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른험 침팬지들의 이름은 이곳 사육장에서 태어난 놈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서로 다른 머리글자로 시작된다. 각각의 머리글자는 관찰 중에 약칭으로 사용되는데, 이렇게 하면 집단의 구성원을 쉽게 요약할 수 있다. 장성한 세 수놈(Y, L, N), 어린 수놈 한 놈(D), 장성한 암놈 여덟M, G, F, J. K, S, T. P), 어린 암놈 넷 가운데 한 놈은 거의 어른(A), 아직 어린 나머지 셋(O.Z.H).
두 마리의 양자를 제외하고 사육장에서 태어난 새끼들은 모두 어미의 이름과 똑같은 머리글자로 불린다. 어떤 암놈의 첫 자식에게는 이름의 두 번째 문자에 ‘ㅇ‘를 넣고, 두 번째 자식에게는 ‘a‘를 붙인다. 이미(Jimmie)의 두 자식이 요나스(Jonas)와 야키(Jakie)가 되듯이 말이다.
사육장에는 모두 일곱 마리의 새끼가 있는데 그중 가장 어린 두 놈만이 암놈이다. - P121

몸집의 크기와 사회적 서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사회적 서열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지표로 나타나는 특정한 행동 형태에 의해 더욱 확고해진다. 바로 ‘복종적인 인사(submissive greeting)‘라는 행동인데 야생에서뿐만 아니라 아른험에서도 동일하게나타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인사‘란 헐떡이는 것처럼 짧고 빠르게 ‘아하아하‘ 하는 소리를 계속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위가 낮은 놈은 이런 소리를 내면서 ‘인사‘받는 상대를 우러러 보는 포즈를 취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상대방에게 연신 절을 해대는데 이 동작은 ‘굽신거리기‘라고 불린다. 때로는 ‘인사‘하는 녀석이 나뭇잎이나 나무 막대기같은 것을 가져와서 지위가 높은 놈에게 건네기도 하고, 혹은 발이나 목, 가슴 등에 키스를 하기도 한다. 지위가 높은 침팬지는 이런 ‘인사‘를받으면 몸을 곧추세워 키가 커 보이게 하거나 털을 곤두세운다. 이로인해 실제 체구가 같은 놈들끼리도 외양이 명확한 대조를 보인다. 한쪽은 굴욕적으로 굽실거리고, 다른 한쪽은 왕처럼 ‘인사‘를 받는다. 또한어른 수놈들 사이에서 보이는 우열관계는 지위가 높은 놈이 ‘인사하는 놈을 밟거나 그 위를 넘어 다니는 연극적인 동작을 통해서 더욱 강조된다(소위 말하는 으름장이나 허세 부리기). 이때 지위가 낮은 놈은 몸을 웅크리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이같은 곡예 짓은 암놈이 ‘인사‘할 때는 그리 일반적이지 않다. 암놈은 대개 수놈 우위자가 자신의 성기를 검사하고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엉덩이를 내민다.
암놈이 엉덩이를 들어 수놈에게 성기를 보여주는 이 행동이 자세를 ‘프레젠팅(presenting)‘이라 한다. - P129

이렇듯 우열관계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표출된다. 먼저 사회적 영향력, 즉 ‘권력‘이다. 이는 누가 누구를 이기고 누가 집단적인 갈등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지를 반영한다. 특히 침팬지들의 경우 이합집산에 능하기 때문에 이런 대결의 결과가 어떨지는 100퍼센트 예측할 수 없다. 다른 동물에 비해 침팬지들 사이에서는 사회적 서열이 일시적으로 역전되는 사태가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래서 그들의 서열 조작은 종종 ‘유동적이다‘라든지 ‘유연하다‘고 표현된다. 때에 따라서는두세 살쯤 된 어린 침팬지가 어른 암놈이나 수놈을 쫓아버리기도 하고강제로 무언가를 시키는 경우마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놀이에 그치지않고 심각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어린 요나스가 어미의 후광을 업고 프란예의 젖을 뺏어먹은 경우처럼 말이다.
새끼들이 어른에게 ‘인사‘를 받는 경우는 없다. 새끼들은 실제적인 권력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형식적인 우위‘는 갖지 못한다. 다툼의 결과는 때때로 지도자마저 나무 위로 쫓겨갈 정도로 다양하지만 ‘인사‘ 의식은 완전히 예측 가능하다. ‘인사‘는 ‘고정된‘ 우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팬지 사회에서 유일하게 관찰할 수 있는 비상호적인 사회적 행동 양식이다. 간단히 말해, 일정 기간 A가 B에게 ‘인사‘를 하는 경우, 그 기간에는 반대의 상황, 즉 B가 A에게 ‘인사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두드러진 경직성은 일련의 낮은 신음소리를 동반하는 복종적인 인사에서만 나타난다. 침팬지들은 여러 가지방법으로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내가 인용 부호를 붙여 ‘인사‘라고 하는경우는 낮은 신음소리를 동반하는 복종적인 것을 지칭한다. 이에룬은 자신이 1인자였을 때 절대 이같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고, 대신 집단 내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자주 그 ‘인사‘를 받았다. - P132

이 집단에 있는 아홉 마리의 어른 암놈들이 마치 일치 단결한 것처럼 보인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들이 실제로도 만장일치였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이에룬과 라윗 사이의 우위 경쟁은 가끔 암놈들 사이에도 긴장관계를 조성했다. 그럴 때면 마마와 호릴라 같은 서열높은 암놈들이 분명하게 이에룬을 적극 지지했지만 파위스트나 이미같은 다른 암놈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파위스트는 이에룬 편이 되어 라윗에 대항하려던 마마를 공격한 적도 있다. 이후 암놈들의 공동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을 때에는 반대의 경우도 나타났다. 결국 라윗이 최강자로 등극하자 가장 먼저 이에룬을 버리고 새로운 권력자 진영에 합류한 것은 파워스트였다. 초기에 마마는 파위스트의 탈당에 분노해서 파위스트가 공공연하게 라윗의 편을 들 때마다 그녀를 공격했다. 만일 마마가 없었다면 파워스트나 이미 같은 암놈들이 더 빨리 라윗 편에 달라붙었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암놈들이 몇 달에걸쳐서 이에룬을 공동으로 지지한 데에는 자발적인 만장일치보다는 마마의 압도적인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배후에 이런 강력한 지지 집단이 있는 이상, 이에룬은 무서울 것이 전혀 없지 않겠냐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첫날부터 그가 집단적인 지원을 상실할 위험성을 갖고 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마마는 그가 따라오는 것을 몇 차례 거부했고 이것은 이에룬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라윗의 전술에 의한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P143

나는 이에룬이 암놈 집단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떼어놓는 라윗의행위를 ‘떼어놓기 간섭(separating interventions)‘이라고 부른다. 그것의단기적인 효과는 명백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장기적으로 가져올 효과를 알아보려고 그해 말에 통계를 분석해보았다. 특히 과정 자체가 느리게 진행될 때 주관적인 인상은 확실히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우리는 매 5분마다 어느 놈들이 서로 어울려 소집단을 형성하는가, 즉 누가 2미터 이내에 앉아 있는지를 휴대용 테이프에 녹음해왔다. 1976년 여름에 행한 연구에서 우리는 몇백 개의 기록자료를 분석해서 이에룬이 그밖의 침팬지들과 어떤 친소관계에 있었는지를 그려냈다.
라윗이 아직 이에룬에게 주기적으로 ‘인사‘를 하던 1976년 봄, 이에룬은 자기 시간의 30퍼센트 가량을 어른 암놈들의 집단과 무리를 지어 보냈다. 그러나 처음으로 라윗에게 노골적인 도전을 받은 뒤 몇 주동안에는 그 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당시 이에룬이암놈들과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있으려고 했다는 것을 뜻한다. 라윗의태도가 변하기 시작한 사실을 간파한 이에룬은 아마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음을 느꼈는지 자주 암놈들에게로 물러나 있었다. 당시 라윗은 이에룬에게 거의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이에룬이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시기에 암놈 무리라는 안전한 피난처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기록 자료의 분석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우리는 곤란한 사태가 진전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새로운 권력투쟁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의 데이터는 매우 현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윗이 이에룬의 리더십에 좀더 적극적으로 도전해서 수없이 ‘떼어놓기 간섭‘을 자행하고 있던 몇 주 동안, 이에룬이 암놈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차츰 줄어들었다. 급기야 가을이 오자 암놈들과의 접촉 횟수가 뚝 떨어졌고, 암놈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봄철보다 더욱더 줄어들었다. 우리가 조사한 데이터를 통해서 이에룬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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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오브위트혼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는데 독립 투표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떠들썩한 언쟁이 벌어졌다. 애나는 처음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누구나 충분히 납득할 만한 반감(조부모님이 둘 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고, 특히 할아버지는 해방될 당시 아우슈비츠의 수감자였다고한다) 때문에 독립을 반대했었는데 이제 민족주의와 독립이란 꼭 일맥상통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듯했다. 오늘 같이 저녁을 먹은 우리들 중 반은 독립 찬성파였고 나머지 반은 반대파였다. 만일 투표 결과가 오늘 저녁식사 때 모였던 우리처럼 반반으로 나뉜다면 18일 저녁에 개표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 저녁 일어난, 생각지도 못했던 일 중의 하나는 우리가 시에관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다. 우리를 저녁에 초대한 집주인 크리스토퍼는 농부이고, 대학에서는 순수 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시집 쪽에 열정을 갖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거의 평생을 알고 지냈다고 해도 될 만큼 오랜 친구인데도 그 친구가 강수량이나 수확량이외의 것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크리스토퍼가 예이츠의 「방랑자 앵거스의 노래」를 암송했다. 정말 감동적이고 훌륭한 낭송이었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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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은 시인의 감수성으로 인물을 내다보는 독특한 안목을 갖고있다. 1986년부터 간행한 『만인보 12권에서 그는 김근태에 관해 썼다.

김근태

그는 70년대에는 물 위에 떠오르지 않았다
인천 어딘가
후덥지근한 이 공장 저 공장에 스며들어가
자격증 네 개 다섯 개 땄다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장 따위 던져도 좋았다
공장에서
떳떳한 호모 파베르였다

하얀 양초 같은 얼굴
하얀 염소 같은 얼굴
그러나 노란 눈동자 안에는
어떤 동요도 없이
몇십 년을 한 뜻으로 가는 의지
슬쩍 내비쳤다가 숨어버린다

평생 노동자와 일치하리라고 결심한 이래
그는 70년대에는
몇몇 친구들밖에는 몰랐다
무서운 청년시절을 다 바쳐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 떨치는 것
나서는 것
그것이야 뒤로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죽기 직전까지
그 자신의 고문을 의식 속에 기록한
결사적인 또 하나의 그 자신이야 뒤로 미루어도 좋아라 - P65

1983년 9월 30일 저녁 서울 성북구 돈암동 소재 가톨릭상지회관에서는 경찰의 삼엄한 포위 속에서 진보적인 지식청년 59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저녁 7시를 전후하여 150여 명의 회원들이 상지회관 주변에 모였으나 상당수가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어, 59명만 참석할 수 있었다.
대회는 의장으로 내정된 김근태가 ‘민청련 창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막이 올랐다. "고통과 희망을 한 몸에 안고 억압받는 제3세계 민중의 일원으로서, 민족사의 전진에 앞장서야 할 청년으로서 (•••••) 민주·통일을 위한 민주정치 확립, 민주자립경제의 확립,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 체계의 형성, 냉전체제 해소와 핵전쟁 방지"라는 내용의 선언문이었다.
창립선언문(요지)은 다음과 같다.

-민족통일의 대과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된 민주정치는 반드시 확립되어야 한다.
-평등하고 인간적인 생활을 위한 민주자립경제가 이룩되어야 하며, 부정부패 특권경제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한다.
-역동적이고 건강한 민중의 삶을 위하여 자생적이고, 창조적인 문화, 교육체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국제평화와 민족 생존을 위해 냉전체제의 해소와 핵전쟁의 방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 P68

민청련 간부들은 결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두꺼비를 상징으로 내세웠다. 두꺼비는 뱀에게 잡혀먹히면서도 자신의 독성으로 뱀을 죽여 뱃속의 새끼들이 그 뱀을 자양분으로 삼아 알을 깨고 나오게 한다. 자신을 죽여서 새끼를 살리는 두꺼비를 통해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민중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민청련은 깃발을 든 동학농민군에 빙 둘러싸인 두꺼비를 탱크처럼 그린 판화를 제작,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표지에 로고처럼 실었다. - P76

김근태 민청련 의장을 맡으면서 점차 정치 투사가 되어갔다. 온순했던 성격도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안기부 수사국장의술상을 뒤엎을 만큼 담대해졌다. 민주화에 대한 의지도 더욱 강해졌으며 대정부 투쟁 방법에서도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만큼 주도면밀해졌다. 그중 하나가 기관지 발행이었다.
당시 제도언론은 이미 언론의 정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군사정권에 의해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대거 쫓겨난 언론계에는 독재정권에 부역하면서 정관계로 진출하거나, 치부하는 데에만 눈이 먼 신문·방송인들이 많았다.
민청련은 반독재 투쟁의 홍보 전략으로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했다. 정론 부재의 언론 상황에서 대안언론의 기능을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84년 3월 11일 민청련은 "관제언론이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이 어두움을 뚫고 민주화운동의 앞길을 열어가는 횃불로서 대중언론의 깃발을 높이 들 것"을 선언하며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창간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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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삶과 죽음

김근태는 흔히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2011년 말 그가 운명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민주주의자‘로 기억했고, 장례 또한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치렀다.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자‘란 모든 성원에게 주어지는 보통명사일 텐데도 유독 김근태를 부르는 고유명사처럼 되었다. 그만큼 한국의 민주주의가 파행을 일삼는 불구 상태임을 말해준다. - P24

김근태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와 유신 변란이 아니었으면 유능한 대학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 날에 그는 교수를 꿈꾸었다. 전두환·노태우의 헌정 유린과 폭압 체제만 없었으면 온순한 시민운동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의도의 햄릿‘이라는 별명처럼, 젊은 날의 그는 행동인이기보다 사색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신과 5공 체제에서 가장 강력하게 투쟁하고, 가장 심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폭압과 반이성의시대가 햄릿을 민주주의 투사로 만든 것이다. - P25

김근태가 광신중학교 3학년 때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군사반란은 김근태의 가정에도 다시 한 번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세대교체론의 열풍이 전개되고 별안간 정년이 60세로 낮아지면서 아버지가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정년을 4년 앞둔 시점이었다. 대학에 다니는 형과 여고생 누나 그리고 중학생인 김근태까지 학생이 셋이나 되어 그렇잖아도 쪼들리는 살림에 아버지의 갑작스런 실직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심장판막증을 앓게 되고 5년 뒤에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경기고 시절 내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타교생이라는 설움도 1년정도는 받아야 했고, 학교 공부도 낯설고 또한 치열해서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반에서 1, 2등 정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퇴직금은 얼마 가지 않아 다 떨어졌고 수입이라곤 형이 가정교사를 해서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참다못해 아버지께서나서 여자 스타킹과 양말을 동대문시장에서 받아다가 각 학교로 다니면서 팔기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분이 심장병으로 편찮으신가운데 비닐가방을 들고 이 학교 저 학교 다니시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 P37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지원으로 부족한 재원을 메우기 위해 쿠데타 직후부터 극비리에 한일회담을 진행했다. 물론 아시아의 반공기지 연대를 통해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1961년 6월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일본 수상 이케다의 회담에 이어, 11월의 박정희 - 케네디 회담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문제가 한·미·일3국간에 은밀히 논의되었다. 대일 협상 진행 과정을 비밀에 부쳤던 박정희 정권은 1964년 3월에서야 한일회담이 조기 타결되었음을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근태는 시국 문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학내의 ‘순수서클‘이라는 기독교 서클에 가입해 활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야당과 시민, 학생들의 거센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일굴욕 회담을 강행하면서 오히려 반대 측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박정희 정권의 야만성은 김근태 같은 학구파 대학생마저 시위대열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굴욕 회담 반대 시위는 야당 및 각계 대표 2백여 명이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대정부 경고문을발표하면서 대학가로 번졌다.
1964년 3월 24일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대학생 시위로 점화된 시위의 물결은 4월 17일의 시위, 5월 20일의 ‘민족민주주의장례식‘ 및5월 25일의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로 이어졌다. 6월 2일에는 서울시내 대학생 6천여 명이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광화문까지진출한 데 이어 3일에는 수만 명이 박정권 타도, 매판자본 몰수 등을 외치며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이날 저녁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물리력으로 제압한 것이다. - P40

박정희는 국민의 거센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965년 6월 22일한일회담을 타결하고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양국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인 일제강점기의 죄악상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조차 받지 못한 채,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를 받는것으로 매듭 짓고 말았다. 액수도 문제지만 동남아 국가들이 전승국으로서의 배상을 받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또 이 협정으로 40해리전관수역을 주장해온 한국의 입장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저인망 어선이 우리 인근 해역으로 몰려와 남획을 일삼게 되면서 우리 바다의 어족자원은 씨가 마르게 되었다. - P42

정부는 6월 15일 서울대 등 서울의 주요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강압적으로 학원시위를 봉쇄하려 했지만, 시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김근태는 연일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앞장섰다. 학생운동에서 리더십을발휘한 것이다.
보복이 따랐다. 학교 당국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김근태를 권고처분에 이어 제적이라는 ‘형‘에 처했다. 그리고 한 달 뒤 김근태는 신체검사도 받지 않은 채 강제로 군에 끌려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때부터 시위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키는 이른바 ‘강제 징집‘을 자행했다. 정부는 교련을 거부한 35개 대학 1만 3천505명의 학생들에게 병무신고를 하게 하고 그중 5천 명에게 집병영장을 발부했다. 우선 데모 주동으로 제적된 학생 중 71명에게 1차로 영장을 발부하고 이들을 징집열차에 태웠다.
박정희 정권은 국방의 의무를 반정부 학생들을 처벌하는 형벌로 악용한 것이다. 김근태는 그 첫 희생자가 되었다. 1967년 10월의 일이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제적을 당하고 논산훈련소로 끌려갔다. - P45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모의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면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위원장 심재권(서울대 상대 3년), <자유의 종》 발행인 이신범 (서울대 법대 4년),
장기표(서울대 법대 3년), 조영래(사법연수원생), 김근태(서울대 상대 4년) 등을구속했다. 이들은 10월 15일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으 - P49

며, 이들에게 주어진 혐의는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 · 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강제하야, 혁명위원회 구성과 헌법 기능 정지 후 정부 전복 기도를 계획했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꾸며구속한 것은 날로 격화되어가는 학생 시위를 저지하려는 정치적 책략에서였다. 특히 4.27 대통령선거의 부정을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이 조직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이하 ‘학생연맹‘)을 겨냥한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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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변형윤 교수 등의 배려로 수배 중에 시험 대신 우편으로리포트를 제출하여, 1972년 2월 가까스로 서울 상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피신 생활 중에 가명으로 취업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정부는 이들을 ‘위장취업자‘라 하여 회사와 공장을 샅샅이뒤져 찾아낸 뒤 처벌했다. 노동자들을 ‘의식화한다는 이유였다.

이때부터 그는 길고 긴 수배생활에 들어갔다. 물론 그 기간 동안 간간이 수배로부터 ‘사실상 해제된 상태도 없지 않았으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피신을 하던 그는 피신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오는 한 방편으로 일신산업(일신제강의 전신)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그는 수출 업무를 맡아 약 11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의 45년 생애(인터뷰 시점-인용자)에 넥타이를 매고 월급봉투를 만져본 유일한 기간이었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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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 학자들이 각각의 개체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을 비판하는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동물을 쓸데없이 의인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비난한다. 이런 비판에는 개별적 차이에 대한 관심이 종특이적 행동에 대한 연구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하지만 요즘은 각 개체의 사회적 배경이나 삶, 독특한 유전적 자질 중 한 가지 요소라도 없으면 동물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상식이 되었다.
개체의 개별적인 식별을 광범위하게 시도한 최초의 과학자는1950년대에 이 작업을 시작한 일본의 영장류 학자들이었다. 숫자 코드를 사용한 그들의 관찰은 ‘험프리‘라든지 ‘플로‘와 같은 이름을 붙였던제인 구달보다 더 객관적으로 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했다. 숫자코드를 시도했던 관찰자들은 한결같이 그 숫자가 이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영장류에게 부여한 숫자가 마치 이름과 같은 개성으로 자동 연상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P82

중재자로서 마마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집단전체가 니키에게 반항했을 때였다. 니키는 불과 몇 달 전에 우두머리 수놈이 되었기에 그의 난폭한 행위는 아직 집단 구성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마마를 비롯한 모든 침팬지들은 비명을질러대며 니키를 쫓아버렸다. 늘 압도적인 힘을 가진 니키였지만 그때는 그저 한 마리의 공포에 질린 침팬지가 되어 비명을 지르며 나무 위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도피할 수 있는 곳도 모두 차단됐다. 니키가나무 위에서 내려오려고 할 때마다 다른 침팬지들이 다시 나무 위로 쫓아냈다. 15분쯤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다. 마마가 천천히 그 나무 위로올라가더니 니키를 만지고 입맞춤을 했다. 그런 다음 니키를 자기 뒤꽁무니에 붙이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마마가 니키를 데리고 내려온 뒤로는 누구도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니키는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간신히 적대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 P85

그러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마마는 구성원들 중 누구에게도 지원받을 수 없었다. 호릴라조차 입장한 지 10분이 지나지 않아서 이에룬과 우호적인 접촉을 한것이다. 암놈들 사이의 단결이 무너졌다는 것은 마마에 대한 경외심이 급속히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몇 주일뒤 마마는 1인자의 자리를 잃었다. 그때부터 이에룬이 두목이 된 것이다.
일시적으로 마마와 호릴라를 집단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수놈에 대한 상위의 권위 기반을 이루고 있던 강력한 동맹이 파괴됐다. 이 일은내가 아른험에서 연구하기 전에 이뤄졌지만 아직도 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이 간섭 때문에 대해 비난을 받고 있다. 연구진들은 수놈이 지배하기를 원한 것인가? 마마는 훌륭한 지도자가 아니었는가? 등등.
그런 간섭을 시도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야생에서는 장성한 수놈이 암놈보다 우위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곳 아른험 동물원의 수놈들도 인간의 간섭 없이도 결국 지배권을 가졌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특히 억눌린 실내에서 지내야 하는 겨울철에는 아마 정권 탈취에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넓은 야외 사육장이라면 수놈들은 마마나 다른 암놈들과충분한 거리를 유지할 테고, 그런 경우에 그들은 회를 거듭하면서 용기를 갖게 되어 서서히 위협적인 도발행위를 더 자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야외에서는 수놈들이 마마와 단독으로 싸우기 위해 그녀를지지자들로부터 분리시킬 기회도 가졌을 것이다. 장성한 수놈은 암놈보다 강하고 민첩하다.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사태의 진전을 기다릴 수 없었던 이유는 마마의 권력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놈들을 들여오기 전에 침팬지들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부상을 당해 건강이회복될 때까지 얼마 동안 격리시켜야만 했다. 그런 부상은 거의 마마의소행이었다. 물리는 경우는 다반사였고 피가 나거나 때로는 피부가 벗겨질 때도 있었다. 수놈이 암놈보다 온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로 심한 타격을 주는 공격은 드문 편이다. 오히려 수놈들이 공격성을잘 통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구나 수놈들은 암놈들의 싸움에 개입해서 다툼이 크게 번지는 것을 막는다.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부상 숫자로 보자면 이에룬의 권력 쟁취가 맘이 놓이는 일이었다. 권력 교체로특히 낮은 지위의 침팬지들이 덕을 보았다. 마마는 무섭게 공격을 했지만 이에룬은 포악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어느 선 이상을 넘지 않았던것이다.  - P88

단디는 힘이 부족한 만큼 피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독일 사진작가인 피터 페라(Peter Pera)와 함께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는침팬지 사육장에다 약간의 자몽을 감춰두었다. 과일의 일부가 언뜻 보이도록 해서 모래 속에 묻어두었는데 침팬지들은 우리가 뭔가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과일이 가득 든 상자를 가지고 들어와서는 빈 채로 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어 있는 상자를보자마자 흥분해서 ‘후우후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가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미친 듯이 찾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침팬지 모두가 자몽이 숨겨진 장소를 그냥 지나쳤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디 역시 자몽이 숨겨진 장소에서 걸음을 멈추거나 느리게 걷는행위를 일체 하지 않았으며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날 오후 모든 침팬지들이 햇볕 아래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단디는유유히 일어나 꿀벌처럼 뱅뱅 돌아서는 문제의 장소로 갔다. 그는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과일을 파내서 게걸스럽게 먹었다. 만일 단디가 문제의 장소를 비밀로 하지 않았더라면 과일은 다른 놈들에게 빼앗겼을것이다.
이 실험은 침팬지끼리의 정보 전달에 관한 연구 중 에밀 멘젤이 채택한 방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의 연구로부터 유인원들이 서로를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속임수가 이렇게 완벽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단디가 과일이 숨겨진 곳으로 갈 때의 모습이 너무나 태연해서 우리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사진작가는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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