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초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 증언이 있고 나서 엿새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력 에너지 합동 위원회 공개회의에서 또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했다. 이번 주제는 연구 목적으로 외국의 실험실에 방사능 동위 원소를 수출하는 문제였다. 치열한 논쟁 끝에 원자력 에너지위원회 위원들은 수출을 승인했다. 유일한 반대표를 던진 위원은 스트라우스였는데, 그는 방사능 동위 원소가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수출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얼마 전, 스트라우스는 합동 위원회 청문회에서 수출에 반대하는 증언을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상원 빌딩의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스트라우스의입장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런 우려는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는 "그 누구도 방사능 동위 원소를 원자력 에너지를 얻는 데에 절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없을 것입니다. 원자력 에너지를 얻으려면 삽도 필요하지요. 원자력 에너지를 얻으려면 맥주도 필요할 것입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자 청중석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 필립 스턴(Philip Stern)이라는젊은 기자가 청문회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38 스턴은 이런 야유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몰랐지만, "오펜하이머가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것은 명확했다."라고 썼다. - P606

이후 10여 년 동안,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똑똑하고 사교적인 동생은 목장 관리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도 3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그들의 신분을 상기시켜 주기라도 하듯, FBI 요원들이 가끔씩 찾아와 이웃들에게 질문을 하고는 했다. 그들은 가끔 오펜하이머 목장까지 찾아와 프랭크에게 다른 공산당원들에 대해 묻기도했다. 한 요원은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우리에게 협조해야 할 겁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프랭크는항상 그들을 돌려보냈다. 1950년에 프랭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시간이 꽤 지나자 나는 FBI가 나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내주변을 유해하게 만들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내 친구들, 이웃들, 동료들을 나에게서 돌아서게 만들고 나를 의심하게 만들어서나의 좌익 활동을 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매 여름마다 목장을 방문했다. 프랭크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동생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아파했다. 프랭크는 "나는 정말 목장 주인이 된 것 같았고, 실제로도 목장 주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은 내가 목장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나를 학계로 돌아오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죠."라고 말했다." 이듬해 프탱크는 브라질, 멕시코, 인도, 그리고 영국에서 임시로 물리학 강의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국무부는 그에게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  - P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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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주자의 노트에서
독일의 좋은 것들 No.1 Hansaplast

한자플라스트 Hansaplast는 1922년에 나온 반창고 브랜드다. 여섯 살 때 롤러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났을 때 엄마가 한자플라스트를 붙여줬다. 한자플라스트는 엄마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피부가 두껍건 얇건, 매끈하건 주름투성이건, 건조하건 촉촉하건, 한자플라스트는 딱 달라붙어서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최고 고집센 반창고여서 상처를 보려고 떼어내면 아프다.

강제수용소를 의미하는 콘첸트라치온스라거 Konzentrations-lager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이 언제였는지는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배우기도 훨씬 전부터 나는 어렴풋이 그것에 대해 짐작하고있었다. 강제수용소는 뭔가 불길한 장소처럼 여겨졌고, 나의 상상 속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몸이 고통스러울정도로 한데 쑤셔 넣어져 있었다. 하지만 차마 겁이나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뭔가 꺼내선 안되는 이야기 같았다. 그것은 어른들도 소리 죽여 얘기하는 일이었고, 앞마당에서 오빠랑 나만 놀고 있을 때 가끔씩 사탕과 풍선을 건네던 남자에게서느껴지던 불안감을불러일으켰다.

우리 부모님은 종교는 없었지만, 어린 시절 일요일이면 가끔 오빠와 나를 데리고 성당에 가곤 했다. 우리가 뭔가를 믿으면서 자랄 수 있게 해주기위해서였다. 고해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고백할 정도로 죄지은 일이 뭐가 있었지 하며 머리를 쥐어짜던 기억이 난다.
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물려받은 죄‘ -독일인들이 ‘원죄‘를칭하는 말-라거나 다른 세대가 저지른 행동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개념은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예수님에게 그걸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나와 반 친구들은 베르사유 조약에서부터 파리강화회의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살폈다. 두운, 동어반복, 신조어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히틀러의 연설들을 분석했다. 나치 대원들이 유대인 가게와 사원을 약탈하고 방화한 라이히스크리스탈나흐트 Reichskristallnacht,
‘수정의 밤‘ 혹은 ‘깨진 유리의 밤‘ 기념일에는 아방가르드 공연도 올렸다.
수용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미국에서 온 할머니들에게 드릴 질문들도준비했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에 대해 물어볼 생각은 절대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언어가 한때는 시적이었지만 이제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언어라고 배웠다. 실러를 읽긴 했지만 셰익스피어를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하도록 배우지는 못했다. 우리가 쓰는 어휘에서 ‘영웅‘ ‘승리‘ ‘전투‘ ‘금지‘라는 독일어 단어들을 지웠고 최상급을 피했다.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보다 더 큰 어떤 이념을 믿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 추자멘게회리히카이츠게LZusammengehörigkeitsgefühl은 미국의 문화정체성을 정의할 때는 사용했지만 우리 이야기를 할 때는 사용하지 않았다. "너무도 전형적인 독일식"이라는 표현은 불친절하거나 편협한 행동을 묘사할 때 썼다.

한때는 부엌 창문 너머로 저녁 먹으라고 부르던 이름들, 크리스마스 선물과 학교공책에 쓰여 있던 이름들, 교실에서 엄한 목소리로 불리던 이름들, 입대 날 소령들이 격식을 차려 호명하던 이름들, 떠나기 전날 밤 부인들과 아가씨들이 속삭여 부르던 이름들, 대답이 없을 줄 알면서도 전쟁터에서 목 놓아 부르던 이름들, 상관에게 보고되던 이름들, 대령 비서들이 사무실 타자기로 타닥타닥 치던 이름들, 축축한 군사 편지지에서읽히고, 다시 읽히고, 또다시 읽히던 이름들, 돌에 새겨진 이름들,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전 조용히 떠올리던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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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라고 하지만, 성실함의징표 같은 매일매일의 글쓰기는 아니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어떨 때는 하루에 두 번도 썼지만, 어떨 때는 한 달 동안 한 번도 쓰지않은 적도 있었다. 거기 적은 내용도 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적으로기록한 것은 아니고(그에게는 어떤 하루도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다면 그는 하루치의 일기 말고는 더쓰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내면의 수상한 움직임들을 정교하게(그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과장에도 빠지고) 포착한것들이었다. 그 내용만으로는 도대체 그날 이 사람이 무얼 했다는것인지 잘 알 수 없는, 도무지 일기 같지 않은 일기를 썼다. 그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식으로 나름대로의 문학 수업을시작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 P101

독서도 취미냐는 별 신통치도 않는 반문이 한때 퍽 재치 있는 화술인 것처럼 통용된 적이 있지만, 그에게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버릇이라는 사실이 여러 군데서 진술되었다. 예컨대 그의 독서는, 아파트 안에 하루 종일 갇혀 있는 할머니가 딱히할 일이 없어서 한 통의 차를 다 마셔 버렸다는 경우와 유사하다. 목표도 체계도 반추도 없는 맹목의 게걸스러움. 그것은 그가 세상에대해 문을 닫은 결과였고, 또 그 동인이기도 했다. 세상은 그가 눌러앉은 방만큼 작아졌고, 그보다 더 큰 문밖의 세상은 거짓이 되었다. - P106

모든 예감에 비극의 냄새가 묻어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숙명의 울림 때문이다. 예감은 열람이 금지된 숙명의 세계를 부지불식간에 엿보고만자의 머리 위에 그 부정에 대한 징벌로 떨어지는 벼락, 그 벼락 같은 천재지변의 떨림이다. 그래서 숙명은 예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모든 숙명은 비극의 광배(光背)를 두르고 있게 마련이다. 숙명적이라는 말이 비극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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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이르러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덤 앞이었다. 그는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가방 속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어 무덤 앞에 두고 호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었다.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곧장 성냥을 켜서 책과 노트에 불을붙였다. 불길은, 처음에는 수줍은 듯 쭈뼛거리는 눈치더니 조금 있자흰 연기들 사이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3월이었고, 해를 넘긴마른 나뭇잎들은 불을 보자 반갑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의 내면으로 무언가 뜨거운것이 치받아 오르는 듯했다. 알 수 없는 충만감이 그를 휩쌌다. 뜻밖으로 코끝이 매워 왔다. 그는 그 사태를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몸을 돌려 뛰었다. 산속으로 마구 내달렸다. 발길에 차이는풀뿌리가 자꾸만 그를 넘어뜨렸다. 몇 번이고 쓰러지면서, 그는 무작정 내달렸다.
고갯마루에 당도했을 때, 그의 숨은 턱에 차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었다. 그가 달려온 산 아래쪽에서는 뻘건 불길이 영역을 크게 확대하면서 내달려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서 마을로부터 술렁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불이야, 불, 산불이 났어요•••••.그런 소리들이 들리고, 횃불이 만들어져 이리저리 우왕좌왕 오가는 듯하더니 산을 향해 급히 올라오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보였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으리라. 젊은이도 있고, 늙은이도있었으리라. 어쩌면 마을 전체가 잠에서 깨어나 산으로 달려올지 몰랐다. 그의 입가에 스멀스멀 웃음이 고였다. 마을을 굽어보면서 그는 몸의 민감한 부분을 간지럽히는 듯한, 야릇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소리 질렀다. 타올라라, 더 타올라라•••••. 가속도가 붙은 불길은 더 빠르고 더 세차게 달음질쳐 올리왔다. - P79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그에게는 곧 고향이었고(기억하거니와 고향이란 하나의 산천(山川)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관계이다. 인연이다. 그 때문에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 둘에 대한 절연의 의식을 그처럼 파격적으로 치름으로써 고향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고향, 곧 관계의 늪. 그 파리지옥 같은 인정의 끈끈함.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만한 매정함, 그만한 모욕을 감당할 체질을 익히지 못해서 대개의 사람들은 고향의 인정)을 끌어안고 산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신화의 표정>) - P82

그렇다면 무극사에 대한 그의 오래고 끈질긴 동경은 무엇이었단말인가. 더구나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름으로써 아버지와 아버지가 상기시키는 모든 심리적 부담으로부터 절연코자 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 터에 부재하는 부재가 확실하게 증명된 아버지에 대한가짜의 신화를 추적하는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받아들이게 만든다.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한 박부길이 아버지를찾아가는 과정을 이런 점에서 이해하면 모순되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 속의 아버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는 무극사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는 무극사행에 나섬으로써 신화 속의 아버지를 완성하려고 한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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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버지는 이상스럽게 관대했고, 다른 식구들 역시 그러했다. 그는 종일 모래밭에서 뒹구느라 옷을 다 버렸지만, 큰어머니는 두말하지 않고 새옷을 갈아입혀서 다시 모래밭으로 내몰았다. 사촌 형은 그런 그의 손에 감과 대추를 들려 주었다.
그런 순간에 그에게 쏟아지던 주변 사람들의 특별한 눈빛에 대해서 그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례적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인 집안의 분위기에 만족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맨 처음 그 죽음의 현장을 목격한 장본인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는 너무쉽게 그 현장으로부터 벗어났다. 한 사람의 죽음의 충격조차 어린아이의 감정을 오래 장악하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지.
상여가 산으로 나가기 전날 저녁, 담장 아래에서 구슬을 만지고 있던 박부길의 모습을 한동안이나 쳐다보고 있던 친척 어른이 (부음을듣고 외지에서 온 사람으로, 그에게는 고모가 된다고 했다)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더니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 당연히 그는 어쩐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마구 쓰다듬으면서 눈물에 젖어 훌쩍이는 음성으로 말했는데, 그녀의 태도가 너무도갑작스러운 것이어서 박부길은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길아, 죽은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그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는 틀리게 알고 있었다. 어렴풋한 깨우침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불쌍한 것,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 P70

큰아버지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잠시 동안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다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파도가 밀려와 발 밑을 때렸다. 시간도 파도를 따라 그들의 발 밑을 때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큰아버지의 계산된 것 같은 침묵에 불안을 느꼈다. 그는엉덩이를 들썩이며 큰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여전히 시선을 바다로 둔 채 큰아버지가 그에게 물었다. 엉뚱하기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직접 대답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너의 가슴속에 있다. 아버지는 너의 정신 속에 있다. 너는 아버지의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네 속에 있는 아버지가 너에게 힘을 줄 것이다. 너에 의해서, 아버지는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그는 큰아버지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순간, 그는 막연하게 슬펐다. 무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면서도 아득한 낙망의 정서가 울타리를 만들어 그를 감쌌다. 그는 자신이 이큰 우주 속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큰아버지는 시선을 바다에서 거두지 않았다. 햇살을 반사한 바다의 푸른 광채가눈부셨다. - P71

큰아버지가 그의 손에 삽을 쥐여 주었다. 그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흙을 퍼서 관 위에 뿌리라는 주문을 받고 나서 그는 조금 멈칫거렸다. 사람들은 삥 둘러서서 그가 행동하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야릇한 눈길들 속에서 그는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적어도 그 순간, 거기 모인 사람들에의해서, 매우 특별한 존재로 구별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그와 달랐다. 적어도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네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그가 종종 경험하곤 했던,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나가는듯한 걷잡을 길 없는 소외감이 그때 처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는 온몸을 빠르게 관통해 가는 전율에 사로잡혀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상대로 맞서 있는 한 왜소한 개체의 외로움이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한 방울 뚝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타고 몸속의 기가 모조리,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렸다. 그는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필시 사람들은 오해했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고, 코를 훌쩍이는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또 애써 소리 죽인 이런 말도 들렸다.
「불쌍한 것•••••. 알긴 다 알고 있었던가 보지•••••.」「그러게나. 이제 저 아이를 어쩔꼬•••••.」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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