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 브레인 - 우리 몸과 마음을 컨트롤하는 제2의 뇌, ‘장(腸)’
에머런 마이어 지음, 서영조 외 옮김 / 레몬한스푼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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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가 뒤틀린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뒤틀린다. 누군가 위를 찢어버릴 목적으로 쥐어짜는 것 같아 잠에서 깰 정도다. 이상한 일이다. 스트레스는 정신의 영역일 텐데, 어떻게 물리적인 기관들이 영향을 받는 걸까?


생각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말, 일체유심조라는 이야기에는 가해자의 논리가 숨어있다. 마음의 평온이 결국 나에게 달린 문제라면 외부 조건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모두 헛수고이지 않은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다스렸다면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런 생각은 행동이 필요할 때 명상이나 하자는 비겁한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일일지니, 다투지 말고 자신의 마음이나 돌아보라. 정말 불쉿이다.


<세컨드 브레인>은 우리의 감정이, 생각이, 마음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장 내 미생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가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장과 장 내 미생물군은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감정과 통증 민감도,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의사결정을 좌우할 수도 있다. (p.22)


영어로 직감을 gut(내장) feeling이라고 하는데 괜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과 뇌는 정보를 '양방향'으로 전달할 수 있는 굵은 신경다발과 혈류를 이용해 소통한다. 이 신경절달경로를 통해 호르몬과 염증성 분자가 부지런히 오가며 뇌와 장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이다. 장은 고유한 신경계를 갖고 있는데 약 5천만~1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된다. 이는 뇌-신체 연결의 중추라 불리는 척수와 맞먹는 수치다.


장 신경계가 수집하는 풍부한 감각정보는 뇌에 전달되고, 뇌는 이를 분석해 장의 기능을 조절한다. 우리 몸은 이 과정에서 '감정을 느낄 수'있다. 감정을 감각정보 그 자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뇌가 해석한 결과로 보느냐는 흥미로운 논쟁이긴 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 이는 물질이 먼저냐 생각이 먼저냐를 놓고 수천 년간 싸워온 낡은 유물-관념 전쟁을 연상케 한다. 해봐서 알겠지만 이는 헛수고일 뿐이다. 둘은 미묘하게 얽혀있다. 분명히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면 어느새 안이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정말 놀라운 건 장 내 메생물의 관점에서 이 '연결'을 바라볼 때 발생한다. 미생물도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존이 최대 과제이며 자신의 DNA를 가능한 많이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 미생물들이 번식에 유리한 음식물을 달라고 뇌에게 조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먹고 우울감이 감소하는 걸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당분이 장 내 어떤 미생물의 주요한 먹잇감이라면, 이 미생물들이 특정 신경전달물질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게 지나친 상상일까?


과학이 발전해서 좋은 점은 호기심이 해소되서가 아니다. 새로운 질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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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영화 특별판) - 신의 선택을 받은 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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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멜리는 교황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니,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었다. 요직인 국무원장을 역임했으나 이제는 뒷방으로 밀려나 허울뿐인 추기경단 단장직을 맡은 게 전부였다. 국무원장에서 내려올 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교황은 거절했다. 아직 바티칸에는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로멜리는 그 말이 달갑지 않았다. 대단한 평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래도 관리자라니. 고작 그 정도 크기였을 뿐인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크고 작은 그릇은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사람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조차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원망하지 않았던가.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후보는 아데예미, 트람블레이, 테데스코, 그리고 벨리니였다. 몸놀림이 신중하고 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이었으며 늘 품위를 챙겨 '교회의 왕자'라 불리는 아데예미에게는 아프리카의 동족들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 우주 역사 최초의 '흑인 교황'이라는 불꽃을 지닌 남자였다.


트람블레이. 프랑스계 캐나다인. 잘생긴 외모에 날씬한 몸. 북미인 특유의 가식만 제외하면 괜찮은 남자였다. 그에겐 아시아를 비롯한 비주류의 지지가 있었다. 아! 비주류. 영원히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늘 자신을 대신할 대표자가 필요했다. 트람블레이는 그들의 열망을 연료로 콘클라베를 달릴 준비를 마쳤다.


테데스코는 여러모로 추기경답지 않았다. 우선 돼지 같은 외모가 그랬다. 열 다섯 남매 중 막내로 자랐기 때문일까? 게걸스러운 식성은 안 그래도 떨어지는 품위를 짓이겨 밟았다. 그래도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추종자가 적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 극우파의 수장이었다.


로멜리는 벨리니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교황이라는 성좌보다는 신학자의 책상이 더 어울렸지만 현직 국무원장이 아닌가. 흑인 교황은 너무 급진적이었고 캐나다인 교황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웠으며 테데스코는 꼴통이었다. 벨리니의 강점은 딱히 결격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끌어내릴만한 손잡이를 달지 않는 것이다. 로멜리는 벨리니야 말로 진정한 교황의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로멜리는 자기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에 늘 벨리니의 이름을 썼다.


로멜리는 첫 투표에서 5표를 얻었다. 테데스코 22표, 아데예미 19표, 벨리니 18표, 트람블레이 16표, 기타 38표였다. 처음에 로멜리는 감개무량했다. 이중 다섯 명이나 자신에게 최고의 영예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두 번째 투표에서 9표를 얻자 점점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이상하리만치 운이 좋은 카드들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앞선 주자들을 나락으로 끌어내릴만한 비밀들이.


여섯 번째 투표에서 로멜리는 40표를 얻었다. 일곱 번째에는 52표였다. 로멜리가 선두였다.


주님의 가여운 양, 바티칸의 관리자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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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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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의 소설은 영화보다 못하다.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를 처음 봤을 때를 잊지 못한다. <러브레터>의 '오겡끼 데스까?'가 너무도 오겡끼한 덕분에 이 영화 말고는 기억하는 게 거의 없어 이와이 슌지를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 전문 감독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원래 이 남자는 빛바랜 필름 사진이 전하는 따뜻함 속에 약간의 B급 감성, 그 부조화가 마음속에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기는 독보적 영화를 만드는 인간이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와이 슌지는 소설도 꽤 썼다. 대부분은 영화를 옮긴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도 참 특이하다. 보통은 그 반대로 하지 않나? 아무튼 <러브레터>도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도 소설로 있다. <러브레터>는 그렇다 쳐도 '그' 소설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누워있던 나를 벌떡 일으켜, 다시는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소설은 평범했다. 지독히도 평범했다. 이와이 슌지의 글 솜씨가 형편없는 건지 상대적으로 그의 영화가 너무 뛰어난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소설은 별로 오겡끼하지 않았다.


나는 <제로의 늦여름>도 그러리라는 걸 알았다. 책장을 손에 대는 순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들고 타임스퀘어 교보문고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책은 비닐포장 되어있었다. 한 문장도 읽어볼 수 없었다.


그냥 아주 친했는데, 살다 보니 이런저런 시간에 치여 한 동안 잊고 살다, 먼지 덮인 창고에서 발견한 옛날 앨범, 잠자코 앉아 몇 시간이고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등 뒤에선 이와이 슌지 특유의 태양광이 쏟아져 들어오고, 세상은 뿌옇게 흐려지다 적당한 농도에 멈춰 아스라이 눈에 남는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 한 두 마디 물어본 뒤, 뒤따르는 정적 속에서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줄곧 옛이야기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공백이 얼마나 컸는지는 상관없이, 우리가 나눈 과거는 너무나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하다. 무언가를 더하지 않아도 좋다. 지난 것만으로도 마음은 넘쳐난다. 꺼내고 또 꺼내도, 줄지 않는다.


아, 책 얘기는 거의 할 게 없다. <제로의 늦여름>은 화가에 대한 얘기다. 일본 사람들이 흔하게 찍어내는 미스터리 장르다. 다시 옛이야기로 돌아가자.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에는 아게하라는 여자가 나온다. 그리꼬가 나오고, 그리꼬는 노래를 잘한다. 암살자들도 등장한다. 폭력단 두목이 있는데, 나쁜 놈인데도 불구하고 무지하게 멋있다. 마지막엔 줄이 끊기듯 툭하고 끝난다. 암전과 함께, 내 마음도 툭, 떨어진다.


이 장면은 설산을 향해 수백만 번 오겡끼를 외쳐도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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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
정명섭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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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가 딱 이런 느낌일 것 같다. 단순하고 매끄럽다. 복잡하지 않고, 어쩌면 이야기가 예측되는 면이 재미의 요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독자의 눈높이에서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문장이 잇따른다. 읽는 게 부담인 세상에선 무게를 덜어야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김언수 식으로 말하면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 하나를 들고 오듯 어깨에 힘을 빼고 잽, 잽, 경쾌하게 내질러야 한다.


<암행>은 판타지다. 주인공 송현우는 반정의 일등공신인 병조판서의 외아들인 데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수재다. 꽉 찬 스탯이라 먼치킨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암행>은 고전 소설의 전례를 따라 그를 나락으로 꽂아버린다. 그것도 심각한 밑바닥. 송현우는 결혼 첫날밤에 아내와 부모, 집안의 종들까지 무자비하게 난도질한 살인마의 누명을 쓴다.


당연히 송현우가 진범은 아니다. 절친은 불신했고, 종놈은 배신했고, 이웃은 매수되어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부모와 아내까지 죽은 마당에 뭘 더 희망할 수 있었겠는가? 송현우는 감옥 바닥에 묻혀있던 사기 조각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바로 그때, 신묘한 힘이 흘러들어와 그를 어둠을 걷는 자(암행)로 만든다.


힘을 얻은 송현우는 감옥을 탈출해 어느 무당의 집으로 도망친다. 무당은 송현우가 가야 할 곳을 가리키고, 무기를 쥐여주고, 동료까지 붙여준다. 목적지는 무원, 무기는 낙죽장도, 동료는 천하제일 검객과 그를 따르는 검은 개다.


낙죽장도를 뽑아 들면 온갖 정령과 요괴가 뛰쳐나와 적들을 무찌른다. 힘의 원천은 분노인데, 결코 그 분노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검객은 필시 미남일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와 싸워 이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 세상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의 고수다. 검은 개의 생김새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귀신을 물어뜯을 정도이니 삽살개를 떠올릴 만 하지만 풍기는 느낌은 늑대 쪽이 가깝다. 삽살개는 너무 귀엽잖아. 시종일관 진지한 이 여행에는 잘 붙지 않는다.


송현우를 쫓는 관아의 암행어사는 조금 아쉽다. 무력도 지력도 상대가 되질 않으니 추격이 밋밋하다. 악당들의 매력도 그렇다. 애꾸, 외팔, 절름발이. 사람은 아니고, 신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이다. 그들은 송현우의 낙죽장도에 너무 쉽게 쓰러진다. 아이템도 더 나오고, 기술도 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레벨업과 파밍의 재미가 없는 RPG 같다.


정리해 보자. <암행>은 어떤 소설인가? 콕 집어해  얘기를 찾다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자은의 다크 판타지 버전.


정세랑이 가진 양의 무게만큼 비워낸, 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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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사 - 중세부터 현대까지
아담 자모이스키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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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닮은 점이 많다. 외세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 그렇고 강대국들에 의해 국토가 분할됐다는 점도 그렇다. 이들의 역사를 읽고 있으면 폴란드인들이 겪었을 분노와 원통이 고스란히 밀려들어와 감정을 깊이 이입하게 된다. 우리는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한때는 초강대국이었다는 점도 같을까? 싸움에 관한 한 우리 역사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고구려를 갖다 놓으면 얼추 짝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국가다. 중동부 유럽의 드넓은 평원이 모두 그들의 것이었고 귀족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눈을 부릅뜨고 쳐다볼 만큼 호화로웠다. 폴란드 귀족들은 서민을 위해 초호화 서비스를 제공했다. 말발굽에 금박을 입혀, 말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떨어지는 금 부스러기들을 사람들이 주워가게 했던 것이다. 외국을 여행하는 폴란드인에겐 이 골드쇼가 일종의 유행이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정치 체제는 참으로 신비했다. 세습 군주가 대대로 국가를 통치한 게 아니라 무려 투표로 선출했다. 18, 19세기의 얘기가 아니다. 중세를 이제 막 벗어난 시점부터 그랬다. 소수의 귀족들만 참정권을 가졌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슐라흐타라고 불리는 귀족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빈부의 격차는 심했고 직업상의 상하관계도 존재했다. 가진 건 몸과 괭이 밖에 없는 가난한 농부도 대지주도 모두 슐라흐타 일 수 있었다. 그들은 법적으로 완전히 평등했다.


물론 전 국민이 참여하는 오늘날의 선거와는 달랐다. 전체 인구의 8% 정도였고 그마저도 전부 참여하지는 않았으니 많이 모일 땐 수만 명 수준이었다. 선출되는 사람을 보면 더 재밌는데 전 국왕들의 후광을 입은 친척들도 있었지만 아예 외국인 군주가 뽑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쯤 되면 사실상 국왕은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고 크고 작은 자치 도시들이 비슷한 문화를 기반으로 연합한 도시 국가 정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다는 사실은 다양성과 분열이라는 장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왔다. 당시의 폴란드는 현대의 미국과 버금가는 민족과 인종의 용광로였고 큰 박해와 장애 없이 각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삶을 추구할 자유가 있었다. 오죽하면 전 세계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이 한 몸이 되어 몰려들었겠는가? 한때 폴란드는 전 세계 유대인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국가이기도 했다. 아유슈비츠가 괜히 폴란드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빛을 잃고 만다. 각자의 이해는 너무나 달랐고 민족적 다양성은 오히려 그 민족의 침입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격변의 시간을 거치며 폴란드는 유럽 열강의 군침 돋는 먹잇감이 됐고 급기야 그 넓던 영토가 갈가리 찢겨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폴란드의 역사는 제삼자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너무 닮아 효과적인 교육자료가 된다. 특히 위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배울 것이 많다. 흥미로운 건 고금을 막론하고 민족을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배반하는 게 늘 특권층이었다는 사실이다. 잃을게 많은 그들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저항과 민족적 자부심은, 늘 서민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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