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은 이전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중국의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초원지대 야만인 출신이라는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그 오랜꿈을 실현하는 데 송나라 통치자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중국 사람들에게 하늘이 오직 쿠빌라이 칸 한 사람에게만 통치를 위임하였으며, 어차피 활력을 잃은 낡은 송 왕조는 시간이 지나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계획된 것처럼 보인다.
쿠빌라이 칸은 할아버지가 초원지대 부족들을 최초로 통일할 때 자신과 비슷한 문제들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 공통점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의 응집력 있는 정치적 통일체로 조직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칭기스 칸은 각각 10만 명이 되지 않는 부족들을 놓고 고민했던 반면, 쿠빌라이 칸은 각각 수백만명을 거느린 나라들을 놓고 고민했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두 세대 전의 칭기스 칸과 마찬가지로 핵심을 이루는 인종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끈기 있게 국가 건설 사업을 진행했지만, 쿠빌라이에게 그 핵심적인 문화적 정체성은 몽골족이 아니라 중국인에서 나왔다. 그는 중국 백성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얻어야 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통일되어 하나의 튼튼한 전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들을 재건해야 했고, 많은 경우 새로 만들기도 해야 했다. - P286

그러나 쿠빌라이는 결국 대도의 심장부에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은 거의 들어갈 수 없는 몽골인만의 안식처를 만들었다. 몽골의 가족과 고관들은 몽골 전사들이 지켜주는 높은 담 뒤에서 계속 몽골인으로 살았다. 도시 한가운데 짐승을 풀어놓은 넓은 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중국문화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쿠빌라이의 ‘금단의 도시‘는 몽골 수도 한가운데 만들어진 소형 초원지대였다. 몽골 시대에는 내성의 단지전체가 게르로 채워졌으며, 고관들은 자주 이곳에 들어와 살고, 먹고,
잠을 잤다. 칸의 자식을 잉태한 부인들은 반드시 게르에서 몸을 풀었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자라면서 게르에서 교육을 받았다. 쿠빌라이와 그 후계자들은 중국 황제로서 공적인 생활을 했지만, 내성의 높은담 뒤로 들어오면 계속 초원지대의 몽골인으로 살았다. - P290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수도와 관리들을 정복하면서 자신이 굉장한보석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고 수준에 이른 중국 문명의 대표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오랫동안 쿠빌라이는 그들의 업적을 보존하는 동시에 제국을 개혁하고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일본 학자오카다 히데히로가 썼듯이, "몽골 제국이 중국인들에게 물려준 가장 위대한 유산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다." 몽골은 다양한 중국어 방언을 사용하는 모든 지역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티베트, 만주, 위구르 등 인접한 왕국들, 나아가 더 작은 왕국이나 부족국가 수십 개까지덧붙였다. 몽골이 관장하는 새 나라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는 문명의 약 5배 크기였다. 중국의 공식적인 국가 문화는 물론 몽골 문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중국 문화도 아니었다. 쿠빌라이 칸은 잡종을만들어냈다. 쿠빌라이의 노력 덕분에 이 문화는 전 세계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 P303

쿠빌라이는 패배한 송나라 해군을 흡수하면서 자신에게 도전하는섬들을 침공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기술을 얻게 되었다. 그는 송나라 해군을 재건하고 확대했다. 해군을 단순히 해안이나 강 지역의 감시인이 아니라 큰 바다에서 상업과 군사작전 양쪽 일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있는 진정한 대양의 함대로 바꾸어놓으려고 노력했다. 쿠빌라이는 한반도를 거대한 조선소 겸 군사기지로 바꾸어 그곳을 발판으로 일본을 정복하려 했다. 그의 배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지만, 서둘러 건조하느라 품질은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고학적증거들을 보면 닻을 만들 때도 큰 돌을 두 개 붙여서 만드는 등 손쉬운방법을 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하나를 깎아서 만들었을경우보다 안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배에 식량, 갑주, 병기를 실었다. 병기에는 멜론 크기의 도기 수류탄도 있었다. 일본 수비대를 공격할 이 수류탄 안에는 화약과 파편이 가득 들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사절을 몇 번 더 보내 섬나라 일본에게 몽골의 통치에굴복하라고 설득했지만 일본군 지도부는 매번 거부했다. 1274년 쿠빌라이는 약 900척의 함대를 모아 2만 3000명에 이르는 고려와 중국 보병을 태웠다. 몽골 기병의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함대는 11월에 고려와 일본을 가르는 176킬로미터 길이의 방심할 수 없는 바다로 나섰다.몽골군은 해협 중간에 자리잡은 쓰시마 섬, 이어 큐슈 근처의 이카 섬을 쉽게 점령했다. 함대는 하카타 만으로 들어가 군대와 짐승을 상륙시켰다.
사무라이 전사들은 몽골군을 향해 달려나가 일대일 전투를 벌이려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대오를 유지했다. 몽골군은 평소처럼 개인이 아니라 단합된 부대로서 싸웠다. 그들은 앞으로 나서서 결투를 하는 것이아니라 폭탄을 발사하고 화살을 퍼부었다. 몽골군은 유명한 일본 전사들을 도륙했으며, 살아남은 일본 전사들은 해안지대를 떠나 내륙의 요새로 물러났다. 몽골군은 달아나는 일본군을 쫓지 않았다. 그 지역에 대해서 믿을 만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피해는 입었지만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위하며 전장을 떠나 병사와 말과 물자를다시 배에 실었다. 몽골군의 계획은 지금도 수수께끼다. 그들은 다음날 다시 돌아와 일본군을 추격할 생각이었을까?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해안을 따라 더 올라가 다른 지점을 공격할 생각이었을까? 이들은 본대가 아니라 일본의 반응과 전술을 시험해보러 나온 부대였을까? 이 전투에서 보기보다 큰 피해를 입어 퇴각을 하려 했던 것일까?
그날 밤 침공군이 모두 배에 타고 있을 때 무시무시한 가을 태풍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일본인이 나중에 가미카제, 즉 신풍(神風)이라고 이름붙인 이 바람은 바다를 휘젓더니 급조한 배 여러 척을 암초와 해안에 내던져 부수어버렸다. 탈출하려고 애를 쓰던 침공군 1만3000명이 죽음을 당했다. 대부분 고려의 안전한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위험한 해변에서 익사했다. 역사상 최대의 함대가 적과 뵨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해전사상 최대의 전사자를 낸 것이다. - P304

그럼에도 일본과 자바에서 패하는 바람에 몽골 제국의 동쪽 한계는일단 물을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타이완이나 필리핀제도 같은 가까운 섬까지도 뻗어나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쿠빌라이의통치 초기인 1260년에 이집트의 맘루크 군대에게 패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남서쪽 경계가 확정되고 말았다. 북서쪽 경계는 그로부터 20년 전몽골이 스스로 폴란드와 헝가리를 포기하면서 확정되었다. 따라서 몽골제국은 1242년에서 1293년 사이에 그 최대의 크기에 이르렀으며, 네 번의 전투- 폴란드, 이집트, 자바, 일본이 상대였다가 몽골 세계의 바깥 경계를 확정지었다. 이 네 경계 안의 영역은 파괴적인 원정과 정복에시달리며 그때까지와는 매우 다른 종류의 통치체제에 급하게 적응해야했다. 그러나 그 단계를 지나자 100년간 전례 없는 정치적 안정을 누릴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업, 기술, 지성이 그 전의 역사에서 유례를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 P309

대칸 자리를 둘러싸고 가족 내의 경쟁하는 지파들 사이에화가 생겼음에도 경제적, 상업적 체제는 쉬지 않고 가동되었다. 간헐적인 싸움 때문에 잠깐 정지되거나 우회하는 일이 생겼을 뿐이다. 때로는전쟁의 와중에도 양편은 싸움을 하면서도 분배 물자의 교환을 허용했다. 우구데이 칸의 손자로서 초원지대 중앙을 통치하던 카이두는 종종사촌 쿠빌라이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카이두 역시 중국 도시 난징주변에 장인과 농부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아마 그 대가였겠지만, 그는 쿠빌라이가 초원지대 부족들로부터 자기 몫의 말이나 물자를 가져가는 것도 허용했다. 몽골 제국의 행정구역은 중국, 모굴리스탄, 페르시아, 러시아 등 크게 넷으로 나뉘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요구는 줄지 않았다. 정치적 분열 때문에 오히려 과거의 분배 제도를 보존할 필요가 강해졌다. 한 칸이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그들의 몫을 공급하지 않으면 상대편에서도 자신의 영토에 있는 그 칸의 몫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서로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정치적 분쟁을 넘어섰던셈이다.
이런 분배 물자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몽골이 전쟁할 때 쓰는 길은 점차 상업적 간선으로 바뀌어갔다. 끊임없이 확장되는 오르토(ortoo)또는 얌(yam)은 몽골에서 베트남까지 또는 고려에서 페르시아까지 소식과 사람, 물자를 말이나 낙타 캐러밴에 실어 보냈다. 물자의 이동이늘어남에 따라 몽골 당국은 이전의 전통적인 길보다 더 빠르고 편한 길을 찾았다. 쿠빌라이 칸은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1281년에 황허-몽골인들은 검은 강‘이라고 불렀다의 발원지를 찾아내 지도로 그릴 대규모 원정대를 보냈다. 학자들은 이 정보를 이용해 강의 자세한 지도를 그렸다. 원정대는 중국에서 티베트로 들어가는 길을 뚫었으며, 몽골은 이 길을 이용하여 티베트와 히말라야 지역을 몽골의 역전 제도 안에 포함시켰다. 새로 뚫린 길은 티베트를 중국의 나머지 부분과 상업적, 동교적, 정치적으로 연결시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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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룸의 토론 이후 며칠 뒤 뭉케 칸은 루브룩을 불러 고향으로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자리를 빌려 루브룩에게. 나아가서 그를 통해 유럽의 통치자들에게 자신은 어떤 하나의 종교에 속한 사람이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몽골인의 관용과 호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몽골인은 하나의 신을 믿소. 우리는 그 신에 의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하오. 우리는 그 신에게 정직하게 다가가요." 뭉게 칸은 또 덧붙였다.
"신이 손에 여러 손가락을 주셨듯이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 길을 주셨소. 신은 당신들에게 경전을 주셨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그 경전을따르지 않고 있소." 몽케 칸은 그 증거로 기독교인이 정의보다 돈을 앞세운다는 점을 들었다. 이어 신이 몽골인에게는 경전 대신 거룩한 사람, 즉 샤먼을 주셨다고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하면서" 서로 "평화롭게 살고 있소. 몽케 칸은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하늘에는 ‘영생의 신‘ 한 분이 계시고, 땅의 주인은 ‘신의 아들‘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을 다스리는 그의 후손들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칭기스칸이 죽은 뒤에 첨가된, 메시아를 연상시키는 수사(修辭)를 제외하면 기본적인 내용은 몽골 제국의 창건자가 말년에 밝힌 내용과 다를 바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몽골인의 관대한 통치 밑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영생의 신의 힘으로 해가 뜨는 곳부터 지는 곳까지 온 세상이 하나가되어 기쁨과 평화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뭉게는 프랑스인을 포함한모든 기독교도에게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생의 신의 선언을 듣고 이해하고 나서도 우리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 산은 높고 우리 바다는 넓다‘고 하면서 그 선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믿지 않으려 한다면, 또 그런 태도로 군대를 모아 우리와 싸우려 한다면, 우리손에 혼이 날 것이다." - P258

몽골은 눈앞에 있는 재료를 즉석에서 무기로 활용하는 전통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주변에서 가장 큰 물체는 아랍인들이 수백 년에 걸쳐길러온 키가 큰 야자나무들이었다. 몽골군은 이 나무를 베어 그 줄기로치명적인 발사 무기를 만들었다. 러시아의 도시를 공격할 때와는 달리바그다드에서는 큰 도시를 둘러싼 나무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홀레구는 깊은 도랑과 누벽으로 도시를 둘러싼 뒤 무시무시하게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랍인도 전투에서 불을 뿜는 무기가 사용된다는 것은알고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화약의 힘을 경험해본 적은 없었다.
몽골군은 화약의 제조법을 바꾸어 산소를 충분히 공급함으로써 불창이나 불 화살처럼 천천히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빠르게 타오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발화하면 불이 붙기보다는 폭발이일어났다. 몽골군은 이 폭발을 이용하여 다양한 발사체를 날렸다. 장인들은 관을 이용하여 화살촉을 비롯한 금속 발사체들을 날릴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이 관은 크기가 작아 병사 혼자서 조작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관에서 폭발이 일어날 경우 대나무보다 더 강한 재료가 필요했기때문에 주로 쇠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다루기 편하게 하려고 작은 관에는 나무 손잡이를 붙였으며, 큰 관은 이동의 편의를 위해 밑에 바퀴를달았다. 큰 관들은 도기나 금속으로 만든 상자를 발사했다. 안에는 파편들이 들어 있었다. 때로는 화약이 더 들어 있어 다른 물체에 부딪히면서 2차 폭발을 했다. 몽골군은 이런 형태의 포격 장치를 이용해 공격을 하면서 연막탄 원시적인 수류탄, 단순한 형태의 박격포, 소이탄 등도 사용했다. 또 강한 힘으로 발사체를 날릴 수 있는 폭발 장치들도 개발하여, 진짜 대포를 사용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들은 화력을 집중하여 도시 방어망 가운데 한 지역을 두들겨댔다.
이런 원거리 포격 때문에 바그다드 주민은 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었으며 수비군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의 무기가 닿을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한 적이 없었다. 몽골공병들은 화약무기만이 아니라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땅에 묻는 폭탄도 거의 완벽하게 운용했다. 이런 혁신적인 무기들 덕분에 몽골군은 원하던 대로 실제 전투와 살인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공격을할 수 있었다. 훌레구는 댐을 여러 개 파괴하여 티그리스 강의 물줄기로 칼리파 진영을 물바다로 만들었으며, - P268

홀레구는 기독교인 부대를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 전리품을 걷어오•게 했다. 이 부대는 많은 사람들이 소개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집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략군은 명령 불복종을 죽음으로 다스렸다. 몽골군의 명령에 따라 도시의 교회와 기독교인 소유지는 약탈을 면했다. 흘레구는 카톨리코스 마키카에게 칼리파의 궁 하나를 주기도 했다. 바그다드 내부의 기독교도는 밖에서 들어온 기독교도와 합세하여 도시를약탈하고 무슬림을 학살했다. 기독교인들은 마침내 무슬림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수백 년에 걸친 증오와 분노가 터져나오면서기독교도는 모스크를 더럽히고 파괴했으며, 많은 모스크를 교회로 바꾸었다. 기독교인들은 압바스의 땅 전역, 그리고 그 너머에서도 승리를 축하했다. 아르메니아의 연대기 기록자는 그 기쁨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도시가 세워진 지 15년이 지났다. 이 도시는 그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늘 배가 고픈 거머리처럼 온 세상을 삼켰다. 그러나 이제 이 도시는 가져간 것을 모두 내놓았다." 바그다드는 "그 동안 뿌린 피와 그•동안 저지른 악에 대한 벌을 받았다. 그 죄악은 이미 바그다드를 가득•채우고 흘러넘칠 정도였다." 약탈은 17일 동안 계속되었다. 침략자들이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도시에는 불이 붙었다. - P270

뭉케 칸도 앓아누웠지만 서서히 회복이 되어갔다. 그러다가 1259년 8월 11일에 갑자기 죽었다. 사망 원인은 연대기마다 다르다. 중국인은 콜레라로 죽었다 하고, 페르시아인은 이질로 죽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다 한다. 어쨌든 뭉케 칸이 죽자 전진은 중단되고 제국은 그 상태에서 응결되었다.
이전의 세 대칸이 죽었을 때에는 몽골 지도자들이 서둘러 고향으로달려가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각 파벌이 이미 소유한 땅을 보호하러 나섰다. 그 무렵에는 중동에서 승리를거둔 홀레구가 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과 도시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장악한 부는 몽골 제국의 나머지 땅의 부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는 이미 러시아를 다스리던 사촌들이 귀하게 여기던 아제르바이잔의 목초지 일부를 차지했다. 사촌들은 더 많은 땅을 잃을까 두려워 선거를 위해 몽골로 돌아가기는커녕 자신들의 영토를 꽉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다. 중동의 홀레구나 ‘황금 오르도"-러시아에 사는 주치의 후손은 그런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그들이 이미 통제하고 있는 영토를 놓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몽골에서 대칸이라는 최고의 칭호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 칸의 상속자로서 대칸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 칸은 제2차 몽골 세계대전을 시작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제품에 사그라졌다.
뭉케의 형제들은 가끔 원정에 나서기는 했지만 외부의 적과 싸우기보다는 서로 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쿠빌라이는 갑자기 송나라에서관심을 돌려 카라코룸에서 몽골을 통치하던 막내동생 아릭 부케에게 도전했다. 두 형제는 각각 자신의 영토에서 별도의 쿠럴타이를 열었다. 두경쟁자, 나아가서 그들 각각의 지지자들은 선명한 차이를 보였다. 쿠빌라이는 교육을 잘 받았고 중국 문화가 지배하는 농경지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황금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전적인 신임이나 인정을받은 적이 없었다. 쿠빌라이는 건물이나 도시를 더 좋아했다. 궁에 있을때도 천막에 있을 때처럼 편해 보였다. 심지어 중국어도 조금 할 줄 알았다. 이렇게 몽골의 전통적 생활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늘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 P276

아릭 부케는 세계주의자인 쿠빌라이와는 달리 초원지대 사람으로 살았다. 자신의 말에서 멀리 떠나가본 적이 없는 골수 몽골인이라고할 수 있었다. 그는 막내아들로서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족의옷치긴, 즉 화로의 왕자였다. 뭉케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대칸의 자리를추서했으므로 아릭 부케도 뭉케와 마찬가지로 대칸 자리에 대한 권리를주장할 수 있었다. 나아가서 아릭 부케는 황금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이각자의 땅을 다스리는 데 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반면 쿠빌라이는 오만한 태도 때문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릭 부케는 몽골 법을 따라 몽골인의 고향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몽케 칸의 미망인과 아들들은 그를 적법한 최선의 상속자로 밀었다.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두 친형제 홀레구와 쿠빌라이만 예외였다. 1260년 6월, 가족 모든 지파의 대표자들은 카라코룸의 쿠릴타이에서 아릭 부케를 대칸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빌라이는 중국인 대신들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영토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그의 추종자들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선포했다. 쿠빌라이는 중국인 신하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같은 해인 1260년 대칸에 덧붙여 황제 자리에도 올라, "중앙의 통치"162) 라는 뜻으로 연호를 중(中)이라고 정했다. 이 연호는 대칸을 ‘중앙‘ 진영으로 부르고그의 군대를 ‘좌익‘과 ‘우익‘으로 부르던 몽골식 명명법을 중국식으로바꾼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선출이 몽골 기준에서는 전통에 어긋났지만,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몽골 부대만이 아니라 중국 군대도 휘어잡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카라코룸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식량 공급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몽골의 초원도시 카라코룸의 주민은 수가 너무 불어나 그 지역의 가축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외지의 농부들을 불러들이려고 꾸준히 노력했음에도 카라코룸 주위의 땅은 농업에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카라코룸은 쿠빌라이가 장악한 농지로부터 상당량의 식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주민을소개(疏開)하거나 굶겨죽일 수밖에 없었다.
쿠빌라이는 식량 공급을 차단하고 군대를 보내 카라코룸을 점령했다. 아럭 부케는 거세게 저항했지만 형이 보낸 중국군의 엄청난 규모에 계속 밀렸다. 카라코룸은 곧 쿠빌라이의 손에 들어갔지만, 1261년 아부케는 잠시 카라코룸을 탈환했다. 경쟁하는 두 칸의 군대는 두 번 더 교전을 하지만 아직 부케의 군대가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다. 게다가 군사력도 낫고 더 똑똑해 보이기도 하는 형과 비교할 때 어린 칸에게 승산이 별로 없다고 본 동맹자들이 하나둘 떠나자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아직 부케는 몽골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과 직면했다. 주드, 즉 동물 기근이었다. 1250년부터 1270년까지 몽골에는 이상저온 현상이 나타났다. 몽골처럼 생태학적으로 취약한 지대에서는 기온이 평년과몇 도만 달라져도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강우량이 심하게 줄어 풀의 생장이 제한되고, 그 결과 동물이 약해지거나 죽는다. 말이나 식량을 넉넉하게 갖추지 못하자 이미 쿠빌라이 칸의 영토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공급받지 못하던 아릭 부케의 지지자들은 전쟁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힘이없었다. 1263년 겨울은 특히 가혹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아릭 부케에게는 이렇다 할 권력기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추종자들에게 식량을 제공할 수 없었던 아릭 부케는 상도(上都)로 갔다가 1264년에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 P277

기나긴 싸움 끝에 형제가 만났을 때 쿠빌라이는 아릭 부케에게 공식적인 복종의 예를 갖출 것을 강요했다. 쿠빌라이는 조정의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동생을 심문하며 대칸의 자리를 둘러싼 투쟁에서 두 편 가운데 누가 옳으냐고 물었다. 아릭 부케의 답은 그가 패배했을망정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때는 우리가 옳았고, 지금은 형이옳소." 멀리 있는 형제 훌레구를 포함한 다른 가족은 쿠빌라이가 동생을 사람들 앞에서 욕보인 것에 화가 나 쿠빌라이에게 항의했다. 쿠빌라이는 몽골 영토에서 다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아릭 부케의 운명을결정하고, 자신도 새로 적법하게 승인을 받아 중국 땅에서 선출되었다는 오점을 씻어버리려는 것이었다. 쿠빌라이군의 군사력이 압도적이었음에도 황금 가족은 참석을 거부했다. 쿠빌라이가 통치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인정했지만 자신들이 대칸으로 지지했던 아릭 부케를 재판하는 범죄행위에는 가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고향을 떠났다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만큼 쿠빌라이를신뢰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쿠릴타이를 열 수 있는 정족수를 채우지못하자 동생을 용서했다.  - P279

‘은 나무‘의 네 개의 샘과 마찬가지로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에서는 늘 문제가발생했다. 킵착 칸국(황금 오르도에 세운 나라)은 동유럽의 슬라브 국가들을 다스렸으며,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 홀레구와 그의 후손이다스리는 땅은 ‘봉신의 제국‘을 뜻하는 일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수백 년간 아랍의 지배를 통해 페르시아 문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가장 전통적인 몽골인은 중앙의 초원지대를 차지했다. 이곳은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북쪽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을 가로질러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했다. 이 지역은 한동안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부하라에서 통치하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분할되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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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문명화된 군대가 공포를 자아내는 행동을 하는 것과 비교할 때 몽골군의 행동은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매우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동쪽으로 말을 달리면서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들의 원정은 그들이 피에 굶주린 행동을 했거나 사람들 앞에서 잔혹성을 과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막강한 군대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들과 싸워 전례 없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눈길을 끌었다.
몽골군에게 항복한 도시들은 풍문에 듣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과비교할 때 그들의 태도가 온화하고 자비로운 것에 놀랐다. 그래서 그들은 순진하게도 몽골군이 다른 면에서도 무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도시가 일단 항복을 한 뒤 몽골군이 멀리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태도를 바꾸었다. 몽골군은 소수의 관리에게 책임을 맡기고 도시를 지킬 병력도 주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은 몽골군의 철수를 군사력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했고, 몽골 군대가 그쪽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이런 도시에는 결코 자비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곧 반역자들에게 돌아와 그들을 완전히 짓밟아버렸다. 파괴된 도시는 다시 반역을 일으킬 힘을 회복할 수 없었다. - P184

칭기스 칸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은 아프가니스탄의 아름다운 바미안 골짜기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불교도의 순례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조각상들이 있는 곳이다. 고대 불교 신자들은 산비탈에 붓다의 거대한 상(像)들을 조각해놓았다. 몽골군이 이런 상들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궁금할 따름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칭기스칸이 가장 사랑하는 손자 무투젠이 화살을 맞고 죽었다. 칭기스칸은 무투겐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이의 아버지 차가타이보다 먼저 들었다. 칭기스칸은 아들을 불러 그 소식을 전하기 전에 울거나 애도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 번 울었으며, 그 계기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두려워 울기도 하고, 화가 나서울기도 하고, 슬퍼서 울기도 했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을 때는 아이의 아버지가 눈물이나 애도로 고통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은 큰 어려움이 있거나 개인적인 고통에 직면하면 전투로 힘든 순간을 돌파했다. 슬퍼하지 말고 죽여라. 그는 괴로운 슬픔을 바미안 골짜기 사람들에 대한 큰 분노로 바꾸었다. 부자건가난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선하건 악하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 골짜기에는 훗날 하자라가 들어와 살게 된다. 하자라는 페르시아어로 ‘천(千)‘을 뜻하는 말인데, 이들은 스스로 칭기스 칸의 한 천호의 후손이라고 내세웠다. - P185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약간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뒤에 훨씬 더 실용적인 조언이 나온다. 몽골 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호수건너편에서 정복한 사람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통치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가르침도 무시해버렸다. - P195

우구데이는 군대를 따라가지 않았다. 정복은 그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우구데이는 자신의 제국을 향유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모든 위대한 군주들처럼 영원한 수도를 갖기로 했다. 단지 게르들을 모아놓은 야영지가 아니라 벽과 지붕, 창문과 문이 있는 진짜 건물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우구데이는 그의 아버지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말을 타고 정복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을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고 확신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말을 타고 통치하는 것, 즉 권력의 중심이 옮겨다니는 것이야말로 몽골 성공의 제1요인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우구데이가 짧은 치세에 저지른 몇 가지 실수 가운데 첫 번째가 이 정책을 버리고권력 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 했다는 점이었다. - P205

우구데이는 수베데이를 싫어했던 것 같다. 어쩌면 불신했는지도 모른다. 수베데이도 우구데이에 대해서 같은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수베데이의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사람들은 주치 집안이었다. 그들은 서쪽 끝 초원지대에 살면서 볼가 강 주변, 수베데이가 정복한 땅들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주치가 죽은 뒤에는 아들 바투가 그의혈통의 칸 자리를 계승했다. 바투 칸은 주치의 둘째아들로서 칭기스칸의 손자들 가운데 가장 유능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우구데이 사후에 대칸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에 유럽 원정에서도성공을 거두면 부와 명예가 크게 늘어 대칸의 제1후보 자리를 확실하게굳힐 수 있었다.
바투가 유럽 원정에 찬성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구데이 칸은 반대를 했다. 우구데이 자신은 송나라 원정에서 얻을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우구데이는 몽골 제국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으로가는 길목은 두 형제의 땅이 가로막고 있었다. 반면 송나라로 가는 길목에는 막내 톨루이의 땅밖에 없었다. 게다가 3년 전 가을-발효가 가장 잘된 마유주를 마실 수 있는 철이었다- 에 톨루이가 어느 날 아침 술잔치 끝에 대취한 채 천막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다가 쓰러져 죽어 우구데이의 앞길을 편하게 해주었다. 톨루이의 나이 40세였다. 우구데이는 즉시 자신의 아들 구육과 톨루이의 미망인 소르칵타니-케레이트의옹 칸의 조카딸이었다-의 결혼을 추진하여 죽은 동생의 소유를 합병하려 했다. 여기에는 조상의 고향과 성산 부르칸 칼둔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어린 네 아들을 고루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결혼을 거부했다. 이것은 결국 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된다. 그러나 당장은 그녀의 검증되지 않은 아들들에게 숙부인 대칸과 경쟁할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우구데이는 송을 친다는 명분으로 남하할 경우 소르칵타니의 소유지와 그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 침공을 구실로 그녀의 남편에게 할당되었던 전사들 가운데 일부에 대한 지휘권을 확보할수도 있었다. 따라서 우구데이에게는 송나라 원정이 중국으로부터 더많은 부를 가져오는 동시에 죽은 동생의 미망인으로부터 땅과 군사를 뺏어낸다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호기였다. - P218

기사들이 전장에서 몽골군을 물리치지 못하자 성직자들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려 했다. 기독교 사제들은 성자의 유골과 유물을 진열하여 다가오는 몽골군을 저지하려 했다. 어쩌면 몽골군 가운데다수가 기독교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몽골인이 유해를 드러내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고 두려워하는지는 몰랐다. 몽골군은 격분했다. 유골을 드러내는 것은 역겨울 뿐 아니라 산 자를 더럽히는 의식이기도 했다.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힌 몽골군은 성직자들을 죽였을 뿐 아니라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 유물과 교회를 태워버렸다. 유럽은 몽골군과 싸워 군사적으로 패배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타격을 입었다. 헝가리는 병사와 왕만이 아니라 주교 한 사람, 대주교 두 사람을 비롯하여 성전기사단 소속 기사까지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은 헝가리의 기사단을 궤멸시켰을 뿐 아니라 왕 벨라 4세를남쪽 아드리아 해까지 추적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개의 텍스트는몽골 침략의 엄청난 심리적, 감정적 충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토레 마조레의 로제르가 쓴 타타르인의 헝가리 파괴에 대한 슬픈 노래(Carmen Miserabile super Destructione Regni Hungariae perTartaros)』도 그 가운데 하나다. 유럽 기사단은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거의 10만 명이 전사한 충격에서 결국 헤어나오지 못했다. 유럽인은 그들의 기사와 귀족의 "꽃"이 졌다고 애도했다. 성벽을 두른 도시와 중무장한 기사의 시대는 갔다. 몽골군이 1241년 부활절 기간에 연기와 화약속에서 거둔 승리는 곧 다가올 유럽 봉건제와 중세의 완전한 붕괴의 전조였다. - P233

몽골 장교들은 유럽 침공의 물질적 성과에 실망하여 원정에 약간이라도 이익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마음에 크림 반도에 자리잡은 이탈리아상인들과 거래를 했다. 몽골군은 물자를 가져가는 대신 유럽에서 잡은포로를 다수 넘겨주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특히 젊은 포로들을 데려가 지중해 근방에서 노예로 팔았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과 베네치아나제노바의 상인들 사이의 거래가 시작되었고, 이 관계는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많은 이익을 남겼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 새로운 시장을 활용하기 위해 흑해에 교역 거점들을 세웠다. 이탈리아인은 몽골인에게 제품을 공급하고 그 대가로 슬라브인을 지중해 시장에 팔 권리를 얻었다.
이렇게 젊은 사람들을 노예로 팔게 되면서 훗날 몽골인은 그 결과로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탈리아인은 노예 대부분을 이집트 술탄에게 팔았고, 술탄은 그들을 모아 노예부대를 만들었다. 20년 뒤 몽골군은주로 슬라브인과 킵착인 노예로 이루어진 이 부대와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 이들은 몽골군과 싸워본 경험이 풍부했으며, 심지어 노예로 팔려오기 전에 몽골어를 배운 사람도 많았다. 몽골군은 현대 이스라엘의 갈릴리 해 부근에서 이들을 만나 싸우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처음 러시아평원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와 매우 달랐다. - P239

그러나 지금도남아 있는 1246년 11월의 편지를 보면, 구육이 인노켄티우스 4세를 향해 분명한 질문을 던진 것을 알 수 있다. 신이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에게 자비를 보일지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당신이 하는 말을 신이 승인한다고 어떻게 자신하는가? 구육은 신이 교황이 아니라 몽골인에게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세계를 다스릴 힘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신은 칭기스 칸의 대법령을 통하여 자신의 명령과 법을 세상에 퍼뜨릴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구육은 이어 교황에게 모든 군주들과 더불어 카라코룸에 와서 몽골 칸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권했다.
유럽과 극동 사이의 첫 번째 직접적인 외교적 접촉은 결국 각자의신학을 무기로 공방을 주고받다가 종교적 모욕으로 끝나고 말았다. 몽골과 유럽인들은 영적인 믿음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음에도, 처음에 관계를 맺을 때 방향이 부정적으로 잘못 잡히는 바람에 그 뒤로 공통의 종교라는 기반 자체도 무너지고 말았다. 몽골은 기독교 유럽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방법을 한 세대 더 모색해보지만, 결국 그런 희망을 모두 버리게 된다. 그와 더불어 기독교 자체를 완전히 버리고 불교와 이슬람으로 방향을 튼다. - P244

그러자 평생을 기다리며 준비해온 소르칵타니가 마침내유능한 네 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투 칸은 그녀의 은밀한 동맹자 소르칵타니의 부추김을 받아 구육의 미망인이 수도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1250년 톈산산맥의 이식쿨 호수 근처에서 먼저 쿠릴타이를 소집해버렸다. 이곳은 몽골의 바깥으로, 바투가 가기 편한 곳이었다. 쿠릴타이에서는 소르칵타니의 장남 뭉케가 대칸으로 선출되었지만 우구데이 가족은 선거 참여를거부했다. 적법한 선거는 몽골 본토, 특히 그들의 가족이 장악한 수도 카라코룸에서 치러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소르칵타니는 기가 죽지 않고 기지가 번뜩이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제국의 수도에는 갈 수 없었지만, 칭기스 칸의 막내아들의 미망인으로서 칭기스칸이 태어나고, 칸으로 선출되고, 죽어서 묻힌 고향 땅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성지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에는 아무도 참석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의 동맹자 바투 칸은 러시아로부터 먼 여행을 할 수 없었지만 대신 선거와 즉위식 과정에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보호할 친위대 3만 명을 보내면서 동생 베르케에게 지휘를 맡겼다. 소르칵타니는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두 번째 쿠릴타이를 소집했으며, 1251년 7월 1일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43세의 뭉케를 몽골 제국의대칸으로 선출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장소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
이 행사는 소르칵타니의 필생의 사업의 절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뭉케보다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칭기스 칸 자신은 비교적 약하고, 술을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인 아들들만 낳았지만, 소르칵타니가 낳아서 훈련시킨 네 아들은 모두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게 된다. 그녀의 아들들은 모두 칸이었다. 또 뭉케에 이어 아릭 부케, 쿠빌라이가 대칸 자리에오르며, 나머지 아들 홀레구는 페르시아의 일칸이 되어 그곳에서 독자적인 왕조를 창건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터키를 모두 정복하여 제국의 규모를 최대로 키운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송나라를 정복하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까지 밀고 들어간다. 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던 아사신(Assassins)" 일파를 없애고 무슬림의 칼리파를 처형한다.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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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0월 25일 오전 10시 30분, 오펜하이머는 대통령집무실로 안내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화술에 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라는 명성이 자자한 유명 물리학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패티슨 장관이 그를 소개하고 나서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트루먼은 오펜하이머에게 메이-존슨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트루먼은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적 문제가 무엇인지 정하는 것입니다. 국제 문제는 그 다음이지요."라고 말을 꺼냈다." 오펜하이머는 이상하리만큼 길게 침묵을 지키다가 머뭇거리며 "어쩌면 국제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모든 핵기술을 국제적으로 통제하는 노력을 통해 신무기의 확산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대화 중에 트루먼은 갑자기 그에게 러시아 인들이 언제쯤 그들의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겠냐고 물었다. 오펜하이머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트루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은 대답을 안다고 말했다. "영원히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오펜하이머는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트루먼의 한계를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히긴보텀은 "대통령이 전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것을 보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자신의불안감을 계산된 결단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감추고는 했던 트루먼에게, 오펜하이머는 지나치게 불확실했고, 애매했으며,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마침내 대통령이 자신의 메시지가 갖는 급박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감지한 오펜하이머는, 긴장한 듯 손을 비비며 나중에 후회할 만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통령 각하. 내 손에 피가묻어 있는 것 같습니다(Mr. President,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라고 말했다. - P505

1946년에 진행된 오펜하이머와 트루먼 정부 관료들에 대한 후버의조사는 반공주의 정치의 전조였다. 그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 지지자", 또는 "동조자"라는 혐의를 무기로 정적들을 침묵시키거나 파괴했다. 그것은 사실 새로운 전술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혐의는 1930년대말부터 주 정부에서 상당한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 우리의 "원자 비밀"을 지킬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기는 쉬운 일이었고, 이와 같은 필요성은 핵 관련 연구자들에 대한 극심한 감시를 정당화했다. 후버는 핵 문제에 대한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고, 그는 원자 에너지 정책에 관여하는사람 중 오펜하이머가 가장 혐의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P517

오펜하이머는 이와 같은 딜레마에 대한 해법으로 현대 과학의 국제주의를 제시했다. 그는 원자력 에너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관장하는 국제 기구를 만들어 개별 국가들에게 혜택을 나눠 주자고 제안했다. 이 기구는 기술을 통제하고 그 기술이 오직 민간 목적으로만 개발되도록 할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세계 정부 없이는 영구적 평화를 얻을 수 없고, 평화가 없다면 세계는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라고 믿었다. 물론 세계 정부는 당장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오펜하이머는 적어도 원자력에너지 부문에서만이라도 각국이 주권을 "부분적으로 포기"하기로 합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원자력 개발 공사(AtomicDevelopment Authority)가 전 세계 모든 우라늄 광산, 핵발전소, 그리고 연구소에 대한 소유권을 갖게 될 것이었다. 어떤 나라도 원자 폭탄을 만들지 못하게 될 것이었지만, 과학자들은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위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었다. 4월 초에 한 강연에서 그가 설명했듯이, "이 제안은 원자력 개발 공사가 설립되어 핵무기로부터 세계를•보호하고 원자력 에너지의 혜택을 제공할 수 있을만큼만 각국이 주권을 부분적으로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 P521

그래도 바루크는 벌칙 없는 법조항은 무용하다고 고집했다. 그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소련이 적어도 20년 동안은 핵무기를 만들 수 없으리라고 선언했다. 34 그러므로 그는 빠른 시일 안에 미국의 독점적 지위를 포기할 긴급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가 국제 연합에 제출하기로 마음먹은 계획은 애치슨릴리엔털 보고서를 상당히 수정한, 사실상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새로운 원자력 기구가 취하는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소련은 사실상 안전보장 이사회의 거부권을 포기하게 될 것이었다. 협정을 위반하는 나라는 즉시 핵무기 공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과 관련된 기밀 정보를 제공받기 전에 그들의 우라늄 광맥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애치슨과 매클로이는 처벌 조항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에 강하게반대했다. 그들은 또한 바루크의 의도대로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독점을 앞으로 수년간 유지한다면 계획은 성사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이 계속해서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이 그와 같은조건에 합의할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바루크의 제안은 원자력 에너지를 국제 협력을 통해 통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독점을 연장하려는 의도였다. 매클로이는 완벽한 국가 안보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일이며 그와 같이 엄격한 즉각 처벌 조항을 두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 대법관 펠릭스 프랭크퍼터는 매클로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아주 대단한 싸움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반대편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너무 화가 나서 ‘입에서 먼지를 내뿜을 정도였다고요." - P526

1946년 6월 14일, 바루크는 "산 자와 죽은 자(the quick and the dead)"사이의 선택이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국제 연합에 자신의 계획을제출했다. 오펜하이머와 애치슨릴리엔털 계획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이 예상했듯이, 소련은 즉시 바루크의 계획을 거부했다. 모스크바의 외교관들은 그대신 핵무기의 생산과 사용을 금지하는 간단한 조약을 제안했다. 오펜하이머는 키티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 제안이 "그리 나쁘지않다."라고 말했다. 누구도 소련이 바루크 제안의 거부권 행사 관련 조항에 반대한 것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키티에게 바루크는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잘 알면서도" 이 결과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낙담했는지 과장되게 말하고 다닌다고 평가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오펜하이머가 예상한 대로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다. 몇 달 동안이나 협상이 계속됐지만 그저 형식뿐이었고 의미 있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로써 두 강대국은 핵무기 경쟁을 조기에 통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곧이은소련의 대규모 핵무기 생산이 있고 나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미국 행정부는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군비 통제 조약을 제안할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미 수만 개의 핵탄두가 생산된 후였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은 바루크 때문에 이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했다. 애치슨은 나중에 "그것은 (바루크의) 임무였는데 그가 일을 망쳤습니다."라고 평가했다." 라비 역시 호의적이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그 일은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 P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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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주주들이 계속 남으려는 건 돈을 벌기 위해서예요. 그걸 바로 자본주의라고 하죠. 만일 그들에게 돈을 잃게될거라고 말한다면 당장에 주주를 그만둘 겁니다."
"내가 손해를 보라고 제안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충분히 있죠. 주주가 된다는 건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방금 당신도 말했듯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본주의예요. <SMP> 주주들은 수익을 내고 싶어하죠. 시장이 수익과 손실을 결정하는 게 바로 자본주의 법칙 아닌가요? 그런데 당신은 그 법칙이 <SMP> 직원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하고 당신과 주주들은 예외라는 듯이 얘기하는군요"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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