭐 조선 시대 어디메쯤 살단 간 양반이겠지, 시큰둥하게 넘어갈려다가도 '당쟁의 대가'라는 말을 듣게 되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현대의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갈 자격이 없다. 아, 정치의 신! 거침없이 정적을 물어뜯고 물 흐르듯 처신하여 자기 자리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겠다. 굶고 싶지 않다면 바로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로 말할 것 같으면, 인조를 거쳐 효종,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네 명의 임금을 섬기며 수 십년간 조정의 거두로 머물렀음에도 처세와는 거리가 먼 뻣뻣한 인물이었다. 그는 싸움을 알아도 물러섬은 몰랐다. 그는 왕조차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도리어 왕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만든 인물이었다. 송시열은 왕보다 높은 신하였다.



동인과 서인


조선의 당쟁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분열의 시초,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동인과 서인의 기원이 바로 이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천원짜리에 그려진 할아버지) 학문을 중심으로 뭉친 당파가 바로 동인이다.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는 데 임진왜란 때 다수의 의병장을(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등) 배출해 정권을 장악한 북인이 인조 반정(영화 '광해')으로 대거 사형당한 탓에 동인은 서애 유성룡(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역임하며 이순신을 추천한 정치인)을 종주로 하는 남인만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서인은 율곡 이이의(오천원짜리 할아버지) 학문을 바탕으로 한 당파였다. 이들은 쿠데타에(인조 반정) 성공한 이후 비록 중간 중간 부침이 있긴 했으나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놓치지 않은 무소불위의 집권 여당이었다. 송시열은 이 집권 여당의 우두머리였다(나중에 서인은 송시열파와 반송시열파의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한다).


송시열이 서인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율곡 이이의 학맥을 정통으로 이은 자였고 둘째, 성리학에 관한한 조선에서 대적할 자가 없을 정도의 대학자였다. 정통성이 있기에 그의 발언엔 구태여 힘들이지 않아도 무거운 권위가 실렸고 대학자였기에 시열은 그 누구와의 논쟁에서도 지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투는 무리들 사이에서 이보다 더한 성공의 조건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는 이미 말로써 정의를 다투는 시대가 아니었다. 조선의 비극은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는 시대에 말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율곡 이이와 송시열의 예학


성리학을 탄생시킨 주자와 버금갈 정도였다는 대학자 율곡 이이는, 그러나 성리학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고루한 인물이 아니었다. 율곡은 서자와 천인에게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고(전방 자원 입대자에게 부여) 공납의 폐해를 시정할 정책을 주장하는 등(대공수미법) 사회적, 경제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혁신가였다.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 또한 '무'보다 '문'을 중시하는 조선의 주류 정치계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발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송시열에 이르러 성리학은 사대부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그것을 영속화하려는 '예학'으로 변질되고 만다. '예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각 신분에 따르는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이었다.(p.37)


같은 차이는 송시열의 주자학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의 극심한 변화를 야기한 대사건이었지만 그 중 최고는 대궐을 비우고 쥐새끼처럼 달아난 지배층에 분노한 백성들이 텅텅빈 관청에 침입해 노비 문서를 불태운 사건이었다. 지배계급에 대한 혐오가 극단에 치달은 데다가 양, 천의 구분이 모호해져 신분제마저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사대부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보수의 진면목이다. 



실패한 보수의 성공적 지배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다소 논쟁이 있으나 왜란을 수습하고 당시 중원의 대세로 떠오른 후금과의 실리 외교를 펼쳐 전쟁을 막는 등 여러모로 훌륭한 업적을 이룬 왕이었다. 이 왕이 서인의 반정(反正)으로 폐위된다. 사특한 것을 바로 잡은 고귀한 신하들은 실리 대신 군신의 예를 되찾았고(배금숭명) 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야기해 자신의 왕으로 하여금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게 했으며(삼궤구복) 청으로(후금) 끌려간 아낙을 '환향녀(還鄕女)'로 그들이 낳은 자식을 '호로자(湖奴子)'로 만들었다.


무참한 현실을 압도적 무기력으로 대처했음에도 서인 정권은 버림받지 않았다. 그것은 왕권의 한계였다. 왕은 스스로의 힘으로 즉위한 게 아니라 서인의 힘을 빌어 왕좌를 차지했기에 결코 서인을 버릴 수 없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올바른 방법으로 승계되지 못한 권력이 얼마나 오랫동안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사특한 것을 바로 잡는다 했으나 사실은 권력욕에 다름 아니었고, 군신의 예를 다한다했으나 결국 오랑캐 앞에 머리를 조아렸던 서인들의 모순은 효종의 북벌론을 맞아 더 큰 모순을 드러낸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강력한 북벌의지를 내세워 군대를 양성했으나 서인의 반대에 부딪혀 마음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따지고보면 청을 몰아내고 명을 다시 세운다는 효종의 북벌론이야말로 이른바 예학이 말하는 진정한 군신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집권층인 사대부 중 누구하나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걸 볼 때 당시 사대부들이 말하는 '예'란 결국 자기 안위와 부귀를 지키려는 껍데기뿐인 사변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송시열도 이런 모순을 알고 있었으나 효종의 급서(암살로 추정)로 인해 그는 아무런 정치적 타격없이 진퇴양난의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예송논쟁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된 송시열은 조선 당쟁사상 가장 치열했던 예송논쟁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예송논쟁이란 쉽게 말해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당시 예법상 부모는 장자의 상에 3년 복을 입고 이하 중자(衆子)의 상에는 1년 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므로(첫째 아들인 소현세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한지 두 달만에 독살당한다. 소현세자는 아들을 남겼기에 당연 그 아들이 왕세자가 되야 했으나 소현세자 일가를 극도로 혐오한 인조가 자신의 둘째 아들인 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예법상 1년복이 맞다고 주장했다.


송시열의 주장은 얼핏 예법에 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조금만 돌려 보면 효종은 서자 불과하며 따라서 그의 왕위 계승에도 정통성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에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주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적이었던 남인 학자들이 예송논쟁에 불을 지폈고 송시열의 주장을 못마땅하게 여긴 현종이 남인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서인 세력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현종의 급서로 위기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마니, 이 또한 송시열의 복이라면 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시열의 최후


단 한 번도 왕 밑에 서본 적 없는 신하. 이 위태로운 지위를 갖고 어찌 그토록 긴 세월을 살았나,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83세에 정읍에서 사사당한다. 반란죄가 아닌 이상 대신이 사형은 커녕 국문조차 받지 않았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송시열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이나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왕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면서 동시에 대단히 감정적이어야 했다. 둘 모두를 갖춘 왕은 그 유명한 여인, 장희빈에 빠져 있던 숙종이었다. 이후 숙종은 유례없이 강한 왕권을 누리며 다양한 업적을 세웠으니 다소 감정적으로 처리한 송시열의 사사가 결론적으로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송시열은 성리학의 대가이긴 했으나 주자를 신성화한 나머지 일체의 반론을 모두 사문난적으로 몰아 무고한 선비들을 죽이는 우를 범했다. 그는 남인이 정권을 잡아 귀양살이를 할 때도 그것을 자신의 불관용이 초래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사파가 정파에게 가하는 박해라고 생각했다. 이는 전형적인 광신도의 심리상태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도 그것이 교조화되어 자유로운 반론을 억압할 때 역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그랬고 주자의 성리학이 그랬다. 송시열은 유학의 대가이면서도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깨우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p.398)


군자는 역시 많이 안다고 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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