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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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유시민에게 항상 두 개의 감정을 갖는다. 그는 1959년에 태어나 스무살 때 독재자의 죽음을 경험했고 뒤이어 나타난 독재자와 싸우는데 그 이십대 전부를 할애했다. 민주화는 *1989년에 성공했지만 그의 승리는 **2003년이 되서야 찾아온다. 나는 그와 함께 승리를 만끽했다.


유시민은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중요 내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한미 FTA 체결에 핵심 역할을 한다. 물론 그 때의 FTA는 지금의 FTA처럼 독소 조항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FTA(신자유주의)같은 보수적 가치를 왜 진보 정권이 앞장서 체결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훗날 유시민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기에 그 흐름 속에서 최대한 이득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 당시의 FTA라고 변명한 바 있다. 나는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죽을 힘을 다해 손에 쥔 민주화, 독재의 후계자들과 변절자들의 협잡을 이겨내고 세운 진보 정권이라면, 또 한 번 죽을 힘을 다해 막아내야 했던 게 바로 FTA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이후 유시민은 통합진보당 사태와 일련의 정치적 시련을 겪은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다. 


그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2014년 7월 유시민은 <나의 한국 현대사>를 들고 돌아왔다. 작가이자 한 명의 평범한 시민으로. 이 책의 첫 장은 '같은 시대를 숨 가쁘게 달려온 모든 벗에게'라고 시작한다.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이 책이 그의 벗 뿐만 아니라 그의 적들마저 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잠시후 나는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그가 말한 '모든 벗'에는 이미 그의 적들이 포함되 있었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역사가가 무엇을 기술하고 무엇을 기술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총합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역사는 사실의 폐부를 꾹, 찌르고 들어가는 날카로운 창이다. 그 창날에 꽂힌 일련의 사실들이 역사를 만든다. 그러므로 이 책이 객관적이냐 아니냐 묻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질문이다. '객관'대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단어는 '균형'이다.


이 책에서 그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번민하는 당사자로서 우리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았다."(p.11)라고 썼다. 거짓말이다. 그는 번민하되 냉정을 잃지 않았고 자부하되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를 절대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바보 같은 정치인처럼 박정희 대통령을 자근자근 다진 뒤 물에 헹궈 다카키 마사오와 여성 편력으로 차려내지 않았다. 물론 그는 박정희가 아니라 전두환과 싸워온 사람이기에 상대적으로 그에게 관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부 진보 세력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여준 무조건적인 증오와 비난을 생각해 볼 때 박통에 대한 그의 인식은 충분히 성숙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보통 사람 노태우를 칭찬하고 영원한 박쥐 이인제 마저 재평가의 대상으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양극화와 고용 불안이(비록 김영삼 정권이 일으킨 IMF 탓이 크지만) 진보 정권 10년 동안 급격히 진행됐음을 솔직히 시인한다. 


유시민은 이 책에서 악한 사람의 선한 면, 선한 사람의 악한 면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번민을 낳았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번민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 책이 반짝반짝 빛나는 또 한가지 이유는 '무림'이니 '부림'이니, 민혁당이니, 너무나 많고 복잡한,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군사 독재 시절의 끔찍한 시민 탄압을 잘 정리해놨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그는 균형을 잃지 않고 일명 진보라 자칭해온 불온 세력의 뿌리도 밝혀낸다. 학생 운동이 왜 NL계와 PD계로 나뉘어졌는지, NL과 PD는 도대체 무엇이며, 현재 그를 잇는 것이 누구인지를 가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유시민은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사실 이런 균형은 똑똑한 진보주의자들이 보여온 전형적 태도이기도 하다. 그가 정치인이었던 시절엔 그런 '이성적 태도'로는 승리할 수 없다며 그를 질타하는 사람도 많았다. 맞는 말이다. 옳게 살아가려는 의지, 흥분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힘만으로는 결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현실 정치는 똥통이며 이기기 위해선 온 몸에 똥이 묻는 걸 개의치 말아야 한다. 하지만 잊지 않으셨겠지? 유시민에겐 "더 이상 승리해야 할 선거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이 달려온 격동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역사를 거꾸로 돌린 어리석은 국민에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들고 왔던 불꽃을 앞서가는 세대에 전해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고보면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언제나 고군분투의 행진이었다. 유시민은 이제 묵묵히 자기 페이스를 지키며 그 대열의 끝에서 걷는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화내고 싶지 않다. "숨가쁘게 달려온" 그의 등을, 아무 말 없이 밀어주고 싶다.


*군사 독재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해. 드디어 군사 독재가 끝나나 싶었지만 어이없게도 전두환 정권의 2인자였던 보통 사람 노태우 씨가 당선된다. 국민이, 자기를 탄압했던 사람들을, 자기 손으로 뽑아준 것이다.


**1998년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진보 정권이 탄생한 해였다.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투신한 김영삼은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패배하자 전두환, 노태우, 김종필 등 군사 독재자들과 합당을 추진해 오늘날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한다. 1993년, 그는 대통령이 당선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IMF 사태를 일으켰다.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 위기를 일으켰으나 그 위기를 일으킨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씨의 지지는 여전히 높았다. 이회창 씨는 조순 등과 결합해 거대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을 발족시켜 당시 김종필과 손 잡은 김대중 씨를 박빙의 차로 추격하지만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씨에게 패배한다. 2003년,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진보 정권이 탄생한다. 그 주인공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미 경제 의존도가 극도로 높은 대한민국이 미국의 FTA 체결 압박을 견뎌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차피 체결하게 될 FTA. 그렇다면 보수 정권의 주도로 끔찍한 독소 조항을 포함하기 보다는 그래도 진보 정권이 나서서 최대한 국익에 도움이 되는 협약을 맺고자 한 것이 당시 노무현 정부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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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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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인생의 부조리를 설명하는 책이 있다면 그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수 십, 수 백, 수 천 세대를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아이를 낳아 고통과 절망과 분노로 들끓는 이 세상에 바쳤다. 단 한 번도 아이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내 보기에 탄생은 결코 고귀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오로지 종족을 번식시키겠다는 본능에 의해 저질러진, 불공정 계약이다.


이 계약을 파기하는 방법은 자살 뿐이다. 오로지 자살만이 나의 의지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돌려준다. 자살에 온갖 죄악을 뒤집어 씌우고 침을 뱉고 모욕을 해도 그 진실은 반짝반짝 결코 숨길 수가 없다.


백인 남자는 고속으로 달려오는 선셋 리미티드에(뉴욕을 지나는 통근 열차) 몸을 던졌다. 그를 구한 건 흑인 남자였다. 백인 남자가 눈을 떴을 때 그는 흑인 남자의 집에 있었다. 흑인 남자는 백인 남자에게 묻는다. 왜 자살을? 백인 남자가 흑인 남자에게 대답한다. 왜 삶을?


백인 남자는 "고통과 인간 운명은 같은 말"이라고 한다. 흑인 남자는 이에 "고통이 없다면 행복을 어떻게 인지 하냐"고 응수한다. "뭐에 비교할건데?" 흑인 남자가 덧붙인다.


흑인 남자는 젊은 시절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사소한 시비가 붙은 동료 수감자와 칼부림을 벌였고 거의 죽다 살아난다. 흑인 남자는 아무도 없는 의무실에서 홀로 눈을 뜬다. 그 순간 흑인 남자는 자신이 아무도 없는 곳에 있더라도 누군가 항상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후 흑인 남자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흑인 남자는 자신의 행복을 자기의 과거와 비교해 얻은 걸까? 행복은 오로지 비교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흑인 남자는 자신의 과거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상관 없이 바로 지금, 행복하다. 행복은 뭔가와 비교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가슴에 닿는 순간 알 수 있는 객관적 실체다.


화장실이 급한 인간은 깨끗히 장을 비우고 나오며 배가 아팠던 이전과 비교해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 바로 그때, 그냥, 시원하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지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인생을 총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행복과 비교를 연결하는 건 오히려 불행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인간은 불행했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행복을 찾기 보다는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현재와 비교해 불행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백인 남자의 인식은 탁월하다. 흑인 남자의 설명은 나이브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백인 남자를 막아 세우지 못한다. 흑인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백인 남자가 나간 문 앞에 꿇어 앉아 그가 다시 자살을 저지르지 않기를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 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순진할 수가!


신을 믿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그들은 타인을 위해 기도한다고 믿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왜 모르는 걸까? 기도로 될 일이었으면, 


애초에 고통을 받지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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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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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회색으로 가득하다. 어쩌면 누렇게 변색된 벽지 색인지도 모르겠다. 회색 세계에 낡은 집. 낡은 소파. 낡은 TV. 낡은 자동차. 거기에 낡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대개 실직자거나 알콜 중독자거나 실직한 알콜 중독자들이다. 남루한 삶이 오래된 물때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살다보면 내 인생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자문해 볼 때가 있다. 그럴때면 몰락이 의외로 급작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몰락은 참을성 있게, 은근히, 끈질기게 동작한다. 몰락은 천천히 젖어들어 일상이 된다. 그래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중독의 메커니즘을 공유한다. 


몰락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그 몰락을 자각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1977년 5월까지 알콜 중독자로 살았다. 그는 중독자 요양원에서 나온지 얼마 안돼 출판인 프레데릭 힐스를 만난다. 힐스는 카버의 책 하나를 페이퍼백으로 출간 할 계획과 함께 장편 하나를 쓸 경우 당장 오천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레이는 테이블을 떠나 화장실로 갔고, 거기서 울었다." 카버가 화장실에서 뭘 더 했는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이미 한참이나 진행된 몰락의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아직 그 몰락을 멈춰 세울 능력이 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p. 324 일부 인용).


카버의 소설에 등장하는 실직자와 알콜 중독자와 실직한 알콜 중독자들 또한 종국에 가서는 자신의 몰락을 눈치채고 그 원인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인생이 순식간에 솟구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날개는 이제 막 추락을 멈춰 세웠을 뿐이기 때문이다. 추락의 깊이는 깊고도 깊어 구름 너머 빛의 세계까지는 아직 한참을 날아올라야 한다.


카버의 문장은 담담하다. 철저히 긁어 모은 감정은 양철 상자에 담겨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찬장 구석에 놓인다. 


카버의 이야기는 지루하다. 솔직히 너무 지루하다. 뜨거운 여름날 먼지 낀 선풍기가 힘없이 돌아가는 이발소 같다. 사건이라 부를만한 것도 없다. 말했듯이, 몰락은 일상이다.


그런데 카버의 소설엔 감정과 사건이 없기에 오히려 그것들이 닿을 수 없는 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진짜 삶이다. 돌이켜보면 진짜 삶에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축구장을 만들고 전쟁을 일으키고 술을 만들어 억지로 스펙타클을 짜내는 것이다. 열광으로 가득한 이 거짓 세계에 구원은 없다. 구원은 오로지 구질구질한 현실에만 존재한다. 당신의 인생이 구질구질하다는 건, 역설적으로 당신이 진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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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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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항상 신문을 읽으라고 말했다. 기사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사설로 자기 생각을 키우라고 하면서.


<보바리 부인>의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문이 대량 발행되던 시대에 살았다. 그는 신문이 쓰레기라고 말했다.


"소작농들이 중산층의 4분의 3보다 덜 멍청하다. 중산층은 항상 자기들이 신문에서 읽은 것에 대해 법석을 떨고 한두 군데 신문에서 얘기한 것에 따라 풍향계처럼 빙글빙글 돈다." 플로베르는 오로지 완전한 문맹자와 무지렁이 프랑스인들만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p.80)


나에게 신문을 읽으라고 종용했던 어른들에게 바보 상자는 언제나 TV였다. 오늘날 나에게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스마트폰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바보 상자는 신문에서 TV로 TV에서 스마트폰으로 변해왔지만 따지고 보면 그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체가 쏟아내는 정보들, 즉 뉴스가 문제다.


인간은 뉴스로 세상을 지각한다. 플로베르는 바로 이 문제를 간파했던 것이다.


뉴스는 어머니를 죽이고 불을 지른 아들의 살인을, 이집트 콥트 교도를 산채로 불태운 IS의 만행을, 심각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웃는 정치인을, 누드톤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몸매를, 무너진 건설 현장에 깔려 죽은 노동자의 사망 사고를 24시간 365일 쉬지 않고 보도한다.


뉴스를 읽다보면 이 세상은 불의의 사고로 충만하고, 윤리와 도덕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악인과 미치광이로 가득해 도무지 살만한 곳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지구에선 수 억 명의 사람들이 따뜻한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황금빛 해안을 거닐고 사고 없이 자동차와 전철과 비행기를 타는 등 못해도 55억명의 인간은, 별일 없이 잘 산다.


뉴스는 일반적으로 평범한 일을 보도하지 않는다. 이 말은 뉴스가 세계를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앞에 펼쳐진 뉴스의 스크린은 너무 거대하고 자극적이라 우리는 그 너머에 진짜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이 대목에서 알랭드 보통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결코 파괴적이지 않다. 보통은 뉴스가 이미 우리 세계를 단단히 둘러싼 피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벗겨내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피부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그 밖의 세계를 투과할 수 있을만큼 투명하게 바꿀 수 밖에 없다. 뉴스는 사람들의 눈을 자극하는 살인, 교통 사고, 전쟁, 경제 위기를 오로지 사실에만 기반해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가 그 관계를 통해 무엇을 '더' 깨달아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알려줘야 한다. 


보통은 '객관적 사실 보도'를 신성한 소처럼 숭배하는 뉴스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보통은 뉴스가 문학이 되기를 촉구한다. 기사에 생생한 감정과 사적 의견을 담아 더 호소력 있는 뉴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미친 소리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 천 년간 사실을 각색하고, 허구의 인물을 만들고, 가상의 사건과 공간을 기술해왔음에도 문학이 뉴스보다 더 오래가고 감동적인 '진리'를 전달했음을 생각해보면 과연 알랭드 보통의 주장을 허튼 소리로만 치부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간다.


<뉴스의 시대>가 편안한 점은 우리가 자극적 뉴스에만 눈길을 주고 그 내용에서 우리의 삶을 개선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점을 단순히 대중의 천박함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랭드 보통은 오만한 계몽의 연단에 서서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에게 호통을 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뉴스에게 권하듯 철학을 더 호소력 있게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다.


알랭드 보통의 철학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책은 충분히 쉽다. 바로 이러한 점이 알랭드 보통의 철학을 인기 있는 대중서로 만드는 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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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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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참 신기하다. 처음 읽을 땐 그렇게 좋던 것이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실망스러운 게 있는가 하면 처음엔 그렇게 싫던 것이 두 번, 세 번 읽을 수록 참맛이 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든 섣불리 판단내리길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종종 민망해지곤 한다. 그럴 때면 책 앞에서 절이라도 해야지. 속죄와 송구의 마음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콜롬비아라고 하면 자살골을 넣은 수비수가 훌리건의 총을 맞고 죽은 나라로 밖에 생각치 않는 우리에게 문학을 떠올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이런 인식은 전세계적으로도 그리 낯선 게 아니어서 문학의 창시자라고 생각하는 건방진 유럽, 미국인들 또한 남미라 하면 그저 혼란한 정치, 군사 독재, 마약, 미개한 백성, 가난 등이 한 솥에서 끓고 있는 광란의 부대찌개 쯤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바뀐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들의 문학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인식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자연스레 남미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보르헤스와 마르케스가 있었으니까.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이야기, 마술적 사실주의, 메타 소설 등 새로운 이야기 전략으로 무장한 그들은 일약 세계 문학의 스타로 떠오른다. 보르헤스는 노벨상을 거부했고 마르케스는 바로 이 책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보르헤스와 마르케스는 둘 다 남미 문학의 대표자지만 '남미 문학'이라는 한 범주로 담기엔 민망할 정도로 다르다. 보르헤스가 윤회, 시원 등 주로 철학적 관념을 이야기로 승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마르케스는(적어도 이 책을 두고 볼 땐) 훨씬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더 사람 냄새가 난다.


사실 '마술적 사실주의'만 두고 보면 마르케스야말로 진짜 남미 문학의 아버지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술적 사실주의가 무엇이냐? 나는 불합리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반지의 제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소설은 명백히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다. 실제로 마법이 등장하잖아? 그리고 이 책이 씌여진 시기를 고려했을 때 사우론은 '나치'의 상징으로 반지 원정대는 '연합군'의 메타포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지의 제왕>도 마술적 사실주의의 한 부류로 볼 수 있을까? 아니다. 물론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볼 때 <반지의 제왕>은 매우 황당한 이야기다. 불멸의 나즈굴이 용을 타고 날아다니고 유령 부대가 오크를 무찌르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소설에 용과 오크, 유령이 나오는 걸 문제 삼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은 애초에 용과 오크, 유령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이야기를 짓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술적 사실주의에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해줄 경계가 없다. 독자는 작품을 읽는 순간 그 배경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라고 믿지만 그 안에선 흙과 석회를 파먹는 여인이 등장하고, 4년 밤낮을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리고, 사람이 담요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등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왜 하는 걸까? 작가는 무슨 이유로 자기 작품을 비합리적 사건으로 채워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걸까?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풀어낸 소설 <제 5도살장>의 커트 보네거트는 이 소설이 왜 초현실적이어야만 했는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그토록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현실을 도저히 기존의 사실적인 이야기 방식으로는 써낼 수 없었다"고. 나는 일찍이 이 휴머니스트의 대답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존재 의의를 명백하게 밝혀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나 헛소리, 광인의 농담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합리적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이라는 말을 종종한다. 이 말은 그저 기적처럼 벌어진 일들에 대한 단순한 감탄사일까, 아니면 비로소 깨달은 궁극적 현실 인식일까?


<백년 동안의 고독>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이 늪지대에 둘러 쌓인 마을 마콘도에 정착해 호세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 대령과 아마란타를 낳고 그들이 다시 아르카디오와 아우렐리아노 호세와 17명의 아우렐리아노를 낳고 그들이 다시 미녀 레메디오스와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낳고 그들이 다시 호세 아르카디오와 레메를 낳고 그들이 다시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를 낳고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가 결혼해 낳은 돼지 꼬리 달린 아이가 개미들에게 납치당해 사라지기까지, 약 100년에 걸친 부엔디아 집안의 흥망성쇠를 그린다. 이야기는 한없이 솟아 올랐다 한 없이 꺼져내리고 양껏 부풀어 올랐다 힘껏 쪼그라드는 등, 좀처럼 대중을 헤아릴 길 없이 난동을 부리지만, 이 난동이야말로 끔찍하고 부조리한 남미 역사의 진면목이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현실보다 더 사실적임을,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똑똑한 사람들은 왜 이 따위 헛소리를 하는지, 그 따위 전략으로는 원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없음을, 한편으로는 측은한, 또 한편으로는 근엄한 선생님의 마음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탓할지도 모른다. 일찍히 사도 바울은 이런 똑똑이들을 위해 고린도전서 3장 18절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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