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빅터스 - 우리가 꿈꾸는 기적
존 칼린 지음, 나선숙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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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저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남아공의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에 대해 뉴스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들어왔으면서도, 정작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늦었지만 존 칼린의 르포르타주 <인빅터스>를 통해 남아공 백인들이 ‘합법적으로’ 다수의 흑인을 억압하고, 갖은 폭력과 만행을 자행하는 근간이 되었던 악명 높은 아프리칸스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는데 앞장선 넬슨 만델라에 대해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조국 남아공과 그들이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럭비 경기(비록 백인들의 스포츠지만!)에 대해 알게 됐다.

나의 오해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동안 남아공은 영국계 백인이 지배해 왔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백인 우월주의를 악착같이 주장했던 이들은 바로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인 아프리카너(혹은 보어인)라는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는 책이었다.

<인빅터스>는 넬슨 만델라의 인종차별정책 차별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과 훗날 그가 남아공의 대통령이 되어서 평화와 화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후원을 했던 아프리카너들이 그야말로 신줏단지 모시듯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럭비 경기에 초점을 맞춘다. 뉴질랜드와의 럭비 월드컵 경기가 열리던 1995년의 시점에서 존 칼린은 플래시백 구성으로 남아공 흑인투쟁의 역사를 잔잔하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존 칼린은 먼저 럭비가 남아공의 지배계급이었던 아프리카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독자에게 알려준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건너와 항구적인 생활터전을 마련했던 이민자들에게 조금은 거친 럭비야말로 그네들의 삶을 대변하는 스포츠 중의 스포츠였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종차별정책으로 그들과 대척점에 섰던 흑인들에게 럭비와 대표팀인 스프링복스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27년간의 기나긴 투옥생활을 통해 아프리카너를 이해하게 된 정치적 인간 만델라는 럭비라는 스포츠가 흑백대결로 갈라진 남아공 통합의 핵심적 요소가 되리라는 것을 간파했다.

<인빅터스>는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려서,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찾기 위한 남아공 흑인투쟁의 역사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1980년대 후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끝없는 비난과 자국 내 흑인들의 투쟁에 직면하게 된 P.W. 보타가 이끄는 남아공 정부는 마지막 수단으로 그동안 테러조직으로 간주해왔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의장이자 상징으로 모든 남아공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넬슨 만델라와 비밀협상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남아공의 백인들이 가진 생래의 불안감, 다시 말해 만약 1인 1투표제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국민투표를 했을 경우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정권이 탄생하게 되리라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기득권을 잃을 수도, 그동안 탄압받아온 흑인들에게 분노와 증오에 찬 복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만델라는 정확하게 간파해냈다. 더 중요한 것은 500 만에 달하는 남아공 백인들을 껴안지 않고서는 국가존립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만델라의 탁월한 정치적 식견에 감복했다.

무장투쟁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백인정권으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은 만델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기나긴 옥중생활을 통해, 자각한 아프리카너들과 함께 국가경영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만델라는 석방 후 지루하면서도, 일상처럼 벌어지는 폭력과 내전발발의 일촉즉발의 위기에서도 평정심을 지키면서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그야말로 기적을 일궈낸다. <인빅터스>의 후반부에서는 그가 어떻게 해서 럭비 경기를 재료로 삼아 국가통합과 인종화합이라는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냈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공교롭게도 이달에 개봉한 동명 제목의 영화 <인빅터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메가폰을 잡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두 명의 배우인 모건 프리먼과 맷 데이먼이 각각 넬슨 만델라와 남아공 럭비 대표팀인 스프링복스의 주장인 프랑수아 피나르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쳐 주었다. 원작 르포와 차이점이라면 책에서는 상당 부분이 만델라의 투쟁과 삶이 중심이었다면, 영화에서는 초반부의 뉴스영화 형식으로 그의 삶이 소개되고 대부분이 럭비 월드컵 경기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2010년 3월 좋은 책과 멋진 영화를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인빅터스(Invictus)는 라틴어로 ‘정복되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영국출신의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가 1875년에 쓴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제목 한 번 기가 막히게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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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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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출간된 <마더 나이트>를 읽으면서 故 커트 보네거트 선생의 미출간 작들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근 1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와 만날 수가 있었다. 또 다른 보네거트 선생의 책을 만나려면 새로운 1년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독일계 미국인으로 1922년에 미국 인디애나 주 인니애나폴리스에서 태어난 커트 보네거트는 시인, 소설가, 반전운동가 등으로 알려졌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로는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한 블랙 유머 그리고 ‘트랄파마도어’로 대변되는 조금은 황당한 SF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1965년에 그의 다섯 번째 소설로 발표된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남북전쟁으로 거부를 축적한 로즈워터라는 가상의(혹은 실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가문의 엘리엇 로즈워터를 그 주인공으로 한다. 조상이 남긴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음에도, 엘리엇은 고향 인디애나 주의 로즈워터 군에서 의용소방대를 후원하며,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돕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 엘리엇이 아버지 로즈워터 상원의원에게는 도통 이해할 수 있는 꼴통 아들인 셈이다.

로즈워터 의원은 8,7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만든 로즈워터 재단을 통해 조상의 재산을 성공적으로 아들에게 상속했다.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는 아는 동생을 통해 어떻게 해서 미국의 부자들이 자신의 대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부를 상속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에 대해 듣고 난 후에, 그들의 부에 대한 탐욕에 그만 혀를 내둘렀었다. 물론 가능한 한 세금을 적게 내면서 말이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에서 보네거트는 타인이 어느 한 개인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 사람의 인간성이 아니라 그가 가진 재산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자본주의 천국 미국의 천박함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다 좋다, 우리의 엘리엇이 그냥 그렇게 인디애나의 시골에서 비록 “사마리안실조증”에 걸리긴 했어도 그런대로 평화롭게 살 수만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의 막대한 재산을 노린 로즈워터 재산의 법률 대리인 중의 하나인 노먼 무샤리란  파렴치한 변호사가 로즈워터 가문의 먼 친척인 로드아일랜드 로즈워터 가의 프레드를 선동질해서 재산 상속을 위한 법정 소송을 벌인다. 로즈워터 의원은 이 가증스러운 시도에 맞서,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자신의 아들 엘리엇의 정신이 말짱하고 로즈워터 가문의 상속자로서 손색이 없다는 점을 만천하에 알려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개시한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보네거트 선생의 후기 작품에 등장하게 되는 SF적인 요소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초기 작품이다. 물론 훗날 지속적으로 보네거트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삼류 소설 작가인 킬고어 트라우트도 빠지지 않고 등장을 하기는 하지만, 가끔 황당하고 난감한 외계 행성 이야기보다 좀 더 리얼리즘에 가까운 풍자와 촌철살인의 블랙 유머의 아우라는 일품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 엘리엇이 인디애나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정신이상’으로 간주되는 사실에 보네거트는 주목을 한다.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이들이, 자자손손 그 부를 상속하기 위해 은행과 법률가들과 결탁을 해서 부의 영속화를 획책하면서도 빈부의 격차나 직업은 신이 정해준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요설로 보통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이 모든 것을 주무르는 세상에서는, 타인을 돕겠다는 유토피아적 사고가 일탈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 백만장자 출신의 주정뱅이 자선사업가가 타인을 돕는다는 지고의 목적과 소방대에 대한 집착의 원인을 작가는 전쟁 중에 바이에른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마치 보네거트가 직접 체험한 드레스덴 대폭격의 체험으로 평생을 반전주의자로서의 삶을 산 것과 유사하다. 엘리엇은 모두 다 사랑하고 싶은데, 그가 속해 있는 계급은 물론 그의 도움을 받는 이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의 결말에서 그의 마지막 발언에 모두가 경악했던 걸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로즈워터의 유토피아적 사고와 로즈워터 가문을 둘러싼 이야기의 전개가 후반부로 갈수록 로드아일랜드 로즈워터와 노먼 무샤리의 도전 구도로 가면서, 글맛의 뒷심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찌하다 보니 커트 보네거트의 전작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아직 출간되지 않은 그의 다른 책들도 이른 시일 안에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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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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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 날을 노리즈키 린타로의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읽으면서 마무리했다. 비채에서 2007년 4월 이래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의 20번째 작품으로 교토대 출신의 추리소설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의 작품으로는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됐다. 십 년 전쯤에 출간된 <두 동강이 난 남과 여> 못지않게 섬뜩한 제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미국 출신의 소설작가로 프레데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가 창조한 엘러리 퀸에 대한 오마쥬로 주인공의 이름이자 작가의 필명 그대로 노리즈키 린타로가 등장을 한다. 추리소설 작가이자 아마추어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는 우연히 들르게 된 고등학교 후배의 사진전에서 가와시마 에치카라는 미모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저명한 전위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의 외동딸이란 걸 알게 되고, 그녀의 삼촌인 가와시마 아쓰시와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심각한 병을 앓고 있던 에치카의 아버지 이사쿠가 급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야기의 수레바퀴는 급회전하게 된다. 라이프캐스팅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모델로 해서 만든 조각상의 머리 부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사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회고전을 주도하게 된 미술평론가 우사미 쇼진은 경찰에게 알리지 말고 조용하게 이 사건을 처리하자고 유족들을 설득한다. 그렇게 해서 린타로는 사건에 발을 들여 놓게 된다.

린타로가 현장의 단서를 실마리로 해서, 핵심에 들어갈수록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에치카를 한 때 스토킹했다는 사진가 도모토 슌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는 가운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예의 사건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는 자책에 시달리면서도 린타로는 수사의 끈을 놓지 않는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가와시마 집안 내력에서부터 시작해서, 교묘하게 수사를 방해하는 우사미 쇼진의 숨겨진 의도, 그리고 이어지는 에치카 탄생 비밀에 이르기까지 진행형의 사건은 복잡하게 전개된다. 게다가 주인공 린타로는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도모토 슌과 그의 내연녀 야마노우치 사야카에게 여러 차례 당하면서도 실낱같은 단서와 직감에 의지해서 담대한 수사를 펼쳐 나간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한 저명한 전위조각가가 남긴 유작 작품에 얽히고설킨 과거사를 파헤치는 구성이다. 각 장의 머리에 등장하는 루돌프 비트코어의 <조각의 제작 과정과 원리> 그리고 미술평론가인 우사미 쇼진의 입을 통해 독자는 조각이라는 전문적인 세계로 초대된다. 사실 조각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를 위해, 고대 그리스 이래 조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실존 인물로 회화에서 조각으로 전향해서 인체를 본뜬 석고상을 조각한 조지 시걸(George
Segal)의 아이디어를 빌려서, 아시걸(亞Segal)로 불리며 자신의 조각 세계를 구축했다는 가와시마 이사쿠의 조각 세계에 대한 설명 또한 일품이었다. 책 뒤편에 나와 있듯이, 작가의 리서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된 가와시마 이사쿠는 자신의 유작을 통해, 모두가 잊고 싶은 과거를 현재로 소환한다. 이사쿠의 바람과는 달리 자신의 메시지가 다른 끔찍한 범죄를 유발한 가운데, 린타로는 조각나고 은폐된 단서들을 바탕으로 숨겨진 비밀과 음모를 파헤친다. 주인공 린타로는 공권력을 집행하는 경찰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는 친절하게도 그의 아버지를 경찰로 설정하는 치밀함도 빼놓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린타로가 공권력에 밖에 있기 때문에 자유인으로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가 있었던 건 아닐까?

노리즈키 린타로 작가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엘러리 퀸의 스타일대로,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많은 공을 들인다. 특히 린타로가 도모토 슌에게 허를 찔리고, 내연녀 사야카의 거짓말에 휘둘리며, 우사미 쇼진의 드라이아이스라는 전문적 지식을 동원한 공갈에 속는 장면에서는 주인공 역시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셜록 홈즈 같이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추리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온다. 적당히 용의자들에게 뻥을 치기도 하고, 정보원에게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 인간적인 매력이 노리즈키 린타로의 소설에 재미를 더해 준다.

2005년에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를 정도로 탄탄한 구성과 복선 그리고 주인공의 탁월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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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
닉 혼비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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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국 출신의 닉 혼비와의 세 번째 만남은 최근에 소개된 <슬램>이었다. 첫 번째는 소설 <하이 피델리티>를 영화화한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였고, 책으로는 작년에 만났던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가 처음이었다. <슬램>을 통해 비로소 그의 소설과 처음 만나게 됐다. <슬램>은 닉 혼비의 다섯 번째 소설로 지난 2007년에 출간됐다.
 
<슬램>의 표지에는 이 책의 주인공 16살짜리 샘 존스가 존경해 마지않는 세계적인 스케이트보더 토니 호크의 그림자와 샘이 동경하는 보드 무대인 하프 파이프가 조명과 함께 등장한다. 런던에 사는 십대 청소년에게는 무엇이 관심거리일까? 인터넷과 구글의 도움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진척된 세계화의 도움으로 거의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음악을 듣기 위한 아이팟은 기본이고, 스타벅스 프라푸치노, 맥도널드의 햄버거 등등……. 좀 더 수위를 높이면 멋진 여자 친구 정도?
 
그런데 샘은 그런 걸 한 방에 다 뛰어넘고 생뚱맞게도 아기 아빠가 된다. 자신의 엄마도 샘을 16살에 낳았던가. 엄마의 새로운 남자친구 마크는 존스 패밀리가 콩가루 집안이라는 선언을 한다. 물론 그런 마크도 콩가루 집안에 일조했다. 참, 샘의 엄마 애니도 임신했다!!! 참, 복잡하기 그지없는 설정이다.
 
작가 닉 혼비는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로 작정을 하고 샘의 우상 토니 호크의 힘을 빌려 샘과 그의 여자 친구 앨리시아의 1년 뒤로 미래로 그들을 위치 이동시킨다. 솔직히 부모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16살배기들이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만 하다. 게다가 샘은 앨리시아로부터 임신 소식을 듣게 될 것을 짐작하고 헤이스팅스로 도망가 버린다. 관계에서 빚어지는 즐거움은 취하되, 무언가 심각한 책임을 지게 될 상황은 회피하고 싶은 청소년의 심리를 닉 혼비는 예리하게 파고든다.
 
그저 래빗과 찌질이 같은 보드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고 싶은 샘에게 아기 아빠라는 짐은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다. 게다가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현재에서 미래로 간 샘은 자신의 아들 루프가 태어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샘이 앨리시아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녀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결심을 세우지 못하는 데 있다. 적어도 샘의 아버지는 그의 나이에 엄마와 결혼하지 않았던가. 비록 그 결혼이 오래 지속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작가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빠가 된다는 공황상태에 빠진 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어서 빨리 어른이 되어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틴에이저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십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스케이트 보더의 세계에 대해 세심하게 리서치를 했다는 점이 각주에 등장하는 보드 전문용어들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번역의 힘을 빌리긴 했겠지만, 영국 십대들의 대화와 토니 호크에 대한 샘의 혼잣말 같은 하위문화에 대해 가감 없는 표현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미래에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청소년기의 불안이, 부주의한 섹스와 계획되지 않은 임신 그리고 아기의 출산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닉 혼비는 <슬램>의 구성에 적절하게 조화시켰다. 게다가 토니 호크라는 샘에게는 멘토 같은 존재를 통해 청소년 샘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의 두려움과 책임감의 부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도움을 준다. 미래에 대한 플래시백으로 처리한 결말 부분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역시 닉 혼비 스타일답게 책 읽는 재미 하나만큼은 일품이었다.
 
닉 혼비의 최신작 <줄리엣, 네이키드>의 출간을 기다리며 마지막 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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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 1 열린책들 세계문학 136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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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라비안나이트>에 대해 흔히 잘못 아는 사실 하나. 셰에라자드는 천 일 동안 술탄 샤리아에게 이야기를 해준 것으로 있으나 정확하게 말해서 1,001일 동안이란다. 나도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오리지널로 나온 <천일야화>를 접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동안 영국 출신의 작가 리처드 버턴의 <아라비안나이트>가 오리지널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전에 앞서 프랑스 출신의 앙투안 갈랑이라는 이가 신비롭고 놀라운 환상의 이야기로 가득한 <천일야화>를 집필했다는 것도 덤으로 알게 됐다. 사실, 아마 갈랑이 혼자서 이 많은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으리라. 그리스어, 라틴어 그리고 아랍어에 능통했던 갈랑이 중근동 지방을 여행하면서 남긴 방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천일 밤의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창조의 바탕에는 기존의 무엇인가가 자리하지 않던가.

이야기의 시작은 얄궂게도 오쟁이 진 두 명의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샤즈난과 샤리아 형제는 페르시아(꼭 짚고 넘어갈 것이 페르시아는 아랍이 아니다!) 사산조의 왕자이자 술탄으로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훌륭한 군주로 칭송을 받았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부러울 게 없어 보이던 이들에게도 불행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의 왕비들이 어이없게도 은밀하게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분노한 술탄 샤리아는 이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에 불타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젊은 처녀를 왕비로 맞아들여 하룻밤을 보내고 어김없이 그 다음 날에는 죽여 버리는 것이다. 아 놀라워라, 한 사내의 맹목적인 복수심은 그칠 줄을 모른다.

이를 보다 못한 대재상의 큰딸 셰에라자드는 술탄의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에 나서게 된다. 나서서 술탄의 왕비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만한 결심을 하기까지에는 단단한 준비가 되어 있을 터, 자신의 동생 디나르자드까지 동원해서 매일 밤 동이 트기 전 무렵에 술탄에게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고 한편으로는 술탄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어이없는 복수심을 조금씩 누그러뜨린다.

앙투안 갈랑은 프랑스 독자들을 위해 원래 <천일야화>가 가지고 있던 외설적이면서도 잔인했던 부분들을 순화시켰다고 한다. 상인과 정령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천일야화>는 그야말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환상과 마법이 어우러진 문학적 상상력의 향연이다. 고전 소설의 영향 탓으로, 다분히 교훈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면서도 그 재미를 잃지 않는다.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 빠진 술탄 샤리아의 심정으로 그렇게 책을 읽었다. 그가 차마 자신의 부인이자 대재상의 딸인 그녀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오로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연재 이야기에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중독성 때문에 잠에 졸린 눈을 비비며 천일하고도 하루 동안의 매력 속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17세기에 쓰인 책이라 그런지 어쩌면 그렇게 죄다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왕이나 공주 같은 지위를 가진 선남선녀들인지 모르겠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캐릭터의 픽업에 있어서는 최소한 평면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등장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터부(taboo)들은 어김없이 깨진다.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되는 경고는 하나같이 무시되고, 꼭 대가를 치르게 되는 터부 브레이크(taboo break)가 등장한다. 하긴 그런 금기들은 모두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세계 어느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금기들이 온전하게 지켜졌던가! <천일야화>도 그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천일야화>의 전개에 있어 재밌는 설정 중의 하나는 셰에라자드의 동생 디나르자드가 해가 뜰 무렵에 꼭 자신의 언니를 깨워 술탄이 그녀의 이야기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술탄이 왜 만사를 제쳐 두고서라도 그 재밌는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지 굳이 밤에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갔다. 그런 독자의 의구심에 대비해서 갈랑은 술탄 샤리아가 항상 자신의 책무에 충실했다는 교묘한 장치도 설치해 두었다.

책을 읽으면서 셰에라자드의 기가 막힌 이야기 완급 조절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술탄을 호기심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면서도 유유자적하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낮 시간을 충분히 활용했던 건 아닐까?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튀어나올지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이번에는 드디어 신드바드의 대모험이 등장하게 될 2편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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