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좌파들이 '예수'에 집중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그들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고 했던 예수의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유산계급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 인물이 존재했던가? 이 질문의 답을 잠시 미뤄둔다 하더라도 이토록 상쾌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관심가져 보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솔직함이 그 어느 시대보다 절실히 다가오는 오늘날에 말이다.  

김규항은 우리 사회의 혁명 실패를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는 영성의 개발이 없는 혁명이다. 그리고 둘째는 영성의 개발에만 몰두하는 혁명이다. 전자는 냄비에 끓이는 밥과 같다. 밑바닥은 다 타서 늘러 붙는대도 윗 부분은 설익어 먹을 수 없다. 반면 후자는 증기를 내뿜지 않는 압력 밥솥이다. 안으로 꽁꽁 싸매고 들어가 아무리 힘을 줘도 뚜껑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해답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땐 그냥 '중간'에 두고 에둘러 말해 버리면 의외로 위대한 해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공자도 그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랬으며 칸트 또한마찬가지였다. 김규항이도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사회 변혁과 내 안의 변혁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때 탄생한다'. 고로 좌파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김규항이 이번에 '예수'라는 담론을 자신의 필모그라피에 올리기로 한 것은 그 자신에게는 혁명의 초석이요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예수전'은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쫓는다. 김규항에 따르면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복음서로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씌였고 종교적 첨가가 가장 적은 복음서이다. 

김규항이 마르코 복음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굳이 좌파 기독교도라는 말을 만들어야 할만큼 보수화해버린 오늘날의 교회와 말씀은 김규항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 예수', 진보의 탈을 쓰고 인민을 호도한 짭퉁 지도자들에(바리새인) 대항하고 성전 앞 상인들의 좌판을 뒤 엎으며 분노했고 언제나 빈자와 약자를 대변했던 이 위대한 '아웃사이더'를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예수전'을 통해 김규항이 말하고자하는 유일한 것이다.

나는 한국의 기독교도들은 정말 무식하고 편협하다고 생각한다(물론 나를 포함해서). 이슬람교 심지어 가톨릭까지 싸잡아 사이비 종교쯤으로 말하는걸 보고 있으면 그 무식에 정신이 아연해지기까지 한다.이것은 한국의 종교 교육이 몰이해와 배타성으로 점철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에게 왜 몰이해와 배타성이 필요한 것인가? 그건 이미 거대한 주식회사로 변해버린 한국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의 모토는 단 하나. 

남보다 더 많이 고객을(신도) 유치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남의 종교, 심지어 다른 교파 마저도 찢어 발겨야 한다. 몰이해와 배타성은 일종의 마케팅 전략인 것이다.

신도가 돈으로 보이는 교회에서 어떻게 빈자와 약자를 대변했던 예수의 말씀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예수가 재림하여 부와 권력에 맛들인 목사들을 향해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을 놓고 나를 따르라'고 한다면 누가 과연 예수를 따를 것인가? 그들은 또 한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당신이 꼬박꼬박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헌납하며 좋은 배우자와 직장, 높은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한 기도를 올리기 전에 진짜 예수의 말씀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자. 그리하여 내 안의 진정한 변혁부터 이뤄내자. 그럼 총력전도주일에 가짜 신도의 이름을 적어내지 않아도, 전철역 앞에서 싸구려 커피믹스를 타주지 않아도 복음은 제발로 땅끝까지 이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리타스 Veritas 10 - 완결
윤준식 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이 만화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는 '간만에 볼만한 무협 만화가 나왔구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Oh! Great(오구레 이토)씨의 일본만화 '천상천하의 카피 버전이네'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만화는 '천상천하'에 빚진 것이 많아 보인다. 우선 둘다 학원물이라는 점. 게다가 갈등의 주체가 {(학생회vs비학생회) vs (어른들로 구성된 외부세계)}라는 점 등 세세히 따지고 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베리타스'가 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만화는 꽤 훌륭했다. 특히 그림이 좋았고 '천상천하'처럼 웬지 재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없어서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겨우 열 권에서 끝이란다. 아무래도 10권이 늦는다 싶어서 조마조마했는데 역시나였다. 한 달에 2페이지라도 계속 연재해 주면 안될까? 나가노 마모루의 파이브 스타 스토리도 5년에 한권 씩 나오는데. 원래 대작이란 독자의 간절한 기다림을 도도히 외면하며 유유히 살아가는거 아닌가.

아직 10권을 보지는 못했지만 안 봐도 뻔하다. 9권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권으로는 도저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10권이 한 1,000페이지 쯤 되면 어느 정도 수습은 가능하겠지만
보아하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설마 '협객 붉은매'처럼 2부를 염두에 둔건 아닐테지. (다행히 300 쪽이 넘는 분량이기는 하다)

이 만화의 강점은 한국 전통 문화를 재구성하는 독특한 해석이었다. 예를 들면 남사당 패의 꼭두쇠, 곰뱅이쇠 등이 가진 버나, 살판 등의 기술이 사실은 무술에서 시작한 것으로 백성들이 무기를
소지하거나 무술을 익히는 것을 금했던 지배층의 억압을 피해 교묘히 '놀이'로 탈바꿈 했다는 식이다. 그래서 접신을 시도하여 액땜을 막거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살풀이는 '강신술사'로 남사당 패의 후예는 각자의 기예에 맞는 전통 무예로 되살아 난다.

물론 주류 무공은 이런 전통 무예 보다는 여주인공 '베라'를 중심으로 한 '리 유니온'계 무공이다.  

   

<베라>

'리 유니온'이란 인공 '기(氣)'를 합성하는데 성공한 거대 기업의 무술 연구소다. 이 연구소가 설립한 학교에는 세계 각지에서 뽑혀온 무술 인재들이 다니고 있는데 여기서 무술 인재란 무술을 익힐 재능을 갖춘 자와 이미 전통 무예를 전수 받은 전승자까지 포함된다.  

'일인전승 비인부전'의 금기를 수 천년 동안 지켜왔지만 인공 기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진 전통 무예 전승자들은 무공의 비전을 리 유니온에 공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전통 무예는 리 유니온의 손에서 혼합되고 보완되어 '리 유니온계'라는 다양한 무공을 탄생시킨다. 물론 이 무공은 리 유니온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얼핏 봐도 전통 무예 전승자와 리 유니온계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 예상되지 않는가? 예상대로 이 만화의 축은 전통과 현대의 대결이자 지식의 독점과 공개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화의 특성상 이런 쟁점이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이야 다양하겠지만 역시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 주인공 마강룡과 아이들이 '베라'의 학생회와 격돌하는 장면이다. 특히 '신암행어사', '아일랜드'의 양경일, '니나 잘해'의 조운학의 문하생을 포함하여 도합 7년을 수련했다는 김동훈의 작화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마강룡> 

삼국지, 수호지를 읽으며 등장인물을 줄줄이 외우고 장비가 무슨 무기를 썼는지 노지심이 어떤 무공을 사용했는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베리타스'는 현대판 삼국지이자 수호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성있는 캐릭터를 즐기는 사람에게 다양한 인물과 기술의 등장은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베리타스와 삼국지와 수호지는 그런 면에서 쌍둥이다.

만약 작가에게 건강과 시간 그리고 여유가 좀 더 주어졌더라면 '베리타스'는 한국 무협 만화의 고전이 됐을 수도 있다. 겨우 10권으로 마무리된 이 만화에 깊은 애착과 아쉬움이 남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이제 무슨 만화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걸까. 이제 우리 나라의 무협 만화라면 이미 백만년 전에 성장을 멈춰버린 열혈강호 말고는 없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벡 Beck 34 - 완결
사쿠이시 해럴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만화의 이해의 저자 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매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가는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들을 그림으로만 보여줘야 하는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대단한 작품이라고 칭송하는 것들은 언제나 이런 난제를 멋지게 극복해낸 것들이 아니던가. 예를 들면 미스터 초밥왕 같은 만화 말이다. 비록 지겨울정도로 되풀이되는 구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쇼타가 만든 초밥을 입에 넣는 심사위원의 모습에서 황홀한 맛의 비밀이 느껴지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각은 원래 시각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괜히 하는게 아니다. '맛'을 그리는 만화가 비교적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도 증거로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청각은 어떨까?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있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기 굉장한 만화 한권을 소개해 보겠다. 보는 것만으로도 음악이 들리는 만화 해롤드 사쿠이시의 '벡(Beck)'이다.

Beck의 주인공 다나카 유키오는 삶의 목표가 없는 무기력한 중학생이다. 사실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인정해주는 환경은 없고 그렇다고 과감히 세계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능력도 용기도 없는 나이. 하지만 우연히 류스케라는 남자를 만나 락 밴드 'Beck'을 결성하면서 유키오의 인생은 평범한 삶의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Beck'을 만나기 전까지 유키오는 그저 노래 부르길 좋아하는 소년에 불과했다. 기타를 치기 시작한 것도 단순히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든 위대함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사소한 이유. 바로 그렇게 시작한 일에 서서히 몰두하게 되면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어렴풋한 윤곽이 만져진다.  

하지만 아직까진 자신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큰 재능이 있는지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다. 그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밴드(Band)와의 교감이며 동료의 신뢰다.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믿게 되는 순간 개인의 능력은 날개를 펴고 밴드는 알에서 깨어난다. '이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음악을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 때다. 그렇기 때문에 전세계 투어를 시작하는 고물 승합차 안에서도 Beck의 멤버들은 웃을 수 있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들에게는 장애물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뻔한 얘기라고? 뻔한 얘기 맞다. 그러나 묵직한 삶의 진리는 언제나 뻔한 얘기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때도 됐지 않은가.  

나는 정대만의 3점슛 장면에서도 그랬지만 다나카 유키오가 노래를 부르는 2 페이지 풀샷 씬에선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믿어 주는 동료와 자신을 사랑해주는 관객 앞에서 자신의 가진 모든 능력을 투신하는 작디 작은 고교생(이 때는 고교생으로 진학했다.)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한단 말인가.

평범한 사람의 노력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저 유치하다고 단정해 버릴 수만은 없는 가슴 찡한 매력이 담겨져 있다. 삶의 의미도 목표도 없던 무기력한 중학생 유키오가 세계인의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 어쩌면 나에게도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하는 기대감과 함께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뭔가가 느껴진다.  

만약 이것을 느낀다면 당신의 삶에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영혼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이다.

사족.
쓰다보니 줄거리 요약에 적당히 무거운 주제를 껴맞춘 인스탄트 리뷰가 되어 버렸네. 사실 그림, 작법에 대한 얘기를 더 했어야 하는데 글을 다시 쓰기엔 너무 먼길을 와버렸다.  

모든 문화 컨텐츠가 그렇겠지만 역시 이 만화도 직접 봐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나는 유키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고 했는데 이 말은 진짜다. 정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해롤드 사쿠이시가 그린 힘있는 유키오의 모습에서 나는 언제나 혼신을 다한 그의 노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만화를 봐왔지만 정말로 노래가 들리는 책은 이 만화가 처음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판토 해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4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569년 9월 13일,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키프로스 섬은 입만 닫으면 먹혀버리고 마는 악어새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키프로스는 당시 여왕이었던 카트린느 코르나로로부터 매각을 강요,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차지가 된 지중해의 섬이다. 그런데 이 섬의 위치를 보면 이슬람 안뜰의 뱀둥지로 불리던 성 요한 기사단의 로도스 섬보다도 투르크 제국에 밀착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호랑이의 입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셈.  

코 앞에 있는 적들로부터 끊임 없는 위협을 받아야하는 이 섬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영토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해상 무역만으로 지중해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던 베네치아에게 대 투르크 무역의 전초기지인 키프로스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않될 중요한 섬이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투르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나라의 입장은 좀 달랐다. 투르크의 입장에선 키프로스가 베네치아령임으로 인해 얻는 이득이 자신이 직접 차지하고 있을 때 보다 오히려 재미가 좋았기 때문이다.  

우선 '베네치아령 키프로스'의 존재로 인해 투르크는 동서를 잇는 다양한 문화, 기술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고 서유럽 강대국들과 외교적인 접촉을 시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로 
부터 거둬들이는 조공, 통상료등의 물질적 이득은 매우 짭짤했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령 키프로스'는 가만히 앉아 있는 투르크 제국의 발 밑으로 호박 넝쿨째 굴려주는 보물단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개입하면 언제나 일은 비합리적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눈 앞의 섬 키프로스는 제국의 목을 향해 겨눈 칼날과 같다. 존귀한 알라 앞에서 어찌 물질적 이득을 논할셈인가. 섬에서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위대한 알라의 힘을 보여주자' 이것이 투르크 궁정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대(對) 유럽 강경파의 논리였고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러니 1569년의 베네치아 국영조선소의 화재 소식이 그들에겐 베네치아를 쓸어 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570년 2월 중순 베네치아 시에 투르크 제국의 사신이 도착한다. 그가 전한 술탄의 친서는 간단 명료. '키프로스 반환'. 끝을 모르는 이교도의 오만에 베네치아 의회는 220표 중 199표의 반환 반대로 화답했다. 이리하여 그 찬란했던 역사를 스스로 마무리 지으려는 듯 지중해 최후의 전쟁 레판토 해전의 서막이 올랐다.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 연합함대 210척과 투르크의 대함대 300척이 맞붙은 최대의 해전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바다의 총사령관 '미스터 성채' 베니에르, 참모장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바르바리고, 이집트 총독 시로코, 해적왕 울루지 알리 등 지중해를 주름잡던 바다의 터프가이들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야말로 바다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투입된 전쟁인 것이다.

전쟁 준비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기독교연합함대에 무거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1년여의 농성 끝에 결국 키프로스가 함락된 것이다. 베네치아 병사들은 슬퍼할 새도 없이 막바지 전쟁 준비에 몰두했다. 자신의 칼 앞에 으스러질 이슬람 병사들의 죽음을 다짐하면서.

1571년 10월 7일, 마침내 '500척의 갤리선과 17만명의 인간이 레판토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정오에 시작한 전투는 저녁때 까지 이어졌다. 적장 시로코의 패배가 알려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바르바리고의 전사 소식도 알려져왔다. 잠시 후 이슬람 우두머리 알리 파샤의 기함이 연합함대의 기함 앞으로 조용히 끌려나왔고 해적왕 울루지 알리는 남겨진 네 척의 배를 이끌고 유유히 도망쳐갔다. 마침내 연합함대의 뱃전에서 승리의 깃발이 나부꼈다.

포획한 적의 갤리 군선 117척, 소형선 20척, 이슬람 전사자 8,000명, 포로 10,000명, 풀려난 기독교 노예 15,000명. 전과는 거대했다. 가시적인 성과 말고도 베네치아가 얻은 이익은 충분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그 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베네치아에게 귀중한 평화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해전의 승리도 역사의 흐름만큼은 막을 수 없었나 보다. 레판토 해전은 갤리선이 활약한 최대 최후의 전쟁이었다. 이것은 정확히 17년 뒤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대영제국 해군에 완파 당하면서 확실히 증명 됐다. 대형 범선과 함포사격이 주인공이 된 바다위에 더이상 갤리선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또 이 전쟁은 십자가를 앞세운 최후의 전쟁이기도 했다. 역사의 무대가 서유럽으로 옮겨지고 너도나도 영토 국가의 대형화를 지향하던 혼란기에 유럽 어느 국가도 지중해 변방의 이교도들에게 눈길을 돌릴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콘스탄티 노플 함락으로 마지막 불씨를 살린 지중해 역사는 로도스섬 공방전으로 활활 타오르더니 마침내 레판토의 앞바다에서 그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도스섬 공방전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년대 중반 쯤에 '마계마인전'이란 소설이 있었다. 원래 제목이 '로도스도 전기'였는데, 그래서 난 로도스 섬을 판타지 소설이 만들어 놓은 환상 속의 섬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로도스섬 공방전'을 보니 로도스란 섬은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었단 말씀. 게다가 비록 드래곤과 엘프, 드워프가 존재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기사단이 살았던 섬'이었던 것이다.

중세 시대의 기사단이라 하면 대충 3가지로 좁혀진다. 우선 하버드 대학 기호학 교수인 로버트 랭던이 열심히 찾아 헤매던 템플 나이츠(Temple Knights). 성당 기사단으로도 불리며 온갖 신비주의와 결합하여 현존하는 수 많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의 뿌리가 된 기사단이다. 14세기 초 프랑스 왕 필리프4세가 이교도로 몰아 주축 기사들이 화형된 뒤로 완전히 소멸됐다.

둘째는 튜튼 기사단. 주로 독일인 기사로 이루어져 있어 독일 기사단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이슬람 교도가 완전히 성지를 차지한 이후로 유럽 각지를 돌며 이교도들과 싸움을 벌였다. 한 때는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기도 했으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등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19세기 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의해 해체되었다.

셋째가 바로 로도스 섬의 옛 주인이자 현재까지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성 요한 기사단이다. 원래 성지를(예루살렘) 순례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의료 활동이 주 임무였으나 제 1차 십자권 원정 당시 군사적인 성격을 띤 기사단으로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세력이 축출된 이후 기사단은 로도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것이 바로 이슬람의 정원에 똬리를 '그리스도의 뱀들'이 된 것이다.

1453년 메메드 2세가 난공불락의 성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뒤 동지중해는 투르크 제국의 내해로 포섭되었다. 그런데 그 목구멍에 가시가 걸리 듯 로도스 섬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서유럽 최강의 군주라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이 2만에 지나지 않던 시대에, 10만 정도는 가볍게 동원할 수 있는 대제국 투르크의 왕 슐레이만 1세'가 이를 가만 두고 볼 리 있었겠는가.  

게다가 성 요한 기사단은 가만히 농사나 짓고 살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사단으로 불렸으나 주업은 해적질 이었고 그 대상은 투르크의 선박 뿐만 아니라 투르크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기독교 국가에까지 뻗쳐 있었다.

투르크 입장에서 보자면 로도스는 쌀 한톨에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자존심의 문제다. 엄연한 대제국의 내해를 제 집 안방 드나들듯 하는 벼룩같은 이교도 기사단을 밟아 버리기 위해 슐레이만 1세는 간단히, 10만 대군을 동원해 로도스로 출발했다.

60일 남짓 이어지던 공방전은 1522년 12월, 성 요한 기사단의 완전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기사단 모두를 살려주는 조건, 게다가 무장까지 허용한 최고의 예우였으나 창설 이후 단 한번도 이교도와의 타협을 허용치 않았던 기사들의 마음 속에 '항복'이란 두 글자가 비수가 되어 서늘한 찬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일 뒤,  

장미 꽃 피는 섬 로도스, 영원한 노스탤지어가 될 고향을 뒤로하고 기사단의 배는 정처 없는 떠돌이의 돛을 올렸다.

이 후 기사단은 유럽 각지를 도는 난민이 되었다 가까스로 몰타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다. 그러나 더 이상 전쟁의 최전선에서 이교도와 맞서 싸우던 시절의 기사단이 아니었다. 결국 1798년 이집트 원정길에 나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몰타 섬마저 빼앗겼고 또 다시 난민 생활을 이어가다 19세기 초 로마에 정착 하였다. 이 때부터 기사단은 군사적인 측면을 모두 버리고 그 옛날 *아말피 상인의 병원 임무로 돌아가 멀고 먼 역사의 윤회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성 요한 기사단의 퇴장은 영토형 대국의 등장과 맞물려 서서히 저물어 가는 지중해 시대의 몰락을 의미한다. 이 후로 수 십년이 지나고 나면 바다에서 갤리선은 존재를 감추고 지중해를 호령했던 도시 국가들은 자취를 감춘다. '몰락하는 계급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기사단은 이렇게 뒷 세대에 역사의 바톤을 넘긴 뒤 쓸쓸히 망토를 휘날리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다.

*성 요한 기사단은 이탈리아 아말피 출신 상인이 순례자들의 구호 활동을 위해 세운 '아말피 병원'에서 시작된 종교 기사단 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