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스틱 (개정증보판)
칩 히스.댄 히스 지음, 안진환.박슬라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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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프리젠테이션을 잘해야 성공하는 시대가 왔는지 모르겠다. 벤처 붐? 승진 전쟁? 돈! 돈! 더 많은 돈? 요즘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 긴긴 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핵심만 간단히! 현대인들이 얼마나 시간에 쫓기는지 알려주는 일화를 얘기해 줄게. 엘리베이터 피치. 오 마이 갓! 당신의 상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당신은 신규 사업 기획안을 아주 멋들어지게 끝내야 한다구.


세상엔 메시지가 넘쳐 나잖아. 똑같이 해선 기억에 남지 않아. 자극과 충격을 담은 헤드라인을 달아주자구. '장윤정, 노홍철과 결별이유 이상하더니 역시...' 역시 뭐? 하지만 이래야 사람들은 기사를 클릭해. 클릭을 해야 돈이 되지. 고상한척 하지 맙시다. 누군가 그랬지 외눈박이의 마을에선 두눈박이가 왕이라고. 천만에 외눈박이 마을에서, 두눈박이는 그저 장애인일 뿐이야. 진지한 이야기를 아주 오랫동안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계속하고 싶다면, 정신병원을 찾아야 해. 그런 시대가 왔다고.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싶다.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은 이미 자신의 메시지를 만든 사람들이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절대 다수일 때 우리는 사회는 건전한 토론과 밝은 철학으로 건강해 질 수 있다. 하지만 내보기에 이런 책을 찾는 절대 다수는 아직 자기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해야할 이야기도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잘 하는 법을 알아봤자 그건 그냥 휘리릭~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되겠지. 그러니 이 책을 보려는 사람들은 전부 생각해 봐야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그걸 왜 해야하는지. 진정성이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정수이며, 기억에 영원히 남을 이야기란 거의 예외없이 이 진정성을 통해 빚어지는 법이니까. 전략이니 포장이니 하는 것들은 그 다음 순서에 불과하다고. 그래서 난 이 리뷰의 제목 일부러 이렇게 지었어. '스틱!을 읽고'





사실 이 책은 매우 훌륭하다. 흔히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말하지 않나. 이 책엔 그런 내용이 없다. 스틱!은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6가지 법칙(단순성, 의외성, 구체성, 신뢰성, 감성, 스토리)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름의 상투성으로 볼 때 이 책 또한 애매하고 모호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을거라는 걱정이 앞설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스틱!은 애매함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수 많은 사례를 제시한다. 이 사례들만 따로 정리해 기억에 새겨둬도 얼마든지 훌륭한 카피라이터, 작가, 연설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위대한 점은 뭐니뭐니해도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책 한권을 읽는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는지 아는가? 이 책은 거의 450페이지에 걸쳐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구석은 없다. 특히 주제를 떠나, 저자가 보여주는 문장력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플라잉 니킥을 먹일 만큼 유려하고 재미있다. 세상 사람들의 30%만이라도 이 책의 저자만큼 자신의 법칙에 충실하다면, 이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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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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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오로지 하나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착각이다. 그건 새누리당 지지자나 기독교도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아. 농담이에요.


집에 가는 길을 일부러 돌아가본 사람은 안다. 내려야할 정류장을 일부러 지나쳐 본 사람은 안다. 기어가는 개미의 눈높이로 그 길을 봐본 사람은 안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상이, 이 익숙한 세계가, 얼마나 낯선지를. 농담이 아니다. 지금 당장 집 밖으로 나가 쭈그려 앉아 문을 올려다 보라. 그리고 느껴보라 당신이 발로 차 닫았던 그 낡고 녹슨 철문이 얼마나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지를.


사람들은 상황이나 사건을 다양한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하다. 그러나 사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빡빡한 질서 속에서 엄격히 불변을 고수하는 수도승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사물의 다양성을 알아채지 못하는건 우리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들에게 집중해 보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뽐내고 싶어하는 사물들의 환호성이 들리지 않는가?


왜 낯선 곳에서 철학은 나오는가? 철학은 지식에 대한 사랑이다(Philosophy는 지혜를 사랑하다 라는 뜻). 지식은 단연코 의문에서 나온다. 의문은 호기심을 연료로 한다. 호기심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샘솟는다. 


우리는 생각없이 소리를 지르며 방안을 뛰어다니는, 마냥 즐거워만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삶을 부러워 한다. 나도 저 아이들처럼 생각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린이야 말로 진정한 사색가다. 


'아빠 나는 왜 태어났나요? 그건 엄마가 너를 임신했기 때문이야. 왜요?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이지. 왜요? 엄마가 예뻤거든. 왜요? 얘야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이제 잘 시간이야'


어린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탐구한다. 왜? 이 모든 세상이 낯설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따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알고 싶은 것으로 가득한 바다다. 아이들은 매일같이 그 바다로 나가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큼 가득가득 지식을 낚아 올린다. 


불행하게도 아이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안다고 느꼈을 때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세계에 대한 질문을 멈춘다. 우리가 철학을 포기한 이유? 그건 우리가 이 세게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한게 없기 때문이다. 맑고 푸르던 호기심의 바다는 검고 끈적끈적한 일상이 되어 작은 배를 집어 삼킨다. 배는 심해로 침전하고, 우리에게 남은건 전동차의 빈 자리를 향해 질주하는 탐욕과, 앉자 마자 잠에 드는 한심함과, DMB로 야구나 시청하면 그만인 별볼일 없는 퇴근길이다. 





우리는 세상이 단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여전히 모른다. 우리는 하늘을 타고 내려오는 처마 끝의 봉긋함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며 볼 때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며 볼 때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이상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혐오스럽고 지리멸렬한 썩은 생선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더 이상 익숙한 하나의 모습이 아님을 깨달을 때, 호기심의 톱니바퀴는 다시 구르기 시작하고, 탐구욕에 불타올라 일상을 따뜻한 애정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상에서 철학하기'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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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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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을 크리에이터라고 생각할 땐, 내 주변에 친구가 없다고 느낄 때다. 창의력이란 별다른게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것. 반대로 생각하는 것.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매사를 낯설게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옆에 사람을 붙잡고 '당신은 따뜻한 봄날의 아침에서 죽음을 부르는 권태가 느껴진다고, 물을 마시면서 동시에 오줌을 싼다고, 수박은 숭고하기 때문에 하루에 정확히 두 쪽씩만 야금야금 먹어야 한다고' 말해 보자. 정중한 사람이라면 '아 네 그러시군요'하고 다시는 당신과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할것이고, 대개는 '어디 아프냐?'라고 할 것이며, 성스러운 사람들은 당신을 치유하기 위해 기도를 올릴 것이다. 중요한건 이 세 부류중 어디에도 진짜 당신의 친구는 없다는 사실.






창조의 순간엔 언제나 내적 필연성이라는게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건 그것이 보기 좋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고, 역시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셨다'. 물론 하나님은 내적 필연성만 가지고도 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분은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내적 필연성에 더불어 외적 필연성을 갖다 붙여야만 모두에게 인정받는 창조물을 만들 수 있다. 뭔가를 만들게 하는 동기는 돌발적이고, 직관적이며 불가해한 면이 있다. 크리에이터들은 그 작은 알갱이를 가져다 언어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입혀 세상에 꺼내 놓는다. 그런데 그 언어와 그림과 노래는 '설득력'을 가져야만 한다. 모두가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게 바로 외적 필연성이다. 그런데 이 외적 필연성이란 것은 언제나 근사한 모습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짝반짝 빛나던 내적 필연성, 당신에게 창조를 명한 그 착하고 귀여운 소녀는 미숙한 외적 필연성으로 인해 괴물같은 털복숭이로 성장한다. 으악! 하지만 당신의 눈엔 아직도 콩깍지가 씌여 있다. 사람들은 털복숭이를 보고 괴물이라고, 정직하게 충고하지만 당신에겐 그 모든 사람들이 무지하고 천박한 대중으로 보인다. 

으아니 늬들이 예술을 알아?


그래서 모든 창조자는, 고독하다.





에고의 화신, 치열한 고민, 더러운 성격, 짜증나는 히스테리, 잘린 귀, 더러운 마루 바닥을 구르는 가난, 발 뒤꿈치에 매달린 고뇌, 심장에 새겨진 흉터, 어깨에 앉은 우수, 아티스트를 상징하는 모든 궁상맞고 우울한 찌꺼기들이 이 책엔 없다. 저자의 목표를 들어보자.


'나는 소설가이자 방송인이자 시나리오 작가로서 한창 현업에서 뛰고 있기에 이책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론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했다. (중략) 이 책이 나와 같은 동료 크리에이터들, 또는 그런 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까지는 몰라도 한 끼 별미 정도는 되었으면 한다. 가격도 딱 그 정도이니.'(p. 7)


이재인은 소설가로 등단하여 영화판에서 시나리오를 쓰다 SBS 라디오 '컬투의 두시 탈출'을 연출하고 있는 방송국 PD다. 그는 베테랑 작가이며 대중의 사랑을 쟁취한 성공적인 대중예술가다. 대중예술의 최전선에서 펼쳐지는, 그의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프로페셔날리즘은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를 보는 것처럼 스피디하고 톡톡튄다. 


이 책엔 예술에 대한 골치 아픈 고민, 당신을 기어이 우울의 늪에 빠뜨릴 그 개떡같은 감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재익은 약삭빠르고 명민한 대중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재익은 예술 혹은 예술같은 일을 하면서 스포츠카를 몰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21세기를 크리에이터로서 '살고 싶은' 사람, 동시에 한 명의 생활인으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이재익의 명민함은 괜찮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대중예술가가 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여, 이 책을 보라.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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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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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를 읽고 창피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키보드 위에 올려진 열개의 손가락을 바위처럼 단단하고 칼날 보다 예리한 하루키의 시선이 무겁게 누르고 있다. 그의 글 안에서 내 손가락은 자유롭지 못하다. 1Q84, 뒤틀린 시간과 공간의 통로를 통해 하루키는 내 글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글에 대한 글은 어쩌면 그 글의 '공기번데기'일지도 모르겠다. 마더는 도터의 탄생을 알고 있어. 1Q84에서 도터는 마더와 동일한 위상을 유지하지만 이 현실에선 아무리 야심차게 준비한 도터라도 결국엔 마더의 찌꺼기에 불과해. 1Q84를 읽고 창피한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아. 




1Q84를 사야 되나 말아야 하나, 그 맥없는 고민에 답을 얻기 위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다. 읽을 사람은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이 글을 써야 하는가. 나 자신이다. 나는 창문을 열고 컴퓨터를 킨다. 기분 좋은 가을 바람의 냉기가 창문을 통과해 살갗에 와 닿는다. 적당한 온도다. 나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자리를 잡고 눈을 감는다. 지금부터 나는 1Q84의 공기번데기를 만들 것이다. 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엄숙한 분위기다. 아직 달이 뜰 시간은 아니다.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떠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째 의문, 아오마메의 이야기는 덴고의 소설인가?


아오마메의 세계에 두 개의 달이 뜨기 시작했을 때 부터, 나는 그것이 덴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덴고는 '공기번데기'의 리라이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다. 그리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거기에 아오마메가 등장한다고 볼만한 여지는 전혀 없지만, 어느 순간 아오마메의 이야기에 일그러진 녹색 달이 등장하고 평행선을 달리던 두 레일이 덜컹하는 전환기의 당겨짐과 함께 서서히 한점으로 모여든다. 소설가가 하나의 세계를 써내려 가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써내려 간다. '책을 쓰는 것'은 '인생을 산다'의 은유로써 손색이 없다. 덴고는 장편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기 삶을 축조해 나가는 것과 같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 만나고 싶은 아오마메를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킨다. 거듭 강조하지만 여기서 '쓴다'는 '산다'와 같다. 덴고는 소설을 쓰면서 그 소설을 산다. 덴고의 소설은 덴고의 바람이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현실'은 강렬한 바람에서 탄생한다. 


(스포일러 있음)


소설과 현실이 지나치게 가까워지자 덴고는 자기 이야기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덴고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다. 현실은 소설과 지나치게 뒤엉켜 버리고 덴고 자신 조차 이것이 소설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여기서 분명한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계속되야 한다는 것이다. 급박한 상황에서 하루키는 자신이 직접 화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하루키는 3권에서 딱 한번 해설을 한 뒤 바람같이 사라진다). 하지만 좀 더 안정적이고 필연적인 화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시카와가 등장한다. 그 우시카와는 덴고와 아오마메의 삶에 끼어든 '이물'이지만(생김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교롭게도 그 끼어듦이 세계에 균열을 만들고 이것을 통로로 두 사람은 재회한다. 여기서부터 다시 하루키의 소설이 시작된다.


1Q84는 책의 저자와 책 속의 등장인물들이 써내려가는 소설(삶)이 복잡하게 얽혀들면서 다층적인 구조를 형성한다. 그 애매모호함과 뭔가 있을 듯한 기대감이 시종일관 강력한 몰입도를 만들어 낸다. 하루키 소설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몰입도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쩍하고 스쳐 지나가며 섬광을 내뿜을 때, '헉'하는 신음 소리만이 독자의 텅 빈 머리를 울린다.



리틀 피플은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리틀 피플을 하나의 의미로 결정짓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너무나 적다.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는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오늘날 빅 브라더는 예전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우리 속에 끼어들어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오늘날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양상은 훨씬 교묘하고 은밀해졌다. 하루키는 빅 브라더에게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리틀 피플?



공기번데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 공기번데기를 하나의 의미로 결정짓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너무나 적고 또한 일관적이지 못하다. 


나는 도터와 마더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안다. 덴고가 아오마메의 공기번데기를 보고 그의 손을 잡았을 때, 헤클러&코흐 사의 권총을 목구멍에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아오마메의 손가락이 멈춘다. 


나는 도터와 마더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덴고가 목격한 아오마메의 도터는 10살의 아오마메였다. 


나는 도터가 매개자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후카에리의 도터는 리틀 피플과 이 세상을 연결한다. 아오마메의 도터는 덴고와 아오마메를 연결한다. 아오마메의 도터가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던 이유는, 덴고의 기억이 20년 전에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도터는 마더의 간절한 '바람'이 현실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덴고가 아버지의 병실에서 봤던 공기번데기는 아오마메의 도터가 아니라, 바로 덴고의 도터일지도 모르겠다.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어떻게 평하고 있을까?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게 짜였고 마지막까지 독자를 견인하는 힘이 있지만, 공기 번데기란 무엇인가, 리틀 피플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우리는 마지막까지 미슨터리어스한 물음표의 풀 속에 내던져지고 만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점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러한 자세를 '작가의 태만'이라고 받아들이는 독자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한 듯한 뉘앙스만 풍기는 자세에 관해 머지않아 진지한 고민을 요구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Book2, p.145~146. '공기번데기'에 대한 비평 중)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게 짜였고 마지막까지 독자를 견인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 작가를 태만하다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Book2, p.146. 덴고의 대사)



에필로그


설명을 듣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을 들어도 모른다는 것이다(책 본문 중). 그리하여 이 소설엔 해설이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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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 버클리 :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지식인마을 2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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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철학의 이해라는 수업의 중간 고사 시험 문제로 'Cogito ergo sum'을 비판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그때 내가 썼던 답안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 나는 또 한번 'Cogito ergo sum'을 만난다.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지만 이제는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다. 


정말?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한 지금도 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Cogito ergo sum'이란 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정수이며 그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서양 근대 철학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고농축 선언이다. 이 말을 완벽히 이해하고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학 강의와 저술만으로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원리를 알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감각 경험'에 의한 귀납 추론을 선택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은 '명석판명한 지식'을 토대로 한 연역 추론이었다. 

명석판명한 지식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의심 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를 뜻한다. 절대적 진리란 대충 따져보아 '참인 명제'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동물은 모두 죽는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이것은 경험적으로 봤을 때 참일 가능성이 크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동물의 죽음을 목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령 이 명제가 참이라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동물은 모두 죽는다'라는 명제에서 '동물'이나 '죽는다'라는 단어를 너무나 쉽게 얘기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동물이나 죽음의 존재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젠장 무슨 말이냐고?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동물을 토끼로 바꿔 보자.


지금 당신의 눈 앞에 흰색 토끼 한 마리가 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귀여운 토끼 한 마리다. 귀를 쫑긋 세우고 당근을 갉아 먹는다. 이제 손을 뻗어 토끼를 만져보자. 그 보드라운 털이 만져지는 순간 당신의 손에 토끼의 실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토끼의 존재가 이렇게 생생하게 전해오는데도 여전히 토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생각인가? 하지만 더 생각해 보자. 당신의 감각이 거짓이 아니라고 할만한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 인간의 감각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같은 길이의 직선인데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 보이는 아래 그림을 보라.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더 얘기해 주자면, 당신이 방금 만진 그 토끼는 내가 일본 로봇 연구소에서 빌려온 정교한 토끼 로봇이었다. 손 끝에 전해지던 보드라운 촉감은 최고급 캐시미어 가죽으로 만들어낸 가짜 털 덕분이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정교한 로봇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이같은 경험을 만들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속았다고 낙심하기엔 이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여기서 철학적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 'Cogito ergo sum'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같은 의심에서 딱 한 발자국 전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확실치 않다. 완벽히 증명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거듭해 나가다 보면 결국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 한 가지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의심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근대 사회는 데카르트의 작품이다. 의심할 것 없는 정확성. 제1 명제의 반석 위에 하나하나 차곡차곡, 추론을 통한 지식을 쌓아 세계를 구축한다. 이것은 마치 정교한 건축을 연상케 한다. 철저한 엔지니어링적 사고. 데카르트가 닦은 사상의 반석은 곧이어 아이작 뉴턴이라는 신성한 건물을 탄생시키고, 드디어 과학과 기술과 우리의 '오늘'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는 의심하는 나의 사고 작용이 곧 나의 실체를 증명한다고 보았다. 아무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 봐도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으니까. 여기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심하고 있는 그 내가 '직접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실체'라고 말하는 건 명백한 비약이다. 데카르트가 알 수 있는 건 단지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 그 사실'일 뿐이지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 실재적인 '육체'는 아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정신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육체'라고 불리는 껍데기가 있어야 한다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자신의 '명석 판명한 지식'의 전제로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천하무적 승승장구 할줄만 알았던 근대 사회가 오늘날 다양한 문제를 드러내며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이 세계가 데카르트의 명석판명하지 않은 지식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일까?


나는 앞서 데카르트의 명제를 반박하면서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 그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는데에는 동의했다. 데카르트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는 그의 철학이 '관념론'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실재하는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는 불안정한 세계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와 '육체를 가진 나'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을 대담한 비약으로 메꿨던 것이다. 


역사는 이후 데카르트 철학의 논리적 상처를 봉합하려는 많은 사람들을 배출한다. 아일랜드의 대주교 '조지 버클리'도 그 중 하나였다. 





조지 버클리는 경험론자라는 측면에선(귀납적 추론) 데카르트와 반대점에 서 있는 사람이었지만 '세계의 실재를 규명'하려는 목적에 있어서는 동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버클리가 증명하려한 '실재'는 데카르트의 '실재'와는 차원이 달랐다. 데카르트에게 '실재'라는 것은 외부 세계에 떡하니 공간을 차지하고있는 '물질적 실재'였던데 반해 버클리의 '실재'는 '관념론적 실재'였다.


집, 산, 강 그리고 한마디로 모든 감각 가능한 대상들은 이해력에 의해 지각되는 것과 독립적으로, 자연스럽게 또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113p, 원출처: 인간 지식의 원리론, 버클리 작)


버클리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외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지는걸 의아하게 생각했다(지극히 당연한걸 의심하고 비판해야만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버클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아무런 증명없이, 우리가 인지하는 것에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본능적으로. 하지만 지각은 결코 외부 세계의 실체를 증명해주진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지각하는가? 그것은 관념이다. 해의 실체가 아닌 해라는 관념, 사과의 실체가 아닌 사과의 관념. 하지만 어떻게 실체 없이 관념이 존재할 수 있는거지? 구체적 물질이 없다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그것에 대한 관념도 존재할 수 없잖아! 관념과 실체가 분리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이 같은 딜레마에 빠져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어야 한다. 그리하여 버클리는 과감히 칼을 뽑아들었다. 버클리는 말한다. 외부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관념' 뿐이다. 


버클리는 우리가 보는 사과, 모니터, 키보드, 아이폰 등이 모두 물질이 아닌 관념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정하면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다. 굳이 실체와 관념을 나눠 골치 아프게 따질 일이 없다. 세계는 관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념을 지각한다. 우리는 지각되는 관념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기에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명명백백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버클리는 Cogito ergo sum에 버금가는 유명한 명제를 도출해 낸다. 


Esse est percipi(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자, 버클리에 의해 세계는 다시 안전한 반석 위에 올라왔다. 세계는 명명백백히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물질이 아닌 관념의 형태이긴 하지만. 얘기는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세계를 이끌어 간다. 


자,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귀를 닫고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 속에 우리 자신을 가둬보자.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버클리의 이론에 따르면 이 경우에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내가 볼 때만 존재한다. 내가 보지 않을 때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버클리도 이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철학을 완전 무결한 이론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대주교 조지 버클리. 그는 이 퍼즐을 완성할 마지막 조각을 자신의 직업 안에서 찾았다. 그의 해답은 신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지각하지 않는 동안 이 세계가 사라질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좋다. 왜냐고? 전지전능하신 신께선 우리가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이 세상 만물을 빠짐없이 지각해 주시고 계시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편)


신을 믿는 다는 건 이토록 편리한 일이다. 당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영어 점수가 안나와 승진을 걱정할 지라도, 공부를 안해 수능을 망칠 것 같아도, 두려워 말라 주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지니.





알면 알 수록 철학만큼 재밌는게 없다. 특히 인식론은 언제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줘 더더욱 흥미롭다. 원래부터 그렇게, 자연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곰곰히 따져보고 천천히 돌아보면 모든게 새롭다.


철학이 좀 더 쉬웠다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논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나아졌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철학을 폄하하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들은 쓸데 없는 고민을 사서하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김영사 '지식인 마을' 시리즈 만큼 부질없는 기획도 없을 것이다. 이 시리즈는 진심, 진정으로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책들로 가득한데, 우리가 이 모든 사상을 섭렵한다 할지라도, 행복은 머나먼 정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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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2-09-0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 어렵네요...살아가는데 아무도움이 안되는 학문...한국사회에서는 정말 영양가 없는 분야...백수의 첫걸음...하지만 이 땅에 뿌리를 박고 꿋꿋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할 징검다리 어쩌면 우리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힐링의 학문이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어려운 인식론을 쉽게 설명하는걸 보니 상당히 철학적이시네요^^

한깨짱 2012-09-04 14:55   좋아요 0 | URL
네 철학 정말로 어렵습니다. 인식론을 쉽게 설명했다 하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두 사람의 철학에 대해 뭔가 오해했기 때문에 설명이 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