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경험이 있는 오펜하이머는 1953년에 그 실체를 직시할 수 있었다. 프랭크처럼 그는 당시 미국 공산당이추구하는 사회 정의를 향한 비전에 끌렸다. 패서디나의 공공 수영장에서 인종 차별을 철폐한다든지, 농장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라고 요구한다든지, 교원 노조를 조직하는 것들은 모두 해방감을 맛보게해 주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 그는 또 다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호소하면서 자신이 젊은 시절 꿈꾸었던 가장 숭고한 이상을 지적인 차원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열린 사회를 향한 그의 요구는 비밀주의가 미국 사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그의 우려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넓게 보면 그것은 미국의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히로시마 이전부터, 로스앨러모스 이전부터, 그리고 진주만 사건 이전부터 사회 정의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의 역할은 바뀌었다. 책임 있는 미국 시민으로서 오펜하이머의 역할도 바뀌었다. 하지만 그가 깊숙이 간직했던 가치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리스 강연에서 "열린 사회, 지식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 자기 계발을 위한 인간의 제한없는 연대. 이러한 가치들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지고, 급변하고, 전문화하는 기술 사회 속에서 인류의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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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어요. 그들이 아주 결연한 표정을 지었던 게 기억나네요. 말하자면 ‘우린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고 있다.‘라는 표정이었어요. 허튼수작 말라는 태도였지요. 전 그들이 리아를 정말 아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이를 돌보기 위해 부모로서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었지요. 적어도 전 그렇게 느꼈어요. 화가났던 기억은 없어요. 그보다는 서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며 약간의 경외감을 갖게 됐지요. 전문가의 의견에 단호히 맞설 수 있는 그들의 행동은 저한테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어요. 닐과 페기는 모두가 인정하는 이 지역 최고의 소아과 의사인데도 리아의 부모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어요. 약 복용량을 바꿔달라고 하는 등 자신들이 보기에 옳은 것을 거침없이 주장할 줄 알았지요. 또 하나 그들과 제가 달랐던 건 그들은 제가 보기엔 큰 재앙이다 싶은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했다는 점입니다. 그 사람들이 보기에 문제는 치료였지 뇌전증이 아니었어요. 저는 발작은 멈춰야 하고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는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는데, 그들은 그럴 수도 있다는 태도였어요. 우리가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다는 식이었지요." - P99

"언어장벽은 가장 분명한 문제이긴 해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제일 큰 문제는 문화장벽이었으니까요. 몽족을 대하는 것과 이외의 환자를 대하는 데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무한한‘ 차이라고 할까요."
댄 머피는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몽족에겐 제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 없었어요. 이를테면 췌장에 문제가 있어 당뇨를 앓는다는 얘기를 몽족에겐 할 수 없었지요. 그들에겐 췌장을 가리키는 말이 없거든요. 췌장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죠. 그들 대부분에겐 동물에게 있는 기관이 사람에게도 있다는 개념이없어요. 사람이 죽으면 해부하지 않고 그대로 묻으니까요. 심장의 경우엔박동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도 알았어요. 하지만 그 밖의 것, 그러니까 폐같은 기관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었지요. 폐를 본 적이 없는데 그 존재를어떻게 직관으로 알겠습니까?"
••••••
제2차세계대전의 여파로 엄청난 정신적 외상을 입은 난민들에게서 신체화 장애 발병률이 대체로 높게 나타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심리적인 문제가 신체적인 장애로 나타나는 것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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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사실, 또는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에 대한 미신이 있다. 어떤 작가가 쓴 소설이 사실이라고 하면 구미가 당긴다. 심지어는 소설가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사실을 썼다고 믿고싶어하거나 사실을 썼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한다. 우리는 그다지 치밀하지 않고 현명하지도 않다. 사실을 썼다고 하더라도 소설가가 쓴 것은 결국 소설이다. 백 퍼센트 증류 상태의 사실이란 없다. 더구나 소설 속으로 들어오면 더욱 없다. 그런데도 사실, 또는 사실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우리를 흘린다. 사실에 대한 우리의 신봉은 소설을 작가의 삶과 겹쳐서 읽게 한다. 지금의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는 박부길의 소설을 박부길의 삶 위에 포개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삶을 사실 그대로 베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자신의 삶을 가지고 만든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선택과 배제를 통해 재구성된 삶이고, 또한 거기에 굴절과 왜곡이 불가피하게 가해졌으리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의 소설을 그의 삶 위에 포개려는 시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굴절과 왜곡은 그의 선택과 배제이고 그의 굴절과 왜곡이다. 그가 선택하고 배제한다.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사실은 그가 선택하고 배제하고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 사실이다.  - P189

 훼손되지 않은 그의 순수한 ‘자실‘을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뜻이 있을까?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와 이유가 있는 사실은 그가 선택하고 배제한, 그가 굴절하고 왜곡한 그의 사실이다. 그 사실만이 의미 있는 사실이다. 사실의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굴절과 왜곡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의 진정한 의미 있는, 말해질 필요가 있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 사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굴절하고 왜곡하는 그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바로 그것을 읽는다.
한 작가의 작품은 어떤 식으로든 그 작가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의식, 무의식의 다양한 파편들을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소설들을 만든다. 삶의 파편들은 때로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고, 더 자주는눈에 잘 띄지 않게 숨어 있기도 한다. 삶이 없으면 소설도 없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파편들 속에 감추어둔 작가의 내밀한 음성이지 파편들을 꿰맞춘 사실의 복원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책 밖에 있고, 작가가 쓴 글들은 책 속에 갇혀 있다.
독자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자는 한 작가가 써놓은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그 각각의 소설들에 드러나 있거나 감춰져 있는 파편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경험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조합함으로써 나름대로 한 작가를 만든다. 그런 뜻에서 소설이없으면 삶도 없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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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근래에 읽다 덮어 둔 보르헤스의 단편 가운데 한 구절이 머릿속을 뱅뱅 돌기 시작했다. 그 한 구절은 어쩐 일인지 선명하지가 않았다. 대강의 분위기가 떠오르고 윤곽도 그려지는데 정확한문장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무시해도 될 일이라고 할 테지만, 그리고 사실 그래도 될 정도로 대단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온 신경이 보르헤스에게 쏠렸다. 보르헤스의 문장을 찾아내기까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태를 어쩔 것인가. 나는 갑자기 중요한 과제를 대하는 심정이되어 그 책을 찾았다. 읽던 페이지를 책상에 박은 채 ‘보르헤스‘는 내오른쪽 손이 닿는 곳에 꾸부정하게 누워 있었다. 나는 급히 책장을넘겨 문제의 구절을 찾았다. 단편의 제목은 <독일 진혼곡>이었는데, 거기에 이런 글이 씌어져 있었다.
‘우리가 우리의 불행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생각만큼 교묘한 위안은 없다‘
그 구절은 화살처럼 날아와서 내 가슴에 박혔다. 보르헤스가 그순간의 내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박부길씨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그것도 매우 독창적이고 현저하게 남다른동기에 의해 선택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소설 속에서나마) 교묘하게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는 위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를 위로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것을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안다. 그래서 박부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한다. 그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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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2월 30일, 사건이 재판에 들어가기도 전에, 오펜하이머는 스트라우스의 사무실에 들러 개인적인 문제로 상의할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변호사들이 와인버그 사건에 대한 수입료로 9,000달러의 청구서를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변호사 비용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나왔고, 그는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28 그는 그러고 나서 스트라우스에게 고등 연구소 이사회 의장 자격으로 연구소가 자신의 소송 비용을 부담하도록 권고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스트라우스는 단호하게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오펜하이머가 코닝 글라스 회사(Corning Glass Company)가 자신의 친구 콘던의 소송 비용을 내 주었다는 것을 지적하자, 스트라우스는 그것은 경우가 다르다고 말했다. 콘던 박사의 고용주는 그를 고용하기 전부터 콘던이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 연구소의 이사들은 오펜하이머에게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스트라우스는 차갑게 말했다.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1947년 오펜하이머는 스트라우스에게 자신의 좌익 과거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스트라우스는 변호사들이 오펜하이머가 "꽤 부유하고 그 정도는 부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액의 청구서를 보내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 P694

오래전부터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미래에 어둡고 중대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어렴풋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1940년대 말의 어느날, 그는 집착, 분열된 자아, 그리고 실존적 예언에 관한 이야기인 헨리제임스(Henry James)의 단편 「정글 속의 야수(The Beast in the Jungle)」를 집어 들었다. 그 이야기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오펜하이머는 바로 허버트 마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크스의 미망인 앤 윌슨 마크스는 "그는 허브에게 어서 그 책을 읽어 보라고 재촉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제임스 소설의 주인공 존 마처(John Marcher)는 여러 해 전에 만났던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녀는 그가 어떤 예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고 털어놓았던 것을 기억했다. "당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신 안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 희귀하고 이상하며 어쩌면 놀랄 만하고 끔찍한 일이 언젠가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고, 당신 뼛속에는 그것에 대한예감과 확신이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당신을 압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처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아직까지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은 내가 하게 될일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만 하는 일이, 그것으로 내가 명성을 얻거나 존경을 받을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요." 여인이 "그것은 당신에게 단지 고통을 주는 일인가요?"라고 묻자, 마처는 "글쎄요, 말하자면 기다려야만 하는, 대면해야만 하는, 내 인생에 갑자기 퍼져 나가는 것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아마도 더 이상의 의식을 모조리 파괴하고, 나 자신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마도 모든 것을 바꿔 놓고, 나의 세계의 근본을 잘라 버려서 내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겠지요."?
히로시마 이후로 오펜하이머는 언젠가 자신의 "정글 속의 야수"가 나타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게 될 것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추적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정글 속의 야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스트라우스였다. - P697

그러고 나서 그는 핵무기와 관련된 모든 정보는 기밀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것의 본성을 설명해야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이래로 미국은 "소련의 적대감과 점점 커지는 소련의 국력"과 직면해야만 했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시작된 냉전에서 원자력의 역할은 단순한 것이었다.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은 "우리가 앞서 나가자. 우리가 적들보다 앞서 나갈 필요가 있다."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화제를 냉전 경쟁으로 돌리면서, 소련은 이미 세 번의 핵실험을실시했으며 상당량의 핵분열 물질을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소련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위치까지 와 있는지에 대해 대강의 추정은 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내생각에 소련은 우리보다 4년 정도 뒤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안심할수 있는 정도의 차이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 단 1개의 효과를 생각해 보았을 때 미소 양측은 이와 같은 신무기들이 훨씬 더 큰 살상력을 가질 수도 있음을 안다고 말했다. 미사일 기술을 넌지시 암시하며, 그는 기술의 발전은 곧 "한층 더 현대적이고, 더 유연하며, 더 요격하기 어려운" 운반 수단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곧 현실화될 것입니다. 나는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핵무기의 개발과 국제 정치 체제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기밀로 묶여 있었다. 그는 "나는 그것에 대해 글을 쓸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시한번 비밀주의 때문임을 강조했다. "나는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가능성들에 대해 솔직하게 의논했던 모든 책임 있는 사람들,과학자나 정치인, 시민이나 정부 관료 중에 그들이 알게 된 사실에 대해크게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10년 후를 내다보며 "소련이 우리보다 4년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폭탄을 2만 개 갖게 되더라도 그들의 폭탄 2,000개보다진정한 의미에서 전략적 우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말했다. - P699

오펜하이머는 유일한 구제책은 "솔직함"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워싱턴의 공직자들은 이제 미국 국민들에게 적국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핵무기 경쟁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예리하고 거침없는 연설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핵심적인 사실은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반복해서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특별한 지식의 세례를 받은 브라만 승려처럼 가장 근본적인 비밀을 폭로했다. 그 어떤 나라도 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리라고 예상할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두 강대국들이 상대방은 물론이고 인류 문명 전체를 끝장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국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덧붙여 청중의 간담을서늘하게 했다.
이보다 더 도발적인 연설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새 행정부의 국무부장관 존 포스터 덜러스는 노골적으로 대량 보복에 기반한 국방 정책을지지했다. 하지만 이제 핵 시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과학자가 이 나라국방 정책의 근본 가정들이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핵과학자가 지금까지 엄격하게 비밀에 부쳤던 핵기밀을 공개하고, 핵전쟁의 결과에 대해 솔직하게 토론하•자고 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최고 비밀 취급 인가를 가진 저명한 시민이이 나라의 전쟁 계획을 둘러싼 비밀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발언 내용이 워싱턴 국방 행정가들 사이에 퍼지자 많은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트라우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 오펜하이머의 연설을 들은 대부분의 변호사들과 투자 은행가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조차 그의 연설문을 읽고 솔직함에 사로잡혔다. 군인 출신인 아이젠하워는 오펜하이머가 두 강대국을 "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에 비유한 것을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군축 패널 보고서를 읽고 나서 그것이 사려 깊고 현명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주요 백악관 보좌관 C. D. 잭슨(C. D. Jackson, 잭슨은 타임 라이프(Time-Life) 사에서 헨리루스(Henry Luce)의 오른팔이었다.)에게 "핵무기는 적극적으로 기습하려는편에 유리하게 작용하네. 미국은 절대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핵무기가 출현하기 전까지 우리는 어떤 나라로부터도 이와 같은 히스테리적 공포를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라고 말할 정도로 핵•무기에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임기 후반기에 "이런 식으로 전쟁을 할 수는 없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불도저들로는 길거리에•널릴 시체들을 수습할 수조차 없을 거야."라고 신랄하게 말하며 매파보좌관들의 의견을 힐책하기도 했다. - P702

오펜하이머의 백악관 방문을 예의 주시하던 스트라우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오펜하이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후 몇 달 동안, 《타임》, 《라이프》, 그리고 《포춘》(모두 헨리 루스가 운영하는 잡지들이었다.)은오펜하이머는 물론이고 과학자들이 국방 정책에 가진 영향력에 맹공을 퍼부었다. 《포춘》 1953년 5월호에는 "수소 폭탄을 둘러싼 은밀한 투쟁. 미국의 군사 전략을 뒤집기 위한 오펜하이머 박사의 끈질긴 캠페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익명의 기사가 실렸다. 20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오펜하이머의 영향력 때문에 비스타 프로젝트가 "핵 보복 전략의 윤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고 주장했다. 기자는 공군부장관 핀레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전쟁 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에 대한책임을 지지 않는 과학자들이 중차대한 국가 과제들을 직접 해결하려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포춘>에실린 에세이를 읽고 나서 데이비드 릴리엔털은 자신의 일기에 "로버트오펜하이머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고약한 기사"라고 적었다."
릴리엔털이 간단하게 요약했듯이, 이 기사는 오펜하이머, 릴리엔털, 코넌트 등이 수소 폭탄의 개발을 저지하려 했지만 "스트라우스가 가까스로 이를 막았다. 그 후 J. R. O. (오펜하이머)는 공군의 전략적 폭격 부대가 국방의 주축이라는 생각을 부정하기 위한 일종의 음모를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밝히려는 취지에서 씌어졌다. 당시에 릴리엔털은알지 못했지만, 이 《포춘> 기사는 찰스 머피(Charles J. V. Murphy)라는 편집자가 쓴 것이었다. 예비역 공군 장교였던 머피는 은밀한 공저자(루이스스트라우스)와 함께 이 기사를 썼다. - P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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