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국내 미출간 소설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박현석 옮김 / 현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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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난 뒤 글을 쓴답시고 망망한 백지 앞에 앉게 되면, 그 하얗디 하얀 종이가 사실은 날 통째로 집어 삼키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지옥의 입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모든 소설가는 이 지옥의 입에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사슬을 채워 나간다. 장갑도 보호장구도 없이 하는 고행을, 나는 언제나 경탄에 찬 마음으로 바라본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위대한 일을 몇 십번이나 해 놓고도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의 글에, 남들의 평가에 컴플렉스를 느꼈다. 몇 번이나 죽을 시도를 했다. 아쿠타카와 상 따위 못 받은들 좀 어때. 이제는 고리타분한 그 대가들의 비아냥 따위 그냥 웃어 넘기자고. 당신의 소설은 당신이 죽은 지 6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절찬리 판매 중. 사람들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내 목숨을 대가로 단 하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이렇게 빌고 싶다. 니체와 고흐와 다자이 오사무를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다시 살려내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 됐는지 알게 해달라고. 포기하지 말자.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 전부 우울로 시작해 절망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건 오해가 아니야. 대개가 그렇지. 자기 삶의 편린이 소설의 한 가락이 되고 마는게 소설가라는 인간들의 숙명이다보니,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산 다자이 오사무가 쓰는 소설, 게다가 이 남자는 사소설의 대가, 그 소설들이 다짜고짜 행복을 노래할 순 없잖아. 그건 자기기만이라고. 이래뵈도 다섯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의 번역서를 거의 다 읽은 내가 기억하기론 그에게도 밝고 경쾌한 책이 두 권 있다. 피 비린내 나는 전쟁통, 귀여운 딸 아이에게 들려줄 심산으로 각색한 옛날 이야기인 '오토기조시'. 아무리 절망을 친구삼아 사는 남자라 할지라도,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이 담긴 주머니가 바로 삶이라는 걸 아는 남자라 할지라도, 초롱초롱 귀여운 눈망울로 옛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채는 딸 아이에게 진실을 폭로할 아버지는 없는 법이다. 물론 이 괴물같은 아버지는 몇몇 작품에 결코 개운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씁쓸한 뒷맛을 남겨 두었다. 아이가 자라 세상을 좀 알고나면 비로소 느낄 숨겨진 비애같은 걸 말이야. 


그런데 이 소설, '판도라의 상자'는 진짜 달라. 정말로 다르다. 때는 일본의 패전 당시. 배경은 폐병 환자들이 모여 요양을 하는 '건강 도장'이라는 곳. 이것만 놓고 보면 아~ 또 죽음을 벗삼아 살아가는 남자, 그것을 찬미하지만 결코 자살할 용기는 없는 나약한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책장을 몇 십장쯤 넘기다 보니, 이거이거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나와 놀라고 말았다. 


창작의 내력을 살펴보면 그럴만도 하다. 우선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아니다. 기무라 쇼스케라는, 다자이 오사무와 친분이 있는 한 남자의 일기가 그 바탕이 됐다. 기무라 쇼스케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기무라에게 일기 쓰기를 권한 것이 다자이 오사무였다고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기무라가 죽고 난 뒤 일기를 물려 받아 이 소설 '판도라의 상자'를 쓴 것이다. 







소설은 실로 경쾌하고 가볍다. 주인공 종다리(별명)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새소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삐져나온 아침 햇살과 함께 연주되는 기분. 현실과는 뚝 떼어져 격리된 곳, 폐병을 앓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세계는 고요한 심해로 침잠, 일종의 동면 상태에 빠졌을 거라 생각하지만, 삶이란 그렇게 만만치 않아. 사람이 있으면 사건도 있는 법이지. 그것도 젊은 남자와 여자 간호사들이 있는 곳이라고.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은 언제 어디서곤 사랑을 꽃 피울 수 있는 능력일 거야. 사랑은 말이지, 정말로 풀 한 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황폐한 땅에서도 꽃을 피워내고 만다니까. 


다자이 오사무 자신이 여자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만큼 여자의 마음을 사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니 섬세한 연애 감정을 이렇게도 잘 묘사하는 게 놀랄 일도 아니다. 종다리에게는 자기를 좋아하는 여 간호사가 둘이나 있다. 마아보와 다케. 종다리는 처음부터 다케씨에게 마음이 가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게 쑥쓰러워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음씨는 좋으나 거대하고 못난 여자다'라는 말만 늘어놓는다. 


다케씨의 사랑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아, 연애라는 단어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숭고한 면이 있다. 반면 마아보의 사랑은 어린 여자 답게 더 적극적이고 발랄하다. 1940년대니 남자로선 그 발랄함이 천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그래서 종다리는 마아보를 차갑게 대한다. 그럴때 마다 마아보는 종다리의 같은 방 남자들과 일부러 큰 소리로 깔깔깔 잡담을 한다. 마음에 없다고 내친게 자신이건만 그 경쾌한 웃음 소리에 부글부글 속이 끓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아보는 어린 소녀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 육감이란 게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종다리가 다케씨에게 홀딱 반해버린 사실을 아는 마아보는 말똥같은 눈물을 뚝뚝, 그 귀여운 얼굴 위로 흘린다. 어린 소녀는 원래 도도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저 멀리 만년설 위에 홀로 핀 붉은 백합같지. 그런 소녀가 마음을 완전히 허물어 뜨리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어떨 것 같아?







소녀를 울린 남자에게도 대가는 있다. 다케씨의 결혼. 종다리는 속으로 울다 지쳐 잠에든다. 그러다 꿈을 꾼거야. 마아보의 눈물도, 다케씨의 결혼도 모두 꿈이라는.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다. 잠이 깬 자기에게 다가와 옷을 갈아 입히는 다케씨를 보며 종다리는, 


"다케 씨, 축하해."


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케 씨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네. 말없이 뒤에서부터 잠옷을 걸쳐 주고 그런 다음 잠옷의 소맷부리로 손을 넣어 어깨 부근을 꼬옥, 아주 세게 꼬집었다네. 나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았다네.(p.220)


역시 청춘의 모든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 것. 소설은 이처럼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잔잔하게 흘러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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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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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상당수 틀린 주장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전문 미학자는 아니니까요.



진중권이 들려줘도 재미없어


책의 뒷표지, '진중권이 들려주면 미학도 재미있다'는 말은 순 뻥이다. 고전 미학과는 천지차이, 현대 미학은 복잡 난해하다. 깊이 숨겨진 진리를 찾는게 찾기만 한다면야 더 보람 있겠지만은,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온통 미로를 헤매는 기분, 골치가 아프다는 말이 사실은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한 이유는 이 참에 나에게도 알쏭달쏭한 현대 미학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픈 욕망 때문이었다. 발터 벤야민, 보드리야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이름 만큼은 알고 있어 여기저기 잘난척만 수두룩, 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지식이다 보니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탈탈 털리고 말거라는 공포심. 내 공부의 동기는 모두 이 공포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확히 알아냈느냐? 글쎄올시다. 두 번 세 번을 봐도 모르겠는게 이 현대 미학이라는 장르. 게다가 존경하는 진중권 선생, 이 분이 참 쉽고 재밌게 쓰시는 양반인데 도통 이 책에서만큼은 그 능력을 발휘해내지 못하신다. 무시무시한 번역문과 전문 용어가 두서없이 남발될 때는 이 분을 대단히 존경하는 나 조차 '자기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걸까?'라는 외람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변명을 좀 하면, 우선 번역의 문제가 있다. 이 책에 실린 인용문들은 당연 한글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그게 마치 재현을 포기한 현대 미술처럼 의미 전달을 포기한 문자 예술처럼 보인다.


둘째, 용어의 문제다. 예컨대 '숭고의 부정적 묘사'. 여기서 부정적 묘사라는 건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뭔가를 나쁘게 표현했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호하다. 설명은 당연 친절하지 않다. 사실 이것들도 크게는 번역의 문제다. 아마 외국 철학자들의 용어를 내포된 의미가 아닌, 표면적 의미만을 따라 번역하다 보니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미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용문의 영어 번역본을 찾아보고 미학가들이 사용하는 중요 용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는 입문을 원하는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현대미학의 보이콧, 재현의 포기


지금 난 현대미학의 텍스트를 이해하려는 욕심을 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그림이 명료하게 떠오르는 것 아닌가. 이러쿵 저러쿵 어려운 설명을 늘어 놓으며 자기 존재를 확립한다 해도 현대미술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두 '재현'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왜냐고?




위에서 부터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 잭슨 폴록의 작품들




첫째, 재현은 저급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떡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렸다 한들 그게 실제 떡보다 뛰어날 수 있겠는가? 재현은 필연적으로 '실재'와 '그림'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 낸다. 그려진 것은 결코 실재보다 뛰어날 수 없다. 이 한계를 깨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요, 몬드리안의 파랑, 노랑, 빨강이며 잭슨 폴록의 혼돈의 페인트다.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된다. 


둘째, 비판을 위해 예술은 사회에서(실재)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정신병자같은 대통령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올바른 정치인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듯이,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예술은 그것과 급진적으로 다른 타자로 머물러야 한다'(p.95). 예술은 그렇게 다른 상태로 머물러 끝까지 저항해 나간다. 예술의 비재현성은 곧 반면교사의 실천인 셈이다. 


셋째, 재현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떡을 그린 그림은 '떡은 떡이다'라는 동어반복의 멍청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비재현의 놀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의 모습이 은폐하고 있는 형상들을 새로이 열어 보여준다'(p.168). 회색 빛깔의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 좀비들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느낌표 하나를 넣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예술의 의미다.


넷째, 현대미술은 묘사가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려고 한다. 재현으로는 절대로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미술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그려놓고 이것이 바로 그 묘사가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고 우기기라도 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예술의 사기성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내면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됐다는 의미 아닐까? 현대예술은 작품 스스로가 말을 걸어온다. 그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작품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랴 ⅲ, 바넷 뉴먼





현대미술의 수용법


현대미술은 아무것도 재현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뒤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이걸 예술이라고 부를까? 하이데거는 "이것이(그림) 말을 했다"라고 말한다. 작품이 직접 자신의 진리를 말해줬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작품에 대한 감상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님을, 이유는 없이 그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문제는 이 하이데거의 독단이 작품의 진리를 하나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언부언 횡설수설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을 얘기한다.'


하이데거의 수용법은 어딘지 모르게 거만함이 느껴진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보가 될 것 같은 기분. 어디 무서워서 미술관이나 갈 수 있겠는가? 예술에 대한 현대인의 지적 컴플렉스는 여기서 시작된다.


하지만 여기에 하이데거의 한계가 있다. 현대미술은 재현을 포기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이 지시하는 실제 사물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진리는 어째서 단 하나의 진리를 지시하는가? '이것이 진리다'라는 말은 '이것'이 맞다는 얘기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에 대해' '맞다'는 말인가? 고정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순간 현대미술은 다시 딱딱한 고전미술로 회귀하고 만다.


데리다는 바로 이 부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더 놀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데리다에 의하면 '작품의 진리는 결코 한 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의 해석은 다른 해석으로 확장되고 다른 해석은 또다른 사람들에게 또다린 진리를 열어줄 수 있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열어주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다'. 


해석자와의 만남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끊임없는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일부 문장 수정. p.142). 


나는 앞서 작품의 얘기를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술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사람이다. 상상력이 빈약한 자, 규칙에 얽매인 자, 차이의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작품의 얘기를 들을 수 없다. 








이 모든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장 보드리야르를 만나야 한다.


차이의 놀이, 좋다. 하지만 차이는 정말로 무한히 계속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차이의 생성이 극점을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유의미한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도 예술입네, 저것도 예술입네, 예술은 도처에서 피어나지만 그 중에 진짜 새로운 사건은 없다. 


'"현대예술의 모든 움직임에는 일종의 무기력, 즉 더이상 스스로 초월하지 못하여 점점 더 빠른 순환 속에서 자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있다". 그는 무질서하게 범람하는 현대예술을 암세포의 증식에 비유한다'(p272).


보드리야르는 예술에 종언을 고한다. 지나가는 여자의 몸매도 예술, 멸치 국물의 맛도 예술, 자동차도 예술, "예술은 더이상 없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다. 그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세상에 너무 예술적인 것이 많다 보니 뒤샹과 워홀은 오히려 예술을 범상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예술로 만든다. 가치가 범람하는 세계 속에 던져진 무가치의 역습. 이어지는 현대예술이 저마다 무가치를 주장하며 두 사람을 따라해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뒤샹과 워홀은, 어쩌면 이 세계 마지막 현대예술가였는지도 모른다. 




뒤샹, 그리고 워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보드리야르와 진중권은 거기에 쐐기를 박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무가치와 그 무의미 뒤에 무언가가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무가치한 예술을 무시할 경우 우리는 모종의 "죄의식"을 느끼게 되고, 거기에 편승해 현대예술은 마치 가치 있는 양 포장된다. "바로 거기에 전문가 범죄가 있다."(p.273)


우리 나라의 돈 많은 범죄자들이 현대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현상은 이 말에 더할 나위 없는 증거를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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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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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겠냐만은 그렇다고 너무 당연시 여기며 살아가기엔 시큼시큼한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그런데 생각이 없다는게 도대체 뭐야? 거기엔 두 가지 상태가 존재한다. 

첫째, 무념(無念)


하지만 이런 건 오히려 장려해야 할 상태 아닐까? 무념이란 깊은 명상이나 오랜 시간 도를 구해온 사람이나 얻을 수 있는 극강의 정신적 체험이니까, 오히려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을 칭찬해 줘야지. 


둘째, 산만(散漫)


생각이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생각이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다. 어떤 생각도 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휙휙 지나가 버리는 상태. 문제는 바로 이거다. 쏟아지는 정보에 흠뻑 젖어 더 이상 사색도, 깊은 사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우리는 그저 화려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속에서 살아가는 거야. 불이 꺼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산만함'하면 떠오르는 철학자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언가 발터 벤야민이다. 그가 태어난 시절은 신문이 눈을 뜬지 이미 반 세기가 지났을 때였고 한창 젊은 시절이 되자 영화와 라디오가 출격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른바 매스미디어의 시대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정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것들은 벌처럼 날아와 바람처럼 사라졌다. 벤야민은 기술 진보의 거인이 한 발을 내딛고 나면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수 많은 영상과 텍스트에 적응하는 방법은 '산만함'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인의 지각 특성은 산만함이 될 것이다'


벤야민은 예언자가 됐다.


재밌는건 과학의 속도가 철학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말 까지만 해도 인간의 뇌는 고착화 이후 절대로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 과학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머제니치를 비롯해 수 많은 신경과학자들이 연구를 거듭한 결과 뇌는 가소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인의 뇌는 단순히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잘 변한다. 또는 머제니치가 말했듯이 대대적으로 변한다.'(p. 50)


흔히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을 하지 않나. 여기에 하나 덧 붙이자면, 세상은 결국 개별 인생이 맺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므로 생각이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이것은 기술의 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째서 그토록 광범위한지, 왜 기술에의해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거듭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힌트가 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기술 그 자체 뿐만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변화된 사고다. 기술은 사고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고가 또 다시 기술의 진보를 촉진하는 순환 구조. 상전벽해, 환골탈태는 두 변화의 상호작용을 통해 극대화 된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가 왔다. 하이퍼 텍스트는 현대인의 산만함에서 힌트를 얻은 코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우리의 지각 특성을 그대로 닮아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정보와 정보 사이를 널뛰기 하며 빠르게 이동한다. 중요 기사를 읽는 중에도 우측의 실시간 검색 순위에 눈이 가고 다 읽기도 전에 관련 기사로 넘어가며 수 없이 깜빡대며 유인하는 배너 광고를 클릭하고 만다. 이제 하이퍼 텍스트는 단순히 텍스트만의 연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 비디오같은 멀티 미디어를 직접 품거나 링크를 제공하고 링크로 이동한 순간 수 없이 많은 관련 미디어들이 물샐틈 없는 포위를 마친다.


인간이 정보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알게 되면 이 산만함이 지식 형성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는 지 알 수 있다. 뇌의 기억 구조는 크게 작업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뉜다. 작업 기억은 실시간으로 입수되는 정보를 잠시 저장해 두는 역할을 하는데 이 정보는 긴 사색을 통해 점차 장기 기억으로 옮겨진다. 이 과정에서 우리 뇌는 새 정보를 기존에 갖고 있던 정보들과 통합하면서 이른바 '스키마'라고 부르는 거대한 배경 지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작업 기억의 용량은 매우 작다. 정보가 한 방울 한 방울 똑똑 떨어질 땐 그것을 음미해 장기 기억으로 옮길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만 콸콸콸 쏟아지는 정보 앞에선 아주 짧은 시간만이 주어질 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정보를 보고 살면서도 결코 똑똑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의 예능 프로는 우리의 산만함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주는 좋은 지표가 된다. 요즘 예능은 수 십대의 카메라가 출연자를 끊임없이 쫓아다닌다. 이렇게 생산된 막대한 컷들은 전광석화처럼 뿌려진다. 후다다닥 지나는 컷들 위로 쉴새없이 자막이 흐르고 효과음과 애니메이션이 추가된다. 이 산만한 시청자를 잡아 두기 위해선 그들의 작업 기억에 들어있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갈아줘야 한다. 


벤야민은 우리가 산만함을 배움으로써 정보의 홍수에 적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적응이라는 말은 더 나은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다. 현대인이 산만함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그 적응이 희망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더 천천히 읽고 더 깊이 생각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은 행동을 지배한다.


어쩌면 이런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산만함은 세계를 지배했다. 그렇다면 산만함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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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oddony 2014-12-28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네요. 모든 연결을 끊고 저만의 동굴에 틀어박힐 시간...

한깨짱 2014-12-30 13:37   좋아요 0 | URL
면벽수련이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됐으면 좋겠어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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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단한 책은 난생 처음 읽어 본다. 김영사는 '지식인 마을' 시리즈 이후 최고의 걸작을 만들어 낸 게 분명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극동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선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자가 아닌 이상 이름을 얻기 쉽지 않지만 이 남자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소크라테스와 맞먹는 명성을 거머쥐었다. 철학이 빈약한 이 나라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인기를 끌기 시작한건 EBS 방송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히는 마이클 센델의 정치 철학 강의는 비가 오면 건물이 통째로 잠기기도 하는 열악한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한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 전파에 노출된 적이 있다. 샌델의 강의는 끊임없는 질의 응답으로 진행되는데,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하버드생 답게 자신의 주장을 똑똑히 전달하지만 이어지는 샌델의 질문에 결국 딜레마 상황에 빠지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게다가 그는 언제나 명확하고 구체적인 예시로 우리를 몰아 세운다. 우리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건 교수의 권위나 지식의 무게에 짓눌려서가 아니다. 'To be, or not to be' 딜레마는 구조의 문제고 마이클 샌델은 그 구조를 완벽하게 설계한다. 







삶은 수 많은 행위가 축적되어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것인다. 그리고 행위란 나름의 가치와 기준을 근거로 행해진다. 쉽게 말해 개가 똥을 먹는데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자기 기준을 통하지 않는 것은 숨쉬기나 고통 인지같은 반사적 행동이거나 행위자가 심각한 싸이코패스일 때나 존재 가능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바로 이 대목에서 그 필요성이 입증된다. 

모든 행위엔 이유가 있지만 이유가 있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옳고 그르고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저마다 생긴대로 꼴리는대로 살면 될거 아니냐고. 만약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전 세계 인구로 나눠 똑같이 배급하고 주변에 높다란 울타리를 쳐 서로 상호작용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면 이렇게 살아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면, 우리는 반드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려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우리 사회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세 가지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공리주의. 벤담과 밀로 대변되는 이 사상은 철학이 굶어 죽기 직전인 한국에서도 높은 인기를 갖고 있는 사상이다. 이유는 그 핵심이 너무 명쾌하다는 건데, 오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 하나로 모든것이 설명될 정도다. 


예를들어 우리 동네에 화장터가 들어선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화장터를 건립해야 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간단한 공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if (주변 동네 사람들의 행복 지수 > 우리 동네 주민들의 불행 지수) = 화장터 건립 

else 화장터 건립 취소


너무나 명쾌하고 깔끔하다. 우리는 논쟁이 격렬할 수록 공리주의의 유혹에 빠져드는데, 그건 골치 아프게 따질 필요없이, 언성 높일 필요 없이 그저 다수의 행복이 무엇인가만 따지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단순 명쾌함이 바로 공리주의 최대 약점이다. 뭔가가 극도로 단순하다면 작지만 소중한, 혹은 결코 훼손되서는 안되는 까다로운 가치들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어봐야 한다. 


공리주의 원칙을 신봉하는 당신이 쿨하게 화장터 건립을 찬성했더라도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싶다면 당신은 다음 사례가 지극히 도덕적이라는 사실에 동의해야만 한다. 


당신이 살고있는 마을에 어느 날 신이 내려와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한 아이를 고른다.

2. 이 아이를 지하실에 가둔 뒤 평생 동안 고문을 한다. 

3. 신은 이 아이가 고문을 받는 동안에는 모든 마을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한다. 


한 아이가 평생동안 받을 고통의 합은 결코 마을 주민 전체 행복의 합보다 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공리주의자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재건에 드는 비용보다 이라크 침략을 통해 얻는 이익이 더 크다면 

9.11 테러는 결과적으로 정의로운 일이 될 수 있다.



둘째, 자유! 자유! 자유! 이 논리 또한 우리에게 친숙하다. 우린 이 핵심을 초등학교 바른생활을 통해 배운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 추구는 언제나 선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내 자유는 언제나 선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내 자유를 침해해선 안된다. 근대 사회를 거쳐오면서 자유가 인간의 천부적 권리로 인정되온 탓에 이 주장은 별다른 반박의 여지가 없어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도 몇 가지 반박이 존재한다. 


합의된 식인 행위는 과연 옳은 일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내가 내 몸을 어떻게 사용하든 남들이 상관할 바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몸을 고기로 제공할 용의가 있고 옆집 사내가 그것을 얌얌 맛있게 먹어줬다면, 자유지상주의자인 우리는 과연 옆집 사내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식인 행위는 주변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자유 추구의 제1 원칙에 위배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게 식인 행위를 저지른건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이 알게된 식인 행위는 비도덕적이란 말인가? 이 같은 주장은 이 논쟁의 본질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가라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1785년, 이 의심에 답을 내려주기 위해 임마누엘 칸트가 등장한다.







칸트가 생각한 자유는 확실히 까다롭고 어려운 면이 있지만 대충 '정언명령'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언'이라는 말은 조건이 없으며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정언명령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다른 어떤 동기도 포함하지 않은 명령"이다. 칸트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려면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언명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명령하는가?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명령한다. 인간은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도구의 근본적 차이이며 인간이 존엄한 이유이기도 하다. 


앞의 예로 돌아가보자. 나와 옆집 사내가 식인 행위에 동의한 것은 맞지만 그건 자유로운 행동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존재를 고기로 제공함으로써 나를 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의 주장에도 반박은 존재한다. 게다가 마이클 샌델은 자유만으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유지상주의는 개개인에게 도덕 지침을 제공하는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좋은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무력하다. 우리가 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왜 소수민족우대정책을 실시해야 하는가? 왜 독거 노인을 돌봐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을 돕든 말든 소수민족을 우대하든 말든 독거 노인을 돕든 말든, 그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자유의 원칙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중립, 중립, 중립



마이클 샌델은 정의를 가르는 마지막 기준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263p)


하지만 누가 마땅히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여기 최신형 스마트폰이 있다고 하자. 이 스마트폰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굴까? 전화나 SMS만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이 스마트폰을 주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 이유는 우리가 스마트폰의 목적을 그것이 가진 다양한 기능을 파악하고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받아 마땅한 사람이란 그 재화의 목적을 충분히 발휘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화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목적을 가장 잘 발휘할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합의된 식인 행위는 정의로운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내가 가진 고유한 능력과 미덕을 개발해 사회의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한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지 않고 공동선에 이바지하기위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사회가 임의적으로 만든 가치를 대의로 포장해 개인을 억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결함이 있어 보인다. 예를들어 앞에서 언급한 '나라는 존재의 목적'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이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나라에선 매일 아침을 국민교육헌장 낭독으로 시작해 국기에 대한 맹세로 일과를 마감해야 할 판이다. 이런 생각은 군부독재 시대의 한국에서나 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매우 명확하다는 강점이 있다. 그의 정의론은 가치 판단이라는 애매한 비난을 피해 점잖은 척 중립의 뒤에 서는 비겁함을 보이지 않는다. 여기 동성혼 논쟁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에 찬성했을 때와 반대했을 때의 이득을 따지기 위해 되지도 않는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고, 자유주의자들은 동성혼은 옳은 일도 그른 일도 아니니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따라 결혼의 목적을 '출산'으로 정의한다면 동성혼에 반대할 강력한 근거를 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이 위대한 점은 그것이 어떤 미묘한 사안을 맞이해서도 언제나 명쾌한 시비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라고 만만히 봐선 안된다.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 책이 위대한 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과 닮아있다. 샌델은 여타 지식인들이 그렇듯이 정의에 대한 여러 의견을 구구절절 풀어 놓은 뒤 '자 이제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알아서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 보세요.'라며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중립을 지키는 일이 교양있고 유식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마땅한 의무라는 환상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치가 난립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시대에 고상한 척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이클 샌델은 책의 후반부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정의론을 매우 강한 어조로 두둔하며 그것을 현실 세계에서 펼쳐나가기위한 구체적인 정치 담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공정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p.361)


그는 우리 시대의 어딘가에 분명 커다란 구멍이 나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 옛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친구였고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토론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게 분명하다. 이런걸 보면 그는 영락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는 노인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노파심이 나에겐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저층 주공아파트 78동 203호에 살았을때, 78동 사람들은 101호에 살든 510호에 살든 상관없이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나는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지냈다. 그들은 일 주일에 한 번 반상회를 열어 사는 얘기를 공유했고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다함께 고민했다. 1층 엄마들은 주차장에서 뛰어 노는 모든 아이들을 돌봤고 우리는 다함께 한 집에 몰려 들어가 AFKN에서 하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봤다. 그 동네에서 일어나는 가장 험악한 일은 한창 타다 낡아 버린 자전거를 누군가 훔쳐가는 것 정도였다. 


그 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모두가 '좋은 사회'란 무엇인지에 대해 거의 동일한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견은 생길 수 있었지만 그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불과 20년 만에,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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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프랑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 문제를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1장 인간(Human) 
Q1-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Q2-꿈은 필요한가? 

...


2장 인문학(Humanities) 
Q1-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Q2-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


3장 예술(Arts) 
Q1-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Q2-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가? 

...


4장 과학(Sciences) 
Q1-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Q2-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Rights) 
Q1-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Q2-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


6장 윤리(Ethics) 
Q1-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Q2-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


물론 모든 고등학생들이 다 훌륭한 답안을 내는건 아니겠지.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이것 만큼은 확실하다. 대한민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건, 단지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면허증을 땄다는 의미야. 하지만 프랑스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건, 그 사람이 이미 철학자가 됐다는 얘기야. 


'행복을 만들어 주는 책'. 이 책을 지은 사람은 아르튀르 드레퓌스. 20대라고 한다.





사실 이런 책을 읽고 그 순간, 바로, 금방, 번쩍하고 행복을 찾는다면 세상에 걱정할 게 뭐 있겠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이 많겠지만은, 행복이 지극히 소소한 경험에서 온다는걸 아는 사람도, 파랑새는 저 멀리 첩첩 산중이 아니라 내 집 앞 마당에 앉아 있다는걸 아는 사람도, 그래, 이 모든걸 아는 사람도 실제론 행복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좀 너그럽게 봐주자는게 내 생각.


이 책은 150페이지 밖에 안된다. 그마저도 대부분이 그림에 여백, 총 글자수를 긁어 모아 빽빽하게 페이지를 채운다면 30페이지나 될까?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하지만 그 대담함에 허를 찔리고 말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그 침묵 속에서 갑작스럽게 '뜩'하고 튀어나오는 것들이 있다. 거칠게 요동치던 파도들이 고요 속으로 침몰해 가는 느낌. 불교의 선종에서는 이걸 돈오점수라고 부르던가?


행복? 미간을 잔뜩 찌뿌리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해석에 허색을 덧붙이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침묵은 메시지고 여백은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아봐.

저자의 말대로 굳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볼 필요는 없어. 하지만 공원에 나가, 어렵지 않은 책 한권을 읽으며, 나른한 봄 햇살에 스믈스믈 세상 속으로 녹아드는 나를 발견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어. 한권 봤다고 생색내기에도 참 좋은 책이야.


아르튀르 드레퓌스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은 이 리뷰처럼 두서없이 진행된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소설처럼, 잡담과 의미없어 보이는 글들이 릴레이를 이루지. 


나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무리야 무리. 나는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남자라고.


p.s - 이렇게 쉽게 써보긴 처음이다. 나 지금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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