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니어링 자서전 역사 인물 찾기 11
스콧 니어링 지음, 김라합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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씐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랬다. 그런데 샤바샤바 알샤바 1982년에 왕자의 고백을 받았을 때, 씐데렐라는 왕자가 강남에 대형 아파트를 해오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왕자는 지방에 수 만 평의 대지와 거대한 성을 갖고 있었지만 강남에 아파트를 살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결국 왕자는 결혼을 포기했고 고향에 내려가 평생 외롭게 살다 고독하게 죽었다.  

이후에 씐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고 파티장을 누비다 부잣집 놈팽이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 놈은 사상 최악의 사기꾼 가난뱅이에다 극악무도한 바람둥이였다. 씐데렐라는 화병이 나 2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평소 망자의 유언대로, 무덤 속에는 그 잘나빠진 유리구두 한 켤레가 함께 묻혔다. 

당신이 구입한 고급 세단과 대형 아파트는 당신의 무덤을 지키지는 못한다. 당신은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상이 더! 더! 더!를 외치는 이유는 뭘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일까? 만약 시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이 모든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돈과 지위를 탐하기 보단 당신의 이웃과 가족과 사회를 사랑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해준다면 세상은 바뀔 수 있을까? 내가 너무 바보같은 질문을 한 것 같다. 

 

 

 

스콧 니어링은 1883년 미국의 한 탄광도시를 송두리째 지배하고 있던 부잣집의 첫째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쌓아 놓은 욕망의 결과물을 고스란히 물려 받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 빈자의 길을 택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병들어 있었고 자본주의는 결코 인간의 진보를 보장해 주지 못했다.  

어떤 시대나 마찬가지로 대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외롭게 살다 고독하게 죽을 운명을 맞는다. 대세는 자신의 뜻을 거스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대세가 반골들에게 내리는 최초의 형벌은 바로 사회로부터의 단절이다.  

스콧 니어링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아동 노동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9년 동안 일해 온 직장에서 - 펜실베니아 대학 교수직 - 해고 당했다. 어렵게 다시 찾은 교수직도 오래가지 못했다. 출판사와 잡지사들을 더 이상 니어링의 글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중 강연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니어링 박사는 강연계의 섭외 목록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1917년에는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1919년 연방 법정에 피고로 섰다. 죄목은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스콧 니어링은 이 세계로 부터 완전히 버림 받았지만 그 자신은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 계속된 탄압과 굴욕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사회주의 이상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 이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걸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영원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뭔지 아는가? 그건 이 위대한 이상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외면 당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안된다고 하는 일을 끈덕지게 밀어 부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건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대개는 가족과 친구들이 제일 먼저 등을 돌린다. 스콧 니어링은 자신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부유하고 탐욕스런 인생을 선물 받는 걸 목격했다. 그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부인과 별거 중이었다.  

경제적 압박은 신념을 향해 나아가는 배를 가로 막는 또 다른 암초다. 스콧 니어링은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던 시절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감하고 아주 작은 연금을 마련해 두었다. 연금은 결코 넉넉한 액수가 아니었기에 스콧 니어링은 자신의 삶을 철저한 무욕으로 통제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인생의 두 번째 동반자인 헬렌을 만난다. 헬렌은 니어링 보다 무려 스무살이나 어린 처녀였으나 누구보다도 그의 신념을 믿고 따랐다.  

둘은 곧 시골 마을로 내려가 돌로 된 집을 짓고 농장을 개간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은 직접 재배했고 남은 음식은 다른 물건과 바꾸거나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자 쥐꼬리만한 연금도 남 부러울 것 없는 액수가 되었다. 그는 철저한 지출 계획을 세워 한해를 대비했고 만약 다음 해에 써야 할 돈이 마련되면 지체없이 농사를 멈추고 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가난한 자를 쥐어짜는 이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계급사회의 밑바탕에는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원칙이 깔려 있다. 이 원칙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대신 뿔뿔이 떼어놓는다. 이 원칙은 협력의 반명제이다. 미국에 만연해 있는 이 원칙은 오늘날 건강한 공화국의 장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독소 가운데 하나이다.' 

1983년 8월 24일, 스콧 니어링은 곡기를 끊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딱 100세가 되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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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데드 Walking Dead 1~5 세트
로버트 커크먼 지음, 장성주 옮김, 찰리 아들라드 외 그림 / 황금가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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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만화는 텅 빈 병원에서 깨어난 주인공이 좀비가 득실거리는 폭력의 땅으로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이 개벽한 줄도 모르고 무지의 발걸음을 내딛는 주인공 '릭'. 아직은 순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 최후의 인간. 

좀비 영화를 봐왔던 사람이라면 이 장면이 대니 보일 감독의 2002년 작 '28일 후'(28 days later, 2002)에 어느정도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면 이 뒷이야기 또한 예상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짐작한대로 '살아남은 사람들과의 재회'다.  

 

 

1968년 조지 로메로가 좀비(Zombie)를 창조한 이래 좀비가 단순히 공포의 소재로만 씌였던 적은 없다. 물론 무섭게 생긴 좀비들이 으드득 으드득 인간을 씹는 장면 없이 좀비물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좀비는 단순한 괴물 이상을 상징한다.

많은 좀비물에서, 주인공들이 처음 맞닥드리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살아있는 시체'들이 거니는 길거리에서 그들은 매 순간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극도로 희미해진 세상에 홀로 서 있다. 그들은 이 혼란을 떨쳐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원래의 세계를 찾아 떠난다.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러나 명작 좀비물들은 대개 이 만남의 과정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워킹데드'의 주인공 릭 그라임즈의 여행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병원에서 홀로 살아 남은 릭이 아내와 아들이 살고 있는 캠프를 처음 찾았을 때, 그는 캠프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는 정상 세계의 파편을 목격한다. 그 곳엔 물이 있고 먹을게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가족이 있다. 사람들은 숲 속에 숨어 살며 라이플의 보호를 받는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카니발을 극복하기 위해선 살아남은 사람들간의 연대가 유일한 해답이다. 캠프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인간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캠프에선 매일 밤 희망의 모닥불이 피어 오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둘일 때, 둘이 아니라 셋일 때 더 사악해진다. 연대는 인간성을 회복시키지만 그 인간성에 욕망과 이기심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집단은, 거의 예외없이 악을 생산해 낸다. 

안전할 것으로 믿었던 캠프가 좀비들의 습격을 받아 사랑했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캠프를 옮겨야 되냐 말아야 되냐를 놓고 의견 다툼을 벌이던 릭과 셰인(주인공의 절친)의 갈등이 더 첨예화 된다.  

릭은 이 갈등의 씨앗이 자신의 아내 로라와 셰인과의 의문스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한다. 릭은 여전히 셰인을 친구로 여긴다. 그러나 로라를 뺏긴 셰인의 상실은 너무나 크다. 셰인은 릭만 혼자 병원에 놔두고 왔다는 죄책감에 누구보다도 로라와 그의 아들 칼의 안전에 힘써 왔다. 그는 자신이 릭을 대신해 훌륭한 남편과 아빠가 될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의 눈 앞에 릭이 찾아온 것이다. 친구의 생환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마음 놓고 기뻐하기도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못하는 셰인의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악은 이 균열에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운다. 이 악을 제거하는 것은 한 발의 총알. 인간의 악은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정화된다. 

 

 

 

캠프를 떠나 릭 일행이 도착한 곳은 교도소였다. 교도소에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간수가 아니라 죄수였다. 그때까지 교도소는 죄수들의 것이었지만 총을 가지고 있는 건 릭이었다. 릭은 죄수들로 부터 교도소를 빼앗았다. 망가진 세계에선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마땅했지만 릭은 총을 가진 인간으로서 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살인하지 말 것'이라는 불문율을 정해 생존자들을 보호하려 하지만 이 규칙을 제일 먼저 어기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릭은 좀비들이 습격한 혼란을 틈타 폭동을 일으킨 죄수를 살해한다. 그것은 명백한 살인이었지만 일행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리더로서의 사명감이 살인을 처형으로 정당화한다. 릭의 마음은 서서히 폭력으로 물들어 간다.  

아슬아슬 연약한 연대를 유지해오던 릭 일행은 추락하는 헬리콥터를 목격하면서 전환기를 맞는다. 릭과 두 명의 동료로 구성된 팀이 추락한 헬기를 찾아 떠나지만 헬기는 이미 누군가에게 발견된 뒤다. 릭은 근처에 또 하나의 생존자 집단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일행은 교도소로 복귀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곳을 찾아 떠나지만 밤이 깊을 때까지 생존자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모두가 포기하고 있을 때 그들 앞에 나타난 건 교도소보다 단단한 울타리와 강력한 무기와 쌩쌩한 자동차와 전기로 보호받는 거대한 도시였다. 릭은 모든것이 갖춰진 완벽한 도시 안으로 들어선다. 눈 부신 불 빛 속에 드러난 광경은, 생존자들을 산채로 토막내 좀비에게 던져주는 '인간'들의 모습이었다.  

 

 

 

좀비물이 진짜 공포스러워 지는 순간은 바로 살아있는 인간이 좀비보다 무섭다는 걸 깨달을 때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무의(無) 세계에도 인간의 욕정과 배신과 탐욕과 이기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깊이 깊이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새 무섭게 자라나 남겨진 자들의 목을 조른다. 차라리 좀비가 됐더라면 인간이 인간때문에 무너지는 무참한 경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좀비는 흉측할 지언정 결코 자기들끼리 공격하지는 않는다. 동족을 짓밟는 유일한 동물은 오직 인간 뿐이다. 

저자는 만화의 서문에서 '이 책은 순전히 실제 상황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이 자연스레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말했다. 내 보기에 이 말은 '실제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자연스레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고쳐 써야 한다.  

좀비는 과연 무엇인가? 당신은 거울 속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당당한가? 나는 탐욕에 굶주린 시체들의 거리가 욕망에 가득찬 인간들의 거리와 무엇이 다를지 생각해 본다.  

좀비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니다. 좀비는 나이며 바로 당신이다. 좀비는 단지, 우리보다 조금 더 솔직할 뿐이다. 

  

<'만화'로서의 워킹데드> 

책을 구매하려는 사람을 돕기 위해 몇 가지 덧 붙인다.  

만화 워킹데드는 두 가지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는 캐릭터들의 감정 묘사다. 감정의 변화란 언제나 기승전결을 갖고 서서히 나타난다. 작가는 이 감정선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 어쩐지 워킹데드의 캐릭터들은 중간이 쑹텅 잘려 나간 듯 감정의 변화가 급작 스럽다. 

둘째는 컷 구성이다. 컷은 만화와 영화만이 가진 절대 무기다. 컷은 긴장과(클로즈 업) 이완을(풀 샷) 반복하면서 이야기의 역동성을 만들어 내는데, 이 만화의 컷 나누기는 심심할 정도로 기계적이다. 강약약중간약약 절묘하게 휘몰아치는 컷이 이야기를 좀 더 쥐어짜 주었다면 탄성을 지를 정도의 만화가 되지 않았을까? 

갖추지 못한 것은 이토록 아름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화에는 뒷 이야기가 궁금해져 계속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강력한 마력이 있다. 터져나오는 뇌수와 내장의 파편들이 피곤할 법도 한데, 마치 피멍이 든 상처를 꾹꾹 찔러 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것처럼 손은 자꾸만 다음 권으로 향한다. 그래픽 노블 사상 최초의 밀리언 셀러라는 건 역시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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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빈의 서양고전 껍질깨기
김태빈 지음 / 도서출판 해오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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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란 제목과 줄거리는 읽히 들어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읽어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읽을 예정이 없는 책을 말한다. 또 고전이란, 보통 사람들은 고사하고 책 깨나 읽는 사람들마저 그 제목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책을 말하기도 한다. 의욕 넘쳐 구매한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은 독서를 종용하는 희망찬 송가가 되지만 곧 목구멍을 짓누르는 바위가 됐다 이내 실내 장식으로 전락하고 마는게, 이른바 '고전'이란 것의 운명인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고전이 너무 과대평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은 각 시대별로 최초의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의 저작인데, 아무래도 사람들은 '최초'라는 가치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최초'라는게 그렇게 대단한가? 서양 근대 문학의 물꼬는 셰익스피어가 아니었어도 결국 누군가는 틀지 않았을까? 시대를 송두리째 뒤집어 버리는 새로운 물결, 새로운 시도란게 과연 한 명의 천재적 인간의 힘만으로 가능한 걸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위대한 인간이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기로에 들어선 시대가 우연히 빚어 내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한권의 가치가 몇 백, 몇 천년을 이어 내려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고전이, 최초라는 재기발랄함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는 이내 구식이 되 버리지만 '보편'은 결코 시들지 않는 법이다.   

 



 

 

 

'김태빈의 서양고전 껍질 깨기'는 이 보편적 가치를 네 개의 장으로 나눈다. 그리고 이 장들에서 각각 세 권의 고전을 소개한다. 이 책의 탁월함은 바로 이 구성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시작해 세상의 모든것을 연역하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내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서 1장은 '나를 바라보기'다.  

 

'나를 바라보기'위해서 소개되는 책은 카뮈의 '이방인'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이다. 저자가 이 책들을 통해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고 둘째는 우리가 사회적 관습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질문을 곱씹어 보자. 그러면 어느 순간 나를 둘러 싸고 있던 익숙한 세계가 갑자기 낯설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좀더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다. 

 

철학적 사유는 바로 이 낯섬과 무지의 공포가 만들어 놓은 삶의 균열을 비집고 탄생한다. 이때 '철학적 사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괴로움을 맛보지만 동시에 우리를 둘러 싸고 있던 '당연한 진리'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흔히 이것을 '껍질 깨기'라고 부른다. 





<출처: Flickr. Sammy Naas>



'껍질 깨기'에 성공한 사람들은 비로소 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찬찬히 혹은 진지하게 그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관습에 저항하는 사람과(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껍질 안의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의 진정성과(셰익스피어의 '햄릿') 세계와의 육체적 다툼을 통해 그것을 긍정하는(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인간의 모습을 인식한다. '나'를 넘어 '너'를 인식하고 비로소 '우리'의 연대가 시작되는 시간. 2장의 제목은 '우리와 마주하기'다.  

 

껍질의 실체를 깨닫고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동지가 된 '나'의 두 손엔 어느새 뾰족한 망치가 들려있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하여 껍질이 이루고 있는 단단한 구조의 비밀을 파악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껍질 깨기에 나선다. 튀어오르는 껍질이 얼굴에 부딪히면서 수 많은 생채기를 낸다. 손에는 어느새 굳은 살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철퇴를 휘둘러 세상을 응징'하기다. 철퇴는 생명의 위협을 피해 은근한 풍자의 모습을 띄는가 하면(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조용한 묘사 속에 묵직한 메시지를 숨겨두기도 하고(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정해진 목적과 질서 속에서 세상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신과 종교에 대적하며(호메로스 '오디세이아') '확신에 찬 이 세상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제 남은 일은 폐허가 된 세상에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이 소중히 간직하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해봐야 한다. 또 새로운 세상 만들기라는 맹목적 목표가 다시금 두터운 껍질이 되어 인간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사태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닌지 지켜봐야 한다. 마지막 4장의 제목은 '이상으로 나아가기'다. 

 

이 책의 구성은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기계 군단의 억압으로부터 세계를 구원하는 여정과 닮아 있다. 네오가 모피어스의 빨간약을 먹고 '나'와 '세계'의 진실을 인식한 뒤 마침내 시온이라는 이상을 지켜냈듯이 독자는 고전이 풍기는 시큼한 방부제 냄새를 맡으며 나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세계로 그리고 마침내 이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 받는다. 

 

 

 






저자는 한성여고에서 문학과 논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문장은 구어체로 읽기 쉽게 씌여졌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고전을 이렇게 쉬운 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은 그렇게 흔치 않다. 만일 내가 고등학교 때 이런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60세로 계획한 노벨 문학상 수상을 적어도 10년은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시나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을 소개한다고 머뭇거릴 필요는 없다. 저자는 매 챕터마다 등장인물과 가상 인터뷰를 진행하며 책의 줄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영리함을 보인다.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봐! 

 

보너스로 각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는 고등학생이 쓴걸로 보이는 감상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만만히 봤다간 큰 코 다친다. 몇몇은 정말 기가 죽을 정도로 잘 쓴 글들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에게 논술을 지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활용해 보는 것을 강력 추천한다.  

 

Education의 어원은 '무언가를 이끌어 낸다'라는 것이고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진실의 출산을 돕는 산파로 자처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선생 김태빈'은 Education의 화신이자 진정한 산파다. 내 일찍이 허풍으로 이름을 날려 뭇 사람들을 불신의 세계로 몰아 넣은 전력이 있으나, 그대여 이번만큼은 나의 진심을 알아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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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포로 아크파크 3 : 프로세스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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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권에서 세계의 빅뱅을, 2권에서 색의 축복을 입은 아크파크가 이번엔 뒤틀어진 시간축에서 길을 잃은 방랑자가 된다.
  

 

 

3권의 첫 머리, 아크파크는 여지없이 꿈에서 깨어난다. 갈수록 심해지는 공간난을 해소하기 위해 아크파크의 옷장에 그의 동료가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언제나 서서 자야만 하는 불쌍한 영혼. 밤에도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된 숙명. 아크파크는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강조하는 동료의 아쉬운 소리를 피해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그런데 이 때 아크파크의 침대 위에서 또 한 명의 아크파크가 깨어난다. 이것은 여전히 꿈인가? 

 

 

 

이제 웬만한 사건에는 덤덤한 아크파크는 침대에 누가 누워 있든 게의치 않고 자신을 데리러 온 택시에 오른다. 방금 침대에서 일어난 아크파크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 깨닫고 출근하는 아크파크는 만류하지만 이미 택시는 떠나간 뒤다. 잠옷 차림의 아크파크는 총알 택시를 잡아 타고 자기 자신을 뒤 쫓기 시작한다.   

 

 
 

 <출처: 세미콜론 공식 블로그>

 

도시의 심각한 공간난은 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처럼 거대한 공간을 점유하는 운송 수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도시의 택시는 자전거다. 게다가 도로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해 놓은 외줄! 심지어 이 외줄은 건물의 창문을 통과해 가정집의 부엌을 가로 질러 반대편 창문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아크파크가 탄 총알 택시는 이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치며 목적지를 향해간다. 그 행위의 결과가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채, 인간은 아찔한 외줄 위에서 광속의 춤을 춘다.

택시 위에서 스쳐 지나간 증권 거래소는 이 세계의 민낯을 잔인하게 보여준다. 거래소의 입구에 드러난 말은 '투.기.하.여.라'. 시장은 전반적으로 하락장인데 그 종목을 보면 더 가관이다. 의지, 충성, 정직, 용기, 인내, 올바름, 관용, 자비... 이 중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종목이 바로 의지와 소박함, 연대와 나눔이다. 

 

  

 

배금주의의 황야 위에서 부질없는 욕망을 끝없이 쫓아 달리는 현대인. 한 뼘의 공간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그 공간을 보장해주는 현실 권력에의 복종과 순응. 이같은 부조리는 아크파크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이미 철저히 내재화되어 있어 어떠한 비판과 저항도 불가하게 만든다. 체제에 대한 저항 의지는 소박함과 나눔을 부활시키고, 이것이 곧 거대한 연대가 되어 새 세상을 끌어내는 바퀴가 되지만 이 세계에서 의지와 소박함, 연대와 나눔은 여전히 하한가를 기록 중이다. 

아크파크가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꿈 공장이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좌절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 공장은, 그러나 현실을 넘어 인간의 꿈까지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건 아닐까 의심스럽다. 아크파크는 이 곳에서 천장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로 오인되어 잘못된 꿈 시술을 처방받는다. 그가 빠져든 꿈은 바로 천장이 사라진 아크파크의 집! 아크파크가 침대에서 일어나 사라진 천장이 있던 자리로 올라서자 그 곳엔 바둑판처럼 똑같은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어느덧 자신이 깨어난 방을 잃어버린 아크파크가 하염없이 꿈 속을 헤매고 있는데 이 때 수상한 회오리가 나타나 아크파크를 꿈의 중심 속으로 빨아 간다. 그리고 뒤통수를 강타하는 굉장한 연출! 

 

 

 

꿈의 중심에 도착한 아크파크는 바닥에 널린 컷들을 헤매는 동안 발을 헛딛어 그 중 하나에 빠지기도 한다. 그 순간 아크파크는 이것이 꿈 속의 꿈임을 깨닫는다. 꿈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아크파크가 안내소에 도착해 천장에서 떨어지는 또 다른 아크파크를 목격한 컷은 곧이어 안내소를 나와 꿈의 중심으로 이동한 아크파크가 발을 헛딛어 빠져버린 컷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이 번쩍 든 아크파크는 서둘러 자신의 방을 찾아 떠난다. 이 꿈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면 꿈을 마무리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방을 찾은 순간, 아크파크는 3권의 첫 부분, 바로 출근 준비를 하는 아크파크가 침대에 누운 아크파크를 발견한 컷으로 되돌아 온다. 꿈의 포로 아크파크.  

 

<이 글의 두 번째 그림과 비교해 보라>  

꿈의 포로 아크파크 시리즈 3권 '프로세스'는 무한의 프로세스를 얘기한다. 아크파크는 꿈에서 깨어나 그 무한의 고리를 끊으려 하지만 현실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또 다시 꿈으로 빠져든다. 꿈과 현실의 무한 반복.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언덕 위의 시지프스.

3권 프로세스는 카프카의 패러디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부조리'란 개념을 환상적으로 그려낸다. 비록 시지프스 신화를 강조한 것은 카뮈지만 꿈과 현실, 2차원과 3차원, 허상(만화)과 실재(우리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환상적 표현법은 정녕 카프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만화는 고작 46페이지다. 그러나 이 46페이지를 그리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얼마나 철저한 계산을 했을지, 그 땀과 노력에 경외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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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 불공정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과학
마이클 루이스 지음, 윤동구 옮김, 송재우 감수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비효율이라면 질색하는 서구 문명 사회가 자기 고유의 논리적 체계로 포섭하지 못한 영역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스포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부자 구단 첼시는 연간 수 백억을 들여 스타 선수를 영입하지만 여지껏 단 한번도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돈 쓰기로 따지면 첼시의 엉덩이도 우습게 걷어 찰 맨시티는 같은 리그의 하위권팀 5개를 살 수 있는 돈으로 리그 3위를 얻어냈다.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날아가 보자.
  

 

 

미국에서 '돈지랄'로 유명한 곳을 꼽자면 뭐니뭐니해도 월스트리트겠지만 오늘은 스포츠에 대해 얘기하는 날이므로 미국 야구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부자 구단인 뉴욕 얭키스는-발음이 참 좋다 - 2002년 개막일 당시를 기준으로 총 1억 2,600만 달러의 연봉을 선수단에 지급했다. 그래도 이 팀은 곧잘 플레이 오프에 진출하고 종종 월드 시리즈 우승도 거머쥐니 맨시티 보다는 봐줄만 하다. 그러나 이정도 돈이라면 편의점에서 껌을 사오듯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액수다. 공교롭게도 월스트리트와 양키스는 모두 뉴욕에 있다.   

그렇다면 이 정도 돈을 들이고도 언론과 지역 주민,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가 이 구단의 관계자라고 자랑할만한 일을 단 하나도 해내지 못하는 팀이 있을까? LA 다저스와 텍사스 레인저스 그리고 뉴욕 메츠와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 네 팀은 메이저리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자구단이지만 메이저리그 최종 성적에서(2000년대 초반) 줄줄이 꼴찌를 차지했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예전 구단주가 바로 조지 부시다!) 그렇다면 반대로 빈약한 재정 상황 속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는 팀이 있을까?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 그들이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뉴욕 얭키스가 1억 2,600만 달러를 쏟아 부으며 메이저 리그에 배금주의를 실현하고 있을 때 고작 3,400만 달러만을 투자해 양키스와 맞서 싸운 전설적인 팀이다. 비록 그들은 2000년과 2001년 포스트 시즌에서 얭키스와 맞붙어 단지 아웃 카운트 몇 개 만을 남겨 둔 채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 누구도 오클랜드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같은 지구에 속한 텍사스 레인저스가 한 경기 승리를 위해 무려 300만 달러를 지불할 때 고작 50만 달러만을 지불하는 팀이었다. 메이저 리그에서 오클랜드보다 많은 승수를 올리는 팀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가 유일했다. 덕분에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무려 4시즌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쾌거를 거두었으며 그 중 두 번이 바로 위에서 말한 양키스와의 혈전이었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이하 A's) 승리를 위해 취한 전략은 간단했다. 바로 낭비를 하지 않는 것. 메이저 리그의 부자 구단들이 선수의 타율과 도루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A's는 출루율과 사사구를 얻어내는 능력에 집중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 명료했다. 점수를 얻으려면 아웃 카운트를 낭비해선 안된다. 따라서 A's가 타자에게 요구하는
능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누상에 진출하는 참을성이었다. 아무 공에나 방망이를 휘두르는 습관은 A's에선 '지옥에나 꺼져버릴' 저주에 속했다. 

 

 

 

A's는 지난 수십년간 메이저 리그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직관적 미신을 - 수 십년간 메이저 리그에서 종사해온 베테랑들의 비과학적 직관 - 쳐부수기 위해 촘촘하게 짜여진 과학적 통계를 활용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A's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 위해 얻어야 하는 승수는 95게임 정도였다. 그리고 95경기를 승리로 가져가기 위해서 상대팀보다 최소한 몇 점을 더 획득해야 하는지 계산해 보았다. 그것은 135점이었다!  

다음으로 A's는 자신들이 보유한 인내심 많고 까다로운 선수들이 얻어올 점수와 상대팀에 뺏길 점수를 계산해 보았다. 만약 부상이나 시즌 중 트레이드 같은 변수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800점에서 820점을 기록할 것이고 650점에서 670점 사이의 점수를 내어줄 것이었다. 이로써 A's는 93경기에서 97경기를 승리할 것이고 결국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A's는 선수를 트레이드함에 있어서도 이같은 통계와 철학을 철저하게 적용했다. 특히 그들은 팬들을 비롯 야구 관계자들까지 광분하게 만드는 선수들의 갖가지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매년 3할 2푼 7리를 치는 타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메이저리그의 톱 타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친 안타가 타점이나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3할 2푼 7리라는 기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 그래서 A's는 2할 7푼 4리를 치지만 출루율과 장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선수들을 선호했다. 앞선 타자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누상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다음 타자의 장타는 그들을 홈으로 불러들이기가 아주 쉬웠던 것이다(혹은 장타 두개 - 2루타, 2루타면 쉽게 1점을 얻을 수 있다). 

 

 

A's의 투수 선택법은 타자와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 말은 어느 마이너 리그 투수가 4구를 잘 내주지 않고 장타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A's의 레이다망에 걸려들었다는 얘기다. 추가로 A's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투수는 경기 상황을 창조하고 게임의 색조를 설정할 줄 알아야 했다. 이 말은 투수가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게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갓 졸업한 고교생 투수들에게는 확실히 기대하기 힘든 능력이었다.

A's는 153km를 뿌리며 혜성같이 등장한 고교생 괴물 투수가 어느새 희미해진 꼬리를 끌며 메이저 리그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마는 일을 아주 단순한 통계를 통해 확인했다. A's는 이 단순한
통계를 통해 투수의 경기력이 구속이 아닌 나이와 경험에 비례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와같은 이유로 A's의 드래프트 1순위 명단은 그들의 관점에서 언제나 굉장한 선수들로 가득 채워졌다. 한가지 다행인건 메이저 리그에 속한 나머지 29개의 구단 중 어느 한 팀도 이 명단을 굉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따르는 또 다른 행운은 A's가 지명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신이 1순위에 지명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한 선수들이라는 것이었다. A's의 1순위 지명자들은 다른 구단이 지명하는 스타 선수들과 달리 높은
계약금 문제로 아웅다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1순위에 지명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알아준 A's에 쉴새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고, 다른 팀의 1순위 지명자들이 받는 계약금 보다 수십만 달러가 적은 계약서에 손 쉽게 서명했다. 

   

<A's에 과학적 통계와 진정한 경영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단장 빌리빈>

 

A's에 과학적 통계와 진정한 경영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수십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지배해 오던 엉터리 미신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은 인물이 바로 A's의 단장 빌리 빈이다.

빌리 빈은 선수 시절 최고의 신체 조건과 괴물같은 운동 신경을 지닌 초특급 인재였다. 스카우터들은 예의 베테랑의 직관을 덧붙여 '빌리 빈의 장미빛 미래'라는 터무니 없는 소설을 썼고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옹골찬 젊은이에게 '지옥에나 꺼져 버릴' 바람을 넣어 프로 야구팀과 계약하게 했다. 이후 빌리 빈은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20대를 허비했고 27세에 이르러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그의 통산 타율은 2할 1푼 9리, 홈런은 3개였다.

빌리 빈이 선수 시절 스카우터들로 부터 배운 건 그들이 하는 말이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것이었다. A's의 단장에 취임한 뒤에도 빌리 빈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스카우터들이 고교 출신 괴물 선수를 발견해 돌아와 침을 튀기며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 내도 빌리 빈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수 많은 미사여구들은 바로 18세의 빌리 빈이 들었던 얘기였기 때문이다.

빌리 빈이 스카우터들의 미사여구 대신 선택한 것은 그 동안 메이저리그가 손대지 않은 먼지 묻은 데이터와(출루율과 장타, 사사구 비율) 그 데이터를 분석할 컴퓨터였다. 그는 이 둘을 이용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 A's를 2000년대 최강의 팀으로 변신시켰다.

2011년 현재, 그는 여전히 A's의 단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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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1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2-01-01 16:32   좋아요 0 | URL
리뷰를 재밌게 보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책을 모으는게 취미라서요. 게다가 책을 좀 지저분하게 보는 편이랍니다. 신판 번역이 별로라니 의외네요. 알라딘 중고장터에 머니볼 정도는 꽤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