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리스베트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해 보이는 여자였다. 하지만 드라간이 가장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그 점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은 이미지가 모든 걸 좌우하는 시대 아닌가. 밀톤이 표방하는 이미지가 보수적 안정성이라면 리스베트의 차가운 이미지는 해양박람회에 전시된 동력삽만큼이나 신뢰감을 불어넣는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가장 유능한 조사원이거식증 환자처럼 비쩍 마른데다 바짝 커트한 머리에 코와 눈썹에는피어싱을 한 창백한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목에는 2센티미터쯤 되는 말벌 문신이 있었고 왼쪽 이두박근과 발목에는 끈 모양 문신을 두르듯 새겼다. 가끔 탱크톱을 입고 나타나면 어깨뼈 위에 새긴 큼직한 용 문신을 볼 수 있었다. 머리는 원래 적갈색이었는데 까마귀처럼 새카맣게 물들이고 다녔다. 하드로커 떼거리들과 한 일주일 신나게 어울려 다니다가 불쑥 나타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영양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리지 않고아무거나 먹어치웠다. 타고난 체격이 말랐을 뿐이다. 뼈대가 마치 어린 소녀처럼 섬약했고 작은 손에 발목도 가늘었다. 가슴은 하도 작아 헐렁한 옷을 입으면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나이는 스물넷이었지어떤 이들은 열네 살로 보곤 했다.
입은 제법 컸고 코는 작은데 광대뼈가 솟아서 동양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민첩한 몸동작은 마치 거미의 움직임을 닮았으며 컴퓨터로일할 때면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패션모델을할 만한 몸매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화장한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찍는다면 광고모델로 나서도 될 정도였다. 요컨대 화장과 이따금 눈살이 찌푸려지는 새까만 립스틱을 바르고 다녔다 문신과 피어싱아래 숨은 그녀는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그 매력이란 게 전혀이해할 수 없는 종류인 게 문제이긴 했지만.
리스베트가 드라간 밑에서 일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유형의 여자가 아니었으며 일자리를 제안할 만한 이미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를 채용한 것은 순전히 홀게르 팔름그렌 때문이었다. 과거 요한 프레드리크 밀톤의 개인적인 일들을 관리했었고 지금은 조기 은퇴한 변호사다. 그는 행동에는 약간 문제가 있지만 통찰력이 뛰어난 아가씨라고 리스베트를 소개했다. 그가 기회를 줘보라고 당부하는 터라 드라간은 내키지 않았지만 받아들였다. 거절할수록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문제 청소년 같은 사회의허섭스레기들을 돌보느라 쓸데없이 정력을 낭비하긴 하지만 판단력하나만큼은 제대로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직접 본 순간, 곧바로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녀의 문제는 단지 외모와 행동만이 아니었다. 중학교도 제대로마치지 못했고 고등학교는 근처에도 안 갔으며, 어떤 종류의 고등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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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제조하는 회사들은 가공식품 업계의 요청에 따라 채식용햄버거를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고기의 탄 맛을 흉내 내는 냄새를 만들기도 한다. 또 처음에는 무향이었다가 물이 섞이면 냄새가 나기시작하는 향, 가공식품 제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쾌한 냄새를 가리는 향도 만든다. 이러한 묘약들은 부엌 선반에서 몇 달을 묵어도 썩지 않는 현대 포장 가공식품의 탄생에 공헌한 숨은 영웅이면서도 계획적으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연방 규제 기관들은 식품 제조 업체들의 편의를 위해 펌킨 스파이스와 같은 합성 향료에 쓰이는 화학물질의 제품 성분 표시를 의무화하지 않고 있다. 그런 화학 성분들은 ‘천연 및 인공 향료‘라는 모호한 항목에 한데 묶여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화학물질이 우리가 먹는 식품에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뇌는 아주 잘 안다. 이런 화합물에서 나오는 휘발성 물질은 오직 식욕을 자극하겠다는 목표로 후각 망울을 강타한다. 그중에서도 천연 바닐라 맛을 내는 인공 향료 바닐린은 구미를 가장 강하게 돋우는 물질이라 할 수있다. 식품 제조 업체들은 1만 8000개가 넘는 제품에 바닐린을 첨가하는데, 이 중에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처럼 자신이 바닐라 향을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제품들도 있다.(초콜릿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 중 두 번째로 인기가 많은 종류다.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가장 인기가 많은 아이스크림은 플레인 바닐라 맛이다.)향 제조 회사들이 우리의 식습관을 형성하는 데 이런 간계를 쓰기는 하지만, 천연 향료의 맛을 흉내 내는 능력이 이들이 식품 업계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니다. 식품 기업들이 이런 향 제조 회사들에 도움을 요청할 때는 천연의 맛을 흉내 내는 일보다 더강력한 효과를 기대한다. 식품 기업들이 이런 화학 실험실을 이용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 심리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사람들이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 본능이나 습관에 따라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 P185

식습관을 형성하고 가공식품 중독을 야기하는 가장 기본적이고강력한 인간의 본능은 가격과 관계가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인간의 진화를 에너지 관점에서 설명했던 것을 다시 떠올려 보자. 에너지 관점이란 음식에서 얻는 에너지를 어떻게 소비하며 그 음식을 획득하는 데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소비하는가를 말한다. 후자와 관련하여 우리 조상들이 가장 쉽게 음식을 구하는 길을 택했다는 사실은쉽게 이해가 된다. 그들은 직립보행을 시작하면서 음식을 구하러 다닐 때 힘이 덜 들었고,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음으로써 소화율이 높아졌으며, 신선한 고기를 먹으려 할 때는 영양 대신 나무늘보를 사냥했다. 오늘날 우리가 음식에 관해 내리는 의사결정에도 조상들의 행동 방식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 듯하다. 싼 음식을 구매하는 것은 그 음식을 사기 위해 일을 덜 해도 됨을 의미하므로 우리는본능적으로 값싼 식료품과 저렴한 레스토랑에 끌린다. - P187

슈퍼마켓 체인들이 도둑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슈퍼마켓들은화학 회사에 유명 브랜드의 제조법을 훔쳐 오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쉽기도 하거니와 핵심을 벗어나 있다. 슈퍼마켓들은 자체상품을 더 싸게 팔아야 한다. 그러려면 제조 비용이 덜 들어야 하는데 여기가 바로 향 제조 회사들이 식품 업계에 아주 중요한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지점이다. 그들의 임무는 값싼 재료를 사용하여특정 브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맛을 모방하는 것이다. 향 전문가인샌손의 말처럼 "대형 할인점들은 유명 브랜드의 제품과 유사한 것을바라면서도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천연 바닐라는 자연의 놀라운 작품으로 수많은 천연향 성분이 혼합되어 있어 매우 깊은 맛을 낸다. 그러나 천연 바닐라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자라는 난초에서 얻기에 엄청나게 비싸고 가격 변동 폭도 매우 크다. (일례로 2019년에 바닐라콩은 1파운드약 450그램에 272달러였다.) 따라서 식료품이나 레스토랑 요리에 쓰이는 바닐라향은 대부분 향 전문가들이 만든 가짜다. 가짜 바닐라 향인 바닐린은 천연 바닐라의 향 분자 중 하나로 펄프와 제지 공업의 폐액에서추출하거나 실험실에서 합성한다. 바닐린의 부족한 향은 가격으로 상쇄하고도 남는다. 1파운드에 7달러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펌킨 스파이스를 만드는 시클로텐과 락톤류처럼 향 제조 회사들과 그들의 고객사인 식품 제조 업체들이 가공식품 제조에 사용하는 성분의 더 값싼 공급원을 찾아서 절약하는 생산 원가는 고작 몇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바로 후각 망울을 자극하지 못하면 뇌가 비용절약에서 느끼는 흥분으로도 보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191

편의성에 주목하도록 한 식품 업계의 전략은 아주 순조로우면서도 철저하게 실행되어서 우리는 설탕 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업계에서 편의성이라는이름으로 달게 만든 것은 시리얼만이 아니었다. 기업들은 옥수수 시럽부터 농축 과즙에 이르기까지 60가지가 넘는 당을 무기로 마트에서 파는 거의 모든 제품, 과거에은 단맛이 나지 않았던 제품에까지 설탕을 첨가했다. 한편으로 그들의 목적은 일명 설탕에 대한 지복점(blisss point. 최고의 만족도를 제공하는 지점), 즉 뇌의 추동하는 영역이 매우 자극되어 억제하는 뇌 영역이 제동을 걸 기회조차 없는 설탕의 양을정확히 찾아내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빵에도, 요거트에도, 토마토 주스에도 지복점을 자극할 만큼의 설탕을 넣었다. 그러나 편의적 측면도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단맛이 첨가되었다는 특징은 음료수는 물론이고 디저트류, 유제품, 시리얼, 크래커까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기대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으면서 제품의 포장 전면에 표기되는 매력 요소가 되었다. 이런 전략 때문에 이제 마트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무려 4분의 3가량에 감미료가 함유되어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모든 음식이 달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달지 않은 것, 특히 채소 같은 것을 먹으라고 할 때인상을 쓰는 것도 그래서다. 우리가 먹는 시간을 아끼려 하자 식품기업들은 우리를 설탕에 중독시켰다. 또 제품 자체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소금과 지방도 첨가했다. 우리는 소금, 설탕, 지방 섭취의 주도권을 식품 기업들에게 통째로 넘겨주었고, 이로써 우리의 음식 문화는 기업들이 만든 식습관으로 변하고 말았다. - P195

우리의 문화적 규범에서 이러한 거대한 변화가 언제 일어났는지, 언제부터 우리가 식품 기업의 손에 놀아나기 시작했는지 정확히짚어 내기는 어렵다. 강박적인 식습관을 해결하기 위해 섭식 행위를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이런 변화가 1980년대 초반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것으로 본다. 과거에는 식사 전에 입맛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 무렵부터 무엇이든 어디서든 아무 때나 먹는일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이전과 달리 군것질을 하기 시작했다.
식품 기업들이 군것질을 네 번째 식사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기업의 수익과 함께 사람들의 허리둘레도 늘어났다. 현대인은 군것질로 하루 평균 580칼로리를 섭취한다.‘ 하루 먹는 양의 대략 4분의1에 해당하는 수치다. 또 군것질은 값싸고 편리하게끔 만들어진 가공식품과도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마트에서 사서 집에 가져와 세척하고 껍질을 벗겨 잘게 썰어 보관해야 하는 당근을 군것질거리로 먹지 않는다. 식품 회사들은 군것질거리로 작은 셀로판 봉지에든 사탕, 포장된 초콜릿바, 빨대를 꽂아 먹을 수 있는 음료, 전자레인지용 봉지에 담긴 음식, 튜브 형태로 쉽게 짜 먹을 수 있는 요거트나과일 퓌레 같은 것을 내놓았다. 대부분 별 고민 없이 즉석에서 구입할 수 있는 식품이다.
여기에서 식품 기업들은 한 가지 작은 문제에 봉착했다. 그들은 연구를 통해 인간이 한 가지 음식을 계속 먹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뇌가 다른 음식을 찾도록 명령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은 맛이든 촉감이든 색이든 한 가지 감각 요소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싫증을 느낀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포만감을 느낀 우리조상들이 다른 음식을 찾아다니면서 필요한 다른 영양분을 섭취했다고 볼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아르디가 나뭇잎외에 다양한 음식을 먹으면서 더 튼튼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가지에 쉽게 질리는 인간의 특성은 자연선택을 통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물학적 특성은 식품 제조 기업들에게 또 하나의기회가 되었다. 식품 기업들은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여 포만감을 느껴 그만 먹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또다시 먹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답을 찾아냈다. 제품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조금만 다르게 해도, 심지어 달라 보이게만 해도 더 오랫동안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이 전략을 다양성(Variety 이라고 불렀다. - P197

사람들이 다양성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식품 기업들은 음식을 달게 만들었을 때처럼 단순히 스낵류를 다양화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마트에서 파는 거의 모든 식품에 다양성을 입히기 시작했다. 1980년에 대형 마트에는 약 6000개의 제품이 있었는데 1990년에는 1만 2000개로 증가했고 현재는 평균 3만 3000개에 달하는 제품이 있다. 이 중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개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기존 제품에 새로운 색을 입히거나 포장을 달리하거나 맛을 추가하는 편이 기업에게는 더 쉽고 안전했다. - P199

섭식 장애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이런 사실이 사람들의 행동에 미친 영향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연구를 통해 다양성이 자제력을 잃게 하는 강력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식품이 다양할수록 더 많이 먹는다는 사실, 인간이 다양성에 대단히 민감하고 그것이 대개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가 많습니다." 드렉셀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마이클 로가 내게 말했다. "한 연구자는 사람들에게 열 가지 색상의 엠앤엠 초콜릿을 주면 여섯 가지 색상을 줄 때보다 상당히 더많이 먹는다는 사실을 밝혀냈어요. 심지어 맛이 다 똑같은데도 말이죠. 또 어떤 연구는 사람들에게 스파게티 한 접시를 주면 일정량을먹고 그만 먹었는데 양은 더 많지만 이후 모양이 다른 토르텔리니 한 접시를 주면 그냥 다른 파스타일 뿐인데도 또 먹는다는 사실을밝혀냈습니다. 슈퍼마켓만 보더라도 식품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집에서든 식당에서든 음식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질릴 때까지 더 많은 양을 먹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취약성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측면은 또 있다. 다양성을 좋아하는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판매량을 늘리려는 식품기업들은 실제로 제품을 바꿀 필요도 없다. 연구에 따르면 음식을 먹는 동안 TV를 보거나 핸드폰을 사용하는 등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리면 음식에 집중할 때보다 더 많이 먹는다고 한다. 음식 대신 전자기기처럼 눈을 뗄 수 없는 것에 집중하고 있으면 정신이 팔린 사이에 뇌가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그러다 다시 음식에 집중하면 마치 음식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지고 새롭게 보인다. 그 결과 우리는 과식을 자제할 수 없게 된다. - P203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대체로 곡식, 채소, 고기와 같은 자연식품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편의성과 군것질에열광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패턴이 바뀌었고, 그 결과 오늘날에는 식품 제조 기업들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를 완전히 지배하게되었다. 2015년에 이런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최초의 설문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그 수치는 실로 놀라웠다. 열량으로 따졌을 때오늘날 우리가 구매하는 식료품의 4분의 3이 가공식품이며 심지어대부분이 초가공식품으로 분류된다. 28 이런 식품은 식물이나 동물에서 얻은 원재료를 더 이상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형시킨 성분을 혼합하고 조제하여 만든 것이다. 또 편의성이 아주 높아서 대부분 즉석에서 섭취할 수 있거나(68퍼센트) 데우기만 하면 되고(15퍼센트) 소금, 설탕, 지방도 우리가 직접 요리할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이 들어간다. - P207

FDA가 영양 성분 표기를 실제로 의무화한 것은 그로부터 20년후였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1990년대에 들어설 무렵식품 기업들은 이미 자발적으로 대부분의 포장식품에 제품의 영양성분 정보를 자세히 표기했기 때문이다. 1990년에 대형 스낵 기업인 프리토레이는 FDA에 전달하는 의견서에 식품 업계가 해당 정책을 크게 환영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사는 언제나 소비자의 요구와 우려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으며, 영양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 및 요구와 관련하여 식품에 정확하고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라벨을 부착하는 일에 직접적인 관심과 책임을 느낀다. 우리는 미국의 일반 대중에게 영양 성분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는이 정책을 지지한다."
그들은 업계의 기밀을 밝히는 일을 왜 이렇게 즐거워했을까? 먼저 가공식품 업계가 연방 정부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 냈다는 점을들 수 있다. 새로운 라벨 정책에 협조하는 대가로 FDA는 제품 포장 전면에 모조 식품임을 표기해야 하는 규정을 폐지하는 데 동의했다. 기업들로서는 그동안 판매에 엄청난 타격을 입혀 온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FDA가 이 규정을 둔 이유는 소비자들이 가짜 식품에 속아 돈을 헛되이 소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포화지방함량을 줄이기 위해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 유제품이 이 규정으로 타격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소비자에 대한 기만행위를 우려하여 시•행한 정책이 가공식품 전반에 적용되면 그 영향이 어디까지 미칠지누가 알겠는가?
원료를 열거하는 영양 성분 표기의 특성으로 인해 식품 업계는또 다른 유예를 받았다. 표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향을 내는 데 사용한 화합물(이를테면 펌킨 스파이스에 쓴 80가지성분)과 음식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주로 보조물로 쓰였으나 최종 제품에는 전혀 보이지 않거나 아주 극소량만 남은 다양한 물질은 영양성분 표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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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1월 1일 금요일이미 그것은 연례행사였다. 남자가 그 꽃을 받은 날은 자신의 여든두번째 생일이었다. 그는 소포를 풀고 선물 포장지를 뜯었다. 그러고는 수화기를 집어들어 번호를 눌렀다. 지금은 은퇴해 실리안호수 근처 달라르나에 사는 전직 형사의 전화번호였다. 두 남자는 나이뿐 아니라 생일까지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형사는 우체부가 다녀가는 오전 11시 이후면 전화가 걸려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기다렸다. 그런데 올해에는 10시 반에 전화벨이 울렸다. 형사는 수화기를 들었다. 두 사람 모두안부는 생략했다.
"도착했소."
"올해는 무슨 꽃이오?"
"전혀 모르겠소.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소. 흰 꽃이오."
"물론 편지는 없고?"
"없소. 그저 꽃뿐이오. 액자는 작년 것과
같소. 집에서도 조립할 수 있는 싸구려 액자."
"우체국 소인은?"
"스톡홀름."
"글씨체는?"
"늘 그렇듯 대문자로 쓰여 있소. 반듯하면서도 정성들인 필체요."
이윽고 화제가 떨어진 두 사람은 침묵에 잠겼다. 그렇게 일 분 정도 수화기 양쪽에 정적이 감돌았다. 퇴직 형사는 앉아 있던 주방의자 뒤로 몸을 젖히고 파이프 담배를 뻐끔거렸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번뜩이는 질문을 던져 이 일에 새로운 빛을 비춰줄 민완 형사가 더이상 아니었다. 그런 건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옛추억일 뿐이었다. 나이든 두 사내의 대화 역시 이제는 공허한 의식에 불과했다. 두 사람 말고는 이 세상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수수께끼를 두고 벌이는 의식.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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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은 그리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지체 없이 차에 올라시동을 걸었다. 아이만이라도 전염병과 가난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진 곳에 살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브로커를 찾게 했을 테지만. 도대체 이렇게 한두 명씩 도시 바깥으로 내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한 이렇게 탈출한 한 명의 아이가 나중에 자라 위인이 될지 강도가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는가? 사람들은 왜참담함으로 치자면 여기나 거기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괜찮은 것처럼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를그치지 않는가? 얼은 그것에 대해 지금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당신도 움직이기를.
얼이 만약 움직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 걸음을 넘지 않을 것이었다. 얼은 그 한 걸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되도록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설령 움직이더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범위 내에서 한 걸음 미만의 보폭을 유지할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아펙이 말하고 미그라가 바라던 완전한 이동은 이루어지지 않을 테며, 얼은 언제까지나 요동치기는커녕 미동조차 없는 경계선 안쪽의 존재로 남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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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펜하이머는 나중에 라이더가 자신에게 "윤리학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라이더가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자들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말했다."라고 생각했으며, "구원과 파멸 사이에서 인간의 행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인생에대한 비극적인 감성"을 가진 흔치 않은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겼다. "라이더는 누구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오펜하이머는 라이더의 전문 분야였던 고대 언어에도 관심을 갖기시작했다. 곧 라이더는 매주 목요일 저녁 오펜하이머에게 산스크리트어 개인 교습을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프랭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즘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어. 게다가 가르침을받는다는 달콤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라고 썼다.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오펜하이머가 산스크리트어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에게 라이더를 소개시켜 준 체르니스는 이것이 아귀가 완벽하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체르니스는 "그는 복잡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대부분의 것들이 그에게는 너무 쉬웠기때문에, 그의 관심을 끌려면 반드시 어려운 것이어야만 했지요."  더구나 오펜하이머는 "신비주의적인 것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기도했다.
일단 언어를 배우고 나자, 오펜하이머는 곧 바가바드기타(Bhagavad-Gita)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프랭크에게 "그것은 매우 쉽고 상당히 훌륭해."라고 썼다. 그는 친구들에게 ‘신의 노래(The Lord‘s Song)‘라는 제목의 이 고대 힌두 경전이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송가"라고 말했다. 라이더는 그에게 분홍색 표지의 『바가바드기타』를 선물로 주었고, 오펜하이머는 이 책을 항상 손이 닿는 가까운 책장에 꽂아 두었다. 오피도 곧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 책을 선물로 주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산스크리트어 공부에 심취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1933년 가을 또다시 새로운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사 주었을 때 그것을 가루다 (Garuda)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가루다는 힌두 신화에서 비슈누(Vishnu)를 태우고 날아다니는 거대한 새의 형상을 한 신의 이름이다. 산스크리트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핵심인 바가바드기타는 사람의 모습을 한 신 크리슈나 (Krishna)와 인간 영웅 아르주나(Arjuna)왕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군대를 이끌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진군하려던 아르주나는 친구들과 친척들에 대항한 전쟁을 치르기를 거부한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전사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가서 싸우고 죽여야 한다고 말해 준다. - P167

필립스는 "우리는 공공연하게 정치성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48 오펜하이머는 언젠가 네델스키에게 "나는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딱 세 사람 알고 있어. 말해 봐, 정치가 진실,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하지만 1933년 1월이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오펜하이머는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해 4월이 되자 유태계 독일인 교수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독일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34년 봄, 오펜하이머는 독일인 물리학자들이 나치스 독일에서 이민해 나오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한 광고 전단지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이후 2년동안 연봉의 3퍼센트(1년에 약 100달러 정도)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은 오펜하이머의 괴팅겐 시절 교수였던 프랑크 박사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2개의 철십자 훈장을 받은 프랑크는 히틀러가 처음 권력을 잡았을 때 교수직을유지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몇 안 되는 유태인 물리학자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1년 후, 그가 다른 유태인 교수의 해고에 항의하자 그 역시 대학에서 축출되어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935년에 그는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막스 보른 역시1933년에 괴팅겐으로부터 도망쳐 영국의 대학에서 자리를 잡았다."
독일로부터 날아드는 소식들은 암울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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