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앨러모스는 군사 기지였지만, 산장 같은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하기 직전에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년)의 「마법의 산(The Magic Mountain)』을 읽은 로버트 윌슨은 가끔자신이 그 책에 나오는 마법의 세계에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영국인물리학자인 제임스 터크는 그 시기를 "황금기"라고 불렀다. "이곳 로스앨러모스에서 나는 아테네의, 플라톤의 이상적 공화국의 정신을 발견했다.""그곳은 "하늘 위의 섬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곳을 "샹그릴라(Shangri-La)"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스앨러모스의 주민들은 불과 몇 달 안에 공동체 의식을 키워 나갔다. 그곳에 정착한 부인들에 따르면 그렇게 되기까지 오펜하이머의 공이 컸다. 그는 참여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처음부터 마을 평심의회를 임명했다. 나중에 그것은 선출 기구가 되었고, 비록 공식 권력을 가지고있지는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오펜하이머가 공동체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서 PX 음식의 질, 주거 환경, 주차 위반딱지 등과 같은 일상생활의 소소한 불만들을 제기할 수 있었다. 1943년말이 되자 로스앨러모스에는 뉴스, 지역 사회 공지사항, 음악을 방송하•는 저출력 라디오 기지국까지 생겨났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오펜하이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고전음악 레코드들에서 음악을 선곡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소소한 일들을 통해,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모두의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개인 생활의 부재, 검소한 생활, 그리고 반복적인 물, 우유, 심지어 전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만의 유쾌한 열정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나갔다. 하루는오펜하이머가 버니스 브로드에게 "당신 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미쳤어. 그러니까 잘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브로드 부부는 같은 아파트에서 시릴 스미스와 앨리스 킴벌 스미스 부부, 에드워드 텔러와 미시 텔러 부부 위층에 살고 있었다.). 동네 극단이 조지프 케설링(Joseph Kesselring)의 희극 「비소와 낡은 레이스(Arsenic and Old Lace)」 공연을 시작했을 때, 관객들은 밀가루로 분칠을 하고 시체처럼 뻣뻣한 채로 다른 희생자들과 같이 무대 바닥에서 뒹구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에 놀라고 즐거워했다. 1943년 가을 한 그룹 리더의 아내가 알 수 없는 마비 증세로 사망하자, 오펜하이머는 소아마비에 감염될 우려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슬픔에 빠진 남편을 찾아갔다. - P394

 오펜하이머는 일생 동안 자신의정신적 스트레스를 관리하면서 보냈다. 그럼에도 타이크의 출생과 키티가 떠난 사건은 그를 특히 상처받기 쉽게 만들었다.
셰르는 "아주 이상했어요."라고 기억했다. "그는 우리 집에 와서 나하고 수다를 떨었지만, 아기를 보게 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보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하루는 내가 참다못해 ‘딸을 보고 싶지 않아요? 아주 예쁘게 자라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네, 네‘ 정도로 가볍게 대답할 뿐이었어요."
두 달이 지났고, 오펜하이머는 셰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녀에게 "당•신은 타이크를 매우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셰르는 단순히 "나는 아이를 좋아해요. 그리고 아이를 보살피면 누구의 아이건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된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셰르는 오펜하이머가 "당신은 그녀를 입양할 생각이 있습니까?"라고물었을 때 깜짝 놀랐다.
"무슨 소리예요? 훌륭한 부모가 멀쩡히 있는데요."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녀가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
셰르는 그런 감정은 아이와 떨어져 살게 된 부모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라며 그를 안심시키고는, 시간이 지나면 아이에게 애착을 갖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아뇨, 나는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셰르가 이 문제에 대해 키티와 의논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아뇨, 아뇨, 아뇨. 나는 아이에게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신에게 먼저 물었던 겁니다. 당신이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을 주었잖습니까."라고 말했다.
셰르는 이 대화를 창피하고 심란하게 생각했다. 그의 제안이 비록 기이했지만, 진심 어린 감정을 담고 있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는 커다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나한테 그런 말을 하기까지는......이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담아서, 동시에 그 감정에 죄책감을 느끼면서까지, 자신이 아이에게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을 주려고 했던 것이지요."
- P406

오펜하이머가 나중에 쓰기를, 그때까지 이일은 "으스스해 보였다." 보어는 "많은 사람들이 이 작업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을 때, 희망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히틀러를 무릎풀리기 위해 과학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행복한 결말이 오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객관적이고 협력적인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도 그렇게믿고 싶었다."
바이스코프는 보어가 자신에게 "폭탄은 무서운 물건일지 모르나, 또한 ‘위대한 희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18 그 당시 보어는 자신의 우려하는 바를 알리는 글을 오펜하이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1944년 4월 2일 무렵에 그는 만족할 만한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다. 보어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쾌거를 손에 넣은 것이 확실하다."라고 주장했다." 가까운 미래에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나쁜 소식 역시 명징하고 예언적이었다. "우리가 빠른 시일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다." - P419

오펜하이머는 항상 우라늄 ‘총구식 설계(gun-design)‘ 프로그램에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핵분열성 물질 "한덩어리(slug)"를 또 다른 핵분열성 물질 목표물로 발사시켜 "임계성"을 만들어 핵폭발로 이어지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944년 봄이 되자, 그는 플루토늄 폭탄의 디자인을 통째로 바꾸어야만 하는 위기를 맞았다. 오펜하이머는 세스 네더마이어에게 내파 설계(implosion design) 폭탄(핵분열성 물질을 듬성듬성하게 배열해 순간적인 압력을 가하면 임계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만들기 위한 폭발 실험을 진행하라고 지시했지만, 그는 단순한 총구식 설계로 플루토늄 폭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1944년 7월까지 만들어진 적은 분량의 플루토늄으로 실험을 하자, 총구식 디자인으로는 플루토늄 폭탄을 효율적으로 폭발에 이르게 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그와 같은 시도는 플루토늄이 "총" 안에서 미리 폭발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은 플루토늄 물질을 더 농축시켜 보다 안정적인 원소로 만드는 것이었다. 맨리가 설명하기를 "우리는 나쁜 플루토늄 동위 원소를 좋은 놈들로부터 분리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우라늄 동위 원소를 분리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공장들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지요. 결국 누군가가 플루토늄으로 폭발 가능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낼 때까지는,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워싱턴 주) 핸포드에 투자한 막대한 시간과 노력은 낭비였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4년 7월 17일,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 코넌트, 페르미 등과 함께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코넌트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섞어서 저효율 내파식 폭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런 무기는 수백 톤의 TNT에 불과한 폭발력을 갖게 될 것이었다. 코넌트는 저효율폭탄으로 성공적인 시험을 거치면, 더 큰 무기로 나아갈 자신감을 갖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일정을 지나치게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코넌트의 계획을 거부했다. 그는 서버가 처음 내파식이라는 아이디어를 냈을 때 회의적이었지만, 이제 내파식 디자인의 플루토늄 폭탄에 모든 것을 걸자고 모두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용감하고 훌륭한 도박이었다. 1943년봄에 네더마이어가 이 개념으로 실험해 보겠다고 나선 이래 그동안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1943년 가을,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의 수학자인 폰 노이만을 로스앨러모스로 데려왔고, 노이만은 계산해 본 결과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내파가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오펜하이머는 이것이 해 볼 만한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 P427

폭탄 만들기는 이론 물리학보다는 공학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버클리에서 학생들이 새로운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자극했던 것만큼이나, 그의 과학자들이 기술적이고 공학적인 장애들을 극복하도록 이끄는 일에 매우 능숙했다. 베테는 나중에 "로스앨러모스는 그가 없이도 성공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힘은 더 들고, 정열은훨씬 적고, 더 느리게 진척되었겠지요. 그것은 연구원들 모두에게 잊을수 없는 기억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큰 성과를 올린 다른 연구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들은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든지, 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을 떠올린다든지,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라는 느낌을 주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스앨러모스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펜하이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지도자였습니다." - P431

다이슨은 "유일하게 잠시 멈춰 섰던 사람은 리버풀 출신의 조지프 로트블랙이었다……."라고 썼다."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인 로트블랫은 전쟁이 터졌을 때 영국에 있었다. 그는 제임스 채드윅의 초청으로 영국 폭탄프로젝트에 참가했고 1944년 초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했다. 1944년 3월 어느 저녁, 로트블랫은 "불편한 충격"을 받았다. 채드윅의 집에 함께 저녁초대를 받은 그로브스 장군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농담을 주고받다가 "당신은 물론 이 프로젝트의 주된 목적은 러시아 인들을 굴복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겠지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로트블랫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스탈린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소련의 독재자는 그가 사랑하는 폴란드를 침공했던 터였다. 하지만 매일 수천 명의 러시아인들이 동부 전선에서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로트블랫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나중에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작업이 나치스의 승리를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썼다.  "그런데 이제 나는 우리가 준비하는 무기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에게사용할 의도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1944년 말,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고 6개월 후, 유럽에서의 전쟁은 곧 끝나리라는 것은 명확했다. 로트블랫은 독일인들을 굴복시키는 데 필요치 않은 무기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는 것에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위한 환송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1944년 12월 8일 로스앨러모스를 떠났다. - P436

1944년 9월 무렵 테드 홀은 내파식 폭탄에 필요한 측정 시험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홀이 내파 시험에 관한 한 메사에서 가장뛰어난 젊은 테크니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33 대단히 똑똑한 젊은이였던 홀은 그해 가을 지적인 혼란에 빠졌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에 소련을 선망하는 인물이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자신의 일과 현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내내 그는 20대 후반이나 30대초반의 ‘선배‘ 과학자들이 전후 군비 경쟁에 대해 걱정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는 풀러 로지에서 닐스 보어와 함께 앉아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는 보어가 "열린 세계"을 갈망한다는 이야기를듣게 되었다. 홀은 전후 미국의 핵무기 독점은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질수 있다는 보어의 결론을 듣고서는 1944년 10월부터 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내가 생각했을 때 미국의 독점은 위험하고 방지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진 유일한 과학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홀은 로스앨러모스에서 14일간 휴가를 얻어 뉴욕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고는 곧장 소련 무역 사무소로 걸어 들어가 소련관료에게 친필로 작성한 로스앨러모스에 대한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보고서에는 연구소의 목적과 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고위 과학자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홀은 소련에 내파식 폭탄의 디자인에 관한 중요 정보를 포함한 추가 정보를 제공했다. 홀은 ‘자생적‘ 스파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러시아 인들이 원자 폭탄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련으로부터 아무것도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핵전쟁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핵을 독점하게 된다면 이를 실현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 P438

놀랍게도 오펜하이머는 그날 저녁에 참석해 토론을 경청했다. 윌슨은 나중에 바이스코프 같은 고참 물리학자를 포함해 20명 정도가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회의는 사이클로트론이 있는 건물에서 열렸다. 윌슨은 "나는 건물이 매우 추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전쟁이(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왜 우리가 계속해서 폭탄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꽤 격렬한 토론을 했습니다."
원자 폭탄에 대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내파 기술에 관한 일을 하던 젊은 물리학자 루이스 로젠(Louis Rosen)은 낡은 극장에서 열린 콜로키움에, 방이 꽉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던 것을 기억했다. 로젠에 따르면 오펜하이머가 연사였고 주제는 ‘이 나라가 핵무기를 살아 있는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였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에게 장치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여느 시민들보다 더 큰 목소리를 가질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로젠은 "그는 매우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화학자 조지프 허시펠더(Joseph Hirschfelder)는 1945년초 어느 추운 일요일 저녁에 폭풍우가 치는 와중에 로스앨러모스의 작은 목조 교회당에서 열린 비슷한 토론회를 회고했다. 이때 오펜하이머는 그 특유의 유창함으로 우리 모두는 끝없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지만 폭탄은 또한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보어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희망은 당시 모인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 P440

이제 이 장치가 독일인에게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와 다른 참석자들은 의구심을 가졌지만 명쾌한 해답은 없었다. 윌슨은 "나는 우리가 나치스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지, 특별히 일본인들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일본인들 역시 폭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일어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자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윌슨은 오펜하이머가 토론을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근본적으로 닐스 보어의 "열림 (openness)"이라는 비전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이 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무기에 대해 모른 채 이 전쟁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최악의 경우는 장치가 군사 기밀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전쟁은거의 확실히 핵전쟁이 될 것이었다. 그는 그들이 이 장치가 시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새로 만들어진 세계 연합이 1945년 4월 첫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세계 국가의대표들이 전후 세계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할 때 그들이 인류가 대량 살상 무기를 발명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윌슨은 "나는 그것이 매우 좋은 주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동안 보어와 오펜하이머는 이 장치가 어떻게 세계를 바꾸어 놓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학자들은 이 장치가 국가 주권의 개념을 바꾸어 놓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신뢰했고 그가 바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연합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윌슨이 말했듯이 "주권이 없는 지역이 존재할 것이고, 주권은 국제 연합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방식의 전쟁이 종식될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그 약속이다. 그것이 내가 이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무시무시한 비밀을 세계가 알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했다. 이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 보어의 논리는 오펜하이머의 동료과학자들에게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서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윌슨이 그 순간을 회고했듯이, "내가 당시 오펜하이머에게 느꼈던 것은, 이 사람은 천사처럼 진실하고 솔직해서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믿었습니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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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가족이 목숨을 걸고 테무진을 도와주고 또 귀중한 자산까지내준 것을 보면 그에게 특별한 매력이나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테무진도 물론 이 가족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과 가까운 친족 관계에 있는 타이치우드는 한때 그의 가족을 내팽개쳐 죽음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이제는 그를 죽이려고 안달이었다. 그러나 그와 아무런 친족관계도 아닌 이 가족은 목숨을 걸고 그를 도와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테무진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사람들은 그의 씨족이 아니라 해도 가족과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훗날 테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ㅁ었다. - P72

친족 위계에서 각각의 가문은 뼈라고 불렀다. 혼인이 허용되지 않는가장 가까운 관계는 흰 삐였다. 혼인이 허용되는 먼 친족 관계는 검은뼈였다. 사실은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가문이나 중요한 인물의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주장의 힘은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는 힘에 비례했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먼 친척이었지만 뼈가 달랐다. 그들의 조상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한 여자에게서 만나지지만, 이 여자의 남편에서 갈라졌다. 자무카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초원의 유목민 후손이었다. 테무진은 그들의 구전 역사에서 ‘바보‘ 보돈차르라고 알려진 숲의 사냥꾼 후손이었다. 보돈차르는 남편을 죽인뒤 이 여자를 납치했다. 이에 따르면 자무카는 자신이 장남의 후손일 뿐아니라 초원에서 살던 남자의 후손이므로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할 수있었다. 초원 사회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유대를 강조할 때도 사용되었지만 적대감을 표현할 구실이 될 수도 있었다. 테무진과 자무카의 경우 그들의 친족 이야기는 양쪽으로 다 작용했다. 친족 관계는 실제로 관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사회적인 요구를 놓고 협상을 하거나 강요할 때 사용하는 공동의 방언 역할을 했다.
테무진이 자무카의 무리에 속해 있는 한, 자무카의 가문은 흰 뼈의지위였고 테무진은 먼 검은 뼈 친족일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이 흰 뼈의지위에 오르려면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중심에 놓는 무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몽골 비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테무진이 자무카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난 뒤 자무카는 테무진을 안다라기보다는 동생처럼 대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씨족이 공동의 조상의 장남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미 가족 관계를 통해 증명되었듯이 테무진은 열등한 지위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 이런 상황을 계속 받아들일 수는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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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년 초여름 밤 두 청년 사이에 벌어진 균열은 이후 20년 동안 몽골의 중요한 전사로 성장한 두 사람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했으며, 결국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테무진은 19세에 자무카와 갈라선 뒤, 스스로 전사들의 지도자가 되어 부하를 모으고 권력기반을다지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루기 힘든 몽골 부족을 통일하여 칸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궁극적 목표를 세웠을 것이다. 이런 목표를향해 나아갈 때 자무카는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며, 그들의 분쟁은 몽골족 전체를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게 된다. 이 두 경쟁자는 이후 25년 동안 서로 가축과 여자를 약탈하고, 상대를 습격하여 부하들을죽였다. 몽골족의 최고 통치자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 P86

1197년에 주르킨 원정에 나섰으며, 이제 자신이 전사와 지휘관으로서 높은 수준의 기술을 익혔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쉽게 그들을 물리쳤다. 이 시점에서 테무진은 통치 방식에 두 번째 첫 번째는 가족이아니라 충성스러운 동맹자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임명한 것이다—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게 되며, 이것은 그가 권좌에 오르는 과정에서 중요한특징이 된다.
초원의 기나긴 전쟁사에서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을 약탈하고, 일부 구성원을 포로로 잡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패배한 집단은 다시 모여 반격을 하거나, 흩어져서 다른 부족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테무진은 주르킨을 물리쳤을 때 공격과 반격의 악순환, 동맹을맺고 끊는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야망을 드러내며 완전히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부하들을 소집하여 쿠릴타이를 열고 주르킨의 귀족 지도자들을 공개 재판했다. 타타르 전쟁에서 함께 싸우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없을 때 야영지를 습격한 죄를 물은 것이다. 테무진은 그들이 유죄라고 판결하고 처형했다. 이것은 동맹자 사이의 의리가 귀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조치였을 뿐 아니라, 어떤 가문의 귀족에게도 특별 대접을 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경고였다. 이어 테무진은 주르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집단의 나머지 사람들을 자신의 씨족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주는 유례 없는 조처를 취했다. 양쪽 씨족 가운데 일부는 이것이 주르킨족을 노예로 삼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다. 사실 그것이 초원의 관습에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몽골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그들을 노예가 아니라 정상적인 부족 구성원으로받아들였다. 주르킨 야영지의 고아 소년을 데려와 후엘룬에게 주면서 그녀의 게르에서 노예가 아니라 아들로 기르라고 말한 것이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테무진은 이전에도 자신이 정복한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타타르에서 한 명씩을 골라 어머니의 양자로 들인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주르킨 아이를 양자로 삼게 함으로써 자신의동생 숫자를 하나 더 늘린 것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감상적인것이건 정치적인 것이건 테무진은 가공의 친족 관계를 이용하여 추종자들을 단결시킬 때 그런 행동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실제적인 이익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아이들 전체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과 똑같이 정복당한 사람들 전체를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에게도 미래의 정복에 참여하여번영을 함께 나눌 기회를 준 것이다. - P95

테무진은 타타르 원정에서 오랫동안 초원 생활을 지배해온 규칙을다시 완전히 바꾸게 된다. 이런 변화로 인해 그의 부하들 가운데 일부는그에게 적대하고 다수의 충성심은 더욱 강해졌다. 적대한 소수는 귀족가문이었고, 충성한 다수는 그가 개혁과 물자 분배를 통해 부를 안겨준하급 가문이었다. 테무진은 여러 차례 습격을 해보면서 패자들의 게르를 성급하게 약탈하는 것이 더 완전한 승리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격하는 쪽에서는 습격당한 진영의 전사들을 추적하는 대신 보통 그들이 달아나도록 내버려둔 채 바로 상대 진영을 약탈하는 일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 결과 패한 전사들 다수가 탈출하여 결국 반격을 하러돌아왔다. 그래서 타타르 정복에 나선 테무진은 타타르군에게 완전한승리를 거둔 다음에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하면 전보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약탈을 할 수 있었고, 또 모든 물자를 그가 있는 중앙에서 통제하면서 그가 보기에 적당한 방식으로 분배할 수 있었다. 테무진은 숲의 사냥꾼들이 집단 사냥이 끝난 뒤 사냥한 짐승을 분배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물자를 분배한 것이다.
또 한 가지 혁신은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기로 한 것이다. 타타르에게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뒤 어머니가 처했던 곤경을 기억하고 그렇게 한 것인지아니면 다른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조치는 큰 영향을 주었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보아준다고 믿었다. - P102

타타르 원정 뒤에 부하 몇 사람이 개별적 약탈을 금지하는 그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러자 테무진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엄하지만 적당한 벌을 내렸다. 명령을 어긴 자들의 소유를 박탈하고원정에서 약탈한 물건을 몰수한 것이다. 약탈한 모든 물자의 분배를 테무진이 통제하자 그 휘하의 귀족적인 가문들은 다시 한 번 전통적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부하들에게 독자적으로 물자를 나누어줄 권한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테무진의 급진적 개혁 때문에 귀족 다수가 분노했으며, 일부는 그를 버리고 자무카에게 합류했다. 이로써 지체높은 가문과 일반적인 유목민 사이의 구분은 더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의 부족 구성원들은 친족의 유대나 전통 대신 테무진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정책으로 테무진은 그의 통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하면서 동시에 부하들의 충성심을 높였다.
소수가 불만을 품기는 했지만 테무진의 새로운 정책은 즉시 효과를발휘했다. 약탈을 원정이 끝날 때까지 미루자 테무진 군대는 전보다 더많은 물자와 가축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부는 새로운 문제를•초래했다. 몽골족은 타타르를 이겼을 뿐 아니라 군대와 민간인 대부분을 포로로 잡았기 때문이다.
초원지대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친족의 망(網)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적이었으며, 입양이나 혼인이라는 유대를 통하여 가족으로편입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그런집단들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주르킨이나 타이치우드를 다루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타타르도 다루고 싶었다. 즉지도자들을 죽이고, 생존자와 물자와 가축은 모두 그의 부족으로 흡수해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수백 명 단위의 씨족을 상대로 할 때는효과를 보았지만, 타타르는 수천 명에 달하는 부족이었다. 이들을 흡수하는 대규모의 사회적 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하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했다. 그는 그런 지지를 얻기 위해 승리한 전사들을 쿠릴타이로 소집했다.
쿠릴타이의 구성원들은 그 계획에 찬성하여, 수레의 바퀴를 지탱하는 비녀장보다 키가 큰 타타르 남자는 죽이기로 결정했다. 수레는 어른의 키를 측정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나라의 상징이기도 했다. 해양민족이 배를 자기 나라의 상징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테무진은 이런 살육에 보상이라도 하듯이, 살아남은 타타르족을 자신의 부족의 노예가 아니라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번에도 타타르 아이를 어머니의 양자로 들였을뿐 아니라, 그들과 혼인을 장려하기까지 했다. 이때까지 테무진의 공식적인 부인은 부르테 한 사람으로, 그녀는 아들 넷과 딸 몇 명인지 확인되지 않았다-을 낳았다. 그러나 테무진은 타타르와 싸운 뒤 타타르귀족인 예수겐과 그녀의 언니 예수이를 아내로 맞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타타르는 몽골족보다 널리 알려진 부족이었다. 이 싸움 뒤에 몽골족은 타타르족을 아주 많이 받아들였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몽골 제국에서 고위직에 오르고 이름을 떨쳤다. 이런 연유로 타타르라는 이름은 몽골과 동의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몽골보다 더 유명해진 경우도 많아 수백 년 동안 역사적 혼란을 일으켰다. - P103

테무진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카사르 외에는 친척이 아니라 친구들이었다. 가족 가운데 몇 사람은 초원에서 잠시 서로를 놓쳤지만, 다른친척들은 테무진을 버리고 옹 칸이나 자무카에게로 갔다. 특히 그의 숙부- 아버지의 두 형제 가운데 하나로 테무진의 어머니를 메르키트족남편에게서 납치하는 일을 도왔던 사람이다가 옹 칸 진영에 합류하여 조카와 맞섰다.
서로 위로할 것도 없고 격려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지친 사람들은 갑자기 말이 나타난 것을 초자연적인 징조로 여겼다. 이 말은 허기진 배를채울 음식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말은 몽골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명예로운 짐승으로서 어떤 행사의 의미를 엄숙하게 드높여주는 역할도하고 신의 개입이나 지원을 상징하는 역할도 했다. 말은 테무진의 운명의 힘을 상징했다. 주요한 전투나 쿠릴타이를 앞두고 말을 제물로 바치면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었고 테무진의 영기의 힘은 강화되었다. 말고기를 먹은 뒤에 마실 물이라고는 발주나의 흙탕물밖에 없었다. 테무진칸은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들어올리고, 축배를 들듯 다른 손으로 발주나의 흙탕물을 들어올렸다. 그는 부하들의 충성에 감사하면서 결코 잊지않겠다고 맹세했다. 부하들은 흙탕물을 함께 마시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역사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 사건을 다시 정리하면서 ‘발주나 맹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은 테무진 칸의 군사적 운(運)의 최저점으로서, 또 몽골 제국의 정체성과 형식이 규정된사건으로서 신화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사건은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떠나 상호 헌신과 의리에 기초하여 결집한 몽골 민족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테무진 칸과 함께 있던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이었다. 아마 테무진과 형제 카사르만이몽골 씨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메르키트, 키타이, 케레이트 출신도 있었다. 테무진은 ‘영원한 푸른 하늘‘과 성산 부르칸칼둔을 숭배하는 헌신적인 샤머니즘 신자였지만, 19명 가운데는 무슬림 3명 외에 기독교도와 불교도도 몇 명씩 있었다. 그들은 오직 테무진에 대한 헌신과 서로간의 서약을 통해서 결합되었다. 결국 발주나 호수의 맹약을 통해 하나의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다. 이 결사체는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초월했기 때문에 개인적 선택과 헌신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결사체에 가까웠다. 이 집단은 테무진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새로운유형의 공동체의 맹아였으며, 이것이 결국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P113

자무카의 종말은 극적인 최종 결전이 아니라 느린 흐느낌처럼 찾아왔다. 점차 부풀어오르는 몽골 민족은 얼마 안 남은 메르키트족 무리들을 금방삼켜버렸다. 마흔 살의 자무카는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야생동물을잡아먹으며 추방당한 산적처럼 살았다. 운명의 묘한 역전인지, 한때 귀족이었던 자무카는 어린 테무진이 아버지를 잃었을 때처럼 초라하게 몰락해버렸다. 테무진이 나이만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일 년 뒤인 1205년 소의 해, 절망과 체념에 빠진 자무카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잡아 테무진에게 데려갔다. 테무진은 자무카와 적대 관계였지만, 그럼에도 다른 무엇보다도 의리를 높이 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무카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그들이 배반한 지도자 앞에서 모두 처형해버렸다.
20년 이상 싸워온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은 『몽골비사」에서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다. 테무진은 이제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무카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그와 힘을 합치려 한다. "우리 동무가 되자. 이제 다시 힘을 합쳐 잊었던 일들을 서로에게 일깨워주자. 서로를 잠에서 깨워주자. 그대는 멀리 있을 때에도, 나와 떨어져 있을 때에도, 여전히 행운과 축복을 잃지 않은 나의 형제였다. 물론 죽고 죽이던 시절에는 그대의 명치와 심장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물론 베이고 베던 시절에는 그대의 가슴과 심장이 나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자무카는 한때 그의 동생뻘 동반자였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가졌던 것 이상을 손에 넣고 다스리는 사람의 호소와 감정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젊은 날의 형제애를 감상적으로 회상하는 테무진의 감정에 잠시 끌려들어갔던 것이다. 자무카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함께 먹었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 자무카는 그들이 헤어진 것을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다른 사람의 영향 탓으로 돌린다. "우리를 갈라놓은 자가 우리를 자극했다. 옆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들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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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19

그러나 종국에는 자비를구하는 대신 죽음을 청하면서 한 가지 요청을 한다. 귀족적인 방법으로, 즉 땅에 피를 흘리거나, 해와 하늘에 피를 드러내지 않고 죽게 해달라는것이었다.
자무카는 살아서 테무진을 실망시켰지만, 죽음으로 더 나은 친구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주검을 높은 곳에 안치해주면 테무진과그 후손을 보살피겠다고 맹세한다. "나를 죽여 그 죽은 뼈를 높은 곳에놓아라. 그러면 내가 영원히 그대 씨의 씨를 보호할 것이며, 그들에게 복이 되겠다." 전설에 따르면 테무진은 안다의 맹세를 할 때 자무카에게 주었던 황금 허리띠를 채워 장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 P120

이제 테무진은 방대한 땅의 논란의 여지없는 통치자로서 남쪽의 고비로부터 북쪽의 툰드라까지, 동쪽의 만주 삼림으로부터 서쪽의 알타이산맥까지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의 제국은 풀밭이었으며, 인간보다 동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영토 각 지역에서 온 대표자들의 쿠릴타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기 전에는 통치의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없었다. 만일 어떤 집단이 대표를 보내지 않으면, 소집을 한 칸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칸은 그들을 통치할수 없었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들도 칸의 보호를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테무진은 일 년을 더 기다려 평화를 회복하고 관계들을 정리한 뒤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을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범의 해인 1206년 부르칸 칼둔 성산 근처 오논 강의 원류에서 쿠릴타이가 열렸다. 초원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쿠릴타이였을 것이다.  - P121

테무진은 현대의 서유럽 정도 크기의 방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그러나 그가 통제하는 유목 부족민 숫자는 100만 명 정도였고, 가축은 1500만 내지 2000만 마리였을 것이다. 그는 단지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사람들만의 칸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모전 벽의 사람들의 통치자가 될 예정이었다. 이 새로운 제국을 위하여 그는 자신의 부족 이름에서 파생된 새로운 공식 명칭을 선택했다. 예케 몽골 울루스, 즉 큰 몽골 나라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한 뒤 각각의 혈통, 씨족, 부족에내려오는 세습적인 귀족 칭호를 모두 없앴다. 그런 직책들은 개인이나가족이 아니라 나라에 귀속되었으며, 새 통치자의 의지에 따라 분배될 예정이었다. 테무진 자신은 구르 칸이나 타양 칸 같은 예전의 부족적 칭호를 거부하고 대신 칭기스 칸(Chinggis Kha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아마 그의 부하들이 이미 그 전부터 이 칭호를 사용해왔을 것이다.
- P122

테무진은 인종적으로 다양한 이 대규모 부족 연합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부족 간 분쟁과 전쟁의 전통적 원인을 없애는 새로운 법을 즉시 발표했다. ‘칭기스 칸의 대법령 ‘(대야사)은 다른 입법자들의 법과는 달랐다. 그는 신의 계시를 자신의 법의 기초로 삼지 않았다. 어떤 정주 문명의 오래된 법전으로부터 자신의 법을 끌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이 법을통해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온 유목민 부족들의 관습과 전통을 강화했다.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사회의 기능에 방해가 되는 낡은 관행들은 없애버렸다. 그는 각 집단이 독자적인 영역에서는 대법령과 부딪히지 않는 한 고유의 전통을 따르는 것을 허용했다. 이렇게 해서 대법령은 모든사람의 최고의 법 또는 관습법 역할을 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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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은 압도적인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공격을 계획했으며, 그관중은 이미 정복한 부하라 주민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다음 행군 목적지 사마르칸드의 군대와 주민이었다. 몽골 침략군은 공성 부대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해온 돌과 불을 던지는 투석기, 평형추 투석기, 대석궁(大石弓) 등을 새로 만들어 요새로 굴려갔을 뿐 아니라, 불이 붙은 액체가든 단지, 폭발장치, 인화물질까지 가져갔다. 그들은 또 바퀴에 올려놓고 쓰는 엄청난 크기의 쇠뇌도 가져갔다. 접이식 사다리가 달린 이동용 탑도 밀고 갔다. 이 탑 위에 올라가면 성벽의 수비군을 향해 활을 쏠수 있었다. 몽골군은 공중에서만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굴을 파는 사람들은 땅속을 파고들어 성벽을 무너뜨리려 했다. 칭기스 칸은 이렇게 하늘, 땅, 지하에서 뛰어난 과학기술 능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포로들-요새에 있는 병사들의 전우도 많았다에게 앞으로 달려나가라고 명령하여 적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다. 이 포로들의 몸이 해자를 채우면서 살아 있는 방벽이 세워졌다. 그러면 다른 포로들이 그 방벽 위로 전쟁용 무기를 밀고 갔다.
몽골군은 무기를 새로 고안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접촉한 다양한 문화의 무기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지식의 축적을 통해 손에 쥐게 된세계의 무기들은 어떤 상황에도 응용이 가능했다.  - P47

사냥꾼은 신혼부부에게 들키지 않고 자기 야영지로 돌아가 두 형제를 불렀다. 이 사냥꾼은 가난해서 후엘룬 같은 신부와 결혼을 하는 데필요한 선물을 마련할 여유도 없었고, 또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처갓집에서 노역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는 초원에서 부인을 얻는 두번째로 흔한 방법을 택했다. 약탈혼이었다. 삼형제는 아무것도 모르는사냥감을 추적했다. 그들이 신혼부부를 급습하자 칠레두는 공격한 자들을 수레에서 떼어내기 위해 즉시 앞으로 내달았다. 예상대로 그들은 칠레두를 쫓아갔다. 칠레두는 산을 한 바퀴 돌아 공격자들을 떨치고 신부에게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후엘룬은 남편이 공격자들을 그들의 땅에서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 따돌려봐야 곧 다시 돌아올 것이분명했다. 후엘룬은 십대 소녀에 불과했지만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자리에 남아 납치범들에게 굴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만일 칠레두의 말에 함께 타고 달아난다면 결국 붙잡혀서 남편은 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칠레두 혼자만 달아나면 자신만 붙들리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후엘룬은 남편이 자신의 계획을 따르도록 이런 식으로 설득을 했다고 한다. "살아만 있으면 앞방마다 수레마다 처녀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당신은 다른 여자를 찾아 신부로삼을 수 있고, 그 여자를 나 대신 후엘룬이라고 부르면 돼요." 이어 후엘룬은 얼른 저고리를 벗더니 신랑에게 "빨리 달아나라"고 다그쳤다. 그녀는 헤어지는 선물로 저고리를 그의 얼굴에 던지며 말했다. "이것을가져가요. 내 냄새를 맡으며 가요."
초원 문화에서는 냄새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끌어안거나 입을 맞추지만 초원의 유목민은뺨에 입을 맞추는 것과 흡사한 동작으로 서로 냄새를 맡는다. 냄새 맡기에는 매우 깊은 감정적 의미가 담기는데, 여기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이루어지는 가족간의 냄새 맡기에서부터 연인 사이의 성적인 냄새 맡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이 있다. 각 사람의 숨결과 독특한 체취는 그사람의 영혼의 일부로 여겨진다. 따라서 후엘룬이 남편에게 던져준 저고리는 중요한 사랑의 정표였던 것이다. - P52

예수게이는 후엘룬을 납치한 직후 타타르와 싸우러 나갔다가 테무진우게라는 이름의 전사를 죽였다. 아들이 태어난 직후에 돌아온 예수게이는 아이의 이름을 테무진이라고 지었다. 초원지대 사람들은 아이에게 평생 사용할 이름을 하나만 지어주기 때문에 이름을 고르는 데는 상당한 상징이 개입되며, 그 상징은 여러 겹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흔했다. 이들은 이름이 아이의 인격과 운명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몽골족과 타타르족 사이의 끈질긴 적대감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무진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의미나 아버지가 그런 이름을 지어준 의도에 대해서는 학술적인-물론 상상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지만- 토론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가설은 여러 아이들에게 공동의 어근에서 파생된 이름을 부여하는 몽골의 관습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엘룬은 테무진 뒤에도 자식을 넷 더 낳았는데 막내아들은 이름이 테무게였다. 막내자식이자 외동딸의 이름은 테물룬이었다. 이 세 이름은 모두 테물이라는동사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 어근은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가다. 영감을 받다. 창조적인 생각을 하다. 심지어 분방하게 공상을 하다등의 뜻을 가진 여러 몽골 단어에 나타난다. 한 몽골 학생은 나에게 "등위에 올라탄 사람의 의사에 관계없이 가고 싶은 데로 질주하는 말의 눈에 나타난 표정"을 연상하면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 P56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에 가까웠다. 복수도 약탈의 구실이 되곤 했지만, 진짜 동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투에서 이기면 약탈품을 가지고 와서 가족이나 친구와 나누었고, 나누는 물자의 규모에 따라 승자의위신이 달라졌다. 승리한 전사들은 적을 죽인 것에 자부심을 가졌고 그일을 기억했지만, 머리나 머리 가죽을 모으는 허세는 부리지 않았다. 또전투에서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나타내기 위해 눈금을 새긴다거나 다른상징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물자였다.
초기 몽골 부족들에게 사냥, 교역, 목축, 전투는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며 생계활동의 망을 이루었다. 사내아이는 말을 탈 수 있을 때부터이 각각의 일을 배웠다. 어떤 가족도 이 가운데 한 가지 활동만으로 먹고살 수 없었다. 습격의 방식은 지리적 조건이 결정했다. 비단길의 교역도시들에 가까이 사는 남쪽 부족들은 멀리 떨어진 북쪽 부족들보다 늘물자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쪽 사람들은 무기도 좋았다. 따라서 그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북쪽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머리를 써야 하고, 더 열심히 싸워야 했다. 이렇게 교역과 습격을 번갈아 되풀이하면서 느리지만 꾸준하게 금속과 직물이 북방으로도 흘러들었다.
북방은 날씨도 더 나쁘고, 풀도 더 부족하고, 사람들도 더 거칠고 폭력적인 곳이었다. - P59

남편은 죽고 다른 남자들은 데려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엘룬은이제 가족 외부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그런 사람은 누구도 도와줄 의무가 없었다. 후엘룬이 이제 그 무리의 일원이 아니라는 메시지는 몽골족이 늘 관계의 상징으로 이용하는 음식을 통해서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봄에 전직 칸의 미망인인 두 늙은 할멈은 가족의 조상에게 드리는 연례제사 음식을 마련하면서 후엘룬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에게 제사 음식을 나누어주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고, 나아가서 그녀가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통보였다. 이제 후엘룬과 그녀의 가족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해야 했다. 타이치우드 씨족은 오는 강 하류에 있는 여름 근거지로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후엘룬과 그녀의 자식들은 두고 가기로 결정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무리가 이동하면서 두 여자와 일곱 자식을 버리고 가자, 무리에서 지위가 낮은 가문에 속하는 노인 하나만 큰 소리로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테무진은 이 노인의 말에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이치우드의 한 남자가 노인에게 당신은 우리를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마주 고함을 지르더니 뒤로 돌아가 창으로 노인을 찔러 죽였다. 이것을 보고 당시 열 살짜리 아이였을 테무진은 죽어가는 사람을도와주러 달려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고통과 분노를 느끼며 흐느끼기만 했다. - P62

어떻게 해서 그런 비천한 지위에 있던 추방당한 아이가 몽골족의 위대한 칸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몽골 비사」에서 테무진이 어른으로커가는 이야기를 살피다 보면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준이 초기의 사건•들이 그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나아가서 그가 권좌에 오르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핵심적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테무진은 그의 가족과함께 비극을 견디어내면서 초원지대의 엄격한 카스트 구조에 도전하고자신의 운명을 주도하고, 가족이나 부족보다는 신임하는 동료와 동맹을맺어 이것을 일차적인 지지기반으로 삼겠다는 강한 결의를 굳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무진은 우선 자무카라는 이름의 몇 살 연상의 소년과 이런 강력한유대를 맺었다. 자무카의 가족은 오논 강변 테무진의 야영지 근처에 여러 번 천막을 쳤으며, 그가 속한 자다란 씨족은 테무진 아버지의 씨족과 먼 친척 관계였다. 이상적인 몽골 문화에서는 친족 관계가 다른 모든 사회적 원리를 지배했다. 친족으로 이루어진 망 외부에 있는 사람은 바로적이 되고, 가까운 친족 관계일수록 그 유대도 더 가까워졌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먼 친척 관계였지만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형제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어린 시절에 두 번이나 영원한 형제 관계를 맺자고 맹세했으며, 몽골 전통에 따라 의형제가 되었다. 이 운명적인 우정의 이야기는 테무진 인생 초기의 축을 이루는 사건으로, 필요한자원들을 배치하는 테무진의 탁월한 능력을 분명하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테무진은 이 능력을 바탕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나아가 초원지대를지배하는 여러 부족의 폭력적 성향을 길들이게 된다. - P64

어린 나이에 테무진은 단지 명예나 위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기위해 목숨을 건 게임을 했다. 그는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 형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는데, 훗날 이런 사냥 기술을 전쟁 전술로 바꾸는 데 천재적인솜씨를 발휘하게 된다. 그는 또 자기보다 활 솜씨가 나은 카사르를 앞으로 가게 하고 자신은 뒤를 맡음으로써 전술적으로 영특한 면을 보여주었다. 모든 경주에서 일등을 해야 하는 말처럼 테무진은 뒤따르지 않고앞서 나가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관습을 어기고, 어머니에게 도전하고,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앞길을 막는 사람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테무진은 벡테르를 죽여 배다른 형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가족을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들은 즉시 살던 곳에서 달아나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몽골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벡테르의 주검이 한데서 썩도록 놔두었고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동안은 그곳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벡테르와 후엘룬이 훈계했듯이 이제 테무진은 보호자나 동맹자도 없이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는 가장은 되었지만 배반자로서 위험에 처해 있었다.
지금까지 후엘룬의 가족은 버림받은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범죄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살인 사건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제이것을 핑계로 누구나 그들을 추적해서 없애버릴 수 있었다. 스스로 오논 강의 귀족 혈통이라고 자부하던 타이치우드 씨족은 전사들을 보내그들의 영토에서 살인을 저지른 죄를 물어 테무진을 벌하고 그가 비슷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로 했다. 넓게 트인 초원지대에서는 숨을곳이 없었기 때문에 테무진은 안전한 산악지대로 달아났다. 그럼에도그를 추적한 사람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타이치우드는 그를 그들의본거지로 데려갔으며 그의 의지를 부수기 위해 칼- 황소의 멍에처럼생긴 장치-을 씌워놓았다. 칼을 쓰면 걸을 수는 있지만 손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으면 먹지도 마실 수도 없었다. 매일 다른 가족이 그를 지키고 또 먹여주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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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는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한 독일과의 경주를 이끌어 나갈 완벽한 콤비였다. 오펜하이머의 스타일인 카리스마적 권위가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적절했다면, 그로브스는 위협함으로써 권위를 행사했다. 하버드 출신의 화학자인 조지 키스티아롭스키(George Kistiakowsky)는 "그로브스가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부하들에게 겁을 줘서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기억했다. ‘서버는 그로브스가 "그의 부하들에게는 가능한 한 심술궂게 대하는 것을 방침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펜하이머의 비서인 프리실라 그린 더필드(Priscilla Green Duffield)는 장군이 항상 그녀의 책상을 지나쳐 가면서 인사도 없이 "얼굴이 더럽군."과 같은 무례한 말들을 던졌다고 기억했다. 그로브스의 이런 교양 없는 행동은 메사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만이었고, 이는 오펜하이머에게 향할 비판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오펜하이머가 가진 영향력을 보여 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해냈다. 그는 장군이 원했던 대로 능숙하고 효율적인 행정가로 거듭났다. 버클리에 있을 때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보통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오펜하이머 가족의 가까운 친구가 된 버클리 출신 내과 의사 루이스 헴펠만은 오펜하이머가 메사에서는 "종이 한장 없는 깨끗한 책상을 유지했다."라고 말했다. 외모도 변했다. 오펜하이머는 그의 긴 곱슬머리를 잘랐다. 헴펠만은 "그가 머리를 너무 짧게잘라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라고 기억했다. - P350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으로 알려진 진과 만났다는 보고서는 워싱턴으로 전달되었고, 곧 그녀가 소련 정보 기관으로 원자 폭탄과 관련된 기밀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다. 진의 전화를 감청하는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1943년 8월 27일 작성된 문서에서 FBI는 오펜하이머가 "그녀를 중개자로 이용하거나, 그녀의 전화로 코민테른 조직과중요한 통화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1943년 9월 1일, FBI의 수장인 에드거 후버는 법무장관에게 보내는편지에서, 그들의 소련 코민테른 첩보 요원들에 대한 수사 결과 "진태트록은 우리 나라의 전쟁 준비 노력에 관한 비밀 정보를 가진 사람의정부(情婦)가 되었음을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후버는 진이 "샌프란시스코 지역 코민테른 조직원들의 연락책이며, 그녀는 관련자로부터 비밀정보를 빼낼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조직의 첩보 요원들에게 그 정보를 전달해 줄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후버는 "코민테른 조직 첩보 요원들의 신원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그녀의 전화를감청할 것을 제안했고, 그해 늦은 여름 무렵 육군 정보처나 FBI에 의해도청기가 설치되었다.
오펜하이머가 진과 하룻밤을 보낸 지 2주 후인 1943년 6월 29일, 서해안 방첩 대장인 보리스 패시 중령은 펜타곤에 보낸 메모에서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하고 현재 직위에서 해고할 것을 요구했다. 패시는 오펜하이머가 "여전히 공산당과 연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가 가진 것은 모두 정황 증거에 불과했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진을 방문한 사실과 "버나데트 도일과 스티브넬슨과 연락을 주고받는 공산당원인" 데이비드 호킨스와의 전화 통화를 증거로 들었다. - P361

기묘한 인터뷰였다. 이 인터뷰는 나중에 오펜하이머를 파멸로 몰아넣게 될 것이었다. 그는 육군 정보 장교에게 첩보 활동이라는 적신호를보냈고, 엘텐튼을 용의자로 지명했으며, "결백한" 익명의 중재자가 역시 결백한 몇 명의 과학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하기 때문에 이름을 거명할 필요는 없다고 패시를 안심시켰다.
오펜하이머는 몰랐겠지만, 이 대화는 한마디도 빠짐없이 녹취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녹취록은 오펜하이머의 보안 파일에 들어갔다.
나중에 그가 접근 방식들(두 번인지 세 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에 대한 보고가 부정확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자신도 그 출처를 설명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그는 자신이 패시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아니면 패시에게는 진실을 말하고 나중에 거짓말을 했는지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모르고 시한폭탄을 삼킨 것과 같았다. 그것은 10년 후 폭발할것이었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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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그가 <밀레니엄>에 싣기 위해 집필하년 탐사기사의 주제는 바로 ‘보안과 불법 해킹‘이었다고 미카엘은 주장했다.
리스베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 주장이 거짓임을 잘 아는 그녀는대체 <밀레니엄>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미카엘이 이를 통해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려 했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일단 네덜란드서버에 접속해 ‘MikBlom/laptop‘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뒤이어 그의 노트북 화면이 뜨자 한가운데에 놓인 ‘리스베트 살란데르‘ 폴더와 ‘살리에게‘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미카엘의 편지를 열어본 그녀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화면을응시했다. 그녀의 내부에서 상반된 감정들이 뒤얽혔다. 지금까지는 스웨덴 전체가 자신의 적이었다. 그녀로서도 별반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합군이 한 명 튀어나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결백을 믿는다고 단언하는 잠재적 연합군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합군은 그녀가 스웨덴에서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유일한 남자였다. 리스베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은 여전히 순진하기 짝이 없는 빌어먹을 착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은 어떤가? 열 살 이후로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할 수없는 존재였다.
죄 없는 사람? 그딴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책임지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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