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앨러모스는 군사 기지였지만, 산장 같은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하기 직전에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년)의 「마법의 산(The Magic Mountain)』을 읽은 로버트 윌슨은 가끔자신이 그 책에 나오는 마법의 세계에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국인물리학자인 제임스 터크는 그 시기를 "황금기"라고 불렀다. "이곳 로스앨러모스에서 나는 아테네의, 플라톤의 이상적 공화국의 정신을 발견했다.""그곳은 "하늘 위의 섬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곳을 "샹그릴라(Shangri-La)"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스앨러모스의 주민들은 불과 몇 달 안에 공동체 의식을 키워 나갔다. 그곳에 정착한 부인들에 따르면 그렇게 되기까지 오펜하이머의 공이 컸다. 그는 참여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처음부터 마을 평심의회를 임명했다. 나중에 그것은 선출 기구가 되었고, 비록 공식 권력을 가지고있지는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오펜하이머가 공동체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서 PX 음식의 질, 주거 환경, 주차 위반딱지 등과 같은 일상생활의 소소한 불만들을 제기할 수 있었다. 1943년말이 되자 로스앨러모스에는 뉴스, 지역 사회 공지사항, 음악을 방송하•는 저출력 라디오 기지국까지 생겨났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오펜하이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고전음악 레코드들에서 음악을 선곡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소소한 일들을 통해,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모두의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개인 생활의 부재, 검소한 생활, 그리고 반복적인 물, 우유, 심지어 전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만의 유쾌한 열정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나갔다. 하루는오펜하이머가 버니스 브로드에게 "당신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미쳤어. 그러니까 잘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브로드 부부는 같은 아파트에서 시릴 스미스와 앨리스 킴벌 스미스 부부, 에드워드 텔러와 미시 텔러 부부 위층에 살고 있었다.). 동네 극단이 조지프 케설링(Joseph Kesselring)의 희극 「비소와 낡은 레이스(Arsenic and Old Lace)」 공연을 시작했을 때, 관객들은 밀가루로 분칠을 하고 시체처럼 뻣뻣한 채로 다른 희생자들과 같이 무대 바닥에서 뒹구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에 놀라고 즐거워했다. 1943년 가을 한 그룹 리더의 아내가 알 수 없는 마비 증세로 사망하자, 오펜하이머는 소아마비에 감염될 우려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슬픔에 빠진 남편을 찾아갔다. - P394
오펜하이머는 일생 동안 자신의정신적 스트레스를 관리하면서 보냈다. 그럼에도 타이크의 출생과 키티가 떠난 사건은 그를 특히 상처받기 쉽게 만들었다. 셰르는 "아주 이상했어요."라고 기억했다. "그는 우리 집에 와서 나하고 수다를 떨었지만, 아기를 보게 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보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하루는 내가 참다못해 ‘딸을 보고 싶지 않아요? 아주 예쁘게 자라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네, 네‘ 정도로 가볍게 대답할 뿐이었어요." 두 달이 지났고, 오펜하이머는 셰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녀에게 "당•신은 타이크를 매우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셰르는 단순히 "나는 아이를 좋아해요. 그리고 아이를 보살피면 누구의 아이건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된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셰르는 오펜하이머가 "당신은 그녀를 입양할 생각이 있습니까?"라고물었을 때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예요? 훌륭한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요."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녀가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셰르는 그런 감정은 아이와 떨어져 살게 된 부모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라며 그를 안심시키고는, 시간이 지나면 아이에게 애착을 갖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아뇨, 나는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셰르가 이 문제에 대해 키티와 의논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아뇨, 아뇨, 아뇨. 나는 아이에게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먼저 물었던 겁니다. 당신이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을 주었잖습니까."라고 말했다. 셰르는 이 대화를 창피하고 심란하게 생각했다. 그의 제안이 비록 기이했지만, 진심 어린 감정을 담고 있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커다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나한테 그런 말을 하기까지는......이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담아서, 동시에 그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면서까지, 자신이 아이에게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을 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 P406
오펜하이머가 나중에 쓰기를, 그때까지 이일은 "으스스해 보였다." 보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작업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 때, 희망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히틀러를 무릎풀리기 위해 과학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행복한 결말이 오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객관적이고 협력적인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도 그렇게믿고 싶었다." 바이스코프는 보어가 자신에게 "폭탄은 무서운 물건일지 모르나, 또한 ‘위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18 그 당시 보어는 자신의 우려하는 바를 알리는 글을 오펜하이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1944년 4월 2일 무렵에 그는 만족할 만한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보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쾌거를 손에 넣은 것이 확실하다."라고 주장했다." 가까운 미래에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나쁜 소식 역시 명징하고 예언적이었다. "우리가 빠른 시일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다." - P419
오펜하이머는 항상 우라늄 ‘총구식 설계(gun-design)‘ 프로그램에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핵분열성 물질 "한덩어리(slug)"를 또 다른 핵분열성 물질 목표물로 발사시켜 "임계성"을 만들어 핵폭발로 이어지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944년 봄이 되자, 그는 플루토늄 폭탄의 디자인을 통째로 바꾸어야만 하는 위기를 맞았다. 오펜하이머는 세스 네더마이어에게 내파 설계(implosion design) 폭탄(핵분열성 물질을 듬성듬성하게 배열해 순간적인 압력을 가하면 임계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만들기 위한 폭발 실험을 진행하라고 지시했지만, 그는 단순한 총구식 설계로 플루토늄 폭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1944년 7월까지 만들어진 적은 분량의 플루토늄으로 실험을 하자, 총구식 디자인으로는 플루토늄 폭탄을 효율적으로 폭발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그와 같은 시도는 플루토늄이 "총" 안에서 미리 폭발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은 플루토늄 물질을 더 농축시켜 보다 안정적인 원소로 만드는 것이었다. 맨리가 설명하기를 "우리는 나쁜 플루토늄 동위 원소를 좋은 놈들로부터 분리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우라늄 동위 원소를 분리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공장들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지요. 결국 누군가가 플루토늄으로 폭발 가능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낼 때까지는,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워싱턴 주) 핸포드에 투자한 막대한 시간과 노력은 낭비였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4년 7월 17일,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코넌트, 페르미 등과 함께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코넌트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섞어서 저효율 내파식 폭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런 무기는 수백 톤의 TNT에 불과한 폭발력을 갖게 될 것이었다. 코넌트는 저효율폭탄으로 성공적인 시험을 거치면, 더 큰 무기로 나아갈 자신감을 갖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일정을 지나치게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코넌트의 계획을 거부했다. 그는 서버가 처음 내파식이라는 아이디어를 냈을 때 회의적이었지만, 이제 내파식 디자인의 플루토늄 폭탄에 모든 것을 걸자고 모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용감하고 훌륭한 도박이었다. 1943년봄에 네더마이어가 이 개념으로 실험해 보겠다고 나선 이래 그동안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1943년 가을,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의 수학자인 폰 노이만을 로스앨러모스로 데려왔고, 노이만은 계산해 본 결과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내파가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오펜하이머는 이것이 해 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 P427
폭탄 만들기는 이론 물리학보다는 공학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버클리에서 학생들이 새로운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자극했던 것만큼이나, 그의 과학자들이 기술적이고 공학적인 장애들을 극복하도록 이끄는 일에 매우 능숙했다. 베테는 나중에 "로스앨러모스는 그가 없이도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힘은 더 들고, 정열은훨씬 적고, 더 느리게 진척되었겠지요. 그것은 연구원들 모두에게 잊을수 없는 기억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큰 성과를 올린 다른 연구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들은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든지, 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을 떠올린다든지,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라는 느낌을 주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스앨러모스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펜하이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지도자였습니다." - P431
다이슨은 "유일하게 잠시 멈춰 섰던 사람은 리버풀 출신의 조지프 로트블랙이었다……."라고 썼다."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인 로트블랫은 전쟁이 터졌을 때 영국에 있었다. 그는 제임스 채드윅의 초청으로 영국 폭탄프로젝트에 참가했고 1944년 초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했다. 1944년 3월 어느 저녁, 로트블랫은 "불편한 충격"을 받았다. 채드윅의 집에 함께 저녁초대를 받은 그로브스 장군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농담을 주고받다가 "당신은 물론 이 프로젝트의 주된 목적은 러시아 인들을 굴복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겠지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로트블랫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탈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소련의 독재자는 그가 사랑하는 폴란드를 침공했던 터였다. 하지만 매일 수천 명의 러시아인들이 동부 전선에서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로트블랫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나중에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작업이 나치스의 승리를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그런데 이제 나는 우리가 준비하는 무기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사용할 의도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1944년 말,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고 6개월 후, 유럽에서의 전쟁은 곧 끝나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로트블랫은 독일인들을 굴복시키는 데 필요치 않은 무기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는 것에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위한 환송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1944년 12월 8일 로스앨러모스를 떠났다. - P436
1944년 9월 무렵 테드 홀은 내파식 폭탄에 필요한 측정 시험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홀이 내파 시험에 관한 한 메사에서 가장뛰어난 젊은 테크니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33 대단히 똑똑한 젊은이였던 홀은 그해 가을 지적인 혼란에 빠졌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에 소련을 선망하는 인물이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자신의 일과 현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내내 그는 20대 후반이나 30대초반의 ‘선배‘ 과학자들이 전후 군비 경쟁에 대해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는 풀러 로지에서 닐스 보어와 함께 앉아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는 보어가 "열린 세계"을 갈망한다는 이야기를듣게 되었다. 홀은 전후 미국의 핵무기 독점은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질수 있다는 보어의 결론을 듣고서는 1944년 10월부터 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내가 생각했을 때 미국의 독점은 위험하고 방지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진 유일한 과학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홀은 로스앨러모스에서 14일간 휴가를 얻어 뉴욕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는 곧장 소련 무역 사무소로 걸어 들어가 소련관료에게 친필로 작성한 로스앨러모스에 대한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보고서에는 연구소의 목적과 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고위 과학자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홀은 소련에 내파식 폭탄의 디자인에 관한 중요 정보를 포함한 추가 정보를 제공했다. 홀은 ‘자생적‘ 스파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러시아 인들이 원자 폭탄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으로부터 아무것도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핵을 독점하게 된다면 이를 실현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 P438
놀랍게도 오펜하이머는 그날 저녁에 참석해 토론을 경청했다. 윌슨은 나중에 바이스코프 같은 고참 물리학자를 포함해 20명 정도가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회의는 사이클로트론이 있는 건물에서 열렸다. 윌슨은 "나는 건물이 매우 추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전쟁이(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왜 우리가 계속해서 폭탄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꽤 격렬한 토론을 했습니다." 원자 폭탄에 대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내파 기술에 관한 일을 하던 젊은 물리학자 루이스 로젠(Louis Rosen)은 낡은 극장에서 열린 콜로키움에, 방이 꽉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던 것을 기억했다. 로젠에 따르면 오펜하이머가 연사였고 주제는 ‘이 나라가 핵무기를 살아 있는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였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에게 장치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여느 시민들보다 더 큰 목소리를 가질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로젠은 "그는 매우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화학자 조지프 허시펠더(Joseph Hirschfelder)는 1945년초 어느 추운 일요일 저녁에 폭풍우가 치는 와중에 로스앨러모스의 작은 목조 교회당에서 열린 비슷한 토론회를 회고했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그 특유의 유창함으로 우리 모두는 끝없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지만 폭탄은 또한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보어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희망은 당시 모인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 P440
이제 이 장치가 독일인에게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와 다른 참석자들은 의구심을 가졌지만 명쾌한 해답은 없었다. 윌슨은 "나는 우리가 나치스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 특별히 일본인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일본인들 역시 폭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일어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자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윌슨은 오펜하이머가 토론을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근본적으로 닐스 보어의 "열림 (openness)"이라는 비전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이 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무기에 대해 모른 채 이 전쟁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최악의 경우는 장치가 군사 기밀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전쟁은거의 확실히 핵전쟁이 될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이 장치가 시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새로 만들어진 세계 연합이 1945년 4월 첫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세계 국가의대표들이 전후 세계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인류가 대량 살상 무기를 발명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나는 그것이 매우 좋은 주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동안 보어와 오펜하이머는 이 장치가 어떻게 세계를 바꾸어 놓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학자들은 이 장치가 국가 주권의 개념을 바꾸어 놓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신뢰했고 그가 바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연합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윌슨이 말했듯이 "주권이 없는 지역이 존재할 것이고, 주권은 국제 연합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방식의 전쟁이 종식될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그 약속이다. 그것이 내가 이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윌슨이 그 순간을 회고했듯이, "내가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은 천사처럼 진실하고 솔직해서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믿었습니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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