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 역사의 땅, 중국 변방을 가다
윤태옥 지음 / 시대의창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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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은 환관과 궁녀의 좌표일 뿐이고, 창업 군주인 황제는 정작 변방에서 온다.(p.5)


첫 문장이 눈에 들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대업을 이룬 힘은 천년만년 그 기세를 유지할 것 같지만 거짓말처럼 몰락을 시작한다. 정상에서 경치를 만끽하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전성기가 도래했다는 말은 곧 몰락이 시작됐다는 말과 같다. 대륙의 통일을 이룬 권력이 스스로 중앙을 칭하는 순간 변방에선 또 다른 혁명이 잉태된다.


한편 저 문장은 중앙과 변방을 나누는 게 합당한 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수도의 위치인가? 인구수인가? 경제력인가? 아니면 군사력? 문화? 따지고 보면 모든 곳이 중심이 될 수 있는 동그란 행성의 거주민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웃기기도 하다. 창업 황제들의 힘은 어쩌면 거기서 나왔던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중앙을 탈환하겠다는 야망이 아닌,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중앙이라는 인식.


윤태옥 작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첫 문장에 쓰인 변방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너와 나를 지정학적으로 구분하기 위한 단순한 수사일 뿐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갖고 중국의 변방을 돌며 자신만의 독특한 여행기를 남겼다.


처음엔 동아시아를 염두에 둔 것 같지만 여러 제약 때문에 <변방의 인문학>은 중국과 그 국경지대에 머문다. 대부분 오지인데, 못 들어본 지명과 그 낯섦이 갖는 이국적 풍광이 글과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깨끗한 숙소 없이 여행이 불가한 나지만 작은 사진으로도 전해지는 풍광의 박력에는 엉덩이가 절로 들썩여진다.


특히 더 재미있었던 건 골짜기 너머 골짜기에 위치한 구석구석 곳곳에 수백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역시 배달의 혼은 위대해, 어떻게 조그만 땅덩이를 지나 세계를 누빌 수 있었을까! 하는 국뽕이 아니라 무슨 연유로, 어떻게 거기까지 다다랐나, 그 사람이 겪어야 했을 위험과 모험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상상이 됐던 것이다.


이러한 발자국은 근대에 이르러 더 잦아졌다. 망국의 한은 민족의 거처를 아예 북쪽으로 밀어 올렸고, 기회 아닌 기회를 이용해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중에선 중국과 소련 공산당의 주요 인물이 된 사람도, 정부의 존경을 받는 학자가 된 사람도 있다. 역사에 꽤나 관심이 있었음에도 이런 장면에서 매번 생소한 이름을 마주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즐겁고 또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이 든다. 분단된 조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역사 교육.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정신에 새긴 비극은 분명 대한민국의 미래에 큰 방해물이 될 것이다.


다행인 건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이런 이야기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건 순전히 본인의 잘못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결의와 즐거움이 동시에 생긴다.


단순한 여행기라고 하기엔 생각할 것이 많았던 <변방의 인문학>. 고리타분한 역사를 여행처럼 즐기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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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의 뇌과학 - 움직임은 어떻게 스트레스, 우울, 불안의 해답이 되는가
캐럴라인 윌리엄스 지음, 이영래 옮김 / 갤리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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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주 흥미로운 멍게의 삶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멍게는 제법 유유자적한 삶을 산다. 멍게 유생은 바다를 헤엄치고 다니다 경치 좋은 바위를 찾으면 휴식을 위해 자리를 잡은 뒤 성체로 변태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남은 평생을 거기에 눌러 앉는다.


이런 정착에는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 어린 멍게에게는 매우 단순하지만 뇌가 있고, 꼬리까지 이어지는 신경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일단 살 곳을 찾으면 멍게는 모든 신경계를 소화해버리고, 다시는 그 어떤 의사결정도 하지 않는다. '일회용 뇌'라는 이 흥미로운 사례는 우리가 대체 왜 신경계를 갖고 있는지에 관한 힌트를 준다."(p.19~20)


인간의 뇌는 움직이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 차례 놓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도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우리에게 이는 매우 낯선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이동은 엄청난 정보처리능력을 요구하는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자율주행차가 왜 미래의 상징이 됐는지, 왜 차 값보다 비싼 라이다를 이고 다녀야 하는지, 이를 위해 왜 5G 네트워크가 필요한지 생각해보자.(5G는 애초에 넷플릭스를 4K로 출력하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이 엄청난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뚝딱해치워 버린다. 사실 이족보행이라는 조건은 넣지도 않았다. 이동 능력만으로도 이미 게임이 안되는데 이족보행이라는 절묘한 균형 조절 능력까지 더하면 아예 차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걷기를 결정한데는 역시 먹을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빙하기는 이 이동의 스케일을 대규모로 확장시켰다. 뇌와 육체가 움직임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인류는 분명 대멸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대단한 발전을 이뤄온 뇌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위기를 맞게 된다. 사람들이 전처럼 자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뇌는 효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기관인지라 사용하지 않는 부분을 정리하여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를 막는다. 신경계를 소화해 다시는 의사 결정을 내리지 않는 멍게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단순히 신체 능력의 저하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뇌만이 정신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매우 다르다. 단잠을 방해받았을 때 짜증이 나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짜증을 만들었기 때문일까? 아니, 그 감정을 유발한 건 뇌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 감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짜증을 내지 않는 방법은 짜증을 내지 말라는 '생각'이 아니라 신체가 받아들인 감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전기 신호를 차단하는 일이 될 것이다. 혹자는 쯧쯧 혀를 차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일체유심조'를 들먹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말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육체의 역할을 지나치게 무시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종류의 움직임은 우울증과 만성통증의 원인이 된다고 알려진 '염증'을 줄임으로써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가하면 뇌와 몸 사이의 스트레스 경로를 차단하여 불안감을 줄이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움직임도 있다.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사고는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뇌는 모든 생각과 결정의 주 조정자나 결정권자라기보다는, 신체와 정신간의 대화를 주최하는 일종의 '대화방' 역할"(p.12)을 하는 것이다.


특히 체화된 인지라는 개념은 매우 흥미롭다. 아마 흔들리는 다리에서 만난 두 남녀가 커플이 될 확률이 높다는 연구 사례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뇌가 공포의 떨림과 사랑이 시작될 때 오는 설렘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개념을 활용해 불안감이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도 있다. 예컨대 걷기를 통해 체화된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심지어 다른 일을 할 때도 영향을 미쳐 자신감을 북돋을 수 있다는 말이다. 트라우마는 어떤 자극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경험이 쌓인 결과인데, 장애물 넘기나 격투기 훈련에서(목조르기같은 극한 상황에서 회피한 경험) 얻은 경험이 이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는 말이 세상 폭력적이고 재수없게 들렸는데 <움직임의 뇌과학>을 통해 이것이 과학적으로 완벽히 증명된 사실이라는 걸 배울 수 있었다. 임의로 꾸며낸 행위가 그 자체로 특정한 감정이 될 수 있다니, 우리 몸은 정말로 신기하고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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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 어게인 - 모르는 것을 아는 힘
애덤 그랜트 지음, 이경식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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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는 일관성을 신뢰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랬다 저랬다 말을 바꾸는 직장상사나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최악의 인간상에는 이렇듯 태도나 의견을 손바닥 뒤집듯 태연하게 바꾸는 사기꾼들이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그 자체가 목적이 돼버리는 순간 정신을 옭아매는 굴레가 된다. 예컨대 자신의 의견이 명명백백 틀렸다는 증거가 사방에서 쏟아지는데도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옥을 향해 돌진하는 답답이들을 본 적 있지 않은가? 뚝심 있는 예술가, 장인, 사업가는 늘 존경의 대상이지만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그 뚝심 때문에 인생을 조진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Think Again>의 핵심 주제는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나 의견을 버림과 동시에 사고에 유연성을 기르자는 것이다. 확실히 새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다시 생각하기가 중요하긴 하다. 그 누구도,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 문제들은 사실 접근 방법 자체가 문제인 경우가 많다. 항상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겠는가? 저자는 말한다. 지혜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도구들, 자기 신념의 가장 소중한 것들 중 하나를 버릴 시점을 아는 것이라고.


이 책은 흥미로운 사례도 많고 글도 쉬워 술술 읽히지만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결론의 공허함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우리가 운동이 좋다는 걸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Think Again>은 책 뒷부분에 무려 10페이지를 할애해 다시 생각하기 행동지침을 적어두긴 했다. 급한 사람이라면 이 부분만 발췌해 가이드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특히 직장에서 각각이 처한 입장별로, 내 짧지 않은 회사 생활을 돌아보며, 두세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우선 당신이 뭔가를 결정하는 입장에 있다면 당신의 주장이 특정 데이터에 근거해 추론된 가설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애초에 틀릴 수 있음을 깔고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 가설과 데이터의 오류를 밝히자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반론에 상처 받지 않고 건전한 회의를 이끌어갈 수 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기 의견을 펴는데 부담도 덜하고. 동료들이 돌아가며 레드팀을 구성하는 것도 좋다. 레드팀은 이유를 막론하고 일단 반론을 제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무조건 안 되는 이유만 찾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 레드팀이 특수 목적을 위해 임의로 구성됐다는 걸 알기 때문에 토론이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개인적 감정은 끼어들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팀 구성원이라면 잘못 생각했다고 인정하는 리더가 결코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같이 일하다 보면 리더는 결코 틀려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 가설을 세우고 시도해보는 사람을 '헤맨다'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하, 참, 우리가 개미 새끼인가? 여왕개미의 똥꾸멍만 보고 기어가는 졸개냔 말이다.


카리스마를 겸비한 천재가 꼼짝달싹 못할 논리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한치의 오류도 없는 계획으로 구성원들을 목표지점까지 '가장 빠르게' 인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내 머리는 비었소, 나는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는 노예요,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는 걸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논의가 너무 평행선을 걷고 있으면 상대방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참 희한하게도 설득은 논리로 달성되지 않는다. 반박을 당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방어적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논리가 촘촘할수록 성벽은 오히려 더 두꺼워진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할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기 의견의 허점을 눈치챌 수 있도록. 유용한 질문을 던져 상대방으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한발 떨어져 자기 의견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상이 내가 다시 생각하기를 실생활에 접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다. 물론 안다고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책 한 권 읽고 변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서서히 스며들 수 있는지 고민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제가 최근에 <Think Again>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서...라고 시작하면 아마 될 일도 안 될 테니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기를.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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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16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한깨짱 2022-01-16 09:20   좋아요 0 | URL
저도 고맙습니다!
 
재인, 재욱, 재훈 (리커버 에디션)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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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은 히어로 소설이다. 치밀하게 엮인 이야기가 시공간에 걸쳐 가지를 뻗으며 다차원 우주의 흥미로운 모습을 생생하게 풀어낸 전우주 대하소설이라고 하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정세랑 특유의 사소함이 겉면을 살살 핥으며 일상에 둥지를 트는 '평범한 초인'들의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리 진지하고 거대한 주제라도 정세랑의 손에만 들어가면 탈탈 털려 빨랫줄에 걸린 무릎 나온 츄리닝이 되는 것 같다. 씹덕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게 모에화 된달까? 물론 근사한 곳에 이 바지를 입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을 입을까 옷장을 연 순간 거짓말처럼 손이 가는 게 바로 이 츄리닝이다. 입은 것 같지 않게 편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과한 세제 냄새 없는 피부 같은 옷.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강박증 환자라도 정세랑의 소설에서는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읽다가 졸아도 상관없고, 두 페이지를 잘 못 넘겨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대단한 문장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요가로 치면 첫 장부터 끝줄까지 사바사나인데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완독의 추진력을 제공하는 건지, 전 우주를 통틀어도 이런 능력을 가진 건 정세랑 하나뿐일 것이다. 우연히 내가 우주를 구원했고, 그 대가로 신이 내려와 내게 인피니티 스톤 5개가 박힌 파워건틀렛과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래미안 블레스티지 75평 중 하나를 선물로 고르라고 한다면 그냥 정세랑의 능력이나 하나 달라고 할 생각이다. 그만큼 이 작가의 능력은 귀하고 신기하다.


은행나무 출판사의 노벨라라는 출판 기획도 정세랑의 능력을 절묘하게 뽐내준다. 양장본 책이 200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건 한때 시대를 주름잡은 열린책의 아멜리 노통 시리즈나 가능했던 기획인데, 전반적으로 긴 글이 장문충으로 폄하되고 진지함이 씹선비로 전락한 현대 사회에서는 훌륭한 셀링 포인트가 된 데다, 이 나른한 오후의 낮잠 같은 소설과 찰떡 케미를 보여준다. 솔직히 편안함도 200페이지가 넘어가면 슬슬 지루함과 함께 졸음이 찾아올 것이다. 그 텐션이 사라지기 전에 <재인, 재욱, 재훈>은 아쉬움까지 남기며 완벽한 이별을 고한다. 질척대는 법 없이 쿨하게. 166페이지 만에 끝. 웹툰처럼 스크롤하듯 읽으면 한 시간 컷도 가능할 듯. 고작 그 정도를 투자해 대한민국 성인 1년 독서량의 반을 채울 수 있다면 뿌듯함까지 챙겨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진정 시대를 읽을 줄 아는 기민한 사람들이다.


정세랑의 소설은 워낙에 많아 작품별로 편차가 좀 있는데 이 책은 10점 척도로 7~8 사이를 오간다. 지금까지 나온 단행본이 한 11권 정도고 나는 그중 5권을 읽었다. 참고로 <보건교사 안은영>이 9였고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7, <덧니가 보고 싶어>가 3, <지구에서 한아뿐>이 4다. 워낙에 달달한 건 좋아하지 않아 마지막 두 권에 유독 낮은 점수를 매겼으니 그 점은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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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리더십 - 합의에 이르는 힘
케이티 마튼 지음, 윤철희 옮김 / 모비딕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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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계에서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정치인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신념, 한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추진력을 만들어내는 원천. 신념이 없는 사람이 어떤 큰 일을 해내리라 상상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신념만 가진 사람이 큰 일을 해냈을 땐 예외 없이 인류사에 재앙이 닥쳤던 것도 사실이다. 히틀러, 마오쩌둥, 스탈린, 조지프 매카시,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메르켈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합의와 소통이다. 이는 반드시 연정을 해야 하는 독일 정치의 특성상 불가피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해석하기엔 앙겔라 메르켈이 무려 16년이나 독일 총리로 재임했다는 사실을 충분이 설명할 수 없다.


아마도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과학자에 가까웠던 그의 정체성이 가장 큰 힘이 아니었다 싶다. 신념과 과학적 사실의 가장 큰 차이는 유연성이다. 기존의 믿음과 완전히 다른 사실이 목격됐을 때 신념은 기존의 믿음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후퇴한다. 부정의 방패와 음해의 칼을 들고 새로운 사실을 무찌르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다. 반면 과학적 사실은 어디까지나 잠재적 사실의 위치를 고수한다. 과학은 새로운 사실을 잘근잘근 씹어 기존의 체계를 수정하거나 수용 가능한 임계치가 넘어가면 완전히 파괴하고 새로 만든다. 메르켈은 경쟁자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높은 지지율로 압살 해서 미움을 받지 않았다. 그는 경쟁자의 정책이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족족 자신의 정책으로 끌어안아 미움을 받았다. 기존의 정치 문법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합의와 소통이 메르켈의 16년을 지켜온 정치 도구였다면 겸손과 실용주의는 통치의 뿌리이자 기둥이었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고 명실공히 유럽을 이끄는 리더였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엠마뉘엘 마크롱이고 이탈리아의 총리는 마리오 드라기이고 영국의 총리는 보리스 존슨이지만(브렉시트 했지만) 유럽의 총리는 메르켈이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그런 사실에 우쭐해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독일이 유럽의 왕으로 추앙받는 것이 협치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하이라이트를 적절히 피함으로써 파트너들이 들러리나 패배자처럼 보이는 것을 막았다. 주인공이 되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하나의 유럽이라는 대의를 지켜냈는데. 특히 과거사에 관한 한 그는 조건 없이 무릎을 꿇어 피해국의 존경을 받았다. 뻔뻔함을 넘어 추악한 섬나라를 이웃으로 둔 입장에서는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심지어 그는 그 추악한 국가에 반성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 모든 성공에 독일 정치의 특수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꼽히는 살인마를 자기들 손으로 직접 뽑아 열렬히 지지했다는 사실. 독일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겨준 이 역사는 결론적으로 현대 독일에 실보다 득이 더 많았다. 독일인은 말이 번드러진 정치인을 본능적으로 경계했다. 화려한 언변은 오히려 과거의 악몽을 되새기는 트라우마가 됐으니까. 이 같은 문화는 빈말을 못하고, 웅장한 연설로 국민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메르켈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다 주었다. 예컨대 부동산 대책을 묻는 국민을 향해 '그것은 무척 어렵고 복잡한 문제이며 오랜 시간에 걸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과연 독일 외의 다른 나라에서 당선될 수 있을까? 1년 안에 반값 아파트를 만들겠다는 경쟁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한편 메르켈이 펼친 강력한 재정 긴축 정책의 그림자도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긴축 재정으로 쌓인 독일의 부는 결론적으로 난민 구제와 팬데믹 사태 해결을 위해 요긴하게 사용됐지만, 평상시였다면 이로 인해 교육, 의료 같은 보편 복지에 구멍이 생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 재정이 흑자를 냈다는 건 국민에게 그만큼 불필요한 세금을 거뒀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메르켈은 국민의 고통으로 성과를 챙긴 나쁜 정치인일까? 게다가 그는 금융 위기를 맞은 이웃 국가에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긴축 재정을 강요하기까지 했다. IMF가 한국에 강요해 수많은 실업자와 노숙자를 양산한 것처럼 말이다.


독일의 막대한 무역흑자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무역흑자란 결국 자기 물건을 팔기만 하고 다른 나라의 물건은 사지 않았다는 의미다. 미국이 아무리 양아치 같아도 그들의 무역적자가 사실상 세계 경제를 돌게 하는 심장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나의 유럽이란 결국 독일만 살찌고 나머지는 배를 곯는 허울 좋은 구실이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모든 나라가 독일처럼 벌기만 하고 쓰지 않는다면 유럽의 경제가 어떻게 될까? 서로 관련 있는 단어를 짝지으라는 질문에 소비와 적자는 아마 탕아나 베짱이 흥청망청과 짝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말 못된 의도를 가진 세뇌의 결과물이다.


사실 <메르켈 리더십>은 이처럼 메르켈의 성공을 다각도로 분석하기엔 한계가 많은 책이다. 애초에 메르켈의 그림자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냐 보다는 '어떤' 문제를 해결했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도 문제다. 실제 그의 성공에서 배움을 얻으려면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퇴임식을 한지 이제 고작 1주일도 지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더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이 책은 그때를 위한 가이드북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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