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전집 1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홍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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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실수>

다음은 인터넷 정신분석 카페에서 찾은 어느 직장인에 대한 얘기다. 

나는 내 상사가 지시하는 일들을 자주 까먹곤 한다. 아침에 직접 불러 지시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퇴근 쯤에 일의 결과를 확인하려는 질문을 받고 화들짝 놀라 당황한다. 

한편 이런 일도 있다.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제품의 시료를 자주 잃어버린다. 잘 챙겨야지 챙겨야지 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시료는 사라져 버린 뒤다. 이 모든게 꼼꼼하지 못하고 게으른 천성 탓이다. 반복되는 실수를 설명하는데는 이 만한 근거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지시한 일은 반드시 수첩에 적었다. 수첩을 하루 종일 내 노트북 앞에 펼쳐 놓았다. 시료에는 이름을 적었다. 시료를 관리하는 바구니도 만들었다. 

몇일 
뒤 나는 내 시료가 또다시 사라져 버린걸 깨달았다. 잃어버린 시료를 찾아 사무실을 헤매는데 상사가 나를 불러 유럽향 모델의 진행 상황을 물어 보았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동시에 멋적은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질문이 이미 몇일 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내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남자는 그 날 이후로 정신과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몇 주에 걸쳐 진료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루종일 눈 앞에 펼쳐둔 수첩을 두고도 지시한 일을 까먹은 이유는 내가 격무에 시달려 주의가 흩으러졌기 때문이 아니다. 시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기어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시료 분실의 이유 또한 
잘못된 관리 방법에 있는게 아니다.

상사의 업무 스타일은 어지간히 나와 맞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마이크로 매니징하는 꼼꼼함이 답답했고 말랑말랑 유연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딱딱한 논리적 체계를 세우고마는 강박이 나는 지독히도 싫었다. 내가 매번 시료를 잃어버리고 상사의 지시를 잊은 이유는, 

내가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반복된 실수는 잠재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상사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내가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마다 내 마음은 '당신이 시킨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실수는 심리행위다. 심리란 '마음의 작용과 의식의 상태', 행위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짓'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실수는 심리행위다'라는 말에는 실수가 결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즉 그 속엔 명백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위 이야기는 실수가 심리행위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전형적 사례다. 



<꿈>

나는 한 때 핵폭탄이 떨어져 주변의 모든 것들이 먼지로 사라져 버리는 꿈을 반복해서 꾼 적이 있다. 나는 눈 앞에 떨어지는 핵폭탄을 보고 미친듯이 도망쳤지만 결과는 언제나 매한가지, 먼지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런 꿈을 해석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시 나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한창 낙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골방에 쳐박혀 지겨운 영어 공부와 자기 소개서 쓰기를 반복했지만 취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초조와 불안이 꿈 속에서 핵폭탄과 지구 멸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꿈 해몽가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가 집중한 것은 꿈의 '해석'이 아니라 꿈의 '원인'이었다. 프로이트 이전의 사람들은 꿈을 뇌의 경련, 혹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해프닝 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실수 행위의 탐구에서 보여줬듯 프로이트는 꿈에도 명백한 의도와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는 꿈이 인간의 '소망 충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봤다. 그것은 꿈이 잠재된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인데, 우리는 매일 밤 꿈을 꿈으로써 현실 세계에서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 꿈 얘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핵폭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죽는 꿈을 반복해서 꿨다. 그것은 분명 취업에 대한 불안과 초조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난 이 꿈 얘기에서 몇 가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내 꿈은 반복될 때 마다 완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재현됐지만 거기서 딱 한 가지 매번 변화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죽는 친구들이었다. 모든 것이 똑같았음에도 유독 이 부분만이 달랐던 이유는 뭘까? 나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방법에 따라 차분히 나의 내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걸 고백하는 건 쉽지 않다. 만일 당신의 정신과 의사가 당신의 꿈 얘기를 듣고 이런 해석을 내렸다면 십중팔구 책상을 뒤엎고 병원을 뛰쳐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모두 열고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자. 

처음 꿈에서 나와 함께 죽은 건 20년 가까이 사귄 죽마고우였다. 둘도 없는 내 친구지만 난 한 때 이 친구에게 심각한 컴플렉스를 느낀 적이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그 컴플렉스는 죽을만큼 괴로운 것이었고 
'이 친구가 사라져 버렸으면'하는 소망을 품곤 했다. 두 번째로 죽은 친구 또한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언젠가 일을 하다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화해하고 그 후로는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 이 친구와는 절대 같이 일을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의 일을 모두 잊었고 지금도 여전히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의식은 그 때의 감정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다 나의 이성이 잠드는 시간을 틈타 당시의 불쾌한 감정을 꿈 속으로 밀어넣어 친구들을 살해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과격한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언제나 이 같은 욕망들을 전제로 한다. 꿈의 내용으로만 봐서는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도 그 속에 잠재된 욕망들을 파해치고 나면 어김없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꿈은 도대체 왜 우리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 걸까? 그건 우리의 꿈이 검열을 당하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많이 느슨해지긴 하지만 우리의 윤리, 도덕, 욕망을 억압하는 이성들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꿈은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을 상징하는 대체물을 만들고, 그것의 일부를 과장하고, 또 삭제하고 때때로 하나의 상징물로 압축하여 자신의 본 모습을 완전히 지워 버린다. 

꿈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이처럼 왜곡된 상징의 필름들을 오리고 붙여 숨겨진 욕망을 현상해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

프로이트가 실수와 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것이 신경증과 매우 유사한 매커니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글자는 분명 한글인데 봐도 봐도 미궁이다(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책을 반이나 차지하는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채 이런 리뷰를 쓰고 있다면 그건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를 모독하는 일일까? 하지만 모르는건 모르는거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이 책에 대한 나의 얘기가 여기까지라는 거다.

p.s - 누가 이 책을 쉽다고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꿈의 해석'전에 이 책을 보라는 사람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꿈의 해석'을 봤기 때문이다. 조만간 그 책에 대해 써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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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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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에는, 실로 모래를 마셔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현실감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대학 시절, 일본의 카프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정녕 '부조리'라는 말을 이해하고 싶었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아무도 빌려보지 않는 이 책을 손에 넣었다. 꽤나 진지하게 책장을 넘겼지만 끝내, 부조리가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이십 삼세의 일이다.

나는 이십 팔세에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이 곳에서 타인의 시선이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먹이를 미끼로 포획된, 거대한 개미굴의 일개미에 불과함을 경험한다. 어느날 나는 나에게 날개 한 쌍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작은 날개를 위태롭게 퍼덕이며 개미굴을 탈출한다. 도착한 곳은 벌들이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달콤한 벌집이었다. 나는 그곳에 정착해 새로운 나를 꿈꾼다. 붕붕 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고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법을 터득한 뒤 아름다운 꿀을 얻는 법을 익힌다.  

 

달콤한 꿀에 취해 비틀거리기를 몇 년, 어느날 혼미한 정신으로 날개를 퍼덕여 하늘로 날아 오르려는데 갑자기 천장에 부딪혀 떨어지고 만다. 여기에 이런 벽이 있었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또 하나의 개미굴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우스는 케익의 맛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맛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부조리를 안다는 것? 그게 지끈지끈 짜증을 유발하는 편두통이라면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 그건 마치 폐차장의 압착기 속에 들어가 형체도 없이 짜부러지는 것과 같다. 그 안에서 인간은 비명을 지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 
인간의 의지는 압착기의 암흑 속에서, 완전히 무력해진다.








성명 니키 준페이. 31세. 신장 1미터 58센티미터, 몸무게 54킬로그램. 딱히 나쁜 짓을 한 남자는 아니다. 곤충 채집을 좋아했다. 여지껏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모래 위를 기어다니는 길앞잡이속 좀길앞잡이를 잡으러 나왔다가 정작 자신이 모래 구덩이에 포획되어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니키 준페이를 함정에 빠뜨린건 모래 마을의 촌장이었다. 하룻밤 묵어 갈 장소를 마련해 준다며 할머니 혼자 사는 집으로 안내했다. 흔들리는 새끼줄을 타고 깊고 깊은 모래 구덩이 밑으로 내려가자 할머니가 다소 흥분한 듯한 기분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필요 이상으로 달뜬 모습이 뭔가 수상하기도 하지만, 아마 오랜만에 손님을 맞아 그럴게다. 가난한 마을. 내일 아침 수고료로 내밀고 가는 약간의 돈으로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집은 누추하기 짝이 없지만 섭섭치 않게 사례할 생각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등잔 위로 묘령의 여자가 얼굴을 들이민다. 할머니가 아니었다. 피부가 탱탱하게 하얀 여자. 흔들리는 등불 위로 어색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일부러 보조개를 보여주려는 것 같아,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다. (p. 34) 

 




 


다음날, 새끼줄 사다리가 사라졌다.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잠들어있는 여자를 깨워 다그친다. 진상은 대충 이렇다. 

이 마을에는 끊임없이 모래 바람이 불어온다. 팔분의 일 미리미터의 작은 모래 알갱이는 밤에도 결코 쉬는 법 없이 모래 구덩이를 덮쳐온다. 그대로 놔뒀다간 구덩이 안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파묻힌다. 이렇게 하나의 구덩이가 매몰되고 나면 다음은 옆 구덩이다. 물론 옆 구덩이 사람들은 이 때문에 두 배의 괴롭힘을 받는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감시당하며 오로지 모래를 치우기 위해서 살아간다.

준페이가 잡혀 들어간 모래 구덩이는 오랫동안 여자 혼자 감당해온 곳이다. 힘이 많이 부쳤다. 그러던 중 때마침, 여행객 차림의 젊은 남자가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세상엔 엄연히 법과 질서와 이성과 언론이라는 게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해 놓고 무사할 리 없다. 그러나 마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좋아, 그렇다면 파업이다. 내가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머지않아 이 마을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너희들이 지키고 있는 그 빈약한 풍경도 영원히 안녕이다. 

그런데 웬걸,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물과 식량을 배급해 주지 않는다. 아무리 기어 올라가 봐도 모래 언덕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바람에 섞인 모래가 입안과 몸 위에 성을 쌓는다. 푹푹 찌는 바다의 대기가 뽑아 낸 뜨거운 땀들이 그 위에 엉킨다. 딱 한 잔, 물 한 모금이 절실하다. 정신보다 육체가 먼저 붕괴된다. 남자의 파업은, 끝내 탈진에 굴복하고 만다.



 



한동안은 탈출을 시도해 보기도했다. 모래벽을 넘어서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추격을 피해 들어간 장소가 모래 지옥이었다. 한 번 빠지고 나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이봐 이런덴 동네 개도 얼씬하지 않는다고'

조롱이 감춰져 있는 마을 사람의 친근한 말투가 남자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떨어뜨린다. 준페이는 눈물로, 목숨을 구걸한다. 그 후로는 열심히 모래를 퍼날랐다. 신선한 공기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구역질 나는 모래 구멍에서 열심히 삽을 움직였다.

준페이는 처음에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부당한 처사를 당하면서도 아무런 불만없이 살아갈 수 있다니... 그러나 이제는 준페이가 더 열심이다. 어느새 여자와는 사실혼 관계가 되버렸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모래 위로 벌거 벗은 나체를 드러내는 여자. 그리고 그녀와 함께 추는 욕망의 춤. 심지어 준페이에게는 취미도 생겼다. 바늘에 물고기 반찬을 꿰어 까마귀를 잡는 함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희망에서는 썩은 반찬 냄새가 났다.

산다는건 원래 이런건가? 인간의 망각과 적응력에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난다. 탈출을 시도하던 용기는 어디 갔나? 뜨거운 모래를 씹으며 파업을 선언하던 인내는 어디로 갔나? 밤새 모래를 치우고 작열하는 낮 아래서 짧은 휴식을 취하는 두 마리 동물. 배급된 담배와 소주에 안식을 찾는 사람들. 

이렇게 살아가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난척 하지마. 사실 이곳에서 나간들 당신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삶이 뭐 그리 달라지겠어. 애초에 이 모래 마을을 찾은건 너 자신이었잖아. 당신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은밀한 꿈을 쫓아 이곳에 왔지. 그런데 이제 와서 탈출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착각을 하고 있는거야?




 



느날 모래의 여자는 자궁에서 피를 쏟으며 이불에 둘둘 말린채 모래벽 위로 올려진다. 친척이 수의사라는, 부락의 누군가가 자궁외 임신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여자가 떠난 뒤에도 새끼줄 사다리는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사다리 위를 올랐다. 이윽고 지상에 도착하자 준페이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대한 맛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앞에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는줄도 모르고 끝없이 얼굴을 꼬라박는, 더럽고 악취나는 똥파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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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포로 아크파크 1 : 기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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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파크 시리즈의 1권 '기원'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머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들을 아나니'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아직 이성의 족쇄에 풀려나지 못하는 나를 비웃으려는 듯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들로 견고한 성벽을 만들어 낸다.

이 수수께끼의 주인공은 물론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다. 줄여서 J.C. 아크파크, 아니 그냥 아크파크라 부르자. 그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유머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행정고시를 통과한 고위직인지 9급 말단에서 시작해 여전히 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행색과 주거형태를 봤을 때 말단직일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혹시 말단직이든 고위직이든 매일매일 공평하게 감내해야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건 누구나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 말은 누구나 '출근'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람쥐와 쳇바퀴? 뿡야!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 아니 아크파크도 일어나자마자 출근을 준비한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넘실거리는 인간의 파도 위로 아크파크도 겨우겨우 몸을 섞는다. 백과 흑으로만 그려진 건물과 사람들이 숨통을 조여오듯 컷들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시각적 질식을 위한 완벽한 시도! 

 

 

 

 가까스로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편지 한 통이 와 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게 인간의 운명이다. 아크파크도 이 편지를 열어 버린다. 편지 안에는 아크파크의 아침을 그대로 묘사하는 만화가 들어 있다. 그 만화의 제목은 '기원'.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묘사하는 만화를 그 날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받은 아크파크는 이 기묘한 사실을 파헤치기 위해 해결사 달랑베르 형제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속수무책. 심지어 기원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크파크의 세계에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아크파크가 편지 봉투에 들어있던 나머지 페이지들을 발견한다. 이 역시 '기원'이라는 만화책에서 찢어낸 것이 확실했으나 그것은 아크파크의 과거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페이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아크파크의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크파크는 실존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 직면한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쳇바퀴를 돌리던 다람쥐가 잠시 멈춰선다. '나'는 점점 익숙한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같은 인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뿌리째 뽑혀나가는 자아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옮겨 심으려 한다. 이런 이식의 방법으로는 단연코 종교에로의 귀의가 압도적이다. 신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는 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이렇게 외치고 나면 삶이 나가야 할 길은 명확해진다. 인간의 뇌에서 고민이 사라진다. 인식의 전환기, 세계와 존재의 근원으로 내려갈 수 있었던 일생일대의 기회가, 이렇게 맥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크파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다행히 종교를 찾지는 않았다. 아크파크는 나그네가 되기를 원했고 봉투에서 나온 자신의 미래를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만화가 예언이라면 아크파크의 이러한 거부 또한 예견되었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p. 25). 그리하여 그는 만화에서 예언된 27 페이지를 기다려 과연 예언대로 되는지 확인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예언은 곧 현실이 됐다. 

 

 

 

예언대로 따라 들어간 서점에서 아크파크는 이 기묘한 세계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청을 발견한다. 연구원들은 그곳에서 이 세계가(만화 '기원'의 세계) 사실은 어떤 만화(만화 속에서 파크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줬던 그 만화)와 똑 닮았을 거라는 가정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크파크의 '예정된' 방문은 이 같은 가정을 사실로 만드는데 완벽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대발견을 앞에 둔 연구청장 이고르 우프는 아크파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누군가 보낸 사절과 같소, 아크파크 씨! 당신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도 아마 존재할 수 없었겠지... 배경, 인물, 아무것도 없었을 거요.' (p. 34)

 

<기원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내 리뷰는 원래 이렇게 시작했다.

'난해한 책이다. 구매를 충동질하는 문장들로 글을 가득채우고 에둘러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쉽지 않다. 이 책을 읽는 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만큼 힘든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화를 반복해서 '읽을' 수록 이 책에 난해한 낙인을 찍어 서가 구석으로 밀어 넣는 건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성급한 판단으로 이 책의 미래를 결정짓기에는 만화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꿈의 포로 아크파크는 그 시작에서부터 다양한 철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미래를 향해 수상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미 한번 본 컷들이지만 이들과 다시 마주칠 때마다 하고싶은 이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게다가 불현듯 등장하는 실험적인 컷 구성은 독자의 뇌수를 파고드는 찌릿한 자극이 되기까지 한다. 

 

 

<구멍난 시간축을 통해 만화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다> 

 

 아크파크 시리즈 1권 '기원'은 원래 43 페이지까지 있었던 듯 보이나 42 페이지에서 그 43페이지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만화는 42페이지에서 끝나고 만다. 이어지는 새카만 페이지 위로 백색의 몇 글자가 도발적으로 떠오른다.  

 

 

 

아시다시피 2권은,
내 서가에 얌전히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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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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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동양 역사상 최초의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된 일본은 함대를 구성해 당시 무적이라 불리던 러시아 발틱 함대를 쳐부쉈다. 그리고는 제로센 비행기를 만들어 진주만을 습격했다. 이 일로 일본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있은지 70년 만의 일이다.

이걸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근대 자본주의 국가란 것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공자왈 맹자왈로는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로써 수 천년간 지배해오던 사고방식과 전통은 근대화의 쓰나미에 휩쓸려 폐허의 잔해가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만든것도 이 근대화의 쓰나미 덕분이었다.  



  



문제는 이 근대화라는 것이 사실상 서구화와 동의어라는 것이다. 근대화를 이룬답시고 받아들인 서구 문명은 동양인의 생활과 사고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이 과정에서 동양적인 것=틀린 것, 서양적인 것=옳은 것 이라는 잘못된 공식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서구 문명의 잔인성과 복잡한 세계를 단순하게만 이해하려는 성급함이 수 천년간 쌓아 온 전통과 지식 체계를 완전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이렇게 넝마가 된 '동양식 사고방식'을 다시 주목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이었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니스벳은 동양식 사고방식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다름'이란 각각의 고대 문명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미친 생태, 정치, 경제적 환경의 차이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 방법은 서양을 고대 그리스로 동양을 고대 중국으로 치환하여 비교하는 것이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단순히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의 차이로 단순화하는데는 많은 위험이 있겠지만 이 두 문명이 각각의 대륙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완전히 잘못된 비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제의 차이>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는 수 많은 도시 국가가 모여 형성된 섬나라였다. 사방이 바다. 경작지는 매우 적다. 이런 곳에서 먹고 살려면 사냥, 수렵, 목축 그리고 무역업이 적합했다. 이런 일들은 농업에 비해 사람들의 협동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유지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개인적 의사와 욕구를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이런 욕구들이 충돌했을 때는 적극적인 논쟁을 통해 해결하려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학과 수사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반면 고대 중국은 사방이 땅이었다. 경작할 땅은 차고 넘친다. 그러다 보니 고대 그리스 보다 무려 2,000년이나 먼저 농경 정착 생활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농사라는건 단순히 따져봐도 타인의 손길이 절실한 일이지만 관개 시설의 구축이라던가 재해 복구, 방지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두고 봤을 땐 중앙 권력의 통제와 지역 사회의 단결 없이는 절대로 불가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중국인에게는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논쟁을 피하고 화합을 꾀하는 것)은 단순히 예의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생활 방식이었던 것이다.


<정치의 차이>


두 나라의 정치 체제 차이는 위에서 언급한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런 차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스는 수 많은 폴리스가 독립 국가 형태로 존재하는 일종의 공통 문화권이었지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아테네가 싫은 사람은 얼마든지 다른 도시로 옮겨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죽기 전 망명 길을 떠나라는 제자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끝내 독배를 삼키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적 망명이 쉬운 사회에서는 국가 권력의 눈치를 보지않고 마음껏 발언할 수 있는 저항적 지식인들이 많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나라. 심지어 통치자라 할 지라도 도편추방제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인류 최초의 민주 공화국. 이 같은 자유의 보장은, 비록 흩어졌다 합쳐졌다 하기는 했지만 역사의 대부분을 통일된 전제국가의 지배로 채웠던 아시아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 정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형이상학적 신념 차이>

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보자. 고대 중국인들이 경제적, 정치적 활동을 하기 위해선 밖으로 주의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야 했고, 한편으로는 위로 눈을 돌려 권력자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사회적 상황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생활 습관은 '전체 맥락' 속에서 '나'를 파악하는 경향을 만들었으며 이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을 사회적 의무와 인간 관계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네트워크 속에서 파악하면, 당연히 이 우주는 독립적이고 불연속적인 원자들의 결합이 아니라 연속적인 관계들의 유기체로 인식된다. 따라서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할 때에도, 개별적인 개체들의 내부 속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 개체가 속한 전체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p.192)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은 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들의 주 산업은 농업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사람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가축을 칠 곳을 계획하고 어떤 상품을 어디에다 팔 것인지 결정할 수 있었다. 주로 서양인들의 강점으로 분류되곤하는 분석적, 논리적 사고의 발달은 바로 이런 생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적 사고의 특징은 현상을 파악함에 있어 사물 자체의 속성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년 마을을 찾아오던 학이 더이상 오지 않았을 때를 가정해 보자. 이때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인들은 '마을 사람들이 부덕한 탓', 즉 학과 인간의 정서적 관계에서 이유를 찾는 반면 서양인들은 '학의 생태'를 파악하고 '마을의 환경 변화'를 고려하여 논리적 이유를 유추해낼 것이다. 둘중 어떤 문명이 더 '과학적'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이같은 형이상학적 신념의 차이가 서양 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건 두 말할 필요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가 옳은가?>

그래서 누가 옳냐고? 이런 질문에는 역시 둘다 옳다는, 다소 맥빠지는 대답만이 정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인들이 과학이라는 불도저를 이끌고 문명의 발전에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논리적, 분석적 사고를 앞세워 과학의 초석을 세웠고,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들이 동양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똑똑한 머리로 만들어 놓은게 문명의 충돌, 종교 전쟁, 인종 청소라는 사실에 그 자신들도 질려버렸기 때문이리라. 발전은 더뎠지만 타인과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존중하는 동양인들의 사고 방식에 찌릿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동서양의 사고 방식 차이를 인종의 태생적 문제로 한계 짓지 않고 다양한 환경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그 차이에 대한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보여준다. 책 내용 또한 쉽고 흥미로운 심리 실험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글로벌 시대에 남과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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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이 된 철학교수
프랭크 맥클러스키 지음, 이종철 옮김 / 북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저자 프랭크 맥클러스키는 철학과 교수다. 그는 그 곳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가르쳤다. 그 시대의 철학은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할 덕목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 

논리적으로 다듬어진 답들은 교과서에 빼곡히 적혀 있지만 아무래도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희생과 용기를 이해하는 건 머리지만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를 가로채는 건  두 팔과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 교수라면 누구나 앎과 실천을 통일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강의는 압도적인 위엄을 갖추게 될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교수가 소방관이 된데는 아마도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Fireman이라고 하면 엄청난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크롬 도금으로 번쩍이는 소방차를 보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흥분한다. 그래서인지 의용소방대원이라는 것이 끊이지 않고 모집되는 모양이다. 

의용소방대란 자원봉사의 성격이 짙지만 지자체의 보조금과 각종 기부금을 받아 월급, 보험가입, 교육 심지어 퇴직금까지 지급하는 일종의 정부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곳의 구성원들은 월급과 퇴직금을 바라고 모여든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생업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희생하는 대가로 위험한 삶을 넘겨받은 고귀한 시민들이다. 미국의 경우 1,148,850명의 소방관 중(2008년 기준) 무려 72%에 달하는 827,150명이 이렇게 바보같은 거래를 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출처: Flickr,  ricardomakyn

 

길에서 만나면 평범하고 온순해 보이는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글거리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가 뭘까? 그저 어릴적 추억을 잊지 못하는 어른들의 로망인 걸까? 아니면 Xsports마저 싫증난 사람들의 철없는 취미인 걸까? 마호팩 펄스의 소방대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호팩 펄스 출신의 부모나 형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불 냄새를 맡으며 자라왔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순간 Fireman이 되어 있었다. 이건 의무나 사명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들은 그저 되야할 것이 된 것 뿐이다.

프랭크 맥클러스키 또한 이런 운명에따라 마호팩 펄스의 소방서에 발을 디뎠다. 머시 대학의 철학 교수는 결코 지식과 실천을 통합하기 위해서라든가 존경받는 아버지, 용감한 시민이 되기 위해 Fireman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소방관이 됐고 출동한 화재 현장에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무로 돌리는 오렌지 빛 신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런데 그 순간 프랭크 맥클러스키는는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지 깨달았다. 여지껏 살아왔던 모든 시간들이 바로 그 화재 현장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소방관들은 여느때처럼 농담을 주고 받으며 피자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소방서 뒤뜰의 잔디밭에는 따스한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 속에 섞여 조용히 울려오는 가슴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자신이 왜 소방관이 됐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살다보면 때로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는 오래된 신념과 내가 진짜 바라는게 무엇인지 속삭여주던 마음의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 때 시간을 멈춰두고 지난날을 돌아본다. 이 시간 여행 속에서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되찾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더 캄캄한 미로 속에 갇히곤 한다. 탈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보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제자리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피운
불빛은 어느새 어둠의 일부가 된다. 애타게 기다려 보지만, 잊혀진 소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저자는 머리말에 이 책을 '고향으로 가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라고 썼다. 본문 중에는 '우리 모두는 올바른 길을 알기 어려운 인생에서 전기를 맞게 된다'라고도 썼다. 길을 잃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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