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 Beck 34 - 완결
사쿠이시 해럴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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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의 이해의 저자 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매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는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들을 그림으로만 보여줘야 하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대단한 작품이라고 칭송하는 것들은 언제나 이런 난제를 멋지게 극복해낸 것들이 아니던가. 예를 들면 미스터 초밥왕 같은 만화 말이다. 비록 지겨울정도로 되풀이되는 구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쇼타가 만든 초밥을 입에 넣는 심사위원의 모습에서 황홀한 맛의 비밀이 느껴지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각은 원래 시각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괜히 하는게 아니다. '맛'을 그리는 만화가 비교적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도 증거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청각은 어떨까?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있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기 굉장한 만화 한권을 소개해 보겠다. 보는 것만으로도 음악이 들리는 만화 해롤드 사쿠이시의 '벡(Beck)'이다.

Beck의 주인공 다나카 유키오는 삶의 목표가 없는 무기력한 중학생이다. 사실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인정해주는 환경은 없고 그렇다고 과감히 세계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능력도 용기도 없는 나이. 하지만 우연히 류스케라는 남자를 만나 락 밴드 'Beck'을 결성하면서 유키오의 인생은 평범한 삶의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Beck'을 만나기 전까지 유키오는 그저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소년에 불과했다. 기타를 치기 시작한 것도 단순히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든 위대함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사소한 이유. 바로 그렇게 시작한 일에 서서히 몰두하게 되면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어렴풋한 윤곽이 만져진다.  

하지만 아직까진 자신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큰 재능이 있는지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다.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밴드(Band)와의 교감이며 동료의 신뢰다.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믿게 되는 순간 개인의 능력은 날개를 펴고 밴드는 알에서 깨어난다. '이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음악을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 때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 투어를 시작하는 고물 승합차 안에서도 Beck의 멤버들은 웃을 수 있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들에게는 장애물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뻔한 얘기라고? 뻔한 얘기 맞다. 그러나 묵직한 삶의 진리는 언제나 뻔한 얘기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때도 됐지 않은가.  

나는 정대만의 3점슛 장면에서도 그랬지만 다나카 유키오가 노래를 부르는 2 페이지 풀샷 씬에선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믿어 주는 동료와 자신을 사랑해주는 관객 앞에서 자신의 가진 모든 능력을 투신하는 작디 작은 고교생(이 때는 고교생으로 진학했다.)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한단 말인가.

평범한 사람의 노력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저 유치하다고 단정해 버릴 수만은 없는 가슴 찡한 매력이 담겨져 있다. 삶의 의미도 목표도 없던 무기력한 중학생 유키오가 세계인의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 어쩌면 나에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하는 기대감과 함께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뭔가가 느껴진다.  

만약 이것을 느낀다면 당신의 삶에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영혼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이다.

사족.
쓰다보니 줄거리 요약에 적당히 무거운 주제를 껴맞춘 인스탄트 리뷰가 되어 버렸네. 사실 그림, 작법에 대한 얘기를 더 했어야 하는데 글을 다시 쓰기엔 너무 먼길을 와버렸다.  

모든 문화 컨텐츠가 그렇겠지만 역시 이 만화도 직접 봐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나는 유키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짜다. 정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해롤드 사쿠이시가 그린 힘있는 유키오의 모습에서 나는 언제나 혼신을 다한 그의 노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만화를 봐왔지만 정말로 노래가 들리는 책은 이 만화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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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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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 9월 13일,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키프로스 섬은 입만 닫으면 먹혀버리고 마는 악어새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키프로스는 당시 여왕이었던 카트린느 코르나로로부터 매각을 강요,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차지가 된 지중해의 섬이다. 그런데 이 섬의 위치를 보면 이슬람 안뜰의 뱀둥지로 불리던 성 요한 기사단의 로도스 섬보다도 투르크 제국에 밀착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호랑이의 입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셈.  

코 앞에 있는 적들로부터 끊임 없는 위협을 받아야하는 이 섬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영토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해상 무역만으로 지중해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던 베네치아에게 대 투르크 무역의 전초기지인 키프로스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투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나라의 입장은 좀 달랐다. 투르크의 입장에선 키프로스가 베네치아령임으로 인해 얻는 이득이 자신이 직접 차지하고 있을 때 보다 오히려 재미가 좋았기 때문이다.  

우선 '베네치아령 키프로스'의 존재로 인해 투르크는 동서를 잇는 다양한 문화, 기술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고 서유럽 강대국들과 외교적인 접촉을 시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로 
부터 거둬들이는 조공, 통상료등의 물질적 이득은 매우 짭짤했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령 키프로스'는 가만히 앉아 있는 투르크 제국의 발 밑으로 호박 넝쿨째 굴려주는 보물단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개입하면 언제나 일은 비합리적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눈 앞의 섬 키프로스는 제국의 목을 향해 겨눈 칼날과 같다. 존귀한 알라 앞에서 어찌 물질적 이득을 논할셈인가. 섬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위대한 알라의 힘을 보여주자' 이것이 투르크 궁정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대(對) 유럽 강경파의 논리였고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러니 1569년의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의 화재 소식이 그들에겐 베네치아를 쓸어 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570년 2월 중순 베네치아 시에 투르크 제국의 사신이 도착한다. 그가 전한 술탄의 친서는 간단 명료. '키프로스 반환'. 끝을 모르는 이교도의 오만에 베네치아 의회는 220표 중 199표의 반환 반대로 화답했다. 이리하여 그 찬란했던 역사를 스스로 마무리 지으려는 듯 지중해 최후의 전쟁 레판토 해전의 서막이 올랐다.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 연합함대 210척과 투르크의 대함대 300척이 맞붙은 최대의 해전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바다의 총사령관 '미스터 성채' 베니에르, 참모장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바르바리고, 이집트 총독 시로코, 해적왕 울루지 알리 등 지중해를 주름잡던 바다의 터프가이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야말로 바다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투입된 전쟁인 것이다.

전쟁 준비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기독교연합함대에 무거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1년여의 농성 끝에 결국 키프로스가 함락된 것이다. 베네치아 병사들은 슬퍼할 새도 없이 막바지 전쟁 준비에 몰두했다. 자신의 칼 앞에 으스러질 이슬람 병사들의 죽음을 다짐하면서.

1571년 10월 7일, 마침내 '500척의 갤리선과 17만명의 인간이 레판토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정오에 시작한 전투는 저녁때 까지 이어졌다. 적장 시로코의 패배가 알려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바르바리고의 전사 소식도 알려져왔다. 잠시 후 이슬람 우두머리 알리 파샤의 기함이 연합함대의 기함 앞으로 조용히 끌려나왔고 해적왕 울루지 알리는 남겨진 네 척의 배를 이끌고 유유히 도망쳐갔다. 마침내 연합함대의 뱃전에서 승리의 깃발이 나부꼈다.

포획한 적의 갤리 군선 117척, 소형선 20척, 이슬람 전사자 8,000명, 포로 10,000명, 풀려난 기독교 노예 15,000명. 전과는 거대했다. 가시적인 성과 말고도 베네치아가 얻은 이익은 충분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그 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베네치아에게 귀중한 평화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해전의 승리도 역사의 흐름만큼은 막을 수 없었나 보다. 레판토 해전은 갤리선이 활약한 최대 최후의 전쟁이었다. 이것은 정확히 17년 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대영제국 해군에 완파 당하면서 확실히 증명 됐다. 대형 범선과 함포사격이 주인공이 된 바다위에 더이상 갤리선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또 이 전쟁은 십자가를 앞세운 최후의 전쟁이기도 했다. 역사의 무대가 서유럽으로 옮겨지고 너도나도 영토 국가의 대형화를 지향하던 혼란기에 유럽 어느 국가도 지중해 변방의 이교도들에게 눈길을 돌릴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콘스탄티 노플 함락으로 마지막 불씨를 살린 지중해 역사는 로도스섬 공방전으로 활활 타오르더니 마침내 레판토의 앞바다에서 그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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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스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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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쯤에 '마계마인전'이란 소설이 있었다. 원래 제목이 '로도스도 전기'였는데, 그래서 난 로도스 섬을 판타지 소설이 만들어 놓은 환상 속의 섬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로도스섬 공방전'을 보니 로도스란 섬은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었단 말씀. 게다가 비록 드래곤과 엘프, 드워프가 존재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기사단이 살았던 섬'이었던 것이다.

중세 시대의 기사단이라 하면 대충 3가지로 좁혀진다. 우선 하버드 대학 기호학 교수인 로버트 랭던이 열심히 찾아 헤매던 템플 나이츠(Temple Knights). 성당 기사단으로도 불리며 온갖 신비주의와 결합하여 현존하는 수 많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의 뿌리가 된 기사단이다. 14세기 초 프랑스 왕 필리프4세가 이교도로 몰아 주축 기사들이 화형된 뒤로 완전히 소멸됐다.

둘째는 튜튼 기사단. 주로 독일인 기사로 이루어져 있어 독일 기사단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이슬람 교도가 완전히 성지를 차지한 이후로 유럽 각지를 돌며 이교도들과 싸움을 벌였다. 한 때는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기도 했으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등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19세기 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의해 해체되었다.

셋째가 바로 로도스 섬의 옛 주인이자 현재까지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성 요한 기사단이다. 원래 성지를(예루살렘)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의료 활동이 주 임무였으나 제 1차 십자권 원정 당시 군사적인 성격을 띤 기사단으로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세력이 축출된 이후 기사단은 로도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것이 바로 이슬람의 정원에 똬리를 '그리스도의 뱀들'이 된 것이다.

1453년 메메드 2세가 난공불락의 성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뒤 동지중해는 투르크 제국의 내해로 포섭되었다. 그런데 그 목구멍에 가시가 걸리 듯 로도스 섬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서유럽 최강의 군주라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2만에 지나지 않던 시대에, 10만 정도는 가볍게 동원할 수 있는 대제국 투르크의 왕 슐레이만 1세'가 이를 가만 두고 볼 리 있었겠는가.  

게다가 성 요한 기사단은 가만히 농사나 짓고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사단으로 불렸으나 주업은 해적질 이었고 그 대상은 투르크의 선박 뿐만 아니라 투르크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기독교 국가에까지 뻗쳐 있었다.

투르크 입장에서 보자면 로도스는 쌀 한톨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자존심의 문제다. 엄연한 대제국의 내해를 제 집 안방 드나들듯 하는 벼룩같은 이교도 기사단을 밟아 버리기 위해 슐레이만 1세는 간단히, 10만 대군을 동원해 로도스로 출발했다.

60일 남짓 이어지던 공방전은 1522년 12월, 성 요한 기사단의 완전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기사단 모두를 살려주는 조건, 게다가 무장까지 허용한 최고의 예우였으나 창설 이후 단 한번도 이교도와의 타협을 허용치 않았던 기사들의 마음 속에 '항복'이란 두 글자가 비수가 되어 서늘한 찬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일 뒤,  

장미 꽃 피는 섬 로도스,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될 고향을 뒤로하고 기사단의 배는 정처 없는 떠돌이의 돛을 올렸다.

이 후 기사단은 유럽 각지를 도는 난민이 되었다 가까스로 몰타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러나 더 이상 전쟁의 최전선에서 이교도와 맞서 싸우던 시절의 기사단이 아니었다. 결국 1798년 이집트 원정길에 나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몰타 섬마저 빼앗겼고 또 다시 난민 생활을 이어가다 19세기 초 로마에 정착 하였다. 이 때부터 기사단은 군사적인 측면을 모두 버리고 그 옛날 *아말피 상인의 병원 임무로 돌아가 멀고 먼 역사의 윤회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성 요한 기사단의 퇴장은 영토형 대국의 등장과 맞물려 서서히 저물어 가는 지중해 시대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 후로 수 십년이 지나고 나면 바다에서 갤리선은 존재를 감추고 지중해를 호령했던 도시 국가들은 자취를 감춘다. '몰락하는 계급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기사단은 이렇게 뒷 세대에 역사의 바톤을 넘긴 뒤 쓸쓸히 망토를 휘날리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이탈리아 아말피 출신 상인이 순례자들의 구호 활동을 위해 세운 '아말피 병원'에서 시작된 종교 기사단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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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0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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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콘스탄틴'의 존 콘스탄틴이 이 콘스탄티노플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리던 서구 문명의 한 뿌리가 서서히 퇴락을 거듭, 결국엔 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만 남아 로마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비잔틴 제국은 1,200여년 간의 역사 중 어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종교적으로는 로마 카톨릭과 대립하여 동방정교(그리스 정교)로 분리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왕권 다툼이 끊이질 않는 등 내정이 불안정해 급기야 13세기 초, 같은 기독교도로 이루어진 4차 십자군의 침략을 받아 잠시 동안 멸망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야금야금 제국의 영토는 줄어들고 영향력은 사라지기 시작해 비잔틴과
콘스탄티노플이 동일시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원래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 십자군에게 점령 당한 것만 제외하면 - 육지의 경우 당대 최강이라 알려진 삼중 성벽은 적들이 침략 의도를 품기도 전에 포기하게끔 만들었고 한쪽 해변에서 대포를 쏘면 반대쪽 해변까지 날아갈 정도로 좁은 금각만의 해협은 그 입구에 거대한 쇠사슬을 걸어 두는 것만으로도 해상 공격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었다.  

한낱 도시 국가로 전락해 버린 비잔틴 제국이 그때까지 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성, 역사상 단 한번도 이교도의 침략을 허용치 않았던 콘스탄티노플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괴물같은 철옹성도 1453년, 투르크 제국의 21살내기 술탄에 의해 정복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새파랗게 젊은 술탄, 메메드 2세는 자신의 선조 중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투르크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것이 지금의 터키(Turki=투르크), 이스탄불(Istanbul)의 옛 역사인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를 양분한 두 문명의 대충돌의 서막이었고 유럽의 역사를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계기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 전쟁에 집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시작으로 로도스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으로 이어지는 삼부작은 그녀가 평생을 바쳐 관심을 가졌던, 지중해 역사의 클라이막스이자 몰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냉정히 걸어가는 '역사 자체'인 것은 아니다. 대신 '인간을 그리는 것을 제일의로 한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라선 사람들, 그들 각자가 이 세상에 대처해나가는 삶의 기록이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의 무대를 그저 흔적에 불과한 우리 삶의 족적으로 채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방대한 사료를 직접 수집하고 분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단단한 역사적 사실 위에 세운 뒤 소설적 상상력으로 디테일을 보강했다. 소설이 전해주는 생생한 현장감과 진한 사람의 냄새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한 때는 오히려 이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을 무시한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서 배어나오는 진한 실증주의의 체취가 '모르는 것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 지난 날의 가치관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을 완독하고 재독하는 이 순간, 이 위대한 소설이 먹어치운 작가의 피나는 노력을 깨달으며, 나는 조용히 지난날의 오만을 반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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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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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노암 촘스키다. 신자유주의와 권력 비판에 있어서 이 사람을 빼놓을 수는 없다.  

노암 촘스키는 원래 언어학자이자 교수였다. - 28세에 이미 MIT 교수였다 - 그러다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현재는 실천적 지식인의 상징이 되어 지옥으로 가는 산타마리아 호에서(미국) 유일하게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세계의 양심으로 칭송받고 있다.  

우리나라로 비교하자면 원래 미학자이자 교수였던 진중권을 떠올릴 수는 있으나 레벨로 따지면 글쎄, 노암 촘스키는 만렙이고 진중권은 이제 겨우 캐릭을 만든 newbie에 불과하다. 물론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노암 촘스키처럼 82세가 될 때 쯤에 다시 해보자. 어쨌든.

촘스키에게 감사하고 있는 사실중 하나는 그가 언어학자로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평생 연구만 하고 살았다면 나는 결코 촘스키의 사상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언어학은 너무나 어렵다. 그러나 그의 사명은 언어학에만 있지 않았다. 촘스키가 언제나 지식인의 책무를 강조하듯 그는 오롯이 그의 사상을 살아냈다.  

서기 0년에서 32년 사이에 활동했던 뜨거운 청년 예수도 사회 변화를 막는 가장 큰 적을 중산층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지만 비판만 할뿐 결코 행동하지 않는, 그리하여 하층민의 거짓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 촘스키는 시대의 양심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지식인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길을 밝혀주는 등대요 횃불이라 할 수 있겠다.

촘스키에게 감사하고 있는 두 번째 사실은 그가 책을 쓰는 것과 동시에 다양한 인터뷰를 했다는 것이다. 글로 썼다면 분명 따분하고 어려웠을 내용들이 인터뷰에선 언제나 생생한 말들로 살아난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도 그런 인터뷰를 모아놓은 대담집이다. 이 책은 두 시간 동안 촘스키와 나눈 대화를 무려 2년에 걸쳐 정리한 책이라고 한다.  

책을 읽어 보면 그 같은 정성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보통 말을 그대로 글로 옮겨 읽어 보면 앞뒤가 안맞는 경우가 많다. 말이란 두서 없이 진행되고 다양한 생략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답변자가 질문을 오해하거나 질문 내용에 대해 평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내용이라면 답변은 빙빙 돌아 엉뚱한 곳에 불시착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선 그런 경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2년에 걸친 정리 기간 동안 수 없이 인터뷰를 보완하고 여러 차례 촘스키의 감수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암 촘스키의 '말'은 번듯한 사상의 '글'로 재탄생 할 수 있었다.

나는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촘스키의 압도적 사상의 향연에 변기 속의 응아처럼 빨려들었다. 이런 결과물을 만나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고릴라의 뱃속에서 구음진경을 발견한 장무기처럼 나는 이 책을 통해 진보의 내공을 더할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지금의 세상에 불만을 품고 있다면, 그래서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부탁하건데 이 책을 보라. 문제에 처한 사람들이 스스로 체제에 대항하지 않으면 역사는 끔찍한 드라마를 되풀이 하는 법. 그러니 가난하고 힘 없는자, 우리 스스로를 대마왕 손아귀에서 구해내는 그날까지 Keep on fight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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