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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어렵다. 의미를 파악하기는 커녕 문장을 읽는 것 조차 힘들어 두 번을 내리 읽었다. 에세이 형식의 소고라고 생각했던 게 완전 실수였다. 라캉, 헤겔, 대타자, 주인 담론, 대학 담론, 세계 정신. 이 책을 살 생각이 있다면 두 번, 세 번 고민해 보기 바란다.
이 책을 이 천 자 내외의 짧은 리뷰로 정리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만 얘기하려 한다. 그것은 자칭 의식 있는 시민 혹은 진보라 부르는 이들이 보이는 위선과 무력함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 혁명의 주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다. 가진 건 자식 밖에 없다는 의미의 무산 계급. 지금 이 무산 계급은 모두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 그럼 오늘날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이들은 누구인가. 일명 중산층이라 불리는 중간 계급. 이들이 혁명의 주체라는 사실은 매우 바람직하다. 혁명은 언제나 광범위한 중간 계급의 참여를 통해서만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들이 보이는 태도는 매우 이중적이다.
중간 계급은 대개 교육 수준이 높고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다. 항상 쥐꼬리만한 연봉을 한탄하지만 진짜 쥐꼬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회사원=미생이라는 공식이 잘못됐다는 걸 알지 못한다. 때문에 스스로 미생이라 자처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보수 정당의 정책, 부패한 정치인의 행동, 자본주의, 대기업의 횡포, 갑질 문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SNS에 "썩을대로 썩은 세상", "쓰레기같은 대기업", 좀 더 점잖게는 "국민을 아끼는 나라의 국민이고 싶은 건 지나친 욕심일까?" 따위의 냉소적 혼잣말을 쏟아낸다. 하지만 동시에 유명 CEO의 성공 신화를 공유하고 연봉 1억, 연 매출 100억 등등 대박을 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스타 벅스, 커피빈, 슈퍼 커피, 맘모스에서 아메리카노와 카페 라떼와 오렌지 비앙코를 마시고 노동자의 날과 어린이날이 만든 연휴에 해외 여행을 계획한다.
이런 부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 SNS 상에서 보이는 이들의 이중성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배트맨의 <투 페이스>를 능가한다. 이것은 혹시 중간 계급의 현실에 맞춰 변형된 신종 갑질 문화가 아닐까? 부자가 되서 권력자가 되서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껏 하고, 맘에 안드는 놈을 심판하고, 눈치 안보고 내키는대로 살고 싶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이들이 만들어낸 갑 롤플레이가 아니냐는 것이다. 최근 SNS에 폭로되는 다양한 갑질 고발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이 같은 주장에 힘이 실린다. 그들은 사실 관계가 명확치 않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이야기가 '가해자'로 지정한 사람을 물고 씹고 뜯는다. 그들의 분노가 멈추는 건 언제인가? 가해자가 자기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올릴 때 까지다! 그러니까 혼자서는 갑질이 불가하다는 걸 깨달은 개인이 SNS에 모여 갑질을 공동 구매하는 것이다. 이런 변태적 갑질이 가까운 시일 안에 사라지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집단의 갑질은 개개인에게 익명성을 보장할 뿐 아니라 이들의 행동을 정의로 포장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상 교육이 보장되는 복지 국가? 지옥에서조차 자국민을 구해내는 강력하고 안전한 국가? 그런데 이를 위해 당신의 세금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월호 사태와 맞물려 소방 공무원들의 열악한 현실이 공개된 적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금치 못했고 그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 했었다. 우리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소방관들의 연봉을 높이고 최고급 장비를 구해줬다고 치자. 그리고 이를 위해 국민 1인당 10만원의 세금을 더 냈다고 치자. 이렇게 한 5년이 지났을 때 당신은 '평균 연봉 1억, 귀족 공무원 소방관'이라는 기사를 클릭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물론 부자들의 세금을 줄이고 그 부담을 봉급 노동자들에게 몰아주는 현재의 조세 체계는 확실히 문제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국가는 단순히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는다고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자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만 가능하다.
유토피아는 모두가 희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국가다. 그런데 분노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모두가 잘 사는 세계가 아니라 잘 사는 이들을 끌어내리고 본인이 그 자리로 오르려는 것이라는 게 명백해진다.
정치에 대해서도 이들은 상당히 위험한 태도를 갖는다. 현 정부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100% 정당하다. 정치인들이 모두 썩었다는 말도 옳다. 그런데 그 다음은? 중간 계급의 갑질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나는 의식있고 똑똑한 사람이야.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진짜 깨끗하고 똑똑한 놈 하나만 데려와바. 내가 진심으로 지지해 줄 테니까. 바로 이런 태도가 독일 국민에게 히틀러를, 한국인에게 박정희를 선물해줬다고 하면 그들이 믿을까?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그 자유의 투사, 그 용감한 시민, 그 의식있는 사람들이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박정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정말 의식 있는 시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