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사실 그전에 <압살롬, 압살롬><성역>을 동시다발적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처음으로 읽은 포크너의 책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로 기록되게 되었다. 아 그리고 보니 정말 오래 전에 <소리와 분노>에도 도전하지 않았었나. 어제 서가 정리를 하다가 <소리와 분노>를 찾아서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더라. 아마 완독하지 않아서라고 해두자.

 

예전에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저작권이 잠시 풀렸을 적에 포크너의 책들도 그랬다고 하지 않았나. 그 시절에 사둔 책들인지 어쩐지 모르겠다. 헤밍웨이의 책들은 우수수 출간된 것 같은데, 포크너는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인기가 없어서 그런지 몇 권이 없는 것 같다. 일단 보유하고 있는 책부터 하나씩 읽어야지 싶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는 소설 초반에 죽는 번드런 집안의 엄마 애디다. 어머니가 예전에 하시던 말씀이, 내가 죽어서 누워서 집안 돌아가는 꼴을 봐야 하는데라고 자주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아마 병에 걸려 열흘 정도 앓고 갑자기 죽은 애디 번드런 여사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을까.

 

이십대 후반의 장남 캐시는 엄마가 죽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부재를 대비해서 관을 만들고 있다. 아니 벌써부터 콩가루 집안의 향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그리고 제퍼슨 출신의 애디 여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이 죽으면 고향인 제퍼슨에 꼭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번드런 집안 5남매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셈이다.

 

애디 여사가 죽고 나서 바로 폭우가 쏟아지면서 제퍼슨으로 가기 위한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가 무너져 버렸다. 엄마의 관을 마차에 싣고 제퍼슨으로 향하려던 번드런 식구들의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계절은 미시시피의 무더운 7월 즈음이다. 워낙 가난해서 시신에 방부제를 넣을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나중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른다.

 

가장 앤스 씨는 융통성이라고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다. 번드런 집안의 우환을 아는 이웃 버논 툴과 이웃들이 번드런 집안에 장례 행렬에 숙소와 먹을 것을 제공하려 하지만, 앤스 씨는 그런 호의들을 모두 거절하고 헛간이나 야외에서 지내겠다고 고집한다. 경야를 한다는 차원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모두 59개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 이야기마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들의 시선으로 사건 사고를 바라보는 관점들로 서사가 진행된다. 이런 구성 때문인지 소설의 절반 정도까지는 정말 순식간에 따라가지 않았나 싶다.

 

소설의 모든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번드런 집안의 유일한 딸인 듀이 벨(17)은 레이프라는 남정네와 정분이 나서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레이프는 듀이 벨에가 10달러를 주면서 약국에 몰래 가서 임신중절약으로 아이를 지우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래서 제퍼슨으로 가는 길에 듀이 벨은 수시로 약국에 들러 보지만, 역시 남부답게 의사들은 그런 불법적인 약의 판매를 거부한다. 결국 이사한 놈팡이에게 걸려 이용당하게 되는 듀이 벨. 예나 지금이나 이런 나쁜 놈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죽은 애디 여사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바로 주얼이었다. 주얼은 번드런 농장의 힘든 일에도 불구하고, 따로 추가 노동을 해서 말을 샀다.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보상인 셈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중고 자동차를 한 대 구입한 거라고 할까. 엄마 애디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주얼은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다. 막둥이 바더만은 엄마를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철부지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달은 아마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지 아마.

 

내가 생각할 때 가장 문제적 인간은 바로 앤스 씨였다. 그의 고집 때문에 다리가 무너진 상태에서 여울목에서 강을 건너려다가 식구들이 몰살당할 뻔하기도 한다. 상류에서 그야말로 로켓처럼 날아오던 통나무에 마차가 박살나고, 애디 여사의 관이 강물에 떠내려 갈 뻔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지점에서 일단 애디 여사의 관을 가매장했다가 나중에 이장하는 방법도 있는데, 다른 계절도 아니고 푹푹 그 여름날에 제퍼슨 행을 고집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모든 식구들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말이다.

 

이 무능력한 가장은 죽은 고인의 장례 행렬을 유지하기 위해 장남이 축음기를 사겠다고 꼬불쳐둔 돈을 빼았고, 듀이 벨에게 반드시 필요한 돈마저 양심의 거리낌 없이 강탈하지 않았던가. 어머니가 죽은 마당에 식구들을 절대적으로 보살펴야 하는 가장이 하는 결정과 판단마다 가족들을 위험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다. 소설의 엔딩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애디 여사의 관점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어쩌면 타나토스행 그리니까 죽기 위해서가 아닌가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너무나 숙명적인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우리가 먹고 성장하고, 사유하고 싸우고 또 노동하는 이유가 결국에 가서는 죽기 위한 일련의 준비 과정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긴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죽은 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산 사람들이 치르는 희생을 보면 또 할 말이 없어지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번드런 가족들이 고인에 대한 애정이나 의리가 있는 건 또 아닌 것처럼 보인다. 당장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들부터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번드런 가족의 제퍼슨행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될 가족 해체에 대한 전주족이 아니었을까? 이미 둘째 아들 달은 헛간 방화사건으로 경찰에게 체포되어 잭슨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지 않았던가. 다리를 다친 장남 캐시를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콘크리트 부목을 만드는 장면도 기가 찼다. 이러다가 멀쩡한 사람 잡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1930년 발표된 작품이다. 전후 아찔할 정도의 경제적 호황과 더불어 불과 1년 전에 시작된 경제공황으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미국의 호경기는 천당과 나락을 오가는 그런 시절이었다. 가난한 번드런 가족은 관을 실은 마차로 제퍼슨으로 향하지만, 그 시절에도 이미 자동차가 있었다. 제퍼슨 시내에 번드런네가 등장했을 때, 참을 수 없는 시취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거의 적선하다시피 해서 그들을 마을에서 내쫓는 장면은 희비극의 정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빈부의 격차는 다양한 방식으로 소설에서 보여진다.

 

앤스 씨의 비열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엔딩 시퀀스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현재를 다루면서, 도대체 번드런 집안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드러내는 플래시백의 조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기대할 수 없게 된 불행을 접한 번드런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돕겠다고 나서는 이웃들의 따듯한 마음은 미시시피 출신 작가의 자부심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 보여지는 남부의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는 또 반대일지도 있겠지만.

 

벌써 4월이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다음 달에는 읽다만 포크너의 <압살롭, 압살롬><성역>을 마저 읽어야지. 그리고 보니 <성역>도 사두긴 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다 읽고 나서 포크너 최고의 역작이라는 <소리와 분노>도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땐 너튜브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하나 어쩌나. 어쨌든 포크너의 첫 책으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대단히 만족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본격 한중일 세계사 19 - 1904 러일전쟁 본격 한중일 세계사 19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잊을만 하면 나오는 굽시니스트 작가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가 이제 대망의 완결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시리즈 만화의 근본을 지키기 위해 20권을 마무리할 거라는 단호한 의지를 19편에서 보여 주었다. 그리고 거의 500쪽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을 제공한다. 이거 쉽지 않은데 그래.

 

어제 도서관에 에드나 오브라이언 작가의 책을 빌리러 갔다가 문득 이 시리즈 생각이 났고, 출간된 지 4개월이 지나니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냉큼 빌려다 읽다 잠이 들어 버렸다. 아 달콤한 낮잠이여.

 

일단 중국 청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의화단 사태의 마무리로 시작한다. 8개국 연합군의 무력은 청나라의 그것을 압도해 버렸고, 청나라는 당장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의화단 사태로 청나라는 거의 서강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열강이 원하는 조차지들을 내주면서 국가의 위신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19세기 내내 전 세계에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 영국의 결정이 청나라의 존속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러시아는 의화단 사태를 계기로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증대했고, 철도 부설을 비롯한 막대한 투자로 만주를 거의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게 됐다. 이에 영국은 극동에서 러시아를 저지할 파트너로 일본을 선택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존재가 된 청나라는 답이 없어 보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싶다.

 

차르의 신임을 얻은 사업가 출신의 정치가 베조브라조프는 만주를 넘어 한반도에서 일본을 저지한다는 신박한 플랜을 계획했다. 만주 확보를 위해 만주가 아닌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의 대륙 진출을 차단하겠다는 설정이었다. 1901<압록강 목재회사>를 설립해서 한반도 북부의 임업권을 차지한 베조브라조프는 압록강 유역 곳곳에 임업기지를 가장한 군사기지를 세우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일동맹의 압박으로 러시아는 결국 만주에서 철병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한편, 당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 구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예견했고, 미국은 지는 편인 러시아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만주와 한반도를 집어 삼킨 일본은 반드시 가까운 미래에 미국과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예언은 태평양전쟁으로 현실화되었다.

 

일본 헌정회 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니 패스. 그리고 제주도에서 벌어진 이재수의 난도 흥미로운 지점이 없지 않지만 나중에 다시 한 번 공부해볼 지점이 있다고는 생각한다. 병인양요 당시와 달리 프랑스인들이 죽거나 그러지 않았고, 본국 프랑스에서 정교분리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점 정도. 러일 대결의 막판은 러시아가 용암포를 조차하면서 양국간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최절정기였던 20세기 초, 러시아나 일본 모두 자주국이었던 조선과 청나라의 의사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만환 교환론 같은 철저하게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조건으로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신생 제국 일본의 고민은 자신들에 비해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월등한 러시아와 싸워서 과연 이길 수 있을 것인가였다. 이기지 못할 전쟁이라면 당연히 싸우지 않고, 교섭으로 최선을 도모하는 게 상책이다.

 

여기서 잠깐 간도 관리사로 북간도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이범윤이 등장한다. 오래 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두만강(혹은 토문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한다는 합의는 청나라의 힘이 빠지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이용익의 지원을 받는 이범윤의 민병대가 간도 지역을 사실상 장악했다고 한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앞서 일단 청나라와 조선 양국의 중립을 확인한다. 10년 전의 청일전쟁에서 꿀을 빨았던 일본의 조야는 이번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최소한 비용으로 엄청난 영토할양과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꿈꾸면서 다시 한 번 전쟁이라는 도박판에 뛰어 들게 된다. 얼추 비슷한 실력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상대로 일본 연합함대의 기습으로 러일전쟁의 서막은 시작되고, 1904210일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정식으로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이익선으로 설정하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만주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고, 대신 북위 39선을 기준으로 해서 비무장지대를 설정한 것을 주장했다.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고 했던 일본에게 러시아의 제안은 바로 묵살당했다. 압록강을 DMZ로 삼자는 일본의 주장 역시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교로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는 당연히 폭력적 방법이 동원될 차례다.

 

개전 13일 뒤인 일본은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조선을 사실상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서 신속하게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고, 뤼순항과 봉천의 러시아군 주력을 격멸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겼다. 서구 열강들은 일본이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은 유럽에서 단선철도를 통해 병력과 보급을 받아야 하는 러시아 제국군을 상대로 초전부터 승기를 잡아 가기 시작한다.

 

수차례에 걸친 일본 연합함대의 뤼순항 폐색작전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동안, 일본 육군은 압록강을 건너 목표인 봉천의 러시아군 주력을 잡기 위해 쾌속의 진군을 개시했다. 하지만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이 사령관을 맡은 뤼순 방면 3군은 콘트리트 벙커와 기관총으로 곳곳에 요새화된 러시아군 진지를 상대로 무모한 육탄돌격을 반복하면서 어마어마한 병력 손실을 입기에 이르렀다.

 

일본 연합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러시아의 최강 발틱 함대가 마침내 출발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전쟁이 장기전이 될수록 일본에게 불리하다는 건 상식이었다. 일본 국가 예산을 초과할 정도의 막대한 전비 부담 때문에라도 일본은 신속하게 뤼순항을 점령하고 봉천의 러시아군을 격멸해야만 했기 때문에, 노기 사령관의 무모한 돌격이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설상가상으로 극동에서 전쟁을 담당하던 러시아군 수뇌부 간의 비협조적 태도도 심각한 문제를 유발했다. 지상전에서 충분히 유리한 지형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군의 진격을 돈좌시키고 요격할 수 있었지만, 일본군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음에도 스스로 전선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유능한 제독과 장군들이 어이 없이 전장에서 사건 사고로 전사하는 등 사기면에서도 많은 패착을 보여 주었다. 굽시니스트 작가의 만화/글을 보다 보면 러일전쟁은 누가누가 잘 싸우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상대적으로 덜 삽질을 하느냐가 관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교착된 뤼순항 전투와 봉천에서 많은 수의 일본군 전상자들의 수치가 치솟으면서 일본 국내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선에서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준 제독과 특히 노기 마레스케에 대한 비판은 하늘을 찌를 판이었다. 하지만 노기의 장남 노기 가츠스케(남산전투, 복부관통상)와 차남 야스스케(203고지 전투)가 모두 러일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잠잠해졌다고 하던가.

 

그렇게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이 1905년 정월에 뤼순항을 점령하는 것으로 19권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그전인 1904822<1차 한일의정서>가 조인되면서 조선의 망국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굽시니스트 작가는 러일전쟁에 앞서, 조선이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 편에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상상을 가정해 본다. 그랬더라면 조선의 망국이 좀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전쟁 통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게 되지 않았을까. 결론적인 이야기지만, 고종의 중립 선언으로 국가 조선의 수명은 몇 년 더 유예되었을 뿐이었다. 의화단 사태로 청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세계제국 영국의 존속 결정으로 겨우 10년 더 유지되었을 뿐이다. 마치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처럼 강력한 서구 열강이라는 태풍 앞에 약소국의 운명은 촛불과도 같지 않았나 보다.

 

이번 <본격 한중일 세계사> 19편을 보면서, 예전에 너튜브를 통해 시청한 <러일전쟁> 시리즈와 전쟁을 다룬 일본 영화 리뷰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203고지를 향해 일본 결사대라는 백의대가 돌격하고, 러시아군 진지에서 기뢰 폭탄을 굴리는 장면이 바로 연상됐다. 태평양전쟁 당시, 과달카날에서 미해병대를 향해 무모한 야습을 감행하던 일본군의 모습이 38년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다음 마지막 20편에서는 1910년까지 6년간의 역사를 다룰 예정이라고 하는데, 600쪽을 훨씬 넘기는 대작이 출현할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란다. 지난 100년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어지럽고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 질서가 빚어내는 격랑의 역사가 그 시절과 중첩되어 보이는 건 나만의 생각이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평점 :
품절



 

12년 만에 구병모 작가의 <파과> 리뷰를 찾아서 읽어봤다. 이유는? 이제 곧 이혜영 배우가 조각으로 분한 영화 <파과>가 개봉할 거라고 해서. 그런데 파과가 무슨 뜻일까. 무려 12년 전에 읽은 책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으깨진 과일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영화 트레일러는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12년 전의 내 예언도 맞았다. 영화화될 거라는.

 

그리고 <파과>의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파쇄>의 존재를 알게 됐고, 한 걸음에 도서관에 가서 빌려서 읽었다. 100쪽이 되지 않는 단편이었다. 오래 전에, 집이 영화관과 도서관 근처에 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한 시절이지만, 살던 집 근처에 영화관이 들어와서 저녁 시간에 어슬렁거리며 영화를 보러 가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두 번째 소원인 집 근처 도서관이 있어서 참 좋다.

 

전작 소설 <파과>에서 65세 무려 45년 동안 방역업자(킬러)로 복무해온 조각의 마지막 서사에 방점을 맞추고 있다면, <파쇄>에서는 조각의 빡센 도제 시절을 그리고 있다. 문득 구병모 작가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자신이 살면서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을 무시무시한 킬러에 대한 단상들을 짧지만 강렬한 서사에 녹여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것 또한 작가의 역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숲 속으로 일종의 전지훈련을 떠난 조각과 그의 사부 류(?)는 거의 인간의 극한에서 단련을 시작한다. 언제라도 사부의 등짝을 바닥에 눕히게 한다면 하산해도 좋다라는 단서와 함께 사선에 가까운 그런 수업이 시작된다. 사부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습격은 기본이다. 방심한 틈을 노리고 뒤통수로 날아드는 목봉을 피하지 못하면 즉사할 지도 모른다. 심지어 손발을 결박해서 숲 속에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 탈출하지 못하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독사에게 당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런 실전을 방불케하는 고된 훈련이 조각의 현역 45년을 담보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방역업자에게 필요한 건,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방심하면 안된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구병모 작가가 만들어낸 이 조각이라는 캐릭터는 너무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시작과 끝을 마련해 두고, 중간을 채워가는 작법은 또 어떨까. 그 기간이 무려 45년이나 된다고 한다면, 도대체 조각이 전성기일 때는 어떤 활약을 했단 말인가. 생각만 해도 짜릿해지지 않는가. 시리즈의 탄생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다.

 

작가는 마치 자신이 조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전지적 시점에서 킬러의 심리를 근원까지 도달해서 디테일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길복순>에서 킬러 복순이 보여준 것처럼 확실히 총이 깔끔하고 신속하긴 하지만, 철저하게 기도비닉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총보다 칼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나중에 그녀의 시그니처 도구가 되는 벅나이프를 손에 쥐게 되는 순간, 죽음의 과수원으로의 초대장이 발부된다.

 

그리고 보니 전작 <파과>에서 보여준 것처럼, 으깨진 과일 그러니까 죽음의 과수원의 연료는 희생 제물의 피로 이어지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국어사전에서 <파과>의 뜻을 검색해 보니 "흠집이 난 과실"이라는 뜻과 다른 한자로 여자 나이 16세를 뜻한다고 한다. 엉뚱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방역업자 조각이 이 업계에 입문한 나이가 16세라는 설정은 또 어떨까.

 

어쨌든 영화 <파과>는 이달말에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스크린에서 정말 이혜영 배우를 오랜만에 보게 될 것 같은데, 이 영화는 극장에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제거한다는 방역업계의 대모 조각이 등장하는 또다른 스핀오프를 기대해 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5-04-18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고편 보는데 무척 재미있는 액션 영화 같더군요.근데 소설도 영화만큼 재미있을지 궁금해 집니다.

레삭매냐 2025-04-18 19:38   좋아요 0 | URL
12년 전에 소설 <파과>를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년에 촬영을 마치고 드
디어 개봉박두라고 하는군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
만, 소설도 상당히 재밌답니다.

그레이스 2025-04-18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병모 아가미 읽고 오래 여운이 남았던 기억이 있어요.
아직 파과는 못읽었어요

레삭매냐 2025-04-18 20:52   좋아요 1 | URL
<파과> 추천하는 바입니다.

영화 개봉을 맞이하야 다시 한 번
읽어야 하나 어쩌나 고민 중이랍니다.

<아가미> 궁금해지네요.

coolcat329 2025-04-19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파과>의 스핀오프소설이군요!
이혜영 배우 얼굴이 크게 나와있는 영화 포스터를 어디선가 길을 지나가다 보고 ‘아 이혜영!‘ 했는데 그 영화가 또 파과였네요! 저도 이 소설 참 재밌게 읽었고 강렬했어요.
제가 생각한 조각과는 좀 다르지만 이혜영 배우가 보여줄 조각도 기대됩니다.

2025-04-19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 끝의 정원 - 바깥의 소설 30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4월에는 왜 이렇게 책 읽기가 지지부진한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복잡한 시국 탓이 아니었을까. 설상가상으로 트럼프가 촉발한 관세전쟁으로 환율까지 치솟고, 실물경기는 계속해서 추락 중이고 뭐 그렇다.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는다. 여름이 온 것처럼 더웠다가 눈에 우박까지 내리니 말 다했지.

 

그래도 지난주에 중고서점에 들러서 가브리엘 루아라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책 <세상 끝의 정원>을 구해서 읽었다. 아쉽게도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은 책이라 중고책으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책들은 점점 더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도 중고서점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려나.

 

가브리엘 루아는 프랑스계 캐나다 작가로 매니토바주 위니펙 부근의 생보니파스 출신이다. 사진을 찍을 때, 턱을 괴는 모습을 반드시 취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진짜 생전의 사진들을 보니 그런 설정이더라. 놀랍군 그래.

 

<세상 끝의 정원>은 표제작을 포함한 네 편의 단편소설이 담긴 소설집이다. 이민자들의 나라는 이웃한 미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브리엘 루아의 소설집을 읽고 나니 캐나다 역시 만만치 않은 이민자들의 나라였다. 첫 번째 작품인 <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로 가려는가?>에서는 중국 출신의 쿨리 삼리웡이 캐나다 호라이즌(지평선)에 이민와서 조촐한 식당을 차리고 살아가는 단출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식당은 반드시 필요한 그런 장소일 것이다. 삼리웡은 이민자 지원 협회에서 빌린 돈으로 호라이즌에 테이블 네 개 짜리 식당을 차리고 손님들을 받는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지평선 마을에서 살았지만, 그는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역 만리 캐나다에서 살지만 결국 그는 조상들의 땅에 가서 묻히길 원했던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다음, 삼리웡은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지평선 마을 사람들의 환송연으로 그곳을 떠나게 된다.

 

아 그리고 석유 시추로 호황을 맞게 된 지평선 마을에서의 삼리웡의 식당 영업을 역효과를 발생시켰다. 결국 당국의 위생검사 직격탄을 맞고, 또 새로운 스타일의 경쟁자가 등장하면서 삼리웡은 정든 지평선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나그네 길에 다시 나선 삼리웡은 지평선 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은 마을에서 새출발을 예고한다. 오래된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대로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말이 참 와닿는 그런 사연이었다.

 

<한 나그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는 캐나다 오지 마을에 사촌 행세를 하며 찾아든 어느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는 이웃은 물론이고, 친척들과도 자주 왕래를 하지 않게 핵가족 시대에는 정말 낯설게 들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잘 모르는 친척이라며 누군가 찾아와 얼마간 숙식을 부탁한다면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아니 그전에 철저하게 신원 조회부터 하려고 하지 않을까. 사실 너무 오랫동안 왕래를 하지 않아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얼마 전, 친척분 장례식에 가서 본 분들이 내게는 그랬다.

 

아버지는 예의 친척을 호의로 수용하지만, 어머니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의 정체가 드러난 뒤에는 입장이 역전된다. 여기저기서 비슷한 행적을 보인 나그네는 가정의 진짜 실력자에게 환심을 사는 정확한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가브리엘 루아 작가의 청년기가 대충 100여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우두 골짜기>는 정든 고향 우크라이나를 떠나 캐나다에 정착하기 위해 여기저기 임장을 하러 다니는 일단의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행정관들은 그들에게 정말 좋은 땅을 구해주려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가능하면 자신들이 살던 곳과 비슷한 그런 곳을 원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우두 골짜기>였다. 정부 관리는 결사적으로 그곳을 적합한 땅이 아니니 더 나은 곳을 수배해 주겠다고 하지만, 그들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가 없다.

 

문득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고향에서 가져온 관습이나 풍습을 모두 재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언어부터 배워야 한다. 아마 어쩌면 첫 세대는 불가능한 그런 미션일 지도 모르겠다. 우두 골짜기의 척박함이야말로 우크라이나 이민자들에게는 정말 익숙한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다시 난민의 시대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고단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1975년에 발표된 <세상 끝의 정원>이 역시 소설집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죽어 무덤에 누은 마르타 여사에 대한 이야기. 마르타와 그녀의 남편 스테판은 폴란드 출신 이민자들이다. 이미 자동차가 굴러 다니는 세상이지만, 그들의 세계에는 여전히 수레가 공존한다. 가뭄을 피해 고향을 떠나왔지만,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가뭄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마르타와 스테판을 괴롭힌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마르타가 노구를 이끌고 가뭄에 그 좋아하는 꽃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 물을 퍼 나르는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타인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행동들을 하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남편 스테판도 아내 마르타의 그런 행동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 중에 그런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장성해서 마르타와 스테판의 곁을 떠나는 세 자녀들은 완전한 캐나다 사람들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자식들의 부재가 아쉽긴 하지만, 그 또한 이민자들의 어쩔 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간주하고 마르타와 스테판은 받아들인다. 무료해 보이는 부부의 일상을 관찰하듯이 그대로 전달해 주는 가브리엘 루아 작가의 서사는 심심하면서도 묘한 중독성을 품고 있다.

 

가브리엘 루아의 <세상 끝의 정원>은 무려 21년 전에 현대문학에서 나온 <바깥의 소설> 시리즈였다. 낡은 책의 타인의 장서인까지 찍힌 빛바랜 책을 읽으면서 왠지 20세기 캐나다의 어느 이민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조금 들었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느꼈던 삶의 무게는 지금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 궁금해졌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04-14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14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4-18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민자의 삶은 어디에서건 고단하고 외롭고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레삭매냐 2025-04-18 20:53   좋아요 1 | URL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아닌
타지에서의 삶은 어쩌면
신산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숙명이 아닐까요.
 
산 자들의 밤 - 제15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다키구치 유쇼 지음, 이승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월의 마지막 날, 다키구치 유쇼의 <산 자들의 밤>을 읽는다.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아 중고서점에서 지난주에 사서 읽기 시작했다.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을 줄 알았으나,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라는 변수가 발생해서 좀 늦어졌다.

 

지난 12월에 고모님의 장례를 치러서 그런지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농사꾼으로 살아온 핫토리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인 일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사실 너무 많은 인원들이 등장하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할 수조차 없다. 우리 친척들 이름도 모르는 판에, 소설에 나오는 핫토리 5남매 부부 그리고 10명의 손주들과 증손 슈토까지 기억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지 싶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는다면 일본 사람들은 초밥을 먹는다는 점이었다. 식구들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건, 한국이나 일본이 다를 게 없지만. 오래 전에 본 영화 <학생부군신위(1996)>처럼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해서 떠들썩한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게 그렇게 이야기들이 넘실거린다.

 

고인의 손주 라인인 중고등학생 녀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례식장에 비치된 츄하이(하이볼?)나 맥주를 꺼내 마시는 장면은 아무래도 낯설었다. 우리나라 장례식자에서도 그런가. 최근에 문상을 갔던 장례식장에서는 술을 제공하지 않던데,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 항상 술에서부터 문제가 출발하지 않던가.

 

고인의 시신은 집회소에 안치되어 있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핫토리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기 시작한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중학교 때부터 등교거부를 하다가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요시유키 같은 말썽꾼도 등장한다. 아무래도 식구들이 많다 보니 이런 문제아 하나 정도는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지 않나 싶다.

 

요시유키의 동생 지카는 자기보다 10살 많은 오빠의 삶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긴 소설에 등장하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번듯한 일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곁을 떠나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게 젊은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딱히 하는 일도 없다. 나중에 요시유키가 무슨 음원을 만든다는 것을 동생 지카는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로부터 극적인 무슨 일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은 그렇게 아주 조용하고 무덤덤하게 진행된다.

 

미국 위스콘신 출신의 다니엘과 가마쿠라 바닷가에서 자란 사에가 만나 고인의 증손 슈토가 태어났다. 이 또한 아주 기묘한 인연이 아닐까. 초상집에서 경야를 치르던 식구들은 온천랜드로 우르르 몰려가 온천욕을 즐기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연을 다한 이는 이제 초상이 끝나는 대로 화장하고 신사로 모셔지려나. 그래도 산 사람들은 산 사람들 대로 계속해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

 

집회소(일본식 장례식장)에서 내가 기대한 건, 고인이 남긴 유산을 두고 한바탕 치르게 될 전쟁(?)이었는데 의외로 또 그런 장면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산 고인에게 돈이 될만한 재산이 없어서였을까. 고인이 살던 집은 근처에 살던 아들 야스오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원만하게 처리되었다. 대가 한국의 장레식장에서 벌어지는 막장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문제아 요시유키는 그대로 같이 사는 것으로 결정됐다.

 

참 소설에 등장하는 테레사 텐(등려군)<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라는 곡이 궁금해서 너튜브로 찾아서 들어보기도 했다. 애절하기도 하여라. 고인의 평생지기 핫짱은 고인과 함께 떠났던 어느 해의 츠루가 여행을 추억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도 오래 되어 그런진 몰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또 어디선가 기억은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고 했던가. 둘이서 여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산 자들의 밤>을 읽기 전에 무엇을 기대했을까. 아마 우리와는 다른 일본의 장례 문화, 고인을 추모하는 방식 같은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했던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수용할 수 있다면, 그나마 좀 마음의 위안이 되려나. 고인과의 친밀도에 따라 아마 자신이 느끼는 상실감의 강도가 다르지 않을까 싶다. 해외에서는 고인이 사전에 자신의 장례식에 대비해서 눈물바다 대신 유쾌한 축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이벤트를 준비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역시나 우리네 전통과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다.

 

책의 말미에 달린 <야곡>에서는 무언가 허무주의적인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마가 단골손님들을 상대로 운영하는 주점 이야기였던가. 나는 <산 자들의 밤>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착각했었네. 다른 건 모르겠고 석쇠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시샤모구이는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언제고 이 책은 다시 한 번 읽어야봐야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계속해서 주변에서 상을 당하는 이들이 있어 그런지, 소설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참 낯설지 않게 다가오더라. 무언가 하고 싶은 말들이 더 있었는데 미처 담지 못한 그런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