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문명화된 군대가 공포를 자아내는 행동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몽골군의 행동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동쪽으로 말을 달리면서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들의 원정은 그들이 피에 굶주린 행동을 했거나 사람들 앞에서 잔혹성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막강한 군대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들과 싸워 전례 없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몽골군에게 항복한 도시들은 풍문에 듣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과비교할 때 그들의 태도가 온화하고 자비로운 것에 놀랐다. 그래서 그들은 순진하게도 몽골군이 다른 면에서도 무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도시가 일단 항복을 한 뒤 몽골군이 멀리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태도를 바꾸었다. 몽골군은 소수의 관리에게 책임을 맡기고 도시를 지킬 병력도 주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은 몽골군의 철수를 군사력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했고, 몽골 군대가 그쪽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이런 도시에는 결코 자비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곧 반역자들에게 돌아와 그들을 완전히 짓밟아버렸다. 파괴된 도시는 다시 반역을 일으킬 힘을 회복할 수 없었다. - P184
칭기스 칸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은 아프가니스탄의 아름다운 바미안 골짜기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불교도의 순례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조각상들이 있는 곳이다. 고대 불교 신자들은 산비탈에 붓다의 거대한 상(像)들을 조각해놓았다. 몽골군이 이런 상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궁금할 따름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칭기스칸이 가장 사랑하는 손자 무투젠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칭기스칸은 무투겐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이의 아버지 차가타이보다 먼저 들었다. 칭기스칸은 아들을 불러 그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울거나 애도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 번 울었으며, 그 계기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두려워 울기도 하고, 화가 나서울기도 하고, 슬퍼서 울기도 했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을 때는 아이의 아버지가 눈물이나 애도로 고통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은 큰 어려움이 있거나 개인적인 고통에 직면하면 전투로 힘든 순간을 돌파했다. 슬퍼하지 말고 죽여라. 그는 괴로운 슬픔을 바미안 골짜기 사람들에 대한 큰 분노로 바꾸었다. 부자건가난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선하건 악하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 골짜기에는 훗날 하자라가 들어와 살게 된다. 하자라는 페르시아어로 ‘천(千)‘을 뜻하는 말인데, 이들은 스스로 칭기스 칸의 한 천호의 후손이라고 내세웠다. - P185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약간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뒤에 훨씬 더 실용적인 조언이 나온다. 몽골 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호수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가르침도 무시해버렸다. - P195
우구데이는 군대를 따라가지 않았다. 정복은 그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우구데이는 자신의 제국을 향유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모든 위대한 군주들처럼 영원한 수도를 갖기로 했다. 단지 게르들을 모아놓은 야영지가 아니라 벽과 지붕, 창문과 문이 있는 진짜 건물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우구데이는 그의 아버지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말을 타고 정복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을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고 확신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말을 타고 통치하는 것, 즉 권력의 중심이 옮겨다니는 것이야말로 몽골 성공의 제1요인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우구데이가 짧은 치세에 저지른 몇 가지 실수 가운데 첫 번째가 이 정책을 버리고권력 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 했다는 점이었다. - P205
우구데이는 수베데이를 싫어했던 것 같다. 어쩌면 불신했는지도 모른다. 수베데이도 우구데이에 대해서 같은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수베데이의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들은 주치 집안이었다. 그들은 서쪽 끝 초원지대에 살면서 볼가 강 주변, 수베데이가 정복한 땅들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주치가 죽은 뒤에는 아들 바투가 그의혈통의 칸 자리를 계승했다. 바투 칸은 주치의 둘째아들로서 칭기스칸의 손자들 가운데 가장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우구데이 사후에 대칸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에 유럽 원정에서도성공을 거두면 부와 명예가 크게 늘어 대칸의 제1후보 자리를 확실하게굳힐 수 있었다. 바투가 유럽 원정에 찬성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구데이 칸은 반대를 했다. 우구데이 자신은 송나라 원정에서 얻을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우구데이는 몽골 제국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으로가는 길목은 두 형제의 땅이 가로막고 있었다. 반면 송나라로 가는 길목에는 막내 톨루이의 땅밖에 없었다. 게다가 3년 전 가을-발효가 가장 잘된 마유주를 마실 수 있는 철이었다- 에 톨루이가 어느 날 아침 술잔치 끝에 대취한 채 천막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다가 쓰러져 죽어 우구데이의 앞길을 편하게 해주었다. 톨루이의 나이 40세였다. 우구데이는 즉시 자신의 아들 구육과 톨루이의 미망인 소르칵타니-케레이트의옹 칸의 조카딸이었다-의 결혼을 추진하여 죽은 동생의 소유를 합병하려 했다. 여기에는 조상의 고향과 성산 부르칸 칼둔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어린 네 아들을 고루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결혼을 거부했다. 이것은 결국 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된다. 그러나 당장은 그녀의 검증되지 않은 아들들에게 숙부인 대칸과 경쟁할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우구데이는 송을 친다는 명분으로 남하할 경우 소르칵타니의 소유지와 그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 침공을 구실로 그녀의 남편에게 할당되었던 전사들 가운데 일부에 대한 지휘권을 확보할수도 있었다. 따라서 우구데이에게는 송나라 원정이 중국으로부터 더많은 부를 가져오는 동시에 죽은 동생의 미망인으로부터 땅과 군사를 뺏어낸다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호기였다. - P218
기사들이 전장에서 몽골군을 물리치지 못하자 성직자들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려 했다. 기독교 사제들은 성자의 유골과 유물을 진열하여 다가오는 몽골군을 저지하려 했다. 어쩌면 몽골군 가운데다수가 기독교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몽골인이 유해를 드러내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고 두려워하는지는 몰랐다. 몽골군은 격분했다. 유골을 드러내는 것은 역겨울 뿐 아니라 산 자를 더럽히는 의식이기도 했다.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힌 몽골군은 성직자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 유물과 교회를 태워버렸다. 유럽은 몽골군과 싸워 군사적으로 패배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타격을 입었다. 헝가리는 병사와 왕만이 아니라 주교 한 사람, 대주교 두 사람을 비롯하여 성전기사단 소속 기사까지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헝가리의 기사단을 궤멸시켰을 뿐 아니라 왕 벨라 4세를남쪽 아드리아 해까지 추적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개의 텍스트는몽골 침략의 엄청난 심리적, 감정적 충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토레 마조레의 로제르가 쓴 타타르인의 헝가리 파괴에 대한 슬픈 노래(Carmen Miserabile super Destructione Regni Hungariae perTartaros)』도 그 가운데 하나다. 유럽 기사단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거의 10만 명이 전사한 충격에서 결국 헤어나오지 못했다. 유럽인은 그들의 기사와 귀족의 "꽃"이 졌다고 애도했다. 성벽을 두른 도시와 중무장한 기사의 시대는 갔다. 몽골군이 1241년 부활절 기간에 연기와 화약속에서 거둔 승리는 곧 다가올 유럽 봉건제와 중세의 완전한 붕괴의 전조였다. - P233
몽골 장교들은 유럽 침공의 물질적 성과에 실망하여 원정에 약간이라도 이익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마음에 크림 반도에 자리잡은 이탈리아상인들과 거래를 했다. 몽골군은 물자를 가져가는 대신 유럽에서 잡은포로를 다수 넘겨주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특히 젊은 포로들을 데려가 지중해 근방에서 노예로 팔았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과 베네치아나제노바의 상인들 사이의 거래가 시작되었고, 이 관계는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많은 이익을 남겼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 새로운 시장을 활용하기 위해 흑해에 교역 거점들을 세웠다. 이탈리아인은 몽골인에게 제품을 공급하고 그 대가로 슬라브인을 지중해 시장에 팔 권리를 얻었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을 노예로 팔게 되면서 훗날 몽골인은 그 결과로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탈리아인은 노예 대부분을 이집트 술탄에게 팔았고, 술탄은 그들을 모아 노예부대를 만들었다. 20년 뒤 몽골군은주로 슬라브인과 킵착인 노예로 이루어진 이 부대와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 이들은 몽골군과 싸워본 경험이 풍부했으며, 심지어 노예로 팔려오기 전에 몽골어를 배운 사람도 많았다. 몽골군은 현대 이스라엘의 갈릴리 해 부근에서 이들을 만나 싸우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처음 러시아평원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와 매우 달랐다. - P239
그러나 지금도남아 있는 1246년 11월의 편지를 보면, 구육이 인노켄티우스 4세를 향해 분명한 질문을 던진 것을 알 수 있다. 신이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에게 자비를 보일지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당신이 하는 말을 신이 승인한다고 어떻게 자신하는가? 구육은 신이 교황이 아니라 몽골인에게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세계를 다스릴 힘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신은 칭기스 칸의 대법령을 통하여 자신의 명령과 법을 세상에 퍼뜨릴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구육은 이어 교황에게 모든 군주들과 더불어 카라코룸에 와서 몽골 칸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권했다. 유럽과 극동 사이의 첫 번째 직접적인 외교적 접촉은 결국 각자의신학을 무기로 공방을 주고받다가 종교적 모욕으로 끝나고 말았다. 몽골과 유럽인들은 영적인 믿음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음에도, 처음에 관계를 맺을 때 방향이 부정적으로 잘못 잡히는 바람에 그 뒤로 공통의 종교라는 기반 자체도 무너지고 말았다. 몽골은 기독교 유럽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방법을 한 세대 더 모색해보지만, 결국 그런 희망을 모두 버리게 된다. 그와 더불어 기독교 자체를 완전히 버리고 불교와 이슬람으로 방향을 튼다. - P244
그러자 평생을 기다리며 준비해온 소르칵타니가 마침내유능한 네 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투 칸은 그녀의 은밀한 동맹자 소르칵타니의 부추김을 받아 구육의 미망인이 수도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1250년 톈산산맥의 이식쿨 호수 근처에서 먼저 쿠릴타이를 소집해버렸다. 이곳은 몽골의 바깥으로, 바투가 가기 편한 곳이었다. 쿠릴타이에서는 소르칵타니의 장남 뭉케가 대칸으로 선출되었지만 우구데이 가족은 선거 참여를거부했다. 적법한 선거는 몽골 본토, 특히 그들의 가족이 장악한 수도 카라코룸에서 치러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기가 죽지 않고 기지가 번뜩이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제국의 수도에는 갈 수 없었지만, 칭기스 칸의 막내아들의 미망인으로서 칭기스칸이 태어나고, 칸으로 선출되고, 죽어서 묻힌 고향 땅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성지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에는 아무도 참석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의 동맹자 바투 칸은 러시아로부터 먼 여행을 할 수 없었지만 대신 선거와 즉위식 과정에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보호할 친위대 3만 명을 보내면서 동생 베르케에게 지휘를 맡겼다. 소르칵타니는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두 번째 쿠릴타이를 소집했으며, 1251년 7월 1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43세의 뭉케를 몽골 제국의대칸으로 선출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장소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이 행사는 소르칵타니의 필생의 사업의 절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뭉케보다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칭기스 칸 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빌라이가 대칸 자리에오르며, 나머지 아들 홀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Assassins)"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 P2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