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시민들은 공정 혹은 정의를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나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 증가'에 대한 우려의 차원에서 말하곤 한다. 기득권자가 제도적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할 때 대중들은 그것에 작동한 "특권, 특혜, 자의성, 예외성"등을 비난하고 바로잡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납득하기 불편한 공정성, 정의의 담론이 수구 언론을 비롯하여 지배 권력을 지닌 기득권자들이 이 언어를 자신들의 이익침해에 대한 분노의 언어로 여론을 장악, 호도하고 있다. 정치 검사였던 자가 '공정과 상식' 을 표방하며 어리석은 대중을 우롱하고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 않은가?

 

때문에 이제는 공정이니 정의니 형평성이니 하는 말들이 불온한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언어가 등장하면 외면하고 싶은, 불쾌한 기분이 앞선다. 일종의 피로 증후군이다. 쓸데없는 언어 낭비로 밖에 비치지 않은 것이다. 즉 시민들이 이해하고 요구하는 정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구성된 정의의 개념들이 하나의 언어 형식 속에 들어앉아 있어 공정이 마치 텅 빈 요란하기만한 수레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공정을 외치는 소리가 동네 개가 짖는 소리처럼 들리기에 이르렀다.

 

신진욱 교수는 공정 담론이란 단일 담론이 아니라 복합 담론이며, 혁명과 복고(revolution & restoration)의 모순적 공존이라 주장하면서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의 일환이라 보고 있다. 아래 도표는 2000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 중앙지와 경제지에서 '공정성'을 포함하는 기사 건수의 추이를 분석한 자료이다. 조중동은 이명박, 박근혜를 잇는 보수정권 하에서는 한겨레나 경향신문과 달리 공정성에 대한 언급이 극히 낮게 언급되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부터 급격하게 공정성에 대한 기사가 급증하기 시작해서 2019~2020년에는 그야말로 폭증했다.

 

 

 출처: 창작과 비평통권 193,더 큰 정의로 공정을 다시 쓴다, 51쪽 도표 부분 발췌

 

이 시기에 갑자기 한국사회에 불공정성이 증가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다. "권력을 누리며 불공정을 구축해온 검찰과 보수 언론(54)" 능력주의에 기초한 비례적 정의를 정의의 보편적 담론화하려는 헤게모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외시하는 것은 "좋은 삶과 좋은 사회가 무엇인가라는 가치의 문제(57)"를 기득권 지배계층을 위한 이익의 차원에서만 도모하기 때문 일 것이다. 이들의 정의는 "지배계급에 의해 간과되고 억압되는 평등적 정의(59)", "공존, 공생, 공유의 윤리를 사회에 확산하는 정의"가 아니라 격차의 확보를 통한 차별화, 능력주의에 따른 차등 보상의 공고화 등 기득권의 항구적 유지를 위한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이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공공의대 설립계획에 반대하여 파업을 일으킨 의사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이 파업의 정당성을 내걸며 했던 말이 "공정성 따윈 안중에도 없는(55)" 문재인 정권이라며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정의(Justice)'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공정성이라는 보편성의 담론을 최상류 계층인 의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며 정의의 담론을 훼손하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득권 집단의 수구적 담론 전략'화한 복고가 시민의 건강을 담보로 한국 사회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람시(A. Gramsci)는 혁명과 복고중 어느 것이 압도하느냐가 그 사회의 미래 발전 방향을 규정한다(50)"고 한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매년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 취약 계층 위에 군림하는 불의의 질서가 더욱 심화 고착화되고 있다. 기업의 거대화와 자본집적의 규모는 커지지만 고용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며, 시민적 삶의 미래는 점점 불안성을 키워나가고 있기만 하다.

 

신진욱 교수는 '혁명/복고의 모순적 총체성'을 껴안고 더 큰 정의를 위해 다시 공정성을 쓰는 역사의 변증법을 말하고 있지만 불의한 것, 좋은 삶, 좋은 사회를 향한 이상에 다가가려는 정의의 세상을 추악한 이기심으로 오염시키는 불쾌한 공정성 담론이 뿌리 내릴 수 없는 토양으로 바꾸어 내야 한다. 이것은 시민 역량의 제고만이 가능하다. 시민이 앎의 의지를 회피하는 한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적 기득권 집단은 시민을 지속하여 농락할 것이다. 그것의 미래는 예속이며 노예화이다. 정의(공정성)의 담론이 더 이상 불쾌한 담론으로 감히 헤게모니 투쟁에 나설 수 없는 사회를 위해 앎의 열정이 모든 시민에게 지펴지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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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이 몰고 온 오늘의 사회는 노동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 들끓고 있습니다. 정의(Justice)를 세계적 화두로 사람들을 감화시켰던 마이클 샌델교수가 바로 이러한 불공정성의 심화를 야기하는 그 연원이 짧음에도 급속하게 신화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능력주의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주제로 새 책 The Tyranny of Merit를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말로 의역한다면 '능력주의의 오만' 또는 '능력의 폭정'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네요.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우리의 좋은 성적과 학위는 모두 우리 자신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괜찮습니까?" 내 능력으로 성공했으니 그 과실을 독점적으로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출발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죠.

 

기회가 진정 동등하게 주어졌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나아가 이렇게 해서 기득권을 차지한 엘리트 계층이 능력주의라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압제한다는 것이죠. 대중이 이에 혐오와 불공정함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어두운 측면인 불평등성을 폐기하지 않으면 포퓰리스트(populist)가 엘리트 계층에 전복적 시선을 지니는 것은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죠.

 




승자와 패배자를 다루는 이 능력주의라는 신화에는 불평등을 기초로 하는 교활함이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은 가난으로 연결되고, 부자는 부자로 연결되는 사회 구조를 이루는 토대 환경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불평등성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능력주의 전투'에 덜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대학 학위(,박사 등), 성공의 정의, 일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특히 일(직업)에 대한 오늘의 가치 인식은 '벌어들이는 돈', '계급적 지위'가 아니라 "공동선에 대한 기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쓰레기를 수거하는 미화(청소)원이 의사만큼 중요한 사회적, 공공 기여자라는 것입니다. 그가 일하지 않으면 질병 통제는 불가능하게 되고, 우리가 사는데 서로 얼마나 깊이 서로 지지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그 답변이 될 것입니다. 택배, 창고 노동, 간호보조, 홈케어 ..., 아마 이 노동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검찰청의 정치 검사들보다 공공선에 훨씬 중요한 기여자들임을 부인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가치 인식을 공공선의 기여로 조정하면 지급되어야 할 돈(임금,수익 등), 직업 인식, 성공의 조건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은 내가 잘해서 이룬 것이라는 착각은 패배자들에 경멸을 보내는 것을 정당화 합니다. 실패는 네 잘못이라는 오만함을 양산하는 능력주의는 이러한 가치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 도덕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죠. 뉴노멀의 시대, *사회적 계층의 이동성에 대한 신뢰를 포함하여 정의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틀을 제공하는 저술이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 계층의 이동성: 샌델은 하위1/5의 계층 사람이 상위 1/5계층으로 이동하는 비율은 1.5~2%내외의 비율이라 지적하면서 능력주의는 허구이며, 수많은 불평등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고 비판적 사유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참조】능력주의(Meritocracy)'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마이클 영'의 저서 , The Rise of the Meritocracy(능력주의의 부상)은 마이클 샌델의 새 책을 읽는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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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달아오른 보드라운 피부에
닿지도 않고서 사람의 도리를 설명하는 당신 쓸쓸하지 않나요?”

 

 

 

감각 표상을 통해서
문학 텍스트를 재검토하다.

 

감각(촉각, 시각, 청각, 후각)이 문학과 예술의 창조와 수용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인간의 신체를 사회권력(제도)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책,『감각의 근대 - 소리, 신체, 표상』은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하여 하기와라 사쿠타로, 미시마 유키오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이르는 일본 근대문학 작품을 통해 서양에서 이식되기 시작했던 감각의 통제와 균질화들을 통찰한다. 

 

오늘, 말(언어)의 협소한 의미로 점점 소통의 단절과 소외가 심화되기만 한다.  구체적이며 체험적인 구심적 감각인 촉각(접촉)이 아닌 고작 시각적, 청각적인 원심적 감각에 전념케하여 사적인 신체조차 조작되고 통제관리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비교문학의 차원에서 이 책은 우리의 근대문학은 물론 작금의 문학작품을 바라보는 의미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잃어버린 그 풍성한 감각의 세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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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우선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믿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 인형의 집에서

 

 

결혼과 성 역할을 둘러싼 허위와 기만을 폭로함으로써 근대 여성해방운동의 불씨를 당겼던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상을 위해 다시금 소환되었다.

    

 

오는 11월 예술의 전당 개관 3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3막으로 구성된 인형의 집이 연극무대에 오른다.

희곡의 줄거리는 널리 잘 알려져 있듯이 남편에 종속된 존재로만 여겨졌던 가정주부인 노라

한 인간으로서 홀로 서기위해 집을 떠난다는 이야기이다.

페미니즘의 열기가 지속되고 있다. 민음사에서 예술의 전당 에디션으로 출간 예정된

인형의 집21세기 지금 입센의 메시지를 환기하는 의미 있는 기회를 일깨워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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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선생은 한국문학에 노동과 빈곤의 문제를 시작으로

민초의 시선을 통한 역사의 심원한 통찰과 인간 체온의 따뜻함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확인케 해준,

또한 날선 비판과 고발의 용기를 가르쳐 준 우리문학의 거인이시죠.

 

추천작품: <오래된 정원>, <여울물 소리>, <낯익은 세상>, <강남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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