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외에도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파고들려는 여러 미디어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히로시마 폭격 20주년을 맞던 1965년에 NBC는 원자 폭탄사용 결정 (The Decision to Use the Atomic Bomb)」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체트 헌틀리가 해설자를 맡았고, 오펜하이머의 7월 16일트리니티 실험에 대한 회고와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제 나는 죽음이되었다. 세계의 파괴자")을 낭송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터뷰어가존슨 대통령이 소련과 핵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회담을 시작해야 한다는 로버트 케네디 상원 의원의 제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파이프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서 "이미 20년이나 늦었습니다∙∙∙∙∙∙. 그것은 트리니티 바로 다음 날 했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P877

그들의 대화가 철학적인 주제로 넘어가면서 오펜하이머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모건은 그가 그 단어를 거의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이에 동의하며, 그것은 "종교적인 개념을 초월적인 존재에 연결시키지 않으면서 사용할 수 있는 세속적인 장치"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에 ‘윤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싶군요. 나는 윤리적인 질문들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더 명료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내가 폭탄을 만들 때 역시 나를 강하게 지배했지만 말이지요. 나는 이제 내 인생을 묘사하면서 ‘책임감‘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않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선택과 행동, 그리고 선택들이 해소될 수 있는 긴장과 관련된 말입니다. 나는 지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행동에 대한 제약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없이는 의미 있는 책임감도 있을 수 없지요. 우리는 스스로 행하는 행동에 대해서만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지식, 부, 여가는모두 우리가 책임감을 가져야만 하는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 P885

호크네스트 만의 오두막집은 허리케인에 휩쓸려 이제 없어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주민 회관이 세워졌고, 그 부근은 오펜하이머 해변이라고 불리고 있다. - P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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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인사들은 재판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를 미국이 비이성적 공포에 사로잡혀 있음을 확증하는 증거라고 보았다. 크로스먼(R. H. S. Crossman)은 영국의 주요 진보주간지 <뉴 스테이츠맨 앤드 네이션(The New Statesman and Nation)》의 기고문에서 "이와 같은 환경에서 독립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파리에서 슈발리에는 오펜하이머가보낸 청문회 녹취록을 받고 앙드레 말로에게 일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두 사람은 오펜하이머가 심문자에게 보여 준 이상한 소극성에충격을 받았다. 말로는 특히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친구들과 동료들의 정치관에 대한 질문에 스스럼없이 대답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여겼다. 청문회를 통해 그는 밀고자가 되었던 것이다. 말로는 슈발리에에게 "문제는 그가 처음부터 고발인의 논리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애초부터 그들에게 ‘내가 바로 원자 폭탄이오!(Je suis la bombeatomique!)‘라고 말해 주었어야 했어요. 그는 자신이 원자 폭탄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어야 했습니다. 그는 과학자이지 밀고자가 아니라고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 P840

연구소는 1930년대의 배클리처럼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곳은 다양한 연령대와 여러 전공 분야의 총명한 학자들의 집합소였다. 뛰어난 젊은 수학자인 존 내시(John Nash)는 1957년 고등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내시는 하이젠베르크가 1925년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쓴 논문을 읽고 양성자 이론에서 해결되지 않은 모순점들에 대해 베테와 여러 물리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처럼 내시 역시 양성자 이론의 깔끔함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1957년 여름에 그가 자신의 이단적인 생각을 오펜하이머에게 제기하자, 오펜하이머는 성급하게 그의 질문들을 일축했다. 하지만 내시는 고집을 부렸고 오펜하이머는 곧 그와 심각한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내시는 그에게 보낸 사과 편지에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교조적인태도를 가지고 있다."라고 평했다. 
내시는 그해 여름 고등 연구소를 떠났고, 이후 여러 해 동안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다가 결국 얼마간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오펜하이머는 내시가 겪어야 했던 시련을 동정했고, 그가 정신 분열 증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자 연구소로 다시 초청했다. 오펜하이머는 인간 정신의 허약함에 대해 관용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광기와 총명함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인식에 바탕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내시의 의사가 1961년 여름 오펜하이머에게 전화를 걸어 내시의 정신이 여전히 또렷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의사 선생, 그 질문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 P850

이어진 수상 연설에서 오펜하이머는 전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종종 ‘과학의 형제애 정신‘에 대해 쓰고는 했다."는 점을 언급했다. "나는 우리가 이와 같은 과학의 형제애 정신에 항상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공통의 과학적 관심을 갖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인류가 자유와 행복 추구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늘려 가며, 전쟁이라는 중재자 없이도 살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는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작업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종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존슨을 향해 "대통령 각하, 당신이 오늘 이 상을수여하는 데에는 약간의 동정심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좋은 전조가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P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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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가 라오스에서 하던 ‘쉬운‘ 일 수십 가지를 얘기해주는 동안 나는그녀가 자신을 바보라고 했을 때 진짜 전하고 싶었던 바는 전에 할 줄 알던것들이 미국에서는 전혀 써먹을 수 없다는 사실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남은 아이 아홉에게 너무나 훌륭한 엄마가 되어주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마지막 남은 그 능력마저 미국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부정당했다. 그녀는 법적 선고를 받은 아동 학대자였다.
나는 푸아에게 라오스가 그립냐고 물어보았다. 대나무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는 잠시 말없이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했다. 딸은 대답이 궁금한지 엄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푸아는 입을 열었다.
"모자란 음식, 지저분하고 다 떨어진 옷을 떠올리면 생각하고 싶지도않지요. 여긴 대단한 나라예요. 살기 편하고 먹을 것도 많지요. 하지만 말을 못하잖아요. 남한테 기대서 살아야 하고, 복지 수당을 안 주면 굶어 죽어야 할 거고요. 라오스가 그리운 건 마음 편하고 자유로운 거지요. 원하는대로 할 수 있고. 자기 땅 있겠다. 자기 쌀 있겠다. 자기 채소 있겠다. 자기 과일나무 있겠다. 그런 자유가 그립지요. 정말 내 것이 있던 게 그립지요." - P179

미국에선 이 라오스 내전을 "조용한 전쟁"이라 불렀다. 라오스 내전이 난투극(미국이 계속해서 왕국군을 지원하는 사이 소련과 중국은 배후에서 인민군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이 되어버릴 만큼 베트남전쟁이 점점 요란해졌던것이다. 그러나 몽족에겐 결코 조용한 전쟁이 아니었다. 라오스에 투하된 폭탄은 200만 톤이 넘었는데 대부분 미국 비행기가 몽족 거주지에 있는 인민군 부대를 공격하면서 퍼부은 것이었다. 9년 동안 8분에 한 번꼴로 폭격을 위한 출격이 있었을 정도다.
1968년부터 1972년 사이 단지평원 한 곳에 투하된 폭탄의 톤수가 제2차세계대전 동안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 퍼부은 양보다 많았다. 1971년 단지평원 상공을 비행한 T. D. 올먼 기자는 야트막한 언덕 한 곳에도 폭탄구멍이 수백 개가 넘고 평원의 식물이 고엽제 때문에 대부분 고사 상태이며 밤낮으로 소이탄이 터지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단지평원은 지금도 폭탄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터지지 않은 집속탄이 흩어져 있어 농민이 괭이질을 하거나 아이들이 호기심에 건드렸을 때 폭발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몽족 사상자 수가 자꾸 늘어나자 어린 병사들을 징집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고선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잘 훈련된 (그리고 매년 교대를 하는) 북베트남 군인들을 대적할 수 없었다.  - P221

전쟁이 일으킨 가장 극심한 변화는 몽족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자산, 즉 자급자족의 능력을 잃게 만든 것이었다. 밭은 방치되고 가축은 버려졌고산에 사냥감이 사라져버리자 1만 명이 넘는 몽족은 미국이 후원하는 식량투하로 연명해야 했다. 날씨가 좋고 적의 공격이 그리 심하지 않으면 에어 아메리카의 화물기가 낙하산으로 떨어뜨리고 가는 쌀이 하루 50톤이었다. 한 조종사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 메오족 한 세대는 누가 쌀이 하늘에서 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면 깜짝 놀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양식이 해결되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살던 사람들은 양귀비 재배에 더 공을 들이게 되었고 그만큼 아편 거래가 활발해졌다. 몽족의 마을과 임시 거주지 모두 쌀을 공급받은 건 아니었고, 공급받는다해도 일인당 배급량이 하루 500그램 정도였기 때문에 전에 먹는 양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쌀을 받아먹던 일은 지금도 몽족에게 가슴 사무치는 기억이다. 조나스 방아이에게 물어봤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당시의 몽족을 게으르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쌀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몽족은 언제나 자기가 먹을 쌀을 길러왔습니다. 라오스인들은 몽족한테 소금 등의 물자를 주고 쌀을 사 먹곤 했지요. 몽족은 절대 라오스인한테 쌀을 사 먹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시에 평야지대에 내려와 보니 쌀이 충분치 않았어요. (그들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어요.)"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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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스트라우스의 전략은 역효과를 낳았다. 사람들은 녹취록을 읽고는 청문회가 얼마나 종교 재판처럼 진행되었는지, 매카시 시대에 정의가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지는 알게 되었다.
청문회 녹취록이 공개된 지 4년만에 스트라우스는 동료들의 신망을 일을 뿐만 아니라 공직 경력도 끝장나게 될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재판과 그레이 위원회의 평결을 둘러싼 소동은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오펜하이머의 유명세를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만 알려져 있던 그는 이제 박해받는 과학자로 갈릴레오와 같은 반열에서 추앙받게 되었다. 재판 결과에 분노하고 충격받은 로스앨러모스 과학자 282명은 연명으로 오펜하이머를 변호하는 서한을 스트라우스에게 보냈다. 전국적으로 1,100명이 넘는 과학자들과 대학 교수들은 결과에 항의하는 또 다른 청원서에서명했다. 스트라우스는 이에 대응해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가 "어렵지만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대답했다. 23 방송인 에릭 세버레이드(EricSevareid)는 "그(오펜하이머)는 정부의 기밀문서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고, 정부는 아마도 오펜하이머의 머리에 든 비밀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논평했다. 오펜하이머의 친구이자 칼럼니스트인 조 앨솝은 그레이 위원회의 결정에 분노했다. 그는 고든 그레이에게 편지를 보내 "단 한 번의 멍청하고비열한 행동으로 당신은 이 나라가 당신에게 진 빚을 청산해 버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와 그의 동생 스튜어트는 곧 <하퍼스》에 1만 5000단어짜리 에세이를 발표해 스트라우스가 "충격적인 오판"을 저질렀다고호되게 비난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에밀 졸라의 에세이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차용해, 앨솝 형제는 그들의 에세이에 ‘우리는 고발한다!(We Accusel)‘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들은 유려한 언어로 원자력에너지 위원회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뿐만 아니라 "미국식 자유의 고귀한 이름"을 더럽혔다고 주장했다. 두 사건은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오펜하이머와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는 둘 다 부유한 유태인 가족출신이었고, 이들은 배신행위를 했던 혐의를 받고 재판정에 서야만 했다. 앨솝 형제는 오펜하이머 사건이 드레퓌스 사건과 유사한 장기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프랑스의 추악한 세력들은 그들익 부풀어 오른 자존심과 도가 지나친 자신감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손으로 스스로의 권력을앗아가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세력들이오펜하이머를 재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결국 그로 인해 스스로 권력을 내놓게 될 것이다." - P82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몇 년 동안, 과학자들은 새로운 부류의 지식인들로 떠올랐다. 그들은 과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대중 철학자로서의 정당성을 가지고 정책 수립에 전문 지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끌어내려지자 과학자들은 앞으로는 좁은 과학 문제의 전문가로서만 국가에 봉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사회학자 대니얼 벨(DanielBell)이 나중에 언급했듯이, 오펜하이머의 시련은 전후 시기 "과학자들의 구세주로서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체제 내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은, 오펜하이머가 1953년 《포린 어페어즈》의 에세이를 통해 그랬던 것처럼, 정부 정책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정부 자문 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그의 재판은 과학자와 정부 사이의 관계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앞으로 미국 과학자들은 가장 좁은 방식으로만 조국에 기여할수 있을 따름이었다. - P829

오펜하이머의 패배는 또한 미국 진보주의의 패배였다. 진보주의자들은 로젠버그 핵 스파이 사건 도중에 재판정에 서지 않았다. 앨저 히스•는 위증 혐의를 받았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던 혐의는 첩보 활동이었다. 오펜하이머 사건은 달랐다. 스트라우스의 개인적인 의심에도 불구과학자들하고, 오펜하이머가 비밀 정보를 건네주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레이 위원회 역시 이와 같은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수많은 루스벨트 뉴딜주의자들처럼 오펜하이머는 한때 넓은 의미에서 좌파였고, 인민 전선의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수많은 공산당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점차 소련 체제에 대한 미몽에서 깨어났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진보주의적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 그룹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당시 그는 조지 마셜, 딘 애치슨, 그리고 맥조지번디와 같은 저명한 외교계 인사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진보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를 두 팔 벌려 받아들였다. 그의 몰락은 결국 진보주의의 몰락이었고, 진보주의 정치인들은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음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꼭 첩보 활동이 아니더라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더라도, 미국의 핵무기 의존이라는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1954년 오펜하이머에 대한 보안 청문회는 냉전 초기에 미국의 공공 영역이 급속히좁아지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P830

오펜하이머의 패배는 또한 미국 진보주의의 패배였다. 진보주의자들은 로젠버그 핵 스파이 사건 도중에 재판정에 서지 않았다. 앨저 히스는 위증 혐의를 받았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던 혐의는 첩보 활동이었다. 오펜하이머 사건은 달랐다. 스트라우스의 개인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가 비밀 정보를 건네주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레이 위원회 역시 이와 같은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수많은 루스벨트 뉴딜주의자들처럼 오펜하이머는 한때 넓은 의미에서 좌파였고, 인민 전선의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으며, 수많은 공산당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점차 소련 체제에 대한 미몽에서 깨어났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진보주의적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엘리트 그룰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당시 그는 조지 마셜, 딘 애치슨, 그리고 맥조지번디와 같은 저명한 외교계 인사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진보주의자들은 오펜하이머를 두 팔 벌려 받아들였다. 그의 몰락은 결국 진보주의의 몰락이었고, 진보주의 정치인들은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음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꼭 첩보 활동이 아니더라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더라도, 미국의 핵무기 의존이라는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1954년 오펜하이머에 대한 보안 청문회는 냉전 초기에 미국의 공공 영역이 급속히 좁아지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P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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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가을에 워싱턴은 마녀사냥에 사로잡혀 있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사소한 혐의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 누구도, 심지어 대통령조차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953년11월 24일에 매카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애처로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다음날 잭슨은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James Reston)에게 자신은 "매카시가대통령에게 전쟁을 선포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스턴은 이 말을익명의 백악관 관계자의 이야기라며 자신의 칼럼에 인용했다. 한 아이젠하워 보좌관은 기사를 읽고서 잭슨의 발언은 "매카시와 그의 동지들이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라며 비난했다. 잭슨은 매카시의 공격에 아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아연실색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지도력의 부재‘에 대해 걱정하던 느낌들이 이번 주에 기어코 현실화되고 말았다. 나는 두렵다."라고 썼다." 그는 대통령 수석 보좌관 셔먼 애덤스(Sherman Adams)에게 자신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최소한 매카시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보좌관들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란다."라고말했다. - P721

그러나 3월 말이 되자 개리슨은 청문회 위원들이 1주일 동안 오펜하이머에 대한 FBI 조사 파일을 검토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FBI 파일에 포함된 오펜하이머 관련 내용을 파악하는 데도움을 주기 위해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검사측" 변호사가 여기에 참가할 것이었다. 위원들이 1주일 동안이나 파일들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의뢰인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개리슨은 "땅이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그 브리핑에 참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동시에 개리슨은 자신이 최소한 같은 정보를 읽어 볼 수는 있도록 긴급 비상 비밀 취급 인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법무부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비상 인가를 내주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스트라우스의 관점에 따르면 오펜하이머와 그의 변호사에게는 피고인에게 주어지는 그 어떤 "권리도 없었다. 이것은 민간 재판이 아니라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인사 보안 위원회 청문회였다. 스트라우스가 모든 규칙을 결정할 것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의 변호를 방해하기 위해 자신이 하고 있는일들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FBI의 도청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어느 요원에게 "FBI가 프린스턴에서 녹취한 오펜하이머에 대한 도청내용은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대응책을 미리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게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런 책략들은 해럴드 그린의 비위를 건드렸고, 그린은 마침내 스트라우스에게 "이 사건은 조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고발에 가까우며, 나는 이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에서 빠질 수 있도록 요청했다. - P738

갑자기 아인슈타인이 나타났고 오펜하이머는 잠시 멈춰 서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홉슨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차에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후오펜하이머는 차로 돌아와 그녀에게 "아인슈타인은 나에 대한 공격이너무 터무니없어서 그냥 사직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나치스 치하 독일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어야 할 책임은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국에 충실했고, 그 대가가 이것이라면 그역시 조국에 등을 돌려야 할 것이다." 홉슨은 오펜하이머의 반응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아인슈타인은 이해하지 못해." 아인슈타인은 독일이 나치스에 감염되려 할 때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미국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없었다. 흡슨은 나중에 "그는 미국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과학에 대한 것만큼이나 깊은 것이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풀드 홀 사무실로 걸어가면서 오펜하이머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조교에게 "저기 나르(narr, 바보)가 간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물론 미국이 나치스 독일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펜하이머가 도망쳐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즘에 크게 놀랐다. 1951년 초에 그는 자신의 친구인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편지를 써서, 이곳 미국에서 "수년전 독일에서의 재앙이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의 세력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묵종하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정부의 보안 위원회에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유해한 과정 자체에 정당성을부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 P746

키티와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진 태트록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증언을 하는 모욕을 주고 나서, 롭은 오펜하이머에게 그녀의 친구들의 이름을 묻고 그들 중 누가 공산주의자였고 누가 단순 동조자였는지를 질문했다. 그것은 청문회의 목적상 의미 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렇다고전혀 무의미하지도 않았다. 당시는 매카시 광풍이 극에 달했던 1954년이었고, 이전에 공산주의자, 동조자, 좌익 활동가였던 사람들을 의회 청문회 자리에 불러내 이름을 대라고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매카시식 정치게임이었던 것이다. ‘밀고자‘ 또는 가롯 유다를 혐오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것은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들의 노림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인격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롭에게 이름을 댔다. 그는 토머스 애디스 박사가 공산당과 가까웠다고 생각했지만 당원이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슈발리에는동조자였다. 케네스 메이, 존 피트먼, 오브리 그로스만, 그리고 이디스안스타인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얼마나 굴욕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고 있었고, 롭에게 빈정대듯이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라고 물었다. 흔히 그렇듯이 그들은 대개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톱의 가차 없는 심문에 오펜하이머는 마침내 큰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하지 않고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한 기자에게 "군인이 전투 중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회고했다.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지거나 곧 벌어질 것이어서 다음 행동밖에는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싸움할 때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싸움이었어요. 나는 내 자신을 느낄 틈조차 없었습니다."
수년 후, 개리슨은 이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오펜하이머의 심리 상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에게는 뭔가 쫓기는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당시의 분위기에 압도되긴했지만 오펜하이머는 특히나 그랬습니다." - P774

 그가 묻고 싶었던것은, 당신 남편이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정리한 것은 언제였는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모릅니다, 그레이 씨. 다만 우리는 아직도 공산주의자라고 알려진 사람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이것은 물론 슈발리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정하는 것에 놀란 롭은 "뭐라구요?"라고 되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계속해서 공산당과 "확실히 관계를 끊게된 과정"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다. 키티는 현명하게 대답했다. "사람에따라 다르겠지요, 그레이 씨. 어떤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관계를 끊고, 그에 대한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천천히 단계적으로 멀어집니다. 나는 공산당을 떠난 것이지, 나의 과거나 친구들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공산당을 떠난 후에도 공산주의자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 P809

그는 그레이 위원회에게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낳을 수 있는 커다란 오해"를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43년 슈발리에 사건은 당시의 상황에서 판단해야만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른바 우리의 용감한 연합국이었습니다.
러시아인과 러시아에 우호적인 인물들에 대한 태도는 현재와는 매우다른 것이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성품과 충성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개리슨은 위원들에게 "당신들은 이 사람과 이제 단 3주를 함께 보냈을 따름입니다. 당신들은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그와 같이 생활해 보지 않았습니다."
개리슨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본 청문회에서는 오펜하이머 박사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 정부 역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개리슨은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걱정"에대해 말하며 은근히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트루먼과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기에 창궐했던 반공 히스테리로 인해 미국의 국가 안보 기구들은 이제 "공산주의라는 단일한 세력이 훌륭한 재능을가진 사람들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민들을 먹어 치워서는 안 됩니다." 개리슨은 그레이 위원회가 "사람 전체를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최종 변론을 마쳤다. - P811

결국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는 만료되기 하루 전에 취소되었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들의 평결을 읽고 나서 릴리엔털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 그들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로버트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그들은 현명한 공직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넌더리가 난 나머지 앞으로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를 "원자력박멸 음모(Atomic Extermination Conspiracy)"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빈정거렸다.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가 취소되기 전인 6월, 스트라우스는 청문회 녹취록 사본이 기차에서 도난당했다며 (그것은 곧 뉴욕 펜실베이니아역 분실물 센터에서 발견되었다.) 타자로 친 3,000쪽짜리 녹취록을 정부 인쇄국(Government Printing Office)을 통해 출판해야 한다고 동료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들을 설득했다. 이것은 증인들의 증언을 비밀로 유지하겠다는 그레이 위원회의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자신이 홍보 전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판단해 그런 우려 정도는무시해 버렸다. - P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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