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이해하기 위하여

1
청탁을 해온 편집자에게 이미 밝힌 바대로, 나는 이 글의 필자로적합하지 않다. 나더러 박부길 씨를 이야기하라니•••••. 솔직히 나는 많이 망설였다. 이유는 명확하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그럴 경우 불가피하게 끼어들 수밖에 없는 뜬구름 잡는 식의 변죽이나 애매모호한 수사들은 대개의 경우 진실을 왜곡하게 마련이다. 그런 일은 작가를 위해서나 그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해서나 해서는 안 될 일이다. - P13

그 호기심은 거의 직업적인 관심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박부길 씨를 소설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덧붙이자면, 한 작가의 성장 배경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이 그의 문학과 삶에 대해 깊은 이해를 확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썩 유익한 일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읽은 그의 소설들과 그에 대한 기사들과 두 번의 인터뷰 내용을 두루 섭렵해 가면서, 가장 자유로운 방식으로 우선 그의 유년기를 재구성해 볼 생각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며, 충실한 연대기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의식 안쪽에 단단하게 붙어 그의 삶과 문학을 지배해 온 질기고 억센 몇 개의 큰 흉터가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자신이 살아 낸 이제까지의 삶의 흔적들을 피상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표정이다. 표정에 층은 있지만, 흔적들은 질서를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몸을 섞고 있다. - P18

 그 책들을 어린 박부길은 뜻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무작정읽어 치운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무의지적인 것이었고, 책을 읽는다는 분명한 자각도 없는 상태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한 번도 어린아이다운 적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지긋지긋한 그는 내게 그 표현을 썼다. 그 나이에 벌써 현실에 대해 엄청나게 비극적인 상상을 하곤 했노라는 것이다)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상처받은 그의 자존심은 현실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기를 꿈꿨다. 요컨대 그의 독서에 몰두는, 책속에서 낙원을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현실에 눈감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책들은 일찍부터 마취제였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어 책을 쓰고 있는 지금은 자신의 글 만들기가 마취제인 셈이라고, 그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나지막하게고백했다. - P22

모든 금령이 신성한 것은, 그것들이 징벌의 공포로 포장되어 있기때문이다. 두려움을 유발하지 않는 법은 신성으로부터 멀다. 신성은어디 있는가. 두려움 속에 있다. 아니, 두려움에 대한 예감 속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왜 두려운가. 금지된 것은 사람을 끈다. 그것이 이유이다. 금령은 권고가 아니라 유혹이다.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금령이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금령이 있기 때문에범죄를 저지른다. 사람이 에덴의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야훼가금령을 준 것이 아니다. 야훼가 금령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따먹었다. 금령이 없으면 범함도 없다.
큰아버지가 뒤채의 ‘차꼬를 찬 남자‘ 대신 ‘감나무‘를 금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런 성찰 때문은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금령은 포괄적인 것이었다. 감을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감나무가 서 있는 곳에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제 분명해진셈인데, 금지된 것은 감나무가 아니라 감나무가 서 있는 땅이었다. 감나무는 단지 하나의 표지에 불과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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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와서 방해됐어?"
리스베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욕조 안에 있었어요."
"응 그래 보였어. 잠시 같이 있어줄까?"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욕조 안에 같이 들어가겠다는 게 아냐. 베이글을 좀 가져왔다고."
그가 봉지 하나를 보이며 말했다. "에스프레소용 원두도 좀 사왔어. 주방에 쥐라 엥프레사 X7을 갖췄으면 적어도 사용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녀는 눈썹을 움찔 들어올렸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실망인지, 혹은 안도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냥 같이 있기만 하는 거죠?"
"그냥 같이 있기만 하는 거야." 그가 확실히 말했다. "난 좋은 친구를 방문한 다른 좋은 친구일 뿐이야. 환영해야 할 손님이라고."
리스베트는 잠시 망설였다. 지난 이 년간 그녀는 미카엘을 최대한 멀리해왔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나 실제 삶에서나 마치 신발 밑에붙은 껌처럼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인터넷상에선 문제될 게 없었다. 거기서 그는 전기와 텍스트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문밖에 펼쳐진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매력적인 빌어먹을 남자였다. 그는 그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비밀을 다 알고 있듯이.
리스베트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음을 확인했다. 적어도 그런 감정들은.
올해 내내 그는 진정으로 그녀의 친구였다.
그녀는 그를 신뢰했다. 어쩌면 자신이 애써 피하려는 사람이 한편으론 자신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건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행동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를 봐도 더이상 아프지 않았다.
리스베트는 문을 열어 다시 한번 자신의 삶 안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밀레니엄 3권 끝. - P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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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말, 트루먼이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한 루이스 스트라우스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고, 로런스와 오펜하이머는 그를맞으러 공항에 나갔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관련 사안을 논의하기 전에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와 잠시 개인적으로 의논할 것이 있다며그를 옆으로 데리고 갔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를 전쟁 말기에 한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콘크리트 활주로에 서서 스트라우스는 자신이 뉴저지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의 이사직을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그는 연구소의 새로운 소장을 선출하기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위원회는 다섯 명의 후보들가운데 오펜하이머를 가장 선호했고, 이사회는 오펜하이머에게 제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관심을 보였지만, 생각할 시간이필요하다고 말했다. 약 한 달 후인 1947년 1월, 오펜하이머는 워싱턴으로 가 스트라우스와 아침을 먹으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오펜하이머는 키티에게 전화를 걸어 아직 결심을 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은"생각 같다고 말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가 연구소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대단히 매력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었다. 오피는 고등 연구소의 "과학 관련 학과들에 과학자가 한 명도 없으며, 자신은 그것을 곧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고등 연구소는 아인슈타인의 지적 피난처로 가장 유명했다. 스트라우스가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소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집중하려는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조용한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편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깊이있는 학술연구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P547

스트라우스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첫인상은 FBI 도청 기록에서 볼 수있다. "스트라우스에 대해서는,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는 훌륭한 교양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일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릴리엔털은 오펜하이머에게 자신은 스트라우스가 "활발한 성격을 가졌고 확실히 보수적이지만 전체적으로 그리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평가는 스트라우스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는 병적인 야심가였고, 집요한 데다 대단히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이로인해 그는 대단히 위험한 정적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스트라우스의 동료였던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한 위원은 그에 대해 "당신이 루이스와 무엇인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처음에 당신이 바보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계속해서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당신이 반역자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포춘》은 그를 "올빼미 상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성마르고, 지적 오만함을 가졌으며, 대단한 싸움꾼"이라고 묘사했다고 밝혔다. 수년간 스트라우스는 맨해튼의 사원 에마누엘의 회장으로 일했는데, 이곳은 마침 펠릭스 애들러가 1876년 윤리 문화 협회를 설립하기 위해 떠난 곳이기도 했다. 유태 혈통과 남부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스트라우스는자신의 성을 "스트로스(Straws)"로 발음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대단히 독선적이던 그는 다른 사람의 실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기억했고, 그것을 "기록용" 파일에 세심하게 기록했다. 그는 앨솝 형제가 썼듯이 "남에게 생색을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 P550

프린스턴의 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오펜하이머는 스트라우스에게 "지금 나의 평판을 떨어뜨릴 만한 정보가 떠돌고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당시 스트라우스는 경고를 무시했다. 하지만 새로 통과된 맥마혼법에 의해, FBI는 모든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직원의 비밀 취급 인가를재검토하고 있었고 전 위원들은 오펜하이머의 파일을 읽어야만 했다. 후버의 어느 보좌관이 말했듯이, 이는 FBI가 "더 이상 조심스러워야 할필요 없이 오펜하이머에 대한 공개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진행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요원들은 오펜하이머의 뒤를 밟았고, 스프라울과 로런스를 포함한 10여 명의 지인들과 인터뷰 조사를 벌였다. 모두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스프라울은 한 요원에게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과거 좌익 활동에 대해 "창피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로런스는 오펜하이머가 "과거에 뾰루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면역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오펜하이머의 신뢰성을 보증하는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우스와 다른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위원들은 곧 FBI로부터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1947년 2월 말, 후버는 백악관으로 12쪽 분량의 오펜하이머 파일 요약본을 보냈는데, 이 문서는 그의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었다. - P555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가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 아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연구소에 대한 그의 강연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과학 자체의 특성과 결과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불과 몇명만이 그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노이만은 자신의 분야만큼이나 고대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처럼 시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이 연구소를 인간의 삶이 처해 있는상황들을 총체적이고 다면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진 과학자, 사회 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싶어 했다. 이는 그가청년 시절부터 동등하게 관심을 기울여 왔던 과학과 인문학을 화합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등 연구소는 로스앨러모스의 정반대이자 심리적 해독제였다. 로스앨러모스가 스파르타식이었다면, 고등 연구소는 전원적이고 편안했다. 특히 종신 교수진에게 그곳은 플라톤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언젠가 "이곳은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고 해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도 변명을 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외부인들에게 연구소는 괴짜들을 위한 보호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 P571

오펜하이머는 "기하학과 중력을 통합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창안한 사람의 "남다른 독창성"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인슈타인이 "창의적인 작업에 오래된 전통 요소들을 적용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이 "전통"에발목을 잡혔다고 강하게 믿었다.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에서 지내는 동안 양자 이론이 중대한 모순으로 인해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보다 더 솜씨 있게 예기치 못한 적절한 사례를 생각해 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중대한 모순은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모순을 해소하는 방법은 아인슈타인 자신의 이전업적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 이론에서 불편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바로 불확정성이란 개념이었다. 하지만 보어의 통찰력에 영감을 준 것은 바로 상대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이를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보어와 고상하지만 치열하게 투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만들었지만 증오하는 이론과 싸웠다. 과학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 P575

프랭크에 대해 걱정했지만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유명세가 동생의 좌익 과거사를 덮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1948년 11월 그는<타임> 표지 모델로 선정되었다. <타임>의 편집자들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원자력 시대의 창시자인 오펜하이머가 "당대의 진정한 영응"이라고 추켜세웠다. <타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급진주의에 경도되었던 과거에 대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1936년까지 자신은 "확실히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라고 설명했다.그러고 나서 그는 실업자가 된 젊은 물리학자들이 "지쳐 가는 것"을, 그리고 독일에 있던 자신의 친지들이 나치스 치하를 벗어나기 위해 피난을 가야 하는 것을 보며 눈을 뜨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어느 날 나는정치가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좌익이 되었다. 나는교원 노조에 가입했고, 여러 공산주의자 친구를 사귀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 시절이나 고등학교 고학년 때 하는 일이었다.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는 이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지만, 나는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너무 늦게 시작한 것이 부끄럽다. 당시 내가 믿었던 대부분의 가치들이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허튼 소리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내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와 같은 교육 과정이 없었다면, 나는 로스앨러모스에서 나의 업무를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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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는 입구 근처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던 미카엘이 삼십대 중반의 어떤 남자와 부딪힐 뻔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에리카가 보기에 그 낯선 사내는 깜짝 놀란눈으로 미카엘을 응시하는 듯했다. 혹시 미카엘을 아는 사람인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다음 순간,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에리카는 처음에 자신이 본 광경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내그가 미카엘을 향해 총을 겨눴을 때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미카엘은 생각할 겨를 없이 반응했다. 왼손을 불쑥 내밀어 총부리를 붙잡아 천장을 향해 올렸다. 찰나의 순간, 시커먼 총구가 그의 얼굴 앞을 홱 지나갔다.
이어 기관단총 소리가 좁은 식당 안을 가득 채우며 귀를 먹먹하게만들었다. 미로 니콜리치가 총알을 열 발 넘게 갈겨대는 사이에 박살난 천장에서 석회와 유럿조각이 머리 위로 비처럼 떨어져내렸다. 그짧은 순간에 미카엘은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내 미로 니콜리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미카엘의 손에서총을 빼냈다. 순간적으로 당한 미카엘은 총부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위험에 처했다는 걸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곧장 괴한을 향해 돌진했다. 만일 이때 몸을 숙였거나 뒷걸음쳤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미카엘은 다시 한번 총부리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온몸에 체중을 실어 괴한을 벽으로밀어붙였다. 다시 총알 예닐곱 발이 발사되는 소리를 들으며 총부리를 바닥으로 돌리기 위해 죽기 살기로 잡아내렸다. - P694

이내 미카엘은 깨달았다. 지금 리스베트는 분장을 하고 나온 것이있다. 평상시 그녀는 옷을 대충 입었고 별다른 취향도 없어 보였다. 미카엘은 그녀가 괴상한 옷차림을 하는 건 유행을 따르기 위해서가아니라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자신의 개인적 영역이 하나의 적대적 지대라는 걸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미카엘에겐 그녀의 가죽재킷에 박힌 뾰족한 징들이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일종의 방어기제로 느껴졌었다. 그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보내는신호였다. 날 만지려고 하지 마. 아플 테니까. 그런데 지금 그녀는 법정에 등장하면서 그런 옷차림을 한층 더 강조했다. 얼마나 강렬한지 과장된 패러디로 보일 정도였다.
미카엘은 불현듯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안니카가 세운 변호 전략의 일부였다.
만일 리스베트가 단정히 빗은 머리에 얌전한 블라우스와 깔끔한 단화 차림으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분명 법정에 거짓말을 팔러 나온 속 보이는 사기꾼으로 비춰질 것이다. 이건 신뢰성의 문제였다. 지금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심지어는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려고 과장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아닌누군가인 척하려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을 부끄러워할 생각도, 어떤쇼를 할 생각도 없어, 이것이 그녀가 법정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법정이 이런 모습을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가 상관할바가 아니었다. 사회는 여러 가지로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고, 검사는결국 그녀를 이곳까지 끌고 들어왔다. 리스베트는 이런 모습으로 등장함으로써 자신은 검사가 기소한 내용들을 모두 엿 같은 소리로 여기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분명히 보여준 셈이었다. - P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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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여러 왕국에서는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상업을 제한했다. 경계에 성을 쌓는 것은 그런 교역을 제한하는 방법이었으며, 나라의 부를 그 성벽 안에서 온전하게 지키려는 시도였다. 그런 행정가들이 보기에 교역용 물자를 내놓는다는 것은 이웃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가급적 교역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했다. 상인보다 높은 지위는 이제 정부 관리밖에 없었다. 대신 중국 전통사회에서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던 유교 학자들을 아홉 번째 지위로 낮추었다.
거지보다는 높지만 매춘부보다는 하나 낮은 등급이었다.
칭기스칸 시대 이후 몽골인은 한 곳에서는 흔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물품이 다른 곳에서는 이색적인 것으로 여겨져 잘 팔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3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상인들은 확대되어가는 몽골의교역망 어딘가에서 팔릴 만한 새로운 상품 또는 새로운 방법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오래된 상품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염료나 종이나 약에서부터 피스타치오나 폭죽이나 독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품이 거래될 수 있었다. - P323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독특한 주거단지를 건설했다. 따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장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인이 아닌 사람들은몽골어를 배우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몽골은 대규모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몽골 평화 기간에도 똑같은 관행을 유지하여 유목민 사회의 이동 원칙을 생활과 문화가 매우 보수적인 지역에 적용했다. 몽골군은 통역, 서기, 의사, 점성술사, 수학자를 모아들여 악사, 요리사, 금 세공장이, 곡예사, 화가를 분배하듯이 황금가족에게 분배했다. 행정당국은 이 지식 노동자들을 다른 장인이나 동물이나 수송 물자들과 함께 긴 캐러밴용 길이나 바다를 통해 왕실 가족이 지배하는 각 지역으로 보냈다.
전통적인 제국은 한 도시에 부를 축적했다. 모든 길은 수도로 통했고, 늘 가장 좋은 것은 수도에 이르렀다. 한 도시가 제국 전체를 지배하다 보니 로마나 바빌론 같은 이름은 제국 자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제국내에서 물자와 사람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 P325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 P333

상당히 그럴듯한, 그러나 확인할 수는 없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병은 중국 남부에서 발생했고 몽골 병사들이 북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병의 세균은 벼룩 속에 살며, 벼룩은 쥐의 몸을 타고 남쪽에서 오는 식량이나 다른 공물과 함께 옮겨다녔다. 벼룩은 보통 사람을 감염시키지않고 말 냄새를 싫어했지만, 곡식 자루나 사람의 옷 같은 주변에서 살다가 사람에게 뛰어들기도 했다. 감염된 벼룩은 고비 사막에 이르자 마못의 굴이나 광범위한 설치류 서식지에서 우호적인 새로운 주거환경을 찾아내 그곳에서 죽 살았다. 이 병은 몽골의 광활한 초원지대에 도사리고있었지만,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에 큰 위험은 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이 병으로 매년 여름마다 몇 사람이 죽지만, 소수의 주민이 많은 말과 함께 살아가고 몽골인 거주지에는 벼룩이 없으므로 전염병으로 커지지는 않는다. 반대로 중국의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 그리고 훗날다른 도시의 수많은 쥐는 이 세균에게 완벽한 거주환경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쥐가 오랫동안 인간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살아온 동물이라 이병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331년 연대기 기록자는 허베이성(河北省) 주민의 90퍼센트가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은 이 병 때문에 인구가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13세기 초에 이 나라에는 1억 2300만 명 정도가 살았는데, 14세기 말에는 인구가 6500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면서 병도 따라갔다. 이런 식으로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교역기지 근처 무덤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1338년에 페스트는 중국에서 톈산산맥을넘어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 근처의 기독교 상인 공동체를 쓸어버렸다. 페스트는 교역으로 옮겨지는 전염병이었다.  - P343

몽골 왕가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자신이 통치하는 주민 내의 특정한 종교분파를 따르게 되자, 왕실 지파들 사이의 불화는 더 심해졌다. 러시아의 킵착 칸국는 무슬림이 되자 이집트와 손을 잡고 아직 이슬람으로개종하지 않았던 몽골의 일 칸국에 대항했다. 일 칸국의 몽골 통치자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그때그때 정치적 판단에 따라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시아파에 가장 헌신한 올제이투의 치세에는 불교도나 유대인 같은 소수파 집단들이 심한 박해를 받았다. 칭기스 칸제국의 보편적 원리는 바람의 재처럼 사라졌다.
무슬림이 된 중동의 몽골인은 쿠빌라이 칸의 예를 따랐다고 볼 수도있다. 쿠빌라이도 중국에서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권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 쿠빌라이 칸의 후계자들은 그의 교활한 천재성을 따르기는커녕 이해하지도 못했다. 몽골 당국은 더 중국화하기는커녕 탄압을 강화하여 고립을 자초했다. 혼돈의 시기에 조정을 구성하던 몽골인 몇 명은 꿈에 칭기스 칸이 나타나 중국인을 더 탄압하기위한 엄중한 새로운 조치들을 여러 가지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조정의 관리들은 중국인에게 자유를 너무 많이 주었고, 몽골인이 지나치게 중국 생활에 동화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중국 문화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대신 자신들의 이질적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언어, 종교, 문화, 중국인과의 혼인 관계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몽골 당국은 편집증에 사로잡힌 듯 중국인으로부터 모든 무기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철로된 농기구까지 빼앗고, 칼의 사용도 제한했다. 그들은 중국인이 말을 타는 것을 금했고, 비밀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중국의 잡극이나 전통적인 만담 공연도 금지했고, 더불어 다른 공적, 사적 집회도 금지했다. 이런 식으로 극단적인 탄압을 하자 중국 신민은 불만이 늘었으며, 몽골 통치자들을 더 불신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몽골인이 중국 아이들을 집단 학살했다거나 특별한 성을 가진 중국인을 모두 죽일 계획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몽골인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여 특혜를 주었다.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중국인은 몽골 통치자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몽골의 제국 통치를 지원하는 외국인에게 증오심을 분출하곤 했다. 특히 티베트 불교 승려가 증오의 대상이었다.  - P351

몽골의 통치가 끝난 뒤 승리를 거둔 명 왕조의 통치자들은 중국인이 몽골 의복을 입고, 자식들에게 몽골 이름을 지어주는 등 외래의 관습을따르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들은 정부와 사회생활에서중국식 원칙들을 살려낼 목적으로 몽골의 정책과 제도 가운데 많은 부분을 조직적으로 철폐해나갔다. 명의 통치자들은 몽골이 중국에 정착하도록 권유했던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상인들을 쫓아냈다. 또 그렇지 않아도 힘을 잃어가던 지폐를 완전히 없애고 금속화폐로 돌아감으로써 몽골이 세워놓았던 상업체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몽골이후원했던 티베트의 라마교 계열의 불교도 배격하여 그 자리에 전통적인도교와 유교의 사상과 전통을 집어넣었다. 새로운 통치자들은 몽골의교역체계를 소생시키려다 실패하자 대양을 다니던 배들을 태우고, 외국인의 중국 여행을 금지하고, 외국인은 못 들어오고 중국인은 못 나가게할 목적으로 국민 총생산의 큰 부분을 투여하여 육중한 새 성벽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 살던 수천 명의 중국인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명은 새로운 몽골 침략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중국식 도시라할 수 있는 남쪽의 난징(南京)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이미 통일중국의통치는 북부의 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고, 주민 다수의 태도와 행동방식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다. 명은 결국 옛 몽골의 수도 칸발릭으로 돌아갔다. 대신 명은 몽골의 외양을 제거하여 도시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금단의 도시"를 세우려 한것이다. 짧은 기간 예외는 있었지만, 그후 이 수도는 이름만 바뀌었을뿐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베이징은 여전히 중국의 수도 역할을하고 있으며, 현재의 중국은 몽골 치하의 국경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있다. - P353

1964년 4월 소련의 기관지 프라우다(Pravda)는 "피에 굶주린 야만인 칭기스 칸을 역사에서 진보적인 인물로 떠받들려 하는" 시도를 엄중 경고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인이 몽골의 침략 덕분에 "더 높은 문화를 알게 될 기회를 얻었으니 몽골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몽골인은 소련이 그들의 영웅을 공격한 것에 속으로는 불쾌했는지 몰라도, 어쨌든 소련에 끝까지 충성했다.
이후 몽골 박해 과정에서 언어학자, 역사학자. 고고학자를 비롯해칭기스 칸이나 몽골 제국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주제를 전공하는학자들 한 세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칭기스 칸이 태어나고 나서 800년이 지난 1960년대 무렵 공산주의자들이 보관하던 술데, 즉 영기(靈旗)가 사라졌다. 칭기스 칸이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를 때 들고 다니던 영기였다. 이 숙청의 시대 이후로 칭기스 칸의 술데는 보이지도 않았고 사라진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학자들 가운데는 당국이 칭기스칸의 영혼을 완전히 파괴하려고 파괴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술데가 어느 지하실이나 폐쇄된 방에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다가, 언젠가 다시 나타나 몽골인을 이끌어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다. - P371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범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몽골 민족의 어머니가 공격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그녀를 빼앗기자 어린 테무진은 자신의 젊은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되찾으려 했다. 테무진은 결국 그녀를 구했으며, 이후 평생 동안 자신의 민족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싸웠다. 이를 위해 쉬지 않고외부인들을 공격하며 돌아다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테무진은 세계를 바꾸었고 민족을 창조했다.
사람들은 냄새나는 말똥더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코를 훌쩍였고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어스름의 침침해지는 황금 빛 속에서 800년의 간격이 녹아 사라졌다. 오래 전 무시무시한 새벽에 그들의 조상이 느끼던 고통이 우리 주위의 연기에 섞여 떠돌고 있었다. 조그만 돌무더기에서 향이 타는 동안 각 사람은 저마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더니, 모자를벗고 돌 앞에 무릎을 꿇은 다음 언 땅에 이마를 댔다. 이곳이 성스러운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돌무더기를 세 바퀴돌며 공중에 보드카를 뿌렸다.
모두 개인적인 물품을 하나씩 꺼내 돌무더기 위에 남겼다. 각설탕한 조각, 성냥 몇 개, 바스락거리는 종이에 싸인 사탕, 찻잎 한 조각. 마치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납치자들의 손에 이끌려 말에 올라탄 채 미지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겁먹은 부르테에게 기운을 북돋워주고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을 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입을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그들의 어머니에게, 다 괜찮다고, 그녀와 그들, 즉 그녀의 후손은 모든 일을 견디며 800년간 생명을 이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사실 그들은 여전히 ‘황금빛‘의 자식들이며, 이리와 암사슴의 후손이다. 몽골의 ‘영원한 푸른 하늘‘의 성긴 구름 사이로 칭기스칸의 영기는 지금도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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