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마디
유기농 당근즙 42%(미국산)
유기농 오렌지과즙 25%(이탈리아산)
유기농 사과즙 22%(터키산)
유기농 토마토즙 8%(이탈리아산)
채소혼합즙 2%(국산)
레몬과즙 1%(이스라엘산)
유명한 가게에서 파는
유기농 채소 과일즙 병에 적힌 이 글을
한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오신 어머니한테
읽어 드렸더니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지랄하네. 그걸 누가 믿노!" (P.32 )
돌잔치
후배 민수의 아들 돌잔치가
가든 뷔페에서 열렸다.
돌잔치 상에는 사과 배 새우 과자 꽃..... .
모든 게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만들어진 가짜배기로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돌 잔치 상 맨 앞에는
돈, 실, 책 세 가지가 놓여 있다.
어른들은 첫돌 맞은 아이한테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집어 보라는 시늉을 한다.
아이는 둘레둘레 살피더니 책을 집었다.
옆에 있는 친척이 책을 빼앗으며
학자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단다.
아이는 다시 둘레둘레 살피더니 실을 집었다.
옆에 있는 다른 친척이 실을 빼앗으며
오래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단다.
아이는 다시 둘레둘레 살피더니
어른들이 맨 앞에 놓아 둔 돈을 집었다.
와아아!
여기저기서 손뼉을 쳤다.
얼떨결에
나도 손뼉을 쳤다. (P.34 )
밥 문나
외할머니는 밥만 먹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도
다 헤쳐 나갈 수 있다고 하셨다. 이 세상에서 밥이 최고였다.
어릴 때부터 쉰 살이 넘도록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는 외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밤새도록 똑같은 잠꼬대를 하셨다.
"밥 문나?"
외할머니는 무엇이 그리 바쁘신지
해가 뜨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면서
내 손을 잡고 딱 한마디 하셨다.
"밥 문나?" (P.74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내 손으로
농사지은 쌀로
정성껏 밥을 지어
천천히 씹어 먹으면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 P.88 )
-서정홍 시집,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
어제 저녁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퇴근 시간을 달려 가는
자동차들의 불빛을 보며 봄이 저렇게 오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짧은 밤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새 시간을 향해 떠나야 하는.
새로운 계약을 하고 오랫동안 정겨운 사람에게 건네 받은 책들을 본다.
이 책들이 다시 나의 밥이 되겠구나, 정성껏 읽고 책을 둘러싼 경계선 안을 잘 헤아려야
겠다며.
'들쑥날쑥 살아가고 있으므로/ 나는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책이 넓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보이는 데까지만 걸어가야겠다.' 라는
맹문재 詩人의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를 새로 펼친다.
어젯밤 꿈에 누가 내게 꽃김밥 하나를 주었다.
이제 정말 봄이다.
밥을 먹는다.
두부 된장찌개와 새로 꺼내 썰은 싱싱한 김치로 늦은 아침을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는다.
고양이들과 물고기들도 밥을 먹고 화분 속 달팽이들도 사각사각 밥을 먹는다.
이 봄에는 천천히 밥을 먹고, 정성껏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