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대학살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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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포용하는 사회영역의 포괄 범위에 따라 거시사와 미시사로 구분한다. 즉 정치에서부터 경제와 법률, 문화, 과학 등등의 영역을 아우르는 역사를 거시사, 우리네가 늘 접하는 통상의 역사이고, 이들 영역에서 하나의 영역에 세밀한 연구를 수행한 것을 미시사로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18세기 프랑스 미시사이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 달랑베르가 살던, 소위 계몽주의가 대두하던 시기의 오늘날 프랑스라는 단일의 영토국가로 불리는 지역의 사람살이를 추적한다.

 

그것은 농민의 목소리가 배어있는 민담이고, 어느 인쇄공의 이야기이며, 중산계급이라 자부하는 어느 슬기롭지 못하고 아둔한 부르주아의 설명서이고, 문필가들의 사상 검증을 위해 명부를 작성한 하급 경찰 조사서이며, 어느 독서가의 도서주문 편지이다. 이를 통해 당대 프랑스의 사고방식을, 즉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들의 지성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서술을 망탈리테(mentalite)의 역사라 부른다. 사회문화 현상의 바닥에 자리잡은 인간집단의 무의식, 시대의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의식, 다시말해 표면적으로 떠올라 가시화되지 않아 인지되지 않았으나 실제 광범위하게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마더구스 이야기와 같은 당대 민담이나 도서 주문 편지, 경찰의 조사서, 중산계급임을 자부하는 인물이 쓴 도시 설명서 등 아카이브(문서고)를 각기 바탕으로 한 여섯 꼭지의 미시사 연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무관해 보이는 각각의 이야기들의 저류에 흐르는 당대 인간들의 정신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사를 우리는 직조해 낼 수 있게 된다.

 

미시사가 아름다운 것은 마치 저 위에서 조망하듯 지배자의 총합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거시사의 오만함이 아니라 당대 세계의 다수자인 대중이라는 존재들의 진실된 삶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아주 유사한 그 평범성에 내재하는 속성들, 그들의 삶의 방식과 지혜를 바라보는 일은 새로운 깨달음이며 즐거움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인 <고양이 대학살>의 논의에 앞서 저자는 역사적 문서로서의 민담을 우선 살펴본다. 이것은 이유가 있는 배치인데,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민담이 이야기하려는 했던 것들을 시대의 사회상 반영으로 해독하여 왜 고양이를 대학살해야 했는지, 그 저의(底意)를 보다 내밀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담은 밑도 끝도 없이 임의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항시 기존 사회질서 속에서 경험된 것들의 어떤 공통적 근거를 표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민담은 사실상의 역사적 문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는 루이 14세의 권위주의적 문화정책 입안자로서 농민 문화에 일말의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페로의 민담집처럼 기득권자의 교만한 훈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농민판본에 의거한 원색적이고 날것인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빨간 모자, 엄지 소년, 신데렐라, 잠자는 미녀, 장화신은 고양이,... 등 이야기를 독일과 프랑스의 서로 다른 판본을 비교 분석하며 18세기 대중인 농민들에 깃든 의식, 그 본질을 길어 올린다. 프랑스의 민담은 동일한 소재의 이야기에서 독일과는 아주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독일의 민담에서는 콩나무를 기어올라 닿은 공상의 세계에서 거인을 죽이지만 프랑스인들은 현실적 배경에서 기지와 교활성을 통해 거인을 처단한다. 빨간 모자역시 소녀는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끝나며 불가해하고 비정한 세계에 어떠한 포장도 하지 않는다. 신데렐라의 프랑스 판본인 작은 아네트에는 영양실조를 두드러지게 묘사하여 이를 제외한 판본들과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 민담의 주인공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소원의 권리를 취득했을 때 고작 음식을 말하는 것에 공감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농민들의 상상 속에 어른거리는 일차적 즐거움은 식욕이 고갈될 때까지 먹어보는 것이었고, 실상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진실이다.

 

민담의 도처에 등장하는 그 많은 계모와 의붓자식의 박대, 연약한 아이에게 초인적인 일을 던지고 끝내놓으라는 명령들의 이야기는 실재하는 당대의 현실의 반영이었다. 18세기 여러 문헌들은 프랑스인의 40%10세 이전에 죽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성직자와 귀족은 빠진 채 농민에게만 부과되던 악명 높은 타이유(taille)부터 기근과 흉작으로 인한 빚더미와 이에따른 노역으로 극빈으로 내몰려 길에 떠돌던 절박한 영혼이 수백만에 달했음의 투영이기도 하다. “보잘 것 없는 몸이 보잘 것 없이 죽었다.”, 따라서 모든 곳에서 계모가 급증했으며, 고아와 의붓자식이 방치되고 넘쳐났다.

 

세계는 냉혹하고 마을은 야비하고 인류는 악당으로 가득 차있다면 농민 대중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프랑스인의 독특한 세계관은 이를 도피로 해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고 그 세상에 대처하는 전략을, 그 경계표시를 민담으로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네들의 이야기에는 어떠한 우둔함에도 동정을 보이지 않으며, 멍텅구리라는 단순성은 죄악의 전형이며 치명적 죄악으로 인식했다.

 

그들에게 순진함이란 재앙으로 가는 초청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은 고되고 동료 이웃의 이타심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 작은 것이나마 지키기 위해서는 명석한 두뇌와 재빠른 기지가 요구된다는 것, 도덕적 고결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기에 냉소적 초연함이 민담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미몽에서 깨어날 것! ‘장화 신은 고양이의 꾀바름은 이렇게 출현한다. 결코 추상을 다루지 않으며 현실적 삶의 기지와 그 경계를 경고한다. 그렇게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모욕을 가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라블레식 웃음으로 파안대소하며 현실의 삶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동력을 얻으며.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주제는 이렇게 이어진다. ‘작은 사람들(menu peuple)’큰 사람들(les gros)’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역사의 표현으로서 인쇄소 직공들인 노동자들의 폭동이야기가 된다. 18세기의 노동자와 부루주아 사이에는 일과 음식과 잠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삶의 요소에서 커다란 운명적 불균형이 놓여있었다. 고용과 해고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어져 일주일후에도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을 만큼 폭력적이었다. ‘퇴니스공동사회와 이익사회에서 산업화 이전 사회를 미화하여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당대는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하는 공동사회였다.”고 말이다. 이런 낭만적 헛소리를 학교에서 배우고 자랐다. 삶이 비정한 죽음과의 투쟁이었음에 눈을 감는, 지배권력을 위한 학자의 글이 여전히 득세하는 오늘의 세계 또한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은 생세브랭 가() 자크 뱅상 인쇄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인쇄소 직인이었던 니콜라스 콩타가 전하는 일화이다. 당대 분위기는 이렇다.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이미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속한 종()이었다는 점이다. 계급의 분할 기준인 특징은 부르주아는 일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인쇄소 주인부부는 실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며 늦게까지 잠을 자며, 견습공들은 물론 직인과 장인(匠人)조차도 주인이 기르는 고양이가 먹고 남은 쓰레기 같은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하늘이 바라보이는 천장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로 몸을 붙이고 가까스로 불편한 잠을 자야했다. 더구나 밤마다 울어대는 주인부부가 기르는 25마리의 고양이로 인해 짧은 수면조차도 불가능했던 이들은 지혜를 짜낸다. 주인부부가 자는 본채의 지붕 위에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서 주인부부의 잠을 방해한다. 이윽고 주인의 부인은 이들에게 고양이를 처치하라고 명령한다.

 

인쇄소 직공들은 이 명령이 떨어지자 부인이 가장 아끼는 고양이부터 시작하여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이 살육의 향연 이야기에는 무수한 상징이 가득한데, 이들 노동자의 행위는 그래서 더욱 재미있다. 혹자는 동물에 대한 잔혹행위라고 오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학적 환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테지만 고양이 죽이기는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중문화의 깊은 조류중 하나의 표현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들 문화의 주제를 가지고 유희를 함으로써 부당하고 불의한 부르주아를 드러나지 않게 모호하게 공격한 것이다. 당대에 고양이에게 부여한 의미는 마법, 광란, 오쟁이 지기, 학살, 유혹, 강간, 살인...등이었다. 그들은 사회질서 전체를 조롱하고 축적된 분노를 슬기롭게 발산한 것이었다.

 

인쇄소 사장 부인이 애지중지하던 고양이를 제일먼저 처단함으로써 그녀의 약탈적 성욕에 은밀히 혐오와 멸시로 답했으며, 한편으로는 오쟁이 진 사장의 멍청함을 조롱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일종의 성()과 유혹의 카니발은 폭력의 언저리에 억압된 감정을 희롱했던 유머의 한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 능욕을 가함으로써 그들은 한바탕 무릎을 치고 배를 잡는 라불레식 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인쇄 노동자들의 이러한 폭력성 분출에는 다가오는 민중 봉기의 징후가 서려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1789년 대혁명의 씨앗은 이렇게 농민, 노동자에게서 싹트고 있었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지만 18세기 프랑스 사회는 갈라치기의 잔혹함, 냉혹한 배제, 참담할 정도의 가렴주구가 만연한 사회였음을, 이러한 양상이 광범위하게 대중의 의식에 확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자신을 부르주아로 인식하는 인간은 당대의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1768년 자신이 살고있던 도시 몽펠리에를 자부심 가득한 어조로 쓴 도시설명서에 나타난 한 견실한 중산 계급 시민의 가치관과 관념을 해독한다. ‘몽펠리에 퍼레이드라는 도시의 대행사에 대한 세밀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되는데, 행진 순서에 따라 참가한 인물들에 대한 칭호, 특권, 수입, 기능까지 일일이 열거하여 도시사회의 집합적 질서와 인간 희극의 복잡성과 모순의 극치를 보게 한다. 이 부르주아는 행진의 순서인 명예와 품격이 실질 권력과는 일치하지 않음을 도처에서 드러내며, 신분을 구별하는데, 부르주아는 제 2신분으로서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반면 제 3신분인 평민은 본연적으로 악하고 방종하며 폭동과 약탈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들 위치에 제한시켜야 되며, 아니면 추출하거나 교수형에 처하여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르주아인 자신의 신분을 정의할 때조차 적대적 이웃 신분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함으로써 부르주아의 권위를 정당화한다. 특히 제 3신분의 부르주아화()를 극도로 경계하며 혐오감을 보이고, ‘떨거지 출신이라 비하하는가 하면, 자율적 선출을 통한 정치적 집합의 움직임에 경악하기도 한다. 특히 제3신분의 아이들에 대한 교육 기회를 맹비난하며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그들에 대한 교육기회의 폐지를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부유하고 잘 먹고 깔끔하게 입으며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 기뻐한다. 동료 시민을 분류하려 시도하며 자신의 도시성에 행복해하는 18세기 중산층의 인간상을 바라 불 수 있는 특별한 사료이다.

 

이 같은 몽펠리에의 한 부르주아의 관념은 앞선 농민과 노동자의 분노가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물론 당대 부르주아의 정신이 모두 이러한 이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의 존재가 공개적으로 표명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 폄하할 이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계층 간의 분열이 가진 자들에 의해 극단적으로 획책되고 보다 악질적으로 누적되고 있었음이다.

 

이것은 한 서적거래 수사관의 500명에 이르는 문필가들의 조사보고서에 의해 당대 지식 사회 계급간의 관계성을 통해 또다른 차원의 확대된 갈라치기 된 사회상을 엿보게 된다. 파리의 이 하급 경찰관은 지식인을 걸러내어 명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일종의 스토리텔링을 포함하는 전기적 단평(短評)의 성격을 지닌, 즉 문학적 감수성과 관료적 질서가 기묘하게 결합된 서류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대 문필가들의 지위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는가, 그런 것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의 실존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대체 이러한 명부가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18세기 프랑스 문필가, 즉 글쓰기는 독자적 직업이나 별개의 신분으로 여겨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적상의 독점과 해적 산업으로 책으로 수입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필수적으로 보호의 그물망, 일종의 후견인을 갖지 못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실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소설 마농 레스코의 작가 아베 프레보(Abbé Prevost)’는 법원 관리로서 원장 신부 생활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문필가로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몇 푼의 돈이 나오는 직업을 줄 수 있는 후견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후원자의 시혜에서 나오는 후원은 문필 공화국의 일용할 양식과 관련해서 가장 중대한 요인이었다.

 

단지 먹고사는 것도 그만큼 용이하지 않은 시대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문필가들은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그 권위를 이용해 다시 누군가를 도와주는 그러한 커넥션으로 유지되는 체제였다는 점이다. 만일 이러한 체제의 중심 권력을 풍자하거나 조롱하면 바로 이 사상검증의 공권력에 의해 바스티유로 직행하게 된다. 이 기본원리를 벗어난 문필가들은 살기 위해 불가피하게 부수적 활동을 하게 되고, 이는 곧 감옥행으로 이어지곤 했으니 1789년 이전에 바스티유는 급진적 선동의 상징적 의미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볼테르를 비롯해 극작가 샤를루아 등이 귀족들의 하인에게 매질을 당하거나 죽도록 얻어맞는 일이 빈번했던 것처럼 문필가란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재주에 불과했으니 이들이 기존의 지식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재구성하려 했던 백과전서파로 불리는 계몽주의자들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을까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의 걸음이었을 것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지식의 나무-세부화된 인간 지식의 체계>, P340에서


디도로와 달랑베르를 중심으로 하는 백과전서의 내용을 오늘의 시선으로 읽게되면 그 지루함으로 왜 이 저술이 그토록 역사성을 지닌 책일까 물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식의 낡은 질서를 해제시키고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 새로운 금을 그으려고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지식의 경계선을 새롭게 그으려 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엄중한 지식이 지배하던 낡은 지식의 분류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식의 분류를 정립하려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즉 금기(taboo)를 건드리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 우리들이 배우는 지식의 분류체계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은 어느 시기에나 기득권의 잔악한 방해를 받게 된다. 사실 그 어떤 질서가 고정된 진리라 하겠는가. 모든 질서는 임의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도록 만든 어쩌면 최초의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이렇게 민담에서 시작하여 백과전서의 이야기를 통해 18세기 프랑스 민중의 역사를 파헤친다. 농민, 노동자, 부르주아, 귀족과 왕정의 이데올로기, 무의식과 현실의식이 어떻게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마침내 민중의 봉기로 이어지는 과정의 한 정면들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 여섯 번째 미시사를 여는, 독서가의 도서주문 편지를 통해 읽기의 실제로부터 당대인의 생각하기를 도출한다. ‘문화=부패라는 문학적 문학의 유형을 만들어내 교양인에 호소했던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신엘로이즈에 열광했던 18세기 프랑스인들의 내밀하고 진솔한 감정의 메마름을 엿보게 된다. 진실하고 순수한 영혼에 대한 갈망, 그러한 영혼과의 연결에 대한 희구, 저자의 내면까지 관통하도록 장려하는 독서의 이야기가 마지막 장을 수놓는다.

 

지배적 가치에 대한 반기를 들었던 루소의 소설이 1800년 이전까지만 70개 판본이 출시될 정도의 베스트셀러였다니 당시 대중의 정신은 이미 혁명에 가닿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갈라치기, 자기와 다른 이들의 배제와 억압, 다시금 69시간 노동을 외치는, 그리곤 공기업의 사영화를 통한 시민 삶의 빈곤화를 종용하는 퇴행적이고 사악한 권력을 마주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이 18세기 미시사는 많은 깨달음과 지혜, 그 길로 통하는 어떤 모티프를 발견하게 한다. 고양이 대학살의 이야기를 반복하며 호탕하게 웃는 노동자들의 유머가 유독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냉소적 초연함으로부터 기지와 지혜를 도모했던 18세기 프랑스 대중으로부터 모처럼 진짜 인간들의 역사를 배운다.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역사가 지시한다. 혁명, 민중의 봉기는 기어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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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김정훈 옮김 / 호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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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하고 익숙한 이 자명한 ‘죽음‘, 그러나 필사적 반감에 휩싸이게 하는 이 ‘비-존재‘의 성찰 불가능한 앎의 사유로의 초대는 어쩌면 인간 앎의 필연적 통과지대가 아닐까요?, 앎의 축복을 향한 이 시대 최고의 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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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관 -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로 만나는 문화 절정기 조선의 특별한 순간들
탁현규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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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언제까지 지속했을까?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실천이 시작되었을까? 회화 또한 시대의 정신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성리학에 의한 엄격한 가치를 백성에게 강요했던 이들 예속된 비루한 정신세계로부터 탈출은 숙종조인 170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음을 화원들의 그림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들 화가의 그림은 중요한 사료(史料)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 문화의 절정기인 숙종(肅宗)에서 정조(正祖)까지 태평시국을 반영한 화원들의 회화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오랜 사슬을 끊고 조선 고유의 산수와 풍속을 그리기 시작한, 그야말로 조선 사람과 그네들의 풍경, 습속과 삶의 형상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듯하다. 복색도 중국의 것을, 하다못해 묘사되는 동물도, 산천도 중국의 것을 그린 것만을 고집했던 이 철저한 굴종의 정신을 벗어나는데 조선 19대 임금에 이르는 시간이 요구되었다는 것은 사대주의에 뿌리를 내린 기득권 사회의 자기 보위라는 끈질긴 탐욕 때문이었다 할 것이다.

 

책은 전시관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1전시관은 풍속화와 산수화를 통해 평민과 기생, 사대부와 사대부가 여인들, 사미승을 비롯 노비에 이르기까지 당대 인간들의 삶의 실체 속으로 뛰어들게 하고, 2 전시관은 임금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축하하는 궁궐의 성대한 잔치 기록화인 숙종의 <기해기사첩>과 영조의 <기사경회첩> 대비를 통해 관료사회의 엄격한 형태와 복색과 문물, 가치관의 변화를 읽는다.

 

조선 그림의 양대 산맥인 산수화와 풍속화를 모두 조선화(朝鮮化)시킨 화가가 겸재 정선이다.”

 

중국화를 벗어나 조선의 것, 진짜배기 조선의 진경(眞景)을 그리기 시작한 인물이 정선이고, 이는 진경풍속을 완성한 조영석(1686-1761)으로 이어지고, 평민 풍속의 종결자인 김홍도(1745-1806)와 양반 풍속의 끝판왕인 신윤복(1758-1813?)”으로 대미를 맞이했다. 그렇다고 이들 네 화가의 그림만이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신윤복의 부친인 도화서 최고의 화가 일재 신한평, 긍재 김득신을 비롯 기록화를 그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초상화 등을 통해 당대의 화풍이나 그네들 그림의 화법을 기웃거리듯 감상할 기회도 마주할 수 있다.

 

시대의 풍속에 대한 이해들(정선, 김홍도, 신윤복 중심으로)

 

1 전시관에서는 무엇보다 진경 조선화를 연 정선(1676-1759)의 그림이 강한 인상을 준다. 율곡 이이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려진 정선의 그림 <사문탈사>는 그의 나이 66세와 80세에 그린 두 점이 남아 봉은사로 추정되는 정경과 화가의 가치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절 입구에서 도롱이를 벗는 이이와 그를 마중하는 스님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66세의 그림은 이이가 타고 온 소의 그림이 중국의 물소이고 복식도 중국색이 여전하다. 이것이 80세의 그림에서 조선의 황소로 조선의 전형적 복색으로 바뀌었다. 12년 사이에 사대부들의 가치 변화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예증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변화는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漁樵問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무튼 정선 그림의 회화적 우수성을 이해할 감식안이 없는 내게는 이러한 저항적 새로움의 태도가 보다 의미깊게 다가온다.

 

평민 등 하층민 삶의 정경을 주로 묘사했던 김홍도의 그림들은 그에게 머물렀던 시선, 평범성에 대한 태도를 해독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살기좋은 태평성대라는 무비판적 관점이나 음풍농월, 자신의 여유로운 삶의 향유로만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무 짐을 가득진 소년이 황소에 올라타 지나가는 장면을 노동이 주는 고단함에서 중간에 맛보는 여유로움이라 저자가 해석하듯 소년의 고됨을 미화하는 그림 <기우부신(騎牛負薪)>을 기득권적 자세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묘사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그린 이들의 풍속화가 정치의 방향을 가늠하는 표시로서의 가치도 있었을 것이다. 즉 통치 교과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홍도의 그림은 머리를 갸웃거리게 한다.

 

신윤복, <이부탐춘> 그림 일부


반면 혜원 신윤복의 그림은 이와 달리 비판적 의식, 풍자를 통한 시대의 비판적 정신을 발견하게 한다. 그의 회화 소재의 많은 것들이 실외인 길거리이고 시냇가이며 설혹 울타리 안()이라할지언정 마당이다.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지는 공간들이다. 그것은 당대 기득권자인 양반들의 퇴폐성이고, 수절을 명분으로 여인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질서에 대한 과감한 반기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그의 회화는 사회 계층들의 의복은 물론 각종 장식물들을 고증하고 재현하는 중대한 자료일 만큼 무진장한 당대 삶의 다양성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여인들의 일상생활을 속속들이 기록한 유일무이한 화가라는 점에서 어쩌면 페미니즘의 가장 앞선 징후를 엿볼 수도 있다.

 

사대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부탐춘> 여인의 봄날 한 장면은 그 노골성과 민망함의 극대화를 통한 연출의 강렬함으로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부패한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이나 계급이 지닌 처절한 고통이 양반가 인물들의 놀음을 그린 <임하투호(林下投壺)><납량만흥(納涼滿興>과 대비되어 화가의 엄혹한 비판정신을 읽게 된다.

 

궁중 기록화 - 숙종, 영조 2 시대의 공적 기록화

 

궁중 밖인 백성들의 일상에 대한 그림과 달리 궁중 기록물인 공적 기록화는 지배계급의 가치변화를 탐색할 수 있는 좋은 사료라 할 수 있다. 책은 사대부의 경우 정2품 이상의 문관으로 70세 이상이거나 임금의 경우 60세면 입소할 수 있는 조선 관료사회의 가장 영예로운 행사를 그린 숙종과 영조, 두 시대에 그려진 기사첩을 통한 물질과 정신사(精神史) 변화의 발견이다.

 

기로소 행차 그림, 숙종시대


기로소에 들어가는 사건을 그린 두 기록첩에는 등장인물은 물론 물건들이 빠짐없이 표현되어 있어 조선의 철저한 기록사회임을 엿보게 된다. 특히 이 그림에서 오늘은 소실되어 없어진 경덕궁(궁궐)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지금은 광화문 교보빌딩이 서있는 한양 중부 징칭방으로 일컬어지는 기로소가 있던 자리였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여기서도 성리학 우주관에 지배되고 있던 왕실 의례가 숙종에서 영조라는 25년의 시간에 느슨하게 변화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오행 순환의 상징인 성리학의 오방색(五方色)이 사라진 것이라든가, 여인의 모습이 일체 보이지 않던 숙종조의 기록화와는 달리 영조대에는 기생과 무희가 궁중에서 사대부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모습은 사소한 변화가 아니다. 남녀유별이 점진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실상이다. 한편으로는 정 2품 이상의 기로신(耆老臣)인 고관대작들의 행차에 사용되던 가마의 변화라던가, 엄격한 품계의 상징물이었던 정 1품 상계에게만 적용되던 파초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미 영조대에 이르러 관료사회를 유지하던 견고하던 품계질서에 작은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을 추정할 수도 있다.

 

기로소 행차 그림, 영조시대, 가마에 바퀴가 달렸다


조선 문명의 절정기였던 18세기 조선의 회화를 통해 당대 정신사의 변화와 가치관의 점진적인 교체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선도하고자했던 예술가들의 실천을 엿보며 오늘 우리네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21세기 우리의 미술은 어떤 부패한 사회정신을 향해 어떠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책무를 각성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국면에서 시대가치 전환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를 완성했던 7인의 화가를 둘러보며 미술과 미술가의 숭엄하기조차 한 반영을 배우는 기회가 된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대중적 시선에서 필요한 핵심적 물음으로 옛 선조들의 의식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소박한 앎을 조금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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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출판사 창비 출간 예정인 이유리 작가외 5인의 학교괴담 앤솔로지인 스터디 위드 X가제본에 대한 감상글입니다.


다섯 달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수능 출제 방침에 혼선을 야기하는 무책임한 권력의 목소리로 가뜩이나 지치게 만드는 폭염 더위가 어린 학생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즈음이다. 경쟁에 내몰리고, 주변에서 가해지는 각양의 압박, 그리고 알록달록 널린 유혹을 인내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환경이 에워싸고 있다. 지친 심신에 휴식을 줄 시간조차 없는 청소년 학생들이 이 소설 선집을 읽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앤솔로지의 이야기들은 위로가 되고 공감의 목소리로 평온한 휴식의 기회가 되어줄 터이다.



수록된 여섯 작품은 어느 학교건 으레 하나쯤은 지니고 있는 학교괴담을 중심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몸을 으스스 떨어댈 만큼 괴기스럽거나 잔혹성을 표방하는 그런 선정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다. 고래로 전해오는 처녀귀신 이야기가 현생의 억울함과 불의를 호소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였듯, 학교 괴담 또한 그곳에 존재했던 정당치 못한 어떤 사태에 내재된 고발을 품고 있을 것이다. 혹은 실현되지 못한 소망의 안타까움이나, 죄책감, 조롱과 모멸을 동반한 폭력, 강요되는 부당한 억압에 대해 항거할 수 없었던 취약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이의제기와 같은 도덕적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에워싸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그 표현 방식을 떠나 애틋한 마음이 앞선다. 여섯 작품 모두 상이한 소재와 테마를 전하고 있지만 특히 나푸름 작가의 하수구 아이는 학생들의 집단화된 폭력성의 점진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위 왕따라는 집단 따돌림의 형태가 보편적 행위처럼 광범위하게 번져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기성권력인 어른들이 왜 구체적 시정을 위한 정책적, 사회구조적 개선방안을 내놓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무엇보다 부모의 권력과 부가 아이의 학교권력으로 이어지는 이 시대의 추악한 세습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하수구 아이에서 화자(話者)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한 상황을 떠올리며 자신이 회피하려한 것의 정체를 마주하고 죄책감을, 친구를 감싸지 못하고 집단 폭력에 무관심의 형태로 동조했음을 뉘우친다. 누군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한 아이에게 결점이나 모욕이 될 언행을 시작하고, 이것을 본 주변의 아이들에게 대상이 된 아이에겐 무언가 결점이 있어 당할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존재치 않았던 결점이 대상의 것으로 굳어지고, 이것이 일상화되면서 집단은 의식적이고 악의적 따돌림, 폭력을 행사한다. “‘하수구에 사는 아이’. ...아이들은 그 애가 지나가면 코를 잡고 과장되게 얼굴을 찌푸렸으며...” , 화자는 그 아이의 집을 알지만 그 아이와 같은 취급을 받을까봐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고 집단에 동조하고 만다. 집단의 불의를 시정할 용기를 지닌다는 것이 물론 힘겨운 일이다.

 

아마 이러한 양태에 대비되는 작품으로 조진주 작가의 그런 애의 주인공인 예나는 진정한 친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배우가 되려는 소망의 의욕이 앞선 나머지 과도한 몸짓과 치장으로 급우들의 비난과 조롱, 모멸을 당하는 친구 솔희의 노력을 감싸고 그녀에게 중단 없는 우정을 보낸다. 자칫 무너지거나 빗나갈 수 있는 친구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음을. 네게는 저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아니라 너를 진정 이해하는 친구가 있음을.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주의력 깊은 눈을 요구한다. 타인을 알기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인간들로 넘쳐나고, 또 세상은 그렇게 이끌고 있다. 네 주위는 내가 밟고 디뎌야 할 하찮은 경쟁의 무리만 있다고. 권여름 작가의 영고 1830과 이유리 작가의 스터디 위드 미는 이러한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영고 1830은 지역 내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영흥고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자로 시작하는 고등학교가 여럿 있지만, 소위 명문대 진학에서 압도하는 영흥고만이 영고로 불린다.

 

이 학교에는 섬뜩한 괴담이 지역에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1학년 830번 학생은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석차 순으로 반 배정과 번호를 부여하는, 즉 모욕을 아이들에게일상적으로 강요하는 이 학교에서 1830은 곧 꼴찌를 뜻하는 표상(表象)어다. 주인공 희준은 중학교 성적이 우수한 측에 속하지만 영고의 입학은 왠지 주저하게 된다. 자신이 1830이 되어 불행의 주인공이 될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나 영고의 교사인 아버지의 강압으로 희준은 영고에 입학하고 반배치 고사를 보게 되지만 행여나가 현실이 된다. 근심과 우려는 아이를 떠나지 않는다. 희준은 학교의 상징이자 불행의 전설 속 나무가 있는 장소를 마주하면 명치끝에 매달린 통증이 사라지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 장소에 이사장실이 있어 누군가 그 앞에 서있는 것이 거슬린다고 엄금한 곳이다. 그러나 희준은 그곳만이 유일한 위안의 장소이기에 고통이 몰려 올 때면 반복적으로 찾는다. 이런 쪼다 새끼를 봤나....작살로 물고기 잡는 원시인처럼 이사장은 지팡이로 희준 몸을 여기저기 억세게 찔렀다. .... 8반 놈이지, .” 소설이 끝나가는 장면에서 한 학생의 죽음에 대한 아무런 연민도 없이 주절거리는 이사장의 대사는 그야말로 호러가 따로 없다. 황천 가는 관짝이지 뭐였겠어, 그게. ...호방하게 웃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오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들의 현주소이기에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매양 뻔뻔하고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일말의 성찰도 없는 부패한 의식의 어른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유리 작가의 스터디 위드 미는 영고 1830과는 그 궤를 달리하며 성적(成績)지상주의에 내몰린 아이들의 혼돈에 찬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만연한 성적 경쟁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한의 경쟁심에 포획된 아이들의 어두운 심리, 그리고 성적이라는 진부하고 퇴색한 표상을 넘어 돌출적으로 비어져나가는 실태로서 온라인상에 번성하는 선정성의 관련성을 엿보게 한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아는 <스터디 위드 미>라는 브이로그 영상을 운영한다. 어느 날 수아의 영상에 유령이 악의적 모습으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연은 이를 수아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한다.

 

마침 짝 윤서의 필통에서 저주 인형을 발견하게 되고 소연은 이것을 수아의 영상 속 유령과 연결 짓는다. 마침내 수아에게 이 사실을 전하지만, 수아의 대답은 정말 가관이다. 소연아, 이젠 단순히 공부만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시대가 아냐. 성공하려면 유명해져야 돼. 돈이건 명예건 일단 유명해져야 따라온다구.” 속된 말로 어그로를 끌기 위해 합성한 영상임을, 아마 소연이 수아의 얼굴이 이제 소름끼치게 무서웠다고, 귀신들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고 하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지금 아이들을 이렇게 내몰고 있는 우리 사회, 이 사회의 교육 현실은 잘 못되어도 한참이나 잘 못된 것 같다. 인기, 권력, 부를 성공이라는 언어에 담아 이를 향한 무한 경쟁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가르치는 사회는 확실히 빗나간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누군가에게는 흥밋거리로 소비되지만

누군가에겐 절실한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된다.”

 

윤치규 작가의 카톡 감옥은 중학교 내내 동급생 병세 등으로부터 지속적 괴롭힘을 당했던 준우가 이들을 피해 멀리 외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비대면 수업으로 시작된 팬데믹 시절의 어느 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학급 단체 카톡방에서 반 친구 도상현으로 추정되는 'D‘라는 계정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의 중학교 시절 괴롭힘 이야기를 들려주고, D는 준우의 복수를 해주겠다고 나선다. 한 번 들어오면 절대 나갈 수 없는 채팅방”, “카톡 감옥에 들어 온 것을 환영한다.” 아마 이 신선한 소재의 독특함이 소설적 재미를 더하지만, 동료의 괴롭힘이 얼마나 잔혹한 폭력인지를 등골이 서늘하게 깨우치게 하는 작품이라 하면 부족할까?

 

끝으로 은모든 작가의 벗어나고 싶어서는 교사 미진의 첫 사랑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학창시절의 친구 우리에 대한 고백되지 못한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다.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 또 너냐?” 칠판을 보고 선 미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채는데, 소설의 이 시작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라는 반복과 보지 않고서도 아는 존재는 누구일까? 아마 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지닌 의미를 발견하는 읽기를 통해 이 작품의 애틋한 감성에 공감을 끄덕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동료 인간을 범주화, 대상화해서 편협하고 악의적인 이미지를 덮어씌워 다름을 틀림이라는 부정의 존재로 낙인찍어 파괴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회는 인간 모두를 파편화, ()인륜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불신과 경계가 팽배한 사회에서 그 어떤 공존과 유대와 화합이 싹틀 수 있겠는가? 아이들이 처한 오늘의 환경이 낳은 이 무수한 학교 괴담들은 비뚤어진 이 사회의 반영일 것이다. 가장 익숙한 학교가 아이들에게 무서운 곳으로 인식되는 이 현실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독특하고 신선한 이 젊은 시선의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공포담과 어울려 재미와 진실의 무게를 함께하며, 더위에 무거워진 우리의 심신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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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 소설 문학동네 플레이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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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활용하는 기술에서 자기가 해야 하는 것,

언제 그것을 해야 하고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는 행복하다.”

- 플라톤 법률에서

 

작가의 호흡에 한 순간에 사로잡혀 홀리게 되는 소설이다. 한 때 수학천재로 불렸지만 프랑스혁명사에 필이 박히면서 문과로 전향한, 그래서 불문학을 전공한 이로아는 학부 동료가 잘나가는 네덜란드계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FWIS에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쟁심에 허공에 펀치를 날리듯 지원했는데 합격 통지를 받는다.

 

입사 3개월 만에 한국 지사장 뤼카스 휘스먼의 개인 보조 분석가로 발탁되어 거대조직 FWIS를 위해, 휘스먼의 지도하에 수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쥐어짜내며 화려하게 경력을 이어나간다. 즉 삶의 매 순간마다 진심을 다해, 허세가 극에 달한 미치광이처럼 헌신하지만 6년차에 이른 어느 날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나고, 이제 자신으로부터 더 이상 쥐어짤 것이 없어지자 버려진 것임을 깨닫는다.

 

이로아는 프로젝트에 치여 무력감이 몰려 올 때면 사내 정신과 상담의로부터 약을 처방받아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거닐며 시간을 견뎌내 오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초고연봉의 글로벌 노예로 살아왔음을 감지한다. 발칙할 정도로 독아론(獨我論)적 삶을 살아온 소위 잘 나가는 삶의 본질을 알게 된 인물은 다시금 자신이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덕질 끝에 도달한 깨달음, 자유란 없다, 원래도 없었고, 발명된 적도 없었고, ...., 자유란 완벽한 불가능성, 즉 인간은 전부 노예임을 상기한다. 그래서 독아론적인 인간, 곧 신이자 노예인 자기 삶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휘황찬란한 화려함과 고급 부대시설, 하물며 약 처방대신 대처법으로 쇼핑 중독을 처방하는 그야말로 경제 사정에서 어느 만큼 해방된 환경에 놓여있는 삶을 쫓게 된다.

 


두 백화점의 VIP고객이 된 이로아는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자 소비를 축소하는 대신 돈벌이를 확대하기로 결정하는데, 이 제약없는 사고와 행동에 미묘하게 미끄러지듯 매혹되어 코를 석자는 빠뜨리게 된다. 그녀는 세계 뉴스에 감춰진 시그널을 꿰뚫고 원유 3배 레버리지 ETF에 투자하여 자신의 증권계좌에 찍힌 102억이라는 형이상학적 숫자를 바라본다. 이미 빠져들만큼 충분히 세련된 서사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마치 이미 지나온 이야기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본격적 행보를 시작한다.

 

다 잊고 이젠 나도 나 만의 삶을 살아가야겠지

가족으로부터, 회사로부터도 벗어난....”

 

과연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자유란 걸 찾기 위해 도달 한 곳, 오직 영원한 여름의 세계”, “오직 느낄 것, 느낌만을 따르고 그것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는 듯한 리조트 타운 시타 델 마레(Cita Del Mare)가 펼쳐진다. 기후변화로 열대 지역이 된 제주에 들어선 미국계 호텔 체인의 위용과 금발의 드레드 머리, 올리브 빛 상채, 오렌지색 반바지 수영복과 맨발의 백인 남자 등 과잉의 위선적 부를 전시하듯 돈(money)질을 제법 한 풍경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줄거리는 이쯤에서 멈추어야 할 것 같다. 충분히 넘쳐나는 부()가 그저 무심히 배경을 차지하는 가운데 빼어난 생김새와 옷차림의 남녀, 짐짓 예술가인 루마니아인, 우연인지 다시금 모여든 뤼카스와 전 정신과 담당의() 여인까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며 이 낯선 지대에서 펼쳐지는 자본의 제국을 꿈꾸는 인간들, 그리고 그 과잉의 쾌락을 향해 치닫는 군상들의 한 판 게임이 펼쳐진다. 아마 소설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라면 사건이라 할 이로아에게 나타난 소녀의 유령, 그리고 소녀의 목맨 죽음의 발견은 이로아 주변의 인물들과 얽히고설켜 현실인지 망상인지, 펼쳐지는 몽환적 풍경과 어울려 의심의 지대로,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 세계의 지저분한 방종의 현실로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문득 미셸 푸코의 쾌락의 도덕적 문제 설정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인간 욕망이란 본래 잠재적으로 과도한 것으로 이 힘에 어떻게 맞서고, 제어하며 적절한 관리술을 확보하느냐가 바로 도덕적 문제라 설명한 문장이다. 아마 김사과의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어떤 과잉에 대한 절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배경들 모두,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것들을 초과하여 넘치고 있다는 인상이 주는 부도덕함이 지속하여 내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지역 공무원인 제주의 일개 국장이란 인물이 몰아대는 호화요트,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고가의 단독 콘도, 그리고 지방권력과 결탁한 거대 자본과 예술의 더러운 유착들의 이면에 가려진 악마적 욕구들이 마치 몽상처럼 흐른다. 신이 된 돈과 쾌락의 무절제함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이 소설은 지금 우리네 사회의 도덕적 문제를 보다 촉진된 지적 사고를 통해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작가는 추악한 인간들을 처치하는 데 보다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바캉스 소설이란 제목처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여름날, 아마 많은 독자들을 열광케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지만 이 작품 또한 단연 올해의 화제작으로 추천한다.

 

자연은 인간 안에다 항시 정해진 목표를 넘어서고자 하는

초과와 과도함이라는 필연적이고 위험한 힘을 심어 놓았다.

여기서 도덕적 문제는 출발한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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