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덴 호수


호수는 하늘만 올려다보고
하늘은 호수만 내려다보는,
어디에도 길은 없고 길이 모두 막혀버리고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그래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단지 비 오는 날
한낮에 소방울의 무딘 소리를 따라,
소 가는 길을 따라, 소 가는 길을 밟아
호수까지 가는 방법밖에 없는
외로운 호수, 정든 호수,
나의 고향 같은 것.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섹덴 호수》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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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나의 벗, 율리에게.

 

 물고기들도 밤이 되면 잠을 잔다.

 밤에 수조의 불을 꺼주면 바닥으로 모두 내려가 고요한 물속의 잠을 꿈꾸듯 자고, 아침이면 물위로 올라와 발랄하게 유영을 하며 꿈같이 또 하루를 지내는 것이다.

 네가 예쁘다고 사진을 찍은 하프문 베타인 귀동이는 엄청 감정이 섬세한 녀석이다.

 현빈이만 보면 턱 밑의 솜털같은 지느러미를 하염없이 흔들다가도 내가 가면 뚝, 수초밑으로 휑하니 가버린다. 내가 한번은 그놈을 본의아니게 식겁하게 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론 나에겐 까도어(까칠하고 도도한 물고기)가 되었다~^^

 며칠전 현빈이가 여러가지 물생활 용품들을 사왔는데 애플스네일도 한 마리 가져왔다.

 그런데 이 놈이 커다란 달팽이인 팽군과 팽이등에 시도때도 없이 껌딱지처럼 붙어 있길래 '거 되게 밝히는 놈일세' 생각했는데 현빈이의 말. 원래 상태가 안좋아 수족관에서 샤크라라는 고기들의 먹이로 던져진 애를 덤으로 받아왔다고. 그런 애가 이젠 자신과 같은 게다가 커다란 달팽이들과 함께 있으니 안심이 되서 그런다고. '아이고, 너 욕봤구나. 구사일생이구나.'

 달팽이도 그럴진대 하물며 사람이야.

 사랑하는 율리.

 知音. 자신의 소리를 알아듣는 친구를 만나는 것만큼 마음 든든한 일이 있을까.

 늘 너와의 만남은 내게는 知音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을 울리는 글을 만날때도, 작업을 하다가 잘 안풀릴때도, 기쁜 일이 있을때도, 슬픈 일이 있을때도 너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을.. 조근조근 마음에 채워 넣어 사소하지만 안온하고 평화롭다.

 네 덕분에 이번 겨울도 마음이 춥지 않게 따뜻하게 잘 지냈다.

 그리고 이젠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영화도 함께 하는 기쁨도 배가되고. 언제 클래식음악이 배경이 되는 Sound 좋은 영화를 보고 싶구나. '세상의 모든 아침'이나 '파리넬리'같은.

 오늘 너와의 저녁을 기다리며 몇자 적었다. 황지우의 詩처럼.

 이제 봄이다. 이번 사순절은 유난히 복잡다단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촉촉히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우리의 기쁨과 소망의 씨앗들이 일제히 싹이 트고 꽃피우리라 믿는다. 늘 고맙고 사랑한다. 부활을 기다리며.. So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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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팅이 있어서 나갔다가, 오는 길에 근처 서점에 들렸다.

 모든 책을 거의 인터넷서점에서 구입하는지라 오랜만에 들린 책방나들이는 나름 신선했다.

 인터넷에서 본 책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들쳐 보는 즐거움도, 오래된 기쁨처럼 그리고 그저 땅기는 책들을 부담없이 만나는 소소함도 쏠쏠했다.

 인터넷으로 사는 가격보다는 물론 할인이 안되기에 좀 그랬지만 그래도 그냥 눈에 들어 오는 책들을 몇 권 질렀다.

 사람을 보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먹는지를 보라! 라는 '곰탕에 꽃 한송이', '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 '책 사용법', 니나 상코비치의  '혼자 책 읽는 시간'.

 가끔은 아무 생각없이 그냥 마음에 끌리는 것들을 지르는 무장해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거리에서 빈대떡을 파는 수레가 냄새로 나를 불러 빈대떡도 사고, 막걸리도 한 병 사가지고 와서 친구를 불러 먹으니 좋구나.

 왠지 오늘은 과거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아 편안하고 좋은 날이다.

 

 

 

 

 

 

 

 

 

 

 

 

 

  

 

 

 

  참. 오늘 주문한 책도 있구나. 이현주 목사님의 '사랑 아닌 것이 없다'와 '김제동이 어깨동무 합니다' ㅎㅎ 내일 오겠다.

 

          

 

 

 

                                                                                                      

 

 

 

      

 

 

 이달에 살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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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어봐요


그런데 말야,
방안의 창문을 열어야
바람도 불어오고 햇살도 들어오겠지.
담장 밖을 나가보면 더 좋을거야.
길을 걷다 보면 새 세상도 보일 테고
함께 걷고 있는 친구도 만날 거야.
마음이 문제일 거야. 닫힌 문을 열어봐.
아마도 웃을 일도 자주 생길거야.
분명!


- 박병철의《자연스럽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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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전, 술을 마시다 친구가 나와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니 예매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가 백화점 지하에서 오설록에서 나온 ' 레드파파야 블랙티'를 사고 옆가게에서 권해 준 올해 나온 매화차도 마시고, 귤차도 마시다가 10층에 있는 시네마로 올라갔다.

 

 오늘 우리가 본 영화는 -언터처블 1%의 우정-.

 

 올리비에르 나카체, 에릭 토레아노 감독과 푸랑수아 클로제, 오마 사이 주연.

 상위 1%의 백인 귀족남과 하위 1%의 무일푼 무식남의 천생연분의 만남과 아무도 예기치 못한 소통과 우정을 영화는 보여준다.

 

 필립은 목위의 기능만 가능한 전신마비이고  남자도우미를 뽑는 면접에 껄렁한 흑인 드리스가 나타난다. 면접을 보러온 사람들은 왜 이 일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돈이 필요해서' '사랑으로'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봉사가 좋아서'라는 상투적인 답변들을 하고,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저런 그럴듯한 말을 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일하는 사람은 없는데'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때 드리스가  들어와 자기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으니 거절사인이나 빨리 하라는 말을 뱉는다. 거절을 세 번 받아야 생활보조금을 탈 수 있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솔직하게 내뱉는 드리스에게 필립은 묘한 호감을 가지며, 2주안에 제발로 나갈 것이라는 말로 드리스를 자극하여 오기가 발동한 드리스는 수습기간을 시작한다. 이후, 순전히 오기로 2주를 채울 생각이었던 드리스의 간병도우미로선 절대 부적절한 반응들이 속출하고 필립은 그런 저런 일들에 무관하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조언을 해주며 여러 에피소드가 일어나고 시간이 지나간다.

 

 어느날 , 24시간 호출폰을 지니고 있는 드리스에게 한밤중, 필립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달려간 필립의 상태는 숨을 못쉬며 괴로워한다. 그때 드리스는 필립을 들처안고 나가 휠체어에 필립을 실고 강변을 산책시킨다. 그리고 매일 클래식이나 고전문학, 오페라등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즐기는 필립에게 담배도 몇 모금씩 입에 대주고, 팝송에 맞춰 춤도추고..한마디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생동감으로 주변을 아연실책시키기도 때론 웃음짓게도 하며 뜻밖에도 아주 훌륭한 도우미로 필립과의 생활을 잘 해나가게 된다.

 

 그런데 필립의 변호사가 드리스에 대해 여러가지 조사를 했으니 그를 가까이 두지 말라는 말을 하며 특히 그는 연민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에, 필립이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마음에 들어한다. 드리스와 같이 있으면 나도 마치 보통사람같은 기분이다."  그의 말에 공감이 갔고.

 

우리는 누군가 우리와 다른 상태의 사람을 대할때 은연중에라도, 그 다름에 대한 선입감으로 분리시키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병시에도 기술적인 문제는 누구나 처음엔 서툴고 실수도 많치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곧 익숙히 잘 해낼 수 있는 업무이다. 그러나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은 의외로 힘든 일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문제는 신체의 장애뿐만 아니라 마음의 장애, 삶의 특수한 장애를 겪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대부분 그러하다.

 그래서 보는 내내 관객들은 드리스와 필립의 좌충우돌한 나날을 보며 웃음도 짓고 그러면서도 왠지 마음 한켠으로는 싸한 기분도 들고.

 

 흑인 빈민가 출신의 드리스에게 사고를 친 동생이 찾아오고 그 일을 해결해 주기 위해 드리스가 떠나고, 필립은 다시 새로운 도우미를 채용하지만 이미 드리스를 대신 할 도우미는 없어 이후 그의 날들은 더욱 신경질적이고 피폐해진다

.

 집사인 이본 부인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드리스는 필립을 차에 태우고 바닷가로 나간다.

 그리고 자기 대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준다며 자리를 비키고..그 자리에 나타난 사람과 함께 웃음 짓는 필립의 얼굴을 끝으로 영화는 별안간, 불이 나간것처럼 끝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고 하고 혹자는 '버킷리스트'와 함께 이야기도 한다.

 '버킷리스트'도 백인부자와 가난한 흑인과의 시한부인생들의 마지막 행복한 탈출을 그렸고, '언터처블'도 백인 백만장자와 가난한 흑인 백수청년간의 우정을 그렸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향해 달려들 가는 시한부인생이 아닌가.

 살아있는 지금 이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살아있음의 의미를 만나고 기쁨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내게는 오늘 이 영화를 보았던 시간이 마치 삶의 정지화면 같이, 깊숙하고도 몽롱한  마음의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던 그런 느낌이다. 특히 필립을 연기한 푸랑수아 클루제(근데 자꾸만 더스틴 호프만의 얼굴과 겹치는군)와 드리스를 연기한 오마 사이의 연기가 너무나 생생하고 충실해 아직도 그들의 웃는 행복한 얼굴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율리와의 행복한 데이트였다. 오늘 밤 꿈엔 필립과 드리스와 함께 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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