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
웨인 케스텐바움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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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의 상처는 신체의 은밀한 부위를 직접 침해한다. 굴욕은 괴로움, 취약함, 욕구, 몸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는 사적 차원을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공적 차원으로 끌어냄으로써 안이 밖으로 나오게 하고 밖이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155쪽에서

 

어쩌면 웨인 케스텐바움의 이 책은 숭고와 굴욕사이에 길을 내는 삶 살았던 장 주네가 부활하여 쓴 것 같은, 굴욕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의 정당화를 위해 굴욕의 변신술을 익혀 온 인간 존엄의 내밀한 기록이라 하여도 될 것 같다. 11개의 푸가로 구성된 이 책은 제 1푸가 알몸 수색에서 굴욕이라는 감정 또는 정동에 대한 정의와 유형들의 정리를 시작으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거나 상상될 수 있는 사실들 속에서 저자 자신의 일상적 굴욕에 대한 경험들을 풀어놓는다. 어찌나 투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지 그것이 마치 굴욕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아니 이 악의로 범벅된 치욕의 단어가 역설적이게도 그의 연금술에 의해 생의 유익하고 긍정적인 성소(聖所)로 변화하기까지 한다.

 

심란하기 짝이 없는 저자 자신의 굴욕적 전사(全史 혹은 前史)를 발가벗겨 드러내는 글을 쓰는 이유를 바로 그 굴욕의 역사라는 심해의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서라고 쓰고 있듯, ‘굴욕이라는 단어를 되뇌는 데서 고통과 슬픔보다는 기쁨을 느끼고, 이 단어의 되풀이가 용서와 위로의 향기가 되어주는 까닭이기 때문일 것이다. 굴욕의 감정이란 정말 더러운 정동(affect)인데, 내 안의 무언가가 뒤집혀 수모가 되고 불안정을 야기하는, 누군가에 의해 더렵혀졌다는 느낌이다. 육체이건, 정신이건, 이 굴욕의 감정은 신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고, 그래서 굴욕은 한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고갈시키고 소모시키는 과정이다. 굴욕은 현존했던 것, 온전하고 견고하고 중요했던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그 존재의 주체를 한없이 축소시켜 마침내 탈주체화하여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치게까지 하는 추악한 감정이다.

 

웨인 케스텐바움시인이자 미술가이며 영화제작자이고 예술비평가로

 뉴욕시립대 비교문학 석좌교수이기도 한 퀴어연구 창시자 중 한 명이다

퀴어연구의 대표적 창시자 이브 코소프스키 새지윅에 영향을 

받은 학문적 동료이자 정서적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내면서 굴욕과 결코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케스텐바움은 굴욕을 필수 덕목으로 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고 한다. 사실 상상해 볼 것도 없이 인간들의 사회에서 굴욕은 이미 모든 곳에서 차고 넘쳐 통과의례적 사건임을 부정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체가 뒤집어지는 이 수모의 체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즉 굴욕을 겪어냄으로써, 아니 굴욕의 만연, 그 짓밟힘을 침착하게 견뎌내기 위해서 양감감정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굴욕을 생의 필연적 운명으로 수용하는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주인공 야곱이거나, 혁명의 에너지이자 전주곡으로 삼은 프란츠 파농이거나, 자아 행진을 강제 중지당한 예수의 숭고함처럼 자기 인식의 길을 내는 선행사건 쯤으로 수용하는 것 말이다. 굴욕을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 바꿔내는 감정능력을 갖추는 것일 게다.

 

하지만 굴욕을 이렇게 긍정성으로 수용하기에는 용납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것이다. 해서 저자 케스텐바움의 이러한 양가감정 갖추기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책의 작업을 남들에게 가해지는 굴욕을 감지하는 굴욕 레이다(humiliation-radar)를 새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며 관찰자 혹은 조사자로서 굴욕의 연금술이 가능함을 역설하고 있지만, 미군 병사에 의해, 개 목줄에 묶여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채 교도소 바닥에 쌓아올려진 이라크 병사들의 굴욕이 과연 긍정성과 유익의 원천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나치의 아우슈비츠 절명수용소에서 인간이 아닌 한낱 물건으로 취급되는 유대인 수감자의 굴욕은? 백인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절단당한 신체로 거꾸로 매달린 흑인의 참담한 굴욕은? 케스텐바움은 굴욕 받아 죽을 때까지 씻어내지 못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처럼 대속이라고 정신 승리를 하라는 말인가?

 

케스텐바움의 주장들은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비인간으로 탈주체화를 강요당한 인간에게 세계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지 않을까. 굴욕을 다 겪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오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문장처럼 굴욕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경우, 그래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경우라면, 혹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처럼 큰 고통이 지나면 형식적인 감정이 올 수도 있겠다. 케스텐바움은 시몬 베유의 글을 오독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실 안에 들어갈 방법은 자기 소멸뿐, 극심하고 전면적인 굴욕의 상태에 오래 머무는 것뿐이다. (시몬베유,인간의 성격)”는 글은 낮고 작아져 스스로 겸허 속에서 살아갈 때, 즉 무아(無我)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 ‘전면적 굴욕이란 인간적 지위와 위치의 하락을 강요하는 일시적 관계적 긁힘인 굴욕이 아니다.

 

더구나 조르조 아감벤이 탈주체화라고 명명했듯 원치 않는 물질이나 작용력에 의해 무방비의 육체가 갑작스레 침범당하여 고통을 느끼고, 그 불가해함으로 인해 주체이기를 멈추도록 강제 작용당하는 대상이 되고 훼손당하는 지형이 되었을 때, 한 인간은 존재할 가능성을 부인당하고, 결국 소멸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지 않는가. 케스텐바움은 성추행자인 상원의원, 자기 딸에게 욕설을 퍼붓는 헐리웃 대스타, 고급매춘부를 출장에 동행하여 시민에 지탄받는 뉴욕주지사의 공개 석상에서의 사과연설을 굴욕이라 칭하고 있는데, 과연 그 추락이 숱한 약자들이 겪어내야 하는 굴종과 같은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냉정한 비교분석 없이 그저 그네들의 오만이 초래한 도덕적 법적 부정의 감정에 대한 질타보다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앞선다고 자신의 양가감정 능력을 자랑하는 것은 도덕적 무능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책 전반의 논지에 대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 케스텐바움은 굴욕의 본질이 더럽고 악한 것임을, 그래서 이 세계를 함께하는 인간들이 겪는 고통을 해소하고 나아가 승화하는 동기로 삼고 싶어 함을 안다. 훼손당한 주체들이 안고 가야만 하는 그 고통을 흔쾌하게 털어내기 위한 그만의 사고과정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다. 바로 그 해소하고 싶어함을 이 글쓰기를 통해 케스텐바움은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크리스테바가 언어가 침을 흘린다. 대화가 똥을 싼다.”라고 통제되지 않은 단어를 마구 흘려내어 올바름의 규칙들을 뒤집어 소위 구리고 습하기 그지없는 비체(卑體)문학의 영광(?)을 구현했다는 루이 페르디낭-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처럼, 표준화된 언행을 위해 무언의 조절이라는 고된 작업을 내던진 속 뚫림의 시원함이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케스텐바움이 굴욕의 퍼포먼스들을 즐기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 굴욕의 대문은 우리들 삶의 일상에 늘 열려있기에, 그것에 익숙해져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짐 크로(Jim-Coow)눈총이라는, 다른 사람이 존재할 가능성을 고려하기를 그친 인간의 얼굴에 나타나는 침 뱉는 자의 눈총, 앞에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냉담함이나 무반응, 옹졸하고 편협한 비승인의 악의적 눈길에는 인간이 없다. 더러운 것, 기분 나쁜 것, 사람이 없는 것을 보는 가해자의 눈길은 다른 누군가에게 굴욕을 가하겠다는 집요한 선언이다.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출처: 사람, 장소, 환대)”는 인류학자 김현경의 정의에서처럼 사회가 이름을 불러주기를, 자리를 내어주기를 거부함으로써 사람이 아닌 사물로 처해지는 굴욕을 당한 존재가 과연 그 굴욕의 경험을 구원 또는 승화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굴욕을 야기하는 내용이나 상황, 당하는 사람의 현실적 지위나 위치에 따라 결코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일률적으로 이러한 결코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의 단어에 개념화함으로써 굴욕의 의미를 호도(糊塗)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매춘부를 데리고 공적 행사를 다닌 뉴욕지사가 자신의 아내와 딸을 동반하여 TV화면을 마주보고 수사를 동반한 전혀 사죄 같지 않은 사죄 담화를 발표하는 상황과 발길질을 일방적으로 감수하여야 하는 한국의 아파트 경비원의 굴욕이 동일한 것인가? 목소리 톤이 높고, 긴 머리를 한 남자 아이가 아이스크림 점원에게 여자 아이로 인식되는 것과 흑인들을 거꾸러뜨리고 종속상태를 선전하고 강화하기 위해 흑인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린치와 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뉴욕경찰이 가하는 굴욕이 같은 범주로 말 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케스텐바움이 이들 굴욕을 옹호나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굴욕이 사회의 시스템이고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이기에 그것을 삶의 배경처럼 인식함으로써 승화된 삶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독하게 이상주의적이며, 윤리의식을 모호하게 할 우려가 심각해 보인다.

 

성소수자로 인식되어 누군가에게는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게이나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것이 사람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굴욕이 사람임을 부정하는, 즉 탈주체화를 목적으로 하는 굴욕과 일시적, 상황적 모욕으로서의 굴욕은 구분되어야 한다. 즉 나는 케스텐바움과 같이 굴욕과 부끄러움을 구분하는 회피적 정의에 동의하지 못한다. 굴욕을 나는 탈주체화로서의 굴욕과 모욕으로서의 굴욕으로 크게 구분하여 설명하여야 후자의 굴욕을 케스텐바움의 삶의 필수적 요소로서, 즉 자기 인식의 길을 내는 선행사건으로서 굴욕에 겨우 동의 할 수 있을 것 같다.

 


케스텐바움은 말한다. 나는 굴욕에는 이골이 났어요 / 최근에는 / 굴욕을 당해도 굴욕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예요.” 라는 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내 목표다라 선언하며 그곳에 행복한 마취가 있고 무심이 있으며, 굴욕이 더러움을 씻어낸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미학 놀음, 예술적 신선놀이라는 상상의 공감에서나 거둘 과실(果實)로 여겨진다. 그는 장 주네를 호출하여 침과 악취, 분비물로 흥건한 음습함을 반복적으로 성애화하는 방식으로 윤리적 가치의 안과 밖을 뒤집어 굴욕의 아픔을 초월로 가는 우회로로 삼았다고, 더러움 속에서 새로운 신성함을 발견했다고 평가한다. 주네가 찾은 것이 정말 칵테일 빛깔의 신성함이었을까?

 

관념적 추상에 터 잡은 존재론적 성찰과 현실적 인간들 간의 상호관계에서 빚어지는 굴욕은 결코 동일한 개념적 범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케스텐바움의 글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굴욕을 성상화(聖像化)하기까지 하다가 너무 잔인하게 취급당한 굴욕의 기억 앞에서 사람들은 뒷걸음친다, 그 심한 고통 탓에 묘사의 재능을 상실하고, 그들의 언어는 굴욕의 흔적인 공백을 가리켜 보일뿐, 그 공백을 충만하게 채워내지 못한다고 까지 굴욕 이후에 말을 잃은, 부재하게 된 존재의 극한적 고통을 이해하는 듯 말하기도 한다. 굴욕이 이러한 극한적인 것이라면 이것을 그 무슨 승화와 성화의 원천으로 삼겠는가? 언어도단이요, 미학에 몸을 감춘 채 머리로 하는 공허한 사적 위안 놀음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굴욕을 반복할 수 있는 자는 신이 되리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공중화장실, 백화점, 극장 등을 배회하는, 즉 크루징(cruising)을 하는 게이에겐 굴욕의 시선이 항상 온몸에 들러붙어 존재를 한없이 축소시킬 것이다. 그런 사람에겐 상시적 굴욕을 일상성으로 삼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고, 나아가 그 굴욕이라는 주체의 훼손을 신선한 쾌감으로 전도해야만 살아 갈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매 순간을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굴욕의 상시적 고통의 자리에 있지 아니하다. 다시 말해 굴욕이 인간 세계에서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이 빚어내는 불가피성이라면 존재의 주체성을 앗아가는 이 악의성에 대한 세계의 환기가 필요한 것이지, 굴욕 그 자체를 내면화하는 것은 영원한 시선의 노예적 삶의 익숙성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의 바닥으로의 추락, 즉 왕의 굴욕이 도덕적 부주의가 초래하는 결과들을 알게 됨으로써 정신적으로 오히려 풍요로워졌다는 해석은 물론 옳다. 굴욕이 만들어 낸 여파(餘波)의 위안에 대한 이러한 황량한 통찰이 굴욕을 신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케스텐바움은 자신의 도덕적 패착이 몰고 온 비극의 결과를 자기 지위의 추락이라는 굴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굴욕이 외부의 침입으로 인해 발생하는 굴욕의 본질과는 다른 것이다. 자신의 내적 도덕성의 결여, 위치의 우월성이 가져온 교만의 착각에 동반되는 정상화로의 복귀이다. 케스텐바움의 자가당착적 해독이 불러온 두루뭉술한 개념 정의의 불비로 인해 그의 다채롭고 풍부한 사회적 감정의 고찰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아쉬운 텍스트가 되고 마는 것 같다.

 

오히려 케스텐바움의 여러 푸가 중에서도 조지 엘리엇의 아담 비드에서 점령군 나치의 첩이라고 조리돌림 당하느니 자기 아이를 죽이는 영아 살해범의 길을 선택한 헤티 소렐의 인용이 가장 동의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시민대중의 무감각에 의한 집단적 짐크로의 눈총이 도덕적 무능력이라는 악의임을 해독 하는 시선 말이다. 프랑스 시골마을 주민들의 자신들만은 확고한 윤리적 우월감을 갖추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에 기초해 헤티를 향해 더러운 존재라 손가락질하며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곤 추방하는 그 무심한 굴욕의 강제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이어 케스텐바움은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다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이 남자로 읽히는 데 실패함에 따른 굴욕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감정적 긁힘의 정도를 객관적 척도로 잴 수는 없다. 그러나 헤티 소렐의 굴욕과 무성성, 혹은 양성성의 존재로 읽혔음으로 인한 내적 굴욕은 조금 터무니없어 보이기도 한다. 전자에는 탈주체화의 강제가 있지만 후자에는 그런 시도가 없다. 즉 동일한 비교대상으로서의 굴욕이 아니다.

 

다만 케스텐바움 자신이 백인으로서 굴욕의 가해자라는, 즉 짐크로 눈총의 역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윤리적 수렁인 시선을 내재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는 성찰적 이해는 고귀한 교훈을 던져준다. 우리들은 굴욕의 수용자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굴욕을 가해하는 자의 시선을 내면화한 존재이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무심히 행사되는 굴욕의 강제는 그 상대에게 끔찍한 내면의 좌절감과 자기혐오, 굴욕의 장면이 초래한 기억으로 야기된 인격의 훼손과 마비로 삶의 황폐화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케스텐바움은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기 황폐화, 굴욕의 길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도록 이끄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통찰이다. TV 리얼리티 쇼, 특히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패션이나 신체의 교정을 통해 'before vs after'를 선보이며 자신의 맵시나 몸을 굴욕스러워 하는 여자들의 변화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미운오리새끼들을 백조로 바꿔준다고 선전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시청자들은 왜 이러한 굴욕의 퍼레이드에 흥분하고 감동하며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것일까. 자기 몸을 수술대에 바치거나 의상과 미용술에 맡기는 계약에 동의하고 그 수술 또는 성형과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굴욕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 이유일까. 시청자들은 운명을 바꾸고 행복을 쟁취한다는 잘못된 신화적 감동, 그 근거 없는 믿음에 근거한 기쁨에 도취하려는 것일 테고, 참가자는 여성성 혹은 미적 성취라는 것을 확보함으로써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감격하고 그것이 곧 행복쟁취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수술의사로 참여한 의사들의 말을 보면 정말 가관인데, “XX에게는 여성화 대책이 더 필요합니다.”라거나, 우리가 목표를 성취한다면 그녀는 정말 예쁜 아가씨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말들에서 우리는 의료윤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소비자들의 허위의식을 조장함으로써 자본을 축적하려는 욕구말고 그 무엇이 있는가. 여성화 대책이라니, 예쁜 아가씨가 목표라니, 더구나 이러한 굴욕 프로그램에 환호하는 시청자 시민대중의 그 무심한 가해자의 동참행위는 정말 끔찍스럽기까지 하다.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이 OO이 아빠는 청소부이시니 도시 청소에 대해 급우들에게 설명해주면 좋겠구나 라고 말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아이가 도시 청소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유사한 사례들이 학교, 직장, 여러 공동체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다. 무심을 가장한 채 앞에 있는 인간의 내부를 외부로 꺼집어내 존재를 축소시키는 행위들 말이다. 저자 케스텐바움의 내적 고백의 이야기들은 텍스트에 맡기련다. 아마 이 책을 읽다보면 굴욕의 똥통을 뒹굴다가 나온 느낌이다. 똥통에 떨어진 더러워진 인간 존엄의 이야기들을 헤엄치다보면 잠간 내민 머리통에 다가오는 신선함이 마치 세계의 신성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지만 굴욕이란 그 어떤 미화로도 깨끗함으로 돌아오는 감정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동의 할 수 없는 글들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굴욕으로 뭉쳐진 케스텐바움 몸의 항변, 굴욕의 승화를 향한 글쓰기의 의도를 알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문학을 비롯한 현대 예술, 음악 등 황홀할 정도의 예시들만으로도 이 책은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리라. 더불어 우리들이 잃어가고 있거나 망각한 도덕감각을 회복하는 데 어떤 단서를 수확할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굴욕의 백과전적 탐색을 통한 이 자전적 고백서는 굴욕의 밑바닥을 지나온 한 인간의 내밀한 성찰 과정이기도 하다. 이 굴욕의 다이어리는 훔쳐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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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로이트 자신의 정신분석적 발견에 오이디푸스 콤플레스라는 이름을 부여했을까? 이것은 21세기 오늘의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삶에 있어서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계급주의적,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유산을 과신하는 논자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그 무참한 몽매성에 대한 하나의 역사적이고 실체적인 통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1. 고대 그리스 비극 공연의 의미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공연되었던 기원전 5세기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를 조금은 해야 한다. 당대의 아테네인들은 비극(연극)을 자신들 도시국가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다는 것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스 비극들이 모두 기원전 5세기의 7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생겨나고 사라졌음은 비상한 의미를 갖는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혁명의 일부로서 폭발한 문화적 혁신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비극은 그들의 교육과정에서 읽고 암기되었으며, 비평가와 철학자들은 이 극들을 읽고 연구했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시민에게 감정적, 지적 영향을 미침으로써 긍정적인 교육경험을 준다고 보았으며, 비극이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는 시민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인식으로 이끈다고 생각했음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매우 중대한 사실인데, 이 비극(연극)들은 아테네에서 매년 개최되던 디오니소스 대축제(국가적 종교축제였음)의 주요행사로 단 한 번 공연되기 위해 쓰여져 무대에 올려진 것이라는 점이다. 아테네인에게는 이 비극 관람이 오늘날 우리들이 연극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는데, 연극관람, 디오니소스 축제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시민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축제에는 아테네 시민은 물론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있는 외교사절들의 의무적 참석과 국가 관료인 아르콘(집정관)이 직접 경연에 참가할 세 명의 극작가 선발부터 행사를 주관했다는 점에서도 비극 공연 참관이 시민정치 생활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 행사의 의식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아테네 제국의 군사적 이데올로기를 과시하는 의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지배력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의도된 스펙터클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자부심 가득한 의식이 끝나면 하루에 한 작가의 세 작품씩 3일에 걸쳐 공연되었다. 그런데 이 화려한 힘의 과시라는 의식 이후에 시민생활의 토대가 산산이 깨어지고 찢어지는 세계를 보여주는 비극과 정치적 부패를 비롯한 부정한 삶들에 대한 풍자를 주제로 한 희극이 공연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게 여겨지지만 이 두 극단인 긍정성의 의식과 부정성의 연극이 결합된 축제는 바람직한 도시국가는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낯설면서도 신선한 그들의 감각을 발견하게 된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시민적 자부심이 불러 올 자만이 일으킬 비극성을 통해 시민의 바람직한 도덕적 인식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비극 작품들은 그들에게 지적, 감정적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도 이러한 시민적 삶의 태도에 대한 자기성찰을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는 점은 오늘 우리들이 이 작품에서 발견해야 할 앎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필수적 배경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이러한 배경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임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하다. 지중해 패권자로 군림하는 아테네 제국처럼 오이디푸스는 지적이고 존경받는 성공한 인물로써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통제할 줄 알지만 신탁이 예언한 운명을 필사적으로 피하고자 하며,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도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모범적인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데서 아테네 시민들은 그 인간적 비극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성찰로 나아가게 된다


현전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은 예외 없이 이러한 구도를 따른다. 디오니소스 대축제(이데올로기 과시의 의식+비극(연극)공연)는 이렇게 시민들이 일반적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자기반성을 하는 감정적 연대의 장()이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 같은 시민적 자기성찰과 비판적 감정적 연대의 장을 생각조차 할 수 없기에 더욱 매혹적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이 어떠한 의미를 지닌 배경 아래 있었는지에 대한 대강의 이해는 갖춘 것 같다. 이제 20세기 독일의 한 정신분석가가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인물을 자신의 발견 이론의 이름으로 삼았는지를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2. 20세기 독일 사회의 고대 그리스의 집착과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 또 다른 배경의 파악이 필요한데, 19세기 전후에 시작된 독일인들의 정체성 발견을 위한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 즉 자기이해의 열쇠를 고대 그리스에서 찾았다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헤겔부터 시작해서 실러, 바그너, 니체에 이르는 독일 사상가들은 마치 입을 모아 말하듯 그리스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헤겔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는 역사에서의 빛의 초점이었으며, 고대 그리스는 그리스의 이름으로 유럽의 교양인들, 특히 우리 독일인들이 고향처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라거나, 니체 또한 더 이상 어느 곳도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고향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을 동경한다. 왜냐하면 그곳이 우리가 우리의 고향이기를 바라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바로 그리스다.”라며 독일인들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에 있었음을 천명한다.

 


이것은 바그너의 독일국가주의라는 흉물스러운 정치적 열정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독일과 그리스 사이에 친족관계라는 무모한 혼합을 통해 자신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이한 논법들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타키투스가 묘사한 북방으로부터 그리스를 침입하여 스파르타와 코린토인을 구성하게 되는 도리스인을 독일인 자신들이라고 신화적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공통된 신체적 특징인 큰 키, 금발, 푸른 눈동자, 잘 발달된 근육을 종족 아리아인의 전형적 표지라고 진리로 확증하기에 이른다. 독일인들은 이같은 날조된 정당화의 궤변에 열광하며 감명 받은 것은 물론이다.

 

독일의 모든 교육기관에는 그리스 비극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에 대한 교육과정이 필수가 되고, 모든 교육제도는 이러한 그리스 애호 열풍에 부응하기위해 재편되기까지 한다. 국민이 세대에 걸쳐 그 나라의 본질을 유지하며, 국가는 없을지언정 독일 국민은 언제나 존재한다. (...) 신화는 한 국민에게 특유한 것으로 한 국민에게는 그러한 신화가 있어야 한다.”는 민족과 독일 정체성의 신화 발명이 이렇게 독일에서 출현한다. 이황당한 계보학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혈통에 대한 왜곡된 극단적 환상이 지속되어 편견의 역사를 만들고 그릇된 독단은 확실성이 된다.

 

멀쩡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이러한 사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프로이트는 이렇게 환상에 맹목적으로 심취한 독일인의 정신과 섹슈얼리티의 발달에 대한 거대 서사를 고대 그리스 비극작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시대의 대유행에 따르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 탁월한 지성은 오이디푸스에서 자신의 태생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탐구해나가는 그 고통스럽고 집요한 자아탐색이 독일인들과 쌍둥이처럼 닮았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유대계 독일인은 국가주의적 열정이 절정에 이른 독일인들의 민족적 가족사에 욕망과 폭력이 얽힌 추악한 비밀을 폭로하기로 한다. 그리스에 순수하고 순결한 기원을 두고 있다는 독일 국가 신화를 위협하는 망측한 진실을 드러낸 것이다.

 

독일인들의 정체성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이다. 날조된 독일인들의 순혈주의와 국가주의적 신화를 깨뜨림은 물론 이 똑똑한 천재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최신 유행하는 그리스 고전이 갖는 위상, 즉 그 권위를 올라타기 위한 전략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 꾀바름은 곧바로 권위를 지닌 이론으로 격상된다. 프로이트는 독일인들의 그리스 열광을 고의로 이용한 것이었다. 프로이트가 왜 오이디푸스를 자신의 이론 명칭으로 사용하게 되었는가의 배경까지 더듬어보았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의 의식과 독일 사회의 국가주의적 신화를 깨부수는 이름의 배경과 더불어 그 토대로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이르렀다.

 

3.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이 말하려는 것 ; 앎의 불가능성

 

앞서 언급했지만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반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된 연극이라고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그리스고전문학 교수를 지낸 사이먼 골드힐은 그의 역작 Love, Sex and Tragedy에서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Oidipous)라는 말로 말장난을 하였다고 쓰고 있다. ‘나는 안다라는 뜻을 가진 oida라는 말과 어디라는 의미인 pou를 조합하여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이름은 나는 어디인지 안다라고 외치는 것이라고, 이 분열적 말놀이를 통해 앎에 대한 매혹과 은폐와 폭로에서 하나의 전기를 맞게 하려한 것이라고 해독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은 단순히 근친상간이나 오인된 정체성에 관한 슬픈 이야기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포클레스가 그 이름에서 말장난을 하였듯, ‘너는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소포클레스의 의도이자 공연행사에 부합하는 주제였다. 이 극이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서 보여주는 통찰에 주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이 비극을 읽어본 사람들은 극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너는 어디서 왔는가?’ 라는 물음이 울려 퍼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나쁘거나 타락한 사람이 아니다. 지적이고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며, 주변 상황의 통제를 위해 자신이 지닌 온갖 수완을 사용하여 운명에 투쟁하는 인간이다.

 

자기 삶의 방향을 통제하려고 애쓰지만 운명 또는 우연이라 불리는 다른 힘들이 그를 다른 길로 이끈다. 자기 삶의 이야기의 통제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자기 삶의 파괴, 삶의 실패로 귀결된다. 이 비극은 인간 삶에 대한 인간의 통제 실패,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이야기이기를 분명하게 직시하여 적절히 보지 못하는 무능함을 가리킨다. 우리들 모든 인간은 오이디푸스와 같이 자기 삶을 통제하려고 하기에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자극 혹은 충격을 받게 되고, 자신들의 삶에서 적절한 자기 의문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한 남자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했음을 알게 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비극이라고 여기지만, 이 극의 진짜 충격적인 목소리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야말로 가장 자기기만의 참극을 초래하기 쉬운 순간임을 끈질기고 불안할 정도로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 극한의 비극성이 있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의 해독자이자 문제해결사이며 앎의 추구자이다. 그리고 성공을 거둠에도 그럴수록 점점 더 불운한 자기파멸을 향해 나간다. 다시 말해 이것이 비극인 것은 인간이 자신이 알고자 하는 욕구와 답을 찾는 능력을 훼손시켜 놓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 비극의 중추골조는 한 인간의 혈연의 관계망이 뒤엎어지면서 그 관계망이 뒤죽박죽이 되어 찢어발겨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내이기에 오이디푸스의 아이들은 그의 형제이거나 자매이기도 하다. 자아를 규정하는 통상의 언어가, 근친상간에서는 내파(內波)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동할 수 있는 범주는 아무것도 없다. 오이디푸스에게 자신의 기원을 안다는 것은 세계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가족 가치가 붕괴되는 전조일 뿐이다. 잘 안다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불행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길을 가야 하는지 잘 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어쩌면 이러한 앎의 진실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오이디푸스를 선택한 것은 결과론적이지만 정말 매우 통찰력 있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로부터 독일인과 그네들 사회의 순혈주의와 국가주의적 망상이 초래할 자기파멸을 보았던 것일 게다.

 

4. 결어 ; 범국민적 자기비판의 공통감각은 불가능한 것인가

 

오늘 한국 사회의 모든 개인, 사회, 정치적 수행에 있어서 갈등과 반목은 앎에 대한 그릇된 확신에서 초래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배에 대한 오만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오인은 지금 벌어지는 이 세계의 모든 비극의 원인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바로 지금 여기에대한 적절한 인식을 형성하는 지에 대해 안다는 것, 이러한 앎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시도가 야기하는 불행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비극을 오늘날에는 소설과 시 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분야가 대신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게 하는 과거와 그 파묻혀 있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그리스 비극공연처럼 그 감정적 연대적 자기비판을 공유하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오늘에도 대단히 매혹적이고 독자(관객)로 하여금 한 인간의 자멸을 공포감에 차서 바라보게 함으로서 내가,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운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이 비극 작품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하는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뜻 깊은 의미를 열어놓는다. 오만해지고 부패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앎의 경계를 두려울 만큼 읊어대는 이 비극은 인간 앎의 궁극적 불가능성에 대한 비통함을 상기시킨다. 내 날 것의 마음을 보려는, 생의 통제력을 지니려고 시도하는 내 교만이 이 비극 작품과 그 역사적 배경을 더듬게 했다.

 

독일인들은 그렇게 그리스 문화를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열렬히 떠들면서도 오이디푸스의 비극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는 점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프로이트가 이들의 환상을 깨부수려 하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도 이러한 비극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만 같다. 자기 성찰 없는 인간들이 너무도 날뛰고 있다. 이러한 비극 작품을 모든 국민이 관객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획은 불가능한 것일까? 공통의 자기비판이라는 감각적 유대를 지닐 수 있는 방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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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과 더불어 사이먼 골드힐의 Love, Sex and Tragdy(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통제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인간의 오만이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비통한 앎의 불가능성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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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마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57
김복희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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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게서 존경받을 만한 데를 전혀 찾을 수 없다니,

이렇게 작다니, 커지지 않아도 된다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에서


시(詩)의 시대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사실 시는 사라져버린 적도 없고,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시를 읽기에 적절한 시대가 아니게 되었을 뿐일 게다. 시 비평가이기도 한 조연정 시인은 『시 보다 2025』에 실린 「보조 영혼」, 「요정의 마당」 등 김복희 시인의 시를 말하는 문장 속에서 “회한에 얽매이고 불행에 저당 잡혀 조금은 위축된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삶을 들여다보는, 그 삶의 표면과 속살을 샅샅이 눈으로 생각으로 매만지며 관찰하여야만 하는 시 읽기는 더욱 곤혹스러운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삶 자체인 시는 더욱 읽어야 할 시대의 언어라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시의 본질 상 도래할 언어의 순간에 먼저 도착해 사람들을 기다리는 언어이고, 동시대의 감각을 발명하는 것이기에 그 낯선 감각이 사람들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바로 그 고민 하는 시간을 참을 수 없도록 몰아세우는 것이 이 시대의 실상이라는 점이 시의 시대가 사라져버렸다는 곤란의 변()일 것이다. 김복희 시인의 시는 바로 이러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그러한 시를 읽는 영혼들에 마음의 양식을 함께 고양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다가온다. 시인의 시에는 귀신, 요정, 소인(小人), 새와 같은 작은 것들, 비인간 존재들이 도처에서 출몰한다. 이를 문학비평가 강동호 교수는 작은 것의 큼을 드러내며 존재와 삶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발견하는 미묘한 기쁨으로 충만하여, 결코 단일한 의미로 단순화될 수 없는 세계의 다차원성과 그 뜻밖의 광활함을 마주하게 된다고 김복희 시인의 시작(詩作)들을 말한다.

 

또한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임유영 시인은 말의 몸집을 끝없이 부풀리는 언어, 그렇게 커진 말을 뒤집어 까서 이것들 속에 축적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김복희 시인의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을 시인은 생 마음에서 백지에 놓기 위해 백지부터 만들기로 한다. 그때 그 재료인 필요한 것으로 티끌 없는 오전 / 진솔 속옷 진솔 양말 / 온갖 말 가르쳐준 이들 /생각처럼 들어와 / 피도 땀도 함께 흘려주는 것 이라고 한다.

 

........(前略)

내 피 내 땀

스미는 것

 

백지에

 

생 마음은 독한 것이군

 

백지를 가리키며

말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넌지시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생 마음은 독하지만 정한 것이라고

 

- 생 마음, 생 마음60~61쪽에서

 

나는 이 시를 통해 내가 알지 못하는 도래하고 있거나 도래하는 낯선 감각의 언어를 배운다. 그래서 익히 알고 있는 계절의 바뀜을 뜻하는 환절(換節)’ 짧지만 강렬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상태라는 새로운 감각을 내 몸에 기입한다. 그리고 시 속 작은 것들 - , 요정, 소인 - 인 이 젊은 시어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인이 발표했던 새 입장속 시구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

.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생각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

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

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中略)

 

더 커질 것을 알기에 더 커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

작은 손 작은 발의 소인들 더 작아져도 되는 곳,

희망에게

- 새 입장, 보조 영혼, 110쪽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이 스스로 커졌다는 망상에 잠기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진다. 이 역설적 장면은 그것이 망상임을 자각하게도 하지만 바로 이 자각으로 그 작음을 인식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가능성, 희망은 더 작아져도 되는 희망이 된다. 시인의 언어에는 그 어떤 윤리적 잣대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있는 사실 그대로에서 지금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그것은 샅샅이 관찰하는 것, 작은 상대라도 더 유심히 살피는 감각 그것일 게다.

 


장시(長詩)라고 할까, 우화라고 할까, 아무튼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옛 이야기도 있는데, 그 제목 또한 여느 시처럼 기묘하다.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이다.

 

...........(前略)

 

저는 환절기가 되면, , 내가 호랑이 되어 개 백 마리를 죽일 결심하고, 마침내 고민 없이 아흔아홉 마리를 죽이고 사람도 죽인 호랑이 되어 이제 다시 사람 될 길 없겠네. (...) 매일매일 내 기분 내 심정 내 상황 내 허기, 호랑이 고개 넘듯 뛰어넘고 싶어집니다. (中略) 뉘우침 없이 내 서러운 것만 생각할까요. 기구하다 하며 아득해 할까요. 그럴 수 없기에 짧은 틈을 놓치지 않으려 배를 깔고 엎드려봅니다.

-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 생 마음, 69~79쪽에서

 

나라를 온통 자신의 허기 채우기 놀음으로 구렁텅이로 몰아넣던 인간이 떠오른다. 배를 깔고 엎드려 그 인간은 그 강렬하고 짧은 환절의 시간에 과연 제 서러움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괘씸한 생각이 내 마음을 더럽힌다. 아 털어내고 날 것의 내 마음, 생 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참으로 삶이란 아쉬움투성이 같다. 시와 시의 제목이 마치 선문답처럼 대조를 이루는 몇몇 시들은 그 자체로 낯설어 힘겹게 읽어가는 독자에게 신선한 재미도 불러일으키는데, 춘향이 집 가리키기,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과 같은 시들은 잘 알려진 관용적 의미를 앞세워 읽어나가며 시어의 감각을 학습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前略)

 

잠들어 깨어났다

모르는 여자 남자가 우리 딸 왜 벌써 일어났느냐고

목마르냐고 차가운 물 한 사발을 내밀었다

찰랑찰랑 물 코 닿을 듯 들여다보았으나

묘하게 닿지 않는 것이었다

- 목마른 송아지 우물 들여다보듯, 생 마음, 30쪽에서

 

잠결에 마주한 낯선 상황에서 닿을 듯 닿지 않는 골똘한 생각 끝에도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운 우리네 현실의 많은 실재들을 생각게 된다. 이왕 이 낯선 감각의 언어들과 정직하게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기 때문이겠지만 시를 배우겠다고 찾아간 요정에게 시의 화자(話者)를 쓰는 법부터 가르치고, 요정은 “‘를 향해 / 멀리 돌아가는 시를 쓴다 그리곤 요정은 시에 외롭다는 말을 없애는 법을 알려달라고 한다. 그때 화자는 요정의 시에/ 손대지 않고/ 요정의 앉을 자리를 정돈해둔다. 보이지 않는, 아니 미력한 존재를 위한 환대의 모습, 아마 시를 읽는 독자들을 위한 넉넉한 품일 것이다.

 

모기가 앉은 작은 토끼를 돕는다고 찰싹 휘두르는 곰의 친절(곰의 친절, 130)은 그 약자를 죽인다. 강자의 몰이해에 천착한 친절이란 곧 무지의 폭력이기 십상일 것이다. 이렇게 민담, 민요나 속담을 인용할 때 시인의 시는 임유영 시인의 말처럼 인간의 마음들에 대한 까발림으로 다가온다. 지금 바로 여기와의 연루됨을 잃지 않는 예리한 시선과 더불어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회한이 찌든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시인의 시집이 어쩌면 소원해졌던 시에 대한 감각을 다지는 전환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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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것들 - 바르샤바 게토의 아카이브로 떠난 여행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여문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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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장의 이미지, 그것을 몽타주적이라고 하든 그 어떤 정동(affect)적 반영이라 하든 그 이미지들을 통한 사유 전개작업으로써의 글쓰기가 이 책이다. 그 대상은 1940년에서 1943년에 이르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절멸 될 폴란드 유대인 게토 내 민중들의 모든 자료 - 편지, 절멸수용소로 이송되던 열차에서 밖으로 던져진 쪽지들, 사진들, 일기들, 유언들, 오고간 행정문서들, 은밀히 건네던 자체 소식 문서들, 그 밖의 타자원고와 등사본, 인쇄본 등의 문서들 - 오이네그 샤베스라는 비밀 모임을 통해 수집한 유대인 역사학자 에마누엘 린겔블룸의 35,269쪽 분량의 자료들을 모체로 한 상상과 반추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해석 에세이다. (린겔블룸은 1944년 가족과 함께 총살 처형되었다)

 

이 상상과 반추는 흩어지고 누락된 결핍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적 이해의 목소리이며,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집단적으로 체험되고 전승된 고통과 흔적의 이미지들을 통해서이다. 어떤 미학적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터무니없는 지적(知的) 놀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 문화적 경험을 저장하고 전송하는 기억의 매체로서 해독하기이다. 첫 장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절망 속에 쓰여진 글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다시 읽을 때 그 글자들이 하나씩 사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처럼 어떤 비극적인 탄식의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보인다. 이 첫 장의 일면 감성적 시작은 책 전체의 이미지를 아우르며, 린겔블룸의 아카이브들과 그 아카이브들의 매립과 발굴에서 감지되는 고통과 정념의 몸짓으로부터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고 변형되는 이미지들이 머금은 가능한 의미들의 추적을 실행해나간다.

 

19435, 750명 남짓 남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봉기를 진압하는 SS(나치 친위대)장군 위르겐 슈트로프가 벌인 최종 게토 청산 작전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어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 폴란드 내 유대인은 절멸한다. 저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감응과 내 감응은 결코 동일한 것일 수 없을 게다. 높이 3미터 둘레 13킬로미터에 달하던 게토 장벽의 잔해들을 모아 전쟁 후 다시 세워놓은 붉은 벽돌 장벽의 틈새에 올려놓은 작은 돌멩이들을 탄식의 사물 혹은 결정화된 눈물로 읽어내는 그러한 감응을 나는 가질 수가 없다. 다만 그 파괴와 학살의 흔적으로부터 그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금 반복되지 않도록 어떻게 멈춰 세울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하 통로의 바닥인지 벽인지 모를 이미지 아래 강제 노동을 시키고 일이 끝나면 얼굴을 벽에 대고 서 있게 하고서는 귀와 머리를 때려죽이는 끔찍한 인간 사냥, 유흥거리로 삼기위해 유대인을 죽이는 인간성 침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1942722일부터 921일까지 나치는 최종 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조직적인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이 두 달 동안 유대인 30만 명을 가스실에서 처형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오늘 역사의 눈으로 해독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한 의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려는, 적어도 문서들만큼은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아 고통과 한탄의 기록들이 미래 세대에 전달될 수 있기를 거대한 욕망으로 생동하면서 죽어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바로 그 유대인들의 바람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폴란드 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절멸될 것임을 이미 잘고 있었던 듯하다. 게토 장벽에 갇힌 그들에게 모든 음식의 수급은 차단되었으며, 극단적 굶주림과 반복되는 처형, 가축 열차에 실려 절멸 수용소로의 이송되어 사라지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참혹함은 구태여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이 상상할 수 있다. 수집된 자료들은 양철상자에 담아 세 차례에 걸쳐 노블립키 거리 38번지, 시비에토 에르스카 거리 31번지 건물 지하에 각기 매립하였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 난 후 19464월 게토봉기 3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렇게 매립되었던 린겔블룸 아카이브를 발굴해야 한다고 라헬이라는 여성이 호소한다. 그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무엇일까. 아카이브를 찾을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며, 하찮은 종이쪽지를 찾아 땅을 파헤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친 방해의 목소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는데 새삼스레 그것을 찾는 일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자기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기를 회피하거나 무시하려는 종자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가히 흉물스럽다. 오랜 시간과 우여곡절 끝에 수색이 결정되었지만 이미 잔해가 말끔히 정리된 바르샤바에서 그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니, 그 엄청난 길이와 높이의 장벽, 그리고 수많은 건축물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항공 사진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발굴을 시작하여 표면이 산화된 양철통이 발굴되기까지 4년 동안 물이 흘러들어가고 곰팡이가 서식하면서 습기와 팽창으로 상자에 눌러 붙고, 글자가 지워지고 부패되고 훼손된 문서들의 섬세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진다. 린겔블룸이 주도하여 수집한 오이네그 샤베스 아카이브는 그렇게 윤리적, 정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힘을 세상에 물려준다.

 

사진 이미지 작업을 통해 사유이론을 전개하는 이 독특한 저자는 지워지고 뭉그러지고 종이끼리 들러붙어 흐려진 문서들과 사진으로부터 역사 지식에 대한 또 하나의 알레고리를 발견한다. 애초에 흐릿했기 때문에 사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이 역사의 사물들과 사건은 존재하게 되고, 광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가독성의 조건을 독특한 방식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어떤 실재가 현실에 뒤섞여 역사는 그 흐릿함에서 건져내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마 매립된 양철통을 발굴해내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디디-위베르만은 그 자료들이 두 번 물에 잠겼다고 말한다. 한 번은 땅 속 지하의 물속에,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증언하는 눈물의 감동적 물속에서라고.

 


책은 이렇게 발굴해내 복원한 문서들의 내용이 빼곡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긴박하고 다급함이 넘치는 목소리로 부모와 형제, 동료들의 안부를 확인하려는 간절함들, 비통한 메시지들이 넘쳐난다. 그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기억해주세요. 제 이름은 나흠 그지바치입니다.”, “점점 더 옥죄어 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동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 그곳으로 이송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오늘이 마지막 밤입니다.”

 

그런가하면 매립의 마지막 순간에 상자에 밀어 넣었던 19살 소년의 개인적 유언 같은 글도 있다. 우리가 당대의 세계를 향해 외치고 울부짖을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땅 속에 묻습니다. 나는 이 소중한 보물이 언젠가 발굴되어 세상에 진실을 외치는 순간을 정말 보고 싶습니다. 세상이 모든 것을 알게 되기를.” 이 어린 소년조차 자신들이 곧 절멸할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쪽지와 문서들이 미래 세계에 역사의 증언이 될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사사로워 보이는 서신들에는 당시의 급박한 동료들을 향한 정보들도 있는데, 트레블링카 절명 수용소를 급하게 그린 지도가 그려진 우편엽서, 특수 트럭에서 자행된 가스학살 작전에 대한 상세한 보고들도 있다. 헤움노 절명수용소에서 19421월 탈출하여 4개월 후 체포되어 베우제츠(Bełzec) 수용소 가스실에서 살해되는 슐라메크가 전한 정보기록이다.

 

그런데 더욱 아찔하고 끔찍한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명 상상하기의 재앙이라 불리는 것이다. 현실이 너무 가혹하여 사람들이 미칠 지경이 되면 스스로 고의적 무지나 자발적 예속의 심리상태로 빠져드는 현상이다. 상상력이 현실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완전히 마비되거나 그러한 현실로부터, 아니 자신으로부터도 벗어나 현실의 가혹한 논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연한 목소리들, 경악스러운 사실들이 매장된 종이들의 아카이브에서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대량 학살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일상적 생존의 단순한 몸짓들, 비참 속의 고귀한 몸짓들, 비영웅적 몸짓들로 직조된 이들 자료를 그들로부터 물리적,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이방인에게도 텍스트 속 문자가 흐려지고 보이지 않기 시작한다. 감상적이라고? 어찌 감상적이기만 하겠는가, 더는 합리적 이성이란 것으로 해독되지 않는 사실을 접하면서 차가운 이성 어쩌구 하는 것이 오히려 비이성이고 문명적 퇴화의 비윤리 아닌가.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이 수집행위, 가능한 많이 수집하라, 분류 작업은 전쟁 후의 일이 될 것이니라며 오이네그 샤베스의 동료들을 향한 간곡한 부탁은 현재의 무력함을 미래의 힘으로, 나중에 쓰일 당신들의 역사로 바꾸기 위한, 생존의 불가능성을 잔존의 기회로 만들고자하는 숭고한 작업이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디디-위베르만의 진술처럼 일관된 무언가를 도출해내기에는 너무 흩어진 이미지들로부터 나치 독일의 비인간적 문명 퇴화적 표징이나 그들이 축조한 절멸용 기술 장치들을 발견하는 것은 부차적인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해석을 통해 흩어진 도덕 관점들을 다시 주워 모을 수 있으며, 1942년 독일군이 게토에서 촬영한 사전 위조되고 연출되어 왜곡되고 억압되어 전복된 이미지들이 같은 이미지 자료임에도 얼마나 은밀하게 다른 관점을 생성하게 하는지도 분별하게도 된다.

 

게토 내에는 유대인 자체 행정기구인 유덴라트라는 것이 있었으며, 유대인 동료를 감시 통제하는 유대인 경찰도 있었다. 유덴라트라는 특권 계층 특유의 오만함을 과시하는 격식을 갖춘 단체 초상 사진과 유대인 경찰이 줄지어 세우거나 무리를 이루게 하여 조밀하게 모아 놓은 채로 찍은 일반 민중 사진의 뚜렷한 분할을 보는 것도 당시 게토 내 유대인들의 권력구조와 갈등을 상상케 한다. 어차피 19438월 이후에는 모두 절멸할 동족임에도 구별짓고 위계를 부리는 인간들의 그 던적스러움은 역사의 결과를 아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우스꽝스러움을 넘어 가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아니 유대인 역사학자 린겔블룸의 아카이브에 담긴 그 고통스러운 역사에 대한 믿음의 기대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 얼굴들을 시간을 넘어 상상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평범성에 깃든 숭고함과 극악스러움이라는 양면에 대해 다시금 생각에 잠기게 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 속에서 늘 이런 외침은 반복되었고, 그 외침은 헛되이 울렸고, 훨씬 나중에야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글쓰기가 전달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고통의 외침 앞에서 글쓰기에 내재된 본질적 취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윤리만큼은 절대 잃어버리지 말자고. 그때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세계일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에게도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극악한 압제의 시기가 있었다. 어딘가에 시간을 멈춘 채 묻혀 있는 당대 식민지 조선인들의 목소리와 얼굴들, 일경에, 조선인 일제 주구(走狗)들에 쫓기면서 던져지듯 남긴 쪽지들, 색 바랜 사진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날뛰는 뉴라이트로 불리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민족역사의 왜곡 날조를 서슴지 않고 있다. 역사는 오늘의 해석이고, 하찮아 보이는 그 묻힌 소소한 자료들에서 그날들의 진실을 우리는 읽어내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이 품고 있을 단 한 번의 단순한 감정적 체험의 틈 속 깊이 저마다 지니고 있을지 모를 흩어진 심리적 자리를 우리는 복원하고 해독해내야 한다. 어쩌면 이 책을 시작하는 이 문장이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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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 고요하고 단단하게
권민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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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온다. 반드시 온다! (...)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우리는 가진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돌보는 사람들이다.“

- 다시 채소를 가꾸며. 아름다운 마무리, 46

 

법정 스님의 대표 저작을 비롯한 법화(法話)나 법문, 강연 기록들을 인쇄된 문자로 접할 길이 없는 가운데, 스님의 말씀을 엮은이의 체화된 사유의 깊이 있는 글과 더불어 하나의 총체적 흐름으로 만날 수 있게 펴낸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전한다. 법정스님 하면 무소유를 떠 올리지만, 그 뜻을 헤아리는 데는 여전히 미숙하다. 아마 몸과 마음으로 수용하지 못했기에 앎이 되지 못하고 기억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내려놓음의 마음공부이듯, 무소유는 그저 모든 것을 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몫을 덜어내는 선택의 기준을 세우라는 가르침이며, 그렇게 덜어내어 가벼워진 자리에서 단순화한 선택이 쌓이면 삶의 방향도 선명해지고 그럼으로써 더욱 단단하게 자기답게 살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일 게다.

 

이 책은 단순히 법정스님의 고귀한 문장들을 수집하여 배열한 문장 모음집이 아니다. 엮은이라 표기하지만 스님의 말씀에 더해 엮은이의 글은 그 자체로 삶의 태도에 대한 오랜 경험과 깊은 사색의 결과임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책은 법정 스님의 모든 법화를 총체화한 해설서이자 독자적인 명상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비움과 자유, 가족과 사랑, 갈등에서 상실과 병, 죽음, 단련과 실천에 이르는 인생의 단면들인 7개 주제 아래 법정스님의 저작들과 법문, 법회 말씀을 망라한 총 245 문장과 각 해당 문장에 따른 엮은이의 풀어 쓴 시의적 해설, 해당 문장에 스며든 사유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우리네 삶의 태도가 선택의 지점에서 방황하게 될 때 언제라도 다시 펴들고 읽게 될 그런 책으로 항시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어야 할 것 같다.

 

오늘의 걸음, , 시선을 조금만 바꾸고, 오래 붙잡고 있던 기대와 습관을

조금씩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결이 달라진다.“ - 본문 36

 

소유냐 존재냐 또는 소유하기와 소유되기와 같이 그 어떤 대상을 취득하여 자기 지배하에 두려는 욕구와 이와 달리 내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는 자기창조의 능동적 과정으로서 공유와 결속의 양식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뚜렷하게 다른 두 이해이다. 우리는 어느덧 물질과 부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살게 되면서 물질을 비롯한 외적 대상을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더, 더 소유함으로써 대상을 지배하는 느낌의 상승, 즉 새로운 자극의 무한 욕구에 종속됨으로써 욕구와 충동과 탈취의 능력이 행복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아집과 소외와 굴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유 집착은 자유의 족쇄가 되고 자기실현의 장애물이 된 그것에 얽매여 자기 자신에 대한 몰이해와 삶의 감각을 잃고 세상을 탓하게 하곤 한다. 자신임을 확신하게 하는 느낌의 이 왜곡된 현상에 대한 동서를 막론한 가르침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법정스님의 말씀은 바로 이 소유의식, 무언가를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동안 충만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방향과 방법들에 대한 가르침일 것이다. 그것이 곧 비워냄, 덜어내 가벼워진 마음이고 그 내려놓고 가벼워져 단순해진 자리에서 삶의 선택 기준은 선명해지고 단단해져 오히려 그 텅 빔이 생에 대한 태도와 삶의 품격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를 소욕지족 소병소뇌(小慾知足 小病小惱) 라 하여 삶의 깊이는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또렷이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들의 지나 온 인생길을 가만히 돌아보면 삶의 길은 결코 물질의 풍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 생애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랑과 베풂 말고 그 밖의 것들인 재화와 물질, 명예와 권력, 이런 것들이 뭐 그리 소중하겠는가. 무상한 것이다. 즉 항상성이 없다는 것이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비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내 삶의 가치기준이 흐트러지기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때 내려놓음, 비움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삶의 결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오늘처럼 모든 것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부자 되기는 어렵지 않지만. 투철한 삶의 질서를 지니고 가난하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내 안에 중심이 잡히면 (...) 나를 스스로 돌볼 힘이 자란다.” - 본문 195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타자는 시선에서 지워지고 저 위만 보며 계속 달리다 보면 불안의 기분이 떠나지 않는다. 그 극렬한 경쟁의 전선을 쉬지 않고 내달림으로서 성취는 늘어나겠지만 삶의 이유가 흐려지고 자기 삶을 상실한 허전함, 공허가 밀려들어온다. 스님은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다.” 라 말하고 있다.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인데, 이렇게 비워 간소해진 자리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의 리듬과 속도를 찾아내고 그렇게 명확해진 기준을 삶의 방향으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와 오래 앉아 있게 한다.’는 의미인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의 마음의 자세야말로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귀중한 태도일 것이다.

 

마음도 매달린 것을 조금 내려놓아야 새 감정과 풍경이 들어온다. 그 빈자리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삶의 방향을 다시 고르는 자리가 된다.” -본문 196

 

양과 크기를 키우려는 우리네 자세는 타인의 우위에 서려는 사고 때문일 것이다. 결국 주위의 시선과 인식에 휘둘리는 삶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생의 리듬이 없다. 그래서 삶은 고통스럽고 쉽게 짜증나며 피곤하고, 지루하며 지친다. 이러한 비교와 너저분한 장식을 덜어내어 자신에 맞는 속도를 찾아 지켜내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욕심의 속도도 느려지며, 계산하는 관계는 배려와 베풂으로 옮겨갈 것이다. 아마 이렇게 자기 리듬에 맞춰 세워진 자기만의 삶의 기준에 정성을 다하면 생의 밀도가 높아지고 그것은 충만한 행복감이 될 것이다.

 

어떤 세상을 사는지는 오늘 내가 고른 시선이 정한다.”고 엮은이는 말한다. 내려놓기, 비워내기는 자기답게 살기 위한 방식이지 그 뭐를 인색하게 절약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버릴수록 선택이 또렷해진다. 비교와 기대의 볼륨을 낮추고 내 속도를 지킬 때 여백이 생기고 그 위로 자연스레 삶의 여유와 평온이 찾아온다. 이렇게 과한 것을 덜어내 중심을 선명하게 만들면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 오래 남는 삶의 품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아름다움이고 세련된 기품이며 멋이다.

 

한 줄 한 줄 자꾸 멈추게 만드는 책은 불친절한 글이 아니라, 내 삶을 끌어와 함께 생각하게 하는 친구에 가깝다. 결국 독서는 한 문장을 앞에 두고 얼마나 오래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는가에 따라 깊이가 달라진다.” - 본문 253

 

법정 스님의 말씀들은 시적 고아함이 배어나오고 그것에 엮은이의 사유 품격이 더해져 주위 사람들에게 마구 나누어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문장은 절제되어 적은 말들임에도 그 속의 마음이 절로 건네져 옴을 느낀다. 엮은이는 이처럼 말 대신 눈길로 서로의 마음을 건네는 시간을 목격전수(目擊傳受)”라 알려준다. 책 속 문장을 바라보면 그 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간결하고 선명하여 이렇게 가르침과 문장의 리듬이 공명한 그 의미는 증폭되어 다가온다.

 

스님의 저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무엇을 읽을 것인가라는 글에서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 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혀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의 지적처럼 이 책의 문장들은 그 인고의 체험을 겪은 것들이어서 술술 읽힘에도 수시로 책장을 덮고 반추하게 된다. 뭇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고 정체성의 발견을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었다면 그런 말은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정체성은 무언가를 껴입고 장식하여 구성한 것이다. 나를 발견하는 일은 오히려 남의 시선과 기준, 체면, 증명하고 과시 하고픈 강박 등과 같은 것들을 떼어내는 일, 그렇게 단순화한 것 속에서 비로소 또렷해지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난 후 책장을 덮으면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삶을 바꾸는 힘이 몸과 마음에 배어들고 있는 기분 좋은 충만감에 싸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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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3-14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의자를 가지려 함은 소유가 아닌 앉기 위한 필요에 의함임을 아는 것이 무소유의 첫걸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의식 2026-03-14 20:10   좋아요 0 | URL
네, 필요와 소유의 경계, 그 기준을 세우는 마음이겠지요. 좋은 주말 시간 되십시요, 잉크냄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