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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 4 - 폭력의 근대화 ㅣ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4
황석영 엮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땐 시큰둥했다. 첫 권을 보니 실존 인물인가 싶을 정도의 까마득한 대선배들의 등장. 채만식, 현진건, 염상섭, 김유정, 이상. 물론 한국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이분들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겠지마는 한편으로는 좀 화석 같은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절대 만지거나 책장을 넘겨선 안되고 유리장 밖에서 눈으로만 봐야하는 유물들.
두 번째, 세 번째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 <한국 단편 문학선 1,2>에 이미 등장한 바 있는 유명한 작가의 익숙한 작품들. 이렇게 겹치기 출연을 해도 되는거에요? 눈을 흘기며 지나갔지.
무려 황석영 선생님이 고르셨고 내가 좋아하는 단편집임에도 시큰둥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역시 만날 놈은 만나고 마는게 세상의 이치인가 보다. 퇴근길, 다가오는 전철 시간을 분 단위로 체크하며 서점에서 집어든 책이 이 4권이었다. 황석영, 이문구, 이청준, 조세희, 김원일. 익숙히 들어온 이름의 익숙하지 않은 작품들.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1970년대, 대한민국이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터져 나온 고름을 원료로 삼은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석영 선생님의 작품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건 탁월했다. <몰개월의 새>는 베트남 파병 군인의 훈련소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데 박정희 정권은 월남전에 대한민국 청년들을 바친 대가로 산업화를 위한 대규모 차관을 얻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문구, 송기숙의 소설은 산업화 시대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농촌의 풍경을 그린다.
한승원의 <목선>과 이청준의 <눈길>도 시골을 배경으로 하지만 앞선 두 작품과는 좀 다르다. <목선>은 부대끼는 삶을 꾸역꾸역 삼키고 살아야만 하는 어민들의 비애를 당대사와 느슨하게 연결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편성을 갖는다. <눈길>도 마찬가지. 비록 새마을 운동이 발단이긴 하지만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이를 애써 외면하다 결국 그 커다란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아들의 이야기가 별빛처럼 은은하게 흐르는 작품이다.
윤흥길과 송영의 작품은 폭격을 피해 시골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의 슬픈 군상을 훑는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고향을 버리고 서울 변두리에 무허가 날림집을 짓고 살아야 했던 노동자들, 환경 정화라는 명목으로 실행한 철거에 맞서 싸우다 완전히 거지가 되고마는 개털들의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송영의 <중앙선 기차>는 입에 풀칠할 방도를 찾아 변두리에서 도심지로 떠나는 기차칸의 정경을 그린다.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기차칸은 그야말로 세상의 축소판이다.
이 책에서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건 이병주와 김원일이다. 이병주의 <겨울밤>은 너희가 목숨 걸고 이루려 한 공산주의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이념이란 얼마나 무의미한지 조롱해 은근히 신경을 긁는다. 김원일의 <어둠의 혼> 또한 이념이 뭔가요? 내 아버지를 죽게해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 그것인가요? 라고 묻는듯 그 무상함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어찌보면 다른 작품들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선다고 볼 수 있지만 좌우를 불문하고 훌륭한 작품을 실었다는 점에서 이 단편집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은 조세희가 장식한다. 기획의 맺고 끊음이 얼마나 탁월한지. 조세희가 누구인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제목 그대로 쏘아 올린 뒤 그대로 전설이 된 사나이다. <난쏘공> 이후 조세희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내지는 못하지만 고뇌의 끈을 놓고 허송세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80년대의 치열한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자기 '문학을 오롯이 삶으로 살아내기' 위한 시도를 감행한다. 조세희는 70년대를 끌고 80년대로 나아간다.
재미의 여하를 떠나 소설이 끝날 때 마다 등장하는 황석영의 덧붙임 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작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낚시를 떠나고, 바둑을 두고 어쩔때는 감옥에서 만나기도 하는 황석영 선생의 일화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이야기가 된다.
이 분은 정말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