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12월 30일, 사건이 재판에 들어가기도 전에, 오펜하이머는 스트라우스의 사무실에 들러 개인적인 문제로 상의할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변호사들이 와인버그 사건에 대한 수입료로 9,000달러의 청구서를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변호사 비용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많이 나왔고, 그는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28 그는 그러고 나서 스트라우스에게 고등 연구소 이사회 의장 자격으로 연구소가 자신의 소송 비용을 부담하도록 권고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스트라우스는 단호하게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오펜하이머가 코닝 글라스 회사(Corning Glass Company)가 자신의 친구 콘던의 소송 비용을 내 주었다는 것을 지적하자, 스트라우스는 그것은 경우가 다르다고 말했다. 콘던 박사의 고용주는 그를 고용하기 전부터 콘던이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반면 연구소의 이사들은 오펜하이머에게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스트라우스는 차갑게 말했다. 이는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1947년 오펜하이머는 스트라우스에게 자신의 좌익 과거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럼에도 스트라우스는 변호사들이 오펜하이머가 "꽤 부유하고 그 정도는 부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액의 청구서를 보내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 P694
오래전부터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미래에 어둡고 중대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어렴풋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1940년대 말의 어느날, 그는 집착, 분열된 자아, 그리고 실존적 예언에 관한 이야기인 헨리제임스(Henry James)의 단편 「정글 속의 야수(The Beast in the Jungle)」를 집어 들었다. 그 이야기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오펜하이머는 바로 허버트 마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크스의 미망인 앤 윌슨 마크스는 "그는 허브에게 어서 그 책을 읽어 보라고 재촉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제임스 소설의 주인공 존 마처(John Marcher)는 여러 해 전에 만났던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녀는 그가 어떤 예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고 털어놓았던 것을 기억했다. "당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신 안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 희귀하고 이상하며 어쩌면 놀랄 만하고 끔찍한 일이 언젠가 당신에게 일어날 것이고, 당신 뼛속에는 그것에 대한예감과 확신이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당신을 압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처는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아직까지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은 내가 하게 될일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만 하는 일이, 그것으로 내가 명성을 얻거나 존경을 받을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요." 여인이 "그것은 당신에게 단지 고통을 주는 일인가요?"라고 묻자, 마처는 "글쎄요, 말하자면 기다려야만 하는, 대면해야만 하는, 내 인생에 갑자기 퍼져 나가는 것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아마도 더 이상의 의식을 모조리 파괴하고, 나 자신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마도 모든 것을 바꿔 놓고, 나의 세계의 근본을 잘라 버려서 내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겠지요."? 히로시마 이후로 오펜하이머는 언젠가 자신의 "정글 속의 야수"가 나타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게 될 것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추적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정글 속의 야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스트라우스였다. - P697
그러고 나서 그는 핵무기와 관련된 모든 정보는 기밀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것의 본성을 설명해야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이래로 미국은 "소련의 적대감과 점점 커지는 소련의 국력"과 직면해야만 했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시작된 냉전에서 원자력의 역할은 단순한 것이었다. 미국의 정책 수립자들은 "우리가 앞서 나가자. 우리가 적들보다 앞서 나갈 필요가 있다."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화제를 냉전 경쟁으로 돌리면서, 소련은 이미 세 번의 핵실험을실시했으며 상당량의 핵분열 물질을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만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소련이 미국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위치까지 와 있는지에 대해 대강의 추정은 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내생각에 소련은 우리보다 4년 정도 뒤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안심할수 있는 정도의 차이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 단 1개의 효과를 생각해 보았을 때 미소 양측은 이와 같은 신무기들이 훨씬 더 큰 살상력을 가질 수도 있음을 안다고 말했다. 미사일 기술을 넌지시 암시하며, 그는 기술의 발전은 곧 "한층 더 현대적이고, 더 유연하며, 더 요격하기 어려운" 운반 수단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곧 현실화될 것입니다. 나는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핵무기의 개발과 국제 정치 체제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기밀로 묶여 있었다. 그는 "나는 그것에 대해 글을 쓸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다시한번 비밀주의 때문임을 강조했다. "나는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가능성들에 대해 솔직하게 의논했던 모든 책임 있는 사람들,과학자나 정치인, 시민이나 정부 관료 중에 그들이 알게 된 사실에 대해크게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10년 후를 내다보며 "소련이 우리보다 4년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폭탄을 2만 개 갖게 되더라도 그들의 폭탄 2,000개보다진정한 의미에서 전략적 우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말했다. - P699
오펜하이머는 유일한 구제책은 "솔직함"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워싱턴의 공직자들은 이제 미국 국민들에게 적국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핵무기 경쟁에 대해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예리하고 거침없는 연설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핵심적인 사실은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반복해서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특별한 지식의 세례를 받은 브라만 승려처럼 가장 근본적인 비밀을 폭로했다. 그 어떤 나라도 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리라고 예상할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는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두 강대국들이 상대방은 물론이고 인류 문명 전체를 끝장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자국의 파멸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유리병 속에 든 두 마리의전갈과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덧붙여 청중의 간담을서늘하게 했다. 이보다 더 도발적인 연설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새 행정부의 국무부장관 존 포스터 덜러스는 노골적으로 대량 보복에 기반한 국방 정책을지지했다. 하지만 이제 핵 시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과학자가 이 나라국방 정책의 근본 가정들이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핵과학자가 지금까지 엄격하게 비밀에 부쳤던 핵기밀을 공개하고, 핵전쟁의 결과에 대해 솔직하게 토론하•자고 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최고 비밀 취급 인가를 가진 저명한 시민이이 나라의 전쟁 계획을 둘러싼 비밀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발언 내용이 워싱턴 국방 행정가들 사이에 퍼지자 많은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스트라우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 오펜하이머의 연설을 들은 대부분의 변호사들과 투자 은행가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조차 그의 연설문을 읽고 솔직함에 사로잡혔다. 군인 출신인 아이젠하워는 오펜하이머가 두 강대국을 "병 속에 든 두 마리의 전갈에 비유한 것을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군축 패널 보고서를 읽고 나서 그것이 사려 깊고 현명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주요 백악관 보좌관 C. D. 잭슨(C. D. Jackson, 잭슨은 타임 라이프(Time-Life) 사에서 헨리루스(Henry Luce)의 오른팔이었다.)에게 "핵무기는 적극적으로 기습하려는편에 유리하게 작용하네. 미국은 절대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핵무기가 출현하기 전까지 우리는 어떤 나라로부터도 이와 같은 히스테리적 공포를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게."라고 말할 정도로 핵•무기에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임기 후반기에 "이런 식으로 전쟁을 할 수는 없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불도저들로는 길거리에•널릴 시체들을 수습할 수조차 없을 거야."라고 신랄하게 말하며 매파보좌관들의 의견을 힐책하기도 했다. - P702
오펜하이머의 백악관 방문을 예의 주시하던 스트라우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오펜하이머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후 몇 달 동안, 《타임》, 《라이프》, 그리고 《포춘》(모두 헨리 루스가 운영하는 잡지들이었다.)은오펜하이머는 물론이고 과학자들이 국방 정책에 가진 영향력에 맹공을 퍼부었다. 《포춘》 1953년 5월호에는 "수소 폭탄을 둘러싼 은밀한 투쟁. 미국의 군사 전략을 뒤집기 위한 오펜하이머 박사의 끈질긴 캠페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익명의 기사가 실렸다. 20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오펜하이머의 영향력 때문에 비스타 프로젝트가 "핵 보복 전략의 윤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고 주장했다. 기자는 공군부장관 핀레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전쟁 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에 대한책임을 지지 않는 과학자들이 중차대한 국가 과제들을 직접 해결하려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포춘>에실린 에세이를 읽고 나서 데이비드 릴리엔털은 자신의 일기에 "로버트오펜하이머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고약한 기사"라고 적었다." 릴리엔털이 간단하게 요약했듯이, 이 기사는 오펜하이머, 릴리엔털, 코넌트 등이 수소 폭탄의 개발을 저지하려 했지만 "스트라우스가 가까스로 이를 막았다. 그 후 J. R. O. (오펜하이머)는 공군의 전략적 폭격 부대가 국방의 주축이라는 생각을 부정하기 위한 일종의 음모를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밝히려는 취지에서 씌어졌다. 당시에 릴리엔털은알지 못했지만, 이 《포춘> 기사는 찰스 머피(Charles J. V. Murphy)라는 편집자가 쓴 것이었다. 예비역 공군 장교였던 머피는 은밀한 공저자(루이스스트라우스)와 함께 이 기사를 썼다. - P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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