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아줘 - 자크 프레베르 시화집
자크 프레베르 지음, 로낭 바델 그림, 박준우 옮김 / 창비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주말이다. 그리고 도서관에 갔다. 희망도서로 신청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그래픽노블>이 도착했다고 해서. 집에서 출발할 때는 추웠는데, 도서관에 가는 동안 더워졌다. 아니, 걸어서 더워졌는지도. 쓱데이라 쇼핑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이마트에 갔을 적에 지하 주차장 온도는 31도였다. 11월인데 이거 여름인가 싶더라. 근데 걱정하지 마, 다음 주에는 바로 영하로 떨어진다고 하니까.

 

또 살짝 옆으로 새는구나. 도서관에서 이러저러한 책들을 빌렸다. 그 중에 하나는 자크 프레베르의 시화집 <나를 안아줘>였다. 그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하지만, 리뷰를 쓰기 위해 일단 대출해서 집에 가져왔다. 책을 다섯 권이나 빌려서 집에 오는 내내 무거웠다. 내가 쓰는 쓰는 리뷰는 그만큼의 무게일까.

 

40쪽 남짓 되는 시화집에는 파리에 사는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내가 또 이런 거 좋아하지. 로낭 바델이라는 작가가 그린 그림체에서는 왠지 2년 전에 작고하신 장 자크 상페가 떠올랐다. 프랑스 작가들은 대부분 이런 스타일의 왠지 헐거워 보이는 그런 그림체들을 선호하는가 싶기도 하고. 세밀화 보다는 왠지 모르게 빈 공간 혹은 여백의 미학의 추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내 마음에는 든다. 카툰도 왠지 미국 스타일의 그것보다는 유럽 작가들의 스타일이 더 마음에 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가의 시화는 거리에서 사랑을 나누는, 아니 키스를 하는 커플에 대한 자크 프레베르의 시선이었다. 이곳이 한국의 서울이 아니라, 프랑스 파리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대중의 시선은 비슷한 모양이다. 누군가는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해서, 공공장소에서 그런 애정행각에 대해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다르다네. 온전히 그 시간은 그들의 것이라고, 작가는 선언한다. 그냥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고 지나가면 되지 않나. 세상의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런 너그러움과 관대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결국 삶에서 온 게 아닐까. 누구나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는 삶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아는 건 미션 임파서블이다. 아니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모두 다 알고 싶지도 않다. 결국 그런 깨달음으로부터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라는 본질적 질문에 도달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오페라하우스 같이 으리으리한 홀에 우뚝 선 지휘자. 지휘자 좌측에서는 하프로 무장한 궁수 같은 이가 사랑의 화살을 우측의 가냘파 보이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날리기 일보직전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만 너무 충실한 나머지, 상대방에게 노래 혹은 화살로 평생 갈 마음의 상처를 주었을 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서 그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공통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를 전달해도, 그전에 이미 무언의 제스처나 공기의 흐름 같은 부수적인 것들 때문에 오해를 사지 않던가. 짧은 메시지와 한 컷의 그림만으로도 참 많은 사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문학이 가진 힘이 아닌가 싶다.

 

사랑의 도마뱀이 내 손에서 튀면서 꼬리를 남기고 떠났대.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누군가를 구속하고 싶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남긴 부작용을 작가는 도마뱀 꼬리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시시각각 소용돌이 치는 내 감정조차도 종잡을 수가 없는데 어찌 타인의 감정을 내가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저자는 우리는 삶을 알지 못하고, 날을 알지 못하며 결정적으로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가. 삶이나 사랑이 모두 예정된 길로만 가게 된다면 그 또한 심심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변주되면 또 그것도 감당할 수 없겠지만.

 

짧은 시와 그림으로 이루어진 자크 프레베르의 <나를 안아줘>에는 많은 울림이 담겨 있다.뭐랄까 오래 전, 진지보수 공사 나가서 땅에서 캐낸 칡을 씹는 그런 맛일까. 씹을수록 맛이 나는, 읽을수록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원제 <Embrasse-moi>(웅브하세 무아~)는 샹송 가수 뤼시엥 드릴이 1946년에 발표한 곡의 제목이기도 하다는 걸 검색을 통해 알게 됐다. 드릴의 샹송은 아주 간드러진다. 책 읽다가 이렇게 샹송곡도 알게 되는구나.

 

[뱀다리] 나온 지 4년 밖에 안 되었는데 절판이라니,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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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캐드펠 수사 시리즈 1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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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책을 접하게 되는 채널은 다양하다. 종이신문에 실리는 책 소개도 참조하고, 요즘에는 인스타 그리고 스레드를 통해 새로운 책들을 알게 된다. 나의 인스타 피드에 오른 캐드펠 수사 시리즈도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렇다면 또 내가 참을 수가 없지.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무려 20권이나 된다는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인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을 빌렸다.

 

우리의 주인공은 58세 정도로 추정되는 퇴역한 십자군 전사 캐드펠 수사다. 캐드펠 수사는 젊어서 세상을 주유하면 많은 경험을 쌓았다. 동방에 가서는 성도 예루살렘에도 갔었다고 했던가. 이 양반은 수도원보다 어쩌면 속세에 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그런 매력을 지닌 특이한 수사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여러 여성과 연애 경험도 많은 것 같다고 추정된다. 참고로 중세 교황들은 자식도 여럿 두었었다.

 

지난 15년 동안,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슈루즈베리 수도원에서 허브 밭을 가꾸며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게 살던 캐드펠 수사에게 이제 막 파란만장한 모험이 펼쳐질 5월의 어느날이 다가왔다.

 

클뤼니 수도회에서 촉발한 성인들의 유물 그리고 유골 수집에 대한 열풍은 슈루즈베리 수도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광과 짭짤한 수입을 가져다 줄 성물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야심가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결탁(?)한 콜룸바누스-제롬 수도사 콤비의 활약으로 귀더린이라는 곳에 있다는 성처녀 위니프리드의 유골 발굴에 나선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저자 엘리스 피터스는 여기서 정확하게 중세를 휩쓸었던 성물 수집 열풍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시선을 보여준다. 나도 예전에 로마에 갔을 적에, 가톨릭 사제로 로마에서 유학하던 사촌 형님과 성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개인적 성화의 발로가 아닌가 싶었다.

 

자 문제는 귀더린 사람들이 슈루즈베리에서 파견된 6인조 유골 발굴단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 캐드펠은 웨일스 출신으로 잉글랜드 사람들을 위한 통역으로 발굴단에 선발됐다. 그리고 자신의 수하에 있던 수사라기보다 건달 같아 보이는 존 수사도 같이 동행한다. 캐드펠은 특유의 친화력과 같은 웨일스 사람이라는 이유로 지역 유지인 리샤르트와 그의 딸 쇼네드, 대장장이 베네드 등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캐드펠과 대조적으로 노르만 귀족 출신의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고압적이고 오만한 자세로 귀더린 사람들에게 비호감을 산다. 사실 국왕의 권력을 능가하던 중세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귀더린 촌구석에 사는 이들의 외지인에 대한 반감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오해에서 비롯된 충돌이 발생할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귀더린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지 리샤르트를 돈으로 매수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망신만 당한다. 더 큰 문제는 다시 한 번 성 위니프리드의 유골 이전 문제에 대한 협상을 하기 위해, 모임에 오던 리샤르트가 행방불명되고 나중에 싸늘하게 죽은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소설은 미궁으로 빠져 들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우리 캐드펠 수사가 실력을 발휘할 순서다. 중세 사람답지 않게, 리샤르트가 살해된 현장을 보존하라고 귀더린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런 건 현대식 수사 방식이 아닌가. 이야기는 성 위니프리드 유골 이전 문제에서, 리샤르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가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진다. 지금처럼 지문 검사나 CCTV나 녹음 자료 같은 범행의 전모를 밝혀줄 결정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캐드펠 수사의 수사는 자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명백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 해결 방식도 상당히 중세스러운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결론은 모두가 행복한 엔딩이다. 역시 수사답게, 모든 건 신의 뜻에 맡긴다. 신의 종을 자처하는 수사지만 캐드펠은 미제 사건을 상당 부분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리한다. 현대식 탐정들과 달리, 일이 흘러가는 대로 억지스럽지 않게 하는 방식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엘리스 피터스 작가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47년 전에 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올드스쿨 스타일에 아주 세련되진 않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주인공 캐드펠은 신의 소명을 받은 수사지만, 동방의 성도에서는 사라센인들의 화살 공격에 맞서 싸운 전사였으며 15년 동안의 수도원 허브 밭 주인으로 진통제 역할을 하는 양귀비즙의 효능에 대해서도 잘 아는 그리고 속세의 잔기술을 사용하는 데도 능한 그런 인물이다. 수도원에 적합해 보이지 않는 존 수사가 사랑을 찾아 떠날 때에도 전적으로 공감해 주지 않았던가. 엄숙한 신의 뜻과 사그라지지 않는 인간의 욕망의 본질을 잘 아는 캐드펠 수사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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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11-01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결 방식은 중세스러운데 실사 내용을 보면 너무나 인간적인..... 3권 수도사의 두건은 캐드펠 수사가 좋은게 좋은거지라고 하면서 끝맺어지거든요. 진짜 설마 이렇게 맺을까 싶은데 딱 모두에게 좋은 해결책을 찾아내더라구요. 저는 그래서 이 시리즈 너무 좋네요. 지금 4권 읽고 있는데 갈수록 더 좋습니다. 그리고 벌써 10권까지 나왔어요. 신나요. ㅎㅎ

레삭매냐 2024-11-01 12:48   좋아요 0 | URL
저는 어제 1권 다 읽고 나서
바로 10권으로 넘어 갔답니다.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수배해
서 보려구요.

한동은 캐드펠 수사의 매력에
옴팡지게 빠져서 보낼 듯 하
네요. 아, 당장 읽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4-11-01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권이나 되는 시리즈네요.
일단 한 권쯤은 읽어봐도 좋을 것 같아요.
배경이 중세라서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24-11-01 12:54   좋아요 1 | URL
https://www.youtube.com/watch?v=B4CraGmc7Xw

BBC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대요.
너튜브에 있는가 보더라구요.

위키피디아를 참조해 보니
1편의 배경이 1137년 5월이라고
하네요.

엘리스 피터스는 1977년부터
1994년까지 17년 동안 캐드펠
시리즈 21편을 썼네요.
현대판 발자쿠인지도 모르겠
습니다.

Forgettable. 2024-11-01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 좋아하는 시리즈인데 새로 나와서 더 많이 팔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4-11-01 14:1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
예전에도 한 번 나왔던 것
같더라구요. 저희 도서관
에 오래 전 버전이 있더라구요 ^^

전 21권의 완간을 기대해 봅니다.

coolcat329 2024-11-01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2권 거의 다 읽어가는데 정말 캐드펠 수사 때문에 읽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참 끌리는 캐릭터에요.

레삭매냐 2024-11-01 19:50   좋아요 1 | URL
그러시군요.
저는 1권에서 10권으로 건너
뛰어 읽고 있답니다 ^^

중간도 읽을 계획이랍니다.

캐드펠 수사, 마음에 드는 캐릭
터입니다.

stella.K 2024-11-01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리즈 첨 나왔을 때 재밌다고 해서 사 봤는데 뭐가 쟀다는거지? 읽다 결국 포기한 적이 있어요. 제 스탈은 아니던데 지금 다시 읽는다면 그때 왜 그랬을까 참회하며 읽게 될까요? 😢

레삭매냐 2024-11-01 19:52   좋아요 1 | URL
말씀 듣고서 찾아 보니 무려 20년
전에 나왔더라구요 :>

어쩌면,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또 보게 되면 감흥이 다를 수도 있
지 않을까요. 참회까지야...

stella.K 2024-11-01 19:59   좋아요 1 | URL
헉, 20년 밖에 안 됐나요? 전 한 30년쯤 됐나했더니. ㅎㅎ
그렇긴 하죠? 첨 읽을 땐 뭐야? 하다가도 나중에 읽으면
이렇게 재밌는 책이었어? 할 때도 있죠.
이 시리즈가 그런 게 되길 바라며 언제고 함 읽어 보겠습니다.

서니데이 2024-11-01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도서관에서 이 시리즈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때는 그렇게 인기있는 책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나오면서 표지가 달라져서 잘 몰랐는데, 리뷰 보니까 평이 좋은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4-11-02 10:29   좋아요 1 | URL
저는 이런 책이 있는 지도 몰랐
는데, 예전에 나온 책을 아시는
분들이 역시 알라딘 서재에는
많네요.

무언가 새로 만나는 기분이라
그런지 열심히 달려볼까 합니
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11-02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네요

레삭매냐 2024-11-03 00:39   좋아요 1 | URL
시리즈 시작부터 아주 화끈하게 나갑니다.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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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 하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읽었다. 사실 하도 그전에 여기저기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정작 읽어본 적은 없는 그런 고전이라고 해야 하나. 도서관에 들러서 <육두구의 저주>를 찾다가 눈에 띄어 빌려서 바로 다 읽어 버렸다.

 

미국 대학생들의 필독서라고 하던데, 읽기 쉽고 주제가 비교적 뚜렷해서 인기가 있지 않나 싶다. 책은 1954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번역이 많이 아쉬웠는데, savage를 오랑캐로 번역한 건 좀 아닌 듯 싶다.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핵전쟁이 일어나고, 영국 출신의 소년들이 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남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고립된 장소, 부족한 먹거리 그리고 분출하는 갈등, 뭐 이 정도 설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 않는가 말이다.

 

6살부터 대략 12살에 해당하는 소년들은 처음에는 그나마 민주적인 방식으로 랠프를 지도자로 선출한다. 소라를 불어 소년들은 모은 랠프가 대장이 되는데는 지독한 현실주의자 돼지(피기)의 역할이 컸다. 다른 소년들이 쾌락주의자라고 한다면, 돼지는 상당히 자신들이 처한 사실을 잘 파악하고 나름 최선을 도모하는 그런 인간형이다.

 

랠프와 돼지 그리고 사이먼이 이성을 대변하는 한 패라고 한다면, 성가대 출신으로 사냥부대를 자처하는 잭과 로저 일당이 반대편을 구성한다. 장발족 랠프들은 우선 탐험을 통해 고립된 섬의 지형을 파악하고, 산꼭대기에 봉화를 피워 지나가는 배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구조받는다는 계획을 세운다. 자력으로 섬을 탈출할 수 없기 때문에 아주 타당한 목표가 아닐 수 없다. 무인도에 장기적으로 머물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머물 수 있는 오두막을 지어야 한다는 랠프는 어린 친구들에게 설파한다.

 

반면, 유희적이고 쾌락적인 인간형 그리고 나중에는 점점 야만으로 치닫게 되는 잭이 이끄는 사냥부대는 섬에 사는 야생 멧돼지를 잡아 배를 채우자고 주장한다. 전자가 상당히 계획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그런 계획이라면 후자는 당장 입에 채워지는 즐거움과 군중을 자극하는 단선적 계획이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자랑스러운 대영 제국의 후손으로 랠프들이 문명을 대변하는 그런 캐릭터로 그려진다면, 잭 일당은 그에 반하는 이단적인 성향이 농후하다. 랠프와 돼지가 우연히 얻은 소라 나팔은 권위를 상징한다. 누구든 회합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소라를 들고 말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든다. 하지만, 이 또한 잭 패거리의 횡포로 나중에 가서는 별다른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대중을 즐겁게 해주고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만 있다면, 그게 문명이든 야만이든 상관 없다는 게 윌리엄 골딩이 말하고 싶은 바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실제로 소설에서 잭의 사냥부대가 결국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되고, 잭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니 랠프는 자신의 동지들인 사이먼과 돼지를 차례로 잃게 되면서 재기불능에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실 불 피울 도구조차 없는 아이들이 돼지의 안경을 화경으로 사용해서 불을 붙이는 장면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대책이 없는지 잘 알 수가 있다. 내가 랠프라면, 아이들을 동원해서 비행기에서 추락한 잔재들을 끌어 모아 오두막 짓는 자원으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당근과 채찍을 동원해서 거의 광기에 미쳐 날뛰는 잭 패거리를 초기에 제압하는 방식은 또 어떨까. 소년들의 회합에서 정한 합의와 규칙 그리고 통제에서 벗어난 잭들은 오로지 사냥에만 미쳐 날뛰다가 결국에는 동료들조차 죽이게 되는 비극에 도달하게 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사실 짧지만 강렬한 성장소설의 외피를 두른 <파리대왕>은 영국 모험소설의 전통을 따르면서,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 어떤 비극을 부르게 되는지 강렬한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미 소년들이 아무런 도구나 장비 없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을 때, 생존을 위한 광기의 폭발은 예정되어 있었고,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한편, 소설에서 폭력과 광기를 담당한 잭 역시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는다. 야생 멧돼지로 대변되는 식량이 결국 소년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잭은 사냥 부대의 리더가 되어 먹을 거리로 그들을 지배한다. 물에서 올라온 짐승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짐승의 실체에 대한 규명 없이, 그런 심리적인 요소들조차 자신의 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던가. 꼬마들의 무섬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사이먼은 하늘에서 떨어진 짐승의 실체가 사실은 죽은 조종사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직접 확인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사이먼이 광기의 축제가 한창 진행되는 순간에 등장해서,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점이다. 다음 타자는 돼지였고, 그나마 이성의 끈을 놓치 않았던 랠프마저 그들의 죽음이 살해가 아닌, 어쩌면 우연히 발생한 사고였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설정에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파리대왕>에서 윌리엄 골딩이 하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야만과 문명은 한 끗 차이라는 게 아니었을까. 아무리 우리가 문명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극한에 내몰리게 된다면 결국 우리도 소설에 등장하는 '새비지' 무리와 다를 게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아직 이성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새비지 무리의 소년들은 당장의 허기를 채우고, 즐거울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알 게 뭐냐는 식이다. 결정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상위 권력을 가진 어른들의 부재에서 오는 아노미적 상태에서라면 더더욱 그러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70년 전에 나온 책이고, 또 그 후로 비슷한 상황 설정을 가진 여러 가지 소설이나 영화들을 보다 보니 입소문만큼의 강렬한 무언가는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소년들과 비슷한 나이에 이 책을 읽었다면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려나. 너무 무게를 주지 않고, 가볍게 읽은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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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30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품 아니겠습니까?
저도 중학교 땐가 사 두기만하다 결국 못 읽었죠.
어렵다기 보단 재미없는 작품이었군요. 어째스까~ ㅎ
그래도 영화는 두번쯤 본 것 같은데 인상 깊었던 기억이나요.

레삭매냐 2024-10-30 07:45   좋아요 1 | URL
아 맞습니다, 영화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영화는 책하고 얼마나
다른지 궁금하네요 :>

1950년대에는 수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70년이 지난 다음
에는 좀 평범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레이스 2024-11-02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번역해야 한다는 게 중론인듯 합니다.^^

레삭매냐 2024-11-03 00:40   좋아요 1 | URL
번역이 너무 거시키합니다.

새로 나온 <파리대왕:그래픽 노블>
이 훨씬 더 낫습니다.
 
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작년 말에 뒤늦게 러셀 뱅크스 작가의 존재를 알고 이미 절판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아마 이 책을 먼저 읽기 시작한 것 같은데 <달콤한 내세>를 먼저 읽고, <거리의 법칙>은 끝내지 못했다. 어제 아, 읽다만 책이 있었지 싶어 다시 도전했다. 거진 10달 전에 읽다 말아서, 영문 서머리의 도움을 받았다. 순식간에 기억이 되살아나더라.

 

소설의 주인공 채피는 업스테이트 뉴욕의 오세이블이라는 마을에 사는 불한당 같은 녀석이다. 나이는 14, 벌써 마리화나 맛을 들여서 양아버지 켄의 옛날 동전들을 훔쳐다가 전당포에 맡겨서 80달러를 벌었다. 그 돈으로 마리화나를 사서 피울 생각을 하니 짜릿해진단다. 이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그래. 오래 되지 않아 그 사실이 밝혀지고, 채피는 집에서 쫓겨난다. 아니 자발적으로 집을 뛰쳐나갔던가.

 

사실 엄마는 모르고 있었지만 켄은 성적으로 채피를 학대하고 있었다. 무언가 고장난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상이라고나 할까. 채피에게는 비슷한 처지의 베프 러스(16)가 있었다. 학교를 중퇴한 러스는 비디오 덴이라는 가게에서 일하며 오토바이 갱단과 어울려 산다. 두 꼬마들에게 좋지 않은 환경이 구비되었다. 앤스랙스, 메탈리카 그리고 메가데스를 숭배하는 러스에게 얹혀살게 된 채피. 그는 거리에서 마리화나를 팔기도 한다. 채피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괜찮은 친구를 만났다면 무언가 그의 삶이 달라졌을까? 사실 모르겠다. 좋지 않은 배경을 지닌 친구와 어울린다는 설정이 좀 클리셰이이긴 하지만 말이지.

 

플래츠버그 쇼핑몰에서 버스터 브라운의 포로(?)처럼 보이는 프로기(로즈)를 만나 그녀를 악당에게서 구해내려고 하지만, 채피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채피와 러스는 브루스를 보스로 하는 애디론댁 아이언이라는 오토바이 갱단과 어울리게 된다. 브루스, 라운드하우스 그리고 조커가 훔쳐 놓은 장물들을 몰래 빼돌리는 채피와 러스. 그러다 사달이 나서, 러스의 거처에 불이 나고 집에 채피가 있다고 생각한 브루스가 그를 구하러 나섰다가 화재로 죽는다. 꼬마 악동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한다.

 

겁 없이 세상에 나선 채피는 왼쪽 팔뚝 안쪽에 문신을 새기고, 자신의 이름을 ""으로 바꾼다. 뭐랄까 하나의 통과 의례적인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은 소년은 그렇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러스와 함께 어느 교수 가족의 여름별장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벌이는 소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유재산을 신성하게 여기는 미국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하지만 오갈 데 없는 두 불한당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잠깐의 자유를 만끽한다. 왠지 그들의 모습에서 통나무집 열병(cabin fever)아 발명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결국 잠깐이었지만 자신들의 보금자리였던 곳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러스와 채피는 그곳을 떠난다. 그 때 아마 박제 새와 클래식 CD들을 들고튀었지.

 

소설에서 이어지는 채피/본의 삶은 험난하다. 배움도 없고, 뒷배도 없는 소년에게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도 채피는 꾸역꾸역 사람들을 만나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만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런 점에서 <거리의 법칙>은 기존의 제시된 성장소설의 궤도를 충실하게 따른다. 다만, 채피의 주변인물들이 보여주는 영향력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긴 하지만.

 

소설의 전반에서는 독고다이 같은 채피의 좌충우돌이었지만, 후반부에는 채피의 조력자로 라스파타리안 아이맨이 등장한다. 물론 아이맨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그래도 아이맨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아이맨의 이미지는 4살 때 자신과 어머니를 떠난 친부 폴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채피에게 멘터 같은 존재로 부상한다. 채피와 아이맨은 악당 버스터 브라운에게 팔린 어린 소녀 프로기의 어머니를 찾아 그녀를 밀워키로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고로 어려운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의 어려운 이들을 나서서 돕기 마련인가 보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상식적으로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들이 이어진다. 여권도 없는 소년 채피가 아이맨과 함께 자메이카로 간다고? 아무리 30년 전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가능한가 싶다. 자메이카 현지의 개미농장에서 그야말로 개미처럼 일하던 채피는 놀랍게도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 만나게 되는데...

 

반영웅 스타일의 주인공 채피에게 마리화나는 하나의 도피처를 제공해 준다. 약물이 엄격하게 금지된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피가 의지할 곳은 마리화나뿐이라는 설정이 참담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미국 사회에 마리화나가 그렇게 깊숙하게 자리 잡았고, 심지어 이제는 합법화가 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채피가 처한 기구한 운명이 결국 그를 더디게 성장하게 만드는 이 험난한 여정에 초대한 걸까?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할 수 없을 그런 일들이 주변에서 잇달아 발생해도, 채피는 전혀 긴장하거나 놀라지 않고 마치 게임에서 미션 깨기를 하듯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세상풍파를 일찍 겪은 채피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엔딩 부분에 가서, 이브닝스타에게 자신이 원하는 걸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에서는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왠지 모르게 미래의 채피에게서 빌런의 향기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오랜 시간이 걸려서 다 읽고 났는데, 왜 이렇게 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러셀 뱅크스는 오랜 작가 생활 동안 많은 책들을 발표했는데, 국내에 소개된 책들은 너무 적은 것 같다. 좀 더 많은 그의 책들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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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10-17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아주 아주 예전에 읽었는데 매냐님 리뷰를 읽고도 전혀 기억이 안납니다. 찾아보니 별 4개에 나는 이런 몸부림이 있었나 슬펐다 라고 써놨네요 ㅋㅋㅋ 비행청소년이 나온다...이것만 기억납니다.

레삭매냐 2024-10-18 00:24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전 책이 절판된 다음에
우주점을 통해서 구해서 읽었답니다.

저도 읽다 접어서 치트키를 써서 다시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비청 채피는 수준이 다른 그런 친구더
군요.

젤소민아 2024-10-18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 리뷰는 정성이 깃들어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레삭매냐 2024-10-18 14:02   좋아요 0 | URL
부족한 리뷰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10-18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셀 뱅크스,
처음 들어 봅니다.
전형적 불한당의 스토리인 것 같습니다.
요즘 이런 소설을 읽으면 넘 맘이 아픕니다 ㅠㅠ

레삭매냐 2024-10-19 00:53   좋아요 1 | URL
저도 작년말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국내에 소개된 책이 너무 없네요.

좀 더 읽어 보고 싶은데 말이죠.

주인공 채피의 활약은 정말... 그랬습니다.
 
사자클럽 잔혹사
이시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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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대한민국 출판계가 아주 난리가 났다. 좋은 일이다. SNS에서는 관련 피드가 넘쳐 흐른다. 그러다 예전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책이 소개된 기사를 만나게 됐다. 모두들 한강 작가의 책에 정신이 팔린 동안, 나는 바로 그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시백 작가의 <사자클럽 잔혹사>를 읽었다. , 나도 교보문고에 들러서 한강 작가 품절 사진 하나는 찍어야겠다. 기념비적이지 않은가.

 

아주 살짝 삼천포로 빠질 뻔 했구나. 이시백 작가의 소설집 <응달 너구리>를 오래 전에 사두었는데, 읽지는 않고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서 도서관에서 <사자클럽 잔혹사>를 빌리면서 같이 빌렸다. 국가에서 지정한 블랙리스트에 오른 책이라 아주 숭악한 책이 아닐까 싶었지만, 책의 실체는 너무 재밌었다. 아니 너무 재밌어서 블랙리스트에 올렸나?

 

책의 화자는 사자클럽 4기생 송영탁이다. 이 친구는 어려서 김신조 사건의 후유증으로 심한 말더듬증이 생겼고, 학교와 친구들 사이에서 얼벙어리 취급을 받았다. 국민 총화단결을 강조하는 독재정권 밑에서 자란 영탁과 사자클럽 친구들은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시절을 겪었다. 저자가 묘사하는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에는 묘한 환멸과 깊은 혐오가 배어 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그 시절이 좋았노라는 타령을 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하면 그런 게 어딨나 그래. 학교는 영탁에게 아주 뜨거운 맛을 선사해 주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교사들은 하나 같은 우악스럽고 학생들을 그야말로 공깃돌 가지고 놀 듯이 대하는 그런 폭력교사의 전형이다. 무엇보다 경악스러웠던 건, '자동'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친구들 사이에서의 뺨때리기였다. , 그건 나중에 사자클럽 회원들끼리 하는 거였나. 뭐 크게 다르지 않으니 도긴개긴이긴 하지만.

 

주인공 영탁이 팝송에 물들어 가는 장면도 너무 인상적이었다. 왜냐구? 나도 그랬으니까. 어디에서고 위로를 얻을 수 없었던 우리 청소년들은 학업 대신 다른 해방구를 찾았는데 그게 바로 팝송이었다. 사실 그 시절에 가요는 너무 구려서 들어줄 수가 없었다. 소설에서 나오듯, 아이들이 트로트를 신나게 불러대는 것도 그렇고... 물론 영탁도 그랬지만 나중에 가서는 팝송으로 전향해서 다른 치들처럼 기타도 배운 모양이다. 나는 연주에는 아예 젬병이라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 , 영탁의 아버지는 아들이 기타 치는 모습에 격분하셔서 바로 기타 대가리를 부수어 버리는 쾌거를 보여 주시기도 하셨다.

 

동네 양아치들을 원수처럼 여기라는 사자클럽 선배들의 강압에 영탁과 무리들은 서울 근교의 산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체력을 기른다. 아니 이러니 어느 세월에 공부를 한다니 그래. 그런데 문제는 영탁들이 양아치 적군들과 싸우면서 점점 더 그들을 닮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거리에서 보면 양아치들과 전투를 벌이는 이들 역시 양아치로 보이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유비무환'을 국시로 삼고, 빨갱이들을 원수로 여기라는 프로파간다에 젖어 있던 영탁들에게 7-4 공동성명은 충격 그 잡채였다. 각자의 정권 유지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 술수 따위는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알게 무엇인가 말이다. 같은 해에 유신이 선포되는 그야말로 롤로코스터 같은 사건들이 수시로 발생한다.

 

사자클럽 깡패 영탁이 사실은 문학소년이라는 점도 작가가 예비한 하나의 클리셰이가 아닐까. 워즈워스를 인용해서 서정 넘치는 대필 연애편지를 쓰던 영탁은 첫사랑 보경을 다른 친구에게 빼앗기는 실연의 아픔도 겪게 된다. 뭣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의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어라.

 

그렇게 다사다난한 청소년기를 지나쳐온 영탁이 대학에 가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에 휘말려 경찰의 프락치로 변신한다. 그 출발이 사회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기른 장발족 모양 때문이었던가. 국가가 대중들의 사고와 모양새 그리고 입는 옷까지 규제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전체주의적 통제의 발로가 아닌가 싶었다. 대놓고 앙시앵 레짐에 대한 환멸과 혐오를 주제로 삼은 작가는 우회하거나 돌려까지 않고 정면도전장을 내던진다. 점점 왜 이 책이 블랙리스트라는 영광스러운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 같다.

 

시점은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고, 출판사에서 일하는 영탁에게 대형교회로 변신한 친구 성제는 사자클럽 회원으로서의 자신을 모습을 한껏 분칠한 자서전에 가까운 무언가를 대필해 달라고 요청한다. 물론 그에 따르는 금전적 대가는 물론이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 홍비서와 불륜을 저지르는 영탁의 처 미연은 알고 보니, 소싯적에 운동권 여학생이었단다. 과거를 꼭꼭 숨기고 있던 공수부대에 입대했던 사자클럽 친구는 빛고을에 끌려가 애먼 민간인들에게 총을 쐈단다. 또 다른 친구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극우 어버이 연합의 전신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뭐 이거 정상인 사람들이 하나도 없나 그래.

 

솔직하게 말해서 <사자클럽 잔혹사>는 이야기 보부상을 자처하는 작가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문학이라는 방식의 프레임에 욱여넣은 환멸과 혐오의 다른 표현이다. 낄낄 거리며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문득, 너무 적나라한 현실의 그것과 대면하면서 웃음기가 가신다. 너무 리얼리스틱해서 말이지. 어쩌면 저자가 묘사하는 그런 시절들이 현재가 아닌 과거라서 그렇게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 때와 별반 다를 게 없긴 하지만.

 

어쨌든 책은 너무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무언가 개운하지 않은 쓴맛이 입 안에 맴도는 그런 느낌이랄까. 바로 이시백 작가의 <용은 없다><응달 너구리>를 저글링하듯이 번갈아 가면서 읽기 시작했다. 후자에 좀 더 집중할 것 같다. 그나저나 내가 산 <응달 너구리> 책은 도대체 어디에 쳐박혀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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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10-14 1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시백 작가 책들은 정말 재밌어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뭔가 개운하지 않은 맛이 맴돌죠.

레삭매냐 2024-10-14 22:44   좋아요 1 | URL
지금 <응달 너구리> 읽고 있는데
정말 재밌네요.
개운하지 않은 그런 맛!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그레이스 2024-10-16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찾으셨군요
며칠전 한강 책 찾느라 책장을 다 뒤졌는데...
다른 책들 발견하곤 아! 이책이 여깄었네! 하는 제게 엄마 또 시작이라고 하는 딸들...ㅋㅋ
일상입니다.
결국 소년이 온다 한권은 못찾았습니다.
이시백!
검색하러 고고!

레삭매냐 2024-10-16 17:23   좋아요 2 | URL
단군 이래 문학계의 벼락 같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장안의 지가가 오른
다고 하더니만, 그 말이 하나
틀리지 않네요.

이시백 작가의 책들 아주
재미집니다.

고양이라디오 2024-10-16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를 보고 만화책인줄 알았습니다ㅎ 리뷰를 보니 재밌어보여서 읽어보고 싶네요^^

이시백작가, 덕분에 새로운 작가 알고 갑니다^^

레삭매냐 2024-10-16 19:00   좋아요 1 | URL
아주 야생이던 시절에 대한
파란만장한 리포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교회 집사님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비슷해서 깜짝
놀랐답니다.

이시백 작가, 대단한 필력이
더군요.

페넬로페 2024-10-18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들어본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아는 작가는 박시백이었어요.
소설가 이시백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필력이 대단하다시니 관심 가지겠습니다^^

레삭매냐 2024-10-19 00:51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저도 자꾸만 박시백 작가
하고 헷갈리게 되더라구요 ^^

아주 유쾌한 작가여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