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기독교 이야기
유재덕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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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2년 전, 모래와 먼지를 뒤집어 쓴 중동의 작은 지방 나사렛, 그곳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오늘날까지 죽지않고 찬란하게 살아남아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일부에서는 그 남자가 달변이었다고 말한다. 항간으로는 그 남자의 외모가 대중을 완전히 매료시킬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는 사람들 중에는 그 남자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장님을 눈 뜨게 했으며 미친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 남자가 성공한 이유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주고 일곱 번 씩 일흔 번을 용서해 주는 것. 이게 바로 그 남자의 성공 전략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네 이웃을 내 몸의 반에 반만 사랑했어도'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타 종교를 증오하고 억압하는데 그들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줘왔다. 그리고 그 분노와 증오를 종교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대대로 전해오는 것을 그들의 존속 전략으로 삼아왔다.





종교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선행되야 하는건 교리가 아니라 바로 역사다. 이런건 유치 1, 2부 때부터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 나라 교회치고 역사에 기반한 기독교를 가르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종교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에 뿌리를 내린 역사적 실체다. 이걸 무시하면 종교는 현실과 유리되어 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 버린다. 인간과 구체적 세계가 사라진 종교? 그런걸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


우리 나라 종교인들 중에는 가톨릭과 기독교를 이른바 성당과 교회로 나눠(언제 한번 이 단어의 유래를 찾아보고 싶다) 마치 독립된 별개의 종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눈 앞이 캄캄해지고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일부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은 게거품을 물고 난리를 칠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가톨릭은 기독교의 형님뻘 되는 종교다. 가톨릭이야 말로 나사렛 예수를 계승한 최초의 종교라는 말이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에는 당연히 가톨릭 따위는 없었다. 예수와 열두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전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이스라엘에 파견된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핍박을 받았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예수의 언행이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성전을 찾는 것보다 네 이웃과 화해를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거나 성전 앞에서 비둘기를 파는 상인의 좌판을 걷어 차며 '꺼지라'고 할 정도로 대담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혁명적 인물은 기득권의 눈 밖에 나기 마련이 아닌가? 당시 유대인 대제사장이었단 안나스와 가야바는 점차 넓은 지지를 확보해 가던 예수를 군중 선동, 정치 혼란의 주범으로 고발하여 결국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하고 만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보던 지하 묘지. 카타콤



예수 사후 와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사역을 이어갔다. '사도'로 일컬어 지는 열 두 제자들이(특히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독립 종교로서의 지위를 다지게 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라기 보다는 '바울'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변국을 여행하며 선교에 힘썼고 당시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수 많은 피지배층들이 사회적 소수자를 옹호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자 기독교는 점차 로마의 지배층으로까지 침투했다. 세속적인것을 거부하고 경건한 생활에 힘쓰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독교인의 삶은 속세에 찌든 로마의 도시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서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를 자칭한 뒤 벌인 첫 일은 교리의 통합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핍박 끝에 자유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그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심각한 교리 다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교회의 분열을 우려했던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7월 4일, 3백 명의 감독과(Bisop) 2천 명의 장로들(presbyter) 및 집사들(deacon)을 당시 황궁이 있던 니케아에 소집해 교리 통일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니케아 공회'다. 


니케아 공회가 채택한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역시 삼위일체론일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났으나 그 본성은 '신'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같은 교리를 공의회까지 열어 결정할 정도면 초창기 기독교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상당히 분분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대립은 결국 반 삼위일체론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는 아리우스가 추방되면서 일단락 된다. 하지만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종파는 현재까지도 당당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선 완전히 사이비 종교로 오해받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 대표 종파다. (여호와의 증인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으며 대한민국에만 10만명의 성도가 살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가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교리, 즉 이단을 구분해 내고 그들을 잔인하게 심판하는 절대적 교리라는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와 말씀을(성경)을 임의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합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의 채택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교리는 줄곧 교회 권력을 놓고 벌이는 정치적 암투의 희생양이 되어 왔으며 특히 정적을 제거할 구실로는 그만한 방법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상당히 퇴색하고 말았다. 


교리 선택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다수의 추종자들의 합의하여 결정하는 구조를 채택하는 한 교리 해석의 난립과 이를 통한 종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실제로도 그리스도교는 수 차례의 교리 논쟁으로 많은 분파를 만들어 냈으며 그 때마다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진흙탕 싸움을 계속해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 안에서도 또다시 교리 논쟁이 벌어져 이집트, 에티오피아의 콥트교회와 시리아의 야고보교회를 탄생시켰다. 


과연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진짜 말씀인가를 따지는 일은 강물과 바다물을 앞에 두고 무엇이 진짜 물인가를 가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오늘날의 교리에 따르면 두 번 따져볼 가치도 없이 터무니 없는 주장이겠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아니면 교회를 지배하고 그 권력을 향유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인가? 내가 '신은 믿을 수 있지만 교회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후 그리스도교의 상황을 얘기하면 한 마디로 분열이다. 분열이 심했다는건 그만큼 기독교가 '장사가 됐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개인의 구원, 정의로운 삶 어쩌구 하는 가치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건 언제나 힘 없고 무지한 평신도들 뿐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종교는 직업이다. 밥벌이라는 뜻이다. 밥 그릇 주위에는 언제나 악취와 오물이 넘쳐나는 법이다.


7세기에는 이슬람이 탄생했다. 마호메트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마호메트의 하나님은 이슬람교도들에게 자신이 직접 창조한 자식들을 무참히 살해하라고 사주했다. 아이러니한건 기독교인들도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사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동일한 계시를 받고 서로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런 이중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에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가 존재하는 걸까?


사람들이 기독교(가톨릭)의 부패와 멍청함과 부정의에 언제까지 참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최초의 유럽 왕이었다. 그는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인정하고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16세기). 물론 그에게 정의로운 동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파문 시킨 로마 가톨릭이 꼴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틴 루터와 칼뱅이 등장한다. 이들은 가톨릭에서 분리된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고, 한국에서는 이를 개신교 또는 '교회'라 지칭하며 가톨릭의 '성당'과 구분한다. 


유대교에서 시작한 '야훼의 종교'는 가톨릭, 콥트교,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영국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등 수 많은 종교를 파생시켰고 프로테스탄트교는 장로교(칼빈파),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교, 루터교, 제7의 안식일교(삼육 재단)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파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똑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었지만 탄생 당시에는 거의 예외없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댔다. 





이 책은 오랜 기독교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지만, 2천년이란 그렇게 만만한 시간이 아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담는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다. 숨가쁜 질주에 내용은 다소 산만하고 일부는 빈약해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를 한 눈에 훑어 보기에는 이것만큼 좋은 책도 없어 보인다. 시간과 지면이 허락했다면, 저자도 분명 더 나은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기독교인 이야기'를 내 손으로 직접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분명 흥미진진한 작업이 되겠지만, 죽기 전에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대교, 가톨릭 보다는 개신교의 분열이 훨씬 심각한 이유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근본 정신이 저항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부패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 정신이 오히려 프로테스탄티즘의 분열을 가속화 시켰으니, 역시 세상은 아이러니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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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8-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우매함을 가장 극적으로 나타내주는 표지가 저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우매한 존재들이지요. 그러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존재들,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확신 과 자신감에 오만한 존재들...그 태생적인 한계를 깨닫지 못한 이상 그들이 내린 결론은 결국 모래성일 뿐...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도 그런 존재고요....

한깨짱 2012-08-29 13: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인간의 우매함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인간의 불안, 그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도 때때로 종교에 귀의하여 평온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기도 해요.

군자란 2012-08-29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그걸 몰랐을때가 행복했던것 같아요. 신앙의 그 충만함을 어디에서 채울 수 있을까요? 지금도 무척 그립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못본체 할 수는 없고...그냥 그저...웃지요...

한깨짱 2012-08-30 11:55   좋아요 0 | URL
역시 앎은 악마의 재산인 것 같아요.

군자란 2012-08-30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앎은 악마의 재산이라....새겨 듣겠습니다...

한깨짱 2012-08-31 11:25   좋아요 0 | URL
너무 진지하게 새겨들으실 필요는 없어요 ^^
 
부도덕 교육 강좌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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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덕 교육 강좌'는 '주간 명성'이라는 여성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단행본으로 펴년 에세이 집이다. 67편의 부도덕 교육에 해설, 옮긴이의 말까지 포함해 총 422페이지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무게는 무겁지 않아. 내용 또한 마찬가지. 출근길 전철에 서서 부담없이 읽기에 아주 좋은 책이라고 볼 수 있지. 문제는 내가 이 책을 소설로 알고 샀다는 거야.


미시마 유키오는 데뷔와 동시에 성공을 거둔 남자다. 거칠게 없었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입문했고 31살 때 이미 '금각사'를 써 버렸으니까. 어릴 땐 몸이 약해 수줍음 많고 허약한 소년, 근육질의 동성 친구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을 정도로 괴상한 아이였지만, 성공을 거두고 보디 빌딩을 시작하더니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패기 충만한 이상한 아저씨가 되버렸지. 그러니까 감히 '부도덕'을 교육하시려는 것 아니겠어?



소설가들은 원래 그래야만 하는건지, 원래 그랬기 때문에 소설가가 되는건지 알수는 없지만, 대개 개성있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사람일 수록 이 세상을 삐뚜루 보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사람들은 대개 도덕적으로 민감하고 시비에 철저하며 본질 추구에 집요한 면을 보인다. 뭐하나 허투루 넘어가는게 없어. 이 삐딱이들이 '엄밀하게 따지면'이라고 말을 시작할 땐, 어지간히 골치아플 준비를 해야 한다. 

부도덕 교육 강좌가 말 그대로 부도덕을 교육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도덕이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억제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덕을 잘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철저히 실천하는 것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거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남의 불행에 기뻐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은연중에 그 불행이 고소하게 느껴지면서 묘한 자신감에 벅차오르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니가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잘난척 하더니 내가 알아 봤다'. 본성이 펄떡펄떡 살아 날뛸땐 도덕은 속수 무책인 법이지. 하지만 이 더러운 본성을 자기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면? 문득 거울을 봤더니 그 속엔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짐승의 모습이 있다. 이게 나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고 본래의 도덕적인 나로 돌아온다. 


미시마 유키오는 '남의 불행을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독자가 보는 것은 치졸하고 잔인한 나의 '본모습'이다. 인간은 '내 눈의 들보'를 보기 시작했을 때 도덕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작자가 보여주는 건 진실한 너의 모습. 네 눈의 들보. 부도덕 교육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론 도덕 교육이라는 여러 독자들의 평은, 그러므로 타당하도다.


하지만 이런 역설, 너무 흔하잖아. 진부해. 질린다고. 도덕 교육같은거, 진지하게 점잖빼고 얘기하면 꼰대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이런 제스쳐를 취하는거 아니야? 기본적으로 당신의 글에선 남성 우월주의와 힘에의 의지가 느껴져. 남을 깔보는 듯한 시선이 문장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내 마음을 질겅질겅 씹어댄다구. 그래서 난 당신이 싫고, 당신의 말투가 싫고, 이 책이 싫어.





하지만 그의 지적엔 절묘한 섬뜩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잔혹함은 소년기의 특징이다. 아무리 감상적으로 보이는 소년에게도 본능적인 잔혹성이 내재되어 있다. 소녀도 마찬가지다. 다정한 심성은 어른의 교활함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p. 19. 선생을 무시하라, 속으로만)


어른이 된다는 것, 건강한 사회의 예의바른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것. 그것은 결국 펄떡펄떡 살아 날뛰는 본성을 감옥에 가둬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으로 유배보내는 것 아니겠는가. 대가의 시선에는 당해낼 수 없는 점이 있는 법이지. 내가 만약 일찍 성공을 거뒀다면, 아마도 미시마 유키오 같은 사람이 됐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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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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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한 페이지의 리뷰로 옮기는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책은 예루살렘의 기록 아닌가. 예루살렘에는 종교와 문명, 역사와 인종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그것을 하나씩 풀어 헤쳐 온전히 날것의 예루살렘을 꺼내보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책을 딱 한 번 읽고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번역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역사는 현기증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복잡하다. 수 천년의 역사 동안 그 땅에는 얼마나 많은 예수와 요한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무하마드와 알리가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성전과 요새와 왕조가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인종과 종교가 있었는지! 어느 순간 독자는 홍수처럼 밀려 오는 지명과 이름의 압도적 물결에 휩쓸려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된다. 불과 1분 전에 읽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페이지를 뒤로 돌리는 건 예삿일이다. 역사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미궁 속을 헤매는 운명을 겪기 마련이다. 


저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한 권의 책에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넣을 작정을 한 것 같다. 이 책엔 아브라함에서 부터 네타냐후(2009년 부터 재직 중인 이스라엘 총리)에 이르는 유대인들의 기록이 있으며 이는 거의 4,000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400년이 아니다. 4,000년 이다. 


앞에서 나는 이 책을 딱 한 번 보고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알수는 없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말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딱 한 번 읽는 것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알수는 없지. 하지만 이 책 딱 한 권만으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을 알수 있는 것도 사실이네. 





여기 예루살렘이 있다. 그곳에 처음 뿌리를 내린 사람은 아마도 아브라함으로 보인다. 그에겐 이삭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이삭은 야곱과 에서라는 아들이 있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야곱은 에서에게 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가로챘다. 나중에 야곱은 낯선 자와 씨름을 벌이는데, 그 사람은 나중에 신으로 밝혀지고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그는 열 두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것이 바로 유대의 12지파가 되었다. 


그들의 역사처럼 파라오의 호의를 입은 건지 아니면 노예로 끌려 갔던지 그 사실 여부를 따질 수는 없지만 그들이 이집트에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세가 그들을 이끌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이 대탈출의 기적이 바로 모세 5경 중, 출애굽기(이집트=애굽)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 후 예루살렘엔 다윗과 솔로몬이 있었다. 성전과 요새가 지어졌고 역사상 유래없는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번영은 길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과 남쪽의 유다(다윗 왕가)로 갈라선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의해 멸망하고 만다. 디아스포라의(유대인들이 세계 각지로 뿔뿔히 흩어지게 된 것) 시작이었다.


유대인을 고향으로 돌려 보낸 것은 중동의 새로운 강자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를 멸망 시키고 유대인을 해방 시켰다. 해방된 유대인은 또 다시 페르시아를 꺽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에 점령 당했다. 아시다시피 알렉산더는 이민족의 문화에 관대한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은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명은 길지 않았다. 유럽에선 그리스 문명을 이어 받은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다. 로마는 자기가 정복한 나라의 속국들을 이어 받았고 거기엔 이스라엘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로마인 총독은, 


폰티우스 필라테(본디오 빌라도)였다.





폰티우스 필라테는 성난 유대 군중들을 향해 강도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풀어줄 것이냐고 물어봤다.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원했다. 폰티우스 필라테는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그러자 군중이 대답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p. 197)


오늘날까지도 많은 천박한 기독교인들이 이를 근거로 유대인의 박해를 정당화 한다(저자에 따르면 이 마태복음의 구절이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 한다. 저자는 폰티우스 필라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완곡, 부드러움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피를 보기 전에 손을 씻을 필요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p.197).)


이후 세계를 지배한 것은 그리스도교였지만, 그게 그리스도교의 우월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변덕쟁이에 야심가였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중요한 내전을 치르기 전날 밤(312년) '하늘에 빛으로 된 십자가'가 '이 신호와 함께 너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문구와 함께 겹쳐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군인들의 방패에 크리스투스의(Christos. 영어로는 Christ) 첫 두 글자인 키로(Chi-ro)를 그렸다. 그는 승리했고 로마를 차지했다. 당시 로마는 곧 세계였으며, 이로인해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종교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300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적수가 없었다.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이슬람교는 많은 무지한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 예수, 성경, 마리아 등의 개념을 공유하는, 기독교와 아주 유사한 종교다. 실제로 이슬람교가 등장한 초창기엔 종교간 충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교가 마호메트를 선지자로 규정하자 상황은 달라졌고 수 백년이 흐르는 동안 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이제 예루살렘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공통 성지가 되었고 역사상 유례없는 핫 플레이스가 되버렸다. 여름에는 작렬하는 태양이,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가 존재하는, 전략적, 경제적 가치도 없는 바위 투성이의 쓸모없는 땅이 말이다.


이 각축전에서 먼저 승기를 잡은 건 이슬람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과 군사력을 앞세운 이슬람은 유럽의 스페인과 중동의 대다수 지역을 정복했고 예루살렘은 보너스였다. 그런데 이슬람은 많은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자비하고(칼이냐 코란이냐) 문란한(할렘 문화) 민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매우 관대했고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 이슬람 교도들이 사이 좋게까지는 아니었지만 '공존'하는게 가능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종교적 광신에 빠진 중세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성지를 이교도의 손에서 빼앗고자 피의 축제를 벌였고 이게 바로 4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다.


그러나 이 대혼란 속에서 유대인은 단 한 번도 승기를 잡아본 적이 없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뀔 때 마다 심한 박해를 받았고(특히 그리스도인들의 박해) 그저 더 관용적인 침략자가 나타나 자신을 구원해 주길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들이 이 땅을 다시 차지하게 된 건 1948년이 되어서였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유대인 유력자들 사이에서 '시온 주의'가 발흥하게 된다. '시온 주의'란 뿔뿔히 흩어진 유대인들, 세계 각지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핍박을 받는 모든 형제들을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모아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유럽의 왕들 중 일부는 '기생충 같은 유대인들을 내 땅에서 없앨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심정으로 또 일부는 '유대교에 대한 막연한 경외감'으로 또 일부는 '불가사의한 예언의 광신'에 휩싸여(예언에 따르면 유대인이 다시 예루살렘이 돌아왔을 때 메시아가 강림한다) 이 운동에 참여했다. 유대인들의 땅으로는 남미의 아르헨티나, 아프리카의 우간다 등이 제시됐다. 그러나 그 무엇도 예루살렘이 가진 거대하고 위대한 상징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유대인의 지지를 얻고 싶었던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시온 주의자들은 드디어 자기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영국을 도왔다. 마침내 영국은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은 영국이 프랑스와 아랍인들에게도 똑같이 팔레스타인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온 주의는 물거품이 됐고 예루살렘은 영국의 통치하에 그리스도인과 유대인과 이슬람인이 공존하는, 유대인들로서는 예전과 전혀 다를게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유대인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날때 까지도 자기 나라를 세울 수 없었는데, 영국인의 배신에 실망한 일부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있었음에도 영국이 아닌 독일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유대인들은 결국 무력 항쟁을 통해 영국군을 몰아 내고 마침내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옛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망한지 2,700년이 지나서였다.


이 후 이스라엘의 역사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둘러 쌓여 있었다. 이들은 호시탐탐 예루살렘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각지에서 폭탄 테러와 유대인 살인이 벌어졌다. 2,700년 만에 되찾은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멸망의 위기로 몰아 넣은 것은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였다.


단 하나의 아랍 국가를 원했던 민족주의자 나세르는 아랍 국가들 사이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고 싶었다. 그는 주변 아랍국을 선동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게 현대 전쟁사의 최고 드라마 6일 전쟁이다. 


아랍 연합군은 50만의 병력, 5,000대의 탱크, 900대의 비행기를 확보했다. 이스라엘은 27만 5,000명, 1,100대의 탱크, 200대의 비행기를 확보했다.(p. 814)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심지어 이스라엘인 조차도 자국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과감한 선제 기습 공격으로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1967년 6월 5일 오전 7시 10분, 이집트로 날아간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그들의 공군을 궤멸시켰다. 이스라엘은 불가사의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것은 마치 2,700년 간 유보해왔던 축복이 한 순간에 내려진 것 같았다. 이제 그 누구도 유대인들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빼앗을 수 없었다.





역사는 언제나 가해자의 잔인함을 고발하지만 동시에 복수심에 불타는 피해자 어떻게 가해자로 변신하는지를 주목하기도 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겪어온 폭력과 멸시의 고통을 이슬람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가자 지구를 폭격해 수 많은 민간인을 사살하고 폭탄 테러의 위협으로 부터 유대인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비인간적인 격리를 실행하고 있다. 끔찍한 게토의 추억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 말이다.





아브라함에서 시작한 예루살렘의 전기가 2000년대 이스라엘의 모습에 이르러 마무리 지어지면,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세계의 역사를 단숨에 들이킨 듯한 자신감이 충만해 온다. 


이 책은 유대인들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예루살렘에 대한 책이다. 예루살렘에는 수 많은 종교와 민족과 국가가 존재해왔다. 저자는 그 모든 것들을 어느 일방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어쩌면 그의 의도가 예루살렘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을 두고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의도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종교 때문에 폭탄 테러와 비인간적인 학살이 자행되는 곳이다. 아이러니한건 그 곳에 사는 사람 모두가 정의와 평화를 꿈꾼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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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8-0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루살렘을 안다는 것은 인간을 안다는 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인간의 부조리가 한 곳에 응축된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고요, 외계인이 지구상에 나타난다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면 이곳이 아닐까...정말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수많은 것들....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은 아니 겠지요?

한깨짱 2012-08-09 13:15   좋아요 0 | URL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지요. 예루살렘은 정말 복잡하고 미묘한 곳인것 같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이 거하는 곳에 오히려 절망과 폭력만이 가득한 아이러니. 읽는 내내 정말 복잡한 심정이었어요.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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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연출 수업에서 였을 거다. 교수님은 누벨바그를 언급하며 '네 멋대로 해라'를 틀었다. 숏 컷트의 진 세버그가 나왔고 중절모를 쓴 장 폴 벨몽도가 나왔다. 네러티브는 제멋대로 질주했고 컷은 사정없이 튀었다. 숨가쁜 90분이 지나고 영화는 갑자기 '뜩' 하고 끝났다. 다른 모든 영화가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 학기 말 작품에서 나는 장 뤽 고다르의 화신이 되었다. 네러티브는 제멋대로 질주했고 컷은 사정없이 튀었다. 숨가쁜 28분이 지나고 영화는 갑자기 '뜩'하고 끝났다. 그것이 내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진 세버그. 누벨바그의 여신. 진 세버그는 관습과 기성질서를 타파해 새로운 영화를 탄생시키겠다는 누벨바그의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그녀의 짧게 깍은 머리는 여성을 새롭게 정의했으며 수 천년간 여성 위에 군림해왔던 수컷 사회를 대담히 도발했다.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세상은 열광했고 숏 컷트한 여자들이 파리를 가득 채웠다. 가능성은 인정받았으나 결코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던 이 미국 출신 여배우는, 저항과 변화의 상징이 되어, 지구 반대편인 프랑스에서 뜻 밖의 대성공을 거둔다. 





1914년, 리투아니아의 젊은 단역 여배우가 로맹 가리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유대인이었다. 여배우는 유대인에 대한 핍박과 가난을 피해 프랑스의 니스에 도착했다. '들고 온 짐이라곤 열네 살 된 로맹과, 아들에게 프랑스인의 운명을 만들어 주겠다는 유대인 어머니의 각오 뿐이었다.'(p. 26).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넌 프랑스 대사가 될 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고 한다. 로맹은 캘리포니아 주재 프랑스 총영사가 된다.


로맹 가리는 외교관이 되기 전부터 소설을 썼고 2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했다. 전쟁으로는 훈장을 쓸어 담았고 소설로는 부와 명예와 인기를 얻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자는 언제나 시기와 질투 속에 살아가는 법이다. 훈장과 명예와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외교 능력은 유대인이라는 최고급 양념과 버무려져 평생 핀치에 쳐박혔고 그는 소설이라는 주먹을 휘둘러 인간의 잔인함과 무지, 천박함과 편협을 고발했다.


로맹 가리의 화려한 인생은 에밀 아자르의 등장으로 정점을 맞게 된다. 에밀 아자르는 자신을 폄하하는 비평계를 묵사발 내버릴 최강의 무기였다.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소설이라도 프랑스 평론계는 유대인이자 드골주의자였던 로맹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맹수도 늙고 이빨이 빠진다. 소설가로서 로맹 가리의 경력이 끝나갈 기미가 보이자 비평가들은 그를 한물 간 소설가라고, 곰팡내 나는 다락방에 고장난 장난감을 쳐박듯 그를 몰아 붙였다. 로맹 가리는 어둠 속에서 에밀 아자르를 만들었다.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여러 권의 소설을 출간했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치를 떨던 비평가들이 에밀 아자르의 책에 열광했다. 에밀 아자르는 콩쿠르 상을 수상했다. 로맹 가리 또한 콩쿠르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동일한 작가에게 수상을 한 적이 없는 콩쿠르 상을 말이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에서 성공했고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역시 프랑스에서 성공한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의 고향 미국에서 첫 만남을 갖는다. 진 세버그는 위트와 유머와 부와 명예와 권력과 잘생긴 외모까지 갖춘 로맹 가리에게 빠져 들었다. 다가올 불행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어리석은 남자 프랑스 모뢰이는(당시 진 세버그의 남편) 로맹 가리에게 자신의 아내를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모뢰이가 돌아왔을 때 진 세버그는 이혼을 통보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박살나 버렸고,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시작이 박살난 사랑의 폐허에서 탄생했다. 진 세버그의 열정으로 로맹 가리 또한 이혼 했다. 두 남녀는 결혼했다. 24살의 나이차가 났다.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p.82)


진 세버그는 사회에서 소외 받은 약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하지만 당시는 매카시즘과 인종차별의 악랄함이 박애 정신과 숭고한 희생을 짓밟던 시절이었다. 진 세버그는 '흑인들의 창녀'라고 불렸다. FBI는 그녀를 빨갱이로 간주해 사생활을 감시했고 그녀의 명예를 실추 시킬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언론에 공개했다. 악의적인 가십은 그녀의 사생활을 파괴했고 보수적이었던 진 세버그의 가족은 그녀를 버렸다. 진 세버그의 영화 경력은 쇠퇴 일로였다. 불만족이 자기 경멸로 바뀌기 시작할 때는 누구도 도울 수가 없다(p.86). 진 세버그는 알콜 중독에 걸렸고 변함없이 인종차별에 분노해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로맹은 그녀의 혈기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로맹은 수 많은 이데올로기가 짧은 시간 발화했다 먼지처럼 사그라 드는 것을 경험했고, 무엇보다 세상의 비열함을 알고 있었다. 진실과 정의는 영원 불변한 가치처럼 빛나는 것 같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순식간에 빛을 잃고 사라져 버린다. 열광했던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일인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집으로 돌아간다. 로맹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엔 진이 너무 어렸다. 그녀는 언제나 유보적인 로맹 가리를, 불의와 차별에 저항하지 않는 로맹 가리를, 행동하지 않는 소설가라고 매도했다. 평생을 인종차별과 소외와 싸워온 로맹 가리에게 말이다. 





로맹은 아버지 역할을 자진한게 아니었다. 24살의 나이차는 로맹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덧 씌웠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는 젊은 자식과 불화를 겪기 마련이다. 결혼 생활은 8년만에 끝났다. 로맹은 더더욱 글 쓰기에 몰두했고 그가 연기한 에밀 아자르는 콩쿠르상을 거머쥔다. 진 세버그는 물에 빠진 나비처럼 힘없이 침몰하고 있었다. 급기야 경제적 여유마저 상실한 그녀를 로맹은 위기 때 마다 건져주었다. 그녀는 로맹에게 감사했고 새로운 삶을 약속했지만 '추락하는 곳엔 날개가 없었다'. 그녀가 흑인 인권 운동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루머가 퍼졌다. 사람들은 '흑인들의 창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고 떠들어댔다진은 잠적해 아이를 낳았다. 로맹은 진을 보호하기 위해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밝혔다.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죽었다. 진 세버그는 아이를 유리관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그 아이가 흑인인지 아닌지를 보기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몰려들었다. 남의 불행에서 흥미를 느끼는 동물은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1979년 9월 8일 토요일, 진 세버그의 시신이 그녀의 르노 자동차 안에서 발견되었다'(p. 228). 그녀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로망 가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FBI가 그녀의 삶을 파괴했으며 진 세버그가 아기의 죽음 이후에 정신병원을 드나들고 자살 기도를 이었다고 말했다. 


1년여 뒤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깨진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길'(p.230~231) 이라는 메모를 남긴채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죽고 얼마 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천재 작가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였음이 드러났다. 세상은 충격에 빠졌고 프랑스 비평계는 침묵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인간의 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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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기적처럼 느껴진다. 폭력이 영토와 권력과 집과 노예와 먹을 것과 온갖 아름답고 진귀한 것을 보장해 주던 그 시절에, 왜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사이좋게 나눠 갖길 원했던 걸까? 그들이 너무 순진했던 걸까? 아니면 만민의 평등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 이었던 걸까?


아테네는 1년 내내, 열흘에 한 번씩 민회가 열렸다. 아고라에 모여 정치와 국방과 경제를 논하던 시민들은 주홍 물감에 적신 밧줄을 흔들며 민회 참석을 독려하는 서기들의 고함 소리를 따라 원형 극장 '프닉스'에 모였다. 6,000명의 시민들은 그곳에서 500명의 평의원과 대면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누가 뽑히든 현실 세계에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좌절하게 만드는, 그래 그렇게 우리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시시한 대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1년에 한 번은 500인 평의회에 들어가 봉사해야 했다. 500인 평의회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수의 특권층이 아니었던 것이다. 프닉스에는 이 500인 평의회와 시민들이 모여 침략과 평화, 공공 사업과 과세에 대한 결정을 모두 '합의'하에 도출해 냈다. 단군 할아버지가 웅녀와 결혼해 고조선을 세우던 그 시절에 말이다.





나는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기적처럼 느껴지는 것 만큼 이후 이 천년 가깝게 인류의 역사를 지배한 억압적인 통치 체계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아테네 이후 민주주의를 실천한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대놓고 그리스 문화의 카피캣을 자처했던 로마의 공화정이(왕이 없는 정치 체제라는 뜻) 있긴 했다. 하지만 집정관들은 결국 황제를 자처했고 막강한 권력을 차지한 이들의 폭력은 자유와 토론을 중시하고 국가적 의사 결정에 기꺼이 참여할 힘을 지니고 있던 시민을 소수 특권층의 삶을 위해 착취 당하는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아테네에서 평화를 부르짖고 전쟁에 반대하던 자유 시민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인간이 드디어 거추장스러웠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잔인성을 되찾은 걸까?


이 후의 역사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다. 물론 이 기간에 민주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가진 지역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16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그라우뷘덴'은 주변 정세를 두고 봤을 때 아주 이례적인 직접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곳의 민주주의는 권력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한 통치 체제였다. 그 누구도 권력을 차지할 자격이 없으며 이로인해 그 누구도 타인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면, 시민은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실행에 직접 참여해야만 한다. 민주주의가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아테네와 그라우뷘덴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계급적 평등(=권력의 부재)이야 말로 민주주의 탄생의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우리가 그것을 실천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를 확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오랜 공백은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한꺼번에 채워진다. 분노한 파리 시민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으며 파리 시장 드 소비니와 그의 장인 풀롱을(가난한 자들이 배가 고프면 건초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한 인물) 참수했고 급기야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를 단두대 위로 끌고 간다. 왕의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 막강했던 프랑스의 전제 왕정은 막을 내리고 드디어 프랑스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 사건은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입헌군주국 또는 공화정으로 이양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민주주의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같았을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혁명이 일어난 많은 나라가 국민의 투표를 허용하긴 했으나 선거권을 부여하는 기준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그 기준은 대개 보유한 재산이었는데, 이는 근대 민주주의가 만민의 복지와 평등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합법적 지배 체제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많은 이들의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는 점차 올바른 길을 찾아갔으며 오래지않아 모든 성인 남성들이 선거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성, 소수 민족, 노예들에 대한 선거권은 여전히 요원했으며 특히 여성 선거권의 경우 18세기, 19세기도 아닌 무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거의 모든 국가에서 그 권리가 인정된다. 그러고 보면 만인의 의한 만인의 민주주의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갓난 아기라고 할 수 있겠다.





보통 선거권의 확립으로 국민은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은 민주국가가 가진 영원한 숙제였다. 이에 레닌은 선거를 '억압받는 계급이 몇 년에 한 번씩 의회에서 인민을 '대표하고 억압'할 유산계급 대표를 결정할 권리를 누리는' 착취 행위(p. 324)라고 규정하기 까지 했다. 오늘날 세상을 웬만큼 아는 사람치고 이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을 엿 먹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선거다. 저 사람이 우리를 위해 일할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뽑으면 되고, 그 사람이 아니라는게 판명되는 돌아오는 선거를 통해 그를 몰아내면 된다. 민주주의는 이처럼 간편하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은 이 같은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막강한 돈과 언론의 힘을 엎은 정치인들은 대다수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재선에 성공한다. 투표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습관화된 무력감은 결국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을 양산하고 급락한 선거율이 기존 세력의 재선에 도움을 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황당한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30년 전만해도 바람직한 민주사회의 시민은 사회주의자를 때려 잡고 정부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었다.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오늘날 민주주의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는 오래된 것처럼 보이나 갓 솟아난 새싹처럼 싱싱하고 고정된 것처럼 보이나 시대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비록 우리가 의도한 바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실에 심각히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저자는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시기에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p. 22) 라고 말했다. 기원전 500년 고대 아테네에서 발흥한 민주주의가 오랫동안 침체 일로를 걸어왔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민주주의는 확실히 진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대체로 점진적이지만 때때로 급발진을 시도하기도 하며 그 부작용으로 인해 잠시 주춤하기는 하지만 또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2012년의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지금 우리가 빠져 있는 비탄은 명백히 민주주의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기 때문이다. 사악하고 멍청한 지도자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정치 체제라면,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좀비가 된 국민들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자를 구원자라 착각하고 표를 던지는 정치 체제라면, 그딴건 차라리 없어져 버리는게 나은거 아닐까? 이런 생각에 잠겨 우울해 질때마다 이 두꺼운 책은 나에게 이런 말을 던지는 것 같았다. 상처 받지 말라,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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