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상은 가수 아이유의 노래 Love wins all로 촉발되어 박지영의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로 연결된 장애인,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에 대한 소박한 상념이다. 소설집의 간략한 감상으로 시작해 본다.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는 쓸모없음과 잉여나 허수와 같은 언어를 통해 쓸모와 효용과 생산성의 언어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어떤 균열이 있는지를 직시토록 하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들 효용이니 생산성이니 하는 언어는 하나의 언어로 집결된다고 할 것인데, 바로 쓸모있음이라는 유용(有用)’또는 소용(所用)이다. 이 단어는 인간을 구분하는 언어로 사용되어 무용(無用;쓸모없음)’한 인간을 질서에서 배제, 소외시키겠다는 폭력성을 은닉하는 지배의 기호로 이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단편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는 치매를 앓는 일흔아홉 살 아버지가 등장한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가면 실종되기 일쑤인, 아무 쓸모가 없는, 생산력도, 어떤 효용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치매 아버지와 무생물 밥솥이 나란히 거론될 정도이지만, 쓸모의 가치 측면에서만 보는 이 세계의 관점으론 언제라도 폐기처분해도 될 것만 같지 않은가? 효용 가치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모순의 언어를 이 사회는 또한 가지고 있다.

 

의사 소통능력을 상실한 치매 아버지와 함께 산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나? 멋대로 움직이거나 아무 곳이나 드러누우려 하거나,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타인의 위협이 되거나 하는 행동들 말이다. 그런 사람을 끌고 가다시피 하는 자식들이나 배우자등 가족을 향해 사람들은 무슨 도살장에 개 끌고 가는 개장수도 아니고서야 원~, 노인 학대야라고 섣부른 비난을 퍼붓곤 한다. 이 얼마나 편리한 생각인가?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그 쓸모없는 존재를 돌보는 이에게 쓸모없음을 잘 못 보호한다고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다. 소설은 아마 이 이중의 위선적 잣대가 우리들의 인식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가끔 TV 프로그램에는 이러한 치매환자를 돌보는 배우자나 자식들이 함께하는 매끈한 영상을 방영하면서 포장된 거짓과 위선으로 치매 가족의 현실을 미화해서 보여준다. 소설에서도 이러한 예가 등장하는데, 유튜브에 <마담 케이의 비밀 정원>이란 제목을 하고 우아한 치매할머니와 시인인 아들이 등장해서 운치있는 풍경 속에 시와 한 잔의 차가 오가는 예쁜 장면으로 연출된다. 치매가 이렇게 우아한가? 똥칠을 온갖 곳에 하고, 한 순간에 사고가 나는 예측 불가한 상황의 연속이다. 치매의 본질을 싹 걷어내고 효자이고, 지극정성의 배우자 모습만을 과시하는 이것들은 치매환자를 돌보는 다른 가족들은 물론 세상 모든 타자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전달하게 된다. 어쩌면 가장 유해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치매 아버지를 형과 누나를 대신해 돌보는 마흔의 아들인 주인공 강선동은 남에게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선행을 하는 효자로 보이기 위한 많은 위선과 과장을 행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착한 아이 신드롬에 걸린 한국사회의 많은 우리들은 자기 안의 착한 아이와 싸워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착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착함은 양보가 아니었다. 희생이 아니었다. 투쟁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탐욕스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 버텨내야 하는 것이었다.” -59

 

쓸모있음이라는 말은 우리네 일상 곳곳에서 그야말로 아무 쓸모없음이 드러난다. 인간 삶은 결코 유용이나 효용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소설의 표제작인 이달의 이웃비는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앓던 형이 죽자, 그 형의 내면의 어둠과 혼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이해할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도 형의 블랙홀에 같이 빠져들까 두려워 줄곧 멀리서만 지켜봐 왔음에 내재한 진실을 향한 동석이란 인물의 자기 성찰적 걸음의 이야기다.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와, 쌓인 눈을 치우고, 상점들의 짐을 거들어 날라주고, 밤새 토해낸 악취나는 말라붙은 오물을 치우는 일을 하는 부자(父子)가 등장한다. 미화원이었던 아버지 배철영은 약한 지적장애인 아들 배병식이 자기가 이 세상에 없게 되는 날 이웃으로부터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웃비()를 선() 지불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웃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그들은 보상을 지불하고 가져감으로써 쓸모있는 이웃이 되려는 것이다. 여기서 약자들이 소용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는 이 세계의 극렬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반증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동석의 형은 함께하는 동생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그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해 집에 머물면서 실내 자전거 페달을 돌리고 <무한도전>을 보며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체적을 최대한 줄이는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때 체중은 50Kg 남짓이었다고 동석은 말한다. 그는 이를 형과 닮은 보이지 않는 이웃 배병식을 통해 상기하는데, 그것조차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동석 자신이라는 고작과 모자라는 병식이라는 존재의 감히의 관계를 넘지 못한다. 동석은 병식에 대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선, ‘선 밖의 이웃우리안의 이웃에 존재하는 매우 엄중한 제도 혹은 잣대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이 같은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인 척이라도 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세계에 조금이라도 공평함을 돌려주기 위해필요한 것이리라. 위선적이거나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선행일지라도 진실한 수고가 뒤따른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밝음을 위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동석의 행위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이다는 감정을 갖는 것, 아마 여기가 훈련되고 학습되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집의 몇 작품이라도 급하게 읽게 된 이유가 있다. 최근 예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행태가 다시금 추한 민낯을 드러내며 노래 제목조차 간섭하기 시작하는 형국을 접하며 촉발된 선 밖의 이웃 갈라치기라는 폭력성의 속살을 보다 넓게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가수 아이유(IU)의 노래 <Love wins>가 성소수자 구호로 이해되어 사회에 부정적(?) 메시지를 전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수정해서 Love wins all이라는 제목으로 변경 발표되는 일이 있었다. 발표된 음악영상의 내용은 육면체 상자가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인 두 연인을 추적하며 혐오 가득한 편견으로 감시를 그치지 않는 상황 속에 끝내 서로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두 사람이 사회로부터 버려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유튜브, IU 'Love wins all' MV영상 화면클릭(원 영상)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자(Cube,Box)로 상징되는 것은 서구사회에선 익숙한 은유이다. 사회라는 울타리에는 동일성만 유지되고 자기와 다른 이질성에는 곧 혐오와 폭력을 가하는 억압과 편견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기호이다. 바로 그 편견의 존재를 사랑으로 이겨내자는 노래에 비난을 가하는 세계가 바로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이 노래가 담고 있는 고귀한 정신을 알아본 세계인들의 높은 반향이 있다는 소식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노래는 날 데려가 줄래? / 나의 이 가난한 상상력으론 / 떠올릴 수 없는 곳으로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리곤 세상에게서 도망쳐 Run on / 나와 저 끝까지 가줘 My lover / 나쁜 결말일까 길 잃은 우리 둘이라는 음절로 이어진다. 그 혐오와 배제의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면 자신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벗어난 상상을 넘어서는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버림받은 이 세계에서 길 잃은 두 영혼은 그래서 세상 끝 다른 세계가 있는 곳을 향해 도망친다.

 

오늘 한국 사회는 장애인, 성소수자, 정신적질병자, 노인, 그 밖의 사회적 약자(경비,미화 노동자등)에게 그 어느 때보다 극렬한 혐오의 감정을 뱉어내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치매센터는 2024년 치매환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2050년에는 300만 명을 훨씬 초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2021 장애인 통계>에 따르면, 2020년 등록 장애인 수는 전체 인구의 약 5.1%26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적어도 이 두 집단의 인구만 하더라도 360만 명에 이르고, 여기에 성소수자와 독거노인등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인구까지 더하면 인구 10명에 1명은 이러한 범주에 포함된다는 말이며, 이는 둘 또는 세 가족 중 한 가족은 이들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일 세 세대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족이라 가정한다면 전체 인구가 모두 이들과 관련을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타자라고, 사회가 배제하여야 할 존재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부모 일수도, 자식일수도, 형제자매일수도, 삼촌이고 고모와 이모이고 사촌형제이고 조카이며 손녀손자일 수도 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니 잃은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일 테고, 설혹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이라면 외면하는 의도의 행위일 것이다. 모르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그 결과 행위에서 동일한 양상을 낳는다. 시각장애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고 주먹질을 하는 인간의 무지나, 경비노동자에게 자기 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발길질을 하고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다를 것이 없다.

 

사회 약자를 향해 저질러지는 혐오와 폭력들을 방임하는 세계에 우리는 이미 깊숙이 들어 와 있는 것 같다. 이대로가 좋은 세계인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짜 마음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정한 거짓이라도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 표현에도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들의 누군가는 이들이 될 수 있다. 모두 늙어 노인이 된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우리들의 편견과 혐오의 시선은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왜 세계인들이 하나의 노래에 이토록 열광하겠는가? 청각장애인으로 분()한 아이유가 노래하는 오직 장애인만이 서로 의지가 되는 세상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들의 우주(유니버스)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노력, 그래서 그 다름의 불신의 정체를 해소하는 걸음을 걸어보자. 혐오와 편견을 저멀리 날려보내고 설혹 위선이라도 행해보자. 아마 우리 세상은 조금은 더 밝고 환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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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사악함을 못 본 체함으로써 혹은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유일한 희망은 허무주의를 명명하고, 질병의 치료약을 찾기 위해 그것을 목록화하는 데 있다. 요컨대 지금이 희망의 시간임을 인식하자. 비록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일지라도."

Nous sommes dans le nihilisme. Peut-on sortir du nihilisme? C’est la question qu’on nous inflige. Mais nous n’en sortirons pas en faisant mine d’ignorer le mal de l’epoque ou en decidant de le nier. Le seul espoir est de le nommer au contraire et d’en faire l’inventaire pour trouver la guerison au bout de la maladie. Cette collection est justement un inventaire.

 -갈리마르에스푸아르 총서, 책임편집자 알베르 카뮈,

출처: <카뮈, 지상의 인간2> 47, 한길사

 

 

인용한 위 문장은 에스푸아르(Espoir) 총서 모든 책의 뒤 표지에 표기되었던 알베르 카뮈의 글이다.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인 갈리마르의 책임편집자였던 알베르 카뮈는 에스푸아르(희망)라는 소설과 비소설을 망라한 총서 발간의 책임자로서, 전후(戰後) 프랑스인들의 앞에 놓여있는 납득할 수 없는 불의한 세계의 성분을 직시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때문에 이 총서의 초기 목록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저작들이었으며, 표지조차 회색빛을 띤 소프트 커버였다고 한다.

 


설혹 달성이 미완에 그칠지라도 무엇인가를 희망하기 위해서는 직면한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말고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그 문제가 품고 있는 혐오스러움, 더구나 그것이 마주 선 자신의 것일지라도 전부 열거해서 제대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천명이다. 전후 독일 부역자들의 처리문제로 프랑스 사회는 용서와 처벌로 양분되어 곤혹을 치렀다. 그럼에도 드골 임시정부는 엄중하고 주저 없이 민족 반역자들을 극형으로 단죄했다. 프랑스 문단에는 친독은 아닐지라도 기회주의적 방관자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슬그머니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놓고 있었다. 카뮈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카뮈는 시몬 베이유의 유작 <뿌리 내리기>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공식적인 역사는 살인자들의 말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 천박한 영혼이 아니고서 어느 누가 알렉산더를 성심껏 찬미할 수 있겠는가?" , 알렉산더의 동방침략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인간의 역사는 이렇듯 무법자들의 언어로 써진 기록이다. 카뮈에게 인간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인간들 자신의 어둠의 지대를 죽 나열해서 그것들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의 욕망들을 들춰내는 것이 당대 문학예술의 의무라 생각했다고 이해된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지성의 노력을 갖지 못했을 뿐아니라, 민족을 배신한 파렴치한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에겐 이같은 목록화된 문제들의 기록이 없다. 때문에 치료약도 없으며, 희망의 목록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70여 년 전의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노력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역사에 늦은 것이란 없다. 이 목록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부질없는 모래성 쌓기가 될 것이다. 현실이 그러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한국의 시인들, 문인들은 희망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이 단어에 혐오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것이 모두가 될 수는 없다. 목록을 만들어라! 사악하고 부정했던 것들의 목록을. 이 노력을 회피하면서 희망은 무지하고 분별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망상이라 말하는 것은 무책임과 의무의 방기일 뿐이다. 상처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그 상처가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다. 카뮈의 희곡 작품인 <오해>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실존 전체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기반 자체를 갱신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전시(戰時)에 의지와 관계없이 고향 알제로 돌아갈 길이 차단된 채 이방인으로 프랑스 본토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어린 성찰이다.

 

"정신이 마침내 칼은 칼로써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무기를 들고 승리를 쟁취했을진대,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잊을 것을 요구하겠는가? " 이 발언의 의미는 증오가 아니라 기억에 기초한 정의 그 자체의 실현이다. 정의를 잃어버린 민족에겐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다 하나의 단상을 더해 놓는다.

 


"이상도 고결함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정치와 인간의 운명을 빚고 있다.

정치판에서 고결함을 갖춘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알베르 카뮈, 작가 수첩 1,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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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독서를 정리하지 못했다. 이제 마음에 어떤 작은 흔들림을 주었던 책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본다. 국내 문학(소설과 시, 에세이)은 여러 이유에서 소홀히 했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작가들의 몇몇 작품을 읽긴 했으나, 어떤 의무감에 가까운, 작은 기여의 차원이라는 소박한 심정의 독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수히 발간되는 모든 책을 망라할 사진 기억술을 지닌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취향 또한 편협해서 비평과 철학을 비롯한 역사분야와 해외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특히 올 한해는 알베르 카뮈의 글 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내게 새로운 이해를 안긴 역사 및 문화 비평과 세계를 진술하는 방식의 다양성에 관한 저작들이 비교적 인상 깊게 남아있는 정도이다.

 

문학 분야부터 정리한다면, 단 하나의 작품만이 마음에 남아있다.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들여다보게 해준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도어이다. 역사를 말하지 않으면서 역사적 실존을 탐색하게 하고, 그 가운데 인간 존재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게 한 작가의 발견이었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국내 문학분야는 이미 등단시점부터 읽어 온 김사과 작가에 대한 짝사랑이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안윤 작가와 올 한해 새롭게 알게 된 한정현 작가와 성해나 작가의 작품 정도가 여전히 기억에 살아있다. 두 날카로운 시선의 작가와 유머 넘치는 즐거움 속에서 진지한 사유가 피어오르도록 쓰는 두 작가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인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분야의 분류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문예비평에 가까운, 그럼에도 문화사에 가까운 한스 블루멘베르크난파선과 구경꾼은 인류가 지혜를 전달해 온 오래된 방법으로서 은유를 재발견을 하도록 해주었다. 진열된 앎이 아니라 표면과 달리 짐짓 진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비-개념의 이 특별한 언어 도구와 이를 수단으로 한 인간 역사의 통찰은 세계를 인식하는 시선을 확장해주었다고 하겠다.

 

이와 아울러 로버트 단턴의 사회문화 현상의 저변에 자리잡은 개인들에 잠재하고 있는 집단적 의식과 무의식, 즉 광범위하게 시대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을 탐색하는 망탈리테의 역사인 미시사를 알게 해준 고양이 대학살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과학분야라면 단연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로 대표되는 인간 유기체의 의식과 정신 작용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을 통한 자기 고유의 구조적 역동성과 자기생성과 적응에 대한 것이다. 이젠 고전적 과학 저술이 된 앎의 의지자기 생성과 인지두 저술은 아마도 다윈의 책보다 내게 더 많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칠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할 독서라고 내세울 것도 없어 보인다.

 

아마 2024년의 독서도 이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내겐 극히 예외적 사태일 것만 같다. 카뮈와 카프카를 비롯한 고전이 된 작품들의 몇몇 작가는 여전히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으며, 마뚜라나와 바렐라, 그리고 블루멘베르크도 거듭 읽는 저술이 될 것 같다. 보르헤스가 이미 말했듯 이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앎이 부족 할 뿐이지 그 무엇이 새로울까? 2024년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보다 깊숙이 내게 체화되는 독서를 이어갈 계획이다. 아마 거듭 읽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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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대 시인의 문장으로 시작된 은유의 정신사가 이 책에 이르게 했다. 배를 난파시키는 사나운 바람이라는 인간 시련의 상징적 은유는 18세기 프랑스인에 와서 양면적 성격으로 변화했다.

 

인간의 정념이란 그 얼마나 불행을 가져오는 걸까요! [...] 그것은 배의 돛을 

부풀리는 바람이네. 돛은 때로는 배를 가라앉히기도 하지만 돛이 없으면 배는 

나아갈 수 없다, [...] 만물이 다 위험하지만 그것은 모두 필연에 바탕하고 있네.

- 18隱者에서

 

호기심이 이끈 독서는 인간 삶의 행복과 불행을 마치 예정된 조화인 듯 주장하는 이야기를 만나게 했다. 사실 이에 대한 시시비비는 사유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이야기 그 자체에 빠져들어 보기로 작정하고 읽었다. 19편 이야기의 연작으로 구성된 이 동화적 작품은 볼테르 자신의 삶의 곡절들과 절대 분리 불가능한 것만 같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이야기는 그가 욕망하는 사랑의 기원이 담긴 것 같고, 바로 이 사랑의 성취를 향해 겪어야 했던 불운과 행운의 거듭되는 반전의 사건들 속에서 삶의 동력, 인간 삶의 원천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품의 제목인 자디그(Zadig)는 아라비아어로 진실을 뜻하고, 히브리어로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자디그 또한 고대 바빌론의 유복한 가문의 고결한 청년으로 성장한 현자이며, 당시 철학에 거슬러 1년은 3654분의 1일이며,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확신하는 인물이다. 18세기 과학적 이성을 대표하는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분신일 것이다.

 

출처동서문화사 刊, 캉디드,미크로메가스,자디그, 426쪽에서


또한 소설 속 자디그의 궁정 생활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모압다르 왕의 왕비인 아스타르테는 그를 살해하려는 귀족세력으로부터 볼테르를 보호해주었던 샤틀레 후작부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몰이해와 소외로 고통을 겪던 볼테르를 알아주었던 이 지성의 존재에 대해 바치는 사랑의 서사로 읽을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경쾌한 작품은 가벼움 속에 번뜩이는 삶의 지혜들로 결코 진지함을 잃지 않으며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집안과 재산까지 고루 갖춘 청년 자디그는 바빌론 최고의 결혼 상대자로 역시 최고의 미인인 세미르와 약혼하여 결혼을 준비하던 중 이에 앙심을 품은 경쟁자 오르칸의 습격을 받는다. 세미르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여 약혼녀를 빼앗기지는 않지만 눈에 상처를 입는다. 자디그는 한 쪽 눈을 치유할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자 세미르는 애꾸눈 사내는 역겹다며 바로 오르칸과 결혼하곤 자디그를 멸시한다. 자디그는 명문 귀족과 재산을 지닌 종족들에 회의를 느끼고 심성 고운 평민인 아조라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정숙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며 그 천박성에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의 도움을 받아 시험에 들게 하여 그녀의 역겨운 위선을 스스로 이해토록 돌려준다. 아마 당대 프랑스 궁정사회 귀족들의 문란이 얼마나 기만에 싸여있는지의 비난이었을 것이다.

 

코믹한 이야기들을 이처럼 펼쳐내며, 당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버무려낸다. 그리곤 틈틈이 계몽주의 이성의 요소들인 세계의 현상과 대상들의 특성 연구에 몰두하는 자디그를 보여주며, 그의 이성적 지성이 수시로 광적인 멍청이들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을 그려낸다. 그의 예리한 지성은 오히려 마법이라며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고발을 받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율법 논쟁을 종결짓자 신성 모독죄로 몰리기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오늘의 독자인 우리들은 그네들의 역사적 사실을 조망할 수 있기에 당대에 발생했던 사건들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적 견해로서 읽을 수 있게 된다. 1726년 볼테르를 바스티유에 감금하게 된 명문귀족이었던 발리에 드 로앙(소설에서는 오르칸으로 등장)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부터 살해의 위기에 처했던 일, 볼테르를 궁정에서 몰아내는데 안달했던 궁정 권세가 부아예(Boyer)는 글자의 순서만 바꾸어 대주교 예보르(Yebor)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뽐낸다. 지나치게 박식해도 위험에 빠지고, 그래서 입을 닫으면 그것을 문제 삼아 위협하는 세상, 자디그는 외친다.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행복한 자로 불린다는 이유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파멸에 몰리고, 진실이 뜻하지 않게 입증되어 불행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은 누군가의 행운이 오래 머무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행불행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것은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섭리, 신적 질서의 조화로 향한다. 이성의 문제를 가진 것만으로 만족했다.”는 자디그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인간 개체의 운명의 증언에 있어서 섭리라는 숙명성으로 치닫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적 사유의 한계처럼 여겨진다.

 

궁정 장관이 된 자디그는 왕비를 사랑하게 되고, 왕비는 왕의 앞에서 무심코 자디그를 빈번하게 칭송하게 된다. 자디그는 친구 카도르에게 이러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친구는 현명하게 자디그를 경고한다. 사랑이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징후가 있는 법이거든, 자디그, 내가 이렇게 자네의 심정을 읽었는데 왕께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심정을 자네의 마음에서 발견하지 못했을지 생각해 보게. (8질투) ,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성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고의 말처럼 왕은 자기 눈으로 본 모든 것을 믿었고, 보지 않은 모든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제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어나가고, 자디그를 살해하고 왕비를 독살한 준비를 끝낸다. 사랑과 의심, 그리고 증오가 폭발하는 이 이야기는 여느 멜로드라마의 재미를 훌쩍 넘긴다. 왕비가 총애하던 난쟁이 시종의 사전 암시 덕택에 두 사람은 각자 도피의 여정을 떠난다. 이 여정에서 겪는 고초들은 지역마다의 문화와 관습적 차이, 경제적 불균형과 분배에 대한 문제로, 그리고 당시 사제의 신학과 같은 망상에서 생겨난 속임수에 대한 지탄을 통해 과학적 이성에 대한 신념을 이야기의 저변에 도도히 흐르게 한다.

 

이윽고 소설은 사드의 유명한 소설,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에서 유명하게 된 선을 낳지 않는 악은 없다.”고 인용된 원천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에 그 어떤 인과성이란 없다는 것, 인간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도 전체 질서 속에선 선의 원천이 된다는 생각, 예정조화설, 섭리 또는 운명에 도달한다. 설사 이것이 세계 원리라 해서, 인간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마 볼테르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 세계는 엄연히 악행이 있어 타자들을 궁지에 처박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분배는 왜곡되어 극단적인 괴리와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몇 안 되는 정의로운 인간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으니 악을 신의 섭리처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면 아마 인간 세상은 벌써 종말을 고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시련과 행운을 오가며, 라이프니츠의 인과성 없는 개체들을 조화로 이끄는 거대한 힘에 대한 삶의 일화를 제시한다. 내겐 볼테르가 이러한 당대의 사변적 성찰을 내세워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전하려했다는 의혹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서 소설이겠지만 말이다.

 

바람, 폭풍우가 우리를 난파시키는 악이지만 그것에 의해 우리는 삶의 추진력을 얻는다. 동의하면서도 온전히 수긍할 수만은 없는 반항심이 생긴다. 왜 바다여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정녕 바다위에 둥둥 떠다니는 배에 승선한 존재일까? 우리에게 단단한 대지는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옳은 것일까? 아무튼 나는 요즘 이 모순, 부조리의 불가능한 이해를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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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판단력에서 유리된 지식의 패악(悖惡)>



행동은 비루하고 언변만 학자인 자들이 나는 싫다.”

- 파쿠비우스(Marcus Pacuvius; B.C. 220~B.C.130)

 

몽테뉴의 에세(Esse) 1 25현학에 관하여를 읽던 중 재밌는 구절을 발견하고 몇 자 남겨두기로 했다. 이야기는 고트족이 그리스를 침범했을 때, 그들은 단 하나의 도서관도 불태우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반전은 고트족이 지식과 문화를 존경하고 숭배해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 도서관들을 온전히 남겨두어야 판단과 실천의 장을 멀리하고 들어앉아 글에 코를 빠뜨리는 일에 몰두하게 되리라는 견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문()을 숭상하고 이의 판단과 실천적 현장은 도외시하는 식자들만 우글거리기를, 그래서 칼집에서 칼도 꺼내지 않고 손쉽게 주인이 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몽테뉴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는 정의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공부할 뿐, 그것을 판단하고 실천하는 법은 배우지 못하는, 남의 지식만으로 가득 채워진 지식의 무용성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16세기 조선 또한 서원에 들어앉아 세치 혀를 훈련시키는 데 열중하다 왜에 손쉽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것도 이와 다른 현상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페리고르 지방의 이 귀족은 급기야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은 재료를 (두뇌)에 채워 넣으면 둔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고 하기도 하지만, 반지성(反知性)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그 어느 때보다 도서관이 많이 늘어났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곳곳에 공공 도서관이 있어 기억의 창고를 가득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발걸음들로 분주하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의 식견이 더 깊어졌는지, 혹은 이 사회가 더 선하고 정의로운 세계가 되었느냐고 물으면 선뜻 답변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책과 학문에서 우리들은 무얼 배우고자 하는 것일까? 아마 법학, 의학, 경영학, 공학 등등 돈 버는 목표에 소용되는 것을 목표로 한 공부이기 십상일 것이다. 결국 정의를 실천한다거나 올바른 판단을 하기위해서나, 선한 행동을 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러한 양상은 학교 교육 또한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더욱 극성맞게 판단력과 덕성에 관해서는 어떠한 것도 가르치지 않으며, 배우지 않는다.

 

때문에 고대 로마 시인 파쿠비우스가 말하듯 지식은 가득한데 행동은 비루하고 혀만 재빠른 인간들만 양산되고 있는 듯하다. 지식과 판단력을 비교해보면, 판단력은 지식 없이도 작동하지만 판단력 없는 지식은 파렴치하거나 악덕이 되기 일쑤이며,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결국 이 사회에 기억력은 충실하지만 판단력은 텅 빈 인간들로 득실대다보니 사회 정의는 실종되고, 선악이 뒤틀린 세계가 펼쳐질 수밖에 없게 된다. 몽테뉴는 법관을 임용할 때 지식만을 검증하는 시험은 그릇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양식(良識) 또한 검증되는 채용제도의 필요를 역설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 사법의 정의를 위해서 정말이지 이들 기구에 지식은 물론 이해력과 양심이 함께 갖춰지기를!”이라고 썼다.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른 어떤 지식도 해롭다! "

-에세 125, 265, 민음사 2022.8, 13쇄에서

 

지식은 정말 위험한 양날의 칼이다. 판단력, 즉 선한 의지에 대한 배움이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필히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 세네카가 지식만을 채운 인간들이 나타나고부터 선한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듯, 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인간들에게는 다른 어떤 지식도 해롭기만 하다는 것을 오늘 정치검찰이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현실로 입증되고 있듯이 말이다. 몽테뉴는 오랜 공부 뒤에 얻은 것이라곤 법조문에 불과한데 우쭐하고 오만해져 부어오른 영혼으로 바람만 잔뜩 들어간 인간들의 독성으로 가득 찬 정신을 비판하고 있다.

 

지식과 바른 판단력으로서의 지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지식과 실천적 행동 또한 그 거리는 한참이나 먼 것이다. 우리 사회가 17세기 프랑스인이 생각하기를 권했던 인격과 실제 행동으로부터 격리된 지식 쌓기의 그 혐오스러움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 더구나 이를 시정하기는커녕 더욱 고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수치스러움이 엄습해온다.

 

지식 자체는 정신에 광명을 주는 것도, 눈을 뜨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이러한 지식의 직분을 혹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보게 된다. 채워 넣은 지식이 올바른 가치 판단으로 이끌어주고, 판단의 속도를 조절해주는 지혜로 체화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인격형성과 선한 실천력으로부터 유리된 지식만이 난무하는 이 사회는 분명 잘 못된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일 게다. 글한테 망치질 당한 '글 멍청이(Lettreferits)'들이 설쳐대는 사회는 고트족의 좋은 침략 대상이 되리라. 양심과 판단력을 지니지 못한 공허한 지식이 휘두르는 칼날이 이 사회를 어디까지 추락시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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