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목소리에서 감지되는 미세한 악의, 교활하게 아주 조금씩만 거칠어지는 행동,

그때마다 더듬이들은 온몸을 떨며 고통스러워했다.” -167

 

기묘하게 시의에 맞춘 작품이 되었다, 악의 흉물스러움을 마주하는 바로 지금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 악의 편재성을 성찰하는 또 한 차례의 기회가 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인 표제 속 전수미는 아마도 세상 모든 곳의 ()’이라는 인간 모두에 두루 내재하는 것으로서의 하나의 표상일 것이다. 소설 속 화자는 바로 전수미의 동생 전수영이다. 수영의 성장 과정에 늘 전수미는 부모의 사랑에 접근하는 기회를 동생에게서 빼앗고, 온갖 교활한 사건사고를 통해 시선을 자신에게 붙들어 매어두는 존재다. 그로인해 수영은 모든 것을 양보하고, 관심으로부터 소외된 삶이 불가피하게 강제된 것이어야만 했다.

 

보란 듯 부모의 침실에 남자를 끌어들인 후 엄마에게 영상을 보내고 그 혐오스러운 적나라함을 목격하게 하는 전수미의 행위는 관심을 넘어 당혹과 걱정, 온 가족을 고통으로 몰아넣음으로써 획득되는 즐거움이다. 수영은 이러한 집안 상황에서 부모에게 그 어떤 연민이나 사랑도 기대할 수 없음을 안다. 이러한 전수미의 행위로 인해 닮은 모습의 수영은 앙심을 품은 또 다른 추악한 남자들로부터 기습적인 뭇매와 수모를 감당하는 일상이 계속된다. 그 누구라도 이 악으로 똘똘 뭉친 존재를 단지 피붙이라고 관용하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영은 그 참담한 희생, 아니 일방적 피해로 점철된 현실에 이를 간다.

 

수영은 전수미라는 악의 물리적 접근이 가능한 집을 떠나기 위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1년 내 몸이 파손되는 악명 높은 배송분류 아르바이트를 버텨낸다. 오직 악의 영역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작은 전세방이라도 구할 목돈의 마련을 위해서. 그 작은 돈으로 주변 환경이 열악해 값싼 방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수영에게는 집을 피해 오직 자신만의 삶을 꾸릴 수 있기에 마음의 평온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리곤 계속해서 주변에 지속해서 혐오시설들이 잔존하기를, 집세가 오르지 않기를, 그래서 계속해서 살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족 내 악의 존재에 대한 증오의 서사는 수영이 새로이 개원한 노견(老犬)들의 돌봄을 전문으로 하는 동물병원에 취업함으로써 늙음과 그 노화에 따라붙는 곤혹스러운 질병들과 죽음이 그 당사자들의 가족들, 돌봄을 맡게 되는 존재들, 바로 우리들에 어떤 영향을 초래하는지 그 실상을 투영한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늙은 개들, 더는 이들을 바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이 돌볼 수 없게 된 개들이 맡겨지는 죽음 이전에 경유하는 장소다. 수영은 원장의 말마따나 절실해서 뽑힌 직원이다. 그녀와 이유는 다르지만 또 다른 절실함으로 인해 취업한 소란과 함께 개들을 나누어 돌보는 노동을 한다. (노동자의 절실함을 이용하려는 탐욕스러움, 그 이기심이란!)

 

말 못하는 생명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그들을 씻기고 산책시키고, 이상 징후를 수시로 점검하는 가운데 늙음의 슬픔과 연민을, 그들 주인이었던 인간들의 사정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맡긴 시간이 길어질수록 병원비의 부담이 가중됨을 암시하는 견주들의 감정적 징후의 변화와 함께 병원비에 대한 이의가 제기될 때면 개들은 적절한 시간에 맞추어 죽음이 행해진다. 이제 늙고 병든 인간은 으레 요양원으로 보내지거나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삶의 마지막 종착지처럼 여겨지곤 한다. 우리들의 부모이자 형제자매인 노인들이 겪게 되는 돌봄의 현주소와 교차되며 오늘 우리들의 심연에 자리한 불편과 부담이라는 언어에 가려진 작은 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수영은 원장이 내건 동물 돌봄의 언어 뒤에 재화를 향한 꾀바른 욕망만이 있음을 안다. 오직 견주의 지불 능력의 판단에 따라 맡겨진 노견의 죽음의 시간이 정해진다는 것을, 요양원이라는 인간 돌봄 시설의 돌아가는 현 실태와 그리 다른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맡겨진 노쇠한 인간을 찾는 가족의 발길이 뜸해지고 어느 시점부터는 비용의 납부가 지연되거나 지불 능력이 사라졌음을 알아차리게 될 때, 그 인간의 운명 또한 얼마 남지 않았음의 표지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 세계의 작동이 예외 없이 돈의 지불 능력, 이 한 가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제아무리 생명의 고귀함, 신성함을, 그리고 도덕적 책무를 고상하게 떠벌리고 있지만, 우리들의 사회는 이러한 현실의 부담을 결코 나눠 가질 의도란 것이 전혀 없음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수영은 노견 한 마리의 배 아래 쪽 망울이 느껴지고, 그것이 어떤 질병의 징후임을 어렴풋 감지하지만 원장에게 전하여 치료하는 것을 미루다 그것이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러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한다. 수영이 그 개에 대한 연민이 없어서거나 돌봄의 게으름 때문이 아닌 표현할 수 없는 늙음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함께 그의 죽음을 방치코자하는 묘한 양가감정의 혼란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견주가 겪는 경제적 고통과 각박한 삶 속 심리적 상처를 헤아린 표현키 어려운 감정이 야기한 행위로 보인다. 이유야 어떻든 수영의 방치로 인해 개는 죽어 화장된다. 어느 날 망울을 반복적으로 어루만지는 수영의 동작이 녹화된 CCTV를 내미는 원장으로부터 묘한 협박을 받고, 이에 상응하여 병원의 실상에 대해 수영이 입을 다물 것을 넌지시 압박받는다.

 

이제 아주 중요한 이 작품의 정교한 구성을 말 할 때가 된 것 같다. 수영은 언니 전수미의 지속되는 악행의 피해자임에도 수동적 태도를 견지하며, 단 한 차례도 진실을 부모나 여타 인물에게 전하지 않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추리물처럼, 어떤 반전, 그 이면에 묻힌 진실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남기며 이 소설은 이야기의 힘을 잃지 않은 채 이어지게 하고 있다. 이 점만으로도 작품은 강력하고 정교한 구성력이 돋보인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수미가 수영의 어떤 약점을 틀어쥐고, 그 반대급부로 악행을 통해 버젓이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전수미는 자신이 일하는 요양원에서 한 노인의 죽음을 방치함으로써 살릴 기회가 있었음을 고의로 회피했다는 증거에 의해 살인죄로 수감되어 있고, 그녀의 변론을 위해 변호사는 수영에게 가족으로서 우호적 증언을 요구하지만 수영은 그에 응하지 않는다.

 

수영은 어린 시절 유일하게 가족들이 함께 캠핑을 나섰던 어느 날을 기억한다. 전수미가 텐트에 불을 질렀던 그날에 벌어졌던 하나의 트라우마인 사건을, 하얀 껍질의 자작나무가 곧게 솟은 숲 속에서의 비밀을, 수영은 더는 세계의 뒷면에 나를 가둬두지 않을 것임을, 자신을 땅 속 어둠에 가라앉힌 그 비밀의 옭아맴으로부터 벗어날 것임을 다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난 전수미가 아니니까.”, 수영은 자신의 어둠, 작은 악의 모습을 보았다. 지금 그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인간들의 의식적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내면의 악을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 안의 악에 대한 인식의 경고 문장이 이에 맞춤인 것 같다.

 

이 작품이 그 구성의 세밀함에 더해 또 하나의 미덕이라면 수영의 삶, 그녀가 사는 법을 체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는 법이란 결코 단순하고 진부한 언어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악을 조금씩 길들여 조절하는 작업이 바로 사는 법의 체득이다. 이것은 결단코 외로운 작업이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수영은 바로 견주들, 같이 일하는 동료인 소란, 그리고 노견들에 대한 사랑,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관계성을 회복하고 악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일 게다. 병원은 문을 닫게 되고, 오갈 때 없어진 소란에게 자신도 모르게 함께 지낼까하고 말한다. 그녀는 이것을 내가 진짜 하고 싶어 하는 말, 내 양심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비밀의 음습한 지대를 떠나 관계가 있는 연대의 세계로 나섬으로써 그녀는 세상의 일부가 되고 자기안의 악과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일 게다.

 

오늘 우리들은 자기 안의 악은 한 번도 주시하지 않은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하고, ‘나만큼은 선인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의 그 무섭고 집요한 한 인간을 보고 있다. 그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은 외면하고 악을 자기 바깥의 세계로 몰아대는 비상식적 착각을 인지하지 못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둠의 그림자에 압도된 인간, 악은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바로 자기 내면의 악에 압도된 인간, 무사고(無思考)적 인물이며, 에고이스트처럼 우리는 언제든 그와 같은 흉물이 될 수 있다. 안보윤 작가의 이 소설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 내면의 악,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를 인식토록, 그로써 세상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전수영의 사는 법이라는 그 체득의 과정을, 그녀들에게 보내는 헌사로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템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찬란한 신세계여이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니!”

-5막 1, 181~184행 에서


셰익스피어는 그의 극작가로서 일생의 활동에서 정말 이 희곡 미랜더(Miranda)의 대사처럼 이상적 국가, ‘, 찬란한 신세계로 부를 요소들을 발견했을까?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주인공 푸로스퍼로(Prospero)를 통해 이제 저의 공국도 회복하고 사기꾼도 용서하였으니 당신의 주문으로 이 섬에서 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 여러분도 범죄를 용서받으시려거든 관대하게 저를 놓아주십시오.”라며 이 작품을 끝으로 에이본(Avon) 강가 스트래트퍼드에서 은퇴의 삶을 시작했다.

 

셰익스피어는 마침내 신세계, 아름다운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요소들을 찾아냈을까?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그의 독창적인 비평서 William Shakespeare에서 오랜 극작가로서의 숱한 추구에도 불구하고 풍요와 조화, 평화로 채워진 세계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자연의 극악한 신비화, 이유 없는 마술적 장치에 의존하여 멋진 신세계를 붙들어 놓으려 했지만 그 어떤 장치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가 극예술로부터의 퇴장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 비판은 절반의 진실만 담고 있는 듯하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많은 전문가들이 템페스트배신과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한 것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고 한다. 작품의 표면적, 혹은 서사적 줄거리는 물론 이들의 해석에 동의케 하지만, 작가가 흩뿌려 놓은 대사 속 문장들은 이보다는 한 예술가의 고뇌를 엿보게 한다. 그는 연극배우이자 극작가였다. 육체와 언어를 활용하는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육체와 언어의 조화를 향한 갈망만큼이나 그 한계에 대한 뼈저린 인식이 컸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이 폭풍을 맞이하여 고투하는 수부장과 대 귀족과의 언쟁으로 시작하는 것을 작가의 강한 의지의 산물로 보아도 될 것이다.

 

거센 폭풍에 의해 난파에 몰린 배를 구하기 위해 사투하는 수부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처절한 분투에 귀족 곤잘로는 수다스런 말로 간섭해댄다. 이때 수부장이 내뱉는 말은 육체와 말의 쟁투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파도들이 왕의 이름 따위에 관심이나 있는 줄 아시오? (...) 이 폭풍과 물결에 대해서 잠잠해지도록 명하여 평온하게 만든다면 저희는 더 이상 밧줄을 다루지 않겠습니다.” 말의 공허, 자연에 대한 그 무기력함과 대조되어 육체의 실존적 쟁투는 마치 정신에 대한 육체의 승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폭풍이 자연이라는 물질성에 의해서가 아닌 12년 전 배신에 의해 바다로 내몰렸던 푸로스퍼로의 마술, 즉 말의 형상화라는 점으로 이는 다시 역전된다. 이러한 투쟁은 작품 내내 지속되는데, 푸로스퍼로와 미랜더 부녀가 바다에 실려와 살게 된 섬의 주인이었던 마녀 시코랙스의 사생아인 괴물의 형상을 한 캘리밴과 공기의 정령 에어리얼의 대조적 수행 관계를 통해서 육체와 정신의 갈등은 푸로스퍼로를 통해 상징적으로 한 인간의 내면적 긴장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문장들은 푸로스퍼로의 노예가 되어 그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되는 캘리밴이 나누는 대화는 이를 반영하는 한 예로 보아도 될 것이다.

 

푸로스퍼로: 내가 네 자신의 말뜻도 모르고 그저 짐승같이 떠벌리기만 할 때, 난 말을 가르쳐서 의사가 통하도록 해주었다.

캘리밴: 당신은 나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소. 그 덕으로 내가 얻은 이득은 저주하는 법을 아는 것이 전부요. - 12중에서

 

이것은 서사의 진행 과정 중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대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푸로스퍼로의 육체성의 상징으로 캘리번을 읽게 되면 푸로스퍼로가 자신의 신체를 정신이라는 언어, 즉 문명화하기 위해 노력을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여전히 결실을 맺고 있지는 못하지만, 극의 결말에 이르러 캘리밴의 정신적 승화가 이루어져 푸로스퍼로가 어떤 융화, 조화의 평정에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육체와 정신에 대한 이해는 푸로스퍼로의 딸 미랜더의 대사에서도 반영되어 드러난다. 난파선으로부터 살아나 섬에 오른 나폴리 왕국 알론조 왕의 아들 퍼디난드에 대한 그녀의 묘사이다. 만약 나쁜 정신이 저렇게 훌륭한 집을 쓰고 있다고 한다면 선한 것들도 거기에 살려고 그것과 경쟁할 거예요.”

 

이 대사는 멋진 용모를 한 인간은 결코 선함이 거기 깃들어있을 거라는 주장이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로운 융합에 대한 기대심리인데, 바로 이에 근거한 대사가 이 희곡의 명대사인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 찬란한 신세계여(51)”이다. 한편 푸로스퍼로의 정신, 그의 언어를 물성으로 대리 수행하는 에어리얼과의 관계가 이와 대비되어 극의 중요 축을 이룬다. 에어리얼은 공기의 정령으로 푸로스퍼로의 말을 행위로 수행하는 존재이다. 그는 푸로스퍼로의 약속에 대한 신뢰로 적극적으로 돕는다. 에어리얼은 보이지 않는 정신의 상징이며 물성을 통제하는 힘이다.

 


밀라노 대공이었던 자신을 배신하고 나폴리 왕과 결탁하여 죽음의 바다로 내쫓은 분노로 야기된 폭풍의 마법을 행함에 있어서도, 또한 섬에 생존하게 된 나폴리 왕과 배신자이자 왕위 찬탈자인 자신의 동생 앤토니오 일행에 대한 동정심을 권유하는 것도 에어리얼의 목소리다. 마술이 매우 강력하게 그들에게 미쳐서 그들을 보시면 마음이 누그러질 것입니다.” 이에 대해 푸로스퍼로 또한 그들과 같은 인종인 내가, 그들에 못지않게 날카롭게 정서에 반응하고 고통도 느끼는 내가, 너보다 더 동정적이지 않겠느냐? 비록 그자들이 나에게 저지른 큰 죄는 나의 골수에 사무치나, 나는 고매한 이성으로써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이다. 더 귀한 행동은 복수에 있기보다는 용서의 미덕에 있는 것이다.”라고 이미 절대적 용서의 가능성을 예고케 한다.

 

그럼 무엇이 이러한 악행과 씻기지 않은 분노를 용서와 화해에 이르게 한 것일까? 이 작품을 또 하나의 사랑의 서사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더해 푸로스퍼로가 캘리밴이라는 자기 육체의 야만성과 에어리얼이라는 정신의 문명성이 오랜 갈등 끝에 내적으로 화해하였음에 기초하는 것일 게다. 적의 자식인 퍼디난드와 딸 미랜더의 사랑과 결혼을 축복하기까지 푸로스퍼로가 퍼디난드에게 육체노동이라는 시험을 부과함으로써 그 수행과정과 그 가운데 움트는 순수한 사랑의 과정을 발견케 하는 것은 곧 두 극단의 감정을 봉합하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사랑의 결합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작품은 표면적 이야기처럼 그리 단순하고 명료한 해석을 이끌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말의 물성과 정신성이라는 측면에서 에어리얼이 갈구하는 푸로스퍼로부터의 속박, 다시 말해 그의 말의 물적 수행자에 붙들려 있는 한 자신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답답하게 여기고 있는 까닭이다. 마침내 푸로스퍼로의 조건 없는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는 무()로 환원되어 공기로 흩어지는 자유를 얻는다. 어쩌면 셰익스피어 자신이 언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새롭게 살고자하는 심정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 속에서도 계속 방황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퍼디난드는 미랜더를 처음 대면하자 사랑에 빠져들고 감옥처럼 작은 섬을 충분한 공간이라 느끼고, 미랜더 또한 아버지 아닌 최초의 인간이자 남성인 퍼디난드를 보고는 더 훌륭한 남자를 찾을 욕망이 사라져 버리듯 지극히 제한된 곳에서 자유를 발견토록 한 것인데, 에어리얼이 욕망하는 자유와 두 연인의 자유 사이에서 고뇌하는 작가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는 스트래트퍼드로 은퇴하는 길을 선택했으니 아마 에어리얼의 제약 없는, 그 어떤 속박도 없는 자유를 욕망했던 것일 게다.

 

그것은 언어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극예술로부터의 자유, 언어의 물성으로부터의 자유이지 않았을까? 극의 주요한 제재인 푸로스퍼로의 마술은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을 물리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창조적 말의 산물을 상징하는 것이고, 푸로스퍼로가 마술 가운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마술책을 일찍이 어떤 측면도 닿지 못한 바다의 깊숙한 곳에 던져버리는행위는 극작가로서의 자리를 내려놓고 오직 순수한 삶의 존재로 남기로 하겠다는 결심으로 해석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작가는 야심차게 자신의 최종 작품을 아름다운 인간들이 사는 신세계를 빚어내려 했지만 결국 그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것이기에 이 작품은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정을 하게 한다.

 

당대 극작의 중요 규칙인 삼단일(three unities), 즉 하루의 시간, 한 장소, 하나의 줄거리에 관한 것이라는 세 가지 일치를 준수한 걸작으로 이해되었듯, 형식적 측면에서 작가의 가장 숙성된 작품으로 이해되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작품을 용서와 화해, 그리고 관용과 사랑의 희망으로 맺고 있어 생의 찬가라고도 하지만 역시 그 생의 가치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제시는 미완에 그치고 만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랫랜드
에드윈 A. 애벗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껏 2차원 세계만을 알고 살아온 어느 미천한 플랫랜드 출신자가 3차원 세계의 신비를 접했을 때처럼, (...) 그들 입체 인류의 탁월한 인간 종들이 상상력을 꽃피우고 겸손이라는 귀한 재능을 더 깊이깊이 키워나가길 바라며.” 

- 독자를 위한 헌사, 5

 

예기치 않은 독서로 이어지고 있다. ‘플랫랜드(평면세계)’에서의 3차원 세계 인식의 어려움으로부터 우리 인간의 4차원 세계 인식의 곤란성을 엿보는 하나의 비유도구로써 인용하였던 책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자기 차원의 편견에 얼마나 쉽사리 영향을 받고 잘못을 저지르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의 한 웅변으로 들렸던 까닭이다. 19세기 영국의 성직자이자 작가이며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에드윈 A. 애벗의 이 발칙한 소설은 기하학적 기본 원리와 선험적 사유의 필요 역설 속에서 인간 사회의 정치적 이론과 제도의 풍자를 버무린 꽤 흥미로운 저작이다.

 

작중 화자는 플랫랜드, 2차원의 평면 세계에 사는 존재(사각형)이다. 그는 그들의 시간으로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에 3차원 세계의 존재가 2차원 세계의 가장 수학적 사고가 출중한 존재에게 그들 세계 밖의 가능성, 다시 말해 제한된 인식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존재 가능성이라는 사고의 깨우침을 가르쳐 줌으로써 야기된 새로운 시선에서 자신의 세계를 서술하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니 상상할 수 없었던 시선을 얻는다. 그때 그가 내뱉는 말이 , 멋진 신세계여!”. (올더스 헉슬리의 20세기 대표적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는 셰익스피어의 16세기 희곡 템페스트에서 시작하여 19세기의 이 작품 플랫랜드를 경유한 문화역사의 한 산물임을 보게 한다. 멋진 신세계라는 이 경탄의 외침은 셰익스피어를 떠난 이후 그 의미가 전도되어 왠지 불온한 탄성으로만 느껴진다.)

 

2차원 세계인 플랫랜드와 대비하여 3차원 세계를 스페이스랜드로, 그리고 1차원 선의 세계를 라인랜드, 차원이 없는 심연인 점의 세계인 포인트랜드의 영역을 대비하여 기하학적 사유에 내재된 본질, 그 한계를 상상토록 한다. 재미있는 표현들이 소설의 각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를테면 점의 세계는 점 그 자신이 자신의 세계이고 자신의 우주이며, 다른 존재에 대해선 개념조차 없기에 복수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계라고 정의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지만 하나이며 전부인 세계, 자기만족의 비천함과 무지의 세계라는 것이다. 2차원의 존재가 보기에 그 얼마나 무기력하고 맹목적인 만족으로 보이겠는가!

 

144, 삼차원에서 평면 세계를 내려다 볼 때, 이차원 존재는 이렇게 내부를 결코 볼 수 없다

 

스페이스랜드, 3차원의 세계를 경험한 평면세계의 존재는 한 번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up)'라는 입체공간에서 평면 세계를 아래로 내려다봄으로써 자신이 살던 세계의 내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경험으로 체득된 지식은 플랫랜드 지식의 옹졸함과 편협함, 자의성이 너무도 명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게 고차원을 인식한 존재가 자신의 세계인 평면세계를 설명한다. 이 설명들이 지극히 재미있어 혹시 지루한 읽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선입견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다. 플랫랜드의 존재들은 각()과 변으로 형태를 지닌 존재들로 동일한 길이의 변을 많이 가진 다각형의 존재들이 귀족인 상류계급을 형성하는 신분사회다. 그 최상에는 무수히 많은 변을 가져 동그라미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성직자인 최상위 계급으로 플랫랜드의 모든 정치, 사회, 법제도와 문화를 통제 관리한다.

 

여기서 무수한 의문이 발생한다. 그들 평면의 존재가 다른 존재를 어떻게 구별, 인식할까하는 것인데, 그 서술의 발칙함은 바로 우리 인간세계에 가닿는다. 하부계급은 촉각, 즉 서로를 느껴서 상대가 어떤 계급, 어떤 성()임을 인식하고, 상류 계급은 오랜 훈련과 학습을 통해 시각인식을 통해 구별한다는 것이다. 하층 계급 특히 이등변삼각형과 같이 각이 예리한 존재를 느끼려다가는 그 각에 찔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로 사망할 수 있기에, 그처럼 미천한 소통방식을 취하지 않는 것이고, 더구나 오랜 학습을 통한 시각인식방법은 하층계급은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지불할 능력이 없기에 상류계급의 독점적인 차별의 인식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마 저자는 이미 19세기 영국사회 전반을 깊숙이 잠식한 자본주의 관념의 핵심인 시간과 돈이 사회체제를 견인하고 있음을 통찰한 것으로 보인다.

 

계급이 이렇게 특정 도형으로 고착되어 있는 세계라면 반란, 혁명으로 체제의 혼란과 붕괴 우려의 불안이 항상 잠재하고 있었을 것인데, 간혹 돌연변이로 인해 이등변 삼각형이나 불규칙 도형 중에서 정삼각형이나 변의 길이가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출생하여 상위 계급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희귀한 현상들, 상위 계급 진출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의 출생을 귀족 계급은 환영하는데, 이러한 변이로 인한 하층 계급의 상위 계급으로의 이동 발생이 아래로부터 일어날 혁명을 막아줄 유용한 방호막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며, 특히 이러한 계급 상승의 기대가 하층민의 희망을 부채질함으로써 체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대 심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고, 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계층상승의 흔치 않은 일화는 화제가 되어 가능성의 신화로 선전되곤 한다. 1880년경에 발표된 작품이니 작가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당대의 다양한 자본주의 비판 사유들을 알았을 것이다. 반면 오늘 우리들의 시선에서 보면 어리둥절할 얘기들도 있는데, 남성들은 모두 다각형의 존재를 향한 기대를 꿈꾸지만, 여성은 오직 바늘 모양이라는 하나의 형태로 고착되어 있어 각이 곧 지능과 지식을 의미하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허나 이것은 역설적 의미를 지녀 남성 중심 사회에 일종의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되어 인구 억제를 통한 혁명의 싹을 자르는 신의 섭리로 해석됨은 물론 성의 힘에 대한 균형의 요소로 작동되기도 하는데, 바늘 모양의 그 날카로운 예각이 주변 존재들을 살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여성의 행동에는 여러 규제와 관습이 행해지고 있고, 평면 세계이다 보니 누군가가 다가올 때 모두 하나의 선이나 점으로 인식되기에 자칫 바늘에 찔려 사망하게 되기에 지속적으로 흥얼거려야 한다거나 좌우로 흔들거리며 다녀서 자신이 여성임을 상대에게 인식토록 하는 것이다. 웃기는 얘기지만 이것을 여성들이 왜 지킬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상류 계급에 합류하기 위한 여성들의 바람이라는 동기 때문인데, 자기 자손의 계급을 보장하기 위한 성 본능에 터전을 잡고 있는 듯하다. (왜곡된 사회진화론의 반영으로 보인다.)

 

여성의 형태로 인한 의미는 더욱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인식에 대한 어려움으로 인해 기발한 발상이 착안된다. 각 변에 서로 다른 색으로 장식하는 존재가 출현한 것이다. 계급의 중간계층인 한 오각형이 예측 능력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각 변을 각양의 색으로 장식한 것이다. 이로써 그가 앞으로 향하고 있는지, 뒤를 보고 있는지, 그가 어떤 계급인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촉각이라는 상대에 대한 느낌을 통한 위험한 구별 방식이나, 오랜 훈련을 요하는 시각인식 방법이 쇠퇴하게 된 것이다. 항상 체제의 저변을 구성하던 관습은 이처럼 지식 계급의 편의적 논리에 의해 하나의 문화체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때 이들이 들고 나오는 논리는 이렇다. 자연이 변들을 구분한 것은 하나의 선으로 색깔을 다르게 칠하라는 뜻이다.“, 마치 자연의 섭리, 곧 신의 섭리를 들먹이며 불가침의 신성성을 씌우는 것이다.

 

여성의 바늘 모양도 자연의 신성한 섭리이긴 마찬가지다. 그 인구 자동조절 기능처럼 신은 보상과 희생의 균형을 적절하게 부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상위 계급인 동그라미들이나 바늘 모양의 여성은 하나의 변으로 이루어져 각기 다른 색을 칠할 구분이 없다. 이때 또 자의적인 의미의 부여로 자신들의 신성한 권위를 유지하는데, 원주를 지닌 신성한 축복을 받은 존재이기에 자신들은 변의 구분이라는 색의 구분이 불필요한 순수함의 존재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직자인 최상위 계급 동그라미와 여성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그럼으로써 성직자와 여성은 순수성의 신성성을 함께 한다.

 

이렇게 색깔이 귀족 독점의 시각 인식 기술을 무용하게 하자 그네들의 지적 기술은 비례하여 빠르게 쇠퇴하는데, 이때 모든 개인과 계층은 동등하게 인식되고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존재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에따라 모든 존재 도형은 보편 색체라는 앞과 뒤 절반씩 다른 색칠을 통해 구별하게 된다. 시각인식의 쇠퇴는 사회 위협요인이 된 것이다. 인식론의 변화가 가져온 사회 체제 및 관습과 문화의 요동을 생각게 하는 얘기들이다. 한 사회의 도덕이나 정치적 규범이란 것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상대적인지를.

 

아주 멋진 자유의지 존재여부의 비유도 등장하는데, 동질의 각과 변을 지닌 다각형이 우세한 계층을 형성하는 사회는 바로 그 형태의 완벽한 규칙성을 체제의 신성한 근간으로 여기고 있기에 오직 형태의 규칙성만이 도덕적 완전성을 담보한다. 따라서 어떤 잘못이나 결함은 신체 형태의 불완전성, 즉 자기 형태의 불균형성에 기인하는 것이 되어 사법부는 즉각 그 존재를 척결한다. 도둑질이나 그 어떤 범죄도 형태의 불균형성이 초래한 것이라는 변명이 가능하게 되는데, 사회적으로 처벌이 가능하지만 가정 내에서 이러한 사태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됨을 토로하기도 한다. 형태는 곧 의지가 관여할 수 없는 본성의 문제라는 것인데, 이는 오늘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경우 인간 존재의 범죄 처벌 불가능성 주장과 닮아있다.

 

129, 입체인 구를 평면 존재가 인식할 때

 

사실 이 작품은 이러한 사회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사유의 실험이라는 기하학적 통찰과 맞물려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고 탁월하다. 2차원의 존재에게는 위와 아래라는 관념이 들어서지 못한다. 만일 그에게 삼차원 입체 존재가 출현하다면 오직 그는 삼차원의 존재가 평면에 닿은 부분만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점이거나 어떤 선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구()가 플랫랜드에 출현했을 때 평면존재는 처음 점이었다가 점점 둘레가 커지는 선만을 인식할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입체존재가 지면을 위로 떠오르거나 평면 아래로 내려가면 사라져버린다. 생각할 수 없는 차원의 존재는 어느새 출현했다가 사라진 것이 된다. 만일 이를 목격한 존재가 이를 묘사한다면 평면세계의 존재들은 망상이라거나 환영을 보았거나 기만이라고 몰아댈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미확인비행물체(UFO)라 부르는 물체가 이러한 삼차원을 넘어선 고차원의 존재 출현이 아닌가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시간으로 인해 휜 공간의 상상처럼.

 

이 책은 하나의 사고 실험이기도 할 것이다. 상상 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 위해서,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 생각할 수 없음을 승인하고 그 한계의 인지에 대한 겸허함으로부터 세계의 이해와 타자의 포용이 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일 게다. 포인트랜드의 점은 자신의 세계를 벗어난 그 어떤 세계도 상상하지 못한다. 라인랜드의 선분에 있는 존재는 바로 이웃 존재 너머의 그 어떤 세계와의 직접적 조우가 불가능하며 선분 밖의 평면공간을 허공으로 인식한다. 플랫랜드의 존재는 타자의 인식이나 주변 형상을 결코 조망하지 못한다. 입체 공간인 삼차원에 사는 우리들은 사차원의 세계를 인식하는데 곤란과 함께 인식의 혼란을 겪는다. 좀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결국 자신들의 차원에 갇혀 그 세계에서 자신들에게 인식되는 형상을 가지고 자연법칙이니 신이니 자신들의 체제유지를 위한 합리화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 것인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차원의 존재는 자기 세계의 집이나 타 존재의 내부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삼차원의 존재는 그들 이차원 존재인 다각형 존재들의 내부를 훤히 볼 수 있다. 플랫랜드의 존재들은 또한 타 형태 너머의 존재들을 인식할 수 없으며, 그네들 생활거처의 지형을 볼 수 없다. 다만 유추하거나 추측할 뿐이다. 그 조차도 뛰어난 사유능력의 존재에 한해서 말이다. 만약에 이들이 삼차원 세계, 다시 말해 위로 치솟아 평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면 다각형 존재들의 내부가 훤히 보이고, 자신의 세계 지형이 한 눈에 보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차원 존재의 삼차원 인식의 이전으로 삼차원의 존재가 사차원, 그리고 오차원과 같은 더 고차적 차원의 세계에 바로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유추가 될 것이지만, 초월적 상상의 어떤 단서가 되어줄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볼 수 없거나 보이지 않는 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로부터 지적 겸허와 무지의 성찰을 상실했다. 오늘의 존재이론들, 혹은 존재자에 관한 사유들은 바로 이러한 무지의 철학에 대한 반성이다. 무시하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경계 밖으로, 그 무()의 공간으로 내침으로써 발생한 오늘 한국 사회의 이 불온한 퇴행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어디에 부재가 존재한다는 확증이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의 독서를 추동한 것은 바로 이러한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린 감각,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회복을 요청한 인간 너머의 존재를 상상하고, 인간의 관여와 해석에 의존하는 오만에 대한 회의의 자극 덕택일 것이다. 150년 남짓 전에 한 사상가의 저작이 이렇게 오늘 한 인간에게 낯선 각성을 선사해주고 있다. 옛 지성들에 겸손한 감사의 마음이 요즈음 더욱 깊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정의 온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4
정다연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라건대 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좀 더 다정해 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의 단 한 줄이라도 그 일에 요긴하게 쓰인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 10, 시작하며 다정의 온도에서

 

정다연 시인의 그림 9쪽책속에는 시인이 그린 10점의 작은 그림이 수록되어있다】 


시인은 위의 인용 문장처럼 스스로에게 다정해 질 수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쓰고 있다. ‘다정이란 단어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의미란 정()의 오고 감에 있어 따뜻하고 애틋한 감정이 전달되는, 해서 어떤 배려가 내재된 평온과 안전의 느낌이다. 물론 이 단어에 대해 느끼는 정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도 유별나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감정의 언어가 사용될 때는 대개 타자가 내게 주는 정서이지만, 시인은 스스로에게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 스스로에게라는 다정의 어떤 방향성을 지시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동묘시장에서 구입한 원형의 갈색 얼룩을 지닌 가을 외투나, 답십리 고미술 상가에서 마모된 모서리의 액자를 지닌 그림 한 점을 구입하며 사람과 사물, 시간이 함께 부딪히며 만들어 낸 오묘함을 말하는 첫 번째 에세이 빈티지에서부터, 유년의 장소로 거슬러가 잃어버리기 쉬운 무용한 감각들의 기억들에 작은 불씨를 지펴 사물 자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을 그린 계수나무, 얼굴 생각이나 분갈이등 사물과 식물 등 비인간과 인간의 얽힘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에세이인 같이 살자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나와 너의 어울림이라는 조응(照應), 즉 서로 비춤의 글들과 같이 다정함이란 주의 깊게 듣고 세밀하게 바라보는 그들과의 교감이다. 다정함의 방향성이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 서로 혼효적으로, 얽혀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인은 사람, 사물, 식물, 동물을 막론하여 그들의 시간과 삶의 역사를 세심하게,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충만한 그들 너머의 세계를 읽고 상상해 낸다. 한동안 살았던 곳이 중림동 어느 곳이었던 모양이다. 제법 큰 나무 장이 있어 함께 생활하던 밤이가 좋아하던 공간이기도 했으며, 그녀가 남몰래 울었던 장소이기도 했던 낡은 나무 장에 얽힌 얘기이다.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나무 장과도 이별하게 되었는데, 그 장을 한 번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을 그린다. 시인의 일부, 그 손과 숨결, 그리고 사연을 지켜보았던 사물에 대한 뗄 수 없는 연결을 보게 되는 것인데, 이처럼 사물을 매개로 하여 가닿는 사람과 장면, 시간과 장소의 연결은 얼굴 생각이라는 에세이에서 책상 위 글이 써지기를 기다리는 백지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백지 위의 써지는 글을 통해 누군가라는 사람, 사연, 장소에 도달한다. 나는 이러한 장면의 글들에 살짝 매료되기 시작했는데, 시인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듣고 보고, 그 무엇의 너머를 상상하고자 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지녔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에세이 분갈이는 작은 화분을 뒤늦게 분갈이 하게 되면서 그 작은 터전에서 부단히 뻗어 갈 곳을 찾았을 식물 뿌리의 어둠속 막막함을 생각하며, 마침내 늦은 분갈이가 식물이 서서히 쇠약해질 수 있음을 알게 된 시인의 삶의 현실과 존재자의 가까운 이야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유작용, 바로 그것일 게다. 나와 타자,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의 조건과 섬세하게 조응하며 미래의 가능성에 유연하게 열려 있는 삶을 살아가는 시인의 세계, 그녀가 만나는 말의 근원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이 과거의 인식과 현재의 조건들이 조응하는 그 열려진 세계는 사용하지 않는 메일계정 속 옛 편지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 버려야 했던 엄마의 무수한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보석함으로, 시간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질 기억들의 불씨를 되살려 놓는다. 시인에게 이들 물성은 그저 생명 없는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들과 시간을 품고 무언의 대화를 건네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은 내 글은 공룡에 등장하는 설치 미술가 김범의 실제로 나무 위에 돌을 얹어 둔자신을 새라고 배운 돌이라는 작품처럼 돌은 단지 인간에게 도구로서의 돌이 아님을 생각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아마 시인의 삶의 시선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배제한 좁은 인식의 세계를 넘어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몸의 용도는 시인의 무릎을 계단으로 또는 베개로 생각하는 반려견 밤이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얽힘이 주는 세상의 새로운 만남을 생각게 한다. 사랑은 한 존재의 몸을 창의적 뒤바꾸고 기꺼이 사용하게 만들며, 그로 말미암아 세상과 새롭게 만나게 한다.”는 시인의 목소리 바로 그것일 게다. 시인이 지금 함께 하는 존재는 비인간 밤이, 그리고 인간 윤주로 여겨진다. 밤이는 시인이 시집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를 헌정한 존재다. 인간을 사랑해 준 (...) 밤이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그 존재와 함께하는 시인의 일상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시인의 가장 다정한 사람 동료 윤주, 잠깐 함께 살았던 엄마와의 생활 속 갈등과 사랑의 이야기들이 먼 추억처럼 내게도 이입되어 오기도 했다.

 

그래 시인의 글들은 조금 더 껴안아 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가장 소홀히 하는 우리들 자신, 가장 안아주기 어려운 자신의 모습부터 껴안아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타자들과 우리는 서로 얽혀 살아가는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일 게다. 같이 살자는 마음에서 시인이 하는 말이 이를 정리하는 맞춤의 말이기도 할 것 같다. 한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돌봄이 필요한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타인에게 어떤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절감하면서 말이다.” 다정은 바로 이처럼 타자의 많은 손길과 보이지 않는 숨결이 건네는 사랑의 밀어의 다른 이름인 것만 같다. 따뜻함과 애틋함이 푸근한 정감의 언어들로 채워진 아름다운 사랑의 기록이며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우치게 하는 전언이다. 이제 호감과 믿음을 혼동하지 말라는 시인의 조언을 기억하며, 책속 글들을 통한 시인과의 만남을 좋은 기억으로 남겨 놓는다.

 

이 시를 읽으면 콩 한 알에서도 자유를 읽어내는 눈을 가질 수 있어요. (...) 마지막 문장까지 따라 읽으면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지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어요.”  - 시 창작 교실, 84쪽에서


 

이 감상글은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
퀑탱 메이야수 지음, 엄태연 옮김 / 이학사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저술은 소설 속에 묘사되는 상상 또는 가능성의 내용이 과학의 범위 내에 머물러있는지, 즉 과학적 인식에 종속되는 공리를 암묵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소위 과학소설(SF:Science Fiction)’과 메이야수 자신이 명명하고자 하는 과학 밖 소설(FHS : Fiction Hors-Science)’인 과학법칙의 필연성이 수시로 붕괴되는 세계를 상상한 소설을 분류 사고하는 것이 어떤 철학적 실익이 있는 것인지를 논의하는 짧지만 우리네 삶의 전반적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유이다. 왜 구태여 SF가 아닌 FHS를 상상해야 하는가, 대체 이러한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인과의 필연성이 이성의 한계에 봉착하는, 즉 과학의 경험이 항상성이라 주장하는 법칙이 붕괴했을 때에도 삶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지금의 인류가 믿어 의심치 않는 자연과학의 법칙이라는 필연성을 쫓아 맹신적으로 그 대상인 자연 일체에 권한을 행사하는 세계에 대한 회의이며, 그로부터 이를 탈주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물론 메이야수는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 저술의 내용은 이를 입증하는 여정이다. 이 물음은 데이비드 흄의 문제로 알려진 것인데, 칸트의 초월적 연역에 의해 해결된 것처럼 이해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흄은 인간 오성에 대한 탐구에서 당구 시합에 대한 상상의 서술을 통해 인과 필연성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1. 데이비드 흄의 문제 제기 - 인과(因果) 필연성에 대한 회의(懷疑)

 

그 내용은 경험도 논리도 물리법칙들이 어떤 순간에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이를(확신) 보장하는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법칙들의 항구성에 대한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법칙들이 미래에도 영속할 것이라는 추론이 당연히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회의에 기초한 것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옮긴다면 세계가 자연과학의 대상들로 건설될 수 없는 것이 되려면, 이 세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야수는 이 문제에 대한 두 철학자의 응답을 먼저 제시하고 있는데, 이에 앞서 실험, 즉 경험이란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학은 바로 이 경험에 의존하여 어떤 항구적 필연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선험적인 것이 아닌 후험적인 것이다. 이 말은 경험이란 과거에 대한 것이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때문에 자연이 오늘처럼 이미 파악된 필연성이란 것이 내일도 따르리라는 것을 경험에 정초해서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제 과학을 생각해 보자. 과학은 수많은 경험(실험)에 의해 확인된 어떤 필연성에 기초해 미래도 동일한 경험이 반복되리라 확신하는 가설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주관적 확신이 내일도 임의적 움직임이 없으리라 단정하게 하는 것일까? 흄은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그러한 판단에 이성적인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과거의 경험적 항구성에 대한 습관만이 우리에게 미래가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는 믿음을 줄 뿐이다.”라고. 결국 이 회의론자는 미래의 필연성을 증명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들이 지니는 주관적 확신의 심리적 원천을 폭로하는 데 그쳤다. 이 저술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데, 흄이 해결하지 못했던 이성의 한계에 대한 이 도전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두 인물, 칸트와 포퍼의 해결책을 검토하는 것이다.

 

2. 흄의 문제에 대한 포퍼와 칸트의 응답, 그리고 비판

 

2-1. 포퍼 인식론적 응답과 그 비판

 

사실 칼 포퍼의 해결책은 이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면서 마치 자신이 최초로 해결했다고 오인한 것임을 메이야수는 간략히 지적한다. 포퍼의 해결은 존재론적인 물음을 인식론적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본질은 건드리지도 못한 것인데, 아마 그는 이 명료한 차이를 애초에 알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포퍼는 정말 뻔한 말을 하고 있는데, 어떤 법칙이 과학적인 것은 바로 그것이 권리상 경험에 의하여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면서, 새로운 가설이 나오면 기존 가설을 거부하고, 경합 이론들에 엄격한 시험을 가함으로써 경험적 검증을 증가시켜 법칙의 확정적 진리를 수립할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법칙은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박될 수 있고, 더 경쟁력 있는 새로운 추론에 의해 추월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러저러한 사건이 확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포퍼의 해결책 원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사건이 아무리 이상해보여도 모든 사건은 과학의 현재 상태, 혹은 미래 상태와 권리상 양립가능하다는 것이다. 흄은 법칙 자체의 안정성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을 하고 있는데. 포퍼는 고작 과학적 지식의 본성, 다시 말해 법칙의 안정성이라는 인식론에 매달려 하나마나한 얘기를 거창하게 주장하며, 정확히 동일한 상황이라면 동일한 경험이 일어날 것임을 반복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태양이 중력에서 벗어나 태양계 밖으로 산책하러 가는 것을 목격할 수 없다는 아주 진부한 얘기를 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흄이 제기한 문제는 동일한 상황 속에서 현상들이 완전히 다르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다면 포퍼가 말하는 이론의 검증이라는 관념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과학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미래 세계에 대한 가설이라는 흄의 물음을 포퍼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포퍼는 이로써 기각!

 

여기서 메이야수는 칼 포퍼의 과학적 시각을 정확히 반영한 과학소설을 인용하고 있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소설 ()중력 당구공이다. 소설은 프리스와 블룸이라는 두 경쟁관계 과학자의 물밑 대결이라는 배경 하에 모든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대상은 무중력 상태에 있는 대상과 같이 평온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질량 없는 대상의 속도(즉 광속도)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제로 활용하는 작품이다. 이것이 포퍼적 소설, FHS가 아닌 전형적 SF라는 것인데,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과학적 가설이 옛 가설을 몰아냄으로써 또 다른 필연성을 확보하면 그만이라는 얘기이다. 임의의 것이 임의의 순간에 일어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물음인 흄의 문제가 아니라 법칙들이 일관적으로 붕괴되지 않는 세계를 그려낼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체제 또는 질서 순응성에 기초한 자연과학적 사고의 연속일 뿐이다. 포퍼의 정말 하찮은 응답의 문제점을 지적하다보니 본래의 취지와 잠시 멀어졌는데, 이 저술의 논의인 FHS의 의미를 환기해야겠다.

 


2-2. 칸트의 초월적 연역의 응답과 그 비판

 

FHS란 어떤 유형의 질서도 구성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떤 유형의 질서도 구축될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는 정돈되지 않은 순수 잡다이기만 한 것일까? 칸트는 그렇다고 했다. 순수이성비판, ‘범주들의 객관적 연역에서 흄의 문제에 응답하고 있는데, 만일 법칙들이 필연적이지 않다면 세계도 의식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단지 일관성도 잇따름도 없는 순수한 잡다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흄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데, 상상에 제시하는 당구공이 물리법칙의 순수한 불안정성에 따라 공상적 궤적들을 취할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배제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장면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지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칸트는 법칙들의 우연성이라는 가설을 부당한 것으로 일축하는 것인데, 자연법칙들이 당구공 사례에서 약화되기에 법칙들이 일반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따라서 그 세계 자체가 그와 함께 세계에 대한 모든 주관적 표상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설령 우리가 여전히 당구공들을 지각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아무 방식으로나 움직이는 대상들, 즉 과학적 법칙들이 접근할 수 없는 대상들이기에 과학 없는 의식은 이성 작용의 붕괴에 불과하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부재하다면, 과학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이성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칸트의 흄에 대한 응답은 자연법칙이 유효하지 못한 세계는 단조로운 무질서로 환원된 세계일뿐이라는 것이다. 칸트의 해결책은 옳은 것일까? 결점이 없는 완전한 응답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FHS의 논의는 더 이상 끌어갈 이유가 없어진다. 과거와의 관계를 결여한 카오스의 세계는 영속적으로 망각하는 일시적 직관의 세계로 환원되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어떤 필연적 법칙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세계에는 아무것도 존속하지 않는다는 칸트의 주장이 옳은지 실험 사고를 해보면 그것이 정당한지 판단이 설 것이다.

 

그 전에 칸트의 주장에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중대한 결점을 지적해야 한다.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세계는 그것이 정돈되어 있는 대신 카오스적이어야만 하는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필연적 법칙이 없는 세계는 무조건 근본적 카오스 세계와 동일시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아마 그러한 법칙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확률론적 법칙 말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칸트의 초월적 연역의 약점은 FHS에 대한 상상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칸트의 초월적 연역에 대한 비판은 메이야수의 지금까지의 대표저술인 유한성 이후에서 엄격하게 비판되고 있다. 그것을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칸트의 증명은 자연의 필연성과 자연의 안정성을 동일시하고, 필연성의 부재를 곧바로 안정성의 부재로 확장하는 무의식적 추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고, 칸트의 믿음이란 확률법칙의 필연적 존속에 토대를 둔, 증명해야 할 바를 미리 전제하는 일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메이야수는 우발적 사건이 도래할지라도 안정적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상상인데, 자연법칙이라는 인과적 필연성의 과학이 중심축을 이루는 이 세계를 당연시하는 오늘의 인류에게 충격적이고 전복적인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3. 과학 밖 세계의 상상 가능성에 대해서

 

이제 메이야수는 포퍼와 칸트를 비판한 이후에 그들의 주장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과학 밖 세계를 꾸며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의 세계를 개념화해 보고 있다. 유형은 너무 미미하게 불규칙적이기에 과학과 의식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불규칙 세계이다. 이 세계는 여전히 과학의 세계를 수행하기에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원인 없는 사건들이 간헐적으로 출현하지만 그 간헐적 불규칙 사건의 목격자는 재현 가능성을 보증하라는 과학의 요구에 부응할 수가 없기에 과학은 이러한 카오스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무시해버린다. 유형의 세계는 인과원리가 가볍게 위반되는 세계이지만 과학의 세계가 유지될 것이다.

 

유형의 세계는 불규칙성이 과학을 폐지하기는 충분히 강하지만 의식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세계이다. 우발적 사고들, 물질적 대상들의 갑작스런 궤도이탈이 존재해서 과학적 실험이 수행되기에는 너무 잦은 비인과적 무질서가 출몰하는 세계이다. 결국 이런 세계는 단지 운동을 기록할 수 있을 뿐,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장소에 대해서만 일시적으로 가치를 지니는 세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시적 뷸규칙성도 명시적 무질서 밑에 숨겨져 있는 법칙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충분히 증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가 FHS의 세계이다.

 

불확실성의 양태위에 세워져 있지만 일반적 통계를 세우고, 거기서 행동하며 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어쩌면 과학 속 세계에 산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가 사실은 과학 밖 세계의 실체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교통법규라는 질서의 체제 속에 산다고 여기지만 얼마나 많은 불규칙성, 우발성, 인과성 없는 사건을 수시로 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래서 과학의, 질서의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라 간주하면서도 불합리성을 배제할 수 없어 주의(注意)’를 강화할 것을 주문하지 않는가. 이 주의란 것은 불확실성 위에 선 세계에서 요구하는 의식이 할 수 있는 살아가는 방법이다. 칸트가 말하는 과학이 적용되지 않는 세계는 곧 카오스가 지배하는 세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칸트의 확률론에 의지한 충분치 않은 사고는 주사위를 일천 번 던져 앞면만 나오면 곧 사기라고, 도적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틀렸다. 자연의 필연성 법칙이 적용되지 않은 세계는 우리가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정돈된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형의 세계, 칸트가 동일시한 잡다(雜多)만이 존재하는 카오스의 세계도 있다. 이 세계는 온통 뒤죽박죽인 세계여서 그 어떤 법칙도 정돈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아마 이러한 세계는 사실상 하나의 세계라 말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과학의 가능 조건이 들어설 수도, 의식의 가능 조건도 들어설 수 없는 불가능한 세계일 것이다. 곧 사유가 붕괴된 세계이니 여기서는 그 무엇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에는 FHS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사고 실험에서 칸트의 응답을 실패로 돌리는 제유형의 세계를 우리는 발견해낼 수 있다. 이 저술이 매혹적인 것은 이러한 과학 밖 세계의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우리 세계의 또 다른 가능성을 사유해 보는 것이다. 아마 이 지적 탐험의 여정은 많은 독자들에게 흥미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해 주리라는 점이다. 지금 과학의 맹목적 속도를 관망하면서 우리들을 괴롭히는 것들을 생각해보라. 그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린 우주의 수많은 목소리들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감각에 대해서.

 

메이야수는 FHS의 원형이 될 수 있는 문학작품을 발견해낸다. 과학소설로 잘 못 분류된, 그가 명명한 과학 밖 소설, 원인들과 그 근거들의 논리 속에 결코 다시 포획되지 않는 불규칙과 우발성의 세계를 우리는 그려낼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과학적, -이성적 악몽의 세계, 이러한 재앙 한가운데서도 유지되는 일종의 양식(良識,bon-sens)을 대중적 인기작품으로 상상해 낸 작품이다. 르네 바르자벨의  『대재난이 그것인데, FHS-2의 가설을 온전히 수용하면서, 즉 과학적 변이, 자연의 변덕이라는 겉보기에 우연적인 것의 세계에서 질서의 존재가 그 세계와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은 과학 없이도 스스로 정신적 경험을 행하고 이를 통해 생과 과학사이의 간극 속에서 전대미문의 무언가를 발견 할 수 있음을 메이야수의 이 논의는 우아하고 세련되게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이상 SF소설로 분류된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FHS 작품을 발견하고 싶은, 그래서 메이야수에게 이를 알려주고픈 심정이 싹튼다. 아마 발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논리적 정합성, 과학적 필연성에 매몰된 현대 인류에게 FHS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도 낯설고 어려운 작업일테니 말이다. 짧고 간결한 논의 속에서 아주 강렬한 지적 호흡을 한 충만한 기분이 들게 하는 저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