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노이의 불평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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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시작한 모던 라이브러리 100 리스트에 9번째로 필립 로스의 초기 걸작이라고 칭송받는 <포트노이의 불평>을 추가했다. 작년에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반절쯤 읽고 나서 덮어 두었다가 지난주에 다시 도전해서 완독했다. 출간된 지 46년이 지나도록 필립 로스가 구사하는 언어는 영화 <아메리칸 파이>(이 영화도 이제 한물갔지만)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원색적이면서도, 섹스에 미친 주인공 앨릭잰더 포트노이의 심리분석 혹은 자기 내면적 고백을 통해 현대인의 욕구불만의 원천을 탐색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을 당한 지난 이천년 동안 핍박받아온 유대인의 억압된 리비도를 비록 지면으로나마 마음껏 분출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올해 서른세 살 먹은 뉴욕의 잘나가는 엘리트 변호사 앨릭스 포트노이는 시민의 공복으로 근무하고 있다. 월반을 밥먹듯이 하고 고등학교 수석졸업은 물론이고, 중부의 앤티오크 대학을 졸업하고 그야말로 성공의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지금 슈필포겔이라는 정신과 의사 앞에서 자신의 수치스럽고 어두운 과거에 대해 남김없이 까발리고 있는 중이다. 인간기회위원회 부감독관이라는 지위에 맞지 않을 법한 상스러운 비속어를 남발하는 이 유대인 청년에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보험쟁이로 정식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 잭 포트노이는 평생 변비에 시달리며 주인공 앨릭스와 누이 해너를 키어왔다. 아버지보다 포트노이를 더 괴롭히는 가족 구성원은 바로 어머니 소피다. 유대 율법에 따라 자식들을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자기 삶의 진정한 목표라고 설정한 어머니는 사춘기로 이제 막 접어드는 아들 포트노이를 옥죄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반항이라고 해야 할까? 이성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성에 대한 성적 상상으로 앨릭스는 희대의 마스터베이션 전문가가 되기에 이른다. 우윳병, 양말, 야구글러브 심지어 저녁식사로 먹을 간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 포트노이의 성적 일탈은 그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 음침한 청년의 과거 고백이 시간당 수백 달러가 드는 뉴욕의 어느 정신과 클리닉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포트노이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던 걸까? 정신과 상담이 자신의 치료(?)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주인공은 시간과 금전을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억압된 리비도는 말을 나눌 상대 혹은 공격대상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마마보이로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청년은 오랜 체험을 바탕으로 자아를 억눌러야만 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처럼 거의 일방적인 포트노이의 모놀로그가 끝없이 이어진다.

 

초기작 <포트노이의 불평>에서 필립 로스는 훗날 자기 문학의 전매특허가 되는 성을 통한 모든 문제의 해석이라는 주제의식을 수립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 등장하는 잘난 유대인의 전형이라는 이미지는 그의 소설 속에서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필립 로스 소설에 등장하는 성공한 일련의 유대인들의 이미지는 유년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비범한 학업 성취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성공한 변호사라든가 대학교수, 작가 혹은 아트 디렉터들의 이야기 심지어 불평마저도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대척점에 서 있는 성공하지 못한 이들의 인생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 아닌가. 이 성숙하지 못한 유대인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만나는 여성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그저 하룻밤의 정사 상대로 생각하는 경향을 눈에 띄게 드러낸다. <포트노이의 불평>에서도 자신이 꿈꿔온 모든 성적 판타지를 완성시켜준 이방인 여자친구 메리 제인 리드를 멍키라고 폄하하며 훈육시키려는 모습에서 경악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은 자신을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포트노이에게는 어림도 없는 수작에 불과하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는 나쁜 남자의 모범답안 같은 존재다. 그동안 자신을 성적으로 착취한 포트노이를 멍키가 언론에 다 까발리겠다고 하자 불안에 벌벌 떠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직접 행동에 나선 교육받은 진보적 사회주의자로 행세하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위선적인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한다.

 

매력적인 금발 이방인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주신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는 듯 행동하는 포트노이의 행동방식은 개인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누가 보기에도 무신론자인 포트노이가 얼토당토않은 선민의식을 발동시켜서 임신했다고 착각한 케이 캠벨에게 유대인으로 개종하라는 건 또 무슨 짓인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앨릭스 어머니 소피의 집요한 세뇌공작은 성공을 거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는 부지불식간에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타자에게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도덕적 우월감의 또다른 표현방식이 아니었을까. 그런 치졸한 방식의 정신승리야말로 앨릭스 포트노이가 극복하려는 강박관념의 원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심리적 압박이야말로 그들이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 성공을 거둔 원동력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한편,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엄청난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천재 피아니스트로 또다른 유대인 어머니의 자랑거리였던 로널드 림킨의 유서를 빗대어 조롱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 역시 어머니의 심리적 조종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다 자란 엄마의 마리오네트일 뿐이다. 매순간 매력 넘치는 멋진 이방인 여성과의 무분별한 섹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싶은 수컷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의 카운슬러 닥터 슈필포겔에게 악을 쓴다. 도대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런 개인의 성적 혼돈상태는 여권신장, 인종차별철폐 그리고 반전평화운동이 전 미국을 뒤덮던 1960년대 말의 시대상을 상징한다. 과연 슈필포겔 박사는 우리의 불쌍한 포트노이에게 어떤 처방을 선사할 것인가. 아니 그가 과연 치료는 가능한 걸까?

 

필립 로스의 소설 <포트노이의 불평>은 야누스의 얼굴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혹자에게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파렴치한 외설적인 소설로 읽힐 수도 있고, 또다른 이에겐 부모의 억압 아래 자란 불쌍한 청년의 신경쇠약을 극복하기 위한 파란만장한 성적 오딧세이로도 읽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트노이의 불평>은 어느 단편적인 해석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다채로우면서도 논쟁적인 소재들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로스는 이 소설이 발표된 후에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것 같다. 최근 읽은 필립 로스 후기 소설에 비해, 그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포트노이의 불평>은 거칠고 도발적이다. 그 점의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누구 말대로 이 책을 두 번 읽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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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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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평등하지 않다. 특히나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는 인간은 가진 것에 따라 클래스가 나뉜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평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진 인간도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게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려고 하는 걸까? 언젠가 버킷 리스트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죽음 앞에 서게 되면 그 버킷 리스트조차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싶다.

 

필립 로스가 73살의 나이(올해 그는 82세라고 한다)에 발표한 <에브리맨>을 오래전부터 읽어 보려고 노력해 왔다. 도서관에서 수도 없이 책을 빌렸는데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러다 지난주부터 필립 로스 바람이 불었는지(촉발제는 <네메시스>였다), <네메시스>와 <포트노이의 불평> 그리고 <에브리맨>까지 연달아 읽었다. 이번 주말에 있을 독서모임에 가기 전에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도 읽으면 좋겠지만 분량이 상당해서 가능할지 모르겠다. 지난주에 도서관에 최근에 출간된 그의 <죽어가는 짐승>을 빌리러 갔었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대신 읽은 책이 바로 <에브리맨>이다.

 

어디선가 필립 로스의 책들이 유대인 문학으로 분류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유대인 주인공들의 면면을 유심하게 살펴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제 죽음이라는 삶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 노작가는 이름 없는 무명인을 내레이터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야기는 망자의 장례식에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남기는 고별사로 시작된다. 장례식이 끝나고, 조객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망자는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네 뉴저지 뉴어크 시의 엘리자베스가 내레이터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던가. <에브리맨 보석상>의 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슬하에서 형 하위와 내레이터가 자라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잘 먹고 살다가, 노년에 이런 저런 수술을 하며 죽음과 맞서 싸운다는 것이 소설 <에브리맨>의 얼개다. 물론 고인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자그마치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노년에는 911테러로 공포에 휩싸인 삶의 무대였던 뉴욕 시티를 떠나 바닷가 콘도미니엄에 거처를 정하고 오랫동안 꿈꿔 왔던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주인공이 꿈꿔온 그림그리기는 아트 디렉터로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 그의 로망이자 탈출구였지만, 정작 은퇴 후에 그림그리기는 아무 의미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세실리아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과의 지속적인 불화는 그의 삶을 더 외롭게 만든다. 그나마 두 번째 헌신적인 부인이었던 피비 사이에서 낳은 딸 낸시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낙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부인이었던 메레테와의 결혼은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라고 자꾸만 되묻게 되는 그런 최악의 결정이었다. 세 번의 결혼이 주인공의 삶에서 어떤 변이의 과정이었다면, 그 변이를 촉발하게 만드는 사건으로 일련의 수술들을 꼽고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신체 기관이 정상기능을 하지 못하고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A/S 받으며 생명연장을 하는 거라고 늘상 듣곤 했는데 소설 <에브리맨>에서는 정말 그 어느 누구도 피해나갈 수 없는 그런 숙명,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개인의 ‘부질없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쪽 남짓한 이 짧은 소설은 가히 삶의 압축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동생인 주인공은 물질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천만장자 형 하위를 질투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물질적 소유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건강이다. 7년 연속으로 입원해서 6개의 (최근 어느 회장님이 시술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는) 스텐트와 카테터를 삽입하고 심지어 약한 심장을 위해 제세동기라는 기묘한 장치까지 몸에 넣은 주인공은 병치레 한 번 하지 않은 하위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흔 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은 여자들을 꾀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다고 해야 할까. 이걸 늙은이의 노망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살아 있는 인간의 생존의지라고 해야 할지 잠시 헷갈렸다.

 

희한하게도 대부분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현실세계의 물질적 궁핍을 걱정하는 이들은 드물다. 대신 다른 고민에 빠져 산다. 이건 명백하게 현실과 문학세계 사이의 괴리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어쩌면 막장드라마에 나올 법한 초현실적인 이야기야말로 괴로운 현실계를 잊게 해주는 마약 같은 처방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노년에 물질적 걱정 없이 멋진 콘도에서 그림교실을 운영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그를 아들들은 “행복한 신기료장수”라며 비아냥거린다. 물론 그도 아들들과의 화해를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과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를 랜디와 로니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은 노년의 주인공이 바란 관계의 원치 않는 소거로 귀결된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혈육인 낸시조차 편두통 때문에 쓰러진 엄마 피비에게 돌아가고, 주변의 지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뜨는 상황은 그가 계획한 뉴욕 복귀를 무산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힌 쇠락해 가는 유대인 공동묘지에서 어쩌면 자신의 묘를 팔지도 모를 무덤 파는 사람과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소설 <에브리맨>은 망자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특정한 내레이터가 소설을 이끄는 기존의 필립 로스의 소설과 변별점을 보여준다. 또 한편에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에게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만들어 주는 지도 모르겠다. 모두 실패한 결혼생활에서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주인공이 말년에 돌아갈 가정이 없다는 이유로 외로워하는 장면은 역설적이다. 젊어서는 그렇게 될 줄 몰랐단 말인가. 형 하위가 형수와 반세기에 가까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그 나이에 심지어 티벳 여행까지도 나선다), 네 명이나 되는 아들들과 손자들과 더불어 누리는 물질적 성공과 건강에 대한 주인공의 시기와 질투는 어쩌면 의무와 책임감보다 아내에게조차 감출 수 없었던 욕망에 충실했던 자기 삶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었을까. 그런 주인공의 욕망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소거된다.

 

바로 직전에 <포트노이의 불평>을 읽어서 그런진 몰라도, 죄의식과 욕구불만에 시달리던 삼십대의 마마보이 앨릭스 포트노이가 <에브리맨>의 칠십대 주인공이 된 건 아닐까 뭐 그런 엉뚱한 상상이 됐다. 이 책이 자그마치 11쇄나 찍었다고 하는데, 다른 필립 로스의 책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모양이다. 간결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담아낸 대가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죽음을 자신만의 유머로 부드럽게 블랜딩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멋지다.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22일 ~ 23일 1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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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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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의 열혈 팬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출간되는 그의 책들을 꾸준하게 사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책을 다 완독한 게 몇 권이나 되지? <휴먼 스테인>은 다 읽었고, <유령 퇴장>도 각별한 인연으로 만났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포트노이의 불평>은 읽다가 도중에 그만 뒀다. 그리고 다음 주에 있을 독서모임을 위해 그가 다 쓰고 나서 절필 선언을 했다는 <네메시스>를 집어 들었다. 지난 여름, 메르스 광풍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적당한 분량의 흡입력 있는 대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생각이었을까 이번에는 무사히 완독에 성공했다.

 

소설 <네메시스>의 주인공 유진 “버키” 캔터는 올해 23살 먹은 뉴저지 뉴어크에 사는 청년이다. 버키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고, 아버지는 절도죄로 복역한 전과자 출신이다. 그래서 버키의 조부모가 부모를 대신해서 버키를 키웠다. 시대적 배경은 1944년 6월이다. 저지대 뉴어크를 강타한 폴리오의 발병으로 뒤숭숭하기 그지없는 시절이다. 자신이 직접 폴리오의 희생자였던 FDR(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의 영도 아래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2차세계대전을 통해 탈출할 수가 있었다. 피끓는 청년들이라면 조국과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 아래, 일본과 독일을 상대하는 전쟁터로 향했겠지만 우리의 주인공 버키는 형편없는 시력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혜택이었을까 아니면 수치였을까. 필립 로스는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에게 예민한 이슈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대신 뉴어크 위퀘이크 거리에서 여름 놀이터를 감독하는 체육교사가 된 버키 캔터 선생님은 전쟁에 버금갈 만한 공포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폴리오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다른 말로는 소아마비라고도 불리는 폴리오가 뉴어크 전역에 창궐했는데,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위퀘이크 지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불량한 이탈리아 건달들을 혼자 힘으로 제압한 버키 캔터 선생님(분명 이 소설은 내레이터가 진행하고 있는데 왜 자꾸만 캔터 선생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재회> 편에서 설명이 된다)은 유대인 소년소녀 그리고 그들 부모의 우상이 되기에 이른다. 자신 역시 유대인이었던 필립 로스는 미국사회의 여전히 뜨거운 감자 같은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인종문제도 살짝 터치해 주는 멋진 센스를 발휘해주신다. 소설의 모든 장치를 작가가 고안한다고 가정했을 때, 무엇 하나 허투루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비록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전과자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할아버지에게 강인한 용기와 투쟁정신을 물려받고 어머니를 대신한 할머니로부터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자란 버키 캔터에게 또하나의 축복이 주어졌다. 그것은 동료교소 마샤 스타인버그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이었다. 폴리오의 공포로부터 멀리 떨어진 포코노 산맥에 있는 인디언 힐 캠프에 가 있던 마샤는 버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위퀘이크로부터 안전하고 평화로운 그리고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인디언 힐로 오라고 간청한다. 버키의 선택지는 하루가 갈수록 좁아진다. 위퀘이크의 놀이터에서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폴리오의 희생자가 되어 치르는 장례식의 비통함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는 야훼 신의 소위 “정당한”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미 신은 버키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 가지 않았던가. 프랑스에서 전투 중에 전사한 친구 제이크의 경우는 또 어떤가. 생의 대부분을 함께 하고, 미래도 같이 하리라고 생각한 소중한 이를 아무리 우연의 작용이라고 하지만 잃은 후의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버키가 느낀 종교적 분노의 연장선에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었던 1940년대 유럽대륙에서 히틀러의 나치일당에 의해 진행된 홀로코스트 비극이 맞닿아 있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신으로부터 그런 부당한 대우와 가혹한 죽음을 당해야 했단 말인가. 프래그머티즘과 합리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신대륙에서도 유대인들의 처지는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소설을 통해 증언한다. 폴리오가 공동체에 확산되어 가면서 서로를 불신하고 희생양을 찾느라 혈안이 된 가운데, 유대인들이 발병의 원인이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필립 로스는 이성에 우선하는 죽음, 다시 말해 존재의 소멸이라는 극한의 공포가 주는 야만의 시대를 문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우리도 이미 지난 여름의 메르스 사태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함께 살기보다 각자도생을 권하는 사회가 숨기고 싶어했던 추한 민낯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한다면 주인공 버키 캔터 선생님의 영혼은 순수하다 못해, 옛 제자에게 왜에 미친 순교자라고 불릴 정도다.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포코노 산맥의 인디언 힐로 도망친 죄에 대한 “네메시스”를 평생지고 가야할 업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그나마 가지고 있던 행복할 수 있었던 기회를 저버린 이야기로 이어지는 남자의 고백은 너무 슬프다. 폴리오를 겪고 나서 불구의 몸이 된 버키가 내린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은 그야말로 마스터클래스급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폭풍우가 가신 뒤의 인디언 힐에 내리쪼이는 눈부신 햇살은 그만큼 불안의 전주곡처럼 찬란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필립 로스는 다시 독자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년(개인)이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느냐고 말이다. 소설 <네메시스>의 진짜 내레이터 아널드 메스니코프(오래전 놀이터 시절의 캔터 선생님의 제자)가 아무리 버키에게 논리정연한 죄사함을 들려준다고 해도, 지난 27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신 외에 누가 버키에게 보상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필립 로스 작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독자의 감정개입과 분리의 순간을 절묘하게 만들어주는 내레이션 기법과 인생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인물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은 <네메시스>에서도 빛을 발한다. 버키 캔터 선생님이 시시각각 확산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필립 로스도 그가 할 줄 아는 전부가 삶에 천착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직조해내는 것이라면, 계속해서 그 일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딩데이트] 2015년 11월 11일 ~ 20일 11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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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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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 빌 스토너의 삶을 통해 현재를 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숨겨진 책의 발견이라는 점은 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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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뜨기 부처
하니프 쿠레이시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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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 출근길에 록웰의 <Knife>를 들었다. 예전에 어려서 팝송을 신나게 듣던 시절에 좋아하던 노래라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옛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매개로 음악만한 게 또 있나 싶어졌다. 지난 며칠 동안 읽은 하니프 쿠레이시의 <시골뜨기 부처>는 아마 1990년대 독자들에게 1970년대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그런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사실 1970년대, 그것도 영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서 작가의 인도를 따라 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소화해낸 느낌이다.

 

원래 영화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쿠레이시의 소설 데뷔작이기도 한 <시골뜨기 부처>의 주인공은 사우스런던에 사는 17살난 카림 아미르다. 소설에서 사우스런던이라는 교외, 혹은 제목에서 지칭하는 대로 시골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적 배경은 1970년대로 비트 제네레이션의 세례가 아직 지나가지 않은 듯, 잭 케루악의 소설 제목 <다르마 행려>가 눈에 띄어 반가웠다. 게다가 카림은 인도 검둥이라 불리는 혼혈이기도 하다. 아버지 하룬/해리는 모국 인도 봄베이 출신의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식민모국 영국에서는 하급 공무원으로 봉직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처 행세를 하며 영적으로 갈급한 이들에게 요상한 계시를 하며 일약 스타가 되기에 이른다. 하룬은 영국에 정착해서 산지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길치고, 아들 카림을 내세워 모임장소인 에바 케이의 집으로 향한다. 카림이 그곳에 목격한 것은 앞으로 펼쳐질 가정파괴의 전주곡이었다.

 

늘씬한 외모의 소유자 에바와 결국 바람이 난 아버지 하룬은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살림을 차린다. 두 아들 중, 앨리는 어머니가 그리고 카림을 아버지를 따라 나선다. 소설은 교외에서의 삶과 성공을 위해 달리는 에바의 노력으로 욕망의 도시 런던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 검둥이라는 둥, 카레 칠을 한 얼굴이라는 인종차별적 비하와 심지어 길가다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인 교외에서의 삶은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 사람들의 갈등을 정확하게 타격한다. 게다가 아버지와 함께 봄베이를 떠나온 안와르 아저씨는 자신의 딸 자밀라(급진적 진보주의자)의 사위로 자신과 같은 봄베이 출신의 샹제를 점지해서 데릴사위로 들이는 구식 결혼을 추진한다. 이미 자밀라와 숱한 섹스를 해온 카림에게 이런 상황은 불편할 수밖에. 게다가 샹제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결국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한 자밀라는 샹제와 부부가 된다. 그들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그런 어정쩡한 관계의 법적 부부일 뿐이다. 한편, 아버지 하룬은 물질적 성공만을 추구하던 이모부 테드에게 모든 것을 털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예시를 던져 멀쩡한 남자를 신경쇠약에 걸리게 만든다. 어쩌면 소설 <시골뜨기 부처>는 영국의 1970년대 막장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중요한 인물을 하나 빼먹었는데 카림의 새어머니 에바의 아들인 찰리 케이/히어로가 그 주인공이다. 초반부터 모든 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찰리는 결국 팝스타의 길을 걸으며 성공가도를 달린다. 카림은 여자를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찰리에게 동성애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살짝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사우스런던의 교외에 사는 모든 이들은 구질구질한 삶에서 탈출해서 신세계처럼 보이는 도시 런던행을 꿈꾼다. 그것은 마치 영국 제국주의의 침탈당한 식민지 인도 사람들이 꿈꾸는 영국행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영국에 도착한다고 해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신사의 나라 영국 사람들이 보여주는 노골적이지 않지만 파렴치한 차별이 아니었던가. 쿠레이시 작가는 그런 민감한 이슈에 더해,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유머를 섞어 넣는다. 회교도 출신 하룬이 부처 행세를 하자 배교자라는 표현을 쓰질 않나, 회교도 안와르 아저씨가 돼지고기 파이를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해치우고, 샹제와 결혼한 자밀라와의 질탕한 사랑놀음 장면을 친구가 목격하는 장면을 보라. 마냥 웃을 수만 없는 그런 스타일의 은근한 유머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안와르 아저씨가 운영하는 파라다이스 가게에서 벌어지는 소동과 해프닝은 정말 대책 없다.

 

소설의 1부 <교외에서>가 워밍업이었다면, 아미르 일가가 도시 런던으로 뛰어든 2부 <도시에서>는 한층 더 가열된 그들의 욕망이 분출한다. 에바는 아파트 인테리어를 해서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해 나가는 부동산 개발업자로 변신하고, 주인공 카림은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매튜 파이크를 통해 연극배우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 와중에 같은 극단 소속의 엘리너와 유사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1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하룬은 2부에서는 영성을 잃고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카림이 처음 맡은 배역을 뼛속까지 제국주의자였던 루디어드 키플링의 <정글북>에 나오는 정글소년 모글리였다. 어때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도시에서의 세련된 삶을 동경해온 카림에게 주어진 역할은 인도 토속 억양에 히피족과 펑크족이 물결이 이루던 당대에 반하는 옷 같지도 않은 팬티 하나 달랑 걸친 그런 모습이었던 것이다. 2세대 이주문학의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는 쿠레이시는 바로 그런 역설에 주목하고 있다. 아무리 영국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경고일까. 소설에는 수많은 경고와 교훈들이 등장하지만 이주민 자신이 느끼는 정체성 이슈에 대한 울림에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잘 나가는 찰리의 뉴욕행에 동승하기도 하고, 한 순간의 성공에 탐닉하기도 하지만 십대 소년에서 이제 이십대에 접어든 카림은 주위의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특히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엘리너의 관계가 사실은 자신의 성공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연출가 파이크의 농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런던으로 돌아오게 된다. 3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에 보통 사람이라면 체험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체험한 소년은 성장해서 삶이 행복만으로 가득하지 않고, 비통함도 느껴야 하며 무엇보다 익숙해진 것들이나 길들여진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주변의 산재한 가치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카림의 이야기에서 얻은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아쉽게도 나의 하니프 쿠레이시 작가의 독서 여정은 이제 단 한 권(<바디>)만을 남겨 두고 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작품이 달랑 세 편 뿐이니 어쩔 수가 없다. 열음사에서 시나리오 <마더>가 출간될 예정이라고 소설의 뒷날개에 적혀 있었는데 현실화되지 않은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한 작가의 글 세 편 정도는 읽어야 그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다행인지 그 기준은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꽤 두툼한 책이었는데 예상 외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올해 만난 베스트 10에 넣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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