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과 죽음
김근태는 흔히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2011년 말 그가 운명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민주주의자‘로 기억했고, 장례 또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렀다.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자‘란 모든 성원에게 주어지는 보통명사일 텐데도 유독 김근태를 부르는 고유명사처럼 되었다. 그만큼 한국의 민주주의가 파행을 일삼는 불구 상태임을 말해준다. - P24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 날에 그는 교수를 꿈꾸었다. 전두환·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별명처럼, 젊은 날의 그는 행동인이기보다 사색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 투사로 만든 것이다. - P25
김근태가 광신중학교 3학년 때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군사반란은 김근태의 가정에도 다시 한 번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대교체론의 열풍이 전개되고 별안간 정년이 60세로 낮아지면서 아버지가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정년을 4년 앞둔 시점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형과 여고생 누나 그리고 중학생인 김근태까지 학생이 셋이나 되어 그렇잖아도 쪼들리는 살림에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직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심장판막증을 앓게 되고 5년 뒤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경기고 시절 내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타교생이라는 설움도 1년정도는 받아야 했고, 학교 공부도 낯설고 또한 치열해서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반에서 1, 2등 정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얼마 가지 않아 다 떨어졌고 수입이라곤 형이 가정교사를 해서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참다못해 아버지께서나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동대문시장에서 받아다가 각 학교로 다니면서 팔기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분이 심장병으로 편찮으신가운데 비닐가방을 들고 이 학교 저 학교 다니시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 P37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지원으로 부족한 재원을 메우기 위해 쿠데타 직후부터 극비리에 한일회담을 진행했다. 물론 아시아의 반공기지 연대를 통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1961년 6월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일본 수상 이케다의 회담에 이어, 11월의 박정희 - 케네디 회담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문제가 한·미·일3국간에 은밀히 논의되었다. 대일 협상 진행 과정을 비밀에 부쳤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3월에서야 한일회담이 조기 타결되었음을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근태는 시국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내의 ‘순수서클‘이라는 기독교 서클에 가입해 활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야당과 시민, 학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일굴욕 회담을 강행하면서 오히려 반대 측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은 김근태 같은 학구파 대학생마저 시위대열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굴욕 회담 반대 시위는 야당 및 각계 대표 2백여 명이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대정부 경고문을발표하면서 대학가로 번졌다. 1964년 3월 24일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대학생 시위로 점화된 시위의 물결은 4월 17일의 시위, 5월 20일의 ‘민족민주주의장례식‘ 및5월 25일의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로 이어졌다. 6월 2일에는 서울시내 대학생 6천여 명이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광화문까지진출한 데 이어 3일에는 수만 명이 박정권 타도, 매판자본 몰수 등을 외치며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날 저녁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물리력으로 제압한 것이다. - P40
박정희는 국민의 거센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965년 6월 22일한일회담을 타결하고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양국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인 일제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를 받는것으로 매듭 짓고 말았다. 액수도 문제지만 동남아 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의 배상을 받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또 이 협정으로 40해리전관수역을 주장해온 한국의 입장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저인망 어선이 우리 인근 해역으로 몰려와 남획을 일삼게 되면서 우리 바다의 어족자원은 씨가 마르게 되었다. - P42
정부는 6월 15일 서울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강압적으로 학원시위를 봉쇄하려 했지만, 시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김근태는 연일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앞장섰다. 학생운동에서 리더십을발휘한 것이다. 보복이 따랐다. 학교 당국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김근태를 권고처분에 이어 제적이라는 ‘형‘에 처했다. 그리고 한 달 뒤 김근태는 신체검사도 받지 않은 채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때부터 시위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키는 이른바 ‘강제 징집‘을 자행했다. 정부는 교련을 거부한 35개 대학 1만 3천505명의 학생들에게 병무신고를 하게 하고 그중 5천 명에게 집병영장을 발부했다. 우선 데모 주동으로 제적된 학생 중 71명에게 1차로 영장을 발부하고 이들을 징집열차에 태웠다. 박정희 정권은 국방의 의무를 반정부 학생들을 처벌하는 형벌로 악용한 것이다. 김근태는 그 첫 희생자가 되었다. 1967년 10월의 일이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제적을 당하고 논산훈련소로 끌려갔다. - P45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면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 심재권(서울대 상대 3년),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 (서울대 법대 4년), 장기표(서울대 법대 3년), 조영래(사법연수원생), 김근태(서울대 상대 4년) 등을구속했다. 이들은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으 - P49
며, 이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 · 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강제하야, 혁명위원회 구성과 헌법 기능 정지 후 정부 전복 기도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꾸며구속한 것은 날로 격화되어가는 학생 시위를 저지하려는 정치적 책략에서였다. 특히 4.27 대통령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조직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이하 ‘학생연맹‘)을 겨냥한 처사였다. •••••• 김근태는 변형윤 교수 등의 배려로 수배 중에 시험 대신 우편으로리포트를 제출하여, 1972년 2월 가까스로 서울 상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피신 생활 중에 가명으로 취업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들을 ‘위장취업자‘라 하여 회사와 공장을 샅샅이뒤져 찾아낸 뒤 처벌했다. 노동자들을 ‘의식화한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그는 길고 긴 수배생활에 들어갔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간간이 수배로부터 ‘사실상 해제된 상태도 없지 않았으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피신을 하던 그는 피신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는 한 방편으로 일신산업(일신제강의 전신)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는 수출 업무를 맡아 약 11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의 45년 생애(인터뷰 시점-인용자)에 넥타이를 매고 월급봉투를 만져본 유일한 기간이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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