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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슈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글도 읽지 마세요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저 길고 지루한 글이 될 게 뻔합니다. 읽지 마세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책을 읽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내가 작가라면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같은 책을 읽을 땐 더더욱 그렇다. 플롯이 치밀하다는 평을 듣는 책이다보니 그 플롯을 나름대로 구성해보는 것이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다. MBA 학생이 기업의 성공, 실패 사례를 분석하고 경찰 후보생이 범죄의 수사 과정을 되풀이 하는 것처럼.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뒷 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대단한 재능이자 축복이다.
사건의 배경은 뉴햄프셔의 오로라. 작은 시골 마을이다. 해리 쿼버트는 33년 전 이곳으로 와 소설을 하나 쓴다. 소설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고 오로라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15세 소녀가 모티브였다.
1975년 8월 30일 이 소녀가 실종된다.
그리고 33년 뒤 해리의 집 앞마당에서 소녀의 유해가 발견된다. 소녀의 가방 안에는 해리 쿼버트에게 부와 영예를 안겨준 소설의 원고가 들어 있었다. 해리는 체포 되기 직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 마커스 골드만에게 전화를 건다.
마커스 골드만은 나중에 <해리 쿼버트 사건>과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이라는 책을 쓰게 될 남자다.
나는 15세 소녀의(놀라 켈러건) 살해 용의자로 13명을 꼽는다. 그리고 이 용의자들을 각각의 특성에 따라 '조악한 미끼', '충격적 반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라는 세 개의 범주로 나눈다.
조악한 미끼
1. 비스트, 루터 케일럽
루터 케일럽은 미술에 재능을 가진 젊은이였으나 동네 불량배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해 얼굴이 망가진 괴물이다. 변한 건 외모 뿐이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유를 잃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사람들은 괴물의 내면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재앙은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는 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 시작된다. 루터 케일럽은 놀라를(살해 당한 소녀) 사랑한 게 분명하다. 매일 풀숲에 숨어 그녀를 지켜봤으니까. 그리고 루터 케일럽은 놀라가 해리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1975년 8월 30일, 루터는 놀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놀라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거절의 상처로 마음이 격해진 루터가 놀라를 잡아챈다. 겁먹은 놀라가 도망친다. 당황한 루터가 놀라를 쫓을 때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 루터는 가까스로 그녀를 잡아 진정시키려 한다. 단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려던 것 뿐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녀는 죽어 있었다. 루터는 놀라의 가방 속에서 해리의 원고를 발견하고 그녀를 해리의 집 앞마당에 묻는다.
루터 케일럽은 시작부터 '내가 살인자다'라는 팻말을 들고 소설에 등장한다. 내가 <소년 탐정 김전일>을 통해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너무 범인같은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루터 케일럽은 미끼다. 작가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이 미끼에 고정시켜 두고 뒤에서 은밀히 진범을 만들어야 한다.
2. 아메리칸 싸이코, 엘리야 스턴
이 남자는 오로라 인근의 대도시 콩코드에 거주하는 거부다. 부란 무엇인가? 불법을 은밀하게 행하는 권력을 지녔다는 의미다. 게다가 이 남자의 집에는 놀라의 누드 그림이 있다. 그의 밑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루터 케일럽.
온갖 구린내가 풍기지만 문제는 이 남자에게 놀라를 죽일만한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가능한 케이스는 <아메리칸 싸이코>다. 대중이 부자에게 갖는 전형적 편견이니까. 하지만 그가 싸이코패스라면 한 번의 살인으로 만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싸이코패스는 연쇄살인마를 다루는 '스릴러'에는 적합하지만 진실을 찾아 떠나는 '미스테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엘리야 스턴은 절대 범인이 아니다.
충격적 반전
3. 필살의 카드, 놀라 켈러건
최강의 반전 카드다. 15세 소녀가 살해된 게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실존 인물이 아니라면? 오래 전에 죽은 해리의 첫사랑이라면? 반전의 충격이 클 수록 이야기는 더욱 정교하게 짜여져야 한다. 내 실력으론 엄두도 나지 않지만 책 한권으로 100만 달러를 버는 작가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놀라 켈러건은 말 그대로 필살의 카드다. 그런데 그 필살(必殺)의 대상이 '독자'가 될지, 아니면 '저자'가 될지는 오로지 작가의 실력에 달렸다.
4. 악의 기원, 해리 쿼버트
해리 쿼버트가 놀라와의 사랑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의 제목은 <악의 기원>이다.
놀라는 해리 이외에도 여러 남자와 놀아난 것처럼 보인다. 경찰 서장과 오랄 섹스를 했고 누드 모델을 선 뒤 대가를 받았다. 진실을 알고 난 해리가 놀라를 죽였을까? 그렇다면 살인은 오히려 구원의 의미를 갖는다. 천사같은 소녀 놀라 켈러건의 추악한 비밀을 죽음과 함께 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다.
멜로치고는 꽤 근사한 주제다. 대중의 공감이 문제라면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다. 위와 같은 고백을 질투에 눈이 먼 남자의 자기 합리화로 몰고가는 것이다. 이 경우엔 놀라를 자기 집 앞마당에 묻은 걸 두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로 풀어야 한다.
하나는 죄책감이다. 누군가 자기의 살인을 밝혀 무거운 짐을 덜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묘한 트릭이다. 이것은 추리 소설의 아버지 '에드가 알렌 포'가 고안한 트릭이기도 하다. 숨기고 싶은 게 있다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라는 것.
이런 이중성은 <악의 기원>이라는 야릇한 책 제목과 묘하게 어울리기도 한다. 악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혹시 악의 기원은 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5. 포스트 모던, 마커스 골드만
놀라 켈러건은 1975년에 죽었다. 마커스 골드만은 1978년 생이다. 잠깐만 들어봐.
놀라의 유해가 33년 만에 발견됐다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나이가 33세. 그는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지. 마커스 골드만은 놀라가 죽은 지 3년 뒤에 태어났고. 뿡야!
사실은 이런 구성을 생각해봤다.
마커스 골드만은 <해리 쿼버트 사건>과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썼다. 따지고 보면 조엘 디케르가 썼고 내가 읽은 책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마커스 골드만이 두 책을 쓰는 과정에서 겪은 사건과 자료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책을 쓴 건 '조엘 디케르'일까 '마커스 골드만'일까?
이 책의 진정한 저자가 '마커스 골드만'이라면 그에겐 놀라를 죽인 범인을 선정할 권력이 있다. 잠깐, 마커스 골드만에겐 이게 모두 '실제로 벌어진 일'인데 어떻게 범인을 고를 수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생각해보자. <해리 쿼버트 사건>과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이 실제로 벌어진 일을 추적한 소설이라는 건 마커스 골드만의 주장일 뿐이다.
마커스 골드만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게 사실이라면(거짓말은 작가의 본분이다) 그는 놀라를 죽일 수도 심지어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놀라는 죽었다. 마커스 골드만은 자기가 만든 캐릭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하겠지만,
그들은 모두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않은가!
책 속이 아니라 책 너머에서 진실을 발견하기. 포스트 모던.
6. 경찰답지 않은 경찰, 게할로우드 경사
게할로우드 경사는 33년 만에 재개된 놀라 사건의 담당 경찰이다. 그는 마커스 골드만과 함께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나간다. 그런데 왜 그는 마커스 골드만과 단서를 공유할까? 수사 중인 사건의 정보를 일반인과 공유하는 건 명백히 불법이다. 그런데 그는 마커스 골드만이 빌린 호텔 스위트룸에 수사 본부를 차리기까지 한다.
말도 안돼!
가능한 경우는 게할로우드가 마커스 골드만에게 잘못된 단서를 제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가 진실에서 되도록 멀어지길 바라면서. 그게 아니라면 작가는 게할로우드의 경찰답지 않은 행동에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실수라고 하기에 이는 너무 큰 구멍이다.
7. 오 나의 사장님, 버나스키
버나스키는 미국에서 제일 큰 출판사의 사장이다. 마커스 골드만과 계약을 해 그의 첫 번째 책을 성공시켰다. 문제는 두 번째 책이다. 사실 그는 마커스가 두 번째 책을 쓰지 못하고 슬럼프에 빠질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33년 전 놀라를 죽여둔 것이다. 그 사건이 마커스에게 책을 쓸 동기를 마련해 줄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돈이 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버나스키가 정말 이런 이유로 놀라를 죽인거라면 그는 신이다. 신에게 죄를 묻지는 말자.
8. 악령의 나라, 기타 등등
악령이나 악마가 범인인 건 어떨까? 데이비드 핀처의 <나를 찾아줘>인줄 알았는데 제임스 완의 <컨저링>이었던 거지.
글을 쓰다보면 가끔 미칠 때가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9. 오랄 섹스, 프랫
그는 놀라의 실종 당시 수사를 지휘한 경찰 서장이다. 놀라는 어느날 프랫을 찾아와 다짜고짜 오랄 섹스를 한다. 그 다음엔 프랫이 놀라를 불러 강제로 시킨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프랫이 놀라를 죽인 거라면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
세 번째 만남을 가졌을 때 놀라는 프랫의 오랄 섹스를 거부하며 도망쳤고 이를 쫓던 프랫이 실수로 그녀를 죽이고 만다.
이렇게 결론을 내면 사람들은 내 소설에서 '오랄 섹스'만 기억할 것이다. 난 오랄의 아이콘이 되는 거고.
10. 초동 수사, 트래비스 던
놀라 실종 당시 처음으로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이다. 그는 제니 퀸을 사랑한다. 루터 케일럽을 증오한다.
11. 금발의 미녀, 제니 퀸
해리 쿼버트를 사랑했으나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여자. 루터 케일럽을 성추행으로 고소한 바 있다.
12. 복수의 화신, 태머라 퀸
제니 퀸의 엄마. 해리 쿼버트를 사위로 맞을 꿈을 꿨으나 그가 놀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 감히 내 딸을 무시하고 열다섯 살 짜리 어린애에게 눈독을 들인다고? 해리 쿼버트는 변태성욕자다. 태머라 퀸은 그의 파멸을 원했다.
13. 카이저 소제, 로버트 퀸
태머라 퀸의 남편이자 제니 퀸의 아버지. 와이프에게 눌려 사는 소심한 남자지만 가족을 사랑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는 남자다.
그는 소설을 통 털어 해리 쿼버트의 차 쉐보레 몬테카를로에 관심을 보인 유일한 사람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고? 쉐보레 몬테카를로는 놀라 실종 당시 범인이 타고 도주했다고 알려진 차니까. 그럼 해리를 의심해야지! 하지만 생각해보라, 그건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경찰이 알아서 조사해줄 것이다. 사고가 나자마자 인근 지역의 몬테카를로 차주를 조사할 테니까. 우리는 경찰이 놓칠만한 부분을 꼬집어야 한다. 무슨말이냐 하면 로버트 퀸이 쉐보레 몬테카를로를 렌트해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고작 대사 하나로?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뛰어난 작가는 결코 이유 없는 대사를 시키지 않는다.
물론 로버트 퀸의 단독 범행으로 몰고 가기엔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는 면이 있다. 그렇게 되려면 로버트 퀸이 놀라를 강간이라도 해야한다. 오랄 섹스에 강간, 포르노 잡지에나 어울리는 줄거리로 100만 달러를... 벌 수는 있지만 작가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로버트 퀸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활용할 여지가 있다. 그 시작은 분명 쉐보레 몬테카를로가 될 것이다.
14. 그래서 누가?
프랫, 트래비스 던, 퀸 가족 이 다섯 명은 따로따로 놓고 볼 땐 범인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하지만 다섯을 하나로 합쳤을 땐? 난 이 책을 손에 든 순간 놀라의 살인에는 마을 사람 전체가 연루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졌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잡한 플롯은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수로 400쪽이 넘는 책 두 권을 채우겠는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결정적인 오해는 거기서부터 나오니까.
특히 프랫과 트래비스 던. 두 사람은 놀라 실종 당시 수사를 지휘한 핵심 인물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두 사람의 말을 믿은 게 아닐까? 놀라 실종 당시 초동 수사는 이 두 사람만이 관여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걸 밝힐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거 아닌가!
프랫에게는 놀라를 죽일 근거가 있다. 하지만 트래비스는? 프랫이 놀라를 살해했고 트래비스는 단순히 목격했다. 프랫은 경찰 서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 트래비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33년 간 입을 다물고 있기에 이는 너무나 큰 짐이다. 침묵이 강제성을 띄려면 트래비스 던도 놀라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 해야 한다. 그 연결 고리가 뭘까? 퀸 가족이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작가가 제시해 주는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책은 점점 더 재미있어 졌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포기야말로 모든 죄악 중에 최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