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홀릭 두 번째 이야기 - 다시 만난 겨울 홋카이도 윈터홀릭 2
윤창호 글.사진 / 시공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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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여행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여행은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하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나에게 윤창호 작가의 윈터홀릭은 신선한 충격이었다고나 할까. 겨울여행에 긴 여행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창호 작가는 <윈터홀릭>에서 겨울여행의 고독과 즐거움을 자신의 장기인 사진이라는 프레임으로 잘 잡아냈다.

그의 전작인 첫 번째 윈터홀릭을 아직 보지 못해서 비교할 방법이 없지만, 스칸디나비아를 누볐던 전작과 겨울여행이 백미라는 일본 홋카이도 사이에는 묘한 공명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나는 걸까?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아니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세계의 많은 곳을 여행한 작가에게 여행이란 어느덧 삶의 일부분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윤창호 작가가 사진으로 담아내는 홋카이도의 풍경도 일품이지만, 역시 여행의 참맛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멋진 곳, 일상에서 잘 볼 수 없는 그런 풍광도 좋지만 역시 여행 에세이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하코다테에서 고장 난 카메라 수리를 위해 찾은 카메라의 명장 미즈코시 씨와의 조우는 참 인상적이었다. 장인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자신이 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과 삶의 원칙을 지키며 사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여행하는 나라의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축복이다. 서로 불편한 영어보다 그 나라 말로 소통한다면, 여행이 한결 즐거운 것이다. 작가의 일본 유학은 그래서 홋카이도 여행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여행하면서 굳이 무리하지 않는 그의 여행 스타일도 마음에 들었다. 아바시리 교도소행을 포기하고 미니 열차의 몸에 싣는 장면에선, 외로움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절대 고독의 세계를 즐기지 않나 싶었다. 발걸음이 인도하는 대로 홋카이도의 곳곳을 누비는 겨울 보헤미안 사진작가는 한때 구도자의 꿈을 꾸었다고 했던가. 이 지독한 리얼리스트는 몽상가의 얼굴도 갖고 있는가 보다.

정말 멋진 사진작가는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는 특별함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눈이 어디서나 일상적인 홋카이도에서 그 눈과 함께 사는 이들의 일상을 포착하는 테크닉이 정말 일품요리처럼 맛깔났다. 호텔보다 몇 배나 되는 요금의 료칸을 운영하는 오카미상의 단아한 모습, 선술집에서 마신 삿포로 맥주나 연어 알, 홍콩에서 온 여행객들의 설경을 바탕으로 한 사진 찍기까지 모두가 그에겐 이야기가 담긴 소재다.

언제나처럼 여행 에세이를 읽고 나니 일상을 뒤로하고 훌쩍 여행이 떠나고 싶어졌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그곳이 영화 <러브 레터>의 배경이었다는 홋카이도 오타루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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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불평등을 말하다 - 완전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젊음에게
서정욱 지음 / 함께읽는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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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인문서적의 돌풍이 거셌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필두로 해서 최근에 나온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 이르기까지 일반 대중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다. 역설적으로 문명 역주행과 불황의 시대가 인문 고전의 르네상스를 불러왔다고 하면 과언일까? <철학, 불평등을 말하다>의 저자 서정욱 교수는 근대 서양 철학의 여명기에 등장한 9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대표 저서를 ‘풀어서’ 재구성한다.

책의 1번 타자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한 에라스뮈스다. 철학이 종교의 시녀라 불리던 중세 말엽, 한 때 가톨릭 사제로 서품까지 받았던 에라스뮈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종교와 가톨릭 교황을 비판했다. 에라스뮈스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종교 지도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위험한 주장을 자신의 저서 <우신 예찬>에서 선보인다. 우신의 풍자를 통한 당시 권력에 대한 비판은 통쾌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는 가톨릭의 허위와 위선을 꼬집으면서, 인간의 본성인 쾌락과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희화화된 우신이 아니냐고 묻는다. 중세를 휩쓸었던 비이성적 종교재판 같은 어리석음이 광기의 신학에서 비롯되지 않았냐는 복음서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은 명쾌하다! 에라스뮈스가 말하는 미치광이식 행복의 추구는 참 간단하고 편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유토피아란 말의 뜻이 “아무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걸 에라스뮈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인 토머스 모어의 걸작 <유토피아>에 대한 소개문에서 알게 됐다. 가상의 인물이자 <유토피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비현실의 공간 유토피아야말로 인류의 이상향 같은 곳이 아닐까 싶다. 이원론의 창시자 플라톤이 일찍이 언급했던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었던 이상주의자 토머스 모어는 냉정한 현실 세계에서의 관찰과 분석을 통해 대안에 접근한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사회 질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절도죄를 범한 이들을 교수형에 처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토머스 모어는 근대적인 방법으로 처벌보다는 교정에 방점을 둔 이상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현대의 교정방법에 가까운 인간적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공동생산, 공동소비라는 어떻게 보면 공산주의적 이상에 가까운 유토피아 섬의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만, 노예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과 보석 같은 장식은 외교관의 광대라는 어느 어머니의 속삭임은 유쾌했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진 철학자로 등장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당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통일의 구세자로 마키아벨리가 생각했던 피렌체의 사보나롤라와 냉혹한 전제군주의 이상형이라는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해서 저술했다는 이 걸작을 서정욱 교수는 “불온한 책”이라고 부른다.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이탈리아를 무대로 해서 각축을 벌였던 외세(프랑스, 에스파냐)와 교황령, 베네치아 그리고 피렌체 같은 도시국가의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신생군주국의 모델을 마키아벨리는 제시한다. 이런 군주국에는 필히 탁월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군주가 있어야 하는데,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무자비함과 잔혹함이라는 덕목(?)을 지녔던 체사레 보르자야말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칭송한다. 문제의 인물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여우 같은 교활함과 사자 같은 용맹함의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작년엔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언급한 어느 신문사의 사설을 읽었는데, 같은 책을 읽고서도 이렇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국민의 합의 하에 권력을 위임받은 ‘절대군주’라는 괴물의 횡포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한다면 자신이 쓴 위임장의 무효 선언을 하고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욕망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연법에 따라, 군주에게 자유와 권리를 위임했지만 그 위임의 정도를 벗어난 행위는 도대체 어쩔 거냔 말이다.

책 읽는 이의 능력이 부족해서, 9명의 철학자에 대한 설명에서 ‘불평등’이라는 코드를 족족 집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리고 아무래도 풀어 엮은이의 저작으로만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든 원전에 대한 엮은이의 해석이 아니던가. 서정욱 교수가 머리말에서 당부했듯이, 원전에 읽기 전에 애피타이저로 충분히 자극이 되었다. 책의 첫 두 번째 글을 읽고 나서 바로 에라스뮈스의 <우신 예찬>과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샀다.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그런지 다양한 종류의 버전 때문에 고르는데 애를 먹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애피타이저를 먹었으니 이젠 본격적인 앙뜨레를 먹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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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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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화족 출신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미처 읽지 못했으면서도 하도 많이 들어서, 왠지 친근한 제목의 책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읽을 수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번에 시공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책을 만날 수가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로 보이는 <인간실격>은 <인간실격>과 다섯 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실격>, 제목부터 범상치가 않다. 참된 인간이 되려면 어떤 기준이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기준에 모자라는, 다시 말해 실격되는 사람은 인간의 자격이 없단 말인가? 소설은 어느 소설가가 다자이 오사무의 페르소나로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요조가 남긴 노트를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요조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병치레를 많이 한 유약한 소년이었다. 애늙은이 같은 요조는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월등한 조건의 삶을 불신한다. 도대체 무엇이 행복이고 불행이란 말인가? 문득,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바로 이럴 때, 조숙이란 말을 사용하는 게 아닐까. 인간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철저하게 고독하고 음울한 자신의 본질을 숨긴다. 그래서 요조는 광대 짓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을 기만하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왜 요조는 가족에게까지 광대 짓을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인간관계의 본질을 알게 된 것이 문제였을까?

게다가 학교에 들어가서 백치 같은 급우에게 자신의 광대 짓이 노출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한다. 상급 학교로 진학하면서 수려한 외모에 고독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요조는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불안”한 존재로 거듭난다. 공포에서 비롯된 인간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심리묘사를 다자이 오사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어조로 서술한다. 요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성들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요조의 매력은 광휘를 발할 뿐이다. 유부녀와의 정사(情死) 사건으로 집에서 쫓겨난 요조의 일탈은 가속화된다.

그나마 믿었던 불한당 같은 친구 호리키 마사오에게 환멸을 느낀 요조는 먹고 살기 위해 무명의 만화가로 변신한다. 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패전국가 일본의 니힐리즘이 느껴졌다면 너무 앞서 나간 걸까. 다시 여기에서 왜 아무도, 요조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요조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우연의 개입으로 정상적인 인간으로 복귀하는 데 실패한다.

담뱃가게 아가씨 요시코의 때 묻지 않은 순결함에 반해 급작스럽게 결혼에 골인하지만, 스스로 묘사한 대로 ‘살아 있는 시체’는 완전한 타락과 파멸로 치닫는다. 요시코와 관련된 결정적 사건에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하고, 객혈-알코올 중독 그리고 최후에는 모르핀 중독에 빠져 그만 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의 종착역은 요양원이 아닌 정신병원이었다.

<인간실격> 외에 나머지 다섯 편의 단편에서는 대표작에 버금가는 아우라를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개 이야기>에서는 개에 대한 원한으로 개의 심리를 연구하는 “요조”스러운 인물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글에서 개를 ‘인간’으로 바꾸면, <인간실격>의 그것과 주제 면에서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개를 피에 굶주린 맹수로 묘사해서, 동물애호가들이 보면 진저리를 칠지도 모르겠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에서 주인공 요조가 인간에 대한 불신과 공포로 파멸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소설의 캐릭터는 상당 부분 그의 삶에서 추출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작가의 삶과 유사성을 담보한다. 명문 화족 출신으로,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벌인 치열한 투쟁도 사실은 모두가 인간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모두가 타자의 주목을 받게 되는 발화점이 되긴 했지만. 시대를 앞서 비운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작가가 그린 ‘우울의 가람’을 거닐며, 인간에 대해 곱씹어본 독서였다.

...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말투는 이처럼 까다롭게 어딘지 애매하고 책임을 모면하려는 듯한 미묘한 복잡함이 숨어 있고, 거의 무익할 만큼 엄중한 그 경계심과 수도 없이 뒤엉킨 쩨쩨한 계산속에 나는 매번 당황해버립니다.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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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차분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출간이 된 모양이다. 아마 반양장이 먼저 나오고, 다음 주에 양장이 나오는가 보다. 바로 지를까 고민을 약 5초간 했는데, 난 양장팬이니까.
 
일단 가장 기대가 가는 작품은 바로 <카타리나 블룸>과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독일 출신의 작가 하인리히 뵐이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다. 사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으므로 패스. 일단 하인리히 뵐이라는 작가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선생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을 읽은지 이제 딱 1년이 되었구나.
 
아르투어 슈니츨러라는 작가의 <카사노바의 귀향>이란 책은 이미 그전에 출간되었던 적이 있는데, 다시 번역해서 모양이다. 서양문화에서 돈 후안에 필적할 만한 엽색가로 유명한 카사노바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이지 기대가 된다.
 
의외의 기대작으로는 에드가 로렌스 닥터로의 <다니엘서>를 꼽을 수가 있겠다. 내가 아는 성서에 등장하는 풀무와 사자굴에 던져졌다가 살아남은 다니엘 뿐인데, 닥터로는 소련에 미국의 핵무기 정보를 팔아 넘겼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사형당한 로젠버그 부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한다. 1971년에 발표된 작가의 네 번째 작품이라는데 다시 찾아온 냉전의 시기에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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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이산의 책 10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주원준 옮김 / 이산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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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아마 어쩌면 역사상 중국에서 활동한 가장 유명한 외국인이 아닐까. 하지만,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을 읽기 전까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어느 나라 출신인지, 중국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그저 풍문으로 들어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중국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16세기 말, 중국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예수회 사제의 신분으로 전교를 위해 중국에서 남은 생을 마친 인도자이자, 전교자 그리고 연금술사로 알려진 마테오 리치의 삶을 그가 개발한 이미지 기억술을 통해 재구성한다.

마테오 리치는 1552년 이탈리아의 로마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황청 산하 예수회의 부속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한 리치는 1571년 수련수사로서 종교에 귀의한다. 일생을 전교에 바치기로 서원한 리치는 스페인과 함께 당시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포르투갈 코임브라에서 한 때 수학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동양 거점이었던 인도의 고아를 거쳐, 1582년 마침내 중국 마카오에 상륙한다. 1610년 베이징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리치는 자신의 반생을 중국 전교에 매진하게 된다.

대항해시대와 반종교개혁의 분위기가 서유럽을 휩쓸고 있던 중상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리치는 명나라의 만력제가 다스리는 중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전투적 가톨릭주의의 사도로 등장한다. 예수회 사제이자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던 리치는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해 서구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구조로 되어 있는 중국어 배우기에 전념한다. 동시에 중국인에게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자신이 개발한 기억술(기억의 궁전 짓기)이 무척이나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중국인의 꿈인 과거시험을 치르고, 관료의 자리에 오르길 희망하는 수험생에게 암기에 유용한 것으로 알려진 리치의 기억술은 비장의 무기였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이 흥미진진한 전교사 마테오 리치의 전기를 여느 평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서술한다. 그는 리치가 선보인 기억술. 기법(記法)을 다음의 네 가지 한자로 기억의 궁전 네 모퉁이 각각 배치한다. 武-要-利-好는 각각 싸우는 자세로 고정된 두 명의 전사, 후이후이족 여성, 이익과 수확을 상징하는 농부 그리고 아이를 돌보는 하녀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리치는 자신이 상상 속에 짓는 기억의 궁전에 체계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는 의미를 가진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써, “서양의 과학지식과 신학상의 수양을 원용”하면서 전교와 중국인 교화의 방법으로 사용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졌다(43쪽).

작가는 사제로서 마테오 리치의 개인적인 삶을 저술의 기조로 삼으면서, 당대 시대상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빠뜨리지 않는다. 중국 예수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전교를 위한 재원 확보를 했는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중국 마카오에 이르는 원양 항해를 직접 체험한 리치의 진술을 토대로 16세기 말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5백 년 전의 다양한 기록을 통해,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당대 생활 모습을 살펴보는 재미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 때, 종교인이 우대를 받는 서양의 사고로 승복을 입고 전교에 나서기도 했던 리치는 중국 사회에서 승려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서는, 보다 현실적은 접근을 시도한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지식인 계급을 상징하는 유학자 옷을 입은 그의 초상을 볼 수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중국인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태엽 시계와 다양한 서양의 문물을 통해 전교에 전념하던 리치는 문자와 인쇄술이 발달한 중국에서 서적의 유포를 통한 선교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착수한다. 자신의 기억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중국식으로 재해석한 <천주실의>와 <교우론> 같은 저술은 중국 지식인에게도 좋은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 신앙이 유교 경전이 목표로 삼는 국가의 안위와 평화 달성에 이바지할 거라는 점을 리치는 확신했다.

리치는 중국에 대한 열렬한 찬양가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인 숭배자는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정신에 반하는 노예 제도가 엄연히 상존하고 있었고, 중국의 악습 중의 하나인 어린이 인신매매에 대해서도 리치는 눈을 감았다. 교황이 거주하던 로마가 그랬듯이, 중국에서도 매춘업은 성행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의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던 동성애 역시 일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합법적인 거주허가를 얻기 위해 부패한 명나라 관료를 상대하는 데도, 리치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레이 황 교수가 자신의 저서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꼽았던 리즈(이탁오) 같이 저명한 지식인과의 교류에 대한 사실 역시 인상적인 지적이었다. 역사 저술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텍스트 간의 유기적인 상호연관성이다.

리마더우(利瑪竇)라는 이름으로 28년간 중국에 살았던 전교사 마테오 리치의 삶을 통해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16세기 말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의 스펙트럼을 분석해낸다. 너무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조금 산만한 경향도 없지 않지만, 개인의 삶과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아낸 대가의 노고가 돋보이는 역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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