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크리스토프 1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32
로맹 롤랑 지음, 손석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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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로맹 롤랑의 10장 혹은 10권의 대하소설 장 크리스토프(Jean Christophe)1~5권에 대한 독서 후기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와 비견되는 프랑스 교양소설의 대표작으로 불리기도 하는, 악전고투하는 인간 영혼의 격동적 인간의 목소리이다. 이 소설은 한 인물을 내세워 그 어떤 허위의 영웅주의를 그려내려는 케케묵은 교훈주의가 발붙이려는 작품이 아니다. 지식인이라는 얼굴 뒤에 숨어 비열함을 배설하는 이 세계의 권위와 질서에 충돌하며 자기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한 인간이 겪어내야 하는 숱한 굴욕과 좌절의 실체 속에서 지극히 인간적 감정이 들끓는 감동적인 생명의 서사시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을 하나의 음악의 시라고 부르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유아기를 보여주는 새벽을 시작으로 아침’, ‘청춘과 같은 인생의 성장기를 표현하는 장을 거쳐, 성장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이 세계의 온갖 갈등과 증오, 무기력과 절망, 그 속에서 다시 솟구치는 노여움과 분노에서 길어 올린 삶의 강렬한 욕망의 무대들과 마침내 새로운 날에 이르는 총 10개 장(혹은 권)으로 구성된 대하(大河)소설이다. 1890년에 시작된 발상으로부터 10여년에 걸친 집필 끝에 19126월에 탈고한, 한 작가의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이해가 망라된 필생의 역작이다.

 

10개의 장은 각기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던 듯하다. 이 동서문화사의 번역판본으로 1,700여 쪽이니, 여타 국내도서 판본으로는 2,50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한 호흡에 내달려 읽을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작품의 감상이라는 점에서도 각 장()을 기준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읽도록 작가는 애초에 권유하려 했던 듯싶다. 각 장()이 한 인간의 특정 시기에 마주해야 하는 체험의 성분이다 보니, 그 고유한 경험의 세계들마다 독자들의 마음에 건네는 현상들이 다를 것인 까닭이다. (이를테면 새벽은 초등생이, ‘아침은 중학생이, ‘청춘반항은 고교생이, ‘광장시장이후는 대학생과 성년의 독자가 읽는 것과 같이)

 

소설은 제3의 관찰자 시점으로 씌어져있는데, 다분히 전지적 작가시점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이러한 시점이 직접으로 드러나는 5장 혹은 5권인 광장 시장에는 저자와 그림자와의 대화라는 작가와 주인공인 크리스토프와의 대화 장면을 통해 이 세계에 저항하며 단독적인 세계, 크리스토프가 삶의 목적으로 믿는 선을 위한 투쟁과 그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계의 고려와 선을 위한 싸움에 도사린 악의 지향성에 대한 담화로 작가가 개입한다. 이것은 작가 로맹 롤랑이 작중 인물인 크리스토프에 대한 깊은 애정과 바로 작가자신의 이상을 투영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 천재 예술가, 이 세계의 부패와 자기 몰이해에 도전하는 혁명가로서의 인물에 대한 존경의 의지를 반영한 작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1- 새벽

 

1장 또는 1권에 해당되는 새벽은 아기 장 크리스토프(이하 크리스토프라 표기)’와 그의 가계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있는데, 할아버지인 전직 궁중 악장 출신인 장 미셸이 요람에 누워있는 크리스토프를 보고 내뱉는 인상적인 말로 시작된다. 이거 참 밉게도 생긴 놈이로군! (...) 아무 걱정할 것 없다. 얼굴이야 차차 변하는 거니까. 못 생겼으면 어떠냐! 이 애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야. 훌륭한 사람이 되어달라는 거지.”

 

장 미셸의 아들인 크리스토프의 아버지 멜키오르는 아버지의 후광 덕에 궁중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살아가지만 한미(寒微)한 집안의 여식인 아내 루이자와의 결혼을 후회하며, 이것이 자신의 출세를 막아선 것이라며 가장의 역할은 물론 궁중 음악가로서의 역할마저 소홀히 하기 시작한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루이자는 궁핍을 면하기 위해 마을의 피로연이나 연회 등에 요리사로 품팔이를 나서는 고통을 겪는다. 나태하고 술주정에 세월을 보내는 아들을 대신하여 장 미셸은 며느리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몇 푼에 불과한 연금을 쪼개 가계를 돕고, 크리스토프에 음악에 대한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삶에 대한 기개와 가치에 대한 경험들을 들려준다.

 

생 마르탱 수도원의 장중하고 완만한 종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울려 퍼지고, 그 영묘한 음악이 어린 크리스토프에게 풍부한 젖처럼 그의 속으로 흘러들어가며, 세상이란 온통 자유롭고 밝은 미래와 안락한 보호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던 여섯 살 아이는 어머니 루이자가 품팔이 일을 하는 집을 찾아갔을 때 마주친 사건으로 인해 인간 중에는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기네 집 식구나 자신은 명령하는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어머니에게 명령하던 한 여인은 어린 크리스토프를 자신의 아이들에게 끌어다 놓는다.

 

크리스토프의 추레한 옷차림은 곧 가난뱅이 아이로, 무시하고 노리개로 삼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아이로 인식되고 놀림과 폭행을 당한다. 크리스토프는 저항 끝에 그 집 아이를 때리게 된다. 이 장면은 내게 아주 익숙한데 우리 주변에서 늘 관찰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잘못한 아이들은 자기 부모의 권력 뒤에 숨어버리고, 약자의 자식은 바로 비굴한 자기 부모에 의해 얻어터지는 상황 말이다. 어린 크리스토프는 격렬한 고통에 사로잡힌다. 참담하고 미칠듯한 분노가 들끓는 여섯 살 아이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진다. 아마 타인의 악의에 대한 최초의 인식이고 부끄러움과 부정에 대한 반항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유아 성장기인 새벽은 보통의 인간에게는 발생치 않는 하나의 사건이 더해지는데, 크리스토프의 음악, 특히 작곡과 연주 능력의 천재성이다. 주정뱅이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 멜키오르는 아들 크리스토프의 작곡 능력을 폄훼하고 한갓 유치한 아이의 흥얼거림으로 무시하지만, 할아버지 장 미셸이 크리스토프가 흥얼거린 선율을 악보로 표기한 것을 보자 야심으로 돌변하여 크리스토프를 채근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이 부당한 강요를 읽어내고 좋아하던 음악에 혐오를 느끼고, 연주하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그럴수록 학대는 심해지고,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위대한 음악가로서의 희망으로 이내 굴복한다. 멜키오르는 대공으로부터 크리스토프가 작곡한 음악 연주회를 승낙받기에 이르고 크리스토프는 공식 궁중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된다. 음악 천재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대공의 보호 하에 있게 됨으로써, 음악가로서 지위가 인정되고, 그 능력 발산의 토대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것은 멜키오르의 가정에 대한 책무를 더욱 방기하게 하고 어린 아이는 가계의 일정 벌이를 책임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작 여섯 살이다.

 

한 인간의 새벽에 이미 세상의 오욕과 허위, 고난과 역경이 몸에 새겨진 것이다. 어린 크리스토프와 어머니 루이자의 미약하지만 든든한 후원자였던 할아버지 장 미셀마저 죽음으로써 그야말로 가계는 침몰한다. 크리스토프가 궁중 악단원으로서 받는 급여까지 빼앗아 술로 탕진하는 아버지, 어린 아들의 짐을 덜기위해 품팔이를 하는 루이자, 급기야 아버지 멜키오르마저 술에 절어 싸늘한 시신이 되고, 열 네 살의 크리스토프는 두 동생과 어머니의 삶을 꾸려내야 할 가장의 무게를 지게 된다. 이제 어린아이는 아침을 맞는다. 시쳇말로 소년가장인 크리토프가 청년으로 가는 길목이다. 외톨이, 세상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었더라도 아직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소년이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토해 낼 대상이 없던 소년에게 다가 온 우정은 지고한 행복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몽땅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즐거움,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소년들의 우정을 그 자체로 보아주지 않는다. 그 우정에 파렴치하고 불쾌한 빈정거림이 파고들고, 그들 천박한 호기심은 심연을 열어 보여주게 된다. 천진난만했던 관계는 그렇게 더럽혀지고 변해버린다. 그들은 서로 낙담하고 우정은 어둠에 묻혀 사라져 버린다.

 

2- 아침

 

그러나 인생의 아침 아닌가. 사랑은 다시금 소년의 마음으로 들어차고, 집 앞 오랫동안 비어있던 저택에 과부가 된 추밀고문관의 아내인 폰 케리히 부인과 그녀의 여식 민나가 돌아와 살게 된다. 여인은 궁중 연주회에서 본 한 마을의 소년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를 민나의 피아노 선생으로 고용한다. 그들은 동정과 흥미로 소년을 고용했을 뿐, 결코 교육도 훈련도 받지 못한 이 야생의 소년에 대해서 그 어떤 진심도 가지지 않았다. 소년은 그들의 빈정거림을 알 아 볼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었다. 그네들은 그의 책, 담화, 교양전반에 대한 무지와 조잡한 행동거지에 대한 한탄을 감춘 채 얼마간의 은혜를 베푸는 보호자인 척 하는 태도를 고수한다. 여식인 민나 또한 크리스토프는 보기 흉한 가난뱅이 소년이며, 가축 이상으로 생각지 않고 있었다.

 

고립된 공간에 갇혀 지내는 소녀와 외톨이 소년의 반복되는 만남은 산골짜기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안개처럼 무턱대고 솟아나는 연정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소녀는 여인다운 교태로 소년을 유혹하고 그 풍부한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린다. 세상은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능청스럽고 시치미를 뗀 체 소년의 행동을 관찰하는 눈은 딸과 함께 여행을 떠나버린다. 이윽고 소녀의 부재를 안달하던 소년에게 도착한 편지는 너무 흥분하지 말고, 편지도 보내지 말아달라는 단교의 내용이다. 소년에게는 집에 돌아왔다는 전갈도 전하지 않는다. 뒤늦게 사실을 안 소년은 달려가지만, 우리 딸애를 유혹하다니, 정 말 뜻 밖이라는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안 된다. 신분만 해도...”라며 딱 잘라 멸시적 요소를 담아 냉담한 눈초리를 보낸다. 열다섯 살 소년 크리스토프는 그토록 우아한 영혼이라 생각했던 두 모녀의 무정함을 비로소 감득하고 호되게 따귀를 맞은 느낌으로 수치와 노여움으로 몸을 떤다.

 

소년은 되찾을 수 없이 잃어버린 부질없는 생애의 절망감에 짓눌리며 깨닫는다. 인생이란 휴전 없는 무자비한 투쟁임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적군, 추하고 어두운 욕망, 인간을 타락시키고 절멸시키려는 것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소년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하나의 인간, 그가 되어야 할, 성취하여야 할 섭리로서의 인간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며, 청춘이 된다. 3(혹은 3) 청춘은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경험함으로써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기성의 인간 세계의 질서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작품의 중요한 한 축이라 해도 될 것 같다.

 

3- 청춘

 

크리스토프의 청춘은 이 세계의 냉엄한 시선으로부터의 깨달음인 자기되기로 시작한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쓰라린 고뇌를 숨긴 채 세계를 뚫어보는 시선을 가진 인간으로서, 가계의 돌봄과 자신을 위해 착실하게 피아노 교습을 통한 벌이와 작곡을 위한 작업, 궁중 연주를 묵묵히 수행해 나가고, 아버지의 죽음과 동생들의 분가로 어머니와 함께 시장 거리에 있는 작은 집에 셋집 생활을 꾸려나간다. 겸허하고 선량한 여인네의 삶밖에 알지 못하는 어머니, 루이자는 참아왔던 현실의 삶에 지쳐 이제 모든 기운을 잃어버리고 의지의 힘을 상실한 채 무기력으로 빠져든다. 자신의 괴로움에 빠져 어머니의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이내 지난날의 유물 속에 좌초한 어머니를 발견하고 아들은 마음 아프게 불쌍한 영혼, 어머니를 동정심으로 안는다.

 

청춘의 도입부는 이러한 두 모자와 더불어 이사집의 집주인 오일러의 가족들을 통한 독일 소시민들의 면모를 보여주려는 듯 한데, 그네들 교양이란 것의 한계, 기질들, 허영심과 하찮은 명예의 집착, 궁구하지 않은 맹목적 종교관에서 보이는 신앙의 이기주의 등, 독일인에게 자리잡은 이상주의의 허위가 배경이 되어 흐른다. 무엇보다 크리스토프가 경험하는 최초의 이성과의 사랑, 자비네, 아다, 로자 등 여인들과의 사랑과 이별에서 드러나는 허무와 씁쓸한 기쁨들, 닳아빠지고 시든 영혼들, 정열적 환각, 사랑의 전율, 그리고 치명적인 나날의 소모, 상실과 살아감의 이유를 직시하는 위기와 극기로서의 시간이다.

 

삶에 대한 희망을 품었지만 현실의 경험들은 치욕스러움과 비겁함과 자기 맹세의 배신을 요구한다. 그는 세계와 자신에 대한 믿음에 고뇌한다. 떠돌이 행상인 외삼촌 고트프리트는 어디에도 붙들려있지 않은 문자그대로의 유목민적 삶을 실천하는 인물인데, 매년 연례행사처럼 누이 루이자의 가족을 찾아오고, 그때마다 크리스토프는 외삼촌으로부터 어렴풋 현자의 면모를 발견한다. 외삼촌은 청년의 정신적 삶에 대한 유일한 조언자로서 인생의 길을 조언한다. 인간이 희망을 품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은 전혀 별개가 아님을, 인간은 결단코 희망과 살아감에서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따라서 믿음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것임을, 해가 뜨는 데 대해서 믿음을 갖, 오늘 일을 생각하고 이치 따위란 버리라고, 생활에서 억지를 버리고, 하루하루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읽어나가던 중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문장이 있다. 조카에게서 고트프리트는 불가능한 것을 해내려 몸부림치는,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욕망을 발견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면 되는 것을 이라고, 너는 오만하다, 너는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것밖엔 못하지...영웅이라? (...) 난 이렇게 생각한다. 영웅이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다른 이들은 그걸 하지 않는단다.”

 


4- 반항


크리스토프는 이 말의 충일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역량을 초월하려는 시도가 없는 삶이란 보람 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후일 그가 보다 넓은 세계에서 지식과 관계의 경험들이 쌓였을 때 그는 알아차릴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이것만은 깨우쳤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기 자신으로 있다는 자유의 즐거움을 각성한 것이다. 청년은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맹목적 반동의 시기이자 자신이 진실이라 시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는 그러한 시기에 도달한다. 4반동은 기성의 음악계와 대중의 인식에 도전하는, 자기 확신에 찬 젊은 열정이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마침내 무수한 장벽 앞에서 부정되고 좌절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독일의 허위의식을 꿰뚫어보게 된 이 청년 음악가는 기성의 위선적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들, 그리고 대중의 무지를 본다. 이러한 그의 비판적 목소리는 위험하고 해괴한 짓거리로 치부되고, 악의적 소문이 되어 소도시를 휩쓴다.

 

그가 작곡한 독일인의 무기력에 대한 반동의 비판에서 출현한 작품은 철저하게 외면되고, 그의 음악을 조롱하기 위한 작당모의에 의해 안전히 추락한다. 시기와 몰이해, 수구적 보신주의가 팽배한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지향을 말하는 음악은 발붙이지 못한다. 대중과 기성의 권력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 청년의 음악은 무례하고 기이한 것이었으며, 그의 성장을 결코 허용하지 못한다. 작곡가가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고 발표할 수 없다면 토대가 없어진 것과 같다. 그는 비평지에 음악비평을 맡게 되고, 독일의 엄격주의와 속물근성을 비웃음 섞인 관찰안으로 날카롭게 벼려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은 작곡과 음악 연주가들을 넘어 가수를, 나아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연주를 듣고 있는 청중들까지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기성의 권위에 대한 비판을 넘어 대중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그에 대한 비난과 질시는 극에 이른다,

 

여기서 멈추어야 했는데, 젊은 열정은 내친걸음에 동료 비평계에 훈계를 가하기 시작함으로써 비평가들을 연결하는 상호 암묵적 약속을 난폭하게 깨부숴댔다. 그는 곧 공적 질서의 적으로 간주되고,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자기 확신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본디 힘든 존재이다. 크리스토프는 이제 싸움을 할 바에는 머리가 터지는 인간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미친 사람처럼 공격을 계속한다. 앞날을 위한 어떠한 보신처도 마련하지 않은 이 천둥벌거숭이는 급기야 위협을 느낀 비평지로부터 쫓겨나고, 대공의 보호막이었던 궁정연주자의 지위까지 박탈당한다. 크리스토프를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수많은 적이 나타나 크리스토프를 공격 보복한다. 승자에 아첨하고 패자를 욕함으로써 자신들의 무지와 욕망을 감추려는 비겁한 자들은 그의 교향곡은 정신병원에서 태어 난 것이다. 그의 경련적 화성은 마음이 메말라 있는 것과 사상이 없는 것을 기만하려는 수작이라고 까지 살인적 비평을 쏟아낸다.

 

홀로 버림받은 음악가, 모든 출구가 닫혔다. 궁여지책에 자비를 들여 작곡한 것을 출판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리고자 하지만 6개월 동안 단 한부도 팔리지 않는다. 생계에 대한 위협으로 청년 천재는 그의 처지를 이용하여 값싸게 음악교수를 얻으려는 반종교적 학교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박물학을 가르치는 라인하르트 교수의 부인과 공동의 관심사와 친절을 받게 된다. 선량한 교수 부부의 초대에서 그는 애정과 감사의 기쁨과 배은망덕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깨닫는다. 라인하르트 부인으로 불리는 안젤리카로부터 그녀의 출신지인 알자스지방과 프랑스, 라틴 문명에 대한 매혹을 간접적으로 듣게 된다. 독일의 기만적 이상주의에 똬리를 튼 그 허약함, 그 허위에 올라타 권세를 부리는 기성의 권력과 폭넓게 자리한 대중의 몽매성을 떠나 프랑스에서 새로운 출발을 꿈꾸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아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작곡과 답답함을 피해 산책하던 중 들른 술집에서 병사들의 마을 처녀에 대한 성적 모욕을 목격한다. 그들의 행패를 참지 못한 크리스토프는 한 병사를 때려눕히고 커다란 부상을 입힌다. 이때 방관하던 마을 청년들이 가세하여 일군의 독일병사들에게 커다란 상흔을 남긴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은 크리스토프를 지적하며 그로 인해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그를 군대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협하기 시작한다. 피해 대상이었던 마을 처녀는 그들의 비겁을 지적하며, 크리스토프의 해외도주를 돕는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의 범죄 용의자가 된 크리스토프는 불가피하게 파리로 탈주하게 된다. 아마 작가는 이들 농촌 마을의 술집 사건을 통해 당시 독일 소시민들에 팽배한 방관적 태도와 비겁함, 굴종적 인성을 들추어내려 했던 것 같다. 이는 크리스토프가 독일을 벗어나 프랑스로의 이주를 정당화하는, 그의 비판에 힘을 실어주는 적절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예기치 못한 파리로의 도주는 젊은 비판적 음악가의 지성을 한층 넓고 깊어지게 해주는, 그러나 무수한 모욕과 배신, 좌절과 절망의 번민을 수반하는 그런 인생의 여정이 될 것이다. 5권인 광장 시장은 다층적 의미를 지닌 제목으로 여겨진다.

 

5- 광장 시장

 

주머니에 하루 여관비가 될까 말까한 궁박한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몸을 누일 파리의 가장 누추하고 값싼 여관방이 있는 곳으로서 떠들썩한 광장시장이고, 그가 만나고 경험하는 프랑스의 음악과 소설과 시, 연극, 비평, 정치에 이르는 예술과 문화사회 전반에 대한 소란스럽기만한 현상으로서의 광장이자 시장이란 의미로 이해된다. 아마 작가 로맹롤랑의 당시 프랑스를 휩쓸던 예술을 위한 예술, 그 탐미적 세력에 올라탄 사회정치 전반에 만연한 위선과 탐욕, 부패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의 산물일 것이다. 작가는 이를 젊은 독일 천재음악가의 시선을 통해 우회적 비난의 목소리를 실어 직접의 공격화살을 피하고자 했던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프는 프랑스인들로부터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 입으로만 이상주의를 외치고, 예술과 미의 이름으로 국민의 일반적 풍조인 외설과 퇴폐를 은폐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이 장은 온통 프랑스 예술의 각 분야와 정치사회에 이르는 크리스토프의 편력기라 할 만큼 프랑스 사회 전 분야를 망라한 냉혹한 비판의 목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소설적 맛스러움은 가장 덜한, 그야말로 한 편의 프랑스 문예비평이라 해도 될 지경이다. 이 편력을 통해 크리스토프는 그들과 확연히 두드러진 자신의 개성을 확신하고, 그 힘을 배증시키는 시간으로 삼는다. 이 소설은 문학작품으로서의 범주를 초월한다. 새로운 행동으로 가열차게 내모는 한 인간에게 몰아닥치는 무수한 절망들과 그 모멸과 굴종과 실의를 추진력으로 삼기 위해 수없이 고뇌하는 한 인간 내면의 빛을 읽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이미 숭고한 하나의 정신사가 된다.

 

크리스토프는 이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은 어디서 연원하는 것인지는 6~10권의 기대가 될 것 같다. 내 인생 여정에서 너무 늦게 이 작품이 도달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지만 새로운 삶들은 이 순간에도 새벽을 맞으니 그들에게 이 책은 인간과 인간 삶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리라. 결코 시대의 유행과는 무관한 영원한 배움의 산실이 되어 줄 것 같다. 수많은 검증과 비판 속에서 살아남은 명작, 그래서 고전이라 불리는 명예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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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소설문학이 작가 의식의 반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점에서 모든 소설은 작가로서 한 인간의 배설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소설 작품들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고, 그렇기에 문()’이라며 지식의 한 체계라는 거룩한 이름의 범주로 부른다. 그러한 점에서 내겐 이 작품 과자와 맥주(Cakes & Ale)는 전형적인 작가의 배설물이며, 나아가 그 배설의 쾌락을 즐기려는 교활한 자부심과 비겁함의 산물로 보인다. 당대 영국 문단에 대한 비판이라는 장막의 그늘 속에서 자신이 지속하여 간직하고 싶은 한 때의 쾌락을 보존하고자하는 의지를 엿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을 서머싯 몸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단다. 여든 살 기념작으로 한 작품을 출간하게 되었을 때, 이 작품을 호화장식으로 출간한 것으로도 은폐된 자기만의 즐거움을 위해 써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렇게 추측하게 된 이유는 소설 속 곳곳에서도 드러나는데, 당대 영국 사회의 계급신분에 의한 인간관계에 놓인 뿌리깊은 차별의식과 각종 제약에 의한 인습적 수행에 있어 작가의 분신인 작중 화자인 윌리 어셴든(이하 어셴든이라 함)은 자신의 양육 보호자인 숙부인 교구 목사와 귀족 출신 숙모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으로 그려낸다. 나는 여기서 몸의 비겁함과 교활함이 내비치고 있음을 읽는다.

 

또 다른 하나는 소설의 주요 대상 인물 중 하나인 문학 거장으로 불리는 에드워드 드리필드(이하 드리필드라 함)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전기를 쓰려는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앨로이 키어(이하 로이라 함)의 문학적 성공을 향한 각종의 수법을 열거하며, 목적과 수단의 교묘한 조합을 통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얼마나 출세할 수 있는지를 더없이 잘 보여 주는 본보기가 바로 로이였다.”,  문학적 재능 없는 자가 문단에서 거들먹거리는 행태를 비판한다. 단지 이것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당대 거장으로 칭송되던 드리필드의 출신배경이나 그의 사생활을 들추어냄으로써 은근히 한 문인의 작품 활동이나 작품 자체를 은근히 비하한다. 몸은 이러한 배설을 통해서 아마도 꽤나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았으리라.

 

끝으로 하나 더 부가 한다면, 아니 이 소설의 절대 중요 제재로써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드리필드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로지와의 육체관계를 동반한 열정적 관계에 중층의 의미를 부여해 작가 자신의 의지를 감추는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 이것은 일석 삼조인데, 드리필드라는 문학거인을 추문의 희생자로 삼음으로써 격하시키는 효과를 얻는 것이고, 로지를 한 때 자신의 연인으로 삼음으로써 우월감을 성취하는 것이다. 게다가 로지라는 여인은 현실 속 작가의 쾌락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극작가 헨리 아서의 딸인 수 존스의 변신으로서 글로 보존된 숨겨진 관음의 화신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소설은 아주 교활하고 비겁하게 써진 작가 개인을 위한 쾌락의 절대물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물론 이 소설은 이처럼 자전적 요소들로 작가가 숨기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욕망들로 인해 비하될 수 만은 없는, 우리네 인간 개인들과 사회에 대한 성숙한 성찰들이 있으며, 소위 사로잡는다라는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에 있어 탁월한 재능을 갖춘 작품임을 부정하기는 어렵기도 하다.  대중 독자를 사로잡는 작가의 재능은 로이라는 드리필드 전기 작업을 수행하는 인물을 빗대어 한 편으론 폄하의 논의로,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 작품의 불가피한 요소를 오가며, 바로 대중적 흥미를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역설적 정당화 논리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속 1인칭 화자인 어셴든은 어떤 비평가들은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인기를 하찮게 여긴다. 인기란 평범함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몸은 이 말을 진실로 믿어서가 아니라 역설적이고 다양한 반면이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소설의 제목, ‘Cakes & Ale'이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인생의 향락, 삶의 쾌락을 뜻하는 관용구로 사용되었 듯, 인기란 다름아닌  일반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난 재능임을 입증하는 당찬 실현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몸은 어셴든의 입을 통해  어리석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려는 멜로드라마 같은 사건들도 나한테는 아무 매력이 없었다.”고 말하게 하지만,  이 말은 오히려 더욱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멜로드라마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역설적 진술인 것이며, 실제 작가는 화자의 뒤에 숨어. 소설들 대부분이 전형적 통속 소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며,  불멸의 걸작이 햇빛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라지는 일도 있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걸 무슨 수로 알겠는가라는 인식을 슬며시 내보이는 미끼로 진술된 것 같다. 이 소설은 쾌락적 흥미를 주 요소로 하고 있다.  때문에 이야기의 재미는 아주 자극적이어서 흥미, 매력, 사로잡는, 향락과 같이 그가 문단의 세태를 빈정거리며 제시한 요소들이 모두 버무려져, 대중적 인기를 얻는 작품이어야 함을 실천한다는 관점에서 애초에 이 소설은 흥미로 가득한 인기를 겨냥한 작품으로 써졌으리라 여겨진다.

 

열여섯 살 쯤으로 추정되는 어셴든은 숙부의 목사관에서 계급적 우월의 태도로 사람들과 세계를 인식한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함께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분까지 천박하게 낮추어지는 것이라 삼가는 것인 관습인 시절이다. 소년 어셴든은 자전거 구입을 숙부로부터 승인 받아내자 홀로 타는 연습을 하지만 실패만을 거듭한다. 이때 두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데, 소설을 쓴다는 석공의 아들인 드리필드 부부다. 어셴든은 짐짓 거만하게 두 사람을 대하지만 상냥하고 붙임성있게 말을 거는 드리필드 부인의 친절에 그만 드리필드의 도움을 받아 자전거를 홀로 타는 데 일거에 성공하게 되고, 이후 어셴든은 숙부내외 몰래 친분을 쌓아나간다. 사실 이것은 드리필드의 죽음 이후 그의 전기를 쓰려는 동료 작가 로이로 인해 야기된 추억으로 시작된 회고의 기록이다.

 

로이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문호의 이미지에 드리필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때문에 로이가 쓰는 드리필드의 전기는 아마도 부정적 이미지가 제거된 말끔한 것이 될 것이다.  소문나면 안 될 비밀들을 모두 숨긴 채 번듯한 전기를 엮어 내 놓으려는 것에서 어셴든은 부조리한 당대 문단의 왜곡된 조작적 분위기를 포함한 비판의 시선을 들이댄다. 로이라는 인물은 자메이카 총독을 지낸 영국 고위관료의 아들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소설가가 된 한 때의 인기 작가이다. 그는 비평가에 잘 보이려 애쓰는 작가 유형의 대표자다.

 

로이가 어셴든에게 하는  유명한 비평가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나?” 하는 물음은 그의 인물 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물음에 어셴든은  별로, 나도 글을 쓴 지 벌써 35년이나 되네. 그동안 작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많이 보아왔지, 천재라고 추앙받으면서 짧은 시간동안 영광을 누린 뒤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라며, 문단에 의해 조작된 평판을 얻은 작가와 작품은 결국 쉽사리 잊혀질 뿐이라고 로이의 인식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 인식은 불멸의 걸작과 관련한 인기있는 소설에 대한 어셴든 자신의 인식과 충돌한다. 물론 대중적 인기와 문단 또는 비평계의 조작은 그 성격이 달라 완전한 비교 가치는 아닐 것이지만, 문학작품의 위선이라는 악덕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기준이 될 것이다. 사실 어셴든의 당대 문학계에 대한 신랄하고 준엄한 비판이란 것의 이면에는 질투라는 썩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도사린 듯 보인다.

 


결국 이 소설은 로이가 쓰려는 드리필드에 대한 매끈한 전기에 대해 어셴든이 숨김없이 쓰는 사실로서의 전기소설이라는 위상을 갖는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몸의 분신인 어셴든이 진정 비판하고자 하는, 혹은 세상이 추앙하는 대상을 격하하려는 거장은 누구였을까? 가 궁금해진다. 석공의 아들이며, 두 번의 결혼, 중산층 등 평민 계층의 인물을 통해 당대 영국사회의 실상을 비판했던 손 위 세대의 거장은 토마스 하디(1840~1928)이다. 어셴든은 드리필드가 신분이 낮은 자의 자식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자신과의 관계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의 어투나 그가 자신을 대했던 낮은 자세를 눈에 띄게 반복한다.

 

또한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로지가 술집 여급 출신이며, 자유로운 성적 관계를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어 지속적으로 비하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품 자체와는 무관한 극히 사적 삶을 통해 격하하는 동시에, 문단 내 평판을 좌우하는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트래퍼드 부부를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의 종속적 인물로서 문단의 평판을 획득하고 거장으로 불린 것으로 묘사하여 문학적 역량 또한 신뢰할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비춘다. 몸은 이를 통해 자신이 통속작가이거나 단지 대중인기에 영합하는 작가로 치부되는 문단 내 현실을 돌파하려는 하나의 배설로서의 쾌락적 글쓰기처럼 여겨지는 이유이다.


나는 소설 속 드리필드의 모델로 추정되는 토마스 하디의 결혼 생활의 진실을 알기 위해 간략한 기록들을 살펴보았는데, 첫 번째 아내는 술집 여급과는 전혀 다른 변호사의 딸로서 오히려 토마스 하디보다 우월한 계급 출신여성이었기에 그 신분 차로 인한 갈등으로 두 사람이 결별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은 소설, 허구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부인에 대한 묘사는 실제 사실과 상당부분 부합한다.  플로렌스 덕데일로 불리던 여인은 소설의 내용과 같이 하디의 문학적 명성을 자랑스러워했고, 후일 토머스 하디 전기를 집필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로이가 쓰려는 전기 역시 드리필드의 두 번째 아내인 에이미의 요구에 의한 것이고, 그녀가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의미에서 거의 유사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몸은 왜 드리필드의 첫 번째 아내는 다른 성격의 인물로 변조한 것일까? 여기에 이 소설의 향락적 재미가 있다. 이 재미는 대중이 기대하는 멜로드라마적 요소와 더불어 자신이 간직한 소중한 사랑의 기억인 여인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할 수 있는 기막힌 위장 수단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몸과 열정적 사랑의 시간을 8년 남짓 했던 여인인 수 존스는  내면의 밝은 빛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 같은 여인이라는 찬양처럼 그의 인생에 유일한 여성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도 로지의 초상화를 온 정성을 다해 그려내는 화가가 등장하고, 그 초상화에 대한 어셴든의 첫 인상은 여기 기록하여 남겨두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나는 그녀와 그림을 뚫어져라 보았다. 갑자기 심장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푹 찌른 것 같았다.(...) 묘하게 기분 좋은 아픔이 느껴졌다.”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의 수사가 책의 몇 쪽에 걸쳐 흐른다. 너무 아름다워 숨이 막힌다고, 수 존스는 이렇게 소설 속 로지의 몸()을 입고 작가 서머싯 몸의 영원한 여신으로 박제화된다,  나폴리 박물관의 정교한 프시케의 조각상처럼.  실제 수 존스의 초상화는 몸의 평생 절친이었던 영국 왕립미술원 원장이었던 제럴드 캐리가 그린 초상화로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 그림은 아마도 소설 속 로지에 대한 묘사와 거의 일치된 감상을 주는 모양이다.

 

나는 허구의 소설을 작가의 현실적 삶으로부터 유추하려는 이 감상이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 소설은 다분히 작가의 전기적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는 성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 어셴든에 의해 폄하되고 비판되는 문학비평가로 등장하는 로이가 그렇고, 드리필드의 명성을 유지 존속시키려는 두 번째 부인 에이미나, 드리필드를 문학계의 거장으로서 평판을 만들고, 그로부터 자신들의 비평가의 지위와 영향력을 계속했던 트래퍼드 부부 모두 현실 속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기 때문이다.

 

후일 몸은 여든 살 기념 인터뷰에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적을 모두 긍정했으니 작가의 실제 삶과 분리하여 읽는 것은 오히려 작품에 숨겨진 의도를 방해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신분질서의 비인간적 계층질서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체화된 뿌리깊은 인습에 굴종된 모습을 보이지만, 술집 여급 출신이라는 로지의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과 그녀의 분방한 성적 자유의 행로에 대해 진심을 다해 긍정하고 응원하는 것에서 한 개인을 둘러싼 세상의 질서와 관습을 이겨낸다는 것의 모순이라는 어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혐오하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그 나약함과 사랑과 명예의 소유를 향한 갈망들이 때론 거친 격랑처럼 몰려오고, 때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날 저녁같은 고요함이 되어 흐른다.  한 인물의 전기를 쓸 때 전체적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균형이라는 조작된 글이 아니라 엉뚱한 것을 집어넣어 전체 인상을 흩트리려는 작가의 그 교활함을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이 작품의 진솔함이 바로 이 소설이 시대를 계속하며 명작으로 독자들을 유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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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 거장의 재발견, 윌리엄 해즐릿 국내 첫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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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가 까다롭지만 고상하고, 심술궂지만 고결하고, 독선적이지만

인류의 권리와 자유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에서


윌리엄 해즐릿은 최소한 조지 오웰이나 토머스 드 퀸시, 찰스 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에세이스트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라는 평가와 같이 현대의 관문에 들어선 19세기 당대의 새로움을 분석하고 해설해주는 출중한 재능을 지닌 치열한 문장가이자 지성인이었다. 모두에 인용한 해즐릿 사후 100주년 기념 에세이를 쓴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글과 인물됨에 대해 묘사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의 글에서 유사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해즐릿의 글들은 준엄하고 냉소적이며 신랄하고 예리하지만 인간 심리의 깊이를 모색하고 세상사의 이치를 스스로 납득하여 그 사색의 결과를 공유하고 싶어 했던 인류애의 소유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해즐릿의 이 유일한 국역본을 읽으며 시종 야릇한 흥분과 공감을 잃지 않았다. 그의 탐색적이고 분석적이며 냉소적인 비판의 시선에 놓여있는 준엄한 지성과 그 활기가 여기 있는 듯 다가왔기 때문이다. 학식을 존중하지 않는 당대의 분위기와 그를 헐뜯는 블랙우드 매거진과 같은 보수 저널들의 거짓말과 조롱에도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으며, 결코 정부의 도구가 되지 않았던, 오직 진리를 추구하며 굴욕과 환멸의 고통을 겪어냈던 인물에 대한 존경을 갖게 된다.

 

이 에세이집은 버지니아 울프의 기념 에세이와 여섯 편의 해즐릿의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다. 독자의 욕심 같아서는 그의 에세이집 인간 행동론, 좌담, 정치 에세이등 보다 많은 글들을 접하고 싶지만, 이 국내 최초의 해즐릿 에세이집은 그야말로 최고의 글들이 엄선되었음을 절로 깨달을 만큼 독보적 강렬함이 발산된다. 1819년 반혁명적인 반동 지식인들과의 투쟁으로 그의 천재성만큼이나 세상에서 배제되어 그의 글들은 사장되었던 것 같다. 이를 다시금 세상에 복귀시킨 장본인이 바로 울프였던 것 같다. 울프는 그녀의 에세이에서 자신은 그를 마음에 들어 했을 거라며 현란하지 않고 화려한 수식 없이 오직 진리를 찾고 싶어 한 절박한 욕구를 위해썼을 해즐릿의 글들을 옹호한다. 그의 글들을 200년이라는 시간 뒤에 이국의 장소에 있는 한 독자가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아마 울프라는 지성의 덕택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200쪽 남짓한 에세이집의 매 페이지마다 이처럼 많은 색인 스티커를 붙인 적이 없었던 듯하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형광펜 밑줄로 가득 채워졌으며, 옮겨 써 놓은 문장들도 조금 과장해서 거의 노트 한 권 분량에 이르렀다. 이 에세이집의 표제명이 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단연 어떠한 수식어도 필요없는 지혜와 집요한 탐구 정신이 돋보이는 글이다. 그 강렬한 맛에 내 정신이 어찔할 정도다.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의 오늘날 우리는 해즐릿만큼 쓰지 못한다.”는 고백은 결코 실언이 아님을 확인케 된다. 이하 감상글은 여섯 편 중 내게 인상적이었던 세 편의 글에 대한 간략한 인상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모든 문장을 옮겨오고 싶은 마음이지만 절제 하련다.

 

1.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이 글은 해즐릿이 탐색하고 분석한 인간 본성론의 한 단면일 것이다. 이 글이 쓰인 시기에 대한 기록이 제공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 인간 행동론에 수록된 1805년이거나, 그가 모닝 클로니클의 의회 출입기자로 정치 기사를 쓰던 1812년 무렵일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이 글에 투영된 그의 분석 대상이 되었던 인간모델들은 어쩌면 정치인들을 비롯한 소위 권력 계층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어조의 신랄함은 더욱 날카롭고 강렬하다.

 

증오에 물리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농축된 악의처럼 잘 보존되는 것도 없다.

우리는 모든 일에 싫증을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 -52쪽에서

 

이는 결코 주의깊고 치열한 관찰을 통하지 않고는 획득될 수 없는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보인다. 정말이지 인간의 마음이란 들여다보면 볼수록 반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혐오할 게 없으면 생각과 행동의 원천마저 잃어버릴 것 같기만 하다. 우리는 비근하게 이러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어떤 비극적 사건을 목격하는 일이라면 열정적으로 떼지어 몰려드는 인간 군상들을 보라. 또한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이질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보이면 사방의 인간들이 몰려들어 공격하고 괴롭히는 것을 얼마나 쉽사리 볼 수 있는가. 온라인 사회연결망에 어떤 도덕적 아량을 넘어서는 행위자의 영상에 대한 집단적으로 달리는 무수한 비난과 폭력적 댓글들, 이것들에서 우리는 해즐릿이 보았던 얽매임 없이 풀려난 충동적이고 기뻐 날뛰는 야성의 환호, 농축된 악의인 혐오의 즐거움 목격하게 된다.

 

왜 그럴까? 흠잡기 좋아하는 성향, 남들의 행동과 동기를 시기하고 감시하는 편협한 태도에 근인(根因)하는 것이라고 해즐릿은 지적한다. 이 불온한 인간의 본성은 결코 혐오를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예견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 사회 현실의 이해 도구가 되어줄 수 있다. 그는 만일 인류가 올바름을 희망했다면 오래 전에 이루었을지 모른다.”며 공포와 혐오의 대상을 상상 속에 끈질기게 살려두려는 인간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지나친 인간 비하의 논리라 반박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혐오는 죽지 않는다!”

 


2. 질투에 관하여

 

이 에세이는 앞서 소개된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에 버금가는 탁월한 사회심리분석이라 할 수 있겠다. 여물통의 개처럼 우리에게 소용이 없는데도 타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고 사취하는 데 있는 심술궂고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감추고 조작하려는 욕구를 동반하는 비열하고 역겨운 감정이 바로 질투이다. 이 감정의 속성을 해부, 분석하여 이것이 사회와 인간관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적 글이기도 하다.

 

이 기형적 감정 또한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에 팽배한데, 특히 정치인들이라 불리는 족속의 일원에서 아주 쉽사리 발견된다. 우선 하찮고 건방진 자아가 일으키는 사회적 물의라는 측면에서 해즐릿은 이렇게 지적한다. 별스럽고 균형을 잃은 부모의 인격을 보면 그 자식이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게 놀랍지 않다.”.  악질의 정치인 자식들이 제멋대로 이 사회를 휘젓고 다니며 법질서를 파괴하는 것에는, 질투의 근원인 과도한 자기애의 속성 때문에 자신이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질투란 본디 시기하며 악의 품은 곁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기중심적 악의에서 출발하는 까닭이다.

 

때문에 자기를 정점으로 세상이 작동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우수한 것이라도 짓밟아 파괴시켜 버리려는 냉소적 무관심이요 악질적 경멸의 심리이다. 이러한 인간들은 결코 타인이든 세상사든 모두 자기애에 부속적일 때만 연대의식이 작동되기에 거의 모든 행위가 증오로 뭉쳐진 적대감이다. 오늘 한국사회 권력자의 행태는 해즐릿의 통찰처럼 절대적 질투의 화신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기심이 낳은 기형아의 전형이랄 수 있겠다. 사회적 행위에 있어 인간이 보이는 행태에 이 질투라는 감정이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그래서 우리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타인과 사회를 이해, 비판하는 근거로 읽게 된다.

 

3. 학자들의 무지에 관하여

 

읽고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게 낫다.” -132

 

이 글은 나의 독서 행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도록 하였는데, 바로 다음의 문장에 작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머릿속 빈곳에 채워지고 끊임없이 서로를 삭제하는 낱말들과 설익은 비유가 지겹게 끝없이 펼쳐지는 책에 만족하며 가만히 앉아 있다.”, 책을 자연을 바라보는 안경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자연의 강렬한 빛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차단하는 막으로 쓰는 자기 생각 부재와 실제 세계의 이해에 무력함을 해즐릿은 지적하는 것이다.

 

학식은 진정한 지식을 대체한다!”  세상의 혼잡과 소음과 눈부신 빛에서 고개를 돌리고 죽은 언어들의 조용한 단조로움과 덜 놀랍고 더 알기 쉬운 문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돌리는 책벌레가 빠지는 함정이다. 사실 이 문장을 일반화하여 독서와 학식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분명 오류이지만,  책이라는 이질적 출처에 생각을 의존하는 습관이 생각의 내재적 힘을 약화시키는 것 또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오직 책에서 책으로 건너가는 독서광들은 어쩌면 살아있는 세계의 형태를 표현하는 데 서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서평가들이 정작 자기만의 고유한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원인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내던지고 스스로 생각하라!”

 

책벌레는 글자로 구성된 일반론의 거미줄로 스스로 돌돌 말고서

다른 사람들의 두뇌에서 반사된 가물거리는 그림자를 볼 뿐이다.” -132~133

 

해즐릿은 명문 이튼스쿨의 우등 졸업생인 인물이 가장 훌륭하지 못한 정치인이었음을 예시하며, 배운 것만 잘 기억했지 결코 총명하지 않은 아이가 대개 전체 일등을 한다고 경험과 열정, 창의를 추구하는 살아있는 지식에 무지함으로써 빚어지는 학식의 무모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우리 사회 또한 어린 시절 시험 성적이라는 달달 학습한 기억지식을 우수한 지성으로 인식하는 토대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눈과 귀의 위대한 세상이 가려진 채 책이라는 하나의 문만 열려 있을 때 그 사회가 무지에 맥없이 빠져드는 현상이 발생함을 오늘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 때문에 우리들은 이기심이 낳은 저 기형아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지금 신음하고 있지 않은가.

 

4.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 맨주먹 권투

 

앞 선 세 꼭지의 에세이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글들이다. 특히 죽음의 공포에 관하여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논란을 겪는 노인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示唆)하는 바가 높은 사유의 글이다. 나 또한 이제 나이가 제법 들어차면서 죽음의 관념에 곧잘 잠기게 되곤 한다. 어느 새 발치에 안개가 끼고 나이의 그늘이 자신을 감싸드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느리지만 엄숙히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몽상은 죽음은 단지 추상적 명제이거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동의에 그치고 자신에게 온다는 것을 깊이 깨닫지 못한다.

 

해즐릿은 노년의 길고 우울하고 장엄한 색채와 가을 저녁의 어둠이 모든 것을 덮는 시간이 파괴한 것들 속으로 사라질 것을 예감하지 못하는 젊을 때에는 물체와 감각의 무리에 가려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젊음만이 죽음의 필연성을 자기와는 멀고 먼 불가능의 진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많은 대부분의 산 사람들은 죽음의 다가옴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인간 사회의 정치적 현실은 갈등에 휩싸이곤 한다. 마치 자신들에게는 절대 노화와 죽음 같은 것은 오지 않을 것이기에 멸시하고, 혐오하고, 부정함으로써 영원히 현재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해즐릿은 이러한 인간들일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다고 지적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편애 때문인데, 물론 삶을 사랑하는 습관적 애착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에 가까워진 노인들 스스로가 활동적이고 삶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지원하고 응원하는 세계여야지 그것을 박탈하려는 그 어떤 것도 비윤리적이요, 부도덕한 저열성이란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 온 뒤 세상으로부터 빨리 잊힌다고 나는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해즐릿의 말처럼 무대 위에 있을 때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니말이다. 햄릿31절의 대사처럼 오래 사는 불행은 겪고싶지 않은 마음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신선한 통찰들이 가득한 글이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질투에 관하여두 글에 대한 보충적 논의로 읽어도 될 것 같다. 호감을 살만한 거의 모든 자질에도 불구하고 괜히 비위를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한 관찰이기에 우리들 자신의 언행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혹여 나는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타인에 은혜를 베풀 듯 행동한 적은 없는지, 선행을 모종의 암시를 흘리거나, 꺼내지 말아야 할 화제를 꺼냄으로써 친절을 가장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끝으로 맨주먹 권투라는 에세이는 문자 그대로 맨주먹으로 벌이는 권투 시합의 생생한 관람기다. 챔피언으로 자신을 과신한 개스맨이라는 선수가 과대한 자기평가에 매몰되어 박살나는 광경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해즐릿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모습이 선연한 작품이다.

 

아마 당대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인물들에서 그는 이러한 자만, 자기애의 오류를 무수히 목격했기 때문 일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오늘에도 전혀 다르지 않다. 이 에세이들은 위대한 탐구적 지성이 자신의 생각을 잘 알고 그것을 힘차게, 눈부시게 밀고나간, 모든 힘이 정제되어 들어있는 영혼의 글들이랄 수 있다. 그 신랄하고 절박한 열정에 독자는 끌어 당겨져 몰입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그들의 사회는 200년 전 해즐릿이 살던 곳과 근본적 질서는 물론 그 어떤 인간본성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세상사의 이치를 전하고 싶어 했던 일류지성으로부터 오늘의 우리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이다. 윌리엄 해즐릿 읽기를 감히 모든 독서가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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겅클
스티븐 롤리 지음, 최정수 옮김 / 이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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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인 겅클(Guncle)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단어의 외형이 이미 그 개념을 드러낸다. 게이 삼촌. 겅클은 또한 아이들로부터 거프(Gup; Gay Uncle Patrick)로도 스스럼없이 불리는데, ‘게이 삼촌 패트릭은 끔찍해하지만 굳이 아이들의 순수함이 기꺼이 수용한 친근한 언어이기에 사용을 금지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엄마이자, 동생 그레그의 아내였던 패트릭의 오랜 여자사람 친구였던 세라의 오랜 투병과 죽음은 이들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죽음을 앞두었던 아내의 상실에 대한 고통으로 이미 심한 알콜 중독상태에 빠져있던 그레그는 형 패트릭에게 아홉 살 메이지와 여섯 살 그랜트를 자신의 중독치료 기간동안 맡아 줄 것을 부탁한다.

 

자신의 배우자였던 조의 죽음에 대한 비탄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패트릭에겐 절망적인 부탁으로 느껴지지만 동생의 상태를 치유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받아들인다. 인생의 중반에 어언 사년간 사막의 사유지에서 숨어 지내왔던 패트릭은 두 아이들과 상실의 고통을 서로 보듬고 직시하며 그 상황을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를 배워 나간다. 작품의 초입부터 뚜렷하게 도드라져 소설을 더욱 매혹적인 작품으로 이끄는 주요 동력이 있는데, 패트릭이 어린 조카 아이들에게 하는 말투(語調)의 양식이다. 그는 마흔 중반의 영화배우가 동료들과 나눌 때 사용함직한 언어를 그대로 들려준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말들은 친절한 설명과 그 말이 어떤 의미로 이야기 된 것인지를 알려준다. 세상에 대한 신랄한 경험의 말이지만 안전한 방식으로.

 

이것은 세 사람의 구십 일간 함께하는 일상에서 선언되는 십여 가지의 겅클 규칙으로도 드러나는데, 거프, 왜 다른 사람처럼 말하지 않아요?”라는 여섯 살 그랜트의 물음에 패트릭은 단호히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들만의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지함만으로 흐른다면 이 소설은 다소 지루해버렸을 테지만, 아이는 삼촌이 하는 행위를 쫓아 거슬리는 행위를 하고, 패트릭은 이내 그런 조카에게 주의를 준다. 이때 어린 그랜트는 나 자신이 되고 있어요.”라고 받아친다. 아이만의 유머와 유쾌함이 깃든 수용 방식이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함께하는 법을 배워나가며, 슬픔의 비통함에서 탈출하기 위해 서로의 이해를 넓혀가며 삶의 길을 밝혀나간다.

 

아홉 살 메이지의 당돌한 표현들은 소설의 흐름에 깊숙이 개입하여 아이들의 상실의 슬픔에 대한 이해의 워크북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삼촌 애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되죠. 안 되나? 안 되죠! 우리를 달래줘야죠, 그것도 몰라요?” 어린이답게 웃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걸 육아라고 생각지 않는 패트릭에 대한 세상의 진부한 언어를 장착한 아이의 항의다.

 


페트릭은 일상의 행위와 언어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체현토록 한다. 겅클 규칙 7, 이 집안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옷을 입는다. 남자 옷이냐 여자 옷이냐는 상관없다.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어때?”, 혹은 그건 여자가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 이 집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니? (...) 남자 일 또는 여자 일이라는 말조차 있어선 안 돼. 사람은 그냥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이들 대화로부터 독자는 편견없이 사랑하고 진정한 자아를 가꾸도록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도록 신중하게 선택된 언어임을 말하는 패트릭을 알아차릴 수 있다.

 

특히 아이들과 삼촌 패트릭이 아이들의 엄마 세라의 생일을 기리며 케익에 세 개의 촛불을 켜놓고 각자의 소원을 비는 장면이 있는데, 같이 할 수 없는 사랑했던 존재의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상실을 어떻게 자기 생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지를, 혹은 분리 할 수 있는지, 자기 내면의 진솔함을 당당하게 꺼내도록 함께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상실의 슬픔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패트릭은 아이들의 엄마, 세라를 향해 소원을 말한다. 너를 힘들게 한 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 네가 빛으로 가득하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길. 그리고 춤을 출 수 있길 바라...”, 그때 그랜트가 삼촌을 향해 그 소원 좋아요, 거프, 이 대화가 얼마나 아름다움으로 충만했는지, 존재에 대한 사랑과 아이들 마음에 대한 이해가 어우러져 인생의 이야기란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빅토리아 베넷의 언어와 함께 진실의 언어로 내게 새겨진다.

 

소설은 마음속을 맴도는 상실의 비탄을 함께 나누며,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나가는 아이들과 겅클의 성장기다. 아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아이에게 패트릭이 전하는 난 너희가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단다. 산다는 건 가장 드물고 귀한 일이야.”라는 아이들에게는 어렵게 들릴 말이지만 그 진정함에서 그것은 곧 자신을 향한 언어이기도 함을 읽게 된다. 동성인 배우자 조에 대한 상실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패트릭은 아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놀라운 생명선, 회복 탄력성을 발견하고,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길을 찾아낸다.

 

헐리웃을 연상케하는, 대중의 일상적 삶에 신선한 유쾌함을 던져줄 그런 통속적 소재의 이야기 전개를 보이지만, LA에서 직선거리 150Km 떨어진 주요 배경인 팜스프링스처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문화의 유머와 속도감, 기분좋은 감동만을 빼내 상실의 슬픔과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우아하게 직조해 낸 작품이라 하고 싶다. 아이들의 온 숨이 넘어갈 듯 까르르대는 그 즐거움에 함께 순수해지는 웃음소리, 이야기를 관류하는 가장 사랑하던 엄마, 그리고 연인과 아내의 상실이란 슬픔으로 인해 흐느끼는 자기 소외의 고통을 온전하게 품어낸 소설이다. 그 안에 깃든 마음 속 깊은 서로에 대한 의지와 용기의 감정, 그 사랑의 정체가 독자에게 깊숙이 스며들어 환한 감동의 웃음을 지으며 춤추는 그들을 그려 보게 된다. 내면의 그 무언가가 녹아내리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우린 힘든 여름 내내 우울하게 지내는 대신 파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겐 여러분이 필요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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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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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거늘.”

-사무엘 하126절에서

 

그래,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다는 성경 속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간절했던 열여섯 살 청소년의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랑이야기는 주검과 그 주검의 봉분 위에서 왜 춤을 추었는지, 그 기이한 행동의 동기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의 글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 사랑과 주검이 대체 어떤 의미였는지를, 법원 판결을 위해 그 당사자인 헨리 로빈슨(이하 로 표기)이 망자에 대한 모독으로만 보이는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행위를 했는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자 하는 사회복지사의 몇 차례의 면담 시도 끝에 마침내 핼이 써 낸 집요하고 세밀한 자기 관찰기이며, 사건에 이르게 된 동기와 내용의 진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쓰고보니 지나치게 무겁고 밋밋한 형식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단코 주검의 어두운 무게가 짓누르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해변과 바다와 요트, 그리고 오토바이와 침실과 사랑과 질투가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그런 열정의 이야기다.

 

이렇게밖에 묘사하지 못한 것은 감상자의 문장과 문체에 대한 열악한 능력일 뿐, 소설에서 사용되는 어휘를 비롯하여 하나하나의 문장, 그리고 그 구성에 있어 기발한 유머와 재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연결하기 위해 구사하는 수정, 위안, 액션 리플레이와 같은 앞 선 기술(記述)을 거듭 부연 설명하는 문장 기교로서의 인터페이스는 물론, 사회복지사 보고서라는 제 3자 시선의 글이 틈틈이 교호(交互)하여 이야기의 긴장과 흥미를 견인하는 세련되고 우아하기까지 한 그야말로 생동하는 정념의 열기로 들끓는다. 정말이지 스타일리쉬!한 소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이 열여섯 살 핼의 격렬하고 생생한 사랑의 이야기이자 그 설렘에 얽혀드는 비극의 긴장미를 말하는 대신에 조금은 사변적 감상을 쓰려고 한다.

 

모든 일은 2초 사이에 일어난다.”

 

핼은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한 문장, 한 순간의 굴복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은 / 한 시대의 분별로도 돌이킬 수 없도다.”를 인용하며, 모든 일에는 어떤 순간이 있음을, 돌이 킬 수 없는 지점, 한 걸음 더 내디디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이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가슴이 절로 울렁거리며 성큼 사랑에 다가서고 만다. 핼은 바다에 끌고 간 요트 전복의 순간, 그리고 그를 조난의 순간에서 구해준 친절한 또래 청년 배리 고먼을 바라보았을 때, 배리가 그에게 자신의 레코드가게 아르바이트를 권하며 함께 일하기를 제안 했을 때, 핼은 이미 배리에게 저항 할 수 없는 정념의 감정에 휩싸였다.

 

소설은 이처럼 자신을 잃은 채 온통 사랑에 몰두했던 열여섯 소년을 그린다. 그런데 이 소설은 핼이 쓴 사건과 사건에 이른 나날에 대한 성찰기이며, 바로 소설인 이 글을 쓰는 핼의 글쓰기를 통한 자기 발견의 여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의 진로선택과 그 선택의 당위성, 그리고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불가피하게 거쳐야하는 고통스러운 성장과제에 대한 꼼꼼한 자기 관찰의 목소리가 곳곳에 흩어져, 소설 혹은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경험의 경계를 초월한(메타적) 문장론이거나 소설론을 엿보게도 한다.

 

이를테면, 나는 나의 과거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정신기술로 배리의 눈, , , 몸의 움직임, 목소리의 근접 촬영분을 엄선해 모호한 의미를 탐색하고 많은 것을 발견한다. 육체로 이루어진 어휘를.”이라거나, 지난 일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있다. 우리가 한 모든 말, 행동, 디테일, 소소한 단편, 그 단편들을 모아서 커다란 단편으로 묶으려고 한다. (...) 하나의 전체로, 어떤 의미가 있는. (...) 나에게 그를, 또 나 자신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마치 소설 쓰기의 훈련 작법을 소개하는 것 같은 문장들이다. 물론 이러한 문장들은 배리와 핼 자신의 사랑의 여정에 대한 빠짐없는 묘사를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실 핼의 정념으로서의 사랑 이야기는 청소년이라는 성장기 인간의 경험 부재의 미숙함에서만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열여섯 살 핼에게는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놀라움이었겠지만, 이것은 안다고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이성이 쉽사리 통제할 수 있는 그런 것과는 다를 것이다. 자극에 빠져들고, 이성을 잃고, 상대에 빠져드는 것은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이며, 또한 그 맥락과 상황은 조금씩 다르게 반복되어 우리를 도전에 몰아넣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는데, 핼이 배리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겨 거친 말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배리가 핼에게 쏟아붙는 말들인데, 나는 네가 지겨워!”,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네가 원하는 건 우리 둘이 무언가를 같이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나일뿐이지. 나의 전부에서 드러나는 핼의 사랑이란 관념이 빠져있는 오류의 지적이다.

 

어쩌면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라 말할 수 있는 만큼, 철학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부분인데, 핼은 모든 환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무수한 구멍이 생겨나고 그 구멍으로 현실이 침투한다.”, 결코 자신은 죽음과 같은 관념에 매몰된 관념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런데 여자사람 친구인 카리는 그에게 너는 설익은 관념들을 사람보다 중요시하고, 너 자신의 한심하고 탐욕스러운 감정에만 온 관심이 쏠려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감상자인 나는 카리와 배리의 지적이 핼을 올바르게 판단한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핼은 자신과 배리가 나눈 말(대화)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표정, 몸짓, 분위기,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나타났던 상황과 장소, 맥락에 이르는 드러난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쓴 이 소설, 이 글에 대해서 앞에 적은 말들은 우리가 직접 한 말들이다. 하지만 우리 얼굴 뒤쪽에서는 더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더구나 감상글의 모두에서 말한 바처럼 그는 이미 묘사한 글에 뒤이어 수정의 글을 다시 덧붙여 쓰거나, 자기감정이 투사된 글에 위안이라 하여 추가글을 보충한다. 이도 부족했던지 액션 리플레이라 하여 실제 발생했던 모든 언어와 행위, 상황 일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장면으로 철저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핼은 죽음의 관념에 사로잡힌 관념론자도, 인식론자도 아니다. 그는 마치 대상 그 자체의 나타남, 그것을 신뢰하는 현상학자에 가깝다. 그래야 핼이 배리에게 2초 남짓의 순간에 사랑에 빠져드는 것, 배리의 모든 몸체를 자기 지각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이 설명된다.

 

배리의 무덤에서 춤춘 것? 사랑했던 친구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었으며, 그 친구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졌고, 그래서 그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비난과 함께 핼이 원한 건 배리라는 관념이라고 지적하는 카리의 말은 설명은 옳은데, 귀결은 전혀 잘못 된 것으로 보인다. 핼은 철저하게 대상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바로 그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보살핌, 기댐과 같은 몸의 얽힘, 몸의 지각을 신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뢰가 속박이요, 소유욕이요, 지루함이라 말하며, 오토바이를 질주하며, 짜릿함의 일탈로 벗어나려는 배리의 행위는 이 세계와 인간, 그리고 여타 대상에 대한 사랑을 진정으로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요즘의 사랑들은 배리의 사랑처럼 금세 싫증내고, 그 익숙함, 그 얽힘에 깃든 제한된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자유란 본래 조건부의 자유이지 완전한 자유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미 몸이란 것에 구속된 존재가 어떻게 몸을 벗어나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쉴 새 없이 짜릿하게 살 수는 없는 거야라는 말이야말로 진실의 일부를 담아낸 것일 게다.

 

아마도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만큼은.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까?”

- 이 문장보다 더 현상학적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결정적인 단서!, 핼은 나는 내 몸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것을 떠나게 된다면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대목이다. 이 문장에 이어서 노화의 무수한 단점들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건 단지 몸지각의 무뎌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해가 족할 것 같다. 이보다 인용 문장처럼 핼은 몸이 지각하는 것, 그것이 삶의 진실이기에 그 것을 떠난다는 것, 즉 죽음에 의해 주검이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것 아니었을까? 49일간 이어졌던 첫 사랑의 주검이 누워있는 무덤위에서 춤을 추는 것은 그와 한 약속의 이행이기도 하지만, 자기와 얽혀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이해했던 존재에 대한 상실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의식, 새로움을 위한 몸의 습관을 떨어내는 의식으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무진장한 다양성을 경험 할 수 있는 새롭게 변화된 몸으로의 지향을 위해. 카뮈의 말처럼 주검인 무덤, 그것에 대한 조롱과 모욕의 몸짓은 바로 이 새로운 몸들의 태어남이라는 지향의 몸짓인 것 아닐까?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썸머 85에서


결국 핼은 모든 것이 가라앉을 수 있는 시간,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더 많은 걸 쓰고 싶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현재에 파묻히지 않고 새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라며, 세상에서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쓴다. 이 문장은 소설의 첫 문장인 나는 주검에는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돌아가 조우한다. 나는 실존주의의 현상학자 샤르트르의 옅은 그림자를 이 소설에서 본 것 같다. 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영문학 선생 오즈번의 말처럼 핼이 쓴 이 글은 핼의 인생에 새롭고 의미있는 구심점이 되고있는 성찰적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통제하기 힘겨운 에로스의 뜨거운 에너지를 다루는 성장의 의례적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체험의 성찰을 통한 자기 발견의 철학적이며 문학적 행보라 말하고 싶다.  아무쪼록 이 사랑 소설은 이야기의 긴장감이나 생동감, 강력한 흡입력을 장착한 재능 넘치는 작품이다. 누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채로운 텍스트 구성의 맛깔스러움으로 이야기 전개에서 도망치기는 힘겨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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