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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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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랜 주저거림 후에 얻은 연인과의 삶, 그리고 뒤안길에 세워진 아내, 긴 인생길을 걸어 궁극에는 오롯이 회한만 남겨지는 것일까? 걸어오면서 가졌던 많은 감정과 경험은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일까? 작가의 수필같은 잔잔한 문체와 사실적 묘사는 이내 독자의 감성을 몰입시킨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기, 우리시대로 1960년에서 1970년대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부모님의 소망에 끝내 저항치 못하고 이루어진 전족을 한 전통적 시골 아낙을 아내로 맞이한 쿵린, 그는 군의관이다. 아내 수위와는 같이 살지 않는다. 그리곤 간호장교인 우만나와의 애틋한 인연이 시작되고 그녀와의 만남은 아내와의 이혼을 종용케 한다. 군법률에 따라 아내와 18년이상의 별거가 인정되면 이혼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매년 아내와의 이혼을 위해 고향법정에 아내와 서지만 아내는 법정에서 이혼에 동의 하지 않는다.

18년만에 얻은 이혼의 승인과 연인 만나와의 결혼이 이루어진다. 법제도와 도덕율등 사회규범에 순응하는 주인공 쿵린의 우유부단과 소극적인 심성은 연인 만나에게 커다란 형벌 이상이었으리라. 오랜 기다림끝에 만나는 사랑하는 남자 쿵린과 비로소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당시 중국의 이성 결합에 대한 사회적 제도와 그 시대 인간들의 관습이 안타깝고 낯설지만, 그러한 삶속에서 피어나는 연인들의 건조한 듯한 감성의 흐름은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내 수위와 이혼하고 새로운 결혼이 시작되었을 때 만나는 이미 4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수위와 쿵린 사이에 유일한 자식인 딸 쿵화도 18살 아가씨로 성장했다. 결혼할때까지 쿵린과 만나는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만나는 그런 중년의 남자를 기다렸다. 만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쿵린에게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도덕적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아내 수위는? 새로운 결합으로 쿵린과 만나는 들뜬 결합의 시간을 갖는다. 만나의 집착적인 섹스는 그녀의 설움으로만 느껴진다. 애처로움과 그녀의 많은 날의 고통의 보상심리이리라.

그러나 쌍둥이가 태어나고 인생에서 가장으로서의 일상생활을 중년의 쿵린은 비로소 겪게되고 그 기다림 끝에 얻어진 그의 선택인 여자, 만나는 심장질환으로 오랜 삶을 계속 할 수 없게 된다. 일상에 지친 쿵린의 자기연민에 휩싸인 내면의 대화는 이기적이게만 비친다. 명절을 앞둔 어느날 옛아내 수위와 딸 화가 있는 기숙사로 찾아든다. 모처럼의 가정으로서의 평온을 느끼는 쿵린,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생에 스스로 힘이라도 넣는 듯 큰소리로 명랑하게 외치는 만나의 목소리, 지치고 늙은 남편이 돌아오리라 기쁨에 겨워하는 수위의 생기가 마지막으로 교차한다. 이제 쿵린은 일상의 번민에서 삶의 기다림을 이해하는 걸까?

기다림은 누구의 기다림이었을까? 연인을 위한 만나의 기다림, 언제가 돌아오리라 믿는 수위의 기다림, 이혼이 목적이 되어 버렸던 쿵린의 이혼에 대한 기다림? 사랑을 얻기 위해 매마를 대로 말라버린 만나의 기다림과 그녀의 죽음으로의 이행은 한 여성의 삶에 깊은 연민을 가져다 준다. 지극히 중국적인 사건과 사상, 삶의 의식과 이해의 방법이 세련된 필치로 잔잔하게 펼쳐진다. 오랜만에 진지한 순수 문학작품과 같이했다는 느낌이 상쾌한 충만감을 그득 불어넣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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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성당 1
일데폰소 팔꼬네스 지음, 정창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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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민중의 삶과 자유에 대한 감동의 대서사시이다. 지중해의 에머랄드빛을 온통 감싸안고 까따루냐의 한 언덕에 자리한 산따마리아성당, 넉넉한 가슴을 모든 인간에게 내어주는 민중의 안식처가 그들로부터 지어지고 있다.

작품은 14세기 중세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주된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교회와 왕의 권력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그래서 민중들의 삶은 한낱 그들의 소도구에 불과한 그러한 세상이다. 작가는 대지의 종이자 귀족의 종인 그리고 운명의 종일 수 밖에 없었던 민중들의 진정한 자유를 향한 인간의 진실성을 쫒는다.

교회의 권위를 앞세운 성직자들 이면의 악취나는 탐욕과 왕과 귀족들의 끊임없는 권력욕구에 한 없이 왜소해지기만 하는 민중들의 고난의 역사이다. 주인공 ‘아르나우 에스따뇰’은 영주의 초야권 행사라는 어처구니 없는 능욕 속에 출생한 소작농의 아들이다. 아버지 ‘베르나뜨’의 대지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희생적 도피를 통해 번영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찾아든다. “아들아, 이 아비는 너의 자유를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할 것이다!”

작품은 중세 교회의 모순적인 권위, 지속적 권력유지에 몸부림치는 왕과 귀족들의 연합과 배반, 유태인에 대한 배타와 압제, 민중들의 순수한 자유에 대한 갈구를 정교한 플롯으로 이야기 속으로 유연하게 독자를 흡입한다.
도공으로 부를 축적한 사촌집안의 귀족가문과의 혼인, 그리고 그들의 잔인하고 냉혹한 죽음의로의 내침에 아버지 베르나뜨는 아들 아르나우에 ‘삶의 자유’를 각인시키기 위해 의연히 죽음으로 내닫는다. 귀족들의 이기적 허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소설의 팩션적 요소는 14세기 전 유럽에 창궐하여 무수한 민중들을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던 페스트와 교회의 권위와 권력의 확보를 위해 자행되었던 종교재판이 작품의 배경속에 녹아있다. 페스트는 주인공의 삶에 새로운 반전을 가져오는 중요한 사건으로 유태인 환전상과의 인연, 카톨릭과 유대교 그리고 이방인인 노예 무어인(지금의 아랍권)의 등장으로 유럽인들의 절대적 유일종교에 대한 모순성과 허위성을 은밀하게 내비추기도 한다.

또한 의형제 조안의 사제로의 성장, 그리고 ‘아르나우’의 조국에 대한 헌신적 행동(적의 침입에 대한 해안봉쇄라는 기지의 발휘)으로 맺어지게 되는 왕족과의 불가항력적 혼인, 귀족 칭호(남작)의 사사로 사악한 귀족들에 대한 대항의 기틀이 마련된다. 그러나 진실이라는, 즉 인간의 진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주인공의 행동은 농도들의 영주에 대한 부당한 억압의 해방, 핍박받는 가난한 민중들의 지원으로 이어지나 사제인 동생과 왕을 후견인으로 하고 있는 아내와의 밀약은 그를 다시 나락으로 내몬다. 여기서 작가는 동생 조안을 사제로서 교회의 추악하고 불안한 권위로 그의 형식상 아내인 귀족의 욕망과의 결탁을 보여준다. 즉, 종교의 이면에 숨어 파렴치하고 탐욕적이기만 했던 성직자(사제)들의 모순된 가치와 귀족들의 속물성과 상실된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내 역사속의 진실성을 대중적 이해에 쉽게 접근케 하여준다.
한편, 주인공의 사랑에 대한 정념에 시선을 고정하여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키도 한다. 어린시절 이성에 대한 사춘기적 호기심과 그 속에 피어나는 순박한 떨림과 육욕,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던 아내와 그녀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 재회한 어린 시절 여인과의 육체에 대한 탐닉과 고뇌, 수양딸에 대한 이타적 사랑과 그의 결실까지 삶의 의욕과 상실과 그의 이해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매혹적으로 피어난다.

종교에 대한 보편적이고 폭넓은 관용과 이해, 민중 나아가 인간 삶의 진정성에 대한 그 균형적 시각, 사랑과 배반의 일상적 삶의 의미, 그리고 중세의 다양한 역사적 궤적이 그 넓은 산따마리아 델마르 성당에 은은히 울리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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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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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하고 탐욕스런 인류에 대한 로고스의 상실과 불카누스(불의 신)의 징벌에 대한 이야기이며, 서기 79년 이탈리아 캄파니아지방 고대도시 폼페이의 화산폭발일인 8월24일을 전후한 4일간을 소재로 하고 있다.

베수비우스 화산폭발은 악취나는 문명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그 종교적 위엄에 인간의 왜소함과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류의 자연에 대한 오만불손함, 그 파렴치함과 부정,욕망에 제동장치를 잃어버릴 때 자연은 엄격한 재해를 던져주었다. 베수비우스는 평화롭게 더욱 심한 재난을 인류에게 보내기위해 오래고 더디게 준비하고 있다.
 
작가가 무수히 인구에 회자(膾炙)되었던 폼페이의 재앙을 다시금 소설의 소재로 삼은 의미는 작금의 우리인류세계의 겸양을 잃어버린 그 방자함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은 아닌가?

귀족들의 관광과 휴양의 거점지역인 네아폴리스(폼페이,헤라클라내움,스타비아이,미세눔등)의 도시들에 상수를 공급하는 아우구스타 수도교 책임자(아쿠아리우스)로 부임하는 젊은 수도기술자 아틸리우스를 주인공으로 하고있다. 고대 로마의 물은 상상이상의 권력이자 자원이다. 로마는 물로 망했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공중목욕탕 시설과 공창, 그리고 발굴된 그 음란한 모자이크화와 조각상, 암각화는 그들의 퇴폐와 향락의 극한적 단면을 이야기한다. 화산 재앙의 기술적 이해와 추악한 그들의 문화에 침투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배역으로서 물의 관리자는 정말 안성맞춤이다.
 
권력과 더러운 부정의 기반위에 쌓여진 재화의 위용을 악행과 이기적 욕심에 삶을 바치는 암플리아투스, 실종된 수도교의 전임 아쿠아리우스인 엑솜니우스 행방의 추적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탐욕과 이중성의 현실, 순수함과 악의 근원에 저항하는 암플리아투스의 딸 코렐리아, 마지막까지 한 문명의 저주를 기록한 학자이자 제독이었던 플리니우스를 통해 인간사회의 그 보편적 당위성과 나약함, 그리고 후대 인류를 위한 절망적 희망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작품의 진귀한 사실성으로부터 그들의 내밀한 문화와 도시 기간망, 선거와 정치 이면의 몰염치와 부패성, 그 화려한 규모와 시설의 현대성에 독자들은 압도된다. 오늘의 문명을 자만하는 21세기의 우리들은 그들보다 조금도 진전된 존재가 아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부와 권력앞에 귀족의 자존심은 버려진다. 우리사회의 노블리스오브제의 결여와 자신의 이권에만 어두운 그 어두운 양면성까지 유전인자의 돌연변이는 발생치 않고 전달되어 오고 있다. 2000년전의 고대 로마제국의 폼페이와 오늘의 우리 인류와의 오버랩이 착잡함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의 소설적 재미는 거대한 로마제국의 상수원 관리 즉, 수도관의 정밀한 네트워크, 공급되는 수량의 감소로 야기된 그 기술적 추적과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음모, 코렐리아와의 순수한 사랑, 노예출신의 귀족 암플리아투스의 악행, 플리니우스 제독의 인간적 진정성이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허구의 통합된 이미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는 날, 우리 인류는 겸허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린 모두 망각하고 있다. 다시금 베수비우스 화산은 그 폭발을 벼르고 있다. 아직 기회는 있다. 인류는 오만과 그칠 줄 모르는 영악스러움과 탐욕을 버려야 할 것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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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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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평민들에게는 진실로 여겨지고 현자(賢者)들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며 통치자들에게는 유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네카(Lucious Anneaeus Seneca)

도킨스는 “이 책은 내 평생에 걸친 과학과의 사랑을 담은 개인적인 저술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전 인류에 대한 오늘과 미래에 대한 평화로움과 행복 추구에 깊은 애정과 애석함이 저술 전체에 깊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진화론자(다윈주의자)로서 인류에게 복종과 망상등 끊임없는 해악(害惡)을 제공하는 종교주의자(기독교, 이슬람교의 근본주의자들)와 이들 종교에 대한 냉엄하고 실증적이며 박애(博愛)적인 비판 논서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인류와 인류를 지탱하는 지구와 우주에 대한 창조론자들인 아브라함을 시조로하는 3개 일신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배타적이고 기이하며 악의적인 행위에 대한 고발이자 신(God)의 부존재에 대한 과학적인 거증(擧證)이다. 도킨스는 제8장에서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에서 맹목적인 근본주의 종교가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키는”인류에 대한 적대적이고 악의적 집단이기에 그렇다고 확신한다. 도덕적 기준도 없고 과학적이지도 못하고 이타적 사랑도 존재치 않는 종교적 절대론을 숭배하는 일신교 종교인들의 위험하고 위선적인 믿음으로 희생되는 인류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역할에 기꺼이 나섰다.

도킨스는 섬세하고도 친절하게 신(God)이라고 우리들이 지칭하는 의미의 혼동에 대한 명료하고도 적확(的確)한 정의로 자칫 왜곡된 논쟁으로의 꼬투리를 차단해버린다. 초자연적이고 권능과 인격을 갖추었으며 인간의 옮음과 그릇됨을 일일이 단죄하는 우주에 유일한 자를 신이라 하며 그 유일한 자를 섬기는 집단이 종교이다. 이들 종교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중심적으로 거론되며, 이들이 종교로서 인류에게 끼친 그 해악과 기이함과 모순과 거짓에 대해 저자는 분노와 꾸짖음과 학자로서의 설명을 늦추지 않는다.

독자들은 저술 내용에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무궁무진한 과학적 근거와 논리와 증거들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탁월한 진화론자와 같은 시대에 살게 됨으로써 괴이하고 사기에 급급한 탐욕스런 성직자들의 무시무시한 권위를 회피 할 수 있는 준거를 갖게 됨이 너무도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다.

청동기시대에 쓰여지고 수세기에서 10여세기에 걸쳐 조작되고 조합되고 짜깁기된 성서란 것의 시대착오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지막지하게 적용되는 그 낙후성과 무지함에 아연샐색케 될 것이다. 딸자식을 강간과 겁탈의 대상으로 내어주는 아비와 아들을 끓는 가마솥에 넣는 자를 사랑하는 신은 누구를 위한 신인가? 하나의 민족을 남김없이 쳐 죽이라는 그리고 처녀만을 노획하라고 명령하는 자가 그들이 섬기는 신이다. 이교도는 무조건 죽여 버리라는 것도 그 신의 명령이다.

“종교는 분명히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다.”미국은 이미 신정주의(神政主義)국가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미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이 종교가 정치인 이슬람 근본주의가 다스리는 국가들이 있다. 이들은 낡아빠진 30세기전의 구약성서라는 일개 문학소설만도 못한 잡글에 목을 메달고 있다. ‘나 아닌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이렇듯 배타적인 그들의 성전은 서로 상대방을 죽이기에 바쁘다. 미국은 이슬람국가를 이슬람교도들은 미국을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들을 수시로 살상하고 파괴하고 있다. “종교는 늘 그랬듯이 피에 든 독이다”라는 ‘살만 루시디’의 말은 기막히게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이 대단한 걸작의 다채롭고 정연한 수없는 이론과 논증들을 모두 풀어헤치기가 버거울 정도이다. 기독교도들이 주장하는 종교가 없다면 인간은 도덕을 상실할 것이라는 해괴망칙 하고 한심한 논리나 생명의 존엄성에 이율배반적이고 비논리적이며 기만적인 종교인들의 행태들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증거하고 예를 들고 설명하는 수고를 하고 있다.

이 한권의 책은 풍요로운 지식여행을 하려는 독자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저자의 신념과 기저에 흐르는 다위니즘의 해석, 종교가 가지는 허위성과 그 한계에 대한 증거들, 미래의 불편한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움직임과 그 우려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 쾌락을 제공 할 것이다. 물론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이거나 유신론자 저마다 불편함과 분노, 혹은 기쁨과 카타르시등 다양한 신념의 변화를 느끼겠지만 책 속의 그 뛰어난 지식의 향연만큼은 찬탄치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이와 같은 인용된 명제들의 본리를 보려면 바로‘리처드 도킨스’의 “THE GOD DELUSION"으로 당장 뛰어들라!

서로 질시하고 파괴하고 살인하는 배타적이고 도덕심도 없으며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운 근본주의 종교인들과 그 종교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인간 개인의 도덕심과 이성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 같다.
“무신론적인 관점은 삶을 지지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한편,
삶이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자기환멸,
안이한 생각, 은근히 스며드는 자기연민에 결코 오염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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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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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는 작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나 이야기속의 등장인물 혹은 그들의 견해 어느쪽의 편도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에 대한 빗나간 착상일뿐 무의미한 말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다름아니다. 이러한 중도는 정말 의미없이 그리고 공허하게만 들린다.

그러나 이야기속에서 작가는 정말 명료한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보내고 있다.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와 한 치의 차이도 없어 보이는 17세기 조선조의 국왕과 그의 신하들이 주고받는, 어떠한 진정한 의미도 없는 말과 말들의 움직임은 청의 침입과 그의 굴복이라는 국가적 치욕의 사실보다 더욱 진저리나는 모멸감을 확실케 해준다. 작가 김훈은 성공했다. 아주 분명하게 소설에서 우리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아둔하기까지한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제발 변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청의 침입, 우리는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표현인지...
이러한 역사적 편견은 오늘의 우리 현실에 드러나는 국제관계의 무지함과 무능력한 외교역량과 다르지 않다.
이미 기울어버린 ‘명’에 대한 군신의 의리라는 뿌리깊은 유교적 명분과 세치 혀만으로 나라를 정치하는 천박한 사대부만 우글거리는 인조반정세력과 그 무리들의 무능함은 당시 동북아시아지역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이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청이 국제질서의 핵심에 있었다.

국왕과 그의 신하들은 대략 47일간 좁디좁은‘남한산성’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국가의 무참함의 원인에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오로지 유교적 명분만이 그들 삶의 모든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고 있었다. 작금의 한국사회의 정치지도자와 행정권력자들의 행태와 다름이 없다. 지금도 세치 혀만 놀리고 있다..., 지금은 남한산성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작가는 ‘영의정 김류’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하고 의지도 없는 인물과 국제질서의 이해와 국가적 실리주의자인 ‘이조판서 최명길’, 그리고 유교적 명분으로 충효만을 내세우는 ‘예조판서 김상헌’을 그리고, 우직히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이시백, 무엇하나 자신의 결정이 없는 병조판서, 그리고 서날쇠라는 민초, 청의 통역관으로 잡배일뿐인 정명수등 나름의 등장인물에 현실의 성격을 부여했다.

우리가 생활하는 우리사회의 어느 조직에서든 볼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있다. 작게는 지역집단에서, 그리고는 기업조직에서, 나아가 정부조직에 이르기까지 남한산성에 있던 그 인물들과 아주 똑같은 행태가 아무런 변화 없이 약400년간을 지속되고 있다.

적군을 대적하는 무관으로서 자신의 소임에 진중한 의미와 그 실행에 힘을 쏟는 ‘이시백’이나, 무능하기 이를데없는 ‘묘당’의 정치권력자들을 비웃어 대는 그러나 자기의 이익을 잃지 않는 이기적 실속파로 묘사되는 민초의 대표격인 ‘서날쇠’는 오늘의 민중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우둔하고 좁은 시야와 탐욕에 그득한 우물안 개구리같은 우리한국사회의 세칭 ‘지도계층’과 그들과 하등 다를바 없는 우리 사회구성원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작가는 이시백만을 사랑하고 있구나, 우리에게는 이시백만이 필요한 것 아닌가? 달달외워 명문대 나오고, 부모 후원받아 유학갔다 오면 말로만 한세상 살 수 있는 사회가 우리사회 아닌가 말이다. 남한산성의 그들의 삶과 어쩌면 이다지도 같은지...

우리민족을 이렇게 아둔하고 무능하며 탐욕스런 이기적 인간들로 4세기를 묶어둔 그 한국적 인식과 유전인자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남한산성에서 왕과 신하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작가말대로 한 덩어리로 엉켜있었다.

그것은 원인을 빼어버리고 청의 칸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결과일뿐, 나라가 그 모양에 이를정도로 무지하고 준비없으며, 책임도 없이 굴러간 그 과정인 원인이 없지 않은가? 남한산성은 그래서 아쉽다. 작가는 바로 그래서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는 약소한 국가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약소한 국가 일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야 했던 것 아닐까?

그럼에도 여전히 모처럼 우리의 치부를 그려준 ‘남한산성’이 고맙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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