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하는 이카로스 - 20세기 서양 문학과 문화
박설호 지음 / 울력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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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폐된 소시민적 무관심과 무능력을 깨워 댄다.


‘20세기 서양문학과 문화를 기저(基底)로 한 예술비평이자 역사비평을 찾은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거나 아예 말하기를 중단한 사유와 언어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고 해야겠다. 저자 박설호 교수의 이 책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크리스타 볼프를 제외하고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아예 소개조차 되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이 발하는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책은 총 4부로, 14 편의 문학, 역사 평설로 이루어져 있다. 표제인 비행하는 이카로스(Ikarus)'의 신화는 2부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그것은 시대성과 개인의 갈망에 따른 동일 신화의 유형 연구를 기초로 인간 역사 인식의 전환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또한 더 이상 희망이나 이상에 대해 말하거나 꿈꾸지 않는 세계라는 이해에 터 잡은, 더욱이 현실이라는 주어진 조건에 반항하는 이들의 일탈에 눈을 흘기며, 혐오와 배제를 요구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여전히 희망으로서의 저항과 시대의 자기비판을 일깨우는 사유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아마 살아가는데 당장 필요한 도구적 지식에만 매달리는 오늘의 현상도 이러한 시선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지식은 개인의 이해를 떠난 공동체와 사회, 국가, 삶의 전반에 대한 어떤 사안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아마 이렇게 환경 순응적 인간이 된 사람들이 이룬 집단이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이지 않을까? 그 어떠한 비전도 없으며 오직 눈앞의 자기 이익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현재의 정치권력의 작태가 사회경제적 현안 문제에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요인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책의 1<망각된 독일 문학>을 여는 20세기 전반,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증오와 혐오로 뭉쳐진 비참한 시대를 살았던 독일 작가 ‘B. 트라벤은 내겐 생소한 이름이다. 1919년 뮌헨혁명정부의 주도세력으로 혁명재판소를 위한 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문인이다. 군주정을 옹호하는 귀족세력인 백위군은 바이마르 공화정 수립을 극렬하게 방해했다. 백위군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 대기를 하던 중 탈출하여 멕시코의 외진 촌 막에 은거하며 자신의 이름과 거주지를 숨기고 사회에 순응해 나가는 소시민적 인간 유형과, 신분증, 신원조회, 각종 증명서로 표상되는 국가의 통제와 감시체가 일상화되는 관료주의적 전체주의화에 혹독한 비판을 가했던 문명비판 예술가다.

 

B. 트라벤이란 이름에 대한 억측은 그의 사후에 미망인 로자 엘레나 루한에 의해 밝혀졌는데, ‘레트 마르트가 본명이며, ‘리처드 모허트, 여러 필명으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자신의 고정된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며,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활동한 이유는 그의 다음의 문장으로 명료하게 규명된다.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에게 사람들은 이력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례한 짓이다.” -25쪽에서

 

예술가의 이름은 반드시 권위적 선입견을 조장시키기에 궁극적으로 예술의 고독하고 어려운 정도(正道)를 배반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예술가의 명성에서 비롯되는 권위의식을 사장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것은 문화산업의 권력을 파행적으로 확장시키게 하고 거짓된 권위를 창출하는데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숨긴 이유이다, 공정한 비평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가혹할 정도로 자기 성찰을 되풀이한 고결한 정신을 지녔던 한 예술가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의가 사라진 오늘의 세계에서 단비(甘雨)를 맞이한 느낌이다. 예술가의 이력부터 찾아보는 감상가의 체제순응적인 무의식적 습관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 속에 위치한 존재들임을 환기시키는 체제 이익의 주체인 자본주의를 냉혹하게 갈파한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 백장미등을 남겼다. 이에 대한 소개와 비평적 독해는 책에 미루기로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작품 부상당한 소크라테스는 거짓에 숨어든 자의 진리를 말할 진정한 용기에 대한 비유로 많은 책들에서 인용되고 있는 국내에도 제법 알려진 작품이다. 브레히트는 기원전 43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던 소크라테스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그가 살지 않았던 기원전 480~477년 사이에 발생했던 페르시아 전쟁을 무대로 삼고 있다. 브레히트는 역사적 사실의 기술보다는 과거 속에 은폐된 어떤 주제상의 문제를 밝히는 것이 예술의 책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이 작품은 지배자들의 기득권과 이권놀음인 전쟁에 죽음을 불사하며 참전하는 소시민들을 길들인 독단의 이데올로기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한다.

 

아마 애국심이라는 맹신과 허위의식으로부터 심리적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는 맹목적 몽니를 허물기 위한 자기 인식의 전환에 대한 고뇌였을 것이다. 무지의 자궁으로부터 진리를 출산시키는 자로서의 소크라테스는 적절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소개에는 악처로 왜곡되어 설명되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를 진리를 발견하는 산파 역할의 주체로 재발견함으로써 선입견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의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소시민적 무심성과 무관심과 맹목성으로부터 어떻게 깨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의 표제이듯 저술의도를 관통하는 이카로스 신화의 시대적 장소적 변화에 따른 신화수용의 양상을 통해 시대적 갈망들을 비교분석하는 2장으로부터 주어진 역사적 상황에서 문학과 예술 작품이 인간 경험을 어떻게 오늘의 우리들에게 드러내주는가를 읽게 된다. 신화 및 역사비평가인 귄터 쿠네르트(1929~ )’역사는 신화가 변형된 어떤 형체로서 협의 가능한 마지막 신화라고 역사를 삼킨 신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그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에서 인과율의 어떤 사슬을 찾으려하고 합법칙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과거 신화에 나타난 고대 유형으로서 숙명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역사기술이란 신화에 봉사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93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신화적 의미를 부여한 제3제국이라는 파시즘의 발생과 형성과정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비참성을 수정하기 위해 파괴된 민족 신화를 재구성하는 것에서 반계몽적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보았던 이유일 것이다. 결국 그는 신화의 추상성에 내재한 교훈성과 날조된 허황됨, 그리고 가식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어떤 뜻을 존재하는 무엇으로 기어코 찾아내려는 인간의 조작욕구를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지적 야수로서의 인간은 끊임없이 거짓된 합리성의 가상에 맹종하려 한다.” -116

 

이처럼 역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효용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미묘한 신화를 창출한다(물론 이는 부정적 인식으로서 파시즘을 비판하기 위한 논거이다)는 사전 지식아래 이카로스 신화의 시대성에 따른 변조된 유형은 인간의 갈망, 쿠네르트가 지적하는 바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 장을 읽으며 한스 블루멘베르크()-이론의 역사적 수용을 통한 인간 사유의 변천기록을 떠올렸는데 아마 방법론의 동일 유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신화수용사로부터 인간 형상에 공통적이며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본적 변모의 발견 가능성을 지적했었다. 이카로스 신화의 간략한 원형은 이렇다.

 

이카로스는 아테네 출신의 기술자이자 예술가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다이달로스는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방법을 아드리아드네에게 가르쳐주었고, 아드리아드네는 연인 테세우스에게 전하였다. 이로써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살해한 다음 미로를 탈출. 미노스 왕은 이에 격분,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를 미로에 가두어버렸다.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 위로 비행했다. 의기양양해진 이카로스는 지나치게 태양에 근접, 밀랍이 녹아 떨어졌다. 이카로스는 추락하여 바다에 빠져 죽었다.  

- 121, 서양문학에 나타난 이카로스의 유형 연구에서

 

기원전 1세기 오비디우스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위한 비행에서 척도 내지는 절제 등이 관철되지 못했다고, 추락은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결과 때문이라 평가했다. 또한 변신 이야기에서는 청년 이카로스의 아버지에 대한 불복종으로, 조카 페르딕스를 질투로 살해한 아버지의 과거 범죄에 대한 응보라고 이카로스의 추락을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말년의 연작시 슬픔에서 자신의 비극적 고립을 이카로스의 처지에 비유하여 작가와 예술가가 겪는 삶의 고뇌와 해원이라는 주제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즉 고립된 예술가로 이카로스를 이해했다는 것인데, 한 인간에게 있어서도 동일 신화는 이렇게 다른 해석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화의 계통발생론적 갈등의 흔적을 담은 개방적 텍스트라는 발생 조건에 따른 욕구 변화로 초시대적 불변의 상을 읽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14세기 기독교 교부들은 이카로스의 비행(飛行) 오만과 치기의 돌출행동인 비행(非行)으로 만들어 기독교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한편 괴테는 파우스트23막에서 파우스트와 헬레나 사이의 아들로서 오이포리온(이카로스)을 등장시키는데, 파우스트의 이상과 헬레나의 아름다움이라는 두 극단의 특성을 중개하려는 존재이지만 그는 이를 융합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부모의 발 아래로 추락하는데, 자기파괴적 비상 욕구의 불가피한 실패성을 그려내려 했을 것이다. 20세기 초, 1차 대전 후 독일 작가 고트프리트 벤은 이카로스를 맹목적 애국주의를 표방한 비행사들의 신랄한 비판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으며, 1960년에 들어서서는 볼프 비어만에 의해 요절한 동료 혁명가 루디 두츠케의 비극적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불의한 권력에 포위된 노동 혁명가로 표상되기도 했다. 비극적 영웅으로 냉담한 세상을 미리 간파하지 못한존재의 상징이 된 것이다.

 

1560년경,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피터 브뤼헬(Pieter Bruegel)


어쩌면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뢰헬의 유화작품 <이카로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에 그려진 끔찍한 파국과 세상의 냉담성 사이의 위화감 표현만큼 오늘의 시대성과 맞닿아 있는 해석도 없을 것 같다. 화폭에는 세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어느 누구도 추락하는 이카로스를 주시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위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파국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 이들 소시민의 태도에서 슬퍼할 줄 모르는 무심함과 냉담함, 일상인들의 안이함을 지적하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슬퍼할 줄 모르는 무능력, 아마 오늘 우리사회에 팽배한 동료 시민의 죽음을 비아냥거리는 저 무례함과 무공감이야말로 이러한 무능력의 단적 현상일 것이다. 물신 숭배의 도구적 이성에 매몰된 현대인들은 진정한 인식을 위한 지식에서 너무도 멀어진 까닭일 것이다. 나는 죽더라도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 비상하는 수미일관한 모험가의 자세로서 이카로스를 읽는다. 오늘의 사람들은 이 비행과 추락을 과연 어떻게 해독하게 될까?

 

책의 3부는 독일 소설가 유렉 베커브론슈타인의 자식들을 역사적 범죄에 대한 수용의 실태를 살펴보게 한다. 나치의 패망이후 동서독으로 분리된 동독 진영에서 이뤄진 정부의 양태는 당대 한국사회의 해방이후 미군정의 양상과 흡사한 형태였음을 읽게 된다. 동독의 통치를 통제했던 소련은 정치, 행정, 사법, 경찰 등 정부요원을 나치 부역자들로 그대로 채워버린다. 결국 사회주의를 표방하였지만 국가권력의 행태는 나치의 파시즘이 그대로 연장된 것이었기에 동독 사회는 청산되어야 할 역사의 과오를 정리하지 못했다. 여기서 하나의 중대한 과제가 떠오른다. “자발적이고 처절한 자기반성의 과정을 통한 자기 잘못과 오류의 시정이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정의도 없다는 것을 역사는 실증한다는 것이다. 동독은 소위 회복적 정의가 실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동서독 공히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양측 모두 단 한 번도 나치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속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물리친 것은 독일인이 아니라 연합군이 무력을 동원해서만 가능했다.”는 이 준엄한 문장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비장하다. 진정한 청산을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일제 부역자에 대한 청산, 즉 동족을 배반하고 괴롭힌 친일 부역자와 그 후손들이 여전히 권력의 첨단에 서서 국가와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결코 역사에서 늦은 것이란 없다. 우리 또한 식민 조선에서 일제를 몰아낸 주체가 아니다. 미국의 무력에 의해 이루어진 해방이다. 동독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저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친일 부역자 무리의 처단을 감행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제 4부는 자연과학의 맹목적 욕구에 내재된 멈출 수 없는 갈망, 그리고 인간의 쾌락과 파괴 충동, 타인에 대한 폭력 충동의 동인인 경쟁 등 현대 인류사회를 장악한 비극적 세계관에 대한 거대한 환기를 말한다. ‘토마스 브라쉬7개 극작품과 시나리오, ‘크리스타 볼프원전 사고를 통한 이러한 과학 맹신주의의 일방성과 맹목성, 이상추구에 내재된 인류의 비극적 숙명을 일깨우는 글들이다. 결국 이 거대한 열네 편의 문화, 역사적 평설은 무지의 자궁에 갇혀 편협과 무감각, 무능력을 감지하지 못하는 소시민들의 안일성과 무심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일깨우려는 고뇌의 흔적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이 저작은 다른 시대와 장소의 범례들을 통해 우리에게 문제해결 능력을 연마토록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인간의 병적 성향,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처절한 자기성찰과 비판이 따르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이 보다 나은 삶을 생각하기 위해 첫 걸음을 과감히 내딛을 용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러한 자기반성의 출발점을 위한 인식 성장에 분명 가치있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이 사회는 이러한 언어와 사유를 말하지 않는다. 결코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언어는 주류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는 기득권적 금기의식 때문일 것이다. 체제가 가르쳐 주지 않고 은폐하는 것에 훨씬 거대한 삶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것들을 알 필요가 있다.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은 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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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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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는 72세 되던 해 그녀의 구술로 써진 물질적 삶에서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짧은 소회를 말하면서 있는 그대로 손 댈 수 없는 책들이 있다고 이 작품 부영사를 비롯한 일곱 작품을 열거했다. 어떤 비극성으로 똘똘 뭉쳐진 자신에게 출구를 열어주기 위해 불가능할 정도의 안간힘을 썼던 글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손 댈 수 없음이라는 문장은 이 소설의 가장 의미심장한 일종의 부재 언어(혹은 구멍 언어)’로써 이 소설의 한 발단이 되는 캘커타 외교 당국에 치명적이라고 간주되는 사건의 구체적 설명이 거부되거나 모호하게 언급되며, 궁극적으로 진술되지 않는 것의 의미와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라호르의 부영사에게는 재현 불가능한 실재인데, 때문에 라호르라는 실재의 지명은 상징으로서 상상계를 잇는 일종의 구멍이자 삭제로서 기능한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앉아 결코 풀어줄 것 같지 않은 욕망이나 죄의식, 죽음의 유혹과 같은 이상한 욕동(慾動)과 마주했다면 그 무서운 두려움과 떨림, 광기를 재현해 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혹자들은 말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은 출구 없는 비극성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터져나오려는 무엇에 대한 표현할 수 없이 차단된 고통의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는데, 아마 그것은 재현되는 순간 현실의 일상성 언어로 진부화되어 하찮음으로의 전락을 참을 수 없어하는 인물들의 극한에 가까운 절제된 언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인 대사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나,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인 피터 모건에 의해 써 지고 있는 갠지스강에 이르러 10년의 길을 멈춘 걸인 여인도 어떤 비극성에 의해 삶의 목소리가 막혀있다는 느낌에서 라호르의 부영사 장-마르크 드 아슈와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이들 세 사람에 대한 타자의 시선 - 익명의 소문이나 뒷담화, 혹은 소설 쓰기 - 에 의해 묘사되거나, 설혹 그들 자신의 말조차도 내부에 갇혀 터져나올 수 없는 그 어떤 목소리에 의해 차단되어 절제되거나 중단되어 발화됨으로 인해 부영사의 라호르 사건 진술서의 표현처럼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캘커타 프랑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백인사회와 자신들을 외부 세계와 분리하여 철책 바깥의 문둥이들, 걸인들로 형상화된 1930년대 부조리한 세계의 지점으로써 인도차이나와 인도의 대비로 상징되는 유럽 백인들의 왜곡된 시선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한 축일 것이며, 이러한 인종과 지역에 대한 불안과 불신의 심리와 더불어 계절풍으로 대변되는 이 외부화된 기후적, 질병적 질시만큼이나 적대시되는 부영사에 대한 갖은 소문과 추측들은 존재가 야기하는 지옥 같은 외로움이거나 삶의 모든 욕망의 기억이 마치 표백되듯 증발해버린존재의 마지막 모습인 광기에 대한 인식의 성찰이 또 다른 하나의 축인 것만 같다.

 

캘커타의 백인들은 철책 밖의 세계와 어떤 접촉도 시도하지 않으며 단지 글로, 전해들은 소문과 추측된 정보들로 그 외부를 이해하려 할 뿐이다. 특히 문둥병으로 상징되는 그들 백인사회의 외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부영사의 라호르에서의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들보부터 그를 소외시키거나 한 존재에 대한 왜곡의 정당한 수단처럼 활용된다. 이 백인 무리의 배타성은 철책 안에 자신들을 가둔 일종의 유폐(幽閉)여서 그들은 라호르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캘커타의 백인들에게 부영사는 라호르의 사건을 재차 설명한다. 라호르 그건 희망의 한 형태였다. 여기서 라호르라는 부재의 상징적 언어는 구체적 상상의 형상을 하게 된다. 샬리마르 정원에서의 총질이라는 파괴적 사건은 희망을 일궈내기 위한 하나의 폭발, 시쳇말로 새로운 세계를 위해 거쳐야만 하는 파괴였음을.

 

자신 안에 철저하게 유폐된 갠지스강 밤 아래 노래 부르는 걸인 여자, 파괴, 죽음이 녹아내리기를 기원함으로써 즐거운 행복을 느꼈던 부영사, 캘커타 대사관과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있는 백인무리들의 섬 속 별장을 오가며 유배자의 눈물을 흘리는 대사부인 안-마리, 이들 모두 오래된 상실의 고통으로 파괴되어 유폐된 인물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는 것일 게다. 파괴되지 않고는 결코 수리 될 수 없는 견고한 백인 사회의 부조리를 대상으로 한 깊은 고통의 앎(공감)에 대해서.

 

이들은 각자의 상징적 표상을 지니고 있는데, 유일한 단어 바탐방만을 말하는 갠지스강 걸인 여인의 밤 노래, “고독하고 음울하며 역겨운 행위에 대한 기억을 찢는 듯한 상처를주는 인디애나 송을 휘파람 부는 부영사, 권태와 습기처럼 이를 지워버리고자 할 때 안-마리가 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번역자인 소설가 최윤의 해설처럼 수리 불가능한 고통 앞에서치루는 어떤 비장한 전환을 향한 예고를 감지케 한다.

 

이 소설은 특히 뚜렷한 세 축을 담당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발하는 지극히 분산 파편화되고 절약된 언어들을 짜 맞추고 유추하며, 독자는 인간 존재가 겪는 고통의 깊이와 결코 스스로 부패하여 멸실되지 않는 견고한 백인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들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뒤라스 문학만이 주는 독특한 매혹이자 즐거움의 요소일 것이다. 상실과 파괴, 눈물, 그리고 욕망과 광기,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는 출구 없는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설명될 수 없는 재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어떻게 그것을 전달하려 애썼는지를 어렴풋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고통을 일깨우는 사건들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며 존재적 변화를 겪는다.” - 옮긴이의 말에서

 

附記

텅 빈 테니스장을 둘러싼 철책에 기대어진 채쓸모없이 버려져있는 대사 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의 여성용 자전거 이미지는 뒤라스의 물질적 삶, 몸의 말에 대한 그 어떤 고통스러운 믿음을 떠오르게 한다. 내겐 이 소설의 모두를 배제하고라도 건지고 싶은 소설 속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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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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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계 버전의 천로역정(天路歷程)?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긴 제목을 한, 그리고 이의 후속편 5책을 합본으로 엮은, 작가의 말로 지금 읽고 있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책이 바로 이 두툼한 1,235쪽의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사두고서 첫 몇 페이지를 읽고는 책장에 꽂아두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에 별 한 개의 평점을 준 독자들의 푸념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소회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시 꺼내들어 내처 읽게 되었다.

 

한 독자는 이걸 읽느니 전화번호부를 다섯 번 읽겠다며 참을 수 없이 재미없어 치미는 화를 표현한다. 또 다른 독자는 인생이 너무 지루하고 말이 안 되게 흘러가는 것 같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며 황당함과 지루함 그 자체라 혹평하기도하고, 어느 독자는 이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오기로 씨름 할 수밖에 없었음을 토로하며 지루함과 인내의 독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재치 넘치는 푸념과 비아냥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를 상쇄할 만큼의 유머와 즐거움, 잘난척하는 인간 지성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해학의 문장들로부터 막대한 분량의 부담을 지울 수 있다, 더구나 가까운 지방을 히치하이커로 여행하려해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거니와 상상 속 은하계를 책값만 지불하고 여행하는 것은 실익이 훨씬 큰 거래일 것이다. 본디 이 세계와 삶이란 것이 권태요, 끝없는 환멸 아닌 게 있던가?

 

아마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만물의 영장이라며 분별없이 으스대는 인간의 지적 오만을, 그 어리석음의 무한함을 까발리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를 노골적 경멸을 동반한 진지한 언어로 그 치부인 약점을 들춰내면 그 반발이 눈에 선했을 것이고, 해서 선량한 표정으로 풍자와 해학으로 우회하여 참을 수 있게, 나아가 미소 지으며 반성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꾸며냈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슬프고 씁쓸한, 무수한 모순 덩어리인 인간과 인간사회의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것일 게다. 지구가 찰나(刹那)에 파괴되어 사라지는 어느 특정 목요일의 한 장면을 보면 이렇다.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지구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행성 지구를 파괴하려는 보고 행성의 공병함대 우주선단이 도착하여 지구인에게 철거실행을 고지한다. 이때 지구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야단법석을 떨어대자, 보고인은 알파 켄타우리 행성 지역개발과에 지구 시간으로 50년간 공지했는데 알지 못한 지구의 야만적 생물체인 인간의 부주의를 나무란다. 이 장면은 인류사회의 관료제적 부조리와 인간의 지적 야만성을 비난하는 이중의 은유일 것이다. 익살과 해프닝과 유머로 긴장을 낮추며 피식거리며 웃다가 그 이면의 진실에 표정을 단속하게 하는 정말 뼈 때리는 이야기인 것이다.

 

인류와 지구 종말의 대참사를 묘사하는 실질적 문장은 오직 갑자기 지구에 고요가 흘렀다.” 이다. 무슨 긴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저 사라졌을 뿐이니 말이다. 이 작품의 시작 문장도 이러한 관점의 읽기를 암시한다. 이 행성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행성에 사는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작은 녹색 종잇조각(달러)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는 애당초 나무에서 내려오지 말았어야 하며, 그 자체가 엄청난 실수였다는 의견이 확산되었다고 은하계의 고등 지적 생명체들 세계의 시선을 전하기도 한다. 급기야 바다에서 나오지 말았어야했다고까지 한다. 우주의 주인인 듯 행세하는 인간에 대한 자기 직시를 요구하는 조크이며, 신랄한 비난을 담은 유머다. 이러한 시작 문단의 해학적 분위기는 계속되는데, 가히 발칙하기까지 하다. 어느 목요일 한 남자가 이제는 사람들끼리 좀 잘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나무에 못 박힌 지 2천년이 지난 어느 목요일의 끔찍한 대참사가 이야기의 발단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인류와 지구는 파괴되고 사라졌다. 유일한 생존자인 아서 덴트는 친구인 베텔게우스 행성 출신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은여히로 표기함)이동 조사원인 포드 프리펙트 덕분으로 보고인 우주선에 탑승하게 되지만 곧 우주 공간에 버려진다. 공기가 없는 우주공간에서 생물체가 살아남을 무()에 가까운 확률에서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로 운항하는 우주선 순수한 마음호()‘에 구조된다.(책은 기꺼이 이 불가능속에서 마침 그곳을 지나갈 우주선의 확률을 제시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측면에서 즐거움을 주는 요소인데, 인류 지식으로 이해 불가능한, 아니 황당하기조차 한 말장난으로 꾸며진 미래 과학에 대한 무한한 환상의 자극이다. 포드와 아서를 구조하는 순수한 마음호의 추진장치가 발견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범블위니 57 서브-중간자 두뇌의 논리 회로를 강력한 브라운 운동 생성기에 매달려 있는 원자 벡터 작성기에 연결하면 제한적 불가능 확률을 조금 얻을 수 있다나 뭐라나 하며 상상을 무한하게 키워내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성찰과 보잘 것 없는 우주적 미물로서의 철학적 사유라는 굵직한 주제가 은닉되어 흐르며, 수십만 수백만 광년의 은하계 행성들을 누비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의 초대를 통해 인간 지식의 초라함이라는 무지를 일깨운다. ‘순수한 마음호()‘는 은하계 항성 솔(태양계)의 반대편 나선 팔 다모그 행성에 주재하는 은하제국 정부의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로 운항되는 최초로 개발된 우주선을 탈취한 것인데, 그의 두뇌를 지배하는 그 어떤 욕망에 의해 마그라테아라는 미지의 행성으로 향한다. 여기서 우리들을 자극하는 케케묵은 물음이지만 그 명쾌한 답이 부재한 이야기가 출현한다.


마그라테아는 한때 행성을 만들어 은하계의 부를 끌어모아 흥성했던 행성이다. 그러다 은하계 행성간의 전쟁으로 경기가 위축되어 다시 은하계의 부가 모아질 때까지 긴 잠에 든 행성이다. 여기서 아서는 슬라티바트패스트라는 한 늙은이와 조우하게 되는데, 두 번째 지구를 만들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물론 첫 번째 지구도 마그라테아 거주자들이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지구의 존속은 하나의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험이 막 종료되기 5분 전에 보고인에 의해 지구가 파괴되었기에 다시 실험에 착수하여야 되는 수고가 생긴 것이라는 얘기다.

 

그 사연은 이렇다.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시원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삶과 우주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궁극에 대한 물음을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컴퓨터 깊은 생각에게 묻게 된다. 깊은 생각은 답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곤 그 답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칠백오십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궁극의 물음에 대한 종국적 해답을 기다리기로 하고, 이윽고 그 시간에 이르러 깊은 생각은  무지무지하게 엄숙하고 침착하게 42”라고 답한다. 여간 실망스러운 답이 아닐 수 없다. 작업 결과에 당황한 이들은 다시 묻는다. 칠백오십만 년의 작업결과가 겨우 그것이냐고. 컴퓨터는 말한다. 제 생각에 문제는 여러분이 본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궁극의 질문을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그 해답의 의미 역시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궁극의 질문?, 궁극적 해답을 위한 궁극의 질문? 깊은 생각은 이를 위해 새로운 컴퓨터는 미묘하게 복잡한 유기체가 작동 행렬의 일부가 된 컴퓨터, 즉 유기체 스스로가 새로운 형상을 취하고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서 천만년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의 물음에 대한 답이 42! 라는 이 우습기조차하지 않은 칠백오십만년짜리 해프닝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려는 것일까? 더욱이 이 조차도 인간보다 높은 지적 생명체인 생쥐가 지구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었다는 전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궁극의 질문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 생쥐의 실험 대상에 불과했던 인류에 대한 조롱이다. 저 광대한 은하계를 여행해보라! 그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뭐 그렇게 으스대는가? 따위의 비난이기만 한 걸까? 이 장면에 대해서도 그럴싸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는, 우주 역사의 원인과 결과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알 턱이 있겠는가? ~, 인생이란 그런거야라는 자조적인 운명론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인가?

 

내게는 매우 중대한 조연으로 보인 인격을 지닌 로봇 마빈의 존재인데, 순수한 마음호의 탑승자들에 조력하는 로봇이다. 마빈은 인간을 비롯한 지적 생명체들과 이들에 의해 제작된 모든 자동화된 시설들, 지능체인 컴퓨터들의 작동과 행위, 그 사고(思考)의 얼개에 대해 시니컬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유일한 지구 생존자인 아서를 궁극의 질문을 하기 위한 새로운 컴퓨터 제작을 위해 그의 뇌를 깍뚝썰기해서 매핑하려하는 위기가 발생한다. 아서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블라굴론 카파 행성의 경찰들이 공격을 가하다 갑자기 그들 전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로부터 벗어난 아서 일행은 순수한 마음호로 돌아오는데, 그때 차가운 먼지 속에 고개를 처박고 누워있는 마빈을 발견하게 된다. 마빈 뭐하는 거야?”, “절 아는 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순수한 마음호 옆에 나란히 서있는 경찰 우주선을 가리키며 마빈은 저 우주선이 자신을 미워했다며 우울한 이유를 설명한다. 너무 지루하고 우울해서 경찰 우주선의 컴퓨터와 자신을 연결하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자 그 컴퓨터가 그만 자살해버렸다는 것이다. 마빈이 은하계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사유한 것, 그 궁극의 결과는 생존(작동)의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니었을까? 아서 일행을 공격하던 경찰들이 갑자기 사망했던 이유가 바로 마빈의 허무주의에 세례를 받은 경찰우주선 중앙 컴퓨터의 죽음이었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마빈의 활약을 주목해야하는 충분한 동기가 되는 장면이다.

 

은여히에는 은하계의 주요 문명 단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뚜렷하고 확연한 세 단계를 거치는데, 그것은  생존, 의문, 세련의 단계로서, 어떻게, , 그리고 어디의 단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먹을까? -> 우리는 왜 먹는가? ->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와 같은 질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지금의 인류는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일까? 여전히 우리들은 왜라며 물음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이 단계를 넘어선 그 어떤 의문도 불필요해진 여유 넘치는 풍요와 세련됨의 세계로 이행 할 수 있을까? 40여 년 전에 방송되고 쓰여진 이 오래된 코미디-SF 작품은 여전히 그 상상 속 사유와 인문학적 물음의 측면에서 실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인간이 지각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토대이론은 아마도 다중우주와 시뮬레이션 이론이 배경인 것 같다.

 

아무튼 혹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렇게 지루해서 인내를 요구하는 것만도 아니며, 전화번호부만큼 의미없는 숫자들이 배열된 그런 책도 아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앎이란 단어의 과장된 확장이며, 부당한 일반화다. 오히려 물을 수 있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이 더욱 명쾌한 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 자신이 평소 지니고 있던 체화된 의문들을 담고 있을 때 그 의문의 양적 질적 크기만큼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 시대의 지배적 습관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분명 많은 상상의 사유(思惟) 지대로 안내할 것이리라 믿는다.

 

이 우주가 무엇을 위해 있고, 또 왜 이곳에 있는지를 누군가 알아낸다면

그 순간 이 우주는 당장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더욱 기괴하고 설명 불가능한

우주로 대체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 더글러스 애덤스,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참조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인물에는 유일한 지구 생존자인 아서 덴트가 등장한다. 이 이름은 천로 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쓴 존 버니언(John Bunyan)’에게 아내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두 권의 책 중 하나인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의 저자와 같다. 때문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는 이 구원을 향한 순례길에서 이 작품을 착안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은여히는 행성 지구를 넘어 은하계까지 그 시야를 넓힌 범우주적 구도의 길을 향한 걸음을 쓰려했다는 데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사회의 무수한 부조리와 무지를 깨우치게 하며, 이 행성과 저 행성을 필사적으로 이동하며 영광의 문에 이르고자하는 여정을 담고있는, 그야말로 20세기판 天路歷程이라 읽어도 됨직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이 글은 리뷰어의 생각일 뿐이지 그 어떤 기성의 해석과는 다른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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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하는
기세춘 지음 / 바이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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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독에 머무는 주석서의 범주를 넘어서 정치론, 논리학, 철학론, 평화론, 공동체론 등 사상에 대한 논의가 풍성한 묵자 이해를 위한 努作이다! 민중 철학과 진보주의 시조, 묵자로부터 평등의 정치(兼愛)와 의로움의 정치(義政)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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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키아 여자의 웃음 - 이론의 원 역사 모나드 인문학 시리즈 1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모나드 출판사 옮김 / 모나드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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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영면(永眠)에 들 때까지 독일 뮌스터고전문헌학과 철학교수로서 위대한 은유 속에 압축 변형되고 정교화된 인류 사상의 그 독특한 과정을 탐색했던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몇 안 되는 국내 출간저술이다. 이 저술을 만나기 전에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출중한 은유의 사상사에 매료되었었다. 그 책의 서문에는 모든 문화에서 개념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것, 즉 세계, ,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은 오랫동안 조탁되는 이미지 가공 작업 쪽에 이양되어왔다는 글이 있다. 바로 이에 해당되는 저술이 이 책이다. 고대 천문학자의 우물 추락이라는 우화를 화두로 하여 시대라는 시간 경과에 따른 수용사를 통해 대표되는 사상가들의 입장과 사유를 추적한 철학적 사건들의 조명이고, 인간 인식의 변화사라 할 수 있겠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을 읽는 것은 늘 즐겁다. 아마 천박한 지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동일 사태에 대한 그 무수히 변화되는 인간들의 관점들이 푸짐하게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화두(話頭)는 기원전 6세기 이솝우화(Aesop‘s Fables)<점성술사(The Astrologer)>의 이야기다.

 

 【《Aesop‘s Fables, 'The Astrologer(점성술사)'

 

사실 이솝우화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이 책의 시작이 되는 원()이론이 아니다.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원 이론으로서의 이야기는 이것을 변주한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선고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사태를 투영하여 수정한 이야기다. 이솝우화의 내용은 <한 천문학자가가 별을 관찰하기 위해 밤 외출을 하곤 했는데,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하늘로 돌렸을 때 발밑에 놓인 진흙구덩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안에 빠졌으며, 고통 속에서 도와달라고 외쳤다. 이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고선 당신은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노력하던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고 지나쳤단 말이요?’>라고 힐난하였다는 지극히 짧은 일화다. 1927년에 출간된 에밀 샹브리판본을 번역한 국내 번역서에는 매우 표피적인 교훈이 주석으로 달려 있는데, 나는 아주 크게 웃었다. 물론 실소를 하였다는 얘기다. 거창한 일을 한답시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상의 작은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실 이 주석은 기존 질서에 대한 매우 순응적인 기계적 해석일 것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이야기에서 한참 비켜나간 것이기에 이런 읽기도 있다는 것으로 이 얘기는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이솝 우화에는 익명의 천문학자와 또 익명의 행인만이 등장할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철학의 역사에 한 기원을 부여하는 이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운명의 부조리함, 즉 아테네 시민의 인식과 철학자의 인식과의 괴리에서 오는 몰이해, 그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사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의 발견이었다. 그는 1세기 전부터 전해오는 우화의 등장인물에 구체적 면면을 부여한다. 익명의 천문학자는 밀레토스의 탈레스로, 행인은 재치있고 예쁜 트라키아 하녀가 된다. 천체의 궁창에 전념하던 탈레스는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우물에 빠지고, 트라키아의 하녀는 그를 보고 웃는다. 그분께서 코앞과 발밑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볼 수 없었던 가운데 하늘에 있는 것은 열렬히 알고자 하셨습니다.”(테아테토스174 AB번역)


표지 뒷면 이미지: 우물에 빠진 천문학자를 바라보고 트라키아 하녀는 웃는다

 

플라톤이 그려낸 탈레스와 트라키아 하녀의 이 이야기가 원 이론의 자리를 잡는다. 이름없는 한 천문학자가 플라톤에 의해 밀레투스의 탈레스라는 원철학자로 명명된 것이다. 플라톤은 밀레투스 철학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철학적 실재론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과 남을 웃도록 한 것이다. 즉 밤하늘 세계 관찰자의 기괴함과 그가 실재와 부딪친 충동 반경에서 구경하는 구경꾼의 웃음을 묘사함으로서 당대의 근본적 사태인 스승의 죽음을 순교자로 발견하려는 참을 수 없었던 시대성의 반영이며, 그때까지 중심이었던 자연철학의 시선을 인간사회를 향한 전향으로 설정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인데 이로써 하늘의 공간적 원거리 도달은 철학적 관심에서 사라진 것이다. 트라키아 여자는 당대 그리스 시민들처럼 천문학자의 권리로써 추구하는 이론적 순수성을 오해하는 사람들의 표본으로 등장시켰던 것이다. 이제 이것은 원 이론으로서 표준이 되어, 이름께나 날린 사상가들은 개인적이고 시대적인 입장에 따른 성공 스토리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최초의 인물로부터 이 이론에 종지부를 찍는 최후의 인물이 되고자 이야기의 요소들은 탈락과 장식적 유입, 수정과 변경, 변조를 통해 시대성과 도덕적, 사상적 이익을 드러낸다. 그것은 천문학자 탈레스의 원철학자로서의 반영여부이며. 트라키아 여자의 역할 변화이거나 배제를 통한 인식 투쟁이다.

 

이같이 탈레스 일화의 수용사(受用史)는 이천 년을 가로지르며 이론의 역사에서 무엇이 본래적으로 우스운 것인지의 작업을 수행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기원전 3세기 초의 냉소주의 철학자 비온을 거치고 키케로와 에피쿠로스를 지나 기원후 1세기의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과 우물에 처박힌 천문학자를 죽임으로써 사라졌던 중세를 통과하며 11세기 다시 부상하는 천체관측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에 부여된 두 유형의 의미를 쫓고, 몽테뉴, 볼테르, 포이에르바하, 훔볼트, 니체, 하이데거가 수용한 이야기에까지 이른다. 플라톤의 원 이론을 표준으로 불과 5세기 남짓이 지났을 때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의 텍스트와 해석을 읽다보면 인류 지성의 퇴행이 어떻게 저질러지는지를 봄으로써 염오(厭惡)에 빠지게도 한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이야기에서 탈레스를 아예 배제해 버리는데 발밑에 무엇이 놓인 줄 알게 하는 것이 하늘을 아는 일보다 절박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주 내부 표면에 대한 이교도적 성격으로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을 영원한 구원의 중요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던 까닭이다. 그리곤 재빠르게 탈레스를 지워버리고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다. 교부 철학자 테르톨리아누스는 원철학자 탈레스를 우물 추락 즉시 악의 뿌리에 박힌 자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트라키아 하녀의 관념에서 철학적 세계관 입장을 조롱하는 자리에 빨간 밑줄을 그어 기독교 교리의 정당화에 이용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Quod supra nos, nihil as nos), 하늘의 재앙과 세상의 운명과 비밀을 읽으려 하지 말라. 발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제 천문학자의 이론인 일식은 기독교 박해에 대한 신적인 기호의 경고여야 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노여움의 공포(公布)이다. 그래서 천체의 경과는 오히려 예외적이었음을 확증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조짐이 된다. 천문학자는 사라졌고, 별을 우주 운명의 점성술적 위상배열로 인정하는 대신에 운명의 돌파구를 위한 기호로 보려했기에 더 이상 하늘을 관찰할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인류의 지성이 정체되고 퇴보하는 데에는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압박만 있으면 아주 쉽사리 저질러 질 수 있다는 것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텍스트와 해석을 반대자를 확정하는 위장 전투로 삼는다. 저마다 세련된 입장의 해명으로 원 이론에 대한 무지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너희는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다 구멍으로 처박아 들어갔다. 누가 하나님인지를 모르면서 탐구하였다.”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 변증론자의 이 무시무시한 문장은 이성과 철학, 학문을 질식시켜버린다.

 

중세의 해가 저물 즈음인 11세기에 이러한 교부 철학의 갱신이 움트기 시작한다. 다미아누스의 전능에 대하여에서 천체 관측자의 우물 추락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철학자 탈레스는 여전히 익명으로 머물지만, 트라키아의 하녀는 대지의 여신 테메테르의 슬픔을 위로하고 기분을 불어주는 조력자로 엘레시우스 창립 신화의 구성원인 이암베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의 의례적 기능을 담당하던 이암베로 하여금 트라키아 여자의 조롱을 위안과 기쁨과 결합시킨 것이다. 주인의 불운으로 생겨난 교훈을 시적으로 공연하는 하녀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다미아누스는 이암베로 하여금 다음의 대사를 읊게 한다. 나의 주님은 발밑에 있는 똥을 모르고 별을 보려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은 상황 극화를 위한 장식으로 처리하고, 이암베를 통해 철학을 짓밟아 으깨고 신성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시간이 경과함에 따른 인간들의 윤색을 열거하다보면 이들에게서 역사적 주인공 자리를 성취하려는 야심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을 역류하여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오늘의 타산적 이해관계의 이데올로기를 관전하게 하는데, 아마도 블루멘베르크의 지적처럼 그는 스승의 대화록 테아테토스를 읽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창작해 냈는데, 아마도 당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가리키는 가난 때문에 탈레스를 욕하고 있었던 연유도 있었을 것이다.

 

천문학 지식에 근거한 올리브 풍작을 사전에 알게 된 탈레스는 올리브 압착기를 전부 확보하여 올리브 수요가 일어나 큰돈을 벌었다는 일화다. 철학자도 원하기만 하면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이를 통해 철학의 목표는 돈이 아니며, 어떤 물질적 혜택도 도출하지 않는 순수 무결점의 이론적 업적을 증명하여 탈레스를 보호하려는 필요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탈레스는 그가 일구었던 유산을 철학에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이 올리브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나 지혜에 대한 조롱의 이야기로 윤색되어 다시 등장한다. “소유할 수 없으면 쓸모없다.”, 그런가하면 14세기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술에 취한 뮐러 이야기에서 천문학자의 추락이야기를 변조하여 쓰고 있다. 미래를 예견하기 위하여 별들을 응시하였다. 그는 거기서 시궁창에 빠졌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고 당대 점성술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이야기의 원 의미는 탈색되고, 자신들의 상황에 유리한 용도로 변형시켜 상대를 비난하는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몽테뉴는 또 어떨까? 에세(Esse)212절에 원이론에서 필요한 트라키아 하녀의 증언만 남기고 천문학자는 사라진다. 그리고 하녀도 더 이상 웃지 않는다. 이 도덕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에게는 가설이나 추측보다 많은 것을 약속하는 바로 발밑 땅을 위해 포기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탈레스는 우물에 빠지지도 않을뿐더러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그녀는 확실히 그에게 하늘보다 자기 자신을 보라고 충고했습니다.”라고, 하녀가 현장에서 벌인 행위를 선의로 간주하는 이야기로 변질된다. 볼테르, 니체, 하이데거 등 이러한 변주된 이야기들이 계속되며, 시대의 사상적 진화와 철학자 개별의 사유를 쫓을 수 있으나 이쯤에서 그들의 구체적 이야기는 멈추어야겠다.

 

끝으로 니체의 한 걸음 더 나간 기원전 6세기에 벌어졌던 신화와 철학 대결의 탐지로 마무리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도리이겠다. 탈레스는 존재의 통일을 직관하기 위해 밤하늘의 도시에서 등을 돌렸고, 별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 지점에서 물에 빠졌다.” 철학의 시초 역사인 원이론의 이야기에서 니체는 사물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결정적 공포를 환기하기 위한 자기 신뢰의 철인을 발견한다. 탈레스의 정치적 좌절로 인한 신화에 대한 도시국가의 관계로 읽어내는 독법에서 가히 초인의 철학자를 거듭 발견하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독창적인 은유의 독법을 지닌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은 역자의 해설처럼 우물과 하녀를 오가며 우리들의 부족한 앎을 대체하여 우리 자신을 비웃을 수 있도록 이끈다. 또한 철학으로부터 실패하는 방법을 배우고 유리한 지점에서 자빠짐으로써 웃음을 은유적 상상의 토대에 세울 수 있음을 발견토록 한다. 수많은 사유의 실험과 이론의 발전을 한 권의 책으로 누린다는 것은 항시 유쾌한 일이다. 오늘 우리들은 탈레스의 추락과 여자의 웃음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쓰고 싶을까? 여기에 우리 시대의 숨어있는 진실, 욕망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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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많은 탈오자와 비문은 열악한 번역 출판시장에도 불구한 귀중한 저술의 출간이라는 고마움을 상쇄할 정도로 심각하다. 적극적 개정이 뒤따라야 할 성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흠결은 정말 아쉽다. 별 다섯 개를 받아야 할 위대한 저술임에도 별 네 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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